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中)




준결승까지 올라갔어.”

그래? 잘했네.”

가게에 들어서는 카마사키를 향해 초장부터 내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니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졸업하고도 간간이 보던 얼굴이지만 근래 들어 참 드물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낯선 얼굴을 하곤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왜 안 왔어? 인터하이 때는 매일같이 오겠다고 난리더니.”

그냥, . 요즘 회사 일이 바쁘기도 하고. 굳이 나까지 안 가도 다른 애들이 있잖아.”

거짓말 치지 마. 아닌 거 다 알아.”

모니와의 말에 카마사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잔이나 비운 술잔과 친구를 번갈아 보다 모니와는 말없이 카마사키의 잔을 채워주었다.

무슨 일인지 봄고 기간 내내 카마사키는 배구부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은퇴하고 나서도 뻔질나게 놀러 오고, 인터하이 때는 꼬박꼬박 찾아왔던 주제에 갑자기 생판 남인 사람마냥 연습 때에도, 경기 때도 못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하게 웃을 뿐 대답을 회피하기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마사키의 성격 상 아무 일도 없이 그러는 건 아닌 게 분명했지만 본인은 말해주지 않으니 모니와는 결국 모든 경기가 끝나고서야 후배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예선시합 전에 보러 갔었던 때부터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더니 원인은 후타쿠치에게 있는 듯 했다. 경기를 앞둔 긴장으로 보기엔 이렇게까지 신경이 예민해진 적은 없는지라 그 즈음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만나면 항상 서로 티격태격하던 사이이긴 하지만 뒤끝이 있었던 적은 없는데. 모니와는 평소보다 담담해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이름을 듣자마자 별거 아닌 근황을 말하던 입을 다물었다. 모니와의 눈을 피해 카마사키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답지 않게 내내 조용하더라.”

.”

건방진 건 여전하지만.”

.”

무슨 일 있어?, 하고 모니와는 말을 꺼내고 싶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카마사키가 그랬듯이, 후타쿠치도 후배들은커녕 아오네에게 조차 별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걸 보면 두 사람 모두 얘기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대체 뭐기에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모니와는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카마사키에게 무언의 시위를 표했지만 그런 모니와를 카마사키는 끝까지 모른척했다.

, 모니와.”

한참을 대화를 피하고 술만 마시던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

내가 머, 뭐 마래줄 게, 있는데.”

사정없이 꼬인 혀로 카마사키가 더듬더듬 말했다. 모니와는 이미 한계치까지 마신 카마사키의 손에서 술잔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빠져나가는 술잔을 따라가는 손에 물이 든 컵을 대신 쥐어 주며 모니와는 말해보라며 카마사키를 재촉했다.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손에 쥔 게 술잔은 아니라는 걸 아는지 카마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컵을 만지작거렸다. 말하다 말고 컵에 신경을 뺏긴 카마사키에게 모니와가 재차 물었다.

뭐를 말하고 싶은데?”

, 맞아. 말 해줄 거.”

오늘 내내 무표정에 가깝던 카마사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오른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헤집어대는 게 짜증이 났다기보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걔 있잖아, 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중에 어떤 애가 그러는데.”

.”

내가 아는 애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니와는 카마사키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신의 얘기임을 눈치 챘다. 본능적으로 아는 애라고 포장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니까 내가 아는 애의 아는 애가 고등학교 후밴데, 친하친한가? 아씨,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후배란 자식이 말이야. 그 자식이.”

그 자식이 왜?”

젠장, 그 자식이 나한테, 아니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한테 가, 갑자기.”

갑자기?”

,”

?”

악 소리를 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 마구잡이로 쥔 까만 머리카락이 불쌍해 보였다. 술 때문에 빨개진 건지 어떤지 목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양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카마사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한테 키스를 했어. 그 자시기 나한테 갑자기. 근데 그래놓고 암 말도 안하고 .”

, ?! 잠깐, 뭐라고?”

한 번도 아니고 며, 몇 번이나, 젠장.”

, 그러니까 누가 너한테?”

모니와. , 그 자식이 나한테 왜 그랬지? 말로 하는 걸로는 부족해서, 그래서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날 괴롭히는 건가? 새끼, 나 첫키스도 아직이었던 거 어떻게 알아가지고.”

그러니까 누가.”

중얼중얼 첫키스가 어쨌네, 신종 이지메냐며 횡설수설 거리던 카마사키의 고개가 끝내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푸흣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풋풋거렸다. 미쳤나보다고 모니와가 사색에 질리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실은 다 알아. 젠장, 내가 암만 눈치가 없어도 다 안다고. 있지, 모니와. 나 어떡해.”

그니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오.”

어떡해, 존나존나, 걔 나 조아하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걔가 날.”

그러니까 걔가 누군지 말해달라고! 모니와가 미친놈처럼 큭큭거리는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봤지만 카마사키는 뭐라 웅얼거리기만 할뿐 일어나지 않았다.

쿠치, 미쳤나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고부터 이렇게까지 마신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카마사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하지 않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출근했어야 했으면 쓰러졌을 지도 몰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카마사키는 안도했다.

어제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셨더라? 꽤 오랜만에 모니와랑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봄고 얘기 좀 하다가그러다가, 맞아, 모니와가 후타쿠치 얘기를 꺼냈었다. 가만있으면 자꾸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계속 술을 들이켰던 게 기억이 났다. 최대한 후타쿠치 얘기를 피하려고 회사 일만 얘기하면서 퍼마셨지.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시다가 어느 부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 왠지 예감이 안 좋다. 술김에 모니와한테 잔뜩 주정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이마를 쥐어짜며 어제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모니와가 잔뜩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던 것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요상하게 눈빛이 반짝이던데, 대체 무슨 얘기를 했지? 이불 밖으로 손끝을 더듬으니 핸드폰이 잡혔다. 배터리가 없는지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보조배터리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그 잠깐 사이에도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은 켜지자마자 징징 소리를 내며 한참동안이나 부들거렸다. 거의 다 모니와로부터 온 라인이었다.

[배신자. 대체 그 자식이라는게 누구야?]

제일 처음에 온 라인은 그 자식이 누구냐는 얘기였다. 그 자식? 카마사키는 곧바로 화면을 내렸다.

[까먹었을게 뻔하지]

[어제 너가 첫키스 얘기해줌]

[누가 너 좋아한다며]

[이모티콘]

[이모티콘]

[얼굴 새빨개져서 부끄러워함]

[사진]

[사진]

[사진]

[이모티콘]

채팅창에 줄줄이 올라온 건 난리부르스를 추는 캐릭터 이모티콘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사진들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온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웬만큼 취했을 거라곤 예감했었지만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카마사키는 최대한 사진을 외면하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꿈이었으면 하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두통 때문에 머리가 사정없이 아팠다. 그나저나 모니와한테 후타쿠치 얘기까지 해버렸나? 첫키스니, 그 자식이니 하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술김에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누가 그랬는지까지 말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으아. 으아으아.”

그 자식이 후타쿠치란 걸 알면, 모니와 기절할 지도. 카마사키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분명하게 그 일이 언제 일어났더라. 한창 열대야가 시작되었을 때니 벌써 몇 달도 전의 이야기다. 방학을 맞이해 여름합숙을 앞둔 후타쿠치가 언제나와 같이 놀러 왔었고,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날이 너무 더웠다는 것 정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배어나올 정도라 후타쿠치도, 자신도 선풍기 바람 하나에만 의존해 더위에 지쳐 있었다. 아니,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날은 유난히 처음부터 후타쿠치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기운 넘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후타쿠치가 별안간 키스를 해왔던 때. 처음에는 후타쿠치와 입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저 눈앞에 늘 보던 얼굴이 평소보다 가까웠다는 것만 알았다. 그저 너무 더워서, 지나치게 가까이에 보이는 얼굴이 신기루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입술에 닿은 후타쿠치의 입술이 순간 움찔하고 떨리지 않았다면 계속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을 거다. 정신을 차리고 후타쿠치를 밀어내려 했을 땐 이미 어깻죽지를 잡히고 재차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비틀고 기울어지는 고갯짓에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스치는 이마가 간지러웠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입술을 깨물고, 기어코 혀를 들이밀어 입 안 곳곳을 문지르던 후타쿠치는 한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깜짝 놀라 나를 밀쳤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사이, 후타쿠치의 얼굴이 빠르게 무너져갔다. 숨이 턱 막힌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 모습이 금기를 저지른 어린아이 같았다. 정면으로 마주친 캐러멜 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지려던 말이 목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굳어 있던 후타쿠치는 도망치듯 일어나 방을 나갔다. 들고 왔었던 가방만 남긴 채,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뻔질나게 울려대던 벨소리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야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자주 얼굴을 봤으니 친해진 건 맞지만 단순히 선후배로서 친분이 쌓인 것이라 생각했다. 후타쿠치가 느닷없이 입술을 들이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 이후로 후타쿠치를 만난 적이 없으니 어느 하나 분명하진 않지만, 그 때의 그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 방면으로 경험도 없고 눈치도 없더라도 그건 분명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했던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 자취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늘어난 연락들, 그 때의 키스와 결정적으로 그 때의 저질렀다는 표정.

이제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는 사이 시간이 수개월이나 흘렀다. 처음 몇 주간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느 때와 같이 언젠가 태연한 얼굴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안 온다는 걸 깨달았을 땐 꽤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내심 후련한데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약간 화도 났다. 실수였던 아니던 뭐든 간에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따져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후타쿠치가 오지 않는 게 허무했다. 집에 있으면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있어야 할 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 크게 느껴지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낯설었고, 혼자 먹는 저녁이 맛이 없었다. 평소에 옆에서 딴지를 걸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렇게 드나들더니 집안 곳곳에 후타쿠치의 흔적이 잔뜩 남아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도 번번이 후타쿠치가 떠올랐다. 자취를 시작한 뒤 딱히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한 적은 없었는데 그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지나치게 허전함을 느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애매하게 지난 시간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즈음 마침 모니와랑 사사야가 봄고 예선을 앞두고 응원 차 연습을 보러 가겠냐고 물어왔을 땐 기회라고 생각했다. 핑계가 생겼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일단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고, 뭔가 해결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집을 나설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아무 연락도 없는 건 날 피하는 거라고, 이제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고를 앞두고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면 안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갑작스런 일이 생겼다며 핑계를 댔다.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회피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 도망치니 되돌아가는 게 더 무서워졌다. 온갖 이유를 대가며 거절하다 상황을 파악했을 땐 모든 경기가 끝난 뒤였다. 그나마 있던 핑계거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피하기도, 다가가기도, 그렇다고 그냥 멈춰 있을 수도 없는데 뭘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니 근데 왜, 내가 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걔가 나를 좋아하는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대체 내가 왜 틈만 날 때마다 그 자식 생각만 하는 거냐. 어째서 내가 그 자식이 옆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쓸쓸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데?

대체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건지.

 

 

 

오랜만에 들은 그 사람의 소식은 전혀 반가울 만한 게 아니었다.

봄고 예선전까지 남아있던 3학년들은 잠시 뒷전으로 미루었던 취업과 진학 등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유난히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시린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가을비 치고는 대차게 내렸던 어젯밤 비와 더불어 예년보다 낮은 기온 때문에 그날따라 아침 등굣길이 쌀쌀했다. 수 년 동안 반복됐던 아침연습 덕분인지 후타쿠치는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아직도 고교배구가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근 시간보다 한참 앞섰기 때문인지 역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철을 기다리는데 맞은 편 플랫폼에 선 여자의 나풀거리는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팔랑팔랑 낙엽이 길가에 뒹굴 듯이 팔락거렸다. 멍하니 쳐다보는데 스카프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매무새를 정리하며 눈이 마주치지 않은 사람처럼 딴청을 부렸다. 후타쿠치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관심 있어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한 것 같았다. 여자는 예민해서 편하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보이는 행동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니까. 그만큼 착각도 많이 하지만 사람 사귀는 것에 있어서 예민하다고 나쁠 건 없다. 그러다 자연스레 예민하지 않은 남자가 떠올랐다. 솟아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전철이 다가온다는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철에 타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모니와였다. 뭘 하는지 핸드폰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모니와의 옆에 앉았다.

모니와 씨.”

어라? 후타쿠치. 완전 우연이다! 어떻게 전철에서 다 만나네.”

후타쿠치가 말을 걸고서야 모니와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만남에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반짝하고 커다래졌다. 카마사키와 같이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된 모니와는 회사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카마사키를 제외하곤 선배가 양복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신선했다. 거의 1년은 입었을 텐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감색의 양복차림이 아직도 어색해 보였다.

아빠 양복 빌려 입은 중학생 같아요. 뭐야, 넥타이 색깔이 촌스럽잖아요.”

중학생이라는 발언에 모니와가 충격을 받은 듯 괜히 소매를 정리했다. 이 넥타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라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넥타이를 쓰다듬던 모니와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랄만한 거 알려줄까?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괘씸하니까 너한텐 말해줄게.”

제가 괘씸하다고요?”

아니, 너 말고. 진짜 걔가 제일 먼저 배신을 때릴 줄이야!”

누가 배신을 때려요.”

모니와는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후타쿠치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 이야기든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후타쿠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하나도 안 놀라기만 해 봐라. 가는 길에 내내 괴롭혀 줘야지, 하고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먹던 후타쿠치는 이어지는 모니와의 말에 귀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고요?”

카마사키, 사귀는 여자 있나봐.”

사귀는, 여자.

카마사키 씨가.

순간 느낀 감정은 뭐랄까, 억울함이었다. 또 답답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고장 난 것 마냥 모든 게 멈춰지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귓가에는 모니와 씨가 계속해서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귓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콩닥콩닥 잘만 뛰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진 기분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피가 찢겨진 가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모든 감각이 아득해져갔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완벽하게 제로.

아직도 지독하게 더웠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짜증날 정도로 후덥지근했던 방, 들리는 거라곤 가끔씩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이따금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로 덥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 입술이 맞닿았을 때 덜컥 숨을 들이키던 소리.

내가 대체 왜 그랬지.

그 날은 여러모로 기분이 영 별로였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여름방학과 동시에 시작된 배구부 집중 연습 때문에 학기 중일 때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이 지나치게 더웠다. 덕분에 샤워를 했는데도 카마사키 씨를 찾아가는 도중에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셋째로는 그냥 별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딱히 그 날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랬다. 언젠가부터 카마사키 씨를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감정이 요동쳤다.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얽인 실타래가 있어서 그걸 풀고 싶은데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애타고 초조하고 짜증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즈음엔 오랫동안 질질 끌어왔던 짝사랑에 나도 모르게 지쳐가던 중이었다. 아무 변화도 없는 관계가 지겨웠다.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몸짓에 화가 났다. 그 무신경함이 원망스러웠다. 가끔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붙들고 따지고 싶었다. 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느냐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왜 모르냐고. 정작 고백할 용기는 없는 주제에 멋대로 탓하고 원망했다.

이렇게까지 찌질해질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충동적으로 키스해버린 데다 일을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그 날의 나를 죽도록 패주고 싶다. 그 날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지만. 배구를 핑계로 삼아 나는 또 한 번 도망쳤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게 무서웠다. 경멸의 눈빛으로 날 볼 까봐, 혐오스럽다는 듯 말할까봐.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봐, 나는 그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끝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게 결국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주구장창 내가 먼저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나러 가지 않으니 만날 일도, 하물며 연락도 없다. 혹시 이미 카마사키 씨는 모든 걸 끝낸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는데 왜 연락하지 않는 걸까.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연락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미 나를 싫어하게 된 거면 어떡하나. 어쩌면, 나는 벌써 잊혀 진 걸까.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와 카마사키 씨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구나. 고작해야 선후배 관계로 정리될 뿐, 평범하고 흔한 사이. 갑자기 연락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이라는 사실이 잔인하다.

차라리 그 때 도망치지 않고 고백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힘들어 하는 일은 없었을까. 차라리 고백해서 차였다면 지금쯤 좋아했던 감정을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누군가와 사귀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혹시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까?

도망쳤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나는 왜 자꾸 도망치기만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그 집에 찾아가 이미 오래 전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간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지는 게 있을 지도 모른다. 근데 왜 발걸음은 생각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는 건지. 한 걸음 다가가는 게 어째서 이다지도 무서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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