[후타카마] 러브레터(2013)

 

 

 

평소와 달리 학교는 부산스러웠다. 한 곳에서는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 곳에서는 웃는 소리가 났다.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어떤 선생님도, 학생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모두가 복잡한 마음으로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졸업식이다.

교정에 활짝 핀 봄꽃을 배경으로 졸업장을 든 졸업생들이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친하고 말고를 막론하고 그냥 아는 사이면 다들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댔다. 몇몇 졸업생들은 붉어진 눈시울을 창피해하며 카메라를 피해 달아났다. 3년 전 봄에 시작되었던 그들의 고교 생활은 여전한 봄꽃과 함께 끝을 맺었다.

다 모였어? 안 온 사람 있나 확인해 봐.”

정문에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며 모니와가 말했다. 3학년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후배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겨두려던 것이다. 모니와의 말에 1학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카마사키 선배가 없어요!”

누가 전화 좀 해 봐. 자식이 어딜 쏘다니는 거야.”

사사야가 코를 킁킁대며 후배에게 눈짓했다. 교정에 내리는 꽃비로 화분 알레르기가 있는 사사야는 졸업식 전부터 기침을 참지 못했다. 일초라도 빨리 꽃무더기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전화 꺼져 있는데요, 핸드폰을 손에 쥔 후배 하나가 말했다. 졸업식 때 벨이 울릴까봐 선생님들이 핸드폰을 꺼두라고 했었는데 그 때 끈 모양이었다. 말한 선생님도 듣는 학생들이 끌 거라고 생각 안했을 텐데, 곧이곧대로 끈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착실하단 말이야. 후타쿠치는 한숨을 내쉬며 모여 있는 후배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있어 봐. 내가 가서 찾아보고 올 게.”

빨리. 나 더 이상 못 참겠다.”

사사야는 그 틈을 못 참고 기침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사람은. 체육관과 부실을 돌아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문을 잠근 사람이 자신이니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와 봤지만 역시나 카마사키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졸업한다고 감상에 젖어서 교내를 떠돌아다니는 게 틀림없다. 발걸음을 재촉해 교사 안으로 들어가 카마사키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다녔다. 죄다 허탕을 치고 마지막으로 3학년 반으로 가자 예상대로 카마사키가 빈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별로 남지 않은 교내는 멀리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와는 달리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빈 교실에 카마사키 씨는 졸업장이 든 까맣고 둥근 통을 겨드랑이에 꽂고는 한 손에 든 무언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무언가는 편지봉투였다.

뭐해요?”

우왁, , . 후타쿠치?”

난데없는 말소리에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면서 순간 졸업장이 떨어졌다. 졸업장을 줍고 후타쿠치를 향해 돌아보던 카마사키는 한 손에 든 편지봉투와 후타쿠치를 의식하고는 다급하게 손을 뒤로 숨겼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에요? 뭔데 숨기고 그래요. 더 궁금해지게.”

,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한번 봐 봐요.”

후타쿠치가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카마사키가 슬슬 뒷걸음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두, 세 걸음밖에 안 남았을 때는 기어코 졸업장을 쥐고 있는 손을 내밀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니까 더 수상하잖아. 후타쿠치는 고개를 기울여 카마사키 씨가 뒤로 숨긴 편지봉투를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카마사키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방해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후타쿠치는 체념했다는 듯이 두 팔을 올려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어요, 안 볼게요. 그보다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내려가죠? 카마사키 씨 때문에 사사야 선배 기침하다 죽을 지경이라고요.”

, 미안. 잠깐 들른다는 게.”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 나갔다. 그 뒤에서 걷던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바지 뒷주머니에 사정없이 집어넣어진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한 번,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보고 후타쿠치는 재빠르게 편지봉투를 낚아챘다. 앞에서 빠르게 걷던 카마사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뒤늦게 주머니를 더듬어 봤지만 편지봉투는 이미 후타쿠치의 손에 쥐여 있었다.

, 이 자식이! 얼른 이리 내 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뭔데요? 그런 반응 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이거 혹시 러브레터?”

닥쳐. 그만해. 내 놔.”

키는 엇비슷해도 후타쿠치가 팔다리가 유독 긴 편이었기에 아등바등하는 카마사키의 손에 편지봉투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팔꿈치로 카마사키를 이리저리 밀어대며 후타쿠치는 한 손으로 편지봉투를 앞뒤로 살폈다. 하얀 봉투는 두께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안에 편지가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손가락 끝으로 봉투를 뜯어내려는 찰나, 보다 못한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쥐고 편지봉투를 쥔 손목을 쳐냈다. 짧은 둔통과 함께 편지봉투가 손에서 빠져 나갔다.

, 진짜! 아프잖아요! 선배가 후배한테 이래도 되요?”

손목을 쥐며 투덜거리는 후타쿠치의 등을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 하는 경쾌한 소리와 윽, 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런 후타쿠치를 안중에도 안 두고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줍고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해라, . 그러게 내가 그만 하랬지.”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본거지.”

…….”

그거 카마사키 씨한테 온 거죠? , 대체 어떤 여자가 카마사키 씨한테 편지를 썼을까. 눈이 삔 거 아냐, 그 여자? 하하하, ! , 그만 때려요!”

앞서 가던 카마사키는 그대로 돌아서 불같이 화난 표정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마구 때렸다. ,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다 마지막으로 후타쿠치의 정강이를 한 대 차는 걸로 마무리했다.

오늘이 졸업이라 봐 준 줄 알아. 이제 네 얼굴 볼 일 없어져서 속이 다 시원하다!”

얼굴 볼 일이 왜 없어요. 설마 우리 인터하이 때 응원하러 안 오려고요? 안 그렇게 봤는데 사람 참 냉정하시네.”

다른 애들은 봐도 넌 안 봐!”

하하하, 카마사키의 반응에 후타쿠치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허리까지 부여잡아 가며 웃는 후타쿠치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꾹 다물며 성큼성큼 교사를 빠져 나왔다. 상대하면 할수록 후타쿠치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들 뿐이라는 걸 요 2년간 뼈저리게 깨달아왔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나오자 저 멀리 정문에서 배구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루돌프처럼 코가 새빨개진 사사야가 카마사키를 발견하고 씩씩거렸다. 임마, 카마사키! 빨리 안 뛰어 오냐! 사사야의 말에 카마사키가 뛰려는 찰나, 후타쿠치의 말이 카마사키의 발을 잡았다.

보러 오세요.”

?”

후타쿠치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의 잔상이 남아있어 언뜻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후타쿠치는 웃고 있었다. 놀라 되묻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잘난 얼굴 카마사키 씨 인생에서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요.”

졸업한다니까 이제껏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하려는 구나. 카마사키는 어이가 없어서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잠시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무게도 내용도 없는 실없는 말장난에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자식은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헛웃음을 짓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잘난 척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맘껏 잘난 얼굴 감상하라는 듯. 그런 후타쿠치를 향해 카마사키가 투덜거렸다.

다신 네 얼굴 볼 일 없을 거다.”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다. 카마사키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건 카마사키의 100% 진심이었다. 졸업식을 끝으로,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다시 볼 일 없을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는지 서운해 하는 척했다. 카라멜 색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카마사키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고교 마지막 날이었다.



(3769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1)

-알파의 연애 외전



시작은 갑자기 울린 그룹 메시지 초대 알림이었다. 인간관계라곤 회사 사람들과 가끔 만나는 학생시절 친구들뿐인데다 매일같이 회사와 집만 반복하는 일상인 내게 새로운 그룹이 생길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 창에 뜬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초대 완료!]

[다행(이모티콘)]

옆에 있었더라면 분명 시끄럽게 떠들었을 게 상상될 만큼 핸드폰 진동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메시지들이 날아왔다. 뭐가 뭔지 파악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메시지 하나를 공지로 정했다.

[그럼 다음주 금요일 18:30 T가게에서 만납시다!(이모티콘)]

[ㅇㅋㅇㅋ]

[(이모티콘)]

난데없이 잡힌 약속에 유일하게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동기 녀석은 급하게 미팅에 빈자리가 생겼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나 애인 있는 거 알잖아. 걔가 알면 큰일 나.”

알지, 니 애인 극성맞은 거. 근데 진짜 어떡해, 올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다고! 이번 주에 출장 가는 사람도 많고, 그 날 딱 기념일인 사람도 많아서 너 말고는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단 말이야.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그냥 한 자리 비우면 되지. 난 진짜 안 돼.”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분위기도 구려지고, 그리고이미 한 달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라서 이대로 가면 다시는 미팅 안 잡힐 수도 있다고. 이번에 미팅 성사된 것도 진짜 기적에 가깝다니까. 제발, 카맛치. 제발!”

고작해야 미팅인데 뭐가 기적이라는 거야? 상대가 누군데?”

“A기업 비서 팀이야. 엄청 사정사정해서 겨우 약속 잡은 거라고.”

A기업이라면 손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였다. 대기업 비서 팀이라니 외모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있는 여자들이니 미팅이 잡혔다는 게 기적이라고 칭할 만 했다. 녀석이 징징거림을 들어주는 사이에도 뭐가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쉴 새 없이 메시지 알림이 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연이은 야근으로 피곤해 죽겠는데 핸드폰 너머 칭얼거림과 멈출 줄 모르는 진동에 귀가 멍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동기의 울먹임이 커져갔다.

~~! 내 평생의 소원이야! 절대 네 애인한테 안 들키게 내가 잘 할 게. 그냥 회사 동기랑 술 마시는 자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마음이 안 내키는데.”

와서 30분만 있다 가. ? 30!”

내 쪽의 사정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점에선 아는 사람들 중 제일인 놈이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령 좋게 거절할 말도 생각나지 않고, 더군다나 채팅창도 기세 좋게 분위기를 잡은 터라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일단 대답하니 내내 징징거리던 목소리가 단박에 반전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만하게 보였던 게 분명하다. 고맙다며 은인이라고 외치는 녀석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귓가에 이명소리가 맴돌았다.

미팅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진다. 물론 애인이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도 동기 녀석과 똑같은 상황이었겠지. 고등학교를 졸업해 취직하고, 바로 밤낮 안 가리고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미팅 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미팅이란 그저 두통을 유발하는 일일 뿐, 일말의 흥미도 없고 귀찮고 꺼림칙하기만 하다. 미팅에 갔다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모른 척 하고, 다른 무언가를 핑계 삼아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될지 무섭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상상만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묵직해져오는 기분이었다.

 

길고 길었던 삽질 끝에 후타쿠치와 제대로 사귀기 시작한 지 햇수로 3년 차가 되었다. 졸업하고 나는 바로 자재회사에 취직했고, 이듬해 후타쿠치는 대학에 진학했다. 취직이 결정되었을 때부터 회사 근처에서 독립하겠다는 말을 끈질기게 반대하던 후타쿠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거 얘기부터 꺼냈다. 각자 직장과 학교로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후타쿠치는 제멋대로 방을 계약해서 말도 없이 집까지 찾아와서는 부모님 앞에서 착한 후배인 냥 온갖 내숭을 떨었다. 그러더니 둘만 남게 되자 대뜸 짐이나 싸라며 재촉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충 짐을 옮긴 뒤였다. 그제야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에 화를 내니 후타쿠치는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나에게 따져 들었다.

그렇게 같이 사는 게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나는.’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요.’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과정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내심 예전부터 같이 살고 싶었기에 이 문제를 계속 문제 삼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가 시작되었고, 이제 동거 2년 차. 어느새 후타쿠치와 나는 각자 20살과 21살이 되었다.

 

이제 와?”

집에 돌아가면 열에 아홉은 후타쿠치가 먼저 집에 와 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후타쿠치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여유를 만끽했다. 강의며 학회며 정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비어 두었다. 딱히 다른 친구들하고 사방팔방 놀러 다니는 타입도 아니니 웬만한 시간에는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날 백수가 따로 없는 모습에 언젠가 아르바이트라던가, 동아리라던가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후타쿠치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물론 부잣집 도련님이니 아르바이트 안하냐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긴 해도, 그렇게 끈질기게 이어가던 배구에까지 손을 놓다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후타쿠치가 완벽하게 집벌레가 된 덕분에 나까지 회사와 집만 오고갈 뿐 다른 약속을 잡을 눈치가 안 보였다.

저녁 준비 다 했어. 씻고 나와.”

땡큐. , 오는 길에 케이크 사 왔어.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으려고.”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후타쿠치에게 보이게끔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렸다. 뭔지를 가늠하는 듯 가늘게 뜬 시선과 부딪혔다.

뭔데?”

네 건 레몬 타르트.”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

이제는 서로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훤히 파악하고 있다. 동거 초반에는 입맛이며 생활 습관이며 모든 게 달라서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는데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퇴근길에 우연히 후타쿠치가 좋아하는 걸 볼 때마다 챙겨주는 게 사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네 요리는 네 성격이랑 완전 딴판이란 말이야. 어떻게 너같이 삐뚤어진 성격으로 이런 걸 만드냐?”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성격하고 똑같이 요리는 잼병이죠. 누가 봐도 입맛 떨어지게 만들잖아요, 누구 얼굴처럼.”

타르트 안 먹겠다는 거지?”

카마사키 씨, 오늘 배 안 고프다는 거죠?”

매번 하는 말다툼이지만 매번 후타쿠치의 빈정거리는 얼굴을 볼 때마다 울컥 짜증이 솟았다. 항상 마지막에 이겼다는 얼굴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도 짜증이 난다. 이대로 말을 더 했다간 내 기분만 상할 게 분명해 입을 다물었다. 짜증을 참는 내 얼굴을 보며 후타쿠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일 저녁은 알아서 먹어요. 학회 때문에 저녁에 교수님이랑 모임이 생겨서요.”

, 내일?”

내일 뭐 있어요? 설마 혼자라고 외로워서 밥 못 챙겨먹겠다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일은 일전에 약속이 잡힌 미팅이 있다. 그 때 이후로 회사에서 몇 번이나 다시 거절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끈질기게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미팅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후타쿠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또 깜빡 잊어버렸지만. 대충 둘러댈까, 모른 척 할까 이번 주 내내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뭘 선택해도 뒤가 구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더니 그새 후타쿠치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눈치는 귀신같이 빠르기는. 원래도 남에게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후타쿠치 앞에서는 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일 회사 동기가 미팅 대타 좀 해달라고.”

미팅?”

우물쭈물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되물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다 해가던 요리도 중단하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가서 딱 30, 아니 20분만 앉아 있다가 와도 된데.”

“20분이든 10분이든 안 돼. 나가지 마요.”

잠깐이면 된다니까. 친한 동기 부탁이라서 계속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래.”

그 사람 부탁은 들어주고, 애인인 내 말은 안 들어주는 거예요? 대체 뭐가 더 중요해요?”

이미 기분이 팍 상한 듯 후타쿠치는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거짓말이 들키게 되면 상황이 더 복잡해 질까봐 솔직하게 말했던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알면서 뭘 물어?”

그럼 안 가는 거죠?”

아니, 진짜 10분만 자리 지키고 있다가 올게. 나도 한, 두 번 거절한 게 아니라서 어떻게 거절할 말이 없단 말이야.”

대체 누구에요, 그 동기라는 사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카마사키 씨한테 애인 있는 거 알고도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 그러니까. 진짜 미안해. 이번만 네가 이해해 주라.”

후타쿠치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솔직하게 말해버린 게 과연 옳았던 결정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후타쿠치는 대학생활으로, 나는 직장생활으로 이제는 각자 사회생활이 있다 보니 서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여러 번 비슷한 이유로 싸워서 다시는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게다가 미팅이라니 후타쿠치가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실제로 후타쿠치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엔 어쩔 수 없이 미팅에 끌려나갈까봐 자신 또한 온갖 걱정을 다 했었으니까.

여전히 딴 곳을 보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게 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긴 해도 후타쿠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끝나고 연락할게.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을 텐데, .”

그 동기라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요. 존나 재수 없어.”

알겠어. 얼른 밥이나 먹자.”

카마사키 씨도 재수 없어. 딴 맘 품었다간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재수 없다니 저 자식이 근데 진짜. 슬슬 기분이 상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백번 잘못했으니까 참아야지, 참아야.

어차피 그 동기라는 사람도 폭탄 하나 만들려고 카마사키 씨 데려가는 거라고요. 딱 봐도 여자한테 인기 없어 보이니까 카마사키 씨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겠죠.”

알겠으니까 이제 그 입 닥쳐.”

진짜 재수 없어. 카마사키 씨 주제에 미팅이라니.”

저걸 그냥 확. 틈만 나면 못된 말이나 처하는 입을 확 틀어주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울컥해서 뭐라 한 소리 하려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는 모나게 말해서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여전히 눈가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열 받은 눈치다.

제가 한 말마따나, 내가 여자한테 인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있어봤자 10분만 앉아있다 오겠다는데 뭘 저렇게 화를 내는지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딱히 후타쿠치가 날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나는 기분이어서,

타르트 지금 먹을래?”

미안한데 기분이 좋아진다.

 

보통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아침엔 통 일어나 있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후타쿠치가 이른 아침에도 깨어 있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레포트 때문에 자지 못했던 것 같았는데 별 일이었다. 후타쿠치는 수면부족으로 다크서클을 눈가에 달고 다니는 주제에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주위를 졸졸 따라다녔다. 옷을 고르는 내 옆에서 비웃음을 치거나, 아침을 먹는 내 앞에서 말없이 째려보기만 하기에 대체 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나갈 때가 되어서야 현관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미팅 끝나면 곧장 전화해요.”

쟤는 정말 뭘 걱정해서 저러는 건지, 이쯤 되니 후타쿠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이 말 하나 하려고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면서 깨어나 있었던 걸까. 진지하게 의처증 기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진다.

 

어제 후타쿠치가 빈정거리며 했던 말이 씨가 된 건지 이 미팅에서 나는 철저하게 폭탄이었다. 아니, 그 이하인 걸지도 모르겠다. 약속된 장소로 찾아가니 애초 이 미팅에 관심조차 없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이미 고교 동창처럼 친해져 있었다. 알고 보니 처음 생겼던 채팅방에서 미팅이 잡힌 그 날부터 다들 매일같이 수다를 떨어왔던 모양이었다. 누구의 안중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안 왔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싶어 무척이나 억울했다. 괜히 쓸데없는 일 때문에 후타쿠치와 싸운 셈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좀 시끄럽죠?”

그래도 이왕 왔으니 약속한 대로 10분 딱 채우고 얼른 나가버리자 생각하고 가만히 맥주만 들이키는데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의 중심에서 웃고 떠들던 남자였다. 여자들 전부 은근한 눈빛을 하고 이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눈에 띄었던 사람이었다.

, 아뇨. 안녕하세요.”

전 히로키라고 해요. 혹시 제일 마지막에 합류하신 분 아니세요? 다른 분들은 다 인사해서 혹시나.”

. 카마사키라고 합니다.”

히로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살갑게 웃으며 그 이후로도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후타쿠치하고 같은 나이의 대학생으로 미팅을 주도한 동기 녀석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나와는 아무 접점이 없어 보여 곧 분위기가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10분이 다 되도록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덕분에 심심할 틈은 없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난처했다. 히로키는 눈치가 없는지 알고도 그러는지 주위에서 여자들이 온갖 눈치를 보내고 있는데도 그 쪽은 눈빛도 안 주고 나한테만 말을 걸어왔다. 아예 등을 돌린 히로키를 대신해 10분 동안 나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맞봐야 했다.

,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이 뒤에 바로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만.”

갈수록 여자들의 눈빛이 험해지는 게 보여 10분이 딱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옆에서 대화에 낄 궁리만 하던 여자들은 내 말에 활짝 웃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왔다.

벌써 가시게요?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일이 있으시다니.”

아하하, 재밌게 놀다 가세요. 이치로, 먼저 간다.”

아쉬워하는 척 하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옆 테이블의 동기에게 일단 인사를 건넸는데 여자들에게 한눈 팔린 녀석은 내 말을 듣지도 못했다. 기껏 인사해 줬더니 새끼가. 회사에서 만나면 제대로 한 소리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진짜 오지 말걸. 괜한 시간 낭비했다. 가게를 나오며 바로 핸드폰을 꺼내 후타쿠치의 번호를 찍었다. 아침에 그렇게까지 말했을 정도면 지금쯤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 같이 가요.”

? 히로키 씨?”

뒤를 돌아보니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은 히로키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덩치도 큰 녀석이 살갑게 웃으며 뛰어 오는 모습이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그냥 히로키라고 부르세요!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카마사키 씨랑 친해지고 싶거든요. 그래도 괜찮죠?”

, , 어어. 근데 미팅은 어쩌고.”

전 원래 미팅 관심 없었어요. 이번에도 그냥 자리만 채워주려고 온 거지, 애초에 여자랑 사귈 맘도 없고.”

아까 미팅 자리에 있었던 여자들이 들었다면 아쉬워했을 말을 히로키는 서슴없이 했다. 히로키는 처음 봤을 때처럼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활짝 웃었다.

역까지 같이 가요, .”

, 그러지 뭐.”

사실 아직까지 낯선 감이 있어 혼자 가고 싶었지만 구김살 없이 웃는 얼굴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니까 괜찮겠지. 역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고. 그보다 히로키 옆에서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메시지만 달랑 보내면 바로 전화가 올 것 같고.

, 전화할 데 있으세요? 안 그래도 편의점에서 뭐 살 게 있었는데, 전 저쪽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올게요. 편하게 전화하세요.”

핸드폰을 들고 망설이는 걸 눈치 챘는지 히로키가 요령 좋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녀석이구나. 히로키가 편의점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후타쿠치? 약속대로 10분만 있다 바로 나왔어. 지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딴 수작 부린 거 아니죠? 집에 들어가서도 바로 전화해요.]

전화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음이 들리는 걸 보니 후타쿠치도 학회가 끝나고 뒤풀이에 간 모양이었다. 아마 본인은 가기 싫다고 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끌려갔겠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해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장소 안 가리고 할 말. 못할 말 잘도 하네. 생각하기가 무섭게 애인이니 집착이니 전화 너머로 사람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작은 무슨. 이따 다시 전화할게.”

[. 나도 바로 들어갈게요.]

어어.”

말은 그렇게 해도 후타쿠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하곤 전화를 걸어왔다. 직접적으로 말로 하진 않아도 미안하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처럼. 단지 이럴 때가 아니더라도, 가끔 후타쿠치가 살갑게 굴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남들이 들으면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몇 년이 지났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우습게도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게 진짠지 아닌지 믿기 힘들 때도 있다. 괜히 귓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까맣게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막연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멀리서 히로키가 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전화 다 하셨어요?”

, 미안. 자리 피해줘서 고마워.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머쓱한 기분에 사과를 하자 히로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편의점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커피 캔을 내밀었다.

커피 괜찮으시죠?”

괜찮긴 한데. 얼마야? 돈 줄게.”

연하에 학생인, 게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에게 얻어먹을 순 없어 돈을 내려는 나를 히로키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점점 난처해질 때쯤 히로키가 지갑을 쥔 내 손을 아래로 밀어냈다.

그럼 다음엔 형이 커피 사주세요. 이번엔 제가 사는 걸로 하고요. 그럼 됐죠?”

, 그러든지. 그럼 잘마실게.”

착한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슨 말을 해도 웃어주고,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하고 배려심이 엿보인다. 보통 착한 녀석이 아니었다. 주위에 이렇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녀석이 없어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형은 미팅 왜 나오셨어요? 잠깐 있다 가려던 걸 보면 역시 대타로?”

지하철 역 쪽으로 걸어가며 히로키가 물었다.

, 동기 녀석이 끈질겨서. 근데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을 걸 알았다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괜히 싸우기만 하고.”

여자친구? 부럽다~.”

, 애인. 넌 여자 친구 사귈 맘 없다며 뭐가 부럽냐?”

그거랑 이건 다르죠. 여자 친구는 어떤 분이세요? 형이라면 작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할 것 같은데.”

어떠냐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입은 더러운데 얼굴은 쓸데없이 잘생긴 건방진 놈이 되려나.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지만. 저 말을 실제로 하면 어떨까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사람 좋아 보이는 녀석이라도 벙찔 게 분명하겠지.

하하하,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와요? , 진짜 부럽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웃긴 상상을 해서 그래.”

역시 여자 친구 분도 베타겠죠?”

?”

형도 베타 맞으시죠?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베타는 보통 베타끼리 사귀니까 여자 친구 분도 베타 아니에요?”

그야 보통은 그렇다. 보통 베타는 베타끼리, 알파는 오메가와. 그 외의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합이 아니었다.

알파야. 내 애인.”

.”

예상대로 적잖게 놀랐는지 히로키는 으음, 하고 끙끙거렸다. 아마 사람 좋은 녀석으로서 내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알파와 베타는 보통 사귀는 경우가 드무니까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 저기.”

힘드시겠어요, .”

슬슬 지하철역에 다 와 가는데다 썩 달가운 주제도 아니라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히로키가 대뜸 말했다. 걱정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정도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얼떨결에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이 녀석에게 알파와 사귀고 있음을 고백했지만,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알파와, 게다가 후타쿠치와 사귀고 있다는 말을 주위 누구에게도 해본 적도, 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말하면 다들 어쩌려고 그래?, 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알파와 베타가 사귄다는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후타쿠치와 사귀는 걸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후타쿠치가 알파이고 내가 베타일 뿐인데 뭐가 힘들겠어. 사람 사귀는 게 다 똑같지, 뭐가 그리 다르다고, 힘들겠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왔다.

힘들긴, 뭐가 힘드냐.”

알파와 사귀면 항상 끝이 좋질 않잖아요. 지금은 학생이나 직장인이어도 결혼할 나이가 되면 집에서 오메가랑 결혼하라 난리도 아닐 테구요. 아무래도 잠깐 사귀는 게 아니라면, 아니 잠깐 사귀어도 항상 끝이.”

. 그렇긴 해도.”

주변에 비슷한 케이스가 꽤 많았어서 잘 알아요. 알파 남자와 베타 여자라던가, 베타 남자와 알파 여자라던가. 열이면 열 다 헤어졌어요. 알파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요.”

남자와 여자 사이인데도 그렇게 반대가 심할 정도면 남자와 남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 힘들지 않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고집했지만, 사실 힘들 것을 예상했다. 어차피 언젠가 끝이 날 관계라는 걸 알고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게 익숙해지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난 전혀 힘들지 않다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고. 새삼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 괜찮아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거에요? 전 그냥 형이 걱정이 되서.”

아니, 아니야. , 난 이제 가봐야겠다.”

잠시만, . 아무래도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바로 지하철 타면 멀미할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 있다 가세요.”

히로키는 다짜고짜 내 팔을 끌고 가더니 역 앞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손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점점 속이 안 좋아졌다. 할 수없이 울렁이는 배를 부여잡고 벤치에 앉았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배가 아픈지 모르겠다.

죄송해요. 제가 주변에서 그런 걸 많이 보다 보니까 좀 예민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 제가 괜한 말을 해서는.”

괜찮아. 그냥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그런가? 뒤늦게 취하는 것 같네.”

.”

난 잠깐 쉬었다 갈 테니까 너 먼저 갈래?”

아니에요, .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 진짜 저 때문에.”

끙끙거리며 눈치를 보는 게 진짜 대형견 같다. 몸은 다 큰 주제에 나이는 어려서, 자기가 잘못해도 애교밖에 부릴 줄 모르는 대형견. 그러고 본 후타쿠치도 그런 면이 있다. 어리광부리는 방식은 좀 많이 다르지만 의외로 어린 면이 있는 녀석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떠받들어오며 자라서 그런지 도련님 같은 면이 꽤 있다. 언제나 나보다 어른인 척 하는 주제에 지가 잘못하면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못하고 괜히 심술부리는 게 은근히 귀엽다. 젠장, 그럴 때마다 화는 화대로 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가끔씩 보이는 어린 모습을 나만 알고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후타쿠치는 모를 거다.

.”

, 형 웃었다. 왜 웃는 거예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큭큭. ,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

아하하, 다행이다. 진짜 다행.”

이만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신기하게 후타쿠치를 생각하니 아팠던 배가 가라앉았다. 옆에서 걱정하는 히로키에게 인사를 하고 개찰구를 넘는데 뒤에서 히로키가 형, 하고 불렀다. 개찰구 너머에서 히로키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 다음에 봐요!”

하도 손을 흔들기에 덩달아 마주 손을 흔들어주니 히로키가 방긋 웃었다. 후타쿠치랑 같은 나이인데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 후타쿠치도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다 곧바로 그만뒀다. 방긋 웃으면서 손인사하는 후타쿠치라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빨리 보고 싶다.

 

금방 오겠다던 후타쿠치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왔다. 막 씻고 나왔을 때 현관문이 열린 터라 얼떨결에 후타쿠치를 마중 나온 모양이 되었다. 얼굴 가득 못마땅함이 서려있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팔을 벌렸다. 신발은 벗을 생각도 안 하고 그 자세로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어 할 수 없이 다가가자 허리께를 안아왔다. 그리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거렸다.

다녀왔어요. 망할 조교 때문에 시비 털려가지고 바로 못 빠져나왔어요.”

수고했어. 그래도 이 정도면 일찍 온 건가?”

피곤해.”

물 받아줄까? 난 샤워만 해서 욕조 찰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답대신 후타쿠치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뒤풀이에서 얼마나 마셨는지 어깨에 닿은 숨결에 술 냄새가 났다. 더운 숨을 내쉬는데다 어깨에 닿은 뺨이 미묘하게 따뜻한 걸 보면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카마사키 씨는무슨 일 없었죠?”

고작 10분 있었는데 일은 무슨. 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바로 나왔어.”

잘했다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를 매단 채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샤워를 끝내 습기로 가득한 화장실에 후타쿠치를 밀어 내려고 했다. 후타쿠치가 모르는 척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자 나도 모르는 척 손을 잡아 뺐다. 밀려난 후타쿠치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했다.

씻고 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씻겨 줘요.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아.”

까불지 마라.”

후타쿠치는 술만 마시면 5살 어린애처럼 떼가 늘었다. 취하면 취할수록 그 정도와 함께 막말도 늘어나서 술에 취한 날이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몇 번 손이 잡히고 그걸 뿌리치는 실랑이가 오고가다 안 될 것 같았는지 후타쿠치는 잠자코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핀잔을 주거나 시비를 걸 때만 직설적이지 평소에는 솔직하게 뭘 해달라거나 어리광 부린 적이 없어서 사실 후타쿠치가 취해서 들어올 때면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한다.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솔직히 재밌다. 무엇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웬만한 건 기억하지 못해서 무슨 짓을 해도 안심이기도 하고.

물 마실래?”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타쿠치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마시고 있던 컵을 내밀자 거리낌 없이 컵을 비웠다.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조금이나마 술이 깬 듯 했다.

더 마시려면 네가 떠 마셔.”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다. 후타쿠치도 제정신인 걸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어깨가 잡혔다. 올려다보니 후타쿠치가 특유의 웃음을 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니 소파 등받이를 넘어 위로 올라탔다. 제대로 물기를 닦지 않은 몸이 닿자 티셔츠가 차갑게 젖어갔다.

, .”

뭘 당황하고 있어요?”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를 세우자 후타쿠치가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대로 등을 돌려 어깨를 잡은 후타쿠치가 기어코 내 무릎 사이에 허리를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옴짝달싹 못하게 갇혔다. 양치를 했어도 은근히 묻어 나오는 술 냄새에 고개를 가로젓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피곤하다며. 비켜.”

일주일이나 못 했잖아요. 오늘만 기다렸어.”

, , 웃기지마.”

답지 않게 닭살 돋는 멘트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큭큭거리며 웃는 내 위로 후타쿠치가 허리를 은근히 부비며 속삭였다. 하고 싶어. 팬티만 입어 살갗이 고스란히 드러난 다리에 후타쿠치의 맨 살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감기에 걸릴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던 공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부 아래가 묵직해져왔다. 후타쿠치의 말마따나 벌써 일주일동안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했던 섹스도 간신히 갈증만 채운 정도라 거의 이주일은 맘 놓고 욕구를 발산하지 못했다. 저번 주는 내 쪽의 연이은 야근 때문에, 이번 주는 후타쿠치가 학회 일로 바빴다. 그러니 몸을 부대끼는 것만으로도 바짝 달아오르는 게 당연했다.

카마사키 씨, 냄새 좋아.”

목덜미로 후타쿠치의 콧대가 닿았다. , 하고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후타쿠치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냄새가 좋아. 후타쿠치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오물거렸다. 끈덕지게 한 곳만 물고 늘어지는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왼쪽 목덜미에만 집착하던 후타쿠치는 반대쪽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들썩이는 허리 아래로 후타쿠치가 팔을 둘러싸고 꽉 끌어안았다.

내 또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자신의 성감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원래부터 목덜미는 성감대였다. 그걸 깨달은 건 후타쿠치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직 키스까지만 진도를 나갔을 때였는데, 후타쿠치는 유독 키스를 할 때 목덜미를 지분대는 습관이 있었다. 안 그래도 간질거리는데 야하게 목을 매만질 때마다 미치도록 손과 발끝이 저렸다. 몇 번이나 후타쿠치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목가를 만지면 움찔거리는 걸 꿰뚫은 후타쿠치는 더 야하게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었다. 한 번 헤어지고 난 뒤부터는 목덜미를 만지는 습관이 콧대를 부비고, 입술로 깨물고 빠는 정도로 진화했다. 냄새가 좋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민했던 구석은 후타쿠치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리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후타쿠치의 손길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잊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개봉한 영화를 내일 보러가자고 약속했었다. 까먹을까봐 그 날 바로 예매해 놨는데.

내일, , 영화 예매했는데.”

몇 시에?”

아으, 오전에, 열 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와 동시에 후타쿠치가 팬티 위로 돋아난 내 것을 잡아챘다.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성기를 사정없이 주물럭거리면서 입 밖으로 말이 되지 못한 정체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척이는 소리가 스피커를 켠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깟 영화가 뭐가 중요해요? 이렇게 섰잖아, 카마사키 씨.”

들려요? 완전 젖었잖아. 야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 아직 술에 취했어. 취한 게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천박한 말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빨리 하라는 말에 후타쿠치는 간만 볼 뿐 처음과 달리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성기만 잡힌 나만 애가 타서 허리를 들썩이는 꼴이다. 그 모습을 후타쿠치는 애교부리는 강아지를 보듯 웃으며 내려다보기만 했다. 건방진 놈, 속으로 욕하기 무섭게 후타쿠치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

, 이 개새끼야.”

왜 매번 나만 안달내야 하는 거냐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짓이기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내려왔다. 상을 주듯 가벼운 뽀뽀를 하며 후타쿠치는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 지었다. 후타쿠치가 원하는 대로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에도 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반쯤 드러나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보석 같았다. 쓸데없이 잘생겼어. 이럴 때마저 나는 매번 너에게 져주게 된다. 눈을 감으며 후타쿠치의 등을 팔으로 감쌌다.

 



(15614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친구와 후배와 나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외전

>모니와 시점 가벼운 에필로그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후배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 모니와는 후배를 만난이레 처음 보는 표정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곰곰이 후배에게 늘여놓았던 말들을 곱씹어 봤지만 딱히 후배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후배에게 했던 말들은 기껏해야 요즘의 근황이라든지 친한 친구의 부러운 소식뿐이었다. 내려야 하는 역이 가까워오자 모니와가 다시 한 번 후배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후배는 여전히 멍한 채였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후배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모니와가 안절부절 못할 때쯤, 후배는 어딘가 정신 빠진 눈으로 모니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어디 아픈 기색은 없어 보였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 모니와는 재차 후배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후배는 들은 척도 않았다. 점점 전철 안이 혼잡해지는데 후배가 내릴 역까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갈등했지만 말단 사원인 주제에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니와는 결국 후배를 향한 신경을 애써 갈무리했다.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은 조짐을 보이던 친구를 다시 만난 건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늘상 가던 이자카야에서 그는 어딘가 어색한 얼굴로 모니와를 맞았다. 먼저 도착해서 이미 한 잔을 걸친 것인지, 술잔에 사케가 반쯤 채워져 있었다. 모니와는 친구를 보자마자 비죽 심술이 돋았지만 그를 놀리는 일은 일단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당장은 그간의 일을 듣고 싶었다.

"왔냐?"

"먼저 한 잔 했네? 안주는 시킨거야?"

"아니. 너 오면 시키려고 술만 먼저 시켰지."

메뉴를 뒤적거리며 모니와는 간단한 안주 몇 개를 주문했다. 그 동안 친구는 술잔을 비우며 그 답지 않게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전에 모니와가 보낸 라인들을 싸그리 무시해버린 일에 대한 죄책감이 분명할 것이다. 제가 먼저 자랑 비슷하게 말해준 주제에 누구냐는 물음에는 이러 저리 피하던 못된 친구였다. 모니와는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음을 던졌다. 예상대로 찔리는 게 있는 친구가 힐끔 시선을 피했다.

"이주 만이네? 웬일로 연락을 했어, 바쁜데."

"아니, .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냐? 그냥 술 한 잔 하자고 불렀지."

"그래?"

"그렇지."

은근한 비난에 친구는 여전히 술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이 자식은 이랬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이 놈과 고교 후배 중 하나가 이상한 분위기를 내뿜었었다.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후배 놈과 주구장창 만나고 놀고 다닌다던 친구는 언젠가부터 후배의 이름이 나오면 표정이 굳어졌다. 후배의 봄고가 시작하기 전, 한창 연습에 열중일 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하이 시기에는 먼저 팔뚝을 걷어붙이고 응원이니 간식이니 말을 꺼내던 친구는 연습은커녕 경기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약속을 피하길 일수였다. 할 수없이 친구 녀석을 빼고 연습을 보러 갔을 때, 모니와는 친구의 거절의 이유를 짐작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상하게 머리 위에 까만 구름이 끼어 있는 듯 우울해 보이는 후배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응원 차 찾아 온 선배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던 후배는 보다 더 가라앉은 눈빛으로 친구의 행방을 물었다. 일이 있어 못 온다는 말에는 작게 한숨까지 내쉬었던 것에는 조금 놀랐었다. 최근에 좀 친해졌다고 말을 들었어도 이렇게 실망할 정도인지는 몰랐었다. 언제 이만큼 친해진 거지? 그러나 친해졌었다는 말이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친구는 그 여름 내내, 후배의 마지막 고교 배구가 끝날 때까지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배의 머리맡에 떠도는 구름은 시꺼멓게 변해, 후배의 우울한 속내를 반영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당사자는 말을 돌렸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흐른 지금도 역시 친구와 후배가 이상한 분위기일지, 모니와는 새삼 궁금증이 솟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듯 보이는 친구의 연애 사(). 모니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생겼어?"

"? 뭐가?"

"여자 친구."

또로록, 친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주변을 헤맸다. , 네 번 입술을 달싹이던 친구는 결국 귓가를 빨갛게 물든 채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아! 카맛치! 너가 결국."

모니와는 배신당한 슬픔에 자리에 없는 또 한 명의 친구를 부르짖었다. 사사양! 어떻게 카맛치가 우리를 배신하다니!

"네가 제일 솔로 탈출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 내가 뭘. 까놓고 우리 셋 중엔 내가 그나마 낫지."

"아주 그냥, 여자 친구 생겼다고 기고만장 해졌어! 건방져, 카맛치!"

흑흑거리며 가짜 울음을 흘리는 모니와를 향해 기고만장해진 친구는 연신 큭큭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솔로인 처지가 가슴 아파진 모니와는 가득 채워진 사케를 들이 마시고, 친구의 잔을 채우고, 술을 주문했다. 배신자라고 탓하는 모니와를 향한 친구의 웃음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꼴을 볼 때마다 열이 받아 술잔을 비우던 모니와의 하얀 얼굴 또한 새빨개진 것은 물론이었다.

", 야아. 이 짜식, 이이여친 자랑이나 해 봐! 예뻐? 예쁘냐구."

"큭큭, , 예쁘냐고? 그 자식이 뭐가 예뻐, 예쁘긴."

징그럽다, 임마. 친구의 말에 모니와는 기겁을 하며 친구의 팔을 흔들었다. , 너 이 자식. 잡은 고기라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카맛치! 모니와의 말에 또 한 번 친구가 박장대소했다. 뭐가 그리 웃긴지 테이블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기까지 했다.

"잡은 건지, 잡힌 건지. , 모니와. 그거 아냐? 내 애인은 하~나도 안 예뻐!"

"미쳤나봐, 카맛치. 너 그러다간 한 달도 못가서 채일 게 뻔하다?"

"하나도 안 예쁘고. 씨바, 드럽게 건방지고 제멋대로고. 만날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틱틱거리고."

"카맛치. 구박받으면서까지 여자 친구 사귀고 싶었어?"

동정이 어린 모니와의 눈빛에 친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구박은 무슨.

", 너어. 그럴 바엔 헤어져! 그런 못된 여자랑 사귈 바엔 차라리 안 사귀는 게 낫다니까?"

"아냐, 그런거. 아니라구."

"헤어져! 다시 우리한테 돌아와, 카맛치!"

내 이럴 줄 알았다. 겉으론 빵빵하게 근육이 붙어 있어는 데다 눈썹도 눈빛도 사나워서 상남자같지만 속은 누구보다 착하고 순진한 녀석이었다. 분명 뭣도 모르고 마녀같이 못된 여자한테 잡혀 사귀는 게 분명하다. 모니와는 친구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헤어져, 헤어져 외쳤다. 친구를 위한 건지, 그저 솔로 한 명 만들고 싶어선지 모르겠지만.

"헤어져, 카맛치! 그런 여잔 너랑 어울리지 않아. 헤어지고 그냥 우리랑 놀자, ?"

", 아니라니까. 나쁜 놈 아니아닌가? 나쁜 놈인 것 같기도 하고?"

"나쁜 놈이야! 너한테 구박이나 한다며, 그런 나쁜 여자랑은 안 돼, 카맛치."

"아씨, 아냐. 걔 하나도 안 나빠."

". 잘 생각해 봐? ?"

"뭐를?"

모니와는 속고 있는 불쌍한 친구의 앞에 손바닥을 쫙 폈다. 그리고는 하나씩 손가락을 쥐면서 말했다.

"그 여자 예뻐?"

친구는 생각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착해?"

다시 고개가 흔들렸다. 모니와의 손바닥에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막 막말하지 않아? 너한테 못되게 굴지?"

끄덕끄덕,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의 짧은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펼쳐진 손가락은 두 개뿐이다.

"너한테 잘해줘? 뭐 애교부리고, 맛있는 거 사주거나 그래?"

이번에는 친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로젓기를 번갈아했다. 그런가, 아닌가 헤매는 친구 대신에 모니와가 손가락을 접었다. 모니와의 하얗고 가느다란 새끼 손가락 하나만이 외롭게 서 있었다. 술기운에 발간 얼굴을 한 친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로, 진짜 진심으로 그 사람이 너 좋아해?"

멍한 시선이 모니와와 부딪혔다. 밤색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전의 그 날, 술에 취한 얼굴로 헤헤거리던 날과 같이 친구의 입가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모니와는 울컥하는 마음에 마지막 남은 새끼 손가락을 접지도 못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어떤 대답이든간에 모든 손가락을 접어 버리고 친구를 못된 마녀의 야수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던 속셈이었는데. 좋아라 실실거리는 얼굴에 모니와는 분통이 터졌다. 완전히 발이 꾀인 게 분명했다.

"이리 오라고 해! 당장, , 내가 한 소리 해줄게, 카맛치. 이 불쌍한 자식."

", 걔 오늘 바쁜데."

"바쁘고 나발이고 오라고 해!"

"화낼텐데."

궁시렁거리는 친구에게 모니와가 몇 번 으르렁거리자 결국 친구가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전화 너머의 못된 그녀에게 술에 취해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로 올 수 있는지 사정을 물었다. 그동안 모니와는 친구를 동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는 그 짧은 통화에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살짝 빈정 상한 얼굴로 모니와에게 애인이 온다고 말했다. 다가올 만남을 기대하며 모니와는 친구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누군지 몰라도 순진한 친구를 꼬여내다니 참을 수 없다며 모니와는 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친구한테 못되게 굴어서 마음에 안 드는지, 단지 친구가 애인이 생겨서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오기까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모니와는 친구와 술판을 이어나갔다. 가게에 있는 술은 모두 마셔보자며, 모니와가 새로운 술을 주문하고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쯤 익숙한 얼굴이 가게로 들어왔다. 10시를 넘은 이 시각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후배가 술집에 올 리가 없어 모니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뭐야, 카마사키 씨는요?"

"에엥? , 후타쿠치?"

", 진짜 술냄새하고는. 작작 좀 마시지 그래요?"

",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설마 벌써부터 술 마시고 그러는,"

"제가 양아치에요?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게?"

"너 양아치양아치 비스무리한."

후배는 모니와의 말을 술주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그 맞은편에 앉아 가게를 둘러보았다. 옆자리에 친구의 겉옷과 가방을 확인하더니 급기야 핸드폰을 챙겨 제 겉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거 카맛치 핸드폰."

"대체 몇 시부터 마신 거예요? 설마 7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던 건 아니겠죠?"

"어라? , 일곱 시부터 만난 건 어떻게 알았어?"

모니와의 대답에 대충 대답을 유추했는지 후배는 잔뜩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모니와의 앞에 물 컵을 들이밀었다. 대신 그 앞에 있던 술잔과 사케 병을 거둬 구석으로 밀었다.

"후타쿠치. 너 그거 알아?"

"뭘요."

"카맛치가카맛치가."

"카마사키 씨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후배라면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잘은 모르지만 모니와 주변에 이 후배만큼 건방지고 말발이 센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잘하면 친구의 그녀를 물리쳐줄 수 있을지도 몰라. 모니와는 친구의 안녕을 빌며 후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카맛치, 여자 친구랑 헤어지게 해야 해."

"?"

"들어봐, 후타쿠치. 그 나쁜 여자가 글쎄, 카맛치를 엄청 구박한다고.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할지도 몰라. 얼마나 건방지고 제멋대로인지 카맛치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다니는 게 분명해. 안 그래도 연애는 해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그런 여자한테 걸려서는. 후타쿠치, 이따 그 사람 온다고 했거든?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너도 한 번 보고, 카맛치 좀 말려 봐바."

모니와가 숨 쉴 틈도 없이 말하는 동안 후배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 왜 네가 열받아 하는거야? 설마 그런 여자랑 동급 취급해서 그런 건가. 후배의 눈치를 보며 모니와가 생각했지만 취한 잔뜩 술에 취해 후배의 열받은 얼굴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래요? 그렇게 건방지대요?"

"그렇다니깐? 게다가 하나도 안 예쁘데. 내가 예쁘냐고 물어봤는데, 카맛치가 엄청 웃으면서 징그럽다고 하더라니까. 그건 좀 불쌍하긴 하네..."

"헤에, 그래요? 헤에..."

모니와의 말에 후배는 다행히 공감하는 듯 보였다. 최근에는 좀 사이가 별로인 것 같았지만 올 초까지만 해도 친했다는 걸 보면, 후배 또한 친구를 막 대하는 여자가 거슬리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후배의 얼굴이 잔뜩 열 받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경기 시작 전에 상대팀한테 일격을 날리다 되려 한 대 맞은 모양이었다.

"런 사람이랑 대체 왜 사귄데요, 카마사키 씨는?"

역시 모니와의 생각대로 후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웃고 있는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지만 모니와의 착각일 터였다.

"왜 사귀겠어, 그 여자가 억지로 사귀자고 했겠지."

"그렇게 말했어요? 카마사키 씨가?"

"설마! 무서워서 그렇게 말했겠어? 그냥, 눈치로 그래보였다는 거지."

"그렇구나."

"근데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와? 내가 직접 어떤 사람인지 보고 말겠어."

"보면 뭐라고 하시게요?"

"뭐라고 하긴. 헤어지라고 해야지! 친구로서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할 거야. 대체 카맛치를 뭐로 보고 막 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감시할 거야!"

"……."

"근데 사실 헤어지라고 해도 막상 진짜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풀이 죽은 목소리에 후배의 시선이 모니와에게 향했다. 말없이 그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빛에 모니와가 한숨을 쉬었다.

"카맛치한테, 그 여자가 널 진심으로 좋아하냐고 물어봤거든? 그렇게 막 대하고 제멋대로에 예쁘지도 않은데 카맛치를 좋아하지도 않는거면 진짜 최악이잖아."

"...근데요?"

"글쎄, 아휴, 말없이 그냥. 활짝 웃는 거 있지? 아주 좋아라하고."

"……."

"그 얼굴에 대고 당장 헤어지라고 말할 수가 있어야지. 말로는 나쁘다 징그럽다 하지만 카맛치도 그 여잘 진짜 좋아하는 게 보였으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

"……."

"그래도 그 사람 오면 한 마디 해줄 거야.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 오더라도 카맛치한테 잘해주라고."

근데 왜 이렇게 안 와? 카맛치는 화장실에 갔다더니 가서 뭘 하는 거야. 모니와의 툴툴거림에 후배가 피식 웃고는 친구를 찾으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던 친구는 세면대에서 골아 떨어졌다. 후배는 어깨에 친구를 들쳐 매곤 겉옷과 가방을 챙겨 나가자고 재촉했다. 친구의 여자 친구를 기다리겠다며 모니와가 고집을 피웠지만, 후배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건방진 그녀임에 틀림없다며 모니와는 생각했다. 그 말에 후배가 피식거렸다.

가게를 나와 후배는 택시를 잡아 모니와를 챙겼다. 이미 버스도, 전철도 다 끊겼을 텐데 너는 어떡하냐는 걱정 어린 질문에 후배는 친구 집에서 자겠다고 대답했다. 언제 화해한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았다. 모니와와 함께 친구의 그녀를 아니꼽아하던 후배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친구가 여자 친구를 떠올렸을 때와 비슷해 보여, 모니와는 멀어지는 후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행복해 보였다.




(7297자)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