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Kaze (3)

2017. 11. 11. 04:01 from

[후타카마] Kaze (3) 


 

***

 

 

생각해보면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물론 눈치는 더럽게 없는 사람이 당사자도 모르는 걸 먼저 알아챈 건 꽤나 놀라웠지만, 워낙 오지랖이 넓은 데다 쓸데없이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여간 별거 아니었다. 고작 캔 음료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리 쉬운 사람이었던가? 우연히 들른 편의점에서 왜 하필 가장 눈에 띄는 게 이거인 거지. 후타쿠치는 못마땅한 눈으로 제 시선을 잡아챈 코코아 캔을 노려보았다. 그 날 이후로 코코아 캔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카마사키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처럼 코코아 캔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벌렁거린다는 거다. 이건 마치, 내가 이거 하나 때문에 낚인 것 같잖아. 똑같이 달릴 거 달린 남자에 자신과 맞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한테.

 


***

 

 

올해 여름은 유난히 짧은 느낌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진행 될 봄고 예선을 준비하느라 근교에서 합숙도 지냈고, 타교와의 연습경기도 줄기차게 치렀다. 방학 내내 배구 말고는 한 게 없을 정도였지만 그 동안의 연습 성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1차 예선에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2차 예선을 앞두자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조금씩 아침, 저녁마다 쌀쌀해지는 환절기가 찾아와 하나 둘씩 저지를 챙겨 입는 시기가 온 것이다. 청개구리처럼 아직도 반팔 티셔츠 차림인 사람이 한 명 있지만.

춥지도 않아요?”

별로.”

보는 사람이 더 추울 지경이었다. 후타쿠치는 저지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며 카마사키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춥다고는 하지만 정말 체질적으로 추위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마냥 허세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뻥 치시네. 그거 다 허세부리는 거잖아요. 제발 근육 자랑 좀 그만해요.”

진짜 안 춥거든?! 원래 추위를 못 느낀다고.”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다 춥다고요. 그것도 다 시각적 공해라니까요?”

누가 그래? 내가 안 춥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너 그냥 나한테 시비 걸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뭘요?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난리에요.”

그러자 카마사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껏 해온 짓들이 있는데 냉큼 오리발부터 내미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사람 신경을 살살 건드렸던 적이 얼마나 많은데 저 자식이.

넌 왜 날이 갈수록 성격이 나빠지는 것 같냐?”

저처럼 착한 후배가 어디 있다고.”

말을 말자.”

하지만 후타쿠치는 그만 둘 마음이 없었다. 라커룸을 나가는 카마사키의 뒤를 따르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아무튼 내일부터 저지 입어요. 카마사키 씨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이 체감온도가 내려가니까.”

, 싫다고. 안 춥다고.”

안 추워도 입으라고요. 2차 예선이 다음 주인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예요. 주전이면서 책임감도 없어요?”

귀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던 카마사키가 멈칫했다. 저지를 입는 것 가지고 책임감을 운운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슨 고집인지 카마사키는 쉽게 후타쿠치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내가 17년을 살면서 감기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저지 안 입어도 이 정도로 감기 같은 거 걸리지 않는다고, 짜샤.”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뭘 몇 년이나 감기 안 걸리는지 세고 있어요? 감기는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거니까 언제라도 걸릴 수 있다니까요.”

그건 비실비실한 녀석이나 그러는 거고. 난 아냐. 절대 안 걸려.”

진짜 환장하겠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제 딴에는 환절기라 감기 걸리는 사람이 늘어서 걱정해줬더니 당사자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괜한 고집만 피운다. 운동 좀 하고 근육질이면 감기에 안 걸리는 줄 아나. 후타쿠치는 결국 답답하고 짜증나서 카마사키에게 윽박질렀다.

걸리면 어쩔 건데요!”

걸리면 네가 내 형이다, 이 자식아! 저지 안 입어도 감기 안 걸린다니까 괜히 귀찮게 하고 있어!”

지금 분명히 감기 걸리면 형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예요. 젠장, 확 감기나 걸려 버려라!”

, 너 이 자식. 안 걸려! 안 걸린다고! 너나 걸려라!”

이쯤 되니 후타쿠치는 진심으로 카마사키가 감기에 걸리기를 바랐다. 한 번 걸려 봐야 된통 당하지, 아니면 걸릴 때까지 자기는 감기에 안 걸리는 줄 알고 있을 게 뻔하다. 그리고 결국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내 서로에게 감기 걸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카마사키가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후 연습을 위해 라커룸에 갔다가 마주친 모니와 선배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오늘 학교도 결석했어. 꽤 심한가봐.”

진짜 감기에 걸렸다고요?”

. 타이밍이 영 좋지 않네. 며칠 뒤면 2차 예선이니까.”

감기에 걸리라고 저주를 퍼 붇기는 했지만 정말 걸릴 줄은 몰랐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쩐지 자신이 한 말이 씨가 되어버린 묘한 상황이 돼버렸다. 꽤 심하게 걸렸다는 게 어느 정도인 거지. 학교도 결석할 정도면 많이 아픈 건가. 후타쿠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어떤지 라인을 보내볼까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우울한 얼굴로 침통해하던 모니와가 하소연했다.

하긴 지금까지 안 걸리는 게 이상했어. 지금 날씨에 만날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녔으니까. 게다가 감기 걸린 적도 없으니까 초기 증세가 있었어도 몰랐을걸.”

그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어휴, 진짜 내가 못 살아. 이따 다 같이 병문안 갈 건데 너도 갈래?”

저요?”

핸드폰을 쥔 손이 멈칫했다.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 생각은 있었어도 직접 병문안을 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다 같이 라면 모니와는 물론이고 2학년 선배들도 함께일 텐데 상상만 해도 어색하고 껄끄러울 정도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후타쿠치는 고개를 저었다.

귀찮으니까 전 패스.”

, 강요는 아니니까.”

모니와와 카마사키의 입장이 정반대였다면아픈 모니와에 병문안 가자고 카마사키가 말했더라면선배인데 걱정되지도 않냐고 한 소리 들었을 법 했겠지만, 모니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후타쿠치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하도 잔소리가 많은 사람과 붙어 다니다보니 선뜻 그러라고 말하는 모니와의 반응이 익숙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정상이지. 싫으면 싫은 대로 강요하지 않고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이런 관계가 보통의 선후배 사이이인 거다.

애초에 그 사람은 쓸데없이 간섭이 심하다. 귀찮고, 시끄럽고 짜증난다.

에이씨.

그럼 나 먼저 갈게.”

후타쿠치가 머뭇거리는 사이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모니와가 라커를 닫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에 후타쿠치가 말했다.

그냥 저도 갈게요.”

, 너 옷 다 안 갈아입었잖아.”

?”

무슨 소린가 하고 후타쿠치가 돌아보니 모니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 연습복으로 다 갈아입지 못한 후타쿠치를 손짓했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자신이 한 말이 헷갈리게 들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

, 병문안이요. 카마사키 씨의.”

아아, 난 또 같이 나가자는 줄 알았지. 그럼 연습 끝나고 다 같이 가자.”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모니와는 재차 먼저 가겠다고 말한 뒤 라커룸을 나갔다. 괜히 가겠다고 말했나. 라커룸에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고작 감기 걸렸다고 병문안까지 가는 건 조금 오바가 아닐까. 아니, 후배니까 선배 병문안쯤이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니까.

…….”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오바인 거다. 병문안 가는 게 뭐라고 이랬다저랬다 생각이 끊이지 않는지, 걱정되고 안절부절 못하겠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 마저 옷을 갈아입으며 후타쿠치는 재차 다짐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카마사키와 관련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평소라면, 혹은 상대가 카마사키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절대로 말과 행동에 망설임이 깃들 일이 없는데 말이다.

자신이 왜 그러는 지 알고 있다. 설마, 하고 부정해 봐도 결국 카마사키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었다는 거 말고는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언젠가 카마사키가 코코아 캔을 남몰래 전해줬을 때부터 끌린 거다. 조금씩, 서서히, 계속.

 

오후 연습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다. 2차 예선을 코앞에 두고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자신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수투성이였다. 평소에 잘 하던 리시브는 번번이 빗나가길 일수였고 블로킹은 움직임이 한 템포 느린 탓에 제대로 막은 공격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체육관에 남아 나머지 연습을 자처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도 못한다.

아주 제대로 되는 일이 없네. 수직 상승하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라커를 정리하던 후타쿠치에게 모니와가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후타쿠치, 아까 병문안 간다고 했지?”

……. , .”

근데 미안! 먼저 같이 가자고 해놓고서 다들 못 가게 되었어.”

?”

황당해하는 후타쿠치에게 모니와가 설명했다. 2학년 전공 기초과목이 내일인데 중간고사 때 점수가 반영되는 실습의 중간 점검테스트가 있다는 걸 다들 까먹었었다는 거다. 모니와가 재차 사과하며 후타쿠치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혼자서라도 가줄 수 있어? 좀 그러면 1학년들 더 데리고 같이 가든지.”

아무도 안 갈 거 같은데요.”

후타쿠치가 라커룸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남은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 중에 카마사키의 병문안에 가겠다고 선뜻 말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서 다들 지친데다 선배 병문안이라니 귀찮고 어색할 테니까. 후타쿠치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던 모니와는 그제야 납득하고 아쉬운 낯을 했다.

카맛치 저녁까지 집에 혼자라고 그러던데. 걔네 집 맞벌이인데다 외동이거든.”

외동이에요?”

전혀 아닐 것 같은데. 하는 말과 행동으로 봐서는 맏이에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꽤 놀라웠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모니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안 그래 보이지? 아무튼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은데, 나 사실 지금부터 준비해도 아슬아슬하거든. 부탁인데 너가 잠깐이라도 카맛치네 들러주라.”

부탁이야, 하고 모니와가 말했다.

혼자 병문안 가라니 그건 좀, 하고 후타쿠치가 망설이자 모니와가 쐐기를 놓았다.

아까 가겠다고 했잖아, 그치?”

아니 그야 그랬는데.”

그래도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요. 그러나 모니와는 이어지는 후타쿠치의 말은 무시하고 멋대로 후타쿠치의 손에 가지런히 접은 종이를 쥐어주었다.

이거 카맛치네 가는 길 약도로 그린 거거든? 가는 길에 편의점 있으니까 좀 챙겨서 가주라. 돈은 나중에 줄게.”

, 아니, 아직 간다고 안했.”

나 진짜 위험해서, 먼저 갈게. 부탁해, 후타쿠치!”

모니, 모니와 선배!”

어찌나 급했는지 후타쿠치가 잡을 새도 없이 모니와가 쏜살같이 라커룸을 뛰쳐나갔다. 뒤늦게 후타쿠치가 쫓아갔지만 부르는 소리에도 모니와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러는 게 어딨냐고. 후타쿠치는 하얀 종이를 쥔 채 그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버스를 타고 15, 걸어서 5. 후타쿠치는 낯선 정류장에서 내려 모니와가 그려준 약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편의점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오른쪽에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병문안이니만큼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후타쿠치는 편의점에 들러 따듯한 음료와 푸딩,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아이스크림까지 산 뒤 카마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모니와 선배가 말해두었을까. 과연 혼자 병문안 온 자신을 카마사키가 어떻게 맞을지 궁금해졌다. 엄청 어색할 것 같았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단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인데다 애초에 배구 말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10분은 있다 갈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카마사키라고 적힌 문패가 보였다. 그 앞에 서서 후타쿠치는 괜히 한번 어깨를 털고 초인종을 눌렀다. 발랄한 벨소리가 울렸지만 당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사뭇 긴장한 얼굴로 앞이 아닌 구석에 시선을 두고 딴청을 부렸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목이 다 말랐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미안, 자고 있어서.”

잔뜩 가라앉고 거칠어진 목소리에 후타쿠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삐쳐있는 모습을 한 카마사키가 보였다. 카마사키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마중을 나오는 사이에도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후타쿠치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허락 없이 대문을 열고 카마사키에게 달려 나갔다.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요.”

, 어어. 콜록, 미안.”

힘없이 비척거리는 걷는 모습에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등을 손으로 받쳤다. 집으로 들어가 방까지 가는 도중에도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이라 어지간히 아프지 않는 이상은 결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감기에 꽤 심하게 걸렸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거의 독감 수준이었다. 평소와 달리 축 쳐진 모습에 후타쿠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났다.

어떻게 너 혼자 왔냐, 콜록. 모니와는?”

선배들은 내일 실습 중간 점검인가 뭔가 있다고 못 온다고 했어요. 그보다 얼른 침대에 눕기나 해요.”

그 말에 침대에 누우려던 카마사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후타쿠치를 돌아보는데, 그 모습이 꼭 관절이 어긋난 인형 같이 뻣뻣했다.

. 나 아직 다 못했는, 쿨럭, .”

어떡하지, 하고 카마사키가 패닉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아파서 골골대는 주제에 성적은 신경 쓰이나 보지. 후타쿠치는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굳은 카마사키를 억지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지금 그게 문제에요? 아파서 결석했으면 당연히 조정해주겠죠. 그보다 밥은 챙겨먹었어요? 약은?”

, 그런가. 그래야 되는데. 콜록.”

약은요?”

? 아침에.”

그럼 점심은요.”

……?”

흐리멍텅한 얼굴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동자에 후타쿠치는 한숨을 터뜨렸다. 평소엔 귀찮다 싶을 정도로 남에게 참견하길 좋아하더니 제 몸 간수 하나 못하고 아주 잘 하는 짓이다. 후타쿠치는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들을 챙겨 들었다.

주방 빌릴게요.”

설마하니 여기 와서 병수발을 들게 될 줄이야. 후타쿠치는 여전히 몽롱한 얼굴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카마사키에게 턱 끝까지 이불을 여며준 뒤 방을 나왔다.

혹시라도 죽을 만들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카마사키의 어머니가 챙겨놓았을 죽을 대충 데우고 후타쿠치는 냉장고에서 같이 곁들일 간단한 반찬들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식탁에 놓여 있는 카마사키의 약과 물 한 잔을 트레이에 놓은 뒤, 카마사키의 방으로 향했다.

후타쿠치가 트레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일없이 천장만 바라보던 카마사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서 죽 먹어요. 대체 오후 내내 밥도 안 먹고 뭘 한 거예요.”

콜록. 그냥 계속 잤지. 암튼 미안.”

농담을 할 기력은 있나보다 했더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 모습 또한 영 힘없이 축 늘어진 채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무릎에 트레이를 놓으려다 그대로 손을 물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열 띤 숨소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트레이를 제 무릎에 놓았다. 그에 카마사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꽂혔다.

뭐해. 이리 줘.”

…….”

, 후타쿠치. 이리 달라니까.”

뭐 하자는 거야. 여기까지 챙겨와 놓고 직접 가져가라는 건가. 열에 들뜬 머리로 생각이 그리로 미치자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났다.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배고파서 몇 번이고 깬 것도 사실이었다. 배고프지만 몸을 움직일 힘이 도저히 나지 않아 억지로 허기를 참았던 건데 막상 음식이 앞에 보이니 식욕이 불같이 솟아났다. 카마사키가 신경질을 부리며 이불을 걷자 그제야 후타쿠치가 입을 열었다.

됐어요. 숟가락 들 힘도 없으면서.”

그리고는 후타쿠치가 죽을 한 숟가락 뜨더니 그대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따듯하게 데워 뽀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 , 빨리 먹어요. 팔 떨어지겠네.”

, 어어.”

잠시 머뭇거리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내밀어 죽을 받아먹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쪽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주제에, 죽 그릇에만 죽어라고 시선을 두다 오물거리는 소리가 멈추면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떴다.

, 내가 먹을게.”

됐어요.”

당사자가 스스로 먹겠다는데도 고집불통이다. 이게 뭐야. 열이 오른 머리가 한층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색하고 민망하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카마사키는 숟가락을 받아먹을 때마다, 죽 그릇에 코를 박을 것 마냥 고개를 숙인 후타쿠치에게서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했다. 지도 창피한 짓을 하는 줄은 아나 보지. 후타쿠치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후타쿠치는 죽 그릇을 비우자마자 물 잔과 감기약을 챙겨 먹으라는 소리를 하고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되자 카마사키는 꾹 참았던 민망함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으아아아악!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동네방네 소문나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당장이라도 아까 전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카마사키는 도저히 후타쿠치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감기약을 허겁지겁 먹은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카마사키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불을 키지 않은 방에 어둠이 그리워져 있었다. 잠시 허공을 향해 가만히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카마사키는 이불 안이 땀으로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약을 너무 늦게 챙겨먹은 탓인지 좀처럼 열이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땀에 젖은 옷을 의식하기 시작하니 찝찝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순간 어둑한 방 안에 검은 인영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했더니 후타쿠치였다. 화들짝 놀란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향해 소리쳤다.

, 너 아직도 안 갔!”

이제 가려고 했어요. 설거지하고 방금 들어왔다고요.”

, 그랬냐? 미안. 아무튼 늦었으니까 얼른 가라.”

그러나 금방 간다고 말한 주제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마사키는 이불을 끌어올려 제 상체에 덮었다.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이 녀석 앞에서 더 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뭐해? 빨리 가, 감기 옮으니까.”

마스크 썼잖아요.”

어쨌든. 벌써 어, 6시가 넘었잖아.”

병문안 온 사람을 왜 못 쫒아내서 안달이에요? 어차피 부모님도 늦게 들어오신다면서요.”

그게 아니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하는 말이지.”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보다 옷 안 갈아입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물쩍거리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땀 냄새가 그렇게 심했나, 하고 카마사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운동부니까 허구한 날 맡는 게 다른 사람의 땀 냄새라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새삼 민망해하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땀 냄새 안 나요. 옷 갈아입으려고 일어나려고 했던 거잖아요. 전 신경 쓰지 말고 갈아입어요.”

그냥 가는 게 어떠냐.”

지금 내외해요? 카마사키 씨 알몸 봐도 아무 느낌도 없거든요.”

그런 문제가 아니, , 됐다. 말을 말아야지.”

결국 카마사키가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후타쿠치를 등지고 카마사키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녀석 말마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팬티 바람이 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신경 쓰는 게 이상했다. 젠장, 근데 자꾸 옷이 낑기고 팔에 걸렸다.

알몸을 봐도 아무 느낌도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후타쿠치는 침대에 턱까지 괴고 카마사키의 알몸을 감상했다. 카마사키는 배구부 내에서 가장 근육 트레이닝에 관심이 많은 걸로 소문났다. 틈만 나면 상체 근육을 키우겠다며 관련 서적을 읽는다고 했다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가, 유난히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등의 근육이 카마사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거기다 더해 어두운 방 안에서도 땀 때문에 피부가 유난히 반질거려 보였다.

어지간하다고 후타쿠치는 생각했다. 어지간한 콩깍지가 낀 게 아니고서야 같은 남자의 몸을 보고 이리 야한 기분이 들 리가 없다. 후타쿠치는 괜한 갈증을 느끼고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는 카마사키가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우.”

카마사키가 벅찬 숨을 내쉬며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옷 하나 갈아입는 데도 힘이 달렸다. 수십 개의 납이 달린 것처럼 온 몸이 무거웠다. 그런 카마사키를 힐끗 보던 후타쿠치가 물었다.

아파요?”

그걸 말이라고. 카마사키는 대답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집에 가거나 말거나, 멋대로 하라지.

많이 아파요?”

침대 한 편이 기울어졌다. 후타쿠치가 기어코 침대 위로 제 상체를 들이민 것이다. 카마사키가 고개만 돌려 후타쿠치를 돌아본 뒤 짜증스럽게 말했다.

보면 몰라?”

감기는 비실비실한 녀석들이나 걸리는 거라고 누가 그랬더라.”

…….”

이게 목적이었군. 카마사키는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다른 애들 다 냅두고 왜 혼자 왔나 했더니 잔소리를 하려고 온 거였다. 확실히 2차 예선을 앞두고 주전 멤버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긴 하지만 기왕 꾸중을 들을 거라면 차라리 감독이나 코치님께 듣는 게 나았다.

그러니까 제가 분명히 말했죠? 저지 꼭꼭 챙겨 입으라고.”

…….”

뭐라 그랬더라. 감기 걸리면 형이라고 부른다고 그러지 않았나?”

, 콜록, 아프다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꼭 해야겠냐?”

못 할 건 또 뭐 있어요.”

…….”

그래. 못 할 거 없지. 젠장.

당장이라도 형이라고 부르라고 할 줄 알았더니 후타쿠치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덕분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가끔씩 카마사키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거나,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후타쿠치의 팔꿈치가 닿아있는 제 등에서부터 온기가 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하고 따듯하니 열기 오른 머릿속이 점차 멍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어떻게 눈치 챘는지 후타쿠치가 한층 목소리를 낮춘 채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많이 아파요?”

…….”

배고프면 차가운 거 먹을래요? 올 때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왔는데.”

……됐어.”

목마르지 않아요?”

…….”

열이 오른다. 카마사키는 얼굴 전체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감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말과 행동이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지만 오늘따라 후타쿠치의 목소리라든지, 은연중에 마주쳤던 시선 같은 게 이상했다. 낯설고 어색했다. 아프다고 신경 써주는 건가. 그게 아닌 다른 이유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시선이 이리 낯간지러울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냐고.

. , 오늘 되게 잘해주네. 뭐 잘못 먹었냐?”

등에 닿은 팔꿈치가 움찔하고 떨리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기에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카마사키는 괜스레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평소엔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그러지. 이제 와서 내숭 떨지 말고 평소처럼 해.”

왜요? 잘해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카마사키 씨, 저 건방지고 예의 없다고 구박했잖아요.”

……넌 아냐.”

…….”

네가 그러니까 이상해.”

…….

후타쿠치가 상체에 힘을 싣고 카마사키의 등에 기대왔다. 그에 따라 옆으로 돌아누웠던 자세가 무너졌다. 바싹 눌려 침대에 바싹 엎드려진 모양세가 되자 카마사키가 신경질을 부리며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를 비웃듯이 후타쿠치가 그 위에 덮치듯 올라타서는 말했다.

잘해주는 데 이유가 뭐겠어요?”

?”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내가 왜, 하고 카마사키가 무조건 반박했다. “비켜, 이 새끼야.”하고 짜증을 내자 후타쿠치가 선심 쓰듯 몸을 물렸고, 잔뜩 지친 카마사키는 이불로 제 몸을 꽁꽁 감싸고 눈을 꾹 감았다. 너 같이 변덕쟁이에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의 의중을 내가 어떻게 알아? 카마사키는 그 뒤로 후타쿠치가 말을 걸어도 잠든 척하고 무시했다. 이제 가라, . .

자요?”

…….”

카마사키 씨. 자요?”

…….”

자는구나.”

정말로 잠이 드는 도중이었다. 몇 번이고 자는지 확인하는 후타쿠치의 낯간지러운 목소리는 먹먹한 귓가에 맴돌기만 했고, 카마사키는 이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앗다. 잠에 빠질 뻔했다.

잘자요.”

단단하고 서늘한 손가락이 카마사키의 이마 주변을 정리하듯 한 번 훑고 지나갔고, 이윽고 부드러운 감촉이 마른 입술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잠에 빠지려던 의식이 확,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이를 후타쿠치가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를 일이다. 카마사키는 그저 떨리는 입술을 즈려물고 한참을 눈을 뜨지 않았다. 갑작스런 긴장에 볼가가 뻣뻣하게 굳어 아리기까지 했지만 카마사키는 눈을 뜨지 못했다.

잘해주는데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잘자요.’

한참을 굳어있던 카마사키는 그제야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흐읍, 하고 벅찬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동시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꿈이었나.

그러기엔 차가웠던 손끝이 스쳐지나가던, 입술이 닿았던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꿈이 아니라면 뭐지.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순간, 어쩐지 카마사키는 코끝에 바람이 스쳐지나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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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Kaze (2)

2017. 11. 3. 02:01 from

[후타카마] Kaze (2)



***

 

, 똑바로 안 하냐! 연습이라고 대충 때울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아주 자알 하고 있거든요.”

거짓말 마, 임마! 대충 하는 거 다 봤거든?! 연습할 때도 항상 전력을 다해서, , 팍팍 힘을 내란 말이야. 모든 공격을 막아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

코트 밖에서 연습을 지켜보던 카마사키가 기어코 후타쿠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팔을 휘두르며 이렇게 하라고.”하며 후타쿠치에게 블로킹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를 보던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기요, 카마사키 씨.”

, 임마.”

만날 열 내고 다니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요? 너무 많이 먹어서 힘이 막 넘쳐서 그래요?”

이 자식이!”

카마사키가 양 팔의 소매를 걷는 시늉을 하고이미 걷혀 있었다후타쿠치에게 달려들었다. 이쪽저쪽에서 날아오는 손을 잽싸게 피한 후타쿠치는 오히려 여유를 부리며 카마사키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에 잔뜩 약이 오른 카마사키가 씩씩거리며 발차기까지 했지만 후타쿠치가 맞을 일은 없었다.

아오, 진짜. 아주 선배가 물로 보이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 완전 모함 쩌시네.”

너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성격은 못 고쳐도 말투는 좀 고치라고!”

제 말투가 뭐가 어때서요? 카마사키 씨 말고는 아무도 그런 말 안 하거든요.”

뿔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던 카마사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입부했을 때부터 후타쿠치에게 몇 차례나 지적했지만 변할 기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초반에 비하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선후배를 막론하고 건방지기 그지없는 말투다. 당연히 선배들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는데, 문제는 후타쿠치가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지 잘났다고, 카마사키가 비아냥거렸다.

됐다, 됐어. 똥이 더러워서 피하냐, 무서워서 피하지.”

그 반대 아닌가?”

, 시발.”

후타쿠치의 지적에 카마사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창피함에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지나치고 자리를 뜨려하자 후타쿠치가 그를 놓치지 않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국어 공부 좀 하셔야겠는데요, 카마사키 씨. , 방금 거 농담인가요? 아무렴 고등학교 2학년인데 그런 쉬운 속담을 잘못 말한 건 아니겠죠, 그쵸?”

닥쳐, 그냥.”

설마 수업 시간에 졸았어요? 뭐든지 전력을 다해서! 팍팍, 힘을 내라면서요?”

, 진짜 제발.”

저기요, 카마사키 씨. 왜 대답이 없어요?”

뒤에서 보니 카마사키의 귀가 터질 듯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면 진짜 웃길 텐데 자기가 생각해도 엄청나게 창피한지 카마사키는 거의 경보 수준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어서 따라가는 게 벅찰 지경이었다. 게다가 계속 놀려댔더니 이젠 대답도 안 한다. 후타쿠치는 광대가 아파올 정도로 큭큭거리다 퍽 불쌍하다 싶어서 카마사키가 도망가게 내버려두었다.

카마사키 야스시는 정말 놀리기 좋은 사람이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하는 게 놀리는 재미가 있다. 보기와 달리 남을 챙기는 스타일인지 일일이 참견하길 좋아해서 부에서 겉도는 자신을 가만 내버려두지 못하는 듯하다. 매번 말발에 밀려 열 받아 하는 주제에 어김없이 말을 걸어오고 참견한다. 잔소리만 많아서 귀찮고, 뭐만 하면 쓸데없이 소리를 질러대서 시끄럽고, 괜한 참견만 하고, 가끔은 도가 지나쳐서 짜증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다. 선배랍시고 설치는 것들은 싫지만 이런 선배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이 신경 써주는 것일 테고, 건방지고 툭 하면 열 받게 만드는 자신을 질색하겠지만. 어쨌든 간에 나쁘지 않다.

 

 

***

 

 

인터하이가 끝나자 3학년이 은퇴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고 예선을 대비하여 코치는 새로 주전을 뽑은 뒤, 개인의 역량은 물론이고 동시에 팀워크도 함께 다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연습 시합을 잡았다. 3학년이 은퇴한 날부터 주말마다 연습 시합이 치러졌고, 1학년 때부터 주전 감으로 지목되었지만 실전 경험은 많지 않았던 후타쿠치를 비롯한 주전 1학년 멤버들은 계속된 연습 시합에 갈수록 녹초가 되어갔다.

아무리 팀워크를 다진다고 해도 매 주말마다 연습 경기를 잡는 건 아니지 않나, 철벽 방어가 최대 장점인 만큼 자체적인 블로킹 연습이 우선돼야 하는 거 아니냐, 주전이라곤 해도 아직 입부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등등 후타쿠치를 비롯한 1학년 주전 멤버들은 연습 경기가 끝날 때마다 라커룸에서 불평을 부렸다. 그 와중에 얼떨결에 동기들과 살짝 친해지긴 했지만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 생각이 될 정도로 1학년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주전으로 뽑힌 1학년은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답시고 선배 멤버들보다 경기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일 연습이 널널한 것도 아니었다. 주말에 개인 연습을 못하는 만큼 아침과 오후 연습에 서브, 블로킹, 스파이크 연습을 몰아서 해야 하기에 어떻게 보면 연습 경기를 치루는 것보다 고되었다. 물론 배구가 하고 싶다는 마음에 배구부에 입부했고, 이왕이면 전국대회에 가고 싶기 때문에 연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몸이 힘들었다. 여기저기 근육통이 생긴 건 물론이고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니면 소리를 질러대서 그런지 유난히 목이 칼칼하기도 했다.

 

, 목말라.”

매니저가 만들어 놓은 음료수를 단번에 들이켜도 칼칼함이 가시지 않았다. 목구멍에 모래가 걸린 것처럼 영 신경이 쓰여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보았지만 여전했다. 오히려 더 심해져 따끔함까지 느껴졌다. 아침이라 그런가. 후타쿠치가 음료수를 내려놓고 목가를 만지는데 그 옆으로 카마사키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누구한테 무슨 어필을 하려는 건지 양 소매가 어깨까지 돌돌 말린 웃긴 모습이었다.

뭐 하냐? 목 디스크라도 걸렸어?”

아니요.”

근데 목은 왜 만져.”

그냥.”

뭐야. 평소엔 주절주절 말만 잘 하더니 오늘은 영 말이 없냐?”

말할수록 목이 따끔거리는 게 심해질 것 같아 대답을 짧게 한 거지만 일부러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면 괜히 시끄럽게 굴 것 같기도 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질문을 무시하고 두 번째 음료수를 집었다. 그에 카마사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가 입 다무니까 온 세상이 평화로워진 기분인데?”

…….”

능글맞게 웃는 모습에 벨이 꼴려 순간 평소처럼 한마디 하려다 후타쿠치는 가만 입을 다물었다. 그냥 음료수를 마신 것뿐인데 목이 칼칼했다. 후타쿠치가 제 말에 반응하다 말고 목가를 계속 어루만지기만 하자 카마사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냐, 진짜. 어디 아파?”

하나도 안 아픈데요.”

근데 왜 목을 자꾸 만져대.”

…….”

카마사키는 마시던 음료수도 내려놓고 후타쿠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 진짜 또 귀찮게 하네. 후타쿠치는 가뜩이나 고된 연습으로 피곤하고 지쳐 있는데다 목 상태도 안 좋아졌는데 카마사키가 참견하자 짜증이 솟구쳤다. 카마사키가 의심쩍은 눈빛으로 한 발 다가오려고 하자 후타쿠치는 홧김에 팍 그 가슴팍을 밀어버렸다. 그 반동으로 카마사키가 두 세 걸음 뒤로 밀려났다. 순간 도를 넘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후타쿠치는 미안함보다 짜증이 앞서 당황해하는 카마사키를 스쳐 지나갔다.

, .”

신경 끄라고요, 진짜.”

…….”

연습 중인 코트로 돌아가며 후타쿠치는 짜증을 내며 방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저 사람은 그러게 왜 괜한 참견을 해서 사람 신경을 건드리고 난리냐고. 딱 봐도 말 섞기 싫어하는 걸 눈치도 못 채나? 바보 아니냐고.

아으으윽. 진짜아, 시발.”

잔뜩 당황해서 굳었던 얼굴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후타쿠치는 제 앞머리를 사정없이 흐트러뜨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카마사키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왜지? 왜 아직도 저기 있는 거지? 혹시 화났나. 그래, 질렸겠지. 질리고도 남지. 확실히 아무리 만만히 봐도 선배인데 한 살 어린 후배한테 퍽하고 떠밀린 데다 신경 끄라고 짜증까지 냈으니 나라도 질렸겠다, 젠장. 아아, 시발.

후우. 후타쿠치의 한숨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생긴 트러블에 그 날 오후 내내 후타쿠치의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목 상태는 여전히 나빴고, 햇빛이 쨍쨍할 정도로 더운 날씨인데 몇 번씩 한기를 느꼈다. 식욕도 없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절반을 남겼다. 한 마디로 완전히 거지같은 하루였다. 그리고 문제는 오후 연습이 남았다는 거다.

라커룸에서 연습복으로 갈아입는 내내 후타쿠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스스로가 이렇게 약골이었나, 회의감이 들 정도로 온몸이 뻐근하고 무기력하고 힘이 들었다. 곰곰이 원인이 뭔가 생각해봐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일이 없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말 체력이 부족해서 이러나. 후타쿠치는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력적인 문제로 빌빌대는 거라면 오기를 내서라도 체력을 기르고 말겠다고, 젠장.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것과는 달리 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 진짜 왜 이러냐고. 후타쿠치가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잠시 멈춰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매니저가 후타쿠치를 불렀다.

마침 잘 만났다. 전해줄 게 있었는데.”

뭔데.”

이거 받아. 따듯한 거니까 지금 마시고.”

매니저가 건넨 건 따듯한 코코아 캔이었다. 여름이라 따듯한 음료를 일부러 뽑았을 리는 없고. 벌칙 게임으로 산 걸 떠넘기는 건가 싶어 후타쿠치가 인상을 찌푸리자 매니저가 말했다.

그거 일부러 산거니까 남기지 말고 쭉 마셔. 그리고 이거, 오늘 체육관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었다고 하더라. 저지 챙겨왔으니까 입어.”

어어. ?”

오늘 연습은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후타쿠치의 손에 긴팔 저지까지 건네준 뒤 매니저는 먼저 간다며 후타쿠치를 앞질러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니저가 따듯한 캔 음료에 저지까지 챙겨준 이유를 몰라 후타쿠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멀뚱히 서 있었다. 쟤가 날 좋아하나? 아닌데, 듣기로 매니저는 따로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는데.

뭐지.”

나중에 물어보든가 해야지. 후타쿠치는 저지를 껴입으며 캔 뚜껑을 땄다. 마침 피곤하니 달달한 걸 마시면 좀 좋아질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달달한 데다 따듯한 코코아가 들어가자 조금이나마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유였던 간에 나중에 고맙다고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후타쿠치는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하필이면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카마사키와 마주쳤다. 카마사키는 저와 마주치자 걸음을 뚝 멈추는 후타쿠치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별 말없이 지나쳤다. 내심 아침에 있었던 일로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할 것이라 짐작했던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자신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건 말을 섞기도 싫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건가.

매번 틱틱거리고 잔소리만 하는 선배라고 짜증을 냈어도 부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었던 사람이었다. 그게 의무적이었든 저 사람의 성격 때문이었든 카마사키 덕분에 별다른 트러블 없이 배구부에 적응할 수 있었기에 후타쿠치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아쉽고 울적하기도 했다.

 

오후 연습이 시작되고 멤버들이 다 모인 뒤에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쩌다 스트레칭을 같이 하는 파트너가 됐음에도 무표정으로 제 할 일만 하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색함에 먼저 말을 걸어볼까 생각이 들어도 이제껏 본 적도 없는 무표정을 한 카마사키의 얼굴과 냉랭한 태도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스트레칭이 다 끝나갈 때 즈음 후타쿠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아침에는.”

…….”

…….”

카마사키는 묵묵부답에 후타쿠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에 당황한 후타쿠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스트레칭이 끝났다는 코치의 휘슬이 울렸다. 카마사키는 여전히 후타쿠치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일어나 자리를 떴다. 카마사키가 2학년들이 있는 무리로 돌아갈 때까지 후타쿠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입술을 다물었다.

상황이 어쨌든 연습은 해야 했다. 후타쿠치는 일어나 서브 연습을 하는 코트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솔직히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기운이 빠질 대로 빠져서 처음으로 연습을 하는 것이 싫을 정도였다. 오늘은 적당히 하는 척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후타쿠치는 코트에 들어가지 않고 그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런 후타쿠치를 발견한 매니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습 안 해?”

하는데. 지금 줄이 길어서 기다리는 중이잖아.”

그럼 가서 줄을 서야지 주위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면 어떡해.”

어떻게든 되겠지.”

시큰둥한 대답에 매니저가 이미 속셈을 눈치 챘다는 눈빛으로 후타쿠치를 흘겨보았다. 후타쿠치는 괜히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 마침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아까 그거 왜 준거냐? 나한테 관심 있었어?”

미쳤니? 나 남자 친구 있거든.”

그러니까 안하던 짓을 하니까 묻는 거잖아. 벌칙 게임이냐?”

그러자 매니저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코코아 학교 자판기엔 없는 거거든. 벌칙 게임으로 일부러 그거 사러 밖에까지 나갔다 왔겠어, 준비하느라 시간도 없는데?”

그럼 뭐야.”

너 감기 걸린 것 같다고 카마사키 선배가 나한테 부탁하더라. 저지 챙겨주라고 말한 사람도 카마사키 선배라고. 나중에 따로 감사 인사나 해.”

?”

근데 너 감기 걸린 거 맞아? 겉으로 보기엔 영 멀쩡해 보이는데 선배 헛물 켠 거 아닌지 몰라. 하여간 너 같은 애가 뭐가 예쁘다고 매번 챙겨주는지 난 참 모르겠다.”

매니저는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가? 후타쿠치가 자세히 캐물으려던 동시에 3학년 매니저 선배의 부름에 매니저가 후타쿠치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 잠깐. 그거 진짜야?!”

그 뒤에서 후타쿠치가 외쳤다. 평소와 달리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매니저가 뒤를 돌아 똑같이 외쳤다.

진짜지 그럼 뻥이겠냐!”

거짓말.

후타쿠치는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찾았다. 체육관의 끄트머리에 서서 2학년들과 리시브 동작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는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안 했으면서 치사하게 이러는 게 어딨냐고. 어쩐지 분하고 가슴이 울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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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Kaze (1)

2017. 10. 25. 01:44 from

[후타카마] Kaze (1)

 

-바람과 감기

 

 

뭐야, 이거. 누구 거냐.

카마사키는 하얀 가방의 뒷면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의 주인을 알아냈다. 아무래도 어제 새로 들어왔다는 1학년인 것 같다. 늦더라도 어제 왔었어야 했나? 하필이면 신입생들이 입부하는 날 집에 일이 생겨서 참석하지 못했더니 누가 들어왔는지 일일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름 한 번 되게 특이하네. 카마사키는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글자를 읽었다.

니로(ニロ)?”

설마 사람 이름이 니로겠어요?”

어느새 사람이 들어왔는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녀석은 카마사키가 들고 있던 가방을 낚아채 제 어깨에 멨다. 본인인가 보지. 분명 이름이 정말 니로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놀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미안하긴 한데, 그보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면 아닌 거지 말투가 여간 날선 게 아니었다.

, 그러냐. 일학년인가 보지?”

.”

그럼이름이 후타쿠치(二口)인 거고?”

.”

…….”

말을 걸어도 사람 얼굴을 보는 법이 없다. 물론 후타쿠치의 라커가 카마사키의 맞은편이라 옷을 갈아입기 위해선 등을 질 수밖에 없지만 1학년인 주제에 행동이며 말투며 건방지기 짝이 없다. 괜히 말을 더 걸었다간 제 기분만 상할 것 같아 카마사키는 라커룸을 열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첫인상 한 번 최악이네.

후타쿠치보다 늦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일 년 선배라고 먼저 연습복을 입은 카마사키는 라커를 잠그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말없이 부실을 나가려고 했으나,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하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말하기로 한 것이다.

헷갈리기 쉬우니까 가방에 이름 전체를 적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처음 보면 누구든지 니로라고 읽지 않겠냐고. 어쨌든 쓸데없는 오지랖이긴 하지만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그리고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에 티셔츠에 손을 꾀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제야 카마사키 쪽을 돌아보았다. 내내 옆모습이나 뒷모습만 보였다 처음 본 녀석의 얼굴은, 아몬드 모양의 갈색 눈이 퍽 예뻐서 인상 깊었지만 눈빛은 전혀 딴판이었다. 후타쿠치는 헛웃음을 지으며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이제껏 아무도 안 헷갈렸는데요.”

…….”

젠장, 말하지 말걸. 자식이 어린데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카마사키는 한 살 어린 후배에게 비웃음당한 것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져선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도 한참을 씩씩거리며 부실 앞을 떠나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보고 마침 도착한 모니와가 깜짝 놀라 물었다.

, 부실 안에 뭐 있어? 왜 그래, 카맛치?”

아무 것도 아냐!”

, 뭔데 그래?!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걸!”

됐어! 나 먼저 간다, 모니와!”

완전 최악, 최악, 최악! 들어와도 뭐 저딴 녀석이 들어왔어?!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저 녀석이랑 말을 섞나 봐라!

 

녀석, 후타쿠치 켄지라는 1학년은 비단 자신에게만 건방지게 굴었던 게 아니었던지 입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학년과 3학년들의 눈 밖에 난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때 이후로 후타쿠치를 대놓고 무시하고 다니느라 관심을 껐던 카마사키는 그 날로부터 몇 주가 지났을 때야 후타쿠치와 2, 3학년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신경전을 발견했다. 후타쿠치는 중학교 때부터 배구를 해온 만큼 실력은 1학년들 중에 손꼽힐 정도로 좋았지만 워낙 선배 보기를 물같이 하는 녀석인지라 팀워크가 형편없었다. 후타쿠치가 코트에 들어서면 아무도 공을 올려주려 하지 않아 녀석은 블로킹이나 리시브만 줄기차게 해댔다. 대체 중학교 때는 어떻게 플레이를 했던 거지. 배구는 전적으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스포츠인데 말이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눈에 보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 호되게 당하고도 참견할 마음이 생기는 자신이 미친 놈 같았지만 아예 팀에서 소외된 녀석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3학년은 3학년대로 다가오는 인터하이와 그에 따른 주전 경쟁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어서 후타쿠치는 안중에도 없었고, 2학년은 2학년대로 3학년의 눈치를 보느라 후타쿠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1학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이.”

구석에서 땀을 닦던 후타쿠치를 향해 말을 거니 녀석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누구도 녀석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가. 카마사키는 슬쩍 주위의 눈치를 보다 마저 말을 이었다.

너 선배들한테 완전 찍혔다면서? 아주 난리가 아니던데.”

한가하게 남의 일에 참견할 군번인가요. 제가 보기에 그쪽은 괜한 오지랖 부릴 게 아니라 리시브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이고 골 때려라. 순간 후타쿠치의 동그란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얘는 애가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해도 이딴 식으로 하는 거지? 카마사키는 흐읍, 하고 쉼 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짜증내고 그냥 가버리면 괜한 오지랖을 부린 보람이 없지. 어쨌거나 부에 들어왔으니 이젠 함께 해야 할 부원이고 후배다. 먼저 부를 나가지 않는 이상 그런대로 실력이 있으니 경기에 나갈 기회도 생길 터였다.

난 됐고, 너 부에 불만이라도 있냐? 배구부에 들어왔으면 어찌됐던 간에 팀 플레이니까 팀워크를 쌓아야 할 거 아니야.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어느 정도는 선배들이랑 동기들이랑 친해져야지.”

그쪽한테 말하면 뭐가 해결 됩니까?”

?”

솔직히 제가 볼 때 지금 있는 3학년 주전들은 실력도 센스도 형편없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주전으로 뽑힌 것 같은데요.”

, . 너 말 다 했.”

아뇨, 아직 말 안 끝났는데요. 별 것도 아닌 새끼들이 자꾸 말투며 성격이며 건방지다고 트집 잡고 시비를 걸잖아요. 배구하러 들어왔으면 플레이로 보여주면 될 것이지 제 말투랑 성격이 뭐가 상관인데요? 전 친목 다지려고 입부한 게 아니거든요?”

, 잠깐만. 이 자식, 조용히 해!”

불만 있으면 말하라면서요.”

가만 내버려두면 누가 듣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떠들어댈 것 같아 카마사키는 급히 후타쿠치를 구석으로 몰았다. 그러자 후타쿠치는 신경질을 내며 카마사키를 밀쳤지만 힘은 제 쪽이 더 세서 어림없었다. 선배들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 이르자 후타쿠치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지도 못할 거 쓸데없는 참견 말라고요!”

, 이 새끼 완전 골 때리네. 자식이 1학년 주제에 뭘 안다고 벌써 다 아는 척 잘난 체를 하고 난리야? 지금 주전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발탁된 거고 게다가 아예 고정된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대체 뭐냐고요.”

이거 바락바락 대드는 것 좀 보게. 누가 이 녀석을 이제 막 들어온 1학년으로 보겠냐고. 참다못한 카마사키는 결국 팔꿈치로 후타쿠치의 허리를 퍽 찔렀다. 힘을 좀 빼긴 했으나 이제껏 참아 왔던 짜증때문에 은연중에 힘이 좀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아프긴 아파도 견딜 만은 하겠지.

임마, 나도 몰라! 하여간 감독님이 알아서 잘 정한 거겠지!”

! 아프잖아요!”

조용히 해. 아무튼 팀 플레이니까 최소한 선배들한테 시비는 걸지 말란 말이야. 선배들도 지금 한창 예민한 시기라 그렇지 평소엔 이렇게까지 날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조용히 타일러도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다. 카마사키는 말없이 제 허리께를 문지르는 후타쿠치를 향해 한 마디를 더하려다 푹 고개를 숙였다. 젠장, 역시 신경 껐어야 했어. 이렇게까지 제멋대로인 녀석인 걸 알았다면 아무리 신경 쓰여도 말 걸지 않았을 텐데.

그런 카마사키를 쳐다보던 후타쿠치가 여전히 허리께를 문지르며 말을 걸었다.

그쪽은 주전이에요?”

선배한테 그쪽이 뭐냐?”

이름 모르는데.”

카마사키 야스시. 2학년이고 주전이야.”

포지션은?”

미들 블로커,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천성이 이런 걸 어쩌라고요.”

말투는 천성이 아니거든? 바꾸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헤에, 그럼 전 예왼가 보죠. 그나저나 아까 있는 힘껏 찌른 거예요? 어떻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후배한테 폭력을 쓸 수가 있어요? 믿기지가 않네. 이거 암만 봐도 내일이면 퍼렇게 멍들 것 같은데 어쩔 거예요?”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요. 후타쿠치가 건수 잡은 사기꾼마냥 쉴 새 없이 궁시렁거렸다. 카마사키는 했던 후회를 곱씹으며 뒤돌아 달아났다. 아예 양쪽 귀를 막고 무시하는데도 녀석은 끈질기게 쫓아와 책임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제대로 실수했다. 그냥 내버려둘 걸 그랬다고,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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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저거다. 카마사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 안하냐?”

잠깐 쉬는 것 가지고 뭐라 하지 마! 네가 사장이야, 뭐야. 그보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너 혹시.”

혹시 뭐.”

혹시, 마코토가 말끝을 늘이며 손가락으로 애꿎은 파티션을 긁었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카마사키가 그러니까 혹시 뭐, 하고 한 번 더 물으니 흘끗거리며 눈치를 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카마사키가 모니터에 향했던 시선을 들고 마코토를 쳐다보자 마코토는 시선을 피하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애인 생겼냐?”

서류를 넘기던 카마사키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애인이라니, 무슨 소리냐는 눈짓에 마코토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너 요즘 자주 멍 때리고, 예전엔 야근도 불사하던 놈이 요 몇 주간 퇴근시간 딱딱 맞춰서 가려고 하고. 툭하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지를 않나. 네가 하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

그랬나? 마코토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최근 춘곤증 때문에 틈만 나면 졸았기도 했고,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긴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랬나 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마코토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지?”

있겠냐?”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하는 마코토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졌다. 애인이 없다는데 크게 안심하는 녀석을 괘씸하게 쳐다보자 하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없는데 네가 있을 리가 없지.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녀석에게 마침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던져 버릴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백발백중 저 면상에 명중시킬 자신이 있다. 카마사키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마코토가 한 손으로 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끝나고 한 잔 할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이제 술 안 마셔.”

카마사키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마코토가 있는 술자리에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허물없이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사이라 그런지 자중하자고 다짐을 해도 취하면 녀석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방심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다. 저번에도, 저 저번에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다. 언제나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 날 아침이고, 전날 밤의 기억은 통째로 날아가 있다. 어쩌다 술에 취했는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야 별 실수가 없었다 해도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필름이 끊겨서 아무 기억도 없는 것도 영 찝찝하고, 최근 안 그래도 뉴스에서 취객을 상대로 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친하다지만 취할 때마다 마코토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내심 미안했던 터다.

나름 진지했던 카마사키의 거절을 마코토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얼마 안 가 말을 바꾸리라 생각하는 듯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럼 다른 사람 끼면 괜찮다는 거지? 마침 역 근처에 괜찮은 술집이 생겼다는데 오늘은 거기로 가야지~.”

안 간다니까. 다른 사람이 있으면 뭐해? 술자리에 너만 있으면 만날 필름 끊길 정도로 마시게 되서 싫다고.”

내가 언제는 너 안 바래다 준 적 있냐? 알아서 잘 모셔다 줄 테니까 이 형님만 믿어.”

형님 좋아하네. 난 진짜 안 내킨다니까?”

됐고, 형님만 믿어! 마코토가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저 자식은 동기에 나이도 동갑인데 항상 지가 연상인 것처럼 행세한단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형님이니 뭐니 안 그러면서 내 앞에서만 허세를 부리니까 더 짜증이 난다. 혹시 날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카마사키는 괜히 마코토의 까만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그래봤자 파티션에 가려져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하기에 누굴 부르나 싶었더니 마코토는 회사 사람들을 모았다.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회식 자리에 불과했겠지만, S-PLANT의 직원들도 부르는 바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자리가 되고 말았다.

오라고 한 당사자가 어디있나 둘러보니 마코토는 이미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대체 왜 오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카마사키는 이미 저마다 자리를 잡은 테이블을 둘러보다 제법 한산한 테이블에 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카마사키처럼 술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S-PLANT의 직원 세명이 앉아 있었다. 그다지 친목을 다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카마사키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형식적으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떠들썩한 주변과 달리 네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는 테이블은 외딴 섬처럼 조용했다.

 

 

우와, 여기 왜 이렇게 조용해요?”

각자 조용히 술을 즐기던 테이블로 후타쿠치가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맞은편의 직원에게 몇 마디 실없는 말을 건네고는 카마사키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카마사키 씨이, 하고 말을 늘이며 말을 걸었다.

설마 그 나이에 아직도 낯가리는 거예요? 중학생?”

낯을 가리긴 누가.”

누가 술자리에서 혼자 술만 마시고 있으니까 그렇죠.”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술자리는 질색이라고.”

,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니 뭐가, 라고 대꾸하려던 카마사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후타쿠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자신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허물없이 대하는 편이었다.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장난을 치고,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실없는 농담이나 따먹는 사람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걸 못 참아하고, 떠들썩한 걸 좋아했었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어떤 커다란 계기가 있어서 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이 싫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괜히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여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

그게 낯가리는 건데요.”

아무튼 간에. 그러는 너는 자리로 안 돌아가냐.

저긴 너무 귀찮게 해서.”

그리고는 빈 잔을 찾아 술을 채운다. 후타쿠치의 어깨 너머로 후타쿠치가 원래 있던 테이블 사람들이 이쪽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라처럼 고개를 쭉 내밀며 힐끔거리는 게 다들 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타쿠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쓸데없이 인기가 많아 피곤하다고 말하는 후타쿠치가 여느 때보다 얄미워 보였다.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짜증난다니까.

, 지금 여자친구 있냐?”

지금은 없어요. 얼마 전에 차였어요.”

네가 차였다고?”

일순 마시던 술을 뱉을 뻔 했다. 카마사키는 입가에 술이 흘렀나 싶어 괜히 턱을 닦았다. 후타쿠치 같은 녀석들도 차이는 구나. 일견 당연한 일인데 그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았다. 전에 없던 흥미가 솟아 카마사키가 재차 물었다.

?”

바빠서요. 소홀해졌다나 뭐라나? 사무실 이전하니까 한동안 바빠질 거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러더라고요. 전화를 안 받는다는 둥, 주말에 왜 못 만나냐는 둥. 여자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요.”

후타쿠치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게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태도로 미루어보건대 별로 여자친구가 좋아서 사귄 게 아닌 듯싶었다. 후타쿠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 때도 그랬듯이 여전히 가벼운 연애를 즐기는 구나.

바쁘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당황을 삼켰다남의 연애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실례다. 내가 뭐라고 울컥한 거지. 그것도 한눈에 봐도 저보다 연애 경험이 많은 후타쿠치를 상대로 무슨 설교를 하는 거냐. 카마사키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얼버무리며 흘끗 쳐다보니 후타쿠치는 조금 놀란 눈치이긴 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피식 웃었다. 하나도 기분이 나빴다거나 불쾌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카마사키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 태연한 얼굴에 카마사키는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고 후회했다.

가만히 술잔을 채우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불쑥 빈 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술잔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후타쿠치가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카마사키 씨는 여자친구 없나보죠?”

여자친구는, 없지.”

왜요?”

바쁘니까.”

바쁜 건 핑계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사실 바빠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러나 더 자세한 속내를 털어놓기엔 내키지 않아 카마사키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핑계를 댈 만한 게 바쁘다는 것뿐이라 후타쿠치에게 트집이 잡혀 버렸지만. 하여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속으로 놀릴 건수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카마사키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후타쿠치를 쏘아보며 생각했다. 술이 당겼다. 잔을 비우자 쓴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연애를 뒤로 하는 건 핑계가 맞다. 상대를 정말 좋아한다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 사실을 카마사키는 얼마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연애는 감정이 있어야 할 수 있고, 감정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못 할 짓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한 뒤, 연애의 기회는 몇 번 찾아왔었다. 잘생기지도 않은 자신이 좋다며 고백하는 여자도 있었고, 제 쪽에서 먼저 호감을 느낀 여자도 있었다. 사귄 적도 있었고, 사귀지는 못했지만 연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적도 있었다.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꽤 좋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처음 한 연애는 별 거 아닌 일로 설레기도 했으며, 소소하게 이벤트를 챙기는 것도 꽤 재밌었다. 풋풋했다. 풋풋해서, 실수를 했다 생각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그땐 그게 마냥 기뻤었다. 남들과 같이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었다. 좋아한다는 감정까진 아니어도 호감은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연애를 시작했고, 관계가 이어졌다. 하지만 감정이란 단순히 사귀기 시작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호감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한 호감에 그쳤다. 좋아서 설렌다고 느꼈던 건 그냥 낯선 상황에 대한 두근거림에 불과했고, 점차 함께 있어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허물뿐인 관계에 매어있는 기분이 들었고, 같이 있는 시간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함과 죄책감만 더해갔다.

억지로 사랑해야 한다고 되뇌어봤자 마음은 자신의 노력을 비웃듯이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사랑받으면 자신의 마음에도 사랑이 자라나리라 생각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았고 처음처럼 기쁘지도 않았다. 점점 죄책감이 쌓였고, 이를 눈치 챈 여자 친구가 끝내 이별을 통보했다. 어느새 마음이 바닥난 것이다. 사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처음 사귄 여자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다를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시작한 두 번째 연애도 같은 결과였다. 차라리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두 번째 여자 친구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탓했다.

진즉에 마음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카마사키는 후회했고, 그 뒤 사랑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겠지. 그 때는 흠뻑 사랑에 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지만 연애는 없었다. 마음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언젠가 쌀쌀한 바람이 목을 스치던 밤에,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 살아도 그럭저럭 살만 했고, 심심할 때면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과 술 한 잔을 마시면 되었다. 게다가 연애를 안 하니 돈은 쌓이기만 해서 모아놓은 돈이 꽤 되었고, 할 게 일밖에 없다보니 자연스레 실적이 쌓여서 남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사랑이 없는 대가가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한 건지도 모른다.

 

술자리를 마련한 당사자인 마코토는 모든 테이블을 돌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난 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시덥잖은 얘기로 시간을 때우며 술만 홀짝이던 카마사키는 이미 자신의 주량을 훌쩍 넘긴 채였고, 애초에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만 지키던 S-PLANT의 직원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카마사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놀았다. 어린애 재롱을 보듯 건방지게 턱을 괴고 있는 후타쿠치를 마코토는 흘끗 흘겨본 뒤 카마사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의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한 카마사키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기니 술에 취해 늘어진 몸이 흐느적거리며 따라왔다. 허물없이 기대오는 게 꽤나 묵직했다.

얌마,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냐? 필름 끊기는 거 싫다더니.”

?”

, 이렇게, 많이, 마셨나고?”

어어어, 마코토. 너 이 짜식 왜 이제야 오냐. 

카마사키가 몽롱하게 풀어진 눈을 하고는 마코토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낯 가리는 거 아니라고, 하고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반복했다. 술자리에 나만 있으면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다고 투덜대더니 또 이렇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 그나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만 취한다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마코토는 한숨을 내쉬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단단히 안았다. 설마해서 요령껏 술을 자제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혹시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럴까 걱정돼서 마코토는 곯아떨어지기 직전인 카마사키를 타박했다.

어휴, 너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

? 네 책임.”

네가 뭐가 예쁘다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드문드문 끊기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졌다. 고개를 꾸벅꾸벅 거리더니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잠에 빠진 카마사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평상시엔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잠이 든 모습은 영락없이 순해빠졌다. 사나웠던 눈매며 올라간 눈썹이 기세를 잃고 축 쳐져있어서 다른 사람 같았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모습에 마코토는 저도 모르게 카마사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녀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쩐지 자신뿐인 것 같아 뿌듯해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무심코 키스를 해버렸을 지도,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말로는 뭐라 타박했지만 마코토는 사실 이 순간이 좋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카마사키를 바래다주는 일은 마코토 본인만 아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마음껏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은근슬쩍 허리께며 허벅지를 만지는 것도, 술김이라 변명하며 제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도 카마사키를 안아보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술김에 라든가, 친구라는 관계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카마사키와 사귀고 싶었다. 제 마음을 자각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심지어 카마사키도 요 몇 년 간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일단 사귀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참을 카마사키의 얼굴을 구경한 뒤, 마코토는 시계를 확인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은 터라 슬슬 파장하는 분위기였고, 주변 테이블도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어깨에 자켓을 걸쳐준 뒤 어깨를 매고 일어섰다. 동시에 후타쿠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조용히 있어서 눈치를 못 챘는데 후타쿠치는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마사키의 고교 후배라는 후타쿠치라는 녀석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던 데다, 겉보기엔 잘생겼는데 생긴 대로 성격이 건방진 것도 싫었다. 행동과 말투가 가벼워서 도통 진심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가장 싫은 건, 카마사키와 꽤 친해 보인다는 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만에 만났다는 것 치고는 카마사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고, 카마사키도 은근히 저 녀석의 건방진 태도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받아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슬슬 나갈까요.”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예의상 말을 건네니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마코토는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카마사키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집까지 데려다 주려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아니, 이참에 막차가 끊겼다고 핑계를 대고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종종 그랬으니까 뭐. 그러나 마코토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후타쿠치가 마코토가 부축하고 있던 카마사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마코토에게 후타쿠치가 웃으며 말했다.

카마사키 씨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니요, 미즈하라 씨도 집에 들어가셔야죠. 막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그럼 야스시네서 하룻밤 신세를 지면되니까요.”

카마사키를 이쪽으로 달라는 듯이 마코토가 두 팔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후타쿠치는 그런 마코토에게 보란 듯이 카마사키를 안은 제 팔을 추켜올렸다. 축 늘어진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팔 안에 축 늘어졌고, 그 모습이 꼭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옆집이니 제가 데려다 드리는 게 효율적이죠.”

후타쿠치의 말에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을 구경하던 직원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끼어들었다. 귀찮았을 텐데 잘 됐네, 미즈하라. 그러나 마코토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후타쿠치의 어깨를 잡아챘다. 걸음을 옮기려던 후타쿠치가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았다.

잠깐만, 둘이 옆집이라고?”

. 그렇게 된지 꽤 됐는데 여태 모르셨어요?”

얼마나, 되었는데?”

, 한 달은 족히 넘었나. 아니 두 달은 됐나?”

…….”

아무튼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깨가 무거워서요.”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부축하고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후타쿠치가 싫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주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다. 게다가 제 앞에서 보란 듯이 잘난 척까지 하다니. 아까는 순간적으로 후타쿠치를 한 대 패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았었다. 왜 뜬금없이 카마사키와의 친분을 제게 과시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간에 짜증이 났다.

혹시 카마사키를 좋아하는 걸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거며, 조용히 쳐다보던 것 하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이 멋대로 끼어들 명분은 되지 못한다. 아까의 행동은 그저 저를 놀리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건방진 자식이, 마코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잔을 들이켰다. 물인 줄 알았더니 하필이면 누군가 물컵 채로 폭탄주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 하고 목구멍에서 가슴까지 화상이 난 듯 화끈거리고 따끔거렸다. 명백한 질투였다.

 

 

?”

카마사키는 뺨이 화끈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차츰 초점이 맞아졌다. 오렌지 빛으로 가득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집 앞이었다. 카마사키는 멍하니 벽을 보고 있다 주위를 살폈다. 술에 취해서 누가 바래다준 것 같은데 마코토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마코토라면 제 집 열쇠를 찾아서 침대까지 데려다 주었을 테니까. 오래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제 바로 옆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색 슬랙스를 따라 올라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야아, 이거 후타쿠치 아냐.”

깼으면 그만 집에 들어가시죠.”

네가 나 데려다 준거냐? 우와아, 웬일이야. 말도 안 돼.”

, 진짜 술주정 하고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이거 꿈인가. 저 자식이 나 데려다줄 리가 없는데.”

참나 가지가지 하고는. 저기요, 카마사키 씨.”

마코토는?”

술에 취할 때면 늘 마코토가 데려다줬는데 왜 네가 있어?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바지를 쭉 당기며 물었다.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얼굴을 팍 구기고 제 바지를 쥔 카마사키의 손을 뿌리쳤다.

기껏 바래다줬건만 그 사람은 대체 여기서 왜 찾아요?”

마코토가 매번.”

이봐요, 카마사키 씨. 데려다 준 사람은 저거든요.”

마코토는 침대까지 데려다줬는데.”

, 진짜 미친.”

후타쿠치는 잠시 이 사람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쳐야 하나 갈등했다. 정신이 들면 알아서 집에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술주정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데려다준다고 하지 말걸 그랬다. , 한숨을 쉬고 내려다보니 잠깐의 시간동안 카마사키가 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 진짜. 내가 이 사람이 있는 술자리에 다시 한 번 가나 봐라. 후타쿠치가 이를 악물고 카마사키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우고 들어올렸다. 술에 푹 절여진 몸이 물을 잔뜩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시발, 절로 욕이 나왔다.

카마사키를 들고 일어난 뒤는 더 난관이었다. 도통 어디에 열쇠를 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후타쿠치는 제 어깨에 멘 카마사키를 하마터면 집어 던질 뻔 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열쇠를 찾았지만 문을 열고 신발을 벗기고 침대까지 가는 길은 하나도 순탄치 않았다. 카마사키는 자꾸 바닥으로 늘어지려고 하지, 어깨 옆에서 간간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서 소름돋지, 침대까지 가는데 바닥은 난장판이지. 침대에 이르자마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으으.”

그 반동으로 카마사키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내가 다시는 이 인간이 있는 술자리에 가나 봐라. 했던 다짐을 되뇌고 후타쿠치는 잠시 카마사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까지 들쳐 매고 오느라 체력을 탕진해버린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난장판인 방에서는 자고 싶지 않았다. 왠지 평소보다 방 상태가 심한 것 같았다. 옆집인 걸 알고나서 수차례 들락날락 거렸지만 오늘은 가장 난장판이었다. 올 때마다 홧김에 잔소리를 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더니. 전형적인 혼자 사는 남자 같달까, 그보다 더 하달까. 고등학교 다닐 땐 꽤 깔끔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라커도 늘 깨끗하게 정리하고 데오드란트도 꼼꼼하게 챙기던 게 기억났다. 그런 점이 생긴 거랑 달라서 의외라고 생각했었지. 아니, 의외로 그 사람답다고 하나. 지나치게 성실하고 괜한 것에까지 꼼꼼해하던 점이 있었으니까.

사람 참 많이 변했다.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이 사람은 그보다 더 하다. 외모나 행동거지는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른이 되어서인가. 후타쿠치는 빨갛게 볼을 물들인 채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카마사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까 술집에서도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눈을 감으니 순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카마사키 씨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 주변에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곳저곳 건드렸을 게 분명한 남자였다. 눈빛부터가 틀렸다. 단순한 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욕정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구석구석 만지고, 키스하고, 욕구를 풀고 싶어 하던 게 제딴엔 숨기려 했으나 노골적으로 티가 났었다.

미즈하라 마코토라고 했지. 친구인 척 카마사키를 탐내던, 처음 봤을 때부터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하더니 역시나 기분 나쁜 남자다. 은근슬쩍 소유욕을 드러내려 하고, 유치한 도발에 눈을 부라리던 게 생각났다. 거머리 같은 자식.

그런데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인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후타쿠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히 애인은 없다고 했었지. 아니다, 여자 친구는 없다고 했었다. 그럼 남자 친구는 있다는 소리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사이가 가깝고, 스킨십도 서슴없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아까도 분명 그 남자는 어디 있냐며 칭얼대고, 항상 침대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고 했으면서 오늘 술자리에는 참석했고 심지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카마사키 씨가 게이였나? 그럼 낌새는 고등학교 때 전혀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많이 변했고, 성향이 바뀌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이런저런 정황들을 보면 그럴 지도 모른다.

그 거머리 같은 남자랑? 순간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카마사키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그 남자랑 사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아니, 사귀면 좀 괜찮은 사람을 사귀던가 하필이면 거머리 같은 남자랑. 후타쿠치는 불쾌한 속을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졌다. 후타쿠치는 마지막으로 침대 한 구석에 돌돌 말려진 이불을 카마사키에게 덮어주었다. 색색, 하고 깊이 잠든 얼굴을 보다 후타쿠치는 무의식적으로 카마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소 짧은 머리카락이 의외로 부드럽게 감겨 와서, 후타쿠치는 한동안 손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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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2)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타쿠치를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시절, 난 모든 상황을 뒤로 하고 감정을 앞세울 정도로 후타쿠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보고 싶다든가 같이 있고 싶다든가 바랐을 뿐이었다. 가벼운 감정이라 생각했기에 그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늘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 친구가 바뀌었고 그 모습을 보며 이 감정은 절대 내뱉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어찌 보면 사춘기 고교생으로서는 당연했던 것 같다. 남자를 좋아한다니, 고백하는 것 자체도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마음을 들켜서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하루라도 빨리 후타쿠치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마주치지 않으면, 졸업하면, 떠올리지 않으면 분명 얼마 안 가 감정이 퇴색되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 그 땐 그랬었지하고 가볍게 회상할 정도로 별 거 아닌 일이 되겠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감정인 줄로 알았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질질 끌고만 있을 감정인 줄 알고 있었다면, 그 때 어떻게든 했었을 텐데. 지금까지도 그 일만이 못내 후회로 남았다.

 

 

평소엔 밥을 먹는 건지 수다를 떠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입을 다문 적이 없던 마코토가 숟가락을 입에 물기만 한 채 카마사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몇 숟갈 먹지도 않았는지 거의 다 먹어가는 카마사키의 그릇에 비해 마코토의 그릇에는 아직도 음식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그런 마코토의 시선을 무시하다 카마사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마코토는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멍 때리네? 생각도 많아 보이고 너답지 않게 일에 집중도 못하고 말이야.”

별로. 평소랑 똑같은데?”

아니야. 저번에 감기 걸렸을 때부터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무슨 일 생겼어? 아니면 또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냐?”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냥 봄이라 나른해졌나 보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봄을 탄다니, 이제껏 계절을 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코토 역시 카마사키를 수상쩍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조차 요즘 무슨 이유로 기분이 싱숭생숭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다 먹었냐? 나 먼저 가버린다.”

매정하게 그러지 말고 기다려 줘라, . 너 때문에 난 목구멍에 밥도 안 들어가는데! 하여간 너는 머릿속에 일 생각밖에 없지?”

네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자식이 형님한테 말하는 것 하고는.”

지랄한다고 비웃어주니 마코토가 삐진 척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코토가 은근히 자신을 챙겨준다는 걸 알기에 카마사키는 빨리 먹으라고 야단치며 마코토를 채근했다. 그러는 사이 식당으로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들어오면서 조용했던 식당이 떠들썩해졌다. 비교적 캐주얼한 차림의 마코토와 카마사키와는 달리 셔츠와 정장 바지를 차려 입은 그들은 S-PLANT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과 이미 안면을 튼 마코토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카마사키 씨.”

아는 사람이 없어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던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착한 후배 모드를 장착한 채 다가왔다. 직장에서는 나름 성격을 죽이고 다니는지 평소보다 살가운 목소리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뭐야. 야스시 너 아는 사람도 있었어?”

고등학교 배구부 후배야. 후타쿠치 켄지.”

안녕하세요.”

. 난 미즈하라 마코토야. 야스시랑은 동기지. 이 녀석 친구는 몇 번 보긴 했어도 후배는 처음 보네? 별로 친하진 않았나봐?”

글쎄요.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후타쿠치는 마코토의 질문에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깔끔하게 말을 끊었다.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후타쿠치를 쳐다보며 마코토는 무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너 후배라는 자식, 꽤 건방지다? 피식 웃으며 빈정거리는 마코토를 보며 사람 눈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후배인 척 내숭을 떨었지만 본성을 숨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마코토는 한 눈에 후타쿠치의 성질을 눈치 챘다.

맞아. 학교 다닐 때도 성격이 저래서 선배들한테 툭하면 건방지다고 야단맞았었지.”

운동부라고 했었지? 그럼 꽤 험했겠네.”

그렇지는, 않았어. 운동부라고 다 그런 분위기는 아니니까.”

우리 학교는 꽤 심했는데. 선배한테 한 번이라도 눈에 잘못 들면 그 날 부로 부내 왕따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더라고. 은근히 주전 자리는 넘겨주지도 않고 순 잡일만 떠넘기고 그랬다고 하더라.”

, 학교마다 다른 거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마코토는 그런가보다 납득했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다테공고도 원래부터 분위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카마사키의 한 학년 위에까지는 마코토가 말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이지메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 가볍게 시비를 걸거나 핑계거리를 대가며 사소하게 괴롭히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이 3학년일 때는 그 수준이 절정에 이르렀다. 표적은 당연히 만만한 1학년, 그 중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후타쿠치였다.

그 때의 후타쿠치는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가뜩이나 철벽은 무슨 울타리도 되지 않는다며 조롱과 비아냥에 시달렸던 3학년은 누가 되었든 분노와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거고, 입부했을 때부터 특유의 말투와 가벼운 행동으로 오해받기 쉬웠던 후타쿠치가 잘못 걸렸던 것뿐이었다. 이런저런 괴롭힘에 시달렸던 후타쿠치는 몇 번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부내 싸움이 일으킬 뻔도, 퇴부하겠다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아마 카마사키를 비롯한 2학년들이 기를 써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후타쿠치는 애저녁에 배구를 그만뒀을 거다.

3학년이 졸업한 뒤에도 여전히 후타쿠치를 은근히 질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지메를 꾀하지는 못했다. 그 때 즈음엔 후타쿠치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이를 간 것도 이유였지만, 애초에 집단이 아닌 개인이 상대가 되면 그건 이지메가 아니라 그냥 싸움이었다.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그렇지 후타쿠치는 본래 끈질긴 성격이고, 그런 점에서 한 번 시비가 붙은 상대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게다가 당한 것의 곱절로 갚아주는 바람에 더 이상 후타쿠치를 건드는 사람이 없어졌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뭘.”

기분 좋아 보이잖아. 아까는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얼굴이었던 주제에.”

밥 다 먹었냐? 나 먼저 간다.”

, 진짜! 넌 대체 기다려줄 줄을 몰라! , 기다려. ! 야스시! 같이 가자고!”

예전엔 후타쿠치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한 번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각날까봐 두려웠다. 사그라졌던 마음에 다시 불씨가 타오를 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괜찮은 모양이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회사가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그런지 후타쿠치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일은 은근히 자주 있었다. 출근 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거나, 점심시간에 같은 식당에 가서 마주치거나, 아주 가끔 화장실에서 마주치거나 등등.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선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걸어왔다. 마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같은 미소는 거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섭섭하다거나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난 선후배 사이이니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것보다는물론 후타쿠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편하다고 생각했고 다행이라 여겼다. 애초에 후타쿠치와 재회하게 된 것이 달갑지도 않았고.

뭐야. 카마사키 씨 여기 살아요?”

그래서 주말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맨션 복도에서 후타쿠치가 예전처럼 말을 걸어온 게 좀처럼 현실 같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운동복을 입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카마사키의 옆집 문을 열고 있었다. 변함없이 툭툭 거리는 말투와 시큰둥한 표정과 부활동 때 질리도록 봤던 운동복 차림에 마치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네가 왜 거기 있는 거냐?

저번 주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요. 설마 우리 옆집인 거예요?”

……그런가 보네.”

회사는 맞은편에, 집은 옆집. 이거 거의 몰래 카메라 수준 아닌가.”

413, 414. 몇 년 만에 만난 후배가 옆집에 이사 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필이면 그냥 같은 맨션도 아니고 옆집이라니.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집 문과 자신의 집 문을 번갈아 보았다. 허탈하다. 걸어서 세 걸음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말문이 막힌 카마사키에게 다가간 후타쿠치는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카마사키의 집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들어가 봐도 되요?”

, . 그러든지 말든지.”

후타쿠치의 땀 냄새가 섞인 체향이 지척에서 맡아졌다. 카마사키가 숨을 멈추고 한 발자국 뒷걸음을 쳤다. 들어가라고 몸을 비켜준 걸로 알았는지 후타쿠치가 그럼, 하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버리려 했던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내려놓은 뒤, 카마사키는 멈췄던 숨을 뱉어냈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았다. 이건 마치, 그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좋지 않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집이랑 구조가 똑같네요. 여기서 산지는 얼마나 됐어요?”

. 3, 4년 되었나. 커피 마실래?”

그러든지요.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대답에 어쩌라는 거냐고 따져들 뻔했다. 회사 건물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에 그제야 후타쿠치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동시에 멀어졌다 생각했던 거리감이 순식간에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낯설었던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취직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나?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잖아요.”

그렇지. 예전에 살던 집은 너무 오래돼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더라고. 돈 모이자마자 바로 근처로 이사 온 거야.”

그래도 여긴 방음이 너무 안 좋아요. 옆집에서 뭐 하는지 다 들려서 짜증나 죽겠어요.”

그것 빼곤 살 만 하잖아. 여기, 커피.”

후타쿠치는 잔을 받아들였지만 마실 생각이 없는지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챙겨 줬더니 괜한 일을 했다. 후타쿠치가 할 일없이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어지럽게 늘여진 잡동사니들과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이불을 정리했다. 원래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집안이 더 엉망이었다.

보통 평일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빨래 말고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가 토요일 오후부터 슬슬 밀린 집안일을 하곤 하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남이 보기엔 자신을 구제할 길이 없는 게으름뱅이로 볼 게 뻔했다. 그만큼 방 안은 카오스와 같았다. 누구에게든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만 하필이면 후타쿠치한테 보이다니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나마나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예상대로 방 안을 둘러보며 기분 나쁘게 큭큭거렸다.

카마사키 씨는 많이 변했네요. 예전엔 이 정도까지 더럽게 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설마 아직까지도 혼자 방도 못 치우는 거예요?”

알아서 잘 치우거든! 이건, 그러니까, 청소는 원래 토요일 점심때부터 몰아서 치워서 그런 거라고. 나름의 계획이 있단 말이다. 그리고 평소엔 이렇게까지 더럽게 어지럽혀 있지도 않아.”

몰아서. 그럼 평일에는?”

평일은 일이 바빠. 청소할 틈이 없다고.”

무슨 말을 해도 이 상황에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정리한다고 해서 깨끗해질 상태가 아닌지라 대충 치우다 관두었다. 어차피 가장 최악의 모습을 보였고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지금 어떻게 해 봤자.

후타쿠치 근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리는데 후타쿠치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주말이라 안경을 쓰지 않아 그런지 후타쿠치의 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투명하게 빛났다. 왜인지 눈빛이 차가워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게 착각이 아니었던지 후타쿠치는 은근히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의외로 가차 없네요, 카마사키 씨는.”

?”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정이 없다고 해야 할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떻게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왔어요? 카마사키 씨 빼고는 다들 연습할 때나 시합 때 한 번쯤은 보러 왔었는데.”

…….”

심지어 그 3학년들도 몇 번 왔었다고요, 인터하이 때.”

왜 그랬냐는 듯 따지는 말에 카마사키는 마주쳤던 시선을 피해버렸다.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할 바에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던 간에, 선배로서 매정한 짓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미안하다며 단답형으로 사과하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나무라듯 쳐다보다 팩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와서 쩨쩨하게 뭐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좀 궁금하더라고요. 그렇게 부활동에 열 올리던 사람이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걸까 하고.”

…….”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 때도 지금도 크게 신경 안 쓰니까.”

미안.”

말은 그렇게 해놓고 궁금하긴 했는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사과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싶긴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게 녀석답다. 뭐든 크게 아쉬워하는 일이 없고, 사람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카마사키가 알기로 녀석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주의라 뭐든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무례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를 못 느끼는 녀석이었다.

그런 이기적인 녀석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카마사키의 모습이 신기한지 마치 여름방학 관찰 숙제를 하는 초등학생마냥 카마사키를 관찰했다. 저번에 후타쿠치와 재회했을 때, 카마사키가 녀석의 변한 부분을 찾았던 것처럼 후타쿠치도 카마사키에게서 뭐가 변했는지를 찾는 눈치였다. 새삼스러울 만하지. 이제 알고 지냈던 시간보다 연락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오래 되었으니까.

몇 년 만에 보는 거죠?”

“2013년 봄에 졸업했으니까 딱 5년 만이네.”

확실히 오랜만이긴 하네요.”

그렇지.”

카마사키 씨는,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

그래?”

근데 변해도 중간이 없이 변했네요. 예전엔 고릴라 같았는데 지금은 곰 같아요. 근육들은 다 어디 갔데요? 이제 나이도 있는데 벌써부터 관리 안하면 나중에 배 나온다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 확실히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근육 남아 있어.”

아저씨가 따로 없어요.”

너랑 나랑 고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거 알고는 있는 거냐? 그리고 이 나이에 무슨 아저씨냐.”

후타쿠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 살 어린 것 가지고 유세 떠는 꼴이 같잖았다. 하여간 사람 신경 건드리는 데 타고난 녀석이다. 카마사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남아있던 커피를 모두 원샷했다. 사실 나이가지고 아저씨라 놀린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후타쿠치에 비해 형편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 분명 졸업하고 일에 치여 사느라 운동을 안 한 지 오래되긴 했다. 반면 녀석은 꾸준히 운동을 하는지하긴 아까도 운동복 차림이었으니, 모델마냥 몸이 좋았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도 덩치도 커져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땐 내가 조금 컸었는데. 몰려오는 자괴감에 다 비운 잔을 들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후타쿠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갈게요. 앞으로 신세 좀 많이 질 테니까 미리 잘 부탁해요.”

미리 사양한다.”

성격하고는. 그럼 월요일에 봐요.”

이러니까 같은 회사 다니는 것 같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확실히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는 묘하다. ‘나중에 봐요’, ‘또 봐요와 같은 막연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 날 꼭 보자고 약속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는 그냥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지만.

왠지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괜히 귓가를 긁적였다. 슬슬 청소를 시작할까하고 방 안을 둘러보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거절할 것이지 사람 참 귀찮게 하는 자식이라니까. 카마사키는 기껏 내린 커피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싱크대에 커피를 흘려보냈다. 훅 퍼지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카마사키는 또 귓가를 긁적였다. 간질간질한 기분은 그 후로도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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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2)



최근 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카마사키 씨랑 뒹굴어도 모자를 판에 이게 무슨 거지같은 경우야. 아까부터 파란 불빛을 내뿜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 따닥, 하고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케이스 끼웠으니 괜찮겠지. 하긴 고장이 났어도 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으니까.

베개에 턱을 묻고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나뒹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려는지 카마사키 씨가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정신없이 울린 얼굴은 눈이고 코고 입술이고 전부 볼썽사납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아직까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보기만 해도 아플 지경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카마사키 씨가 거울에 제 얼굴을 확인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지만.

. 더 자요.”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더 재우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목소리에 오히려 잠이 깰 판이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는 눈썹을 찡그리고 몇 번 몸을 뒤척거리다 다시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그러면서 잠결에 더운지 다리를 바둥거리더니 이불이 걷혔고 카마사키 씨의 맨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기 좋을 정도로 그을린 살결에 군데군데 빨간 점같이 생긴 것들이 다리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간밤 자신이 필사적으로 남긴 흔적들이었다.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카마사키 씨와 섹스를 할 때면 물고 깨물고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심해지는 편이었다. 보이는 곳부터 안 보이는 곳까지 잔뜩 마킹을 하고 싶어진다. 전희를 가질 때 매번 그러다보니 카마사키 씨는 자국이 남는 걸 질색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민감한 부위를 둘러싸고 깨물 듯 말 듯 애를 태우면 카마사키 씨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를 꾹 참으며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그러다 결국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로 휘감아 오면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쾌감이 오른다.

발가락 사이사이나 복사뼈 근처와 같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내가 남긴 흔적이 남았다 생각하면 가만있다가도 묘하게 흥분된다. 곱씹을수록 아침이라 반쯤 서있던 아래가 묵직해져갔다.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깨우고 N차전에 돌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발에 호되게 채일 게 뻔해 그저 잠에 취한 몸을 끌어안았다. 더운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 모른 척하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건 내 거다. 내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내 사람.

 

동거한 지 2. 멋도 모르고 사귀게 된 지 3. 헤어지자는 말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마사키 씨를 잡아챘지만 좋아하는 건지도 깨닫지 못했던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자신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언제부턴가 마음 한 편에 차곡차곡 쌓이던 감정은, 이제는 그 감정이 없으면 자신조차 사라지게 될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미 어쩌지 못할 정도로 이 사람이 좋다는 것을.

처음 감정을 실감한 것은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고 자취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 즈음 나는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불만에 차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카마사키 씨는 취업준비로 이래저래 바빴고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라 괜히 여기저기 심술부리고 다녔지만.

카마사키 씨는 본인으로서는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생각보다 봉급이 좋다며 바로 자취를 준비해도 괜찮겠다고 웃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고 함께 기뻐해 줬다. 그럼 카마사키 씨 자취방에서 마음껏 야한 짓 해도 되겠네? 응큼한 마음에 좋아했는데 정작 자취할 곳이라고 꼽아둔 곳이 회사 근처였다. 학교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훨씬 더 멀어졌다. 가뜩이나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이대로 가다간 안 봐도 뻔했다. 장난하냐면서 아니꼽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자취할 생각에 실실대는 꼴이 짜증났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은 안 했던 건가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화를 버럭 내버리고 싶었지만 필시 회사에서 가까우면 그뿐인 게 훤히 보여서 뭐라 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왜 화가 나고,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거에 섭섭하다 느껴야 하는 거냐고. 어디든 자취하라지, 내 일도 아닌 일에 신경 쓰는 건 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나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확 김에 무작정 자취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대체 왜 반대하는 거냐고 따져 묻던 카마사키 씨는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시위하자 결국 자취를 포기했다. 들떠서 자취하게 되면 놀러오라며 나설 때는 언제고 다짜고짜 하지 말라는 내 말에 카마사키 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자취하겠다는 결정을 번복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마냥 태연히.

그 때 새삼, 애초에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겉으로 표가 나는 사람이라 어쩔 땐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선 어린애처럼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제에,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던 그 얼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어떻다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마냥 안타깝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욕심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저 사람이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평생 저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로부터 1년을 기다렸다. 졸업하기 무섭게 같이 살 집을 고르고 납치하듯 카마사키 씨를 낚아챘다. 독단적인 행동을 나무라는 카마사키 씨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억지를 쓰고 대답을 강요했다. 나랑 같이 살기 싫냐는, 뻔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카마사키 씨는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란 이름을 빌미로 카마사키 씨의 두 팔과 양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다. 나만 볼 수 있도록, 나 이외의 사람은 보지 못 하도록,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도록. 어디를 갔다 오든 돌아올 장소는 둘만의 집이 되도록. 동거 2년 차. 둘뿐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드르르륵. 바닥에 던져 버렸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거칠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냐고 시위하는 것 마냥 귀에 거슬렸다.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완전히 잡쳐 버렸다. 옆에서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아예 부서질 정도로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할 수 없이 카마사키 씨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쓱 펴주고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서 부들거리는 핸드폰을 주워 방을 나섰다. 그냥 꺼버릴 작정으로 집어 들었던 건데 화면에 뜬 이름이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배로 더 귀찮게 할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켄지?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니.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무음이라 못 들었나 봐요.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어머, 얘는.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네 형한테 아직 연락 못 받았니?]

받았어요. 제가 이전부터 거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뭘 아직까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온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너도 참,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자취한다고 집 나가서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그렇다고 주말마다 집에 들르는 것도 아니고. 방학 때도 사정사정을 해야 한 번 들를까 말까 하잖니. 막내 너, 엄마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

전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대충 모자를 덮어쓰고 현관 밖 복도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엄마는 그동안 뭐가 그리 섭섭했는지 끊임없이 하소연을 늘여 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큰 집에 아들, 딸이라고 낳아놨더니 다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독립한다고 나가버려 서운하다는 등, 외롭다는 등의 투정이었다.

우성 오메가로 자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곱게 자라 와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나이에 안 맞게 철부지 같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막내인 자신은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인지 이미 클 대로 컸음에도 여전히 마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형이나 누나한테는 연락도 잘 안하면서 나한테만 난리라니까.

[듣고 있니, 켄지?]

. 듣고 있어요. 아무튼 전 진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니, 너도 정말. 그래, 이유나 한 번 들어 보자. 대체 형이랑 누나랑 아버지까지 다 온다는데 너만 왜 안온다고 버티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엄마 체면이 있지!]

자식이 몇인데 거길 우르르 갈 필요가 있어요? 전 빼주세요.”

[켄지! 정말 끝까지 이럴 거니!]

엄마야말로 이제 적당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눈을 한 카마사키 씨가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누가 보면 어쩌려고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거야? 들어가라고 입을 뻐끔거리자 멍청하게 서 있던 카마사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따 들어가면 한 소리 해야지, .

[엄마도 이제 더는 못 참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번에는 절대로! 오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이 매정한 녀석아!]

분에 받힌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엄마, 하고 부를 틈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끌고 갈 생각인 듯하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엄마에게 막내다운 살가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무참하게 씹혔다.

집에 들어가니 카마사키 씨는 빨랫줄에 널린 덜 마른 빨래마냥 소파에 엎드려 늘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오전의 밝은 햇빛이 비쳐 들어와 안 그래도 밝은 카마사키 씨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났다. 동그란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니 강아지처럼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기분을 또 묘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어머니셔?”

목이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데다 모래알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비단 아침이어서가 아니라 어젯밤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던 것도 한 몫 했을 테다. 카마사키 씨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쿠션에 얼굴을 푹 묻은 게 맛이 간 제 목소리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닌 모양이다. 이제껏 세지도 못할 정도로 경험했으면서 내숭은. , 아직도 첫날밤 지낸 새색시마냥 창피해 하는 게 카마사키 씨다워서 재밌긴 하지만.

, 언제나 하는 안부 전화죠.”

안부 전화라고 하기엔 네 표정이 영 별로던데. 엄마한테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제가 어떻게 하는데요, 카마사키 씨?”

.”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을 내려 턱을 잡고 들어 올렸더니 카마사키 씨는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입술이며 눈이며 퉁퉁 부어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못생겼어. 근데 이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니 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나 보다.

손 놔라.”

제가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주는데요. 그런 말 하면 섭섭하잖아요.”

아침부터 정신 나갔냐.”

카마사키 씨가 어떻게든 부은 눈을 뜨려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사적인 얼굴 위로 손바닥을 덮어 눈가를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니 카마사키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려 왔다. 벌어진 틈 사이를 넘어 제 집처럼 활개를 쳤다. 맞닿은 부드러운 혀를 인사하듯 휘감아 올리고 보란 듯이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계까지 파고드는 침입자를 카마사키 씨는 괴로워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리듯 문을 열어주고는 벅찬 숨을 고른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주제에, 여전히 제게 얌전하다.

이런 점이 좋다.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아무 이유 없이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언제나 날 미치게 만든다. 너는 다르다고, 너만 특별하다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감정이 터질 줄 모르는 풍선처럼 자꾸만 커져간다. 이러다 어느 순간 팡,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이제 무슨 말로 내 감정을 당신한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다.

하고 싶어.”

더운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발정났냐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무언의 거부를 보인다. 카마사키 씨의 말대로, 아침부터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엎드려 있던 카마사키 씨의 위에 올라타며 입고 있는 거라곤 팬티밖에 없는 옷을 벗겨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 씨가 발을 휘두르며 밀어내려 하지만 팔에 닿는 다리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넌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 치곤, 읏차.”

……!”

기세 좋은데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카마사키 씨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채일 뻔한 걸 간신히 피하고 아까와는 달리 힘이 잔뜩 오른 양 다리를 잡아챘다. , 놓으라고! 성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카마사키 씨를 무시하고 빳빳하게 선 내 것을 카마사키 씨의 아래에 부딪혔다. , 슥 하고 아래위로 부드럽게 마찰하자 손에 잡힌 다리가 미칠 듯 요동을 쳤다. 하지만 자세가 불리해서 그런지 반항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사실 벗어나려고 하면 벗어날 수 있으면서 항상 이렇다니까. 그런 행동이 순순히 다리를 벌려주는 것보다 아래를 더 돋운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내가 좋아요? , 이것 봐.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벌떡벌떡 잘도 서네. 젊긴 젊어요, 그쵸?”

, . . 너 이 미친.”

좋죠. 말해 줘요, 좋다고.”

!”

말해 주세요, 카마사키 씨.”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했는지 카마사키 씨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괴롭히는 건 맞지만 뜻대로 말해주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게 괘씸했다. 서로의 것이 맞닿은 그대로 허리를 튕기듯 움직이며 동시에 카마사키 씨의 귓불을 깨물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 애원하듯 솜털이 간지러울 정도로 속삭이자 온 몸이 소스라치게 움찔거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순순히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조만간, 얘기해 볼까. 이제까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았던 진심을 고백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나올까. 역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창피해 하려나.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아 하겠지. 직접적인 고백은커녕 어렴풋한 가능성만 보인 말에도 못내 자신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좋아한다는 말에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

 

후타쿠치와 살게 된 이래 좀처럼 맞보지 못했던 한가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너무 한가로워서 혼자 있는 집이 썰렁하다 느낄 정도였다. 후타쿠치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말인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갔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마찬가지라 요 2주 간,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핏 듣기로는 집안 행사와 연관되어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냐 물어도 한숨만 내쉴 뿐 말해주지 않았다.

동거하고부터는 항상 회사와 집만 오고가는 생활을 하고, 여가 시간에 뭘 해도 후타쿠치와 함께였기에 몰랐는데 후타쿠치가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최근에는 습관처럼 심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여태껏 후타쿠치가 대놓고 눈치를 줘서 웬만해선 다른 사람과 약속도 못 잡았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이참에 모니와나 사사야, 혹은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오랜만에 집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안 그래도 집을 나오고부터 집이 적적해졌다며 외로워하시던데. 일단 점심을 먹고 전화를 해 봐야겠다.

집에 있던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렸다. 방에 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듯 했다. 혹시 후타쿠치인가, 화면을 확인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번호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이름도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어 광고인가 넘겨짚고 수신거부를 눌렀다. 어디서 개인 정보가 샜는지 최근 광고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똑같은 번호로 전화가 다시 왔다. 광고가 아닌가.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모르는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누구세요?”

[. 저 히로키예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흐릿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에 몇 없는 잘생긴 사람인데다 하도 성격이 살가워서 그랬는지 몇 주 전의 일인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 인상이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또 만나자고 말했었지. 연락처를 교환할 때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하기에 예의상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기억나. 근데 무슨 일로.”

[다행이다. ,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오늘? 시간은 있는데 왜?”

[아는 사람한테 영화표를 선물 받았는데 같이 영화 볼 사람 하나 없는 거 있죠? 그때 딱, 형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어요. 다행이다, 시간 있으시구나! 근데 주말인데 애인 분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히로키는 요즘 제일 재밌는 영화가 마침 2시간 뒤에 있다며 만나자고 말했다. 히로키가 말한 영화는 2주 전, 후타쿠치와 보려다 결국 못 보게 된 영화였다. 후타쿠치도 없고,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도 싫어서 누군가 만날까 생각하던 참이라 히로키에게 알겠다고 말하자 히로키는 들뜬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물었다. 본인은 영화 볼 사람도 없다고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뭘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나를 따르는 것 같더라니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지 모르겠다. 그저 사교성이 좋다고 보기엔 지나친 감이 있어 보였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 할게요. .]

그래, 이따 봐.”

[. 이따 볼게요, !]

말끝마다 형을 붙이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히로키의 형, 형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그것도 몇 십분 밖에 못 만난 사람한테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한단 말이야. 여자였으면 첫 눈에 반했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남자가 이러니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다단계나, 보증 같은 사기 치려고 이러는 건가? 본래 사기꾼이 제일 친절하고, 말도 잘하고, 의외로 겉보기도 멀쩡하다고 하던데. 하나, 하나 다 히로키잖아.

나갈 준비를 하려다 잠시 소파에 앉았다. 작정하고 속이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둔한 자신은 홀딱 넘어가 버릴 거다. 확실히 뭔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히로키를 사기꾼이라고 단정 짓기도 뭐하다. 원래부터 그런 애일 수도 있는데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봤을 때는 전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동생 삼고 싶다 생각했었지.

그래,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거겠지. 사람이 너무 착해도 남에게 의심 살 수 있겠구나, 내심 다짜고짜 의심부터 해버려 미안하다고 허공에 대고 히로키에게 사과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하도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매번 의심부터 하는 게 버릇이 된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그 자식은 대체 언제 어른이 되려나.

 

 

히로키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다 갈 때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착하면 전화하기로 했으니 히로키인가 싶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후타쿠치였다. 일이 꽤 많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매여 있어야 한다고 했던 터라 더 바빠지기 전에 전화를 건 듯했다. 이번 주 들어서는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지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왔다.

[뭐해요? ?]

아니, 밖인데.”

[그런 것 같네요.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 누구 만나기로 약속 했어요? 어젠 별 말 없었잖아.]

확실히 어제까지도 별 말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집에 가봐야 한다면서 투덜거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었다. 아는 사람 만나, 라고 말했더니 후타쿠치가 아는 사람 누구, 하고 물었다. 히로키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2주 전에 미팅에서 본 사람?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동생? 머뭇거리는 사이 후타쿠치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히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살살 흔들며 다가오는 걸 보는 사이에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는 사람, 누구.]

, 친구 아는 동생. 저번에 어쩌다 알게 됐어.”

[바로 대답 못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뭐야, 사실대로 말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진짜 그걸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거든. 아까 전화 왔는데 공짜 영화표 생겼다고 그래서 만난 거야.”

[여자?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왜 같이 영화를 봐요? 그 여자는 친구 하나 없데요? 아니, 친구가 없다고 해도 왜 굳이 카마사키 씨랑.]

, 남자야, 남자. 혼자 보긴 싫은데 이 시간에 한가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보지.”

! , 통화 중?”

[……? , . 카마사키 씨.]

, 나 잠깐 전화 좀. 후타쿠치?”

[…….]

통화 소리가 들릴까 히로키에게서 조금 떨어져 건물 구석으로 갔다. 후타쿠치, 부르는 소리에도 저쪽에선 숨소리만 들리고 대답이 없었다. 사귀던 초반에는 내가 누굴 만나던, 뭘 하던 별 관심도 없던 놈이 언젠가부터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친구든 가족이든 누가 되었건 후타쿠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늘 후타쿠치 중심으로, 모든 시간은 후타쿠치와 함께 보내길 원했다. 물론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할 리가 없다. 다만,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타인과 거리를 두길 원하는 게 나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이미 바람 난 전과가 있는 애인마냥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욱하는,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한숨이 나왔다. 내가 뭐 24시간 전담 대기조야, 뭐야? 저는 갈 데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하고 다니면서.

후우. 후타쿠치. 여보세요?”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하더니, 벌써 형 소리 듣는 사이인거네요? 보통 친해진 게 아닌가본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혀에 가시가 돋쳤는지 말끝마다 빈정대는 어조로 말하는 게 얄미워서 눈앞에 있었다면 발로 한 대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내가 나이가 많고 아는 형 친구니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보다 별로 안 친하다니까 왜 자꾸 빈정거리는 건데? 그리고 막말로 걔랑 내가 친하면 뭐. 뭐 어쩔 건데! 내가 게이도 아닌데 걔랑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그러냐? ?!”

[뭐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내가 이러는 게 한, 두 번 일인가? 그리고 애인이 난데없이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영화 보러 간다고 시시덕거리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그럼 냅다 잘 다녀와라 그래요? 것보다 그 새끼가 뭔데 그렇게 감싸주면서 나한테는 화를 내는 거예요?]

시시덕거린 적 없어!! 그리고 얘는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난 뭐 사람도 못 만나?! 내가 죄수야, 뭐야?!”

[시시덕거렸던 아니던, 상대가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싫다고요! 영화는 나랑 보면 되지, 다른 사람이랑 왜 봐요?!]

됐다, 됐어. 이 얘긴 나중에 집에 오면 다시 해.”

[, , 카마사키 씨!]

끊는다.”

뭘 잘했다고 신경질 팍팍 쓰면서 소리치고 있어? 도저히 후타쿠치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여자였으면 이 자식은 분명 의처증 남편 소리 들었을 게 뻔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피했는데도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얼굴로 몰리는 시선이 따가웠다. 대화 내용을 통해 나를 애인 몰래 바람피우는 게이로 보고 있는 모양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억울하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멀리서도 형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아하하.”

, 그래? , 들었어?”

히로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남잔데도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꼭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주위 사람들이 히로키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역시 이런 애가 사기꾼일 리가 없지.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그 땐 정신이 이상했던가 보다. 선하게 웃는 히로키를 보며 반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지라 높은 기대치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정말 환장하게 재밌었다. 화려한 액션 신과 선명한 색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운드에 눈과 귀가 즐거웠고, 곳곳에 숨겨져 있던 복선들을 회수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여운이 넘치는 엔딩까지 가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 했다. 괜히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던 게 아니었다.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조금 아쉽기도 했다. 원래라면 벌써 한 번 보고도 두, 세 번은 더 봤을 영화였는데. 평소엔 팜플렛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느라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가방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시간 나면 다음에 같이 올까.

진짜,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쵸, ! 제가 본 영화들 중에 세 손가락에 꼽힐 것 같아요.”

상영관을 나오면서 히로키는 연신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온몸으로 재밌었다는 걸 표현하는 게 의외였다. 겉모습은 꽤 성숙한데 하는 행동은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흥분했더니 배고프다. 형도 배고프죠? 근처에 제가 좋아하는 가게 있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요.”

? 그게.”

거기 진짜 맛있는 집인데. 지금까지 누구 데려갔다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요. 게다가 지금 시간이라면 웨이팅도 없을 테니까 딱 좋겠다!”

가요, 얼른 가요!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보다 히로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긴 평소보다 훨씬 영화에 몰입했던 만큼 배가 고프긴 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한데다 어차피 후타쿠치는 오늘도 밤늦게야 집에 올 것 같으니 히로키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그러고 보니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아무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는 거야 늘 있는 일상이지만, 싸우고 나서 메시지 하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싶다. 평소 같았으면 사과인 듯 사과 아닌 투정을 부리는 메시지가 와 있을 법 한데.

조금 심했나.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집착이 심한 걸 가지고 내가 너무 나무랐나? 제대로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삐친 건 아닐까. 아니, 아니지. 그러게 누가 이런 일로 의심부터 하고 빈정거리래?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부터 낸 건 후타쿠치였다. 저는 매일같이 놀러 가고 뭐하는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주제에 나한테만 이러는 게 어디 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기분이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이번엔 절대 사과를 받기 전까지 화해하지 말아야지. 언제까지고 후타쿠치한테 일일이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 그렇지.

그래. 저녁은 내가 살게.”

정말요? 그럼 사양 않을게요. , 그럼 사람들 몰리기 전에 얼른 가요.”

상대방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 느껴 보라 이거야, 후타쿠치 자식. 너도 내가 언제 올지 모른 채로 그 텅 빈 집에 혼자 있어 보라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다 히로키에게 충동적으로 저녁 먹고 술도 마시러 가자고 말했다. 아예 자정을 넘겨서 가버려야지. 의지를 다지는 내 옆에서 히로키가 충견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들뜨다 못해 하늘을 날아다닐 것처럼 얼굴을 상기시키는 모습에 괜히 멋쩍어졌다. 이렇게 기뻐하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근데 얘는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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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큐피트(Cupid)

2017. 8. 12. 04:03 from
-엄청 가볍게 휘리릭 쓴 글



"부탁이 있어요."
헛 것을 들었나. 카마사키는 귀가 이상해졌나 싶어 귓구멍을 파봤지만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얼굴 가득 물음표가 달려 있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부탁 좀 들어 주세요, 카마사키 씨. '부탁'이라고? 지금 나한테 '부탁'이 있다고 말한 게 맞나? 앞에 서 있는 후배가 내가 알던 그 시건방진 후타쿠치가 맞는 건가?
"뭐라고?"
"...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벌써부터 귓구멍 막혔어요? 부탁 좀 들어 달라고요."
"아... 후타쿠치가 맞긴 하군."
평소의 톡 쏘는 말투가 돌아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아까는 영 후타쿠치답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됐나 싶었었다. 그보다 후타쿠치가 '부탁'이란 말을 쓸 정도로 뭘 부탁하고 싶은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대체 뭐지?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미리 말하지만 물어봤다고 해서 들어준다는 건 아니야."
"...해요."
"뭐? 똑바로 말해. 하나도 안 들려."
"...모니와 씨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요."
분명 귀가 이상한 게 아닌데 또 헛 것이 들렸다. 모니와랑 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카마사키의 시선을 피하며 후타쿠치가 답지 않은 얼굴로 재차 말했다.
"제가 ...모니와 씨를 좋아하거든요."
"...하?"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수줍은 소녀처럼 말하는 저 녀석이 정녕 후타쿠치인가? 누가 후타쿠치의 탈이라도 쓴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녀석답지 않아 등 뒤로 소름이 끼치는 듯 했다. 평소같지 않은 후타쿠치에 당황한 카마사키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후타쿠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한 번 쉼호흡을 하더니 덥썩 카마사키의 어깨를 잡았다.
"카마사키 씨가 늘 말하던 B반의 타카하시 있죠."
"어, 어어...?! 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알 바 아니고요. 제가 모니와 씨랑 잘 되면 타카하시 소개해 드릴게요."
후타쿠치가 갈색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카마사키는 순간 동그란 갈색 눈이 인상 깊었던 타카하시가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교내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해 자꾸 신경 쓰이던 그녀였지만 쑥스러워서 말 한 번 걸어본 적 없었는데! 후타쿠치가 타카하시에 대한 제 은근한 마음을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둘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마사키는 어깨에 놓인 후타쿠치의 손을 떼내고는 힘껏 마주 쥐었다.
"나만 믿어라, 후타쿠치!"
후타쿠치가 빙그레 웃으며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근데 너 게이였냐? 니가 모니와를 좋아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게이라기보다는... 남자가 좋다는 생각은 모니와 씨가 처음이거든요. 그럼 바이가 되나? 바이인가 본데요?"
남의 말하냐?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데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하나도 없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이런 문제에까지 가볍다니 두 손 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데? 고백하는 거?"
"뜬금없이 뭔 고백이에요. 진짜 연애 한 번 못 해본 거 티내지 좀 말아요, 촌스럽게."
"그럼 뭐 어쩌라고. 도와달라는 자식이 뭐 이런 태도야?"
"다 A부터 Z까지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말하자면 저는 아직 고백할 단계는 아니라는 거죠. 모니와 씨랑 선후배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고요. 알아 듣겠어요?"
지금 고백했다간 마냥 어색해질 뿐이라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런, 유치원생한테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났다. 지는 뭐 처음부터 연애 잘했나? 잘난 척은.
"그러니까 뭐. 본론부터 얘기 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카마사키 씨는 모니와 씨랑 친구잖아요. 모니와 씨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세요."
"모니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뭐가 궁금한데?"
"기본적으로 뭘 좋아한다든지, 취미는 뭐고 이상형은 누군지. 보통 주말에는 뭘 하는지 등등. 카마사키 씨가 상상을 해 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뭐가 궁금하겠어요? 예를 들면 타카하시한테."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가만 타카하시를 떠올렸다. 사실 카마사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같은 학교, 한 살 연하라는 것과 외모가 귀엽다는 것밖에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까 다 궁금한데."
"그러니까 뭐든지 저한테 알려 달라고요. 이제 감이 좀 잡혀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잠깐 기달리라고 말하고는 후타쿠치는 제 가방에서 노트 하나와 볼펜을 꺼냈다. 대뜸 뭐하자는 거지?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후타쿠치가 울컥 짜증을 냈다.
"안 말해주고 뭐 해요?"
그걸 또 적어두려는 거였군. 후타쿠치는 벌써 볼펜을 손에 쥐고는 카마사키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받아쓰기 시험에서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초등학생 같아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 쓴다, 애 써."
킥킥대는 카마사키에게 열 받은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어깨 위를 볼펜 꼭지로 푹푹 찔렀다. 아프다고 피하면서도 카마사키의 웃음소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모니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날부터 후타쿠치는 틈이 날 때마다 카마사키를 찾아왔다. 연습시간에는 대부분 모니와와 함께 있으니 다가오는 건 그렇다 쳐도, 점심시간에도 3학년 교실 안으로까지 들어온다. 모니와를 보고 싶기는 한데 직접 찾아가기에는 일일이 핑계를 대는 것이 골치 아파서 아예 카마사키에게 가는 거였다. 처음엔 모니와의 반인 C반을 냅두고 왜 우리 반에 오는지 몰랐던 카마사키는 우연히 C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후타쿠치를 보고 깨달았다. 후타쿠치는 여기까지 뻔뻔하게 와 놓고 정작 모니와가 있는 교실 문턱은 넘지도 못하고 있는 거였다.
평소 행실대로 가벼운 연애만 하고 상대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시 할 것 같은 녀석이 중학생처럼 안달나 있는 모습이 너무 의외여서, 카마사키는 태연한 척 교실 안을 훔쳐보는 후타쿠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녀석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거겠지? 어떻게 사람이 아예 변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후타쿠치는 모니와를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다가가는 것도 망설이는 거지? 후타쿠치가 C반을 지나쳐 2반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 카마사키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부실에서 일지를 쓰던 모니와가 괜히 뺨을 긁으며 말했다. 카마사키는 그제야 제가 모니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거 아냐. 다 써 가냐?"
"으음. 조금만 더 쓰면 돼. 일부러 기다리게 해서 미안."
"괜찮아요, 모니와 씨. 카마사키 씨한테는 어차피 남아 도는 게 시간이니까요."
카마사키의 옆에 앉아 빈둥거리던 후타쿠치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은 틈만 나면 왜 나를 걸고 난리야? 동네 북이 따로 없다. 카마사키는 발을 뻗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건방진 자식, 선배도 모르는 놈, 이중인격 같으니.
"무슨 개소리냐.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뭘 안다고,"
"미안, 카맛치! 나 때문에..."
"아냐,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저 자식이 괜히 시비 걸어서 그런 거지. 넌 안 바쁘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할 일 없으면 가서 청소나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제 몸을 밀어내는 카마사키의 발을 잡아채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카마사키의 자세가 무너졌다. 저 자식이!
"신경 안 써주셔도 알아서 잘~하거든요?"
"이거 놔, 놓으라고."
"먼저 건드린게 누군데? 하여간 카마사키 씨가 말끝마다 튕기니까 제가 자꾸 건드리고 싶은 거 아니에요."
"튕기긴, 젠장, 개소리 하지 말고 놓으라고!"
카마사키의 발버둥에도 후타쿠치는 안간힘을 쓰며 카마사키의 발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둘 다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니라 모니와가 일지를 다 쓰고 나서 두 사람을 말리러 올 때까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엎치락 뒤치락 거렸다. 땀이 뻘뻘 나서는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모니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네 정말 사이 좋다. 응?"
"사이가 좋긴 누가, 저런 이중인격이랑!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저야말로 고릴라같은 선배랑은 친해질 마음 하나도 없거든요!"
너 말 다했냐, 카마사키 야말로 나이도 많으면서 초딩이냐. 가만히 냅두면 밤이 샐 때까지 저러고 있을 터라 모니와는 부실 불을 꺼버리고 문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후타쿠치와 카마사키가 부랴부랴 뛰쳐 나왔고 둘의 신경전도 끝이 났다.

[주말에 약속 잡아요]
부실 문을 잠그는 모니와의 뒤에서 후타쿠치가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 내내 이제는 슬슬 모니와와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그러더니. 후타쿠치가 모니와 쪽으로 턱을 까닥이며 카마사키에게 눈치를 줬다.
'타.카.하.시.'
소리없이 후타쿠치가 입술을 움직여 타카하시의 이름을 강조했다. 아, 타카하시. 카마사키는 왠지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교내에서 타카하시와 마주친 것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그 날 하루가 구름 위에 선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었는데.
뭘까? 카마사키는 순간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러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몰래 당황을 삼키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의 시선이 날아왔다. 후타쿠치는 왜? 하고 입술을 오므리고는 속삭였다. 그에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려 할 때, 모니와가 뒤를 돌았고 동시에 후타쿠치의 시선이 움직였다. 자석처럼 모니와를 향해.
"갈까?"
그래, 대답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약속, OK
. 모니와의 등 너머로 카마사키의 고갯짓을 발견한 후타쿠치가 들뜬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설레면 원래 저렇게 빛나 보이는 건가? 왠지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따라 웃었다.

모니와는 주말에 약속 있냐는 말에 눈동자를 댕그르르 굴리더니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심심해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같이 보러 가자든가, 서포터를 사러 가자든가(카마사키는 자신이 서포터를 안 낀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하다못해 연습 하자든가 카마사키는 핑계를 댈 생각도 못했다. 그냥이라니 모니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그러자고 말했다. 뒤늦게 후타쿠치도 함께라는 말을 하자 모니와가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약속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단지 무슨 이유로 만나자는 건지 궁금해하는 듯 긴장한 얼굴을 했다.
[약속 잡았어. 근데 만나서 뭐 하려고?]
집에 도착해 바로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도착했다.
[뭐라고 하면서 약속 잡았는데요?]
[그냥]
[그러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이라고 했다니까. 그냥 심심해서.]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왔던 답장이 몇 분이 지나고도 오지 않았다. 설마 문자 보내다 잠이라도 들었나? 카마사키는 답장이 안 오려나보다 생각하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방에 돌아오자 핸드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 대체 뭐야?
<뭐야, 왜.>
<뭐야, 왜?? 대체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후타쿠치가 미친듯이 짜증을 내며 말을 쏘아붙였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무리 내가 약속을 형편없이 잡았다고는 해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그래도 아까부터 기분 잡쳤는데 후타쿠치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야. 너야말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지 마라. 내가 제대로 말 못한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기냐?>
<......미안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러게 왜 약속을 잡아도 그렇게...>
아니아니, 이제 됐어요. 흥분으로 커졌던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나 한 번 상한 기분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대충 후타쿠치에게 약속 일정만 말해준 뒤 뭐라 말을 걸으려는 후타쿠치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중인격 같으니.
카마사키는 젖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안하고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한데 뭐 때문에 자신이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끝없이 답답하고 우울해져 갔다.
...외로워서 그런가. 분명 자신은 후타쿠치가 누군가를 애가 타게 좋아하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이래서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이라고 하는가 보다. 카마사키는 하루라도 빨리 모니와가 후타쿠치와 잘 되어서 타카하시를 소개받기를 바랐다. 나도 연애를 하면 외롭지 않게 될까? 사소한 거에 기뻐하며 빛나는 웃음을 짓게 될까? 카마사키는 그 때 봤던 후타쿠치를 생각하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카마사키가 아무렇게나 잡은 약속을 후타쿠치가 뭐라 수습했는지 모니와는 들뜬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낯선 조합에 긴장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영화보러 가자는 걸 제가 카마사키 씨한테 부탁했다고 말했어요."
"어."
"......"
"뭘 쳐다 봐. 왜? 할 말 있냐?"
"저번에는 제가,"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그 땐 미안했다. 좀 예민해져 있었나 봐.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모니와랑 잘 해 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괜찮다고 말했는데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무시하고 영화 포스터에만 주구장창 바라봤다. 카마사키의 취향도 아니고, 좋아하는 배우도 안 나오지만 포스터를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멀뚱히 후타쿠치와 모니와가 잘 되가는 꼴을 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서 그러니까 괜히 자신이 외로워지는 거다.
후타쿠치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서 포스터를 뺏어 갔다. 시선을 들자 후타쿠치가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 받아 하는 얼굴은 본 적 있지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 때문에? 카마사키가 왜 그러냐는 말을 하려는 찰나 후타쿠치가 도리어 물었다.
"화 났어요?"
"뭐?"
"저번에 그런 말 해서, 화 났냐고요. 왜 저 무시해요."
"화 안 났다니까. 나한텐 신경 끄고 넌 모니와나 챙겨. 기껏 약속 잡았는데 나랑 싸우면 뭐가 되겠냐?"
"......"
"가 봐. 나 진짜 화 안 났어."
다시 포스터를 뺏어 들고 손을 젓자 후타쿠치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모니와에게 갔다. 그래, 넌 얼른 모니와랑 잘 되서 나한테 타카하시나 소개 시켜 주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 카마사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씨에 애써 읽으려 노력했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 살면 안 된다고, 어른들이 툭하면 그러는 걸까? 허전한 옆자리도, 시큰거리는 가슴도, 답답한 기분도 무엇 하나 짜증나지 않은 게 없다. 내가 혼자라 그런가. 카마사키는 앞 좌석의 모니와와 후타쿠치를 보며 시큰둥하게 외로움에 대한 고찰을 했다. 관심도 없고 취향도 아닌 영화따위 애초에 볼 마음도 없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운드와 현란한 화면을 보다 카마사키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닥거리는 두 사람만 관찰했다. 이중인격. 후타쿠치는 아까 저와 실랑이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내내 싱글벙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모니와도 영화가 재밌는지 동그란 얼굴이 밤송이처럼 더 동그래 보였다.
살 맛 났구나. 완전히 커플 같아 보이는 모양새에 카마사키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 때 후타쿠치가 뒤에서 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보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잘 되가고 있다는 걸 확인해주는 그 잘난 웃음에 카마사키는 마주 웃어주지 못했다.
바라던 대로 다 잘 되가고 있는데. 후타쿠치는 모니와와 사귀고, 카마사키는 타카하시를 소개 받고.
곧 외롭지 않을 텐데, 왜 이다지도 가슴이 답답하고 모든 걸 후회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후타쿠치는 젤리를 질겅이며 내내 흥얼거렸다. 토요일에 모니와랑 영화를 봤던 기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C반으로 가버리지 왜 또 우리 반에 오는 건지.
"잘 되가냐?"
카마사키가 떠보듯이 말하자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말해 뭐하냐는 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도, 젤리가 질겅거리는 소리도 가만 있자니 짜증이 났다.
"그럼 C반에 가지, 왜 우리 반에 와? 안 그래도 2학년이 뻔뻔하게 3학년 교실 들어온다고 뭐라 한다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다."
"이상하네. 나한테 그런 말 한 사람 없는데. 그리고 같은 학생인데 3학년 교실이라고 못 들어갈 건 또 뭐야."
"3학년은 다들 너랑은 달라서 예민하거든? 알면 우리 반엔 이제 오지 마."
카마사키는 턱을 괴고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귀찮고 거슬리니 너네 반으로 가든지 모니와한테 가버리라는 듯 손을 내젓는 그의 뒤에서 후타쿠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카마사키 씨도 요즘 되게 예민한 거예요? 취직 못할까봐 걱정되서 그러는 거죠?"
"너! 너... 이..."
뭐라고 한 번 해보라는 듯한 얼굴에 헛소리 하지 말라든가, 닥치라든가 내뱉으려던 카마사키는 휙 고개를 돌려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지뢰를 밟혔음에도 지금은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카마사키가 반응을 안 하자 후타쿠치는 오히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야. 진짜 취업 못할까봐 신경 써요?"
"......"
"그래서 요즘에 기운이 없었던 거예요? 그거 때문에?"
"신경 꺼. 점심시간 다 끝나가니까 너네 반으로 가라, 이제 좀."
"대답해봐요. 정말 그것때문에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는 거냐고요."
이 자식이 비유를 해도 그딴... 카마사키는 화낼 기력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후타쿠치가 어떻게 받아들이던 지금은 그냥 우울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힘없이 펄럭이는 나부랭이처럼 손을 흔들자 후타쿠치가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가버렸다. 자식, 말 한 번 참 잘 듣는다. 곁에 있어도 거슬리고 없어도 거슬리는 모순된 기분에 카마사키는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슬슬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최근 자꾸 기력이 없어지는 것 같다.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려퍼졌다. 5교시는 영어라 듣기 싫어도 일어나 있어야 했다. 영어 선생님인 가와시마는 노처녀라 그런지 유난히 히스테릭해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꼴을 가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실 뒷편 사물함에서 영어 교과서를 꺼내려 일어나는데 뒷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문을 열 사람은 선생님뿐이 없는데 가와시마가 뒷문을 열 리가 없었다. 교실이 웅성거리며 뒷문을 연 사람에게로 이목이 주목되었다. 놀랍게도 후타쿠치가 서 있었다. 후타쿠치는 사물함 옆에 서 있던 카마사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어?"
"기운 차리라고요.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거 아니잖아요."
뛰어 왔는지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넥타이고 셔츠고 흐트러져 있는 모양새에 카마사키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후타쿠치가 억지로 카마사키의 영어 교과서 위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모나카였다. 가끔 당길 때마다 카마사키가 종종 사먹곤 하는, 매점에서 파는 모나카.
"......"
"...어..."
"......"
"너, 교실은..."
후타쿠치는 할 말을 쉬이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뒤늦게 카마사키가 시간을 확인하고 후타쿠치를 교실에서 내보내는 순간 앞문으로 가와시마가 들어왔다.
"뭐야! 거기, 2학년 아니야? 종이 울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 교실 하나 못 찾아가? 너! 2학년 몇 반이니!"
"아, 가와시마 선생님. 얘는 제가 뭘 부탁해서..."
일 났다. 가와시마가 오기 전에 내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놀라는 바람에 후타쿠치를 보낼 생각을 못했다. 게다가 2학년이니 잘못 하면 완전히 눈 밖에 날 상황이라 카마사키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카마사키의 앞으로 후타쿠치가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가 모범생인 척 눈썹을 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가와시마 선생님. 종이 울린 줄 미처 몰랐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수업을 시작해야 하니 나중에 따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뭐, 뭐어... 그, 그러렴. 얼른 너네 반으로 돌아가도록 해."
"실례했습니다."
후타쿠치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가와시마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교과서로 감쌌다. 하여간 뭐든 잘생겨야 되는 구나. 카마사키는 자리로 돌아가며 뒷문을 흘끗 보았다. 문을 닫는 틈 사이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후타쿠치는 모범생 가면을 벗고 피식 가볍게 입술을 휘었다.

믿기진 않지만 후타쿠치는 자신을 신경써준 거였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매점까지 가서 모나카를 사온 것이며, 제 앞에 서서 가와시마에게 죄송하다고 한 것이며. 대체 후타쿠치가 답지 않게 왜 그랬을까?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주고 간 모나카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모나카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말해준 적이 있나? 모나카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노인네 취향이라며 놀려댈 게 뻔해서 비교적 친한 사람들만 아는 사실인데.
아, 그러고보니 말했었다. 후타쿠치가 모니와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을 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라는 이유로 후타쿠치는 모니와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을 카마사키에게도 던지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자신에 대한 것도 말했었다. 말해 놓고도 후타쿠치가 기억해줄 줄은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녀석 의외로 기억력이 뛰어난 편인가 보군. 카마사키는 모나카를 먹을 생각은 안하고 손 안에 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기만 했다. 어쩐지 포장을 뜯고, 모나카를 먹어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점에서 파는 거일 뿐인데 누가 줬다는 것 만으로 의미가 부여된다니 참 허무하고 씁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나카를 먹어치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먹든 먹지 않든 어느 쪽이든 허무함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후타쿠치에 대해 궁금해졌다. 단순히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생일은 언제이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와 같은 기본적인 건 이미 알고 있다. 후타쿠치가 제 입으로 떠들어댈 때는 들어서 뭐하나 싶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들어놓길 잘했다 싶었다. 이토록 누군가 궁금해질 줄은 몰랐다. 카마사키가 무엇보다 후타쿠치에게 궁금한 것은, 후타쿠치의 마음이었다.
"넌 모니와가 왜 좋아?"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의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자니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도 카마사키가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괜히 물어봤다. 마음 속으로 땅굴을 수십 번을 파며 후회했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그냥, 그냥 궁금했다고 해 버릴까.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여려는 동시에 후타쿠치가 선수를 쳤다.
"왜 좋아하냐구요?"
"어, 어어...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니와는 남자인데 왜 좋아하나... 그냥 궁금해져서."
"으음."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것 같던 후타쿠치는 눈마저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이 좋아하는 이유가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걸까? 카마사키는 이런 게 왜 궁금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유를 몰라 답답하면서도 후타쿠치가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체 나는 저 자식에 대한 게 궁금해도 이딴 게 제일 궁금할까? 카마사키가 제 마음을 헤아려보는 동안 고민을 마쳤는지 후타쿠치가 눈을 떴다.
"착해서."
"... 그 뿐?"
"...작아서?"
"왜 의문형이냐?"
"...귀여워서...?"
왜 하는 말마다 이딴 식이지? 혹시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건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제대로 된 대답을 강요했다. 그러나 후타쿠티는 세 가지까지 말하고는 그만, 하고 외쳤다.
"아! 이딴 게 뭐가 중요해요.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지. 그보다, 이게 왜 궁금해요?"
"어?"
"내가 모니와 씨를 왜 좋아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왜 궁금해하는 거냐고요."
후타쿠치의 얼굴이 다가오면서 갈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깝게 보였다. 부담스러워 얼굴을 치우자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도망가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팔을 잡아챘다. 왜? 후타쿠치가 물었다. 물어봐주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냥."
"그냥?"
"...그냥 궁금했어."
진짜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물었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너가 좋아하는 사람을 너는 왜 좋아하는지. 왜 그 사람 앞에서 항상 빛이 나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지.
그냥...
인정한다. 난 어떻게 하면 너가 날 좋아해 줄 수 있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그것만 궁금했다.

[이번 주말에 약속, 중간고사]
한동안 뜸하더니. 카마사키는 어느새 와 있었던 문자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친절하게 핑곗거리도 가르쳐주다니 정말 애를 쓰는군.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으아아악, 하고 소리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사랑의 큐피트같은 걸 자처해서 이 지경이 되었나. 도와달라는 놈에게 반해버린 제 꼴이 처량하다.
그러지 말걸. 타카하시 따위, 귀엽긴 하지만 어차피 사귈 가능성도 없었는데 넘어가지 말걸 그랬다. 애초에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수백번을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제 와 후회를 해봤자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마사키는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이대로 고백도 못하고 차이는 건가. 남자한테 고백할 생각을 다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제 꼴이 우스운데 차이는 게 당연하다는 게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도와달라고 말만 안했어도 똑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나쁜 자식. 모든 일의 원흉 같으니. 짜증나는 놈. 어쩌다 저런 놈이 좋아졌을까.
아는 욕을 모두 후타쿠치에게 쏟아내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답장도 안한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문자를 보냈나.
[고백할 예정]
나쁜 개새끼. 나는 차일 게 뻔해서 고백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지는 잘 되가고 있다 이거지? 후타쿠치 개자식. 카마사키는 베개가 터질 때까지 울분을 쏟아냈다. 도움도 안 되는 자식! 개자식!
차마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혼자 화를 참다가 우울해졌다가 짜증을 냈다가 기어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슬퍼서는 아니고 분해서였다.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후타쿠치는 그렇다 쳐도, 카마사키에겐 모니와 또한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잘 되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시험기간에는 종종 모니와의 집에 가서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기에 주말 약속은 자연스럽게 모니와네 집에 가는 걸로 정해졌다. 후타쿠치는 모니와네 집에 처음 가는 거라며 전날부터 들떠서 전화를 걸어왔다. 속은 타들어가는데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 때문에 배가 아팠다. 카마사키의 사정을 모르는 후타쿠치는 근처 역에서 만나 같이 가자며 말했다. 그 말에 카마사키는 배가 아프다 못해 제 배가 뻥 뚫렸나 싶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탓이었다.
가뜩이나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데 고백에 들뜬 후타쿠치를 데리고 가서, 화기애애하게 고백 할 분위기를 만들고, 거기다 둘이 잘 되는 모습까지 내가 꼭 봐야 하나? 아니, 그런 변명을 내세울 필요없이 그저 싫었다. 도저히 못 볼 것 같았다. 어차피 잘 되가고 있다는데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러나 후타쿠치는 이제 둘이 만나도 괜찮지 않겠냐며 사양하는 카마사키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와준다면서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발 빼지 마세요. 차가운 말투에 핸드폰을 대고 있는 귀에서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결국 카마사키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참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어째서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걸까. 마음은 한 발자국도 집에서 나오기 싫었는데 몸은 머리와는 달리 잘도 움직였다. 카마사키는 가라앉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어 모자를 뒤집어 썼다. 모자를 쓰면 눈매가 더 사나워보여서 평소엔 질색을 하는데 얼굴을 숨기는 것에 있어선 모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비라도 오면 우산을 쓸텐데 날씨는 쓸데없이 화창했다.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예뻐서 더 짜증났다. 왜 하필 날씨도 이런거지.
"웬일로 일찍 왔네요? 전 이미 선물까지 준비했어요."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바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안그래도 쓸데없이 약속을 잘 지키는 자신에게 화가 난 참이었다. 일찍 도착하면 할 수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마음을 다잡을 새 없이 모니와네 집에 도착할 듯 하다. 카마사키는 모자를 다시 꾹 눌러쓰고는 후타쿠치에게 다가갔다. 평소보다 신경 쓴 태가 나는 후타쿠치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흘끗 시선을 주었다. 단지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있어도 잘생긴 놈이 그 주위를 환하게 비추듯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모자가 시야를 조금이라도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앞장섰다.

"뭘 선물까지 사 왔어?아무튼 고맙다. 아 그래도 집에 먹을 거 없었는데 같이 먹으면 되겠네."
차랑 같이 준비해갈게, 후타쿠치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모니와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방에 간 모니와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데리고 2층 모니와의 방으로 갔다. 카마사키야 워낙 둘 사이에 허물이 없다곤 쳐도 후타쿠치도 온다고 했는데 모니와의 방은 남자애의 방답게 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신경 좀 쓰지, 겉보기와 달리 깔끔한 걸 좋아하는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데나 앉아 있어. 얘는 사람이 온다는데 청소도 안 했네."
"왜 카마사키 씨가 치워요?"
"어? 그냥, 여기 오면 맨날 내가 정리해주거든. 내가 이런 걸 좀 못 참아서."
"흐응. 많이 와봤나 보죠? 너무 익숙한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카마사키 씨 방인줄 알겠어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건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날선 말투에 대꾸하려다 관두었다. 괜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진정하자, 카마사키.
"막연하게만 느꼈던 건데, 모니와 씨랑은 얼마나 친한 거예요? 두 사람이 제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것 같아서 조금 짜증나려고 하네."
손에 쥔 노트가 꾸깃하게 구겨졌다. 아, 이거 모니와 건데. 머리 한 편에 열 받지 말라는 만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전부터 쭉 조금씩 온도가 높아지던 가슴 속의 화는 식을 줄을 몰랐다.
"왜 대답을 안해요? 얼마나 친하냐고요. 설마 카마사키 씨, 모니와 씨한테 흑심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죠?"
"......"
"아니라고 해요. 지금 당장."
"......"
"카마사키 씨!"
대체 얼마나 모니와를 좋아하기에 그런 얼굴로 화내는 거지? 카마사키는 울컥 화를 내려다 후타쿠치의 애가 탄 얼굴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오해도,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이 상황도, 왜 이렇게 됐는지 가슴 속에 쌓인 억울함도,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비겁함도, 그 모든 것들을 쏟아내버리고 싶었는데. 넌 왜 모니와 하나때문에 세상이 다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사람처럼 초조해 하는 거야. 그런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게이도 아닌데 남자를 왜."
"......"
"너랑 모니와, 잘 되게 도와달라고 한 건 넌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냐?"
카마사키는 정리하던 것들을 마저 정리해 나갔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 모니와의 구겨진 노트가 보였다. 미안, 모니와. 내가 노트 망쳐 버렸네. 카마사키는 애써 종이를 펴보려 손바닥으로 노트 위를 꾹꾹 눌러봤지만 구겨진 종이가 이전처럼 말끔하게 펴질 리가 없었다. 이미 변한 것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백 잘 되길 빌게."
"......"
"너네 잘 어울려."
진심으로, 모자를 쓰길 잘했다. 카마사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야 후타쿠치 쪽으로 돌아섰다. 이 상황에서 공부라니 턱도 없다. 후타쿠치가 붙잡든 협박하든 가야 겠다고 다짐하며 카마사키는 바닥에 놨던 가방끈을 잡았다.
"역시 나 그냥..."
"어딜 가요? 나를 내버려 두고."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손목을 쥐고 말했다. 일전에 부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후타쿠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내가 더 센데도 불구하고 후타쿠치의 손 아래에선 무용지물이다.
"고백하려면 제3자는 빠져 줘야지. 니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너 고백하는 것까지 옆에서 들어줘야 하냐?"
"어린애 할게요. 그러면 죽어도 옆에 있어주기라도 할 건가요?"
"미쳤냐? 장난치지 말고 좋게 말할 때 이 손 놔라."
"싫은데."
개자식. 망할 개 같은, 이중인격. 너 때문에 나는 절대로 좋아할 일도 없을 녀석을 좋아하게 되버렸는데. 젠장. 빌어먹을.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 방향 그대로 카마사키를 밀어버렸다. 밀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카마사키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후타쿠치는 얼른 우위를 선점한 뒤 카마사키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자세를 다잡았다. 모자 아래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놓으라고,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싫은데."
"모니와! 모니와악!! 모,"
진짜 골때리네. 집이 떠나가도록 모니와를 부르는 카마사키를 내려다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목에 핏줄이 서도록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후타쿠치는 벌어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헉, 하고 카마사키가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후타쿠치는 본격적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후타쿠치의 혀가 카마사키의 입 안을 제맘대로 휘젖고 다니는 동안 카마사키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안심시키려는 듯 카마사키의 팔이며 얼굴이며 곳곳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굳어있던 몸이 점차 풀리면서 카마사키는 언뜻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끌거리는데 따듯해. 기분 좋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키스에 몰두해 있을 무렵 후타쿠치가 입술을 떼지 않고 웅얼거렸다.
"기분 좋아?"
"...응."
"내가 좋지?"
"...어?"
여직 쾌감에 잠겨 있는 카마사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는 듯 가볍게 키스하고 후타쿠치가 재차 물었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무슨 소리를,"
"그럼 평생 당신 게 되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뭘 했지? 가슴이 미친듯이 벌렁거렸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모니와, 모니와가.
"당신은 날 좋아해요."
"...웃기지 마. 저리 비켜."
"키스해줄게. 좋아한다고 말해 봐요."
"지랄하지 말고,"
"난 이제껏 지금만 기다려 왔어, 카마사키 씨."
그 순간 모자 챙 아래로 후타쿠치의 하관이 눈에 들어왔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과 그의 하관을 보며 일순 숨을 들이켰다. 웃고 있어.
"모, 모니와가."
"모니와 씨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니가 분명! 나한테 도와달라고, 모니와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
"그랬나?"
"이, 이 개 자식을 그냥. 미친놈. 너 때문에 내가, 내가...!"
속았다. 이 새끼가 날 감쪽같이 속이고 연극을 한 거였다. 카마사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들썩였다. 저런 새끼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민했는데. 이 망할 자식.
"내가 좋지?"
카마사키의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내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카마사키의 시야에 한 가득 후타쿠치가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빛나는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번 그 미소가 나를 향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었다. 기어코 카마사키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귓가에 후타쿠치가 속삭였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그럼 평생 카마사키 씨 옆에 있어줄 테니까.
"닥쳐, 이 망할 자식..!"
말이라도 못하면. 절대 가만 안 둘거다. 후타쿠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카마사키가 으르렁거렸다. 조금 젖은 눈가가 야하다고 생각하며 후타쿠치가 빛이 나도록 웃었다.




<Side track>

"부탁이 있어요."
뜬금없이 3학년 교실까지 찾아온 후타쿠치가 대뜸 말했다. 부활동 얘기는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부탁이라니 뭐를? 본능적으로 모니와는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어째 불안한데.
"카마사키 씨랑 잘 되게 부탁 좀 할게요."
 너네 화해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니와에게 후타쿠치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모니와 씨. 이렇게 감이 떨어져서야 어디 제대로 연애 해보겠어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겠죠?"
저, 저런...! 모니와는 부들부들 떨며 반박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딱 봐도 저보다 베테랑인 후타쿠치를 상대로 허세를 부려봤자 제 꼴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것을 과거 카마사키의 일화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후타쿠치와 카마사키의 실랑이를 옆에서 2년동안 봐 온 것이 이렇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너... 이렇게 해서까지 카맛치를 괴롭히고 싶은 거였어?"
초등학생 수준의 괴롭힘으로 아는 모니와가 후타쿠치에게 나무랐다. 탁, 후타쿠치가 제 이마를 감싸쥐었다. 선배를 과대평과했군요. 모니와 씨도 카마사키 씨만큼이나...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에 모니와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마사키 씨보다 별 나은 게 없군요, 모니와 씨. 공부 머리는 좋은데 이쪽은 영... 아무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말이죠...(생략)"
가만히 후타쿠치의 계획을 듣던 모니와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며 후타쿠치에게 말했다.
"후타쿠치 너... 카맛치를 좋아해?"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시합을 할 때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꾀를 부리는 건 나한테 통하지 않아,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타쿠치는 모니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기 입으로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비겁한 수였지만, 모니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후타쿠치가 너무나 환하게 웃어서 그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오히려 감격스러웠다.
"나만 믿어, 후타쿠치!"
이제야 좀 철이 드려나보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두 손을 잡고는 울먹거렸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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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되는대로 써버렸다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본심(本心)

2017. 8. 9. 20:36 from

[후타카마] 본심(本心)

 

 

[저게 뭐가 잘 생겼냐? 그냥 비실비실하게 생긴 거지.]

주위에서 그의 외모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남자는 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남자답지 못한 외모라고 혹평을 하던 남자는 근처에서 얘기를 엿들은 여자들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무시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남자는 그딴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리시브 연습이나 더 하자며 처음 말을 꺼낸 후배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코트 위로 가 버렸다. 옆에 있던 여자는 어느새 눈매를 사납게 치켜뜨더니 남자의 질투란 꼴사납다고 비웃었다. 대화의 중심 소재였던 그는 여자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코트 위에서 움직이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벌써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남자는 리시브를 받아내지 못한 후배의 옆에 나란히 서서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었다.

남자는 늘 그렇다. 세상사람 모두가 관심 있어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제가 관심 있는 것에만 시선을 둔다. 배구, 혹은 그의 친구. 그 밖에도 남자가 관심 있는 것들이 많을 테지만 그는 아직 남자의 관심사가 그 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은 남자의 시야 밖에 있다는 거다. 그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남자를 건드려보고 싶은 본능이 생겼다. 어쩐지 남자의 시선에 들어서고 싶다. 그건 남들은 다 날 신경 쓰는데 너는 왜 아니냐는 오기에 가까웠다. 툭툭,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다혈질이라 툭, 하고 건들면 건드는 대로 그를 인식했다. 그가 남자의 시야에 들어섰을 때 처음 느꼈던 건, 의외로 기분이 묘했다는 거. 남자의 시선은 화살처럼 날아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그가 원했던 건 남자가 자신을 봐 주는 게 맞긴 했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잠깐의 마주침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보다는 감정이 섞인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남자는 졸업할 때까지 그가 원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시선, 잠깐의 마주침에 그치지 않았다.

 

 

, 하나도 안 변했네! 7년 만에 만난 거 맞아?”

이 새끼 완전 아저씨 다 됐어. 이거이거 배 나온 것 좀 봐라~ 결혼했다고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니냐?”

설마 네가 제일 먼저 결혼했을 줄이야. 형수는 너 고등학교 때 어땠는지 다 아냐? 아니, 알 리가 없지. 알면 네가 결혼할 수 있을 리가, 아 새끼야 이거 치워라!”

닥쳐라, 닥쳐. 내가 한 마디 충고하겠는데 결혼은 늦을수록 좋은 거야. 알겠냐, 총각들아.”

아하하하, 술집을 통째로 빌린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앉은 테이블마다 결혼 얘기며, 직장 얘기며,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배구부 선후배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라 그런지 몇 년 분의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9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파장할 기미가 안 보였다.

내 결혼 얘기는 됐고, 너네는 어떠냐? 설마 아직까지 동정인 건 아니겠지?”

이미 가정을 이뤄 똥배가 나올 정도로 여유로워진 사사야가 테이블을 둘러보며 말했다. 결혼했다고 코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사야의 시선이 카마사키에게 멈췄다. 처음부터 모니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은근히 인기가 많아 논외의 대상이었다. 궁금한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기 없어 보이는 카마사키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받은 카마사키가 울컥 화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를 봐! 내가 뭐, 설마 아직까지 동정일 줄 아냐?”

아니면 마는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럼 지금 애인은 있어?”

지금은 없어.”

역시나, 하고 모니와와 사사야가 한숨을 뱉었다. 지금 없는 거지 이전엔 분명히 있었다니까? 카마사키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모니와와 사사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받은 카마사키가 테이블에 있던 술을 닥치는 대로 마셔대기 시작했다.

진짜라니까. 너희들 내 말 못 믿냐?”

아니야. 믿지 그럼. 그래서 여자 친구는 얼마나 사귀어 봤는데? 제일 오래 간 건 얼마나?”

두세 명 정도. 6개월은 갔나.”

두 명이면 두 명이고 세 명이면 세 명이지. 두세 명은 뭐야? 설마 너는 사귄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아니었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니면 사귀는 거로 치기엔 너무 빨리 헤어진 거 아니야?”

모니와의 말이 정답인 모양이었다. 카마사키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는지 처음 와 본 가게의 인테리어가 어떻다는 둥 꼬치가 맛있다는 둥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미끼를 문 물고리를 어부가 그냥 놓아줄 리 없었다. 모니와는 대체 얼마나 사귀었기에 사귀는 걸로도 안치려는 거냐며 카마사키를 닦달했다. 그 옆에서 사사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참을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끅끅거렸다.

일주일? 삼일?”

제발, 모니와.”

혹시 하루는 아니겠지.”

그만하랬잖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모니와는 눈치껏 장난을 거두었다. 만나게 되고 처음으로 테이블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옛날부터 연애에는 지나치게 어리숙했던 저의 친구는 아직까지도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고, 하루 만에 헤어진 기억은 그의 지뢰가 된 듯 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하루는 심하긴 하다. 모니와는 장난이었지만 결국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 그러고 보니.

후타쿠치 말이야. 의외이지 않았어?”

?”

그 녀석 졸업하고 배구 그만뒀잖아. 난 사실 의외로 후타쿠치는 배구에 진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다른 쪽으로 갈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하긴 나도 후타쿠치는 대학 가서 배구 할 줄 알았는데.”

. 하긴 의외였긴 하지.”

그런데도 되게 납득이 가지 않냐? 되게 잘 어울리잖아.”

후타쿠치가 배우라니.”

아이돌이면 몰라도 배우라니. 사사야가 꼬치를 뜯어먹으며 말했다. 그 말에 카마사키와 모니와도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술집에 있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한 번쯤 후타쿠치에 대해 떠들 것이다. 고등학교 때도 튀는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후타쿠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대학을 진학하지도, 취직을 하지도 않았다. 돌연 몇 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갑자기 TV에 나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비록 역할은 작은 단역 수준이었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외모로 후타쿠치는 단숨에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주목받는 신인 치고는 결코 비중이 큰 역할이 와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 덕분인지 후타쿠치는 반짝 스타에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연기 실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2년 전부터는 명실상부하게 가장 주목받는 20대 남자 배우 중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스크린이고 TV, 인터넷, 잡지 등 연예 매체란 매체에는 후타쿠치의 얼굴이 도배하고 있을 정도다.

이 정도까지 성공했으니 그런 연예인과 같은 학교, 게다가 같은 부활동을 했던 게 다테공고 배구부 사람들에게는 은근한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옛날에는 건방지고 얼굴만 잘났다고 툭하면 비아냥거리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들 후타쿠치를 들먹이면서 혹시라도 이 자리에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역시 안 오겠지? 후타쿠치.”

당연하지. 걔가 좀 바쁘냐? 지금 한창 드라마 촬영하고 있다잖아. 그리고 안 바빠도 후타쿠치가 이런 데 올 리도 없고.”

하긴. 걔 성격 상 동창회 같은 거 올 리가 없지. 근데 난 솔직히 동창회 오면서 후타쿠치 오는 거 꽤 기대했는데.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하지 않냐? 화면으로 볼 땐 고등학교 때랑 달라진 거 없어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 궁금하잖아.”

너네 술 안 마시냐? 나 다른 테이블로 간다?”

아까부터 닥치는 대로 술만 마셔대던 카마사키가 불평했다. 카마사키는 아까의 지뢰로 인한 상처가 가시지 않은 건지 구겨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마셔, 마신다고. 건배~!”

카맛치 너는 후타쿠치가 궁금하지도 않아? 너네 꽤 친하지 않았나.”

친하긴 개뿔이.”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왜 옛날에 후타쿠치가 막 들어왔을 때 말이야. 아이돌 같은 애 있다고 소문나서 연습하는 데 여자애들이 막 몰려왔던 거 기억 나?”

당연하지. 난 후타쿠치가 잘생긴 건 알았어도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는데 그 때 다른 학교에서도 왔었잖아.”

모니와와 사사야는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이랬었지, 저랬었지 하는 말을 들으며 카마사키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자리에도 없는 자식 얘기를 뭘 저렇게 신이 나서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도 말이 많은 녀석들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그런지 입이 다물 새가 없다.

, 카맛치. 듣고 있냐? 뭘 술만 퍼마시고 있어, 꿀꿀하게.”

걔가 뭐 그리 잘생겼다고 난리야? 그냥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사람 얼굴인데.”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은 맞지만 그게 뭐. 어차피 남자 얼굴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카마사키의 말에 모니와가 사사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 자식도 하나도 안 변했네? 그 때 카마사키가 거의 유일했지, 아마? 대놓고 후타쿠치한테 저게 뭐가 잘생겼냐고 말했던 사람이.”

후타쿠치 엄청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잖아. 입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친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선배란 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걔도 생각도 못했겠지.”

그러고보니 그 때부터인가? 후타쿠치가 카맛치한테 일일이 시비걸고 다니던 게. 혹시 카맛치 그 때부터 찍힌 거 아냐?”

푸하하핫, 그랬나봐! 찍혔었나봐! 뭐가 웃긴지 사사야가 테이블을 탕탕 쳐대가면서 웃어댔다. 그 옆의 모니와는 그래도 카마사키의 눈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아보는 듯 했지만 큭큭거리는 소리와 들썩이는 어깨가 신경 안 써주느니만 못했다. 카마사키는 이 놈들을 한 대 쥐어 팰까 고민하며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너네 맞을래?”

, 아니. 큭큭근데 카맛치 진짜로, 정말로 후타쿠치가 잘생겼다고 느껴본 적 없어?”

누가 안 잘생겼데? 객관적으로 잘난 얼굴이란 건 나도 알아. 근데 그게 뭐 어쨌냐는 거지.”

그냥 보이는 거 말고, 그렇게 느껴본 적 없냐고. 사람 외모라는 게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 사실 옛날에 걔가 남자인데도 가끔씩 얼굴 보면 설렜다니까. 물론 내가 게이라는 건 아니고.”

호모가 된 걸 축하해, 모니와.”

사사야가 모니와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모니와는 아니라니까, 신경질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 원래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잘생기고 예쁘면 본능적으로 설레는 거야. 안 그럴 리가 있냐? 심지어 우린 남잔데 시각적인 거에 얼마나 약하냐고. 잘난 인간이 빤히 쳐다보면 그게 이성으로 끌리든 안 끌리든 눈이 제대로 달렸다면 반응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카맛치. 너는 어때? 그런 적 없었어?”

술에 취해서 그런지 모니와의 긍정을 바라는 눈동자가 까만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후타쿠치를 상대로 설렜던 적이 있냐고? 카마사키는 반쯤 남은 잔을 원샷하고는 말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절대로 그래 본 적 없다. 후타쿠치한테 설렌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코웃음 쳤다. 남자를 상대로 무슨.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라며 카마사키가 술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영 재미도 없는 이야기만 듣고 있자니 술맛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곱씹다 최근까지 어떻게 살아 왔냐는 근황까지 얘기하고 보면 더 이상 공통의 화젯거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남자들은 이럴 경우 으레 여자 이야기를 하곤 한다.

선배는 벌써 결혼하셨다고요? 우와, 아직 26살인데 요즘으로 치면 빨랐네요. 예뻐요?”

설마 사고 친 거 아니에요? 아하하, 아야.”

이 자식은 여대생이랑 지금 동거하고 있데요. 발랑 까져가지곤.”

카마사키와 모니와, 사사야만 있던 테이블에 이곳, 저곳을 방랑하던 후배들이 합류했다. 결혼이니 연애니 카마사키로서는 달가운 화제가 아니었지만 사사야가 결혼했다는 말에 화제는 금방 연애니 결혼이니 여자와 관련된 걸로 바뀌었다. 아까와 똑같은 말이 나온다면 이번에야 말로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카마사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나한테는 제발 어떠냐고 물어보지 마라.

대학교 들어가면 당장 여자 친구 사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미팅을 수십 번을 하고서야 겨우 사귀었다니까요? 그래도 금방 헤어졌지만.”

얼마나 갔는데? 한 달?”

에이, 한 달은 심했다. 두 달은 갔던 것 같아요. 오래 되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후배의 말에 모니와와 사사야의 시선이 카마사키에게로 향했다. 측은한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카마사키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네 왜 자꾸 나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거냐?

그래도 요즘엔 다 가볍게 사귀는 추세인지라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지 않나요? 6개월 이상을 간 적이 없다니까요. 하하하. 그만큼 여러 여자 만날 수 있긴 하지만.”

“1년 이상 사귀면 진짜 대단한 거야. , 사사야 선배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어요? 사고 친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냥, . 오래 사귀기도 했고, 계속 같이 있다 보니까 자연스레 그런 흐름으로 흘러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에이, 설마. 그 전에도 몇 명 있었지.”

아직 결혼에 대해 막연한 상상만 가지고 있는 후배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사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진지한 연애는 따분하고 시시하다고 말했던 주제에 참 모순적이다. 사사야는 제 연애담을 말하는 게 쑥스러우면서 자랑스러운 모양인지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끊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가 점점 서로 호감을 갖게 돼서 사귀게 되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근데 확실히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었어. 그냥, 그냥 막연하게 이 사람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만의 미래를 상상해도 행복했거든.”

신기해, 후배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미 다들 20살을 훌쩍 넘어 2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사사야 혼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카마사키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순간 이상하게도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이 테이블만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전 이제까지 연애는 해봤어도 사랑은 해본 적 없던 것 같아요.”

나도.”

다들 술에 취해 감성에 젖었나. 조용해지다 못해 심해까지 가라앉을 것 같은 분위기에 카마사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다들 왜 이러냐. 술이나 마시자고.”

마셔, 마셔.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해 봐도 다들 축 늘어졌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돌리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배가 물었다. 그러는 선배는 사랑 해 본 적 있어요?

?”

사랑 해 본 적 있어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던 가게가 일순 조용해졌던 건 그 때였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이는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안 들어왔지만 가게에 들어서는 누군가는 모두의 시선의 한 번에 사로잡았다. 다들 기대하면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후타쿠치가 들어온 것이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후타쿠치는 어쩐지 조명을 받지 않았어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래서 연예인인가 보다, 하고 멍하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야. 역시 연예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 후타쿠치, 너 더 잘생겨진 것 같다.”

그런가요? 선배들은 변한 게 없네요, 아하하.”

연예인이 왔다며 호들갑 치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인사하던 후타쿠치는 마지막으로 가게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후타쿠치의 이름만 들어봤다던 후배들은 그를 연예인을 보듯실제로 연예인이지만, 쳐다보았다. 후타쿠치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사야가 주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지금 되게 바쁜 시기 아니야?”

. 바쁘긴 해요.”

다들 엄청 놀란 거 봤냐? 동창회 있다고는 알려줬다지만 네가 정말로 올 줄은 몰랐거든.”

하긴 제가 좀 비싼 몸이긴 하죠. 마침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서 겸사겸사 와본 거예요.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기도 하고.”

후타쿠치는 예전과는 달리 말투가 살가워져 있었다. 모니와는 네가 나온 영화랑 드라마 챙겨보고 있다면서 나중에 사인이나 해달라고 말했다. 후타쿠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 후배와 인사를 나누더니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향해 대뜸 술잔을 내밀었다. 마침 제 잔에 술을 따르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카마사키 씨는 여전하네요. 아직도 촌스럽게 노란 머리에요? 질리지도 않아요?”

신경 꺼. 그러는 넌 되게 변했다.”

별로 변한 거 없어요. 술 많이 마셨나보죠? 얼굴이 완전 새빨간데.”

원숭이 엉덩이 같아. 후타쿠치가 키득거렸다. 카마사키는 본인도 아까부터 열이 오르고 있다는 걸 알아 말없이 후타쿠치의 잔에 제 잔을 갖다 대었다. , 하고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가벼웠다. 만날 TV에서만 보던 얼굴과 술을 마시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후타쿠치와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같이 있으면 할 말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도 아니고 단순한 부활동 후배라고 하기에도 뭣한 상대인데 게다가 연예인이 되어서 나타난 자식에게 묘하게 거리감이 들었다. 그러나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는지 카마사키에게 뭐 하고 지냈냐며 물었다. 어떻게 계속 직장은 다니시나 보네요? 얄밉게 시비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뭐, 별 다른 거 없이 직장만 다니고 있지. 너야 말로 뭐 하고 지냈냐고 묻는 것도 이상한가? 인터넷에서 다들 떠들어대고 있으니까.”

제 기사를 보긴 하나 봐요?”

보이니까 보는 거지. 게다가 여자들이 다들 네 얘기만 떠들어대니까.”

누구, 설마 여자 친구도 있어요?”

후타쿠치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내가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거에 놀라는 건지 이쯤 되니 게이라는 헛소문이라도 돌았었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지만, 하고 카마사키가 대꾸했다. 그냥 있다고 허세라도 부릴까 싶었지만 실상을 아는 녀석들이 주위에 있으니 그러지도 못한다는 게 원통하다. 보나마나 후타쿠치가 또 놀릴까 싶어 카마사키는 아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럼 이전에는 있었다는 거네요? 헤에, 카마사키 씨가~?”

예상대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놀림조로 말을 걸었다. 몇 명이나 있었는데요? 그럼 동정 딱지는 뗐겠네요? 어떻게 사귀었었는데요? , 이런 촌스런 머리를 하고도 여자 친구를 사귈 수가 있구나~.

닥치고 신경 꺼. 몇 명을 사귀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말투니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전 여친하고는 왜 헤어졌어요? 얼마나 갔었는데요.”

신경 끄라,”

이런 기회가 날마다 오는 줄 알아요? 이대로 평생 여자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어보다 혼자 죽을 셈이에요? 오랜만이니까 코치 해주겠다고요. 뭐 어때요? 오늘이 지나면 카마사키 씨랑 제가 언제 또 만나겠어요?”

…….”

이런 얘기는 원래 별 상관없는 사람한테 하는 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후타쿠치가 턱을 괴고는 말했다. 이 자식, 틀림없이 재밌어 하는 게 분명하다. 선심 쓰듯 말하지만 아직도 저를 놀리는 게 뻔해서 울컥 짜증이 났다. , 그래. 오늘 보면 언제 볼 지도 모르는 녀석이니까 못 말할 것도 없다. 네가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코치해준다는 둥 젠체하는 건지 한 번 해 봐라, 망할 자식아.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후타쿠치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이야기를 풀었다. 카마사키의 뒤에서 모니와와 사사야가 애처로운 듯이 카마사키를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카마사키는 외모가 그렇게 못나지도, 성격이 그렇게 나쁘지도, 벌이가 그렇게 시원찮지도 않은 평범한 남자다. 아니, 오목조목 따져보면 그렇게라고 치부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점도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연애에 있어서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연애 고자인 셈이다.

사람의 몸에 연애 세포란 게 진짜 있다면 자신은 그게 극단적으로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번인가의 썸을 타고, 두 세 번의 연애를 해 봤지만 그 때마다 카마사키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러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를 몰라 혼자 전전긍긍하다 결국 차이거나, 혹은 아무 말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기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얼마 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무성애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데? 카마사키는 누군가에게 관심이 간 적은 있지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두근두근한 설렘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고,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고 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사정이 있겠거니 납득하다보니 상대는 언제나 카마사키에게 왜 질투를 안하냐며 채근했고 그 때마다 카마사키는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느낌인데?”

하소연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진심으로 후타쿠치에게 상담받는 격이 되었다. 카마사키는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느라 우울함에 가득 찬데다 술김에 휩쓸려 낯간지러운 질문을 후타쿠치에게 던졌다. 사랑이 뭐냐니 맨 정신으로는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이다.

글쎄요.”

의외로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의 질문을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가장 구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카마사키는 제가 술에 취하긴 취했나보다 생각했다. 카마사키는 대답을 해주기는커녕 반문하는 후타쿠치에게 제대로 대답하라며 턱을 괴고 있는 팔을 툭 쳤다.

아까 너 오기 전에 후배 하나가 그러더라. 자기는 연애는 해봤어도 사랑은 해본 적 없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사랑해본 적 있냐는 거야.”

그래서?”

말문이 턱 막히던데. 연애를 그렇게 해본 녀석도 모르는데 나 같은 연애 고자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정말 해본 적 없어요?”

가게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지 평소엔 투명하리만치 빛나던 후타쿠치의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여 보였다. 낙엽이 생각나게 하는 그 눈을 보며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없지, 해본 적 있을 리가. 후타쿠치는 빈 잔을 채우려는 카마사키의 손을 치우고 대신 물이 든 컵을 쥐어주었다.

아까부터 엄청 마시고 있는 거 알고는 있어요? 취하면 바래다주는 사람도 없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퍼마시는 건지 모르겠네. 벌써 술 취했어요?”

나 필름 끊긴 적 없거든?”

오늘 처음 끊기려나 보네요? 진짜 대책 없네.”

시끄러, 임마. 너야말로 아까부터 비겁하게 물만 마시고 있잖아. 꼴에 연예인이라고 이미지 관리하는 거야 뭐야. 너 건방져졌다?”

그게 하루 이틀 일이에요? 만날 건방지다 뭐다 화냈던 건 카마사키 씨잖아요.”

알긴 아냐면서 제 잔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빈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너야말로 벌써 취한 건 아니겠지?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후타쿠치가 이마를 찌푸리고는 잔을 비웠다. 카마사키는 큭큭거리며 후타쿠치의 턱에 흐르는 술을 손으로 훔쳐 주며 말했다.

자식, 칠칠맞기는. 너 취했지?”

손 안 치워요? 카마사키 씨야말로 지금 술주정 부리고 있거든요? 얼굴은 무슨 토마토처럼 빨개져가지고 완전 꼴사납거든요?”

시끄러. 너는, 너도.”

제 얼굴을 꼴사나운지 살피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보란 듯이 얼굴을 드밀었다. 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요? 의기양양한 눈빛이 말하는 바를 읽고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솟아 잘난 척 하지 말라고 쏘아 붙이려 했다. 그런데 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조명에 그리워져 있던 그늘이 사라지면서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 카마사키는 홀린 듯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삼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보며 이 자식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주변 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미친 듯이 잘생겼다고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릿결이나, 반쯤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와 캬라멜이 생각나게 하는 갈색의 눈동자와, 보기 좋게 뻗은 코는 물론이고 어디를 봐도 잘났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외모였다. 후타쿠치가 뭐가 잘생겼냐며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라는 말을 변명처럼 내뱉었던 카마사키였지만 사실은 그도 후타쿠치의 얼굴은 동성임에도 지나치게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다. 남자인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게 이상한 것 같아서 언제나 부정해왔지만 사실은.

너 잘생겼네.”

저도 모르게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순간 후타쿠치한테 설레 본 적 없냐던 모니와의 말이 떠올랐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한다고 넘겼지만 사실은.

잘생겼다.”

설렌 적 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블랙홀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데. 그만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동성이고 이성이고 상관없이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이 자식은 성격은 개차반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잘생겼는지 하늘도 참 공평하시다.

문득 후타쿠치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났다. 무슨 애가 저렇게 생겼나 생각했는데. TV에서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후광이 비치는 듯 했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커피를 수십 잔은 마신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안 보려고 필사적으로 피했는데. 후타쿠치가 하도 시비를 걸어서 그것도 다 헛짓거리가 된 셈이었지만. 그 때는 남자를 상대로 설렌다는 게 병이라도 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마냥 이상하다고, 미친 게 틀림없다고. 다른 사람을 상대로는 이런 적 없었는데 왜 후타쿠치 상대로만 이러는 걸까. 카마사키는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는 느낌이 거슬리면서도 좋아서 묘하다고 생각했다눈을 뗄 수가 없었다.

 

후타쿠치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카마사키와 시선을 마주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주 무아지경이구만. 이러다간 밤 새겠다며 후타쿠치는 조금씩 몽롱해지는 카마사키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있다 조심스레 손을 떼니 카마사키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꼭 감겨져 있었다. 벽에 기댄 그대로 잠이 든 카마사키를 보는 후타쿠치의 미소가 보다 더 깊어졌다.

 

후타쿠치는 제 외모에 대해 별 생각해본 적 없지만 지금은 꽤 만족하고 있다. 술에 취해 푹 늘어진 몸을 다시 한 번 고쳐 안으며 후타쿠치는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 연예인이 된 것도 딱히 큰 목표가 있어서 결정한 것도 아니라 이제껏 어떤 보람도 느껴본 적 없지만, 지금은 꽤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매니저의 도움으로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 몸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며칠 밤을 새도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후타쿠치는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자신의 맨션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지는 몸을 그대로 침대로 뉘이니 푹신한 침대가 마음에 드는지 카마사키가 기분 좋은 듯 한숨을 쉬었다. 금세 방 안에 술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허리 위에 올라타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서둘러 풀어버리다 손가락을 멈추기를 반복했다. 당장이라도 나체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곤히 잠든 상대를 아직은 깨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번갈아가며 후타쿠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후타쿠치는 어느새 드러난 카마사키의 상체를 빤히 쳐다보다 가만히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술에 취해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쇄골부터, 보기 좋게 발달한 가슴팍을 거쳐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복근까지 후타쿠치의 손이 스쳐지나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긴 하지만 역시 단단한 남자의 몸이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따듯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실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손바닥 아래 있는 몸이 카마사키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후타쿠치는 한숨을 내쉬며 카마사키의 상체 위로 허리를 굽혔다.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때문에 고스란히 드러난 목덜미 위로 후타쿠치가 입술을 묻었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후타쿠치는 일순 숨을 멈추고 입술에 닿은 피부를 실감했다.

아주 오래 전, 막연하게 이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신경을 건드려 봐도 그 시선에 자신이 기대하던 감정이 스며들어 있던 적이 없었는데. 후타쿠치는 입술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카마사키의 맥박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것이 그의 맥박인지 제 심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위의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끄러울 정도로 귀를 따갑게 했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 눈에 감정이 섞인 것을 본 순간, 후타쿠치는 이제야 자신이 오래 전부터 바라왔던 것을 손에 쥐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본인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원하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단순한 시선, 잠깐의 마주침보다 더 한 남자의 마음을.

잠시 후, 입술 사이로 후타쿠치의 숨결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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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



(1)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카마사키는 자신이 또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세는 것조차 포기했을 만큼 자주 꾸게 되는 이 꿈을 요 몇 년간 이따금씩, 그러나 꾸준히 꾸고 있다. 꿈에서 자신은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3년 동안 땀을 흘렸던 고등학교 시절 체육관에 있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기억이 조작된 환상인지 모를 꿈에서 카마사키는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밤톨처럼 동그란 뒤통수라든지,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라든지 곧게 뻗은 팔다리라든지. 똑같은 남자의 몸을 뭐가 신기하다고 쳐다보는지 참 열심히도 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다. 이제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던 고등학교 후배.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멈춰 있는.

잠에 들었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카마사키는 눈을 깜빡이듯 잠에서 깨어났다. 슬슬 해가 밝아오는지 방 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팔뚝에서부터 싸하니 소름이 돋았다. 온몸을 덮치는 한기에 그제야 잠결에 또 이불을 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엔 잠버릇이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얌전하게 자지 못하게 되었다. 자유를 너무 맛본 탓이다.

간밤동안 이곳저곳 굳은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 들어 아침마다 스트레칭은 꼭 빠짐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고 오고 싶었지만 어김없이 내일로 미루었다. 역시 자신은 자유를 너무 맛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기를 써서 키웠던 근육은 방만해진 지금의 몸에서 이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 그래도 그 때의 노력이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제대로 된 운동을 안 하는 지금에도 나쁘지 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슬슬 찌뿌둥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머리가 몽롱했다. 사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신 터라 숙취로 인한 두통도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뇌가 두부가 된 것처럼 멍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목이 따끔한 걸 보니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듯 했다. 하필이면 할 일이 쌓인 날에 감기가 걸리다니 어지간히 재수 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얼굴이 빨갛다?”

파티션 위에 팔을 기대고 선 마코토가 말했다. 어젯밤 술에 진창 취했던 건 분명 나만이 아니었는데 숙취는커녕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억울했다. 감기라도 옮겨줄까 생각했는데 기침이 터져 나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당장 집에 가서 이불 덮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기야? 너 어제 또 자다가 이불 걷어찼지? 안 봐도 뻔하다, 새끼야.”

내가 걷어차고 싶어서 걷어차나.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네 자리로 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니 안 그래도 따끔했던 목이 누가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마코토는 퉁명스런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를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다시 카마사키의 책상에 찾아왔다.

마셔. 감기약도 챙겨왔으니까 먹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는 게 어떠냐?”

몸도 안 좋잖아, 하고 마코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카마사키는 말없이 마코토가 내민 감기약과 컵을 받고는 단숨에 약을 삼켰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은 목을 자극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카마사키는 고맙다고 짧게 말하고 마코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치에 마코토도 더 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제 자리에서 카마사키의 자리는 파티션에 가려져 서 있어도 카마사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코토는 자리에서 슬쩍 뒤꿈치를 들고 카마사키 쪽을 살폈다. 감기 기운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 된 주제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카마사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인 그의 동기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슬슬 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어제 술을 마시게 했던 건데 고집불통인 녀석은 기어코 감기를 달고서 출근하고야 말았다.

몇 년 동안 카마사키의 옆에서 일을 해 온 마코토의 생각에, 카마사키는 딱히 이 일이 미치게 좋아서 워커홀릭이 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일이 좋아서라기보다 일 때문에 바쁜 걸 좋아하는 듯 했다. 왜 그렇게까지 일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마코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좋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 억지로 상처를 후벼 팔 바에야 모든 게 좋아질 때까지 그 옆에서 카마사키를 지켜보고 싶었다. 둔한 카마사키는 마코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카마사키의 상태는 오전보다 더 나빠져 갔다. 임시방편으로 마코토가 줬던 약을 먹긴 했지만 처방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별 효과도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이 많은 날이라 반차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팀장에게 가 반차 신청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출근했을 때부터 반차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에 잘 갈 수 있겠냐며 물었다. 카마사키가 대답하려는 찰나 언제 온 건지 마코토가 자기가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럼, , 점심은.”

, 됐어. 너 목 아프니까 더 이상 말 하지 마. 너 보내고 바로 점심 먹으로 갈 테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카마사키가 대충 짐을 챙기는 사이 마코토는 컵에 물을 떠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아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이었다. 새삼 몽롱한 와중에도 카마사키는 이게 마코토의 세심한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여자한테 인기 있는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아파서 그런지 평소에는 안 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복도가 시끄러웠다.

맞다. 이번 달에 옆에 사무실이 들어온다고 하더니 오늘인가 보네?”

맞은편 복도에 축하 화환들이 줄지어 있었다. 회사명이, S-PLANT?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의외로 회사 규모는 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전에 맞은편 사무실에 있던 회사도 규모가 꽤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카마사키가 다니는 회사보다 2배는 클 게 분명했다.

“S-PLANT면 꽤 업계에서 알아주는 편이라던데. 몇 년 전에 세워진 회사이긴 한데 매년 급성장하는 데라고 하더라고, 친구가.”

마코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안을 훔쳐보았다. 그 쪽도 점심시간인지 눈대중으로 보아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미어캣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마코토를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없어진 걸 알면 알아서 오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물을 먹은 솜뭉치마냥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카마사키는 결국 모퉁이를 돌기 직전 벽에 기대어 섰다. 택시 잡아주겠다며 뭐하는 거냐, 망할 자식. 저것도 친구라고.

카마사키 씨?”

흐릿한 시야에 하얀 셔츠가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너무 새하얘서 카마사키는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잊어 버렸다. 시선을 조금 들어 올리니 베이지와 녹색이 적절하게 섞인 넥타이가 보였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넥타이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센스 좋네.

저기요. 카마사키 씨.”

남자가 성큼 다가와 카마사키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초점이 맞춰지며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꿨던 그거,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언제나 꿈인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에서 봤을 때와 남자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었던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잘려 있었지만 특유의 비대칭 앞머리는 여전했다. , 겨울 나뭇잎 같은 눈동자는 변함없었지만 그 눈은 투명한 안경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또.

오랜만인데 상태가 영 안 좋으시네요. 살아있긴 한 거에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제 목소리는 들려요?

시간이 지났어도 성격 참 건방지구나.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사람 열받게 하는 말투인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웠던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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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3)

 

 

 

평소와 달리 학교는 부산스러웠다. 한 곳에서는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 곳에서는 웃는 소리가 났다.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어떤 선생님도, 학생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모두가 복잡한 마음으로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졸업식이다.

교정에 활짝 핀 봄꽃을 배경으로 졸업장을 든 졸업생들이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친하고 말고를 막론하고 그냥 아는 사이면 다들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댔다. 몇몇 졸업생들은 붉어진 눈시울을 창피해하며 카메라를 피해 달아났다. 3년 전 봄에 시작되었던 그들의 고교 생활은 여전한 봄꽃과 함께 끝을 맺었다.

다 모였어? 안 온 사람 있나 확인해 봐.”

정문에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며 모니와가 말했다. 3학년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후배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겨두려던 것이다. 모니와의 말에 1학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카마사키 선배가 없어요!”

누가 전화 좀 해 봐. 자식이 어딜 쏘다니는 거야.”

사사야가 코를 킁킁대며 후배에게 눈짓했다. 교정에 내리는 꽃비로 화분 알레르기가 있는 사사야는 졸업식 전부터 기침을 참지 못했다. 일초라도 빨리 꽃무더기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전화 꺼져 있는데요, 핸드폰을 손에 쥔 후배 하나가 말했다. 졸업식 때 벨이 울릴까봐 선생님들이 핸드폰을 꺼두라고 했었는데 그 때 끈 모양이었다. 말한 선생님도 듣는 학생들이 끌 거라고 생각 안했을 텐데, 곧이곧대로 끈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착실하단 말이야. 후타쿠치는 한숨을 내쉬며 모여 있는 후배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있어 봐. 내가 가서 찾아보고 올 게.”

빨리. 나 더 이상 못 참겠다.”

사사야는 그 틈을 못 참고 기침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사람은. 체육관과 부실을 돌아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문을 잠근 사람이 자신이니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와 봤지만 역시나 카마사키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졸업한다고 감상에 젖어서 교내를 떠돌아다니는 게 틀림없다. 발걸음을 재촉해 교사 안으로 들어가 카마사키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다녔다. 죄다 허탕을 치고 마지막으로 3학년 반으로 가자 예상대로 카마사키가 빈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별로 남지 않은 교내는 멀리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와는 달리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빈 교실에 카마사키 씨는 졸업장이 든 까맣고 둥근 통을 겨드랑이에 꽂고는 한 손에 든 무언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무언가는 편지봉투였다.

뭐해요?”

우왁, , . 후타쿠치?”

난데없는 말소리에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면서 순간 졸업장이 떨어졌다. 졸업장을 줍고 후타쿠치를 향해 돌아보던 카마사키는 한 손에 든 편지봉투와 후타쿠치를 의식하고는 다급하게 손을 뒤로 숨겼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에요? 뭔데 숨기고 그래요. 더 궁금해지게.”

,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한번 봐 봐요.”

후타쿠치가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카마사키가 슬슬 뒷걸음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두, 세 걸음밖에 안 남았을 때는 기어코 졸업장을 쥐고 있는 손을 내밀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니까 더 수상하잖아. 후타쿠치는 고개를 기울여 카마사키 씨가 뒤로 숨긴 편지봉투를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카마사키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방해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후타쿠치는 체념했다는 듯이 두 팔을 올려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어요, 안 볼게요. 그보다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내려가죠? 카마사키 씨 때문에 사사야 선배 기침하다 죽을 지경이라고요.”

, 미안. 잠깐 들른다는 게.”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 나갔다. 그 뒤에서 걷던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바지 뒷주머니에 사정없이 집어넣어진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한 번,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보고 후타쿠치는 재빠르게 편지봉투를 낚아챘다. 앞에서 빠르게 걷던 카마사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뒤늦게 주머니를 더듬어 봤지만 편지봉투는 이미 후타쿠치의 손에 쥐여 있었다.

, 이 자식이! 얼른 이리 내 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뭔데요? 그런 반응 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이거 혹시 러브레터?”

닥쳐. 그만해. 내 놔.”

키는 엇비슷해도 후타쿠치가 팔다리가 유독 긴 편이었기에 아등바등하는 카마사키의 손에 편지봉투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팔꿈치로 카마사키를 이리저리 밀어대며 후타쿠치는 한 손으로 편지봉투를 앞뒤로 살폈다. 하얀 봉투는 두께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안에 편지가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손가락 끝으로 봉투를 뜯어내려는 찰나, 보다 못한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쥐고 편지봉투를 쥔 손목을 쳐냈다. 짧은 둔통과 함께 편지봉투가 손에서 빠져 나갔다.

, 진짜! 아프잖아요! 선배가 후배한테 이래도 되요?”

손목을 쥐며 투덜거리는 후타쿠치의 등을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 하는 경쾌한 소리와 윽, 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런 후타쿠치를 안중에도 안 두고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줍고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해라, . 그러게 내가 그만 하랬지.”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본거지.”

…….”

그거 카마사키 씨한테 온 거죠? , 대체 어떤 여자가 카마사키 씨한테 편지를 썼을까. 눈이 삔 거 아냐, 그 여자? 하하하, ! , 그만 때려요!”

앞서 가던 카마사키는 그대로 돌아서 불같이 화난 표정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마구 때렸다. ,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다 마지막으로 후타쿠치의 정강이를 한 대 차는 걸로 마무리했다.

오늘이 졸업이라 봐 준 줄 알아. 이제 네 얼굴 볼 일 없어져서 속이 다 시원하다!”

얼굴 볼 일이 왜 없어요. 설마 우리 인터하이 때 응원하러 안 오려고요? 안 그렇게 봤는데 사람 참 냉정하시네.”

다른 애들은 봐도 넌 안 봐!”

하하하, 카마사키의 반응에 후타쿠치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허리까지 부여잡아 가며 웃는 후타쿠치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꾹 다물며 성큼성큼 교사를 빠져 나왔다. 상대하면 할수록 후타쿠치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들 뿐이라는 걸 요 2년간 뼈저리게 깨달아왔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나오자 저 멀리 정문에서 배구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루돌프처럼 코가 새빨개진 사사야가 카마사키를 발견하고 씩씩거렸다. 임마, 카마사키! 빨리 안 뛰어 오냐! 사사야의 말에 카마사키가 뛰려는 찰나, 후타쿠치의 말이 카마사키의 발을 잡았다.

보러 오세요.”

?”

후타쿠치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의 잔상이 남아있어 언뜻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후타쿠치는 웃고 있었다. 놀라 되묻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잘난 얼굴 카마사키 씨 인생에서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요.”

졸업한다니까 이제껏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하려는 구나. 카마사키는 어이가 없어서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잠시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무게도 내용도 없는 실없는 말장난에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자식은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헛웃음을 짓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는 잘난 척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맘껏 잘난 얼굴 감상하라는 듯. 그런 후타쿠치를 향해 카마사키가 투덜거렸다.

다신 네 얼굴 볼 일 없을 거다.”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다. 카마사키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건 카마사키의 100% 진심이었다. 졸업식을 끝으로,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다시 볼 일 없을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는지 서운해 하는 척했다. 카라멜 색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카마사키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고교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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