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후타카마] 러브레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7.10.02 [후타카마] 러브레터(2018)-(3) 1
  2. 2017.09.14 [후타카마] 러브레터(2018)-(2)
  3. 2017.08.03 [후타카마] 러브레터(2018)-(1)
  4. 2017.07.22 [후타카마] 러브레터(2013)

 

(3)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저거다. 카마사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 안하냐?”

잠깐 쉬는 것 가지고 뭐라 하지 마! 네가 사장이야, 뭐야. 그보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너 혹시.”

혹시 뭐.”

혹시, 마코토가 말끝을 늘이며 손가락으로 애꿎은 파티션을 긁었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카마사키가 그러니까 혹시 뭐, 하고 한 번 더 물으니 흘끗거리며 눈치를 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카마사키가 모니터에 향했던 시선을 들고 마코토를 쳐다보자 마코토는 시선을 피하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애인 생겼냐?”

서류를 넘기던 카마사키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애인이라니, 무슨 소리냐는 눈짓에 마코토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너 요즘 자주 멍 때리고, 예전엔 야근도 불사하던 놈이 요 몇 주간 퇴근시간 딱딱 맞춰서 가려고 하고. 툭하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지를 않나. 네가 하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

그랬나? 마코토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최근 춘곤증 때문에 틈만 나면 졸았기도 했고,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긴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랬나 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마코토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지?”

있겠냐?”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하는 마코토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졌다. 애인이 없다는데 크게 안심하는 녀석을 괘씸하게 쳐다보자 하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없는데 네가 있을 리가 없지.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녀석에게 마침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던져 버릴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백발백중 저 면상에 명중시킬 자신이 있다. 카마사키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마코토가 한 손으로 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끝나고 한 잔 할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이제 술 안 마셔.”

카마사키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마코토가 있는 술자리에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허물없이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사이라 그런지 자중하자고 다짐을 해도 취하면 녀석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방심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다. 저번에도, 저 저번에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다. 언제나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 날 아침이고, 전날 밤의 기억은 통째로 날아가 있다. 어쩌다 술에 취했는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야 별 실수가 없었다 해도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필름이 끊겨서 아무 기억도 없는 것도 영 찝찝하고, 최근 안 그래도 뉴스에서 취객을 상대로 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친하다지만 취할 때마다 마코토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내심 미안했던 터다.

나름 진지했던 카마사키의 거절을 마코토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얼마 안 가 말을 바꾸리라 생각하는 듯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럼 다른 사람 끼면 괜찮다는 거지? 마침 역 근처에 괜찮은 술집이 생겼다는데 오늘은 거기로 가야지~.”

안 간다니까. 다른 사람이 있으면 뭐해? 술자리에 너만 있으면 만날 필름 끊길 정도로 마시게 되서 싫다고.”

내가 언제는 너 안 바래다 준 적 있냐? 알아서 잘 모셔다 줄 테니까 이 형님만 믿어.”

형님 좋아하네. 난 진짜 안 내킨다니까?”

됐고, 형님만 믿어! 마코토가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저 자식은 동기에 나이도 동갑인데 항상 지가 연상인 것처럼 행세한단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형님이니 뭐니 안 그러면서 내 앞에서만 허세를 부리니까 더 짜증이 난다. 혹시 날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카마사키는 괜히 마코토의 까만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그래봤자 파티션에 가려져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하기에 누굴 부르나 싶었더니 마코토는 회사 사람들을 모았다.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회식 자리에 불과했겠지만, S-PLANT의 직원들도 부르는 바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자리가 되고 말았다.

오라고 한 당사자가 어디있나 둘러보니 마코토는 이미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대체 왜 오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카마사키는 이미 저마다 자리를 잡은 테이블을 둘러보다 제법 한산한 테이블에 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카마사키처럼 술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S-PLANT의 직원 세명이 앉아 있었다. 그다지 친목을 다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카마사키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형식적으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떠들썩한 주변과 달리 네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는 테이블은 외딴 섬처럼 조용했다.

 

 

우와, 여기 왜 이렇게 조용해요?”

각자 조용히 술을 즐기던 테이블로 후타쿠치가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맞은편의 직원에게 몇 마디 실없는 말을 건네고는 카마사키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카마사키 씨이, 하고 말을 늘이며 말을 걸었다.

설마 그 나이에 아직도 낯가리는 거예요? 중학생?”

낯을 가리긴 누가.”

누가 술자리에서 혼자 술만 마시고 있으니까 그렇죠.”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술자리는 질색이라고.”

,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니 뭐가, 라고 대꾸하려던 카마사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후타쿠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자신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허물없이 대하는 편이었다.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장난을 치고,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실없는 농담이나 따먹는 사람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걸 못 참아하고, 떠들썩한 걸 좋아했었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어떤 커다란 계기가 있어서 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이 싫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괜히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여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

그게 낯가리는 건데요.”

아무튼 간에. 그러는 너는 자리로 안 돌아가냐.

저긴 너무 귀찮게 해서.”

그리고는 빈 잔을 찾아 술을 채운다. 후타쿠치의 어깨 너머로 후타쿠치가 원래 있던 테이블 사람들이 이쪽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라처럼 고개를 쭉 내밀며 힐끔거리는 게 다들 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타쿠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쓸데없이 인기가 많아 피곤하다고 말하는 후타쿠치가 여느 때보다 얄미워 보였다.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짜증난다니까.

, 지금 여자친구 있냐?”

지금은 없어요. 얼마 전에 차였어요.”

네가 차였다고?”

일순 마시던 술을 뱉을 뻔 했다. 카마사키는 입가에 술이 흘렀나 싶어 괜히 턱을 닦았다. 후타쿠치 같은 녀석들도 차이는 구나. 일견 당연한 일인데 그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았다. 전에 없던 흥미가 솟아 카마사키가 재차 물었다.

?”

바빠서요. 소홀해졌다나 뭐라나? 사무실 이전하니까 한동안 바빠질 거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러더라고요. 전화를 안 받는다는 둥, 주말에 왜 못 만나냐는 둥. 여자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요.”

후타쿠치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게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태도로 미루어보건대 별로 여자친구가 좋아서 사귄 게 아닌 듯싶었다. 후타쿠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 때도 그랬듯이 여전히 가벼운 연애를 즐기는 구나.

바쁘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당황을 삼켰다남의 연애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실례다. 내가 뭐라고 울컥한 거지. 그것도 한눈에 봐도 저보다 연애 경험이 많은 후타쿠치를 상대로 무슨 설교를 하는 거냐. 카마사키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얼버무리며 흘끗 쳐다보니 후타쿠치는 조금 놀란 눈치이긴 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피식 웃었다. 하나도 기분이 나빴다거나 불쾌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카마사키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 태연한 얼굴에 카마사키는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고 후회했다.

가만히 술잔을 채우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불쑥 빈 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술잔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후타쿠치가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카마사키 씨는 여자친구 없나보죠?”

여자친구는, 없지.”

왜요?”

바쁘니까.”

바쁜 건 핑계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사실 바빠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러나 더 자세한 속내를 털어놓기엔 내키지 않아 카마사키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핑계를 댈 만한 게 바쁘다는 것뿐이라 후타쿠치에게 트집이 잡혀 버렸지만. 하여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속으로 놀릴 건수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카마사키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후타쿠치를 쏘아보며 생각했다. 술이 당겼다. 잔을 비우자 쓴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연애를 뒤로 하는 건 핑계가 맞다. 상대를 정말 좋아한다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 사실을 카마사키는 얼마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연애는 감정이 있어야 할 수 있고, 감정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못 할 짓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한 뒤, 연애의 기회는 몇 번 찾아왔었다. 잘생기지도 않은 자신이 좋다며 고백하는 여자도 있었고, 제 쪽에서 먼저 호감을 느낀 여자도 있었다. 사귄 적도 있었고, 사귀지는 못했지만 연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적도 있었다.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꽤 좋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처음 한 연애는 별 거 아닌 일로 설레기도 했으며, 소소하게 이벤트를 챙기는 것도 꽤 재밌었다. 풋풋했다. 풋풋해서, 실수를 했다 생각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그땐 그게 마냥 기뻤었다. 남들과 같이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었다. 좋아한다는 감정까진 아니어도 호감은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연애를 시작했고, 관계가 이어졌다. 하지만 감정이란 단순히 사귀기 시작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호감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한 호감에 그쳤다. 좋아서 설렌다고 느꼈던 건 그냥 낯선 상황에 대한 두근거림에 불과했고, 점차 함께 있어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허물뿐인 관계에 매어있는 기분이 들었고, 같이 있는 시간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함과 죄책감만 더해갔다.

억지로 사랑해야 한다고 되뇌어봤자 마음은 자신의 노력을 비웃듯이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사랑받으면 자신의 마음에도 사랑이 자라나리라 생각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았고 처음처럼 기쁘지도 않았다. 점점 죄책감이 쌓였고, 이를 눈치 챈 여자 친구가 끝내 이별을 통보했다. 어느새 마음이 바닥난 것이다. 사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처음 사귄 여자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다를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시작한 두 번째 연애도 같은 결과였다. 차라리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두 번째 여자 친구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탓했다.

진즉에 마음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카마사키는 후회했고, 그 뒤 사랑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겠지. 그 때는 흠뻑 사랑에 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지만 연애는 없었다. 마음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언젠가 쌀쌀한 바람이 목을 스치던 밤에,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 살아도 그럭저럭 살만 했고, 심심할 때면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과 술 한 잔을 마시면 되었다. 게다가 연애를 안 하니 돈은 쌓이기만 해서 모아놓은 돈이 꽤 되었고, 할 게 일밖에 없다보니 자연스레 실적이 쌓여서 남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사랑이 없는 대가가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한 건지도 모른다.

 

술자리를 마련한 당사자인 마코토는 모든 테이블을 돌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난 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시덥잖은 얘기로 시간을 때우며 술만 홀짝이던 카마사키는 이미 자신의 주량을 훌쩍 넘긴 채였고, 애초에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만 지키던 S-PLANT의 직원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카마사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놀았다. 어린애 재롱을 보듯 건방지게 턱을 괴고 있는 후타쿠치를 마코토는 흘끗 흘겨본 뒤 카마사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의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한 카마사키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기니 술에 취해 늘어진 몸이 흐느적거리며 따라왔다. 허물없이 기대오는 게 꽤나 묵직했다.

얌마,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냐? 필름 끊기는 거 싫다더니.”

?”

, 이렇게, 많이, 마셨나고?”

어어어, 마코토. 너 이 짜식 왜 이제야 오냐. 

카마사키가 몽롱하게 풀어진 눈을 하고는 마코토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낯 가리는 거 아니라고, 하고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반복했다. 술자리에 나만 있으면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다고 투덜대더니 또 이렇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 그나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만 취한다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마코토는 한숨을 내쉬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단단히 안았다. 설마해서 요령껏 술을 자제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혹시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럴까 걱정돼서 마코토는 곯아떨어지기 직전인 카마사키를 타박했다.

어휴, 너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

? 네 책임.”

네가 뭐가 예쁘다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드문드문 끊기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졌다. 고개를 꾸벅꾸벅 거리더니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잠에 빠진 카마사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평상시엔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잠이 든 모습은 영락없이 순해빠졌다. 사나웠던 눈매며 올라간 눈썹이 기세를 잃고 축 쳐져있어서 다른 사람 같았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모습에 마코토는 저도 모르게 카마사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녀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쩐지 자신뿐인 것 같아 뿌듯해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무심코 키스를 해버렸을 지도,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말로는 뭐라 타박했지만 마코토는 사실 이 순간이 좋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카마사키를 바래다주는 일은 마코토 본인만 아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마음껏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은근슬쩍 허리께며 허벅지를 만지는 것도, 술김이라 변명하며 제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도 카마사키를 안아보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술김에 라든가, 친구라는 관계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카마사키와 사귀고 싶었다. 제 마음을 자각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심지어 카마사키도 요 몇 년 간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일단 사귀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참을 카마사키의 얼굴을 구경한 뒤, 마코토는 시계를 확인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은 터라 슬슬 파장하는 분위기였고, 주변 테이블도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어깨에 자켓을 걸쳐준 뒤 어깨를 매고 일어섰다. 동시에 후타쿠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조용히 있어서 눈치를 못 챘는데 후타쿠치는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마사키의 고교 후배라는 후타쿠치라는 녀석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던 데다, 겉보기엔 잘생겼는데 생긴 대로 성격이 건방진 것도 싫었다. 행동과 말투가 가벼워서 도통 진심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가장 싫은 건, 카마사키와 꽤 친해 보인다는 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만에 만났다는 것 치고는 카마사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고, 카마사키도 은근히 저 녀석의 건방진 태도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받아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슬슬 나갈까요.”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예의상 말을 건네니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마코토는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카마사키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집까지 데려다 주려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아니, 이참에 막차가 끊겼다고 핑계를 대고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종종 그랬으니까 뭐. 그러나 마코토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후타쿠치가 마코토가 부축하고 있던 카마사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마코토에게 후타쿠치가 웃으며 말했다.

카마사키 씨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니요, 미즈하라 씨도 집에 들어가셔야죠. 막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그럼 야스시네서 하룻밤 신세를 지면되니까요.”

카마사키를 이쪽으로 달라는 듯이 마코토가 두 팔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후타쿠치는 그런 마코토에게 보란 듯이 카마사키를 안은 제 팔을 추켜올렸다. 축 늘어진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팔 안에 축 늘어졌고, 그 모습이 꼭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옆집이니 제가 데려다 드리는 게 효율적이죠.”

후타쿠치의 말에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을 구경하던 직원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끼어들었다. 귀찮았을 텐데 잘 됐네, 미즈하라. 그러나 마코토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후타쿠치의 어깨를 잡아챘다. 걸음을 옮기려던 후타쿠치가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았다.

잠깐만, 둘이 옆집이라고?”

. 그렇게 된지 꽤 됐는데 여태 모르셨어요?”

얼마나, 되었는데?”

, 한 달은 족히 넘었나. 아니 두 달은 됐나?”

…….”

아무튼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깨가 무거워서요.”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부축하고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후타쿠치가 싫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주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다. 게다가 제 앞에서 보란 듯이 잘난 척까지 하다니. 아까는 순간적으로 후타쿠치를 한 대 패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았었다. 왜 뜬금없이 카마사키와의 친분을 제게 과시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간에 짜증이 났다.

혹시 카마사키를 좋아하는 걸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거며, 조용히 쳐다보던 것 하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이 멋대로 끼어들 명분은 되지 못한다. 아까의 행동은 그저 저를 놀리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건방진 자식이, 마코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잔을 들이켰다. 물인 줄 알았더니 하필이면 누군가 물컵 채로 폭탄주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 하고 목구멍에서 가슴까지 화상이 난 듯 화끈거리고 따끔거렸다. 명백한 질투였다.

 

 

?”

카마사키는 뺨이 화끈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차츰 초점이 맞아졌다. 오렌지 빛으로 가득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집 앞이었다. 카마사키는 멍하니 벽을 보고 있다 주위를 살폈다. 술에 취해서 누가 바래다준 것 같은데 마코토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마코토라면 제 집 열쇠를 찾아서 침대까지 데려다 주었을 테니까. 오래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제 바로 옆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색 슬랙스를 따라 올라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야아, 이거 후타쿠치 아냐.”

깼으면 그만 집에 들어가시죠.”

네가 나 데려다 준거냐? 우와아, 웬일이야. 말도 안 돼.”

, 진짜 술주정 하고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이거 꿈인가. 저 자식이 나 데려다줄 리가 없는데.”

참나 가지가지 하고는. 저기요, 카마사키 씨.”

마코토는?”

술에 취할 때면 늘 마코토가 데려다줬는데 왜 네가 있어?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바지를 쭉 당기며 물었다.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얼굴을 팍 구기고 제 바지를 쥔 카마사키의 손을 뿌리쳤다.

기껏 바래다줬건만 그 사람은 대체 여기서 왜 찾아요?”

마코토가 매번.”

이봐요, 카마사키 씨. 데려다 준 사람은 저거든요.”

마코토는 침대까지 데려다줬는데.”

, 진짜 미친.”

후타쿠치는 잠시 이 사람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쳐야 하나 갈등했다. 정신이 들면 알아서 집에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술주정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데려다준다고 하지 말걸 그랬다. , 한숨을 쉬고 내려다보니 잠깐의 시간동안 카마사키가 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 진짜. 내가 이 사람이 있는 술자리에 다시 한 번 가나 봐라. 후타쿠치가 이를 악물고 카마사키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우고 들어올렸다. 술에 푹 절여진 몸이 물을 잔뜩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시발, 절로 욕이 나왔다.

카마사키를 들고 일어난 뒤는 더 난관이었다. 도통 어디에 열쇠를 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후타쿠치는 제 어깨에 멘 카마사키를 하마터면 집어 던질 뻔 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열쇠를 찾았지만 문을 열고 신발을 벗기고 침대까지 가는 길은 하나도 순탄치 않았다. 카마사키는 자꾸 바닥으로 늘어지려고 하지, 어깨 옆에서 간간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서 소름돋지, 침대까지 가는데 바닥은 난장판이지. 침대에 이르자마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으으.”

그 반동으로 카마사키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내가 다시는 이 인간이 있는 술자리에 가나 봐라. 했던 다짐을 되뇌고 후타쿠치는 잠시 카마사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까지 들쳐 매고 오느라 체력을 탕진해버린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난장판인 방에서는 자고 싶지 않았다. 왠지 평소보다 방 상태가 심한 것 같았다. 옆집인 걸 알고나서 수차례 들락날락 거렸지만 오늘은 가장 난장판이었다. 올 때마다 홧김에 잔소리를 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더니. 전형적인 혼자 사는 남자 같달까, 그보다 더 하달까. 고등학교 다닐 땐 꽤 깔끔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라커도 늘 깨끗하게 정리하고 데오드란트도 꼼꼼하게 챙기던 게 기억났다. 그런 점이 생긴 거랑 달라서 의외라고 생각했었지. 아니, 의외로 그 사람답다고 하나. 지나치게 성실하고 괜한 것에까지 꼼꼼해하던 점이 있었으니까.

사람 참 많이 변했다.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이 사람은 그보다 더 하다. 외모나 행동거지는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른이 되어서인가. 후타쿠치는 빨갛게 볼을 물들인 채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카마사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까 술집에서도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눈을 감으니 순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카마사키 씨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 주변에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곳저곳 건드렸을 게 분명한 남자였다. 눈빛부터가 틀렸다. 단순한 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욕정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구석구석 만지고, 키스하고, 욕구를 풀고 싶어 하던 게 제딴엔 숨기려 했으나 노골적으로 티가 났었다.

미즈하라 마코토라고 했지. 친구인 척 카마사키를 탐내던, 처음 봤을 때부터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하더니 역시나 기분 나쁜 남자다. 은근슬쩍 소유욕을 드러내려 하고, 유치한 도발에 눈을 부라리던 게 생각났다. 거머리 같은 자식.

그런데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인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후타쿠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히 애인은 없다고 했었지. 아니다, 여자 친구는 없다고 했었다. 그럼 남자 친구는 있다는 소리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사이가 가깝고, 스킨십도 서슴없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아까도 분명 그 남자는 어디 있냐며 칭얼대고, 항상 침대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고 했으면서 오늘 술자리에는 참석했고 심지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카마사키 씨가 게이였나? 그럼 낌새는 고등학교 때 전혀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많이 변했고, 성향이 바뀌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이런저런 정황들을 보면 그럴 지도 모른다.

그 거머리 같은 남자랑? 순간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카마사키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그 남자랑 사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아니, 사귀면 좀 괜찮은 사람을 사귀던가 하필이면 거머리 같은 남자랑. 후타쿠치는 불쾌한 속을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졌다. 후타쿠치는 마지막으로 침대 한 구석에 돌돌 말려진 이불을 카마사키에게 덮어주었다. 색색, 하고 깊이 잠든 얼굴을 보다 후타쿠치는 무의식적으로 카마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소 짧은 머리카락이 의외로 부드럽게 감겨 와서, 후타쿠치는 한동안 손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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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2)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타쿠치를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시절, 난 모든 상황을 뒤로 하고 감정을 앞세울 정도로 후타쿠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보고 싶다든가 같이 있고 싶다든가 바랐을 뿐이었다. 가벼운 감정이라 생각했기에 그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늘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 친구가 바뀌었고 그 모습을 보며 이 감정은 절대 내뱉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어찌 보면 사춘기 고교생으로서는 당연했던 것 같다. 남자를 좋아한다니, 고백하는 것 자체도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마음을 들켜서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하루라도 빨리 후타쿠치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마주치지 않으면, 졸업하면, 떠올리지 않으면 분명 얼마 안 가 감정이 퇴색되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 그 땐 그랬었지하고 가볍게 회상할 정도로 별 거 아닌 일이 되겠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감정인 줄로 알았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질질 끌고만 있을 감정인 줄 알고 있었다면, 그 때 어떻게든 했었을 텐데. 지금까지도 그 일만이 못내 후회로 남았다.

 

 

평소엔 밥을 먹는 건지 수다를 떠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입을 다문 적이 없던 마코토가 숟가락을 입에 물기만 한 채 카마사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몇 숟갈 먹지도 않았는지 거의 다 먹어가는 카마사키의 그릇에 비해 마코토의 그릇에는 아직도 음식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그런 마코토의 시선을 무시하다 카마사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마코토는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멍 때리네? 생각도 많아 보이고 너답지 않게 일에 집중도 못하고 말이야.”

별로. 평소랑 똑같은데?”

아니야. 저번에 감기 걸렸을 때부터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무슨 일 생겼어? 아니면 또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냐?”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냥 봄이라 나른해졌나 보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봄을 탄다니, 이제껏 계절을 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코토 역시 카마사키를 수상쩍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조차 요즘 무슨 이유로 기분이 싱숭생숭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다 먹었냐? 나 먼저 가버린다.”

매정하게 그러지 말고 기다려 줘라, . 너 때문에 난 목구멍에 밥도 안 들어가는데! 하여간 너는 머릿속에 일 생각밖에 없지?”

네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자식이 형님한테 말하는 것 하고는.”

지랄한다고 비웃어주니 마코토가 삐진 척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코토가 은근히 자신을 챙겨준다는 걸 알기에 카마사키는 빨리 먹으라고 야단치며 마코토를 채근했다. 그러는 사이 식당으로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들어오면서 조용했던 식당이 떠들썩해졌다. 비교적 캐주얼한 차림의 마코토와 카마사키와는 달리 셔츠와 정장 바지를 차려 입은 그들은 S-PLANT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과 이미 안면을 튼 마코토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카마사키 씨.”

아는 사람이 없어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던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착한 후배 모드를 장착한 채 다가왔다. 직장에서는 나름 성격을 죽이고 다니는지 평소보다 살가운 목소리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뭐야. 야스시 너 아는 사람도 있었어?”

고등학교 배구부 후배야. 후타쿠치 켄지.”

안녕하세요.”

. 난 미즈하라 마코토야. 야스시랑은 동기지. 이 녀석 친구는 몇 번 보긴 했어도 후배는 처음 보네? 별로 친하진 않았나봐?”

글쎄요.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후타쿠치는 마코토의 질문에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깔끔하게 말을 끊었다.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후타쿠치를 쳐다보며 마코토는 무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너 후배라는 자식, 꽤 건방지다? 피식 웃으며 빈정거리는 마코토를 보며 사람 눈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후배인 척 내숭을 떨었지만 본성을 숨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마코토는 한 눈에 후타쿠치의 성질을 눈치 챘다.

맞아. 학교 다닐 때도 성격이 저래서 선배들한테 툭하면 건방지다고 야단맞았었지.”

운동부라고 했었지? 그럼 꽤 험했겠네.”

그렇지는, 않았어. 운동부라고 다 그런 분위기는 아니니까.”

우리 학교는 꽤 심했는데. 선배한테 한 번이라도 눈에 잘못 들면 그 날 부로 부내 왕따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더라고. 은근히 주전 자리는 넘겨주지도 않고 순 잡일만 떠넘기고 그랬다고 하더라.”

, 학교마다 다른 거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마코토는 그런가보다 납득했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다테공고도 원래부터 분위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카마사키의 한 학년 위에까지는 마코토가 말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이지메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 가볍게 시비를 걸거나 핑계거리를 대가며 사소하게 괴롭히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이 3학년일 때는 그 수준이 절정에 이르렀다. 표적은 당연히 만만한 1학년, 그 중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후타쿠치였다.

그 때의 후타쿠치는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가뜩이나 철벽은 무슨 울타리도 되지 않는다며 조롱과 비아냥에 시달렸던 3학년은 누가 되었든 분노와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거고, 입부했을 때부터 특유의 말투와 가벼운 행동으로 오해받기 쉬웠던 후타쿠치가 잘못 걸렸던 것뿐이었다. 이런저런 괴롭힘에 시달렸던 후타쿠치는 몇 번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부내 싸움이 일으킬 뻔도, 퇴부하겠다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아마 카마사키를 비롯한 2학년들이 기를 써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후타쿠치는 애저녁에 배구를 그만뒀을 거다.

3학년이 졸업한 뒤에도 여전히 후타쿠치를 은근히 질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지메를 꾀하지는 못했다. 그 때 즈음엔 후타쿠치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이를 간 것도 이유였지만, 애초에 집단이 아닌 개인이 상대가 되면 그건 이지메가 아니라 그냥 싸움이었다.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그렇지 후타쿠치는 본래 끈질긴 성격이고, 그런 점에서 한 번 시비가 붙은 상대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게다가 당한 것의 곱절로 갚아주는 바람에 더 이상 후타쿠치를 건드는 사람이 없어졌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뭘.”

기분 좋아 보이잖아. 아까는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얼굴이었던 주제에.”

밥 다 먹었냐? 나 먼저 간다.”

, 진짜! 넌 대체 기다려줄 줄을 몰라! , 기다려. ! 야스시! 같이 가자고!”

예전엔 후타쿠치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한 번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각날까봐 두려웠다. 사그라졌던 마음에 다시 불씨가 타오를 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괜찮은 모양이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회사가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그런지 후타쿠치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일은 은근히 자주 있었다. 출근 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거나, 점심시간에 같은 식당에 가서 마주치거나, 아주 가끔 화장실에서 마주치거나 등등.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선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걸어왔다. 마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같은 미소는 거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섭섭하다거나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난 선후배 사이이니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것보다는물론 후타쿠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편하다고 생각했고 다행이라 여겼다. 애초에 후타쿠치와 재회하게 된 것이 달갑지도 않았고.

뭐야. 카마사키 씨 여기 살아요?”

그래서 주말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맨션 복도에서 후타쿠치가 예전처럼 말을 걸어온 게 좀처럼 현실 같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운동복을 입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카마사키의 옆집 문을 열고 있었다. 변함없이 툭툭 거리는 말투와 시큰둥한 표정과 부활동 때 질리도록 봤던 운동복 차림에 마치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네가 왜 거기 있는 거냐?

저번 주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요. 설마 우리 옆집인 거예요?”

……그런가 보네.”

회사는 맞은편에, 집은 옆집. 이거 거의 몰래 카메라 수준 아닌가.”

413, 414. 몇 년 만에 만난 후배가 옆집에 이사 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필이면 그냥 같은 맨션도 아니고 옆집이라니.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집 문과 자신의 집 문을 번갈아 보았다. 허탈하다. 걸어서 세 걸음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말문이 막힌 카마사키에게 다가간 후타쿠치는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카마사키의 집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들어가 봐도 되요?”

, . 그러든지 말든지.”

후타쿠치의 땀 냄새가 섞인 체향이 지척에서 맡아졌다. 카마사키가 숨을 멈추고 한 발자국 뒷걸음을 쳤다. 들어가라고 몸을 비켜준 걸로 알았는지 후타쿠치가 그럼, 하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버리려 했던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내려놓은 뒤, 카마사키는 멈췄던 숨을 뱉어냈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았다. 이건 마치, 그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좋지 않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집이랑 구조가 똑같네요. 여기서 산지는 얼마나 됐어요?”

. 3, 4년 되었나. 커피 마실래?”

그러든지요.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대답에 어쩌라는 거냐고 따져들 뻔했다. 회사 건물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에 그제야 후타쿠치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동시에 멀어졌다 생각했던 거리감이 순식간에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낯설었던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취직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나?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잖아요.”

그렇지. 예전에 살던 집은 너무 오래돼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더라고. 돈 모이자마자 바로 근처로 이사 온 거야.”

그래도 여긴 방음이 너무 안 좋아요. 옆집에서 뭐 하는지 다 들려서 짜증나 죽겠어요.”

그것 빼곤 살 만 하잖아. 여기, 커피.”

후타쿠치는 잔을 받아들였지만 마실 생각이 없는지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챙겨 줬더니 괜한 일을 했다. 후타쿠치가 할 일없이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어지럽게 늘여진 잡동사니들과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이불을 정리했다. 원래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집안이 더 엉망이었다.

보통 평일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빨래 말고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가 토요일 오후부터 슬슬 밀린 집안일을 하곤 하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남이 보기엔 자신을 구제할 길이 없는 게으름뱅이로 볼 게 뻔했다. 그만큼 방 안은 카오스와 같았다. 누구에게든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만 하필이면 후타쿠치한테 보이다니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나마나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예상대로 방 안을 둘러보며 기분 나쁘게 큭큭거렸다.

카마사키 씨는 많이 변했네요. 예전엔 이 정도까지 더럽게 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설마 아직까지도 혼자 방도 못 치우는 거예요?”

알아서 잘 치우거든! 이건, 그러니까, 청소는 원래 토요일 점심때부터 몰아서 치워서 그런 거라고. 나름의 계획이 있단 말이다. 그리고 평소엔 이렇게까지 더럽게 어지럽혀 있지도 않아.”

몰아서. 그럼 평일에는?”

평일은 일이 바빠. 청소할 틈이 없다고.”

무슨 말을 해도 이 상황에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정리한다고 해서 깨끗해질 상태가 아닌지라 대충 치우다 관두었다. 어차피 가장 최악의 모습을 보였고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지금 어떻게 해 봤자.

후타쿠치 근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리는데 후타쿠치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주말이라 안경을 쓰지 않아 그런지 후타쿠치의 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투명하게 빛났다. 왜인지 눈빛이 차가워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게 착각이 아니었던지 후타쿠치는 은근히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의외로 가차 없네요, 카마사키 씨는.”

?”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정이 없다고 해야 할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떻게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왔어요? 카마사키 씨 빼고는 다들 연습할 때나 시합 때 한 번쯤은 보러 왔었는데.”

…….”

심지어 그 3학년들도 몇 번 왔었다고요, 인터하이 때.”

왜 그랬냐는 듯 따지는 말에 카마사키는 마주쳤던 시선을 피해버렸다.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할 바에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던 간에, 선배로서 매정한 짓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미안하다며 단답형으로 사과하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나무라듯 쳐다보다 팩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와서 쩨쩨하게 뭐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좀 궁금하더라고요. 그렇게 부활동에 열 올리던 사람이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걸까 하고.”

…….”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 때도 지금도 크게 신경 안 쓰니까.”

미안.”

말은 그렇게 해놓고 궁금하긴 했는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사과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싶긴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게 녀석답다. 뭐든 크게 아쉬워하는 일이 없고, 사람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카마사키가 알기로 녀석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주의라 뭐든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무례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를 못 느끼는 녀석이었다.

그런 이기적인 녀석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카마사키의 모습이 신기한지 마치 여름방학 관찰 숙제를 하는 초등학생마냥 카마사키를 관찰했다. 저번에 후타쿠치와 재회했을 때, 카마사키가 녀석의 변한 부분을 찾았던 것처럼 후타쿠치도 카마사키에게서 뭐가 변했는지를 찾는 눈치였다. 새삼스러울 만하지. 이제 알고 지냈던 시간보다 연락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오래 되었으니까.

몇 년 만에 보는 거죠?”

“2013년 봄에 졸업했으니까 딱 5년 만이네.”

확실히 오랜만이긴 하네요.”

그렇지.”

카마사키 씨는,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

그래?”

근데 변해도 중간이 없이 변했네요. 예전엔 고릴라 같았는데 지금은 곰 같아요. 근육들은 다 어디 갔데요? 이제 나이도 있는데 벌써부터 관리 안하면 나중에 배 나온다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 확실히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근육 남아 있어.”

아저씨가 따로 없어요.”

너랑 나랑 고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거 알고는 있는 거냐? 그리고 이 나이에 무슨 아저씨냐.”

후타쿠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 살 어린 것 가지고 유세 떠는 꼴이 같잖았다. 하여간 사람 신경 건드리는 데 타고난 녀석이다. 카마사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남아있던 커피를 모두 원샷했다. 사실 나이가지고 아저씨라 놀린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후타쿠치에 비해 형편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 분명 졸업하고 일에 치여 사느라 운동을 안 한 지 오래되긴 했다. 반면 녀석은 꾸준히 운동을 하는지하긴 아까도 운동복 차림이었으니, 모델마냥 몸이 좋았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도 덩치도 커져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땐 내가 조금 컸었는데. 몰려오는 자괴감에 다 비운 잔을 들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후타쿠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갈게요. 앞으로 신세 좀 많이 질 테니까 미리 잘 부탁해요.”

미리 사양한다.”

성격하고는. 그럼 월요일에 봐요.”

이러니까 같은 회사 다니는 것 같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확실히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는 묘하다. ‘나중에 봐요’, ‘또 봐요와 같은 막연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 날 꼭 보자고 약속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는 그냥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지만.

왠지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괜히 귓가를 긁적였다. 슬슬 청소를 시작할까하고 방 안을 둘러보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거절할 것이지 사람 참 귀찮게 하는 자식이라니까. 카마사키는 기껏 내린 커피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싱크대에 커피를 흘려보냈다. 훅 퍼지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카마사키는 또 귓가를 긁적였다. 간질간질한 기분은 그 후로도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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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



(1)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카마사키는 자신이 또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세는 것조차 포기했을 만큼 자주 꾸게 되는 이 꿈을 요 몇 년간 이따금씩, 그러나 꾸준히 꾸고 있다. 꿈에서 자신은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3년 동안 땀을 흘렸던 고등학교 시절 체육관에 있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기억이 조작된 환상인지 모를 꿈에서 카마사키는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밤톨처럼 동그란 뒤통수라든지,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라든지 곧게 뻗은 팔다리라든지. 똑같은 남자의 몸을 뭐가 신기하다고 쳐다보는지 참 열심히도 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다. 이제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던 고등학교 후배.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멈춰 있는.

잠에 들었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카마사키는 눈을 깜빡이듯 잠에서 깨어났다. 슬슬 해가 밝아오는지 방 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팔뚝에서부터 싸하니 소름이 돋았다. 온몸을 덮치는 한기에 그제야 잠결에 또 이불을 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엔 잠버릇이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얌전하게 자지 못하게 되었다. 자유를 너무 맛본 탓이다.

간밤동안 이곳저곳 굳은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 들어 아침마다 스트레칭은 꼭 빠짐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고 오고 싶었지만 어김없이 내일로 미루었다. 역시 자신은 자유를 너무 맛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기를 써서 키웠던 근육은 방만해진 지금의 몸에서 이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 그래도 그 때의 노력이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제대로 된 운동을 안 하는 지금에도 나쁘지 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슬슬 찌뿌둥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머리가 몽롱했다. 사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신 터라 숙취로 인한 두통도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뇌가 두부가 된 것처럼 멍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목이 따끔한 걸 보니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듯 했다. 하필이면 할 일이 쌓인 날에 감기가 걸리다니 어지간히 재수 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얼굴이 빨갛다?”

파티션 위에 팔을 기대고 선 마코토가 말했다. 어젯밤 술에 진창 취했던 건 분명 나만이 아니었는데 숙취는커녕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억울했다. 감기라도 옮겨줄까 생각했는데 기침이 터져 나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당장 집에 가서 이불 덮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기야? 너 어제 또 자다가 이불 걷어찼지? 안 봐도 뻔하다, 새끼야.”

내가 걷어차고 싶어서 걷어차나.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네 자리로 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니 안 그래도 따끔했던 목이 누가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마코토는 퉁명스런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를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다시 카마사키의 책상에 찾아왔다.

마셔. 감기약도 챙겨왔으니까 먹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는 게 어떠냐?”

몸도 안 좋잖아, 하고 마코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카마사키는 말없이 마코토가 내민 감기약과 컵을 받고는 단숨에 약을 삼켰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은 목을 자극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카마사키는 고맙다고 짧게 말하고 마코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치에 마코토도 더 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제 자리에서 카마사키의 자리는 파티션에 가려져 서 있어도 카마사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코토는 자리에서 슬쩍 뒤꿈치를 들고 카마사키 쪽을 살폈다. 감기 기운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 된 주제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카마사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인 그의 동기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슬슬 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어제 술을 마시게 했던 건데 고집불통인 녀석은 기어코 감기를 달고서 출근하고야 말았다.

몇 년 동안 카마사키의 옆에서 일을 해 온 마코토의 생각에, 카마사키는 딱히 이 일이 미치게 좋아서 워커홀릭이 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일이 좋아서라기보다 일 때문에 바쁜 걸 좋아하는 듯 했다. 왜 그렇게까지 일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마코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좋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 억지로 상처를 후벼 팔 바에야 모든 게 좋아질 때까지 그 옆에서 카마사키를 지켜보고 싶었다. 둔한 카마사키는 마코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카마사키의 상태는 오전보다 더 나빠져 갔다. 임시방편으로 마코토가 줬던 약을 먹긴 했지만 처방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별 효과도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이 많은 날이라 반차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팀장에게 가 반차 신청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출근했을 때부터 반차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에 잘 갈 수 있겠냐며 물었다. 카마사키가 대답하려는 찰나 언제 온 건지 마코토가 자기가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럼, , 점심은.”

, 됐어. 너 목 아프니까 더 이상 말 하지 마. 너 보내고 바로 점심 먹으로 갈 테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카마사키가 대충 짐을 챙기는 사이 마코토는 컵에 물을 떠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아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이었다. 새삼 몽롱한 와중에도 카마사키는 이게 마코토의 세심한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여자한테 인기 있는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아파서 그런지 평소에는 안 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복도가 시끄러웠다.

맞다. 이번 달에 옆에 사무실이 들어온다고 하더니 오늘인가 보네?”

맞은편 복도에 축하 화환들이 줄지어 있었다. 회사명이, S-PLANT?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의외로 회사 규모는 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전에 맞은편 사무실에 있던 회사도 규모가 꽤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카마사키가 다니는 회사보다 2배는 클 게 분명했다.

“S-PLANT면 꽤 업계에서 알아주는 편이라던데. 몇 년 전에 세워진 회사이긴 한데 매년 급성장하는 데라고 하더라고, 친구가.”

마코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안을 훔쳐보았다. 그 쪽도 점심시간인지 눈대중으로 보아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미어캣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마코토를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없어진 걸 알면 알아서 오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물을 먹은 솜뭉치마냥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카마사키는 결국 모퉁이를 돌기 직전 벽에 기대어 섰다. 택시 잡아주겠다며 뭐하는 거냐, 망할 자식. 저것도 친구라고.

카마사키 씨?”

흐릿한 시야에 하얀 셔츠가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너무 새하얘서 카마사키는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잊어 버렸다. 시선을 조금 들어 올리니 베이지와 녹색이 적절하게 섞인 넥타이가 보였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넥타이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센스 좋네.

저기요. 카마사키 씨.”

남자가 성큼 다가와 카마사키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초점이 맞춰지며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꿨던 그거,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언제나 꿈인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에서 봤을 때와 남자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었던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잘려 있었지만 특유의 비대칭 앞머리는 여전했다. , 겨울 나뭇잎 같은 눈동자는 변함없었지만 그 눈은 투명한 안경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또.

오랜만인데 상태가 영 안 좋으시네요. 살아있긴 한 거에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제 목소리는 들려요?

시간이 지났어도 성격 참 건방지구나.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사람 열받게 하는 말투인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웠던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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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3)

 

 

 

평소와 달리 학교는 부산스러웠다. 한 곳에서는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 곳에서는 웃는 소리가 났다.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어떤 선생님도, 학생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모두가 복잡한 마음으로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졸업식이다.

교정에 활짝 핀 봄꽃을 배경으로 졸업장을 든 졸업생들이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친하고 말고를 막론하고 그냥 아는 사이면 다들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댔다. 몇몇 졸업생들은 붉어진 눈시울을 창피해하며 카메라를 피해 달아났다. 3년 전 봄에 시작되었던 그들의 고교 생활은 여전한 봄꽃과 함께 끝을 맺었다.

다 모였어? 안 온 사람 있나 확인해 봐.”

정문에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며 모니와가 말했다. 3학년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후배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겨두려던 것이다. 모니와의 말에 1학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카마사키 선배가 없어요!”

누가 전화 좀 해 봐. 자식이 어딜 쏘다니는 거야.”

사사야가 코를 킁킁대며 후배에게 눈짓했다. 교정에 내리는 꽃비로 화분 알레르기가 있는 사사야는 졸업식 전부터 기침을 참지 못했다. 일초라도 빨리 꽃무더기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전화 꺼져 있는데요, 핸드폰을 손에 쥔 후배 하나가 말했다. 졸업식 때 벨이 울릴까봐 선생님들이 핸드폰을 꺼두라고 했었는데 그 때 끈 모양이었다. 말한 선생님도 듣는 학생들이 끌 거라고 생각 안했을 텐데, 곧이곧대로 끈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착실하단 말이야. 후타쿠치는 한숨을 내쉬며 모여 있는 후배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있어 봐. 내가 가서 찾아보고 올 게.”

빨리. 나 더 이상 못 참겠다.”

사사야는 그 틈을 못 참고 기침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사람은. 체육관과 부실을 돌아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문을 잠근 사람이 자신이니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와 봤지만 역시나 카마사키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졸업한다고 감상에 젖어서 교내를 떠돌아다니는 게 틀림없다. 발걸음을 재촉해 교사 안으로 들어가 카마사키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다녔다. 죄다 허탕을 치고 마지막으로 3학년 반으로 가자 예상대로 카마사키가 빈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별로 남지 않은 교내는 멀리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와는 달리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빈 교실에 카마사키 씨는 졸업장이 든 까맣고 둥근 통을 겨드랑이에 꽂고는 한 손에 든 무언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무언가는 편지봉투였다.

뭐해요?”

우왁, , . 후타쿠치?”

난데없는 말소리에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면서 순간 졸업장이 떨어졌다. 졸업장을 줍고 후타쿠치를 향해 돌아보던 카마사키는 한 손에 든 편지봉투와 후타쿠치를 의식하고는 다급하게 손을 뒤로 숨겼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에요? 뭔데 숨기고 그래요. 더 궁금해지게.”

,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한번 봐 봐요.”

후타쿠치가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카마사키가 슬슬 뒷걸음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두, 세 걸음밖에 안 남았을 때는 기어코 졸업장을 쥐고 있는 손을 내밀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니까 더 수상하잖아. 후타쿠치는 고개를 기울여 카마사키 씨가 뒤로 숨긴 편지봉투를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카마사키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방해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후타쿠치는 체념했다는 듯이 두 팔을 올려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어요, 안 볼게요. 그보다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내려가죠? 카마사키 씨 때문에 사사야 선배 기침하다 죽을 지경이라고요.”

, 미안. 잠깐 들른다는 게.”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 나갔다. 그 뒤에서 걷던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바지 뒷주머니에 사정없이 집어넣어진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한 번,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보고 후타쿠치는 재빠르게 편지봉투를 낚아챘다. 앞에서 빠르게 걷던 카마사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뒤늦게 주머니를 더듬어 봤지만 편지봉투는 이미 후타쿠치의 손에 쥐여 있었다.

, 이 자식이! 얼른 이리 내 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뭔데요? 그런 반응 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이거 혹시 러브레터?”

닥쳐. 그만해. 내 놔.”

키는 엇비슷해도 후타쿠치가 팔다리가 유독 긴 편이었기에 아등바등하는 카마사키의 손에 편지봉투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팔꿈치로 카마사키를 이리저리 밀어대며 후타쿠치는 한 손으로 편지봉투를 앞뒤로 살폈다. 하얀 봉투는 두께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안에 편지가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손가락 끝으로 봉투를 뜯어내려는 찰나, 보다 못한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쥐고 편지봉투를 쥔 손목을 쳐냈다. 짧은 둔통과 함께 편지봉투가 손에서 빠져 나갔다.

, 진짜! 아프잖아요! 선배가 후배한테 이래도 되요?”

손목을 쥐며 투덜거리는 후타쿠치의 등을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 하는 경쾌한 소리와 윽, 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런 후타쿠치를 안중에도 안 두고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줍고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해라, . 그러게 내가 그만 하랬지.”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본거지.”

…….”

그거 카마사키 씨한테 온 거죠? , 대체 어떤 여자가 카마사키 씨한테 편지를 썼을까. 눈이 삔 거 아냐, 그 여자? 하하하, ! , 그만 때려요!”

앞서 가던 카마사키는 그대로 돌아서 불같이 화난 표정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마구 때렸다. ,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다 마지막으로 후타쿠치의 정강이를 한 대 차는 걸로 마무리했다.

오늘이 졸업이라 봐 준 줄 알아. 이제 네 얼굴 볼 일 없어져서 속이 다 시원하다!”

얼굴 볼 일이 왜 없어요. 설마 우리 인터하이 때 응원하러 안 오려고요? 안 그렇게 봤는데 사람 참 냉정하시네.”

다른 애들은 봐도 넌 안 봐!”

하하하, 카마사키의 반응에 후타쿠치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허리까지 부여잡아 가며 웃는 후타쿠치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꾹 다물며 성큼성큼 교사를 빠져 나왔다. 상대하면 할수록 후타쿠치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들 뿐이라는 걸 요 2년간 뼈저리게 깨달아왔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나오자 저 멀리 정문에서 배구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루돌프처럼 코가 새빨개진 사사야가 카마사키를 발견하고 씩씩거렸다. 임마, 카마사키! 빨리 안 뛰어 오냐! 사사야의 말에 카마사키가 뛰려는 찰나, 후타쿠치의 말이 카마사키의 발을 잡았다.

보러 오세요.”

?”

후타쿠치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의 잔상이 남아있어 언뜻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후타쿠치는 웃고 있었다. 놀라 되묻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잘난 얼굴 카마사키 씨 인생에서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요.”

졸업한다니까 이제껏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하려는 구나. 카마사키는 어이가 없어서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잠시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무게도 내용도 없는 실없는 말장난에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자식은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헛웃음을 짓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잘난 척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맘껏 잘난 얼굴 감상하라는 듯. 그런 후타쿠치를 향해 카마사키가 투덜거렸다.

다신 네 얼굴 볼 일 없을 거다.”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다. 카마사키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건 카마사키의 100% 진심이었다. 졸업식을 끝으로,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다시 볼 일 없을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는지 서운해 하는 척했다. 카라멜 색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카마사키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고교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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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