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 0504 아카보쿠데이 기념 뻘글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듬직하게 벌어진 어깨에 하얀 유니폼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진 모양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기분이 묘하다. 어디를 보아도 자신과 똑같은 남자인데 왜 시선이 가는 것인지. 확실히 저 사람은 배구를 할 때만큼은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경우 그런 이유와는 조금 다르다. 딱히 배구를 하고 있지 않아도 늘 눈이 가니까.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시야에 보이면 그 모습을 쫓게 된다.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뭐, 딱히 문제될 건 없나.’
자꾸 쳐다보게 되고, 신경 쓰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라? 오늘도 보쿠토 안 왔어?”
“…네.”
“이상하네. 오늘은 그쪽도 연습 없어서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연락도 없었고?”
“네.”
“너한테도 연락을 안 하다니 별일이네.”
코노하의 말에 아카아시는 괜히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봄고가 끝나고, 3학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진학을 준비하는 선배들은 센터시험을 마쳤고, 몇몇 선배들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체육관에는 1, 2학년들과 올해 봄에 입학하는 예비 신입생들로 가득해졌다. 봄고가 끝나고도 부지런히 체육관에 들르는 3학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보쿠토 씨의 마지막 봄고는 4강까지였다. 경기가 끝난 그 다음 주에 보쿠토 씨는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왔던 한 실업팀에 들어갔다. 취업이나 진학을 선택한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봄고가 끝나고도 보쿠토 씨는 틈틈이 체육관에 들렀다. 이제 배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만이 아닌데도 고교 배구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보쿠토 씨는 이번 주 내내 체육관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옆에서 코노하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꾸하며 아카아시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섰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 생각보다 기분이 별로였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일주일째.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고백을 한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좋아해요, 보쿠토 씨.’
오랜 기간 동안 담아왔던 마음이었다. 언제 그 마음을 확신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외로 좋아한 지 꽤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카아시는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그대로 멈춘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하얀 수건을 아무렇게나 뒤집어 쓴 그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언제까지고 내가 돌봐주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
‘어?’
그 아래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한 번도 본 적 없이 생경하게 빛나서, 아카아시는 일렁이는 마음을 하마터면 그대로 내비칠 뻔 했다. 언제나 유리구슬처럼 맑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맹금류의 것과 같이 날카로운 경계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만…, 아카아시.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 한거야?’
‘……아.’
‘그거 그런 뜻으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보쿠토 씨에게 고백했지. 낯선 표정의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럴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게 우스웠다. 같은 남자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당연한 반응인데. 보쿠토 씨라면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해도 경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나를 좋아하는 쪽은 보쿠토 씨일 것이라 생각했고, 고백한다면 기뻐할 줄 알았다.
그야 보쿠토 씨니까. 학년은 다르지만 다른 3학년들보다 훨씬 더 친하다고 생각했고, 배구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지 2년 동안 함께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같이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과 표정과 행동에 당연하게 나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었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거나 표현을 한 적은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으니까. 친구나 후배를 향한 감정보다는 더 큰,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알고 보니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착각한 것뿐이었지만.
‘미안, 나…. 나,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얼굴을 감싼 하얀 수건을 마구 쥐고는 보쿠토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멍하니 보쿠토가 있던 곳을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뒤늦게 체육관을 나섰을 때, 보쿠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방을 품에 안고 달려가고 있었다. 맹수에 쫓기는 토끼처럼 쉬지 않고 달려 나가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맥없이 주저앉아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도망칠 것까진 없잖아요.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예상했었지만 그 날 이후로 보쿠토는 체육관에 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보내오던 라인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항상 아카아시를 불러내던 전화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마냥 아카아시의 일상에서 보쿠토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 아카아시.”
“아, 죄송해요. 잠깐 멍해져서… 뭐라고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었냐. 그보다, 오늘 연습 끝나고 뭐 있어?”
“아뇨, 오늘은 별 일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그게…, 보쿠토한테 전해줄 게 있는데, 나 이제 아르바이트 가봐야 하거든. 학교 오면 보쿠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이 꼬여버렸어. 대신 좀 전해다 줄래?”
어차피 오늘도 끝나고 만날 거잖아, 하고 코노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딱히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만나진 않는데 다들 그랬다. 아카아시가 혼자 있을 때면 보쿠토는 왜 같이 없냐며 물었고, 대신 뭐를 전해달라느니 부탁해왔다. 지금까지야 별 문제 없었지만 이런 부탁을 받는 것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해요. 오늘 보쿠토 씨 안 만나요.”
아카아시가 거절하자 코노하가 엑, 하고 뜻밖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부탁한 건 나인데, 뭘. 근데 진짜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고 전해주러 갈 수도 없고…. 아니, 매일 오던 애가 오늘은 왜 안 왔데….”
“급한 거예요?”
“모르겠어.”
“네?”
“어제 뜬금없이 전화하더니 가져다 달라던데. 오늘 안 가져다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으음, 코노하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끙끙거렸다. 오른쪽 신발을 툭툭거리는 게 꽤나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면 안 되는데….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코노하의 곁에서 아카아시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슬슬 연습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영 연습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3학년이 빠져나간 틈을 매우기 위해선 더 연습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 날 이후로 자신만 그 때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카아시.”
끙끙거리는 코노하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그 다음 이어질 말을 눈치 챘다. 난처하게 웃어 보이는 아카아시에게 코노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종이봉투를 건넸다. 부탁한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코노하를 거절하지 못하고 아카아시는 결국 봉투를 받았다. 어쨌거나 보쿠토 씨를 만날만한 핑계거리는 생긴 셈이었지만 마냥 잘됐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직접 만난다면 어떤 얼굴을 보일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보쿠토를 만나고 처음으로 아카아시는 사람을 대면하는 일에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주일이나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보쿠토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아카아시를 만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이니까. 아카아시는 손에 쥔 봉투를 움켜쥐고 체육관을 나섰다. 보쿠토를 보러 간다는 사실에 조금씩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보고 싶었구나, 나.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는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구나.
보쿠토 씨를 확실히 만나려면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라인을 보내는 것도 전화를 거는 것도 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보쿠토의 집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벨을 눌렀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집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반,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아카아시는 좀처럼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괜히 손에 쥔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딩동딩동, 하고 울리는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다 메아리치며 사라졌을 때쯤 문이 열렸다. 보쿠토는 문 앞에 서 있는 아카아시를 보고 놀라서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바로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버렸다.
“무, 무슨 일이야?”
“코노하 씨가 대신 물건을 전해다 달라고 하셔서요. 이거….”
“아…, 고마워….”
물건을 받고도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각자 아무 말 없이 보쿠토는 손에 쥔 물건만 꼬물거렸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보기만 했다. 일주일 만에 보는 보쿠토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행색이 추레했다. 연습이 없는 날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엉망이었다. 하얗던 피부는 푸석하게 거칠어져 있었고, 눈가에는 못 보던 거뭇한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다. 딱히 예민한 성격도 아닌 사람이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제게 고백 받은 일로 고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지 말라고, 그저 장난이었다고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줘야 하는 걸까.
“아, 아카아시. 나 뭐 하던 중이라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에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끝까지 아카아시의 얼굴로는 시선을 주지 않는 모습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화가 나고,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잘 가라고 더듬거리며 문을 닫으려는 보쿠토의 팔을 잡아챘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뭐?”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망연한 얼굴로 반문하는 보쿠토의 눈을 마주하며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팔을 붙잡은 손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이 손을 놓으면 또다시 보쿠토가 토끼처럼 달아날 것만 같았다.
“한 번만,”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 추억으로.”
“……뭐.”
“졸업하면 다시는 만날 일 없잖아요. 이제 끝이잖아요.”
“…….”
“그러니까 한 번만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아카아시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보쿠토는 망설이다 반쯤 닫히다 말은 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카아시가 들어섰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면서 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먼저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가는 보쿠토의 등에서 아카아시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뭐 하고 있어. 들어 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카아시를 향해 보쿠토가 말했다. 그럼에도 길가에 박힌 돌멩이처럼 아카아시가 미동도 안 하자 보쿠토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뭐 하자는 거야, 아카아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말했다.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며. 네가 말 해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정말로 해도 됩니까?”
“…하지만 이걸로 다시는 네 얼굴 보지 않을 거야. 절대로, 다시는…!”
보쿠토 씨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은 건, 멋대로 지어낸 상상인가. 아카아시는 끝이라고 내뱉는 보쿠토의 얼굴을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다가가는 것도 마지막, 이대로 멈추는 것도 마지막. 어떻게 해도 마지막이라는 결론밖에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뭘 해도 끝이라면……. 망설이던 아카아시의 시야에 떨리는 손이 보였다.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훤히 보였다. 어떤 결과든 가장 중요한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심을 마친 아카아시가 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보쿠토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뒤로 숨겼다. 아카아시가 고백을 한 날 이후, 보쿠토는 좀처럼 가만있질 못했다. 혼자 있으면 자꾸만 그 때의 일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고,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대화에 집중하질 못했다. 연습도 엉망진창으로 해버려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날,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 자리에 온 정신을 두고 온 것만 같았다. 그만큼 놀랐고, 충격적이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어쩌자고 고백을 해온 거지.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은데, 지금의 관계가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데.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지?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체육관에 발을 끊었다. 아카아시를 피해 학교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팀 연습을 하는 날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우연이라도 아카아시와 마주치면 왜 그랬냐고 따져들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에는 아카아시에 대한 비난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제 다시는 아카아시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아시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함께 할 수 없는 건가? 같이 배구를 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시시콜콜하게 산책을 나간다든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이제 함께하지 못하는 거야? 모든 게 끝난 거냐는 질문을 아카아시에게 직접 물을 수 없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계속 아카아시를 피하고 피하다 그대로 끝나도 괜찮은 거야?
내 평생에 아카아시가 항상 함께였던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만나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카아시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함께 있지 않은 날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내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붙어 있어줬으면 좋겠다. 늘, 언제나.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도, 아카아시가 대학에 가서도, 각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끝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하는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너한테는 우리 관계가 끝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 번 하게 해달라는 말에 그러자 말했지만 무서웠다.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해, 이런 걸로 끝을 내지 않겠다고 해.
소리 없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아카아시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 아카아시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 둘씩 얽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한참동안 잡고 있을 뿐이었다. 힘을 주어 잡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닿아만 있었다.
“죄송해요. 거짓말이에요.”
“뭐…가.”
“한 번만 하게 해달라느니, 했던 거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추억으로 삼아달라던 말도 거짓말이에요. 저는 그저…….”
그저…… 제 고백이 마지막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조용한 고백에 보쿠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카아시도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벅찼다. 무턱대고 화부터 난 자신이 창피했다. 간단하게 끝을 고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속상했다.
“아, 아카아시는 내가 왜 좋아?”
“글쎄요.”
“뭐어?! 그게 뭐야! 좋아한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그냥 언젠가부터 보쿠토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보이면 보이는 대로 좋았고, 안 보이면 생각하는 걸로도 좋았고….”
“…….”
“제 눈엔 보쿠토 씨가 빛나 보여요. 너무 빛이 나서 가끔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빛이 난다느니 그게 다 뭐야, 아카아시 답지 않아. 보쿠토는 낯부끄러운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까보다 힘이 더 들어간 손가락의 감촉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무기력한 얼굴을 했던 주제에. 연애니 사랑이니 하나도 관심 없어 보였던 주제에….
“보쿠토 씨.”
“응…….”
“전 보쿠토 씨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만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널 차면 만나지 못하잖아. 난…,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뜻으로 너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아카아시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는 거잖아.”
아카아시가 찾아오고 처음으로 보쿠토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까맣게 빛나는 눈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 눈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아서 보쿠토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카아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인지, 확신할 수 없어.
“한 번만….”
“…….”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보쿠토 씨.”
아니라면 어떡하지, 내 마음이 너와 같지 않다면 어떡하지. 노력해도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해. 그리고 끝이라면 어떡해….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한 번만이라도 저를 좋아해준다면….”
“…….”
“그걸로 저는 괜찮아요.”
“아카아시….”
“그러니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제게서 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처음엔 용기가 없어 살짝 그러쥐기만 했던 손을 아카아시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쥐었다. 어떤 결론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사랑을 보답 받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잃지 않고 싶다. 언제나 함께이고 싶다. 제 말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얼굴이 난처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도망은 쳐도 끝까지 달아나지 못하는 게 사랑스러워. 옆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으니 허락해주세요, 보쿠토 씨.
“보쿠토 씨.”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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