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 0504 아카보쿠데이 기념 뻘글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듬직하게 벌어진 어깨에 하얀 유니폼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진 모양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기분이 묘하다. 어디를 보아도 자신과 똑같은 남자인데 왜 시선이 가는 것인지. 확실히 저 사람은 배구를 할 때만큼은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경우 그런 이유와는 조금 다르다. 딱히 배구를 하고 있지 않아도 늘 눈이 가니까.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시야에 보이면 그 모습을 쫓게 된다.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 딱히 문제될 건 없나.’

자꾸 쳐다보게 되고, 신경 쓰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라? 오늘도 보쿠토 안 왔어?”

.”

이상하네. 오늘은 그쪽도 연습 없어서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연락도 없었고?”

.”

너한테도 연락을 안 하다니 별일이네.”

코노하의 말에 아카아시는 괜히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봄고가 끝나고, 3학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진학을 준비하는 선배들은 센터시험을 마쳤고, 몇몇 선배들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체육관에는 1, 2학년들과 올해 봄에 입학하는 예비 신입생들로 가득해졌다. 봄고가 끝나고도 부지런히 체육관에 들르는 3학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보쿠토 씨의 마지막 봄고는 4강까지였다. 경기가 끝난 그 다음 주에 보쿠토 씨는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왔던 한 실업팀에 들어갔다. 취업이나 진학을 선택한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봄고가 끝나고도 보쿠토 씨는 틈틈이 체육관에 들렀다. 이제 배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만이 아닌데도 고교 배구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보쿠토 씨는 이번 주 내내 체육관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옆에서 코노하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꾸하며 아카아시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섰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 생각보다 기분이 별로였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일주일째.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고백을 한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좋아해요, 보쿠토 씨.’

오랜 기간 동안 담아왔던 마음이었다. 언제 그 마음을 확신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외로 좋아한 지 꽤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카아시는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그대로 멈춘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하얀 수건을 아무렇게나 뒤집어 쓴 그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언제까지고 내가 돌봐주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

?’

그 아래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한 번도 본 적 없이 생경하게 빛나서, 아카아시는 일렁이는 마음을 하마터면 그대로 내비칠 뻔 했다. 언제나 유리구슬처럼 맑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맹금류의 것과 같이 날카로운 경계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만, 아카아시.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 한거야?’

…….’

그거 그런 뜻으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보쿠토 씨에게 고백했지. 낯선 표정의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럴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게 우스웠다. 같은 남자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당연한 반응인데. 보쿠토 씨라면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해도 경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나를 좋아하는 쪽은 보쿠토 씨일 것이라 생각했고, 고백한다면 기뻐할 줄 알았다.

그야 보쿠토 씨니까. 학년은 다르지만 다른 3학년들보다 훨씬 더 친하다고 생각했고, 배구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지 2년 동안 함께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같이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과 표정과 행동에 당연하게 나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었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거나 표현을 한 적은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으니까. 친구나 후배를 향한 감정보다는 더 큰,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알고 보니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착각한 것뿐이었지만.

미안, . ,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얼굴을 감싼 하얀 수건을 마구 쥐고는 보쿠토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멍하니 보쿠토가 있던 곳을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뒤늦게 체육관을 나섰을 때, 보쿠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방을 품에 안고 달려가고 있었다. 맹수에 쫓기는 토끼처럼 쉬지 않고 달려 나가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맥없이 주저앉아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도망칠 것까진 없잖아요.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예상했었지만 그 날 이후로 보쿠토는 체육관에 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보내오던 라인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항상 아카아시를 불러내던 전화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마냥 아카아시의 일상에서 보쿠토가 사라지고 있었다.

. 아카아시.”

, 죄송해요. 잠깐 멍해져서뭐라고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었냐. 그보다, 오늘 연습 끝나고 뭐 있어?”

아뇨, 오늘은 별 일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그게, 보쿠토한테 전해줄 게 있는데, 나 이제 아르바이트 가봐야 하거든. 학교 오면 보쿠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이 꼬여버렸어. 대신 좀 전해다 줄래?”

어차피 오늘도 끝나고 만날 거잖아, 하고 코노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딱히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만나진 않는데 다들 그랬다. 아카아시가 혼자 있을 때면 보쿠토는 왜 같이 없냐며 물었고, 대신 뭐를 전해달라느니 부탁해왔다. 지금까지야 별 문제 없었지만 이런 부탁을 받는 것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해요. 오늘 보쿠토 씨 안 만나요.”

아카아시가 거절하자 코노하가 엑, 하고 뜻밖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부탁한 건 나인데, . 근데 진짜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고 전해주러 갈 수도 없고. 아니, 매일 오던 애가 오늘은 왜 안 왔데.”

급한 거예요?”

모르겠어.”

?”

어제 뜬금없이 전화하더니 가져다 달라던데. 오늘 안 가져다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으음, 코노하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끙끙거렸다. 오른쪽 신발을 툭툭거리는 게 꽤나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면 안 되는데.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코노하의 곁에서 아카아시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슬슬 연습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영 연습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3학년이 빠져나간 틈을 매우기 위해선 더 연습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 날 이후로 자신만 그 때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카아시.”

끙끙거리는 코노하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그 다음 이어질 말을 눈치 챘다. 난처하게 웃어 보이는 아카아시에게 코노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종이봉투를 건넸다. 부탁한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코노하를 거절하지 못하고 아카아시는 결국 봉투를 받았다. 어쨌거나 보쿠토 씨를 만날만한 핑계거리는 생긴 셈이었지만 마냥 잘됐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직접 만난다면 어떤 얼굴을 보일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보쿠토를 만나고 처음으로 아카아시는 사람을 대면하는 일에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주일이나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보쿠토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아카아시를 만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이니까. 아카아시는 손에 쥔 봉투를 움켜쥐고 체육관을 나섰다. 보쿠토를 보러 간다는 사실에 조금씩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보고 싶었구나, .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는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구나.

 

보쿠토 씨를 확실히 만나려면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라인을 보내는 것도 전화를 거는 것도 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보쿠토의 집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벨을 눌렀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집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반,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아카아시는 좀처럼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괜히 손에 쥔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딩동딩동, 하고 울리는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다 메아리치며 사라졌을 때쯤 문이 열렸다. 보쿠토는 문 앞에 서 있는 아카아시를 보고 놀라서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바로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버렸다.

, 무슨 일이야?”

코노하 씨가 대신 물건을 전해다 달라고 하셔서요. 이거.”

, 고마워.”

물건을 받고도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각자 아무 말 없이 보쿠토는 손에 쥔 물건만 꼬물거렸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보기만 했다. 일주일 만에 보는 보쿠토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행색이 추레했다. 연습이 없는 날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엉망이었다. 하얗던 피부는 푸석하게 거칠어져 있었고, 눈가에는 못 보던 거뭇한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다. 딱히 예민한 성격도 아닌 사람이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제게 고백 받은 일로 고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지 말라고, 그저 장난이었다고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줘야 하는 걸까.

, 아카아시. 나 뭐 하던 중이라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에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끝까지 아카아시의 얼굴로는 시선을 주지 않는 모습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화가 나고,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잘 가라고 더듬거리며 문을 닫으려는 보쿠토의 팔을 잡아챘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망연한 얼굴로 반문하는 보쿠토의 눈을 마주하며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팔을 붙잡은 손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이 손을 놓으면 또다시 보쿠토가 토끼처럼 달아날 것만 같았다.

한 번만,”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 추억으로.”

…….”

졸업하면 다시는 만날 일 없잖아요. 이제 끝이잖아요.”

…….”

그러니까 한 번만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아카아시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보쿠토는 망설이다 반쯤 닫히다 말은 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카아시가 들어섰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면서 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먼저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가는 보쿠토의 등에서 아카아시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뭐 하고 있어. 들어 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카아시를 향해 보쿠토가 말했다. 그럼에도 길가에 박힌 돌멩이처럼 아카아시가 미동도 안 하자 보쿠토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뭐 하자는 거야, 아카아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말했다.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며. 네가 말 해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정말로 해도 됩니까?”

하지만 이걸로 다시는 네 얼굴 보지 않을 거야. 절대로, 다시는!”

보쿠토 씨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은 건, 멋대로 지어낸 상상인가. 아카아시는 끝이라고 내뱉는 보쿠토의 얼굴을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다가가는 것도 마지막, 이대로 멈추는 것도 마지막. 어떻게 해도 마지막이라는 결론밖에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뭘 해도 끝이라면……. 망설이던 아카아시의 시야에 떨리는 손이 보였다.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훤히 보였다. 어떤 결과든 가장 중요한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심을 마친 아카아시가 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보쿠토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뒤로 숨겼다. 아카아시가 고백을 한 날 이후, 보쿠토는 좀처럼 가만있질 못했다. 혼자 있으면 자꾸만 그 때의 일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고,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대화에 집중하질 못했다. 연습도 엉망진창으로 해버려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날,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 자리에 온 정신을 두고 온 것만 같았다. 그만큼 놀랐고, 충격적이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어쩌자고 고백을 해온 거지.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은데, 지금의 관계가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데.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지?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체육관에 발을 끊었다. 아카아시를 피해 학교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팀 연습을 하는 날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우연이라도 아카아시와 마주치면 왜 그랬냐고 따져들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에는 아카아시에 대한 비난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제 다시는 아카아시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아시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함께 할 수 없는 건가? 같이 배구를 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시시콜콜하게 산책을 나간다든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이제 함께하지 못하는 거야? 모든 게 끝난 거냐는 질문을 아카아시에게 직접 물을 수 없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계속 아카아시를 피하고 피하다 그대로 끝나도 괜찮은 거야?

내 평생에 아카아시가 항상 함께였던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만나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카아시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함께 있지 않은 날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내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붙어 있어줬으면 좋겠다. , 언제나.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도, 아카아시가 대학에 가서도, 각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끝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하는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너한테는 우리 관계가 끝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 번 하게 해달라는 말에 그러자 말했지만 무서웠다.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해, 이런 걸로 끝을 내지 않겠다고 해.

 

소리 없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아카아시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 아카아시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 둘씩 얽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한참동안 잡고 있을 뿐이었다. 힘을 주어 잡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닿아만 있었다.

죄송해요. 거짓말이에요.”

.”

한 번만 하게 해달라느니, 했던 거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추억으로 삼아달라던 말도 거짓말이에요. 저는 그저…….”

그저…… 제 고백이 마지막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조용한 고백에 보쿠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카아시도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벅찼다. 무턱대고 화부터 난 자신이 창피했다. 간단하게 끝을 고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속상했다.

, 아카아시는 내가 왜 좋아?”

글쎄요.”

뭐어?! 그게 뭐야! 좋아한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그냥 언젠가부터 보쿠토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보이면 보이는 대로 좋았고, 안 보이면 생각하는 걸로도 좋았고.”

…….”

제 눈엔 보쿠토 씨가 빛나 보여요. 너무 빛이 나서 가끔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빛이 난다느니 그게 다 뭐야, 아카아시 답지 않아. 보쿠토는 낯부끄러운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까보다 힘이 더 들어간 손가락의 감촉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무기력한 얼굴을 했던 주제에. 연애니 사랑이니 하나도 관심 없어 보였던 주제에.

보쿠토 씨.”

…….”

전 보쿠토 씨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만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널 차면 만나지 못하잖아. ,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뜻으로 너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아카아시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는 거잖아.”

아카아시가 찾아오고 처음으로 보쿠토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까맣게 빛나는 눈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 눈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아서 보쿠토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카아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인지, 확신할 수 없어.

한 번만.”

…….”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보쿠토 씨.”

아니라면 어떡하지, 내 마음이 너와 같지 않다면 어떡하지. 노력해도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해. 그리고 끝이라면 어떡해.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한 번만이라도 저를 좋아해준다면.”

…….”

그걸로 저는 괜찮아요.”

아카아시.”

그러니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제게서 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처음엔 용기가 없어 살짝 그러쥐기만 했던 손을 아카아시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쥐었다. 어떤 결론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사랑을 보답 받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잃지 않고 싶다. 언제나 함께이고 싶다. 제 말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얼굴이 난처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도망은 쳐도 끝까지 달아나지 못하는 게 사랑스러워. 옆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으니 허락해주세요, 보쿠토 씨.

보쿠토 씨.”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Posted by 005500 :

[아카보쿠] 청포도

2017. 3. 25. 23:20 from

 [아카보쿠] 청포도

-보쿠른 전력 '하찮은 초능력'

-보쿠토TS 요소 있음 



 

청포도, 좋아하세요?”

만날 때마다 청포도를 달고 다니는 나를 향해 아카아시가 물었다. 항상 청포도를 먹고 다니셔서, 그동안 퍽 궁금했었는지 아닌 척 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청포도를 좋아하냐고?

. 좋아해.”

내 말에 아카아시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넌 모르지, 내가 왜 청포도를 달고 사는지.

 

 

 

사실 청포도는 그리 즐겨 먹지 않는다. 아니, 먹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이상하게 변하곤 마니까. 가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얼마동안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이전의 일로, 엄마가 마트에서 사온 청포도를 먹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탱탱하게 알이 차오른 푸른 포도 알맹이가 예뻐서 한 알, 씹을수록 단맛이 퍼져 나오는 게 좋아서 두 알. 그릇에 담겨진 청포도를 해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코타로! 그 때는 아직 어린 아이여서 엄마는 내가 머리가 조금 길어지고, 얼굴이 조금 바뀐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정확하게 여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날은 유난히 배가 고팠는데, 집에는 먹을 만한 게 청포도 말고는 없었다. 이걸 먹으면 또 이상하게 변하려나? 그 때는 그저 머리가 길어지고, 이목구비가 조금 달라지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집에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괜찮겠지 싶어 청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먹었나,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더니 역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단발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연하게 머리가 길었고, 얼굴도 조금 달랐다. 역시 변했잖아. 퉁명스럽게 거울을 보며 바지를 내렸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

내 물건이 그세 작아졌나? 팬티를 내렸는데 주니어가 없고, 주니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이상했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차마 자세히 확인하지도 못하고 나는 팬티를 올렸다. 꿈인가 싶어 망연하게 서 있는데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인상이 부드럽게 변한 얼굴을 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슴팍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 가슴이 나왔지? 아까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직접 확인해 볼까, 말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티셔츠의 목 부분을 늘렸다.

! ,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했던 게 현실이었다. 여자처럼 가슴이 올라 있었고, 아마도 여자의 그것인 게 밑에 있었고, 목소리도 변성기 이전의 것이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졌는데 소변은 마렵고, 어떻게 하지를 못하다 눈을 질끈 감고 후다닥 처리해버렸다. 몸이 완전히 변해버린 게 무서웠다. 이런 몸으론 배구도 하지 못해, 완전히 여자가 되어 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방문을 잠그고 이불을 덮어썼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다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꾹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떴을 때 다행히 원래의 모습이라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습이 변한다는 게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왕성할 때라, 그 이후 청포도를 먹어보며 실험을 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청포도를 먹고 10분정도 뒤에 모습이 천천히 변한다는 것과 1시간 뒤에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청포도를 먹으면 여자가 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철저하게 밖에서는 청포도를 먹지 않으려 주의했다. 급식에 청포도가 나오면 못 먹는다며 친구들에게 떠넘겼다. 한창 배가 고플 시기라 그 조그만 포도 알맹이를 주는 것도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청포도는 항상 멀리했는데,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헉,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보쿠토, 너 청포도 못 먹지 않아?”

? 못 먹는데.”

방금 먹은 거 청포도였어.”

그날따라 아침도 못 챙겨먹은 데다 점심을 먹기 전에 매점을 들르지 못해서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탓이었다. 배고파, 배고파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식판을 비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청포도를 먹은 것이었다. 친구의 말에 바로 식판을 들고 먼저 간다고 하곤 식당을 빠져 나왔다. 어떡하지, 10. 10분이면 여자가 되고, 한 시간 동안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가야 했다. 머릿속으로 어디에 가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 사람들을 피해 무작정 피했다. 밖에서 청포도를 실수로 먹은 건 처음이었다. 어떡해. 여차하면 화장실에 한 시간 동안 처박혀 있어야지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꺾인 곳에서 누군가와 크게 부딪혔다.

으악!”

,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진...”

그리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져 버렸다. 복도에서 달리다시피 걸었던 건 내 쪽이기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고개를 들었다.

, 아카아시?!”

분명 이 건물은 특별한 수업이 없는 이상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오지 않는데, 배구부 후배인 아카아시가 떡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마주쳐버려 당황하는데 아카아시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 저를 아세요?”

무슨 소리야. ...”

그제야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얇다는 것을 깨달았고, 허겁지겁 몸을 확인했더니 어느새 변해버렸는지 여자로 변한 뒤였다. 하필이면 아는 사람한테 들키다니!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한테 들켰어도 여자인 모습에 헐렁한 남자 교복을 입고 있으니 난처한 것은 피차일반이었지만. 아니, 아카아시여서 오히려 다행인건가? 흘끗 아카아시를 쳐다보자 방금 내가 아카아시한테 아는 척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쩌지, 솔직하게 말할까? 아카아시가 믿어 줄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카아시가 손을 내밀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 ... 괜찮아.”

남자 교복이라 셔츠와 재킷이 헐렁한 것도 문제였지만, 바지춤을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바지를 붙잡고 옷을 추스르는 나를 아카아시가 쳐다보았다.

아아아, 아니 이건! ... , , 벌칙이라서! 하하하... 벌칙이라...”

... . 교복이 커 보이는데요.”

, 어어! , 금방 갈아입을 거라서. 아하하! 그럼, 그럼 먼저 갈게...”

아카아시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행색이 이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치였기에 그냥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바지를 잡고 걸어야 해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아카아시가 잠깐, 하고 불렀다. 나는 뭘 훔친 도둑마냥 아카아시의 말을 무시하고 팔딱거리며 뛰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빈 교실에 한 시간 동안 숨어있다 모습이 변한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졸지에 수업을 빠져버려서 담당 선생님께 혼이 났고, 뜻밖의 상황에 몸과 정신이 피곤했다. 그래도 배구는 하러 가야지. 수업이 다 끝나고 연습하러 체육관에 들어가니 웬일로 아카아시가 먼저 와서 배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항상 뭐 준비하느라 일찍 오는 적은 없었는데.

아까의 일 때문인지 아카아시한테 평소처럼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눈치는 못 챈 것 같았지만 나중에 알아버렸을지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를 아카아시가 먼저 눈치 채고 고개를 꾸벅였다.

보쿠토 씨.”

, 어어? ,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살풋 눈썹을 찌푸리고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심상찮았다. 역시 알아차린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카아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아카아시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뭐야, 아카아시. 싱겁긴...”

, 근데.”

?! ! , 뭐야!”

혹시 여동생 있으세요? 사촌동생이라든가...”

없는데... ?”

내 말에 아카아시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아카아시가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나로서는 조금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왜냐고 다시 물으니 그제야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그냥 궁금해서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방금 전처럼 배구공을 튕기는 거였다. 내가 여동생이 있는지 왜, 그냥 궁금한 거지? 사람의 표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카아시의 얼굴이 복잡해 보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라, 아카아시의 대답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자가 되어서 아카아시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뜬금없이 여동생이 있냐는 물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것이, 혹시 나 때문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연습을 빠지겠다고 말하고, 청포도를 먹고 여자로 변한 뒤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서 아카아시를 기다렸다. 용의주도하게 체육복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조금 있으니 아카아시가 보였다. 여자가 돼서 아카아시를 만나보자! 라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정작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것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지금 뭘 하는 거지? , 아카아시한테 말 걸어볼까? 말 걸어서 뭐라고...

, 저기!”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아카아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제 부딪혔던, 하고 아카아시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 모습으로 아는 사람과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그보다 진짜로, 나인 걸 모르는 거겠지?

, 우연이네! 어제는 사과도 안하고 그냥 가버려서 미, 미안.”

아뇨.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어제 체육관에서 나를 살폈던 것처럼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기가 아는 선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선배의 여동생은 없다고 하니 신기한 걸까? 헷갈려하는 얼굴을 보자 조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왜 쳐다 봐? 날 알아?”

,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아서요.”

누구?”

내 질문에 아카아시가 말을 못하고 입술만 지르물었다. 이상하게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냥 배구부 선배가 아닌가, 나는? 왜 대답을 못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아주 많이 닮았거든요.”

?”

그 사람이 여자라면 그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서, 빤히 쳐다보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 어어?”

, 지금 한 말은 비밀로 해주세요.

졸지에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해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는지,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더니 당황해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다가 아카아시가 했던 말을 정리해보았다.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내가 닮았다고 했고, 여자라면 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그럼 방금 아카아시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는 건가?

, 아카아시...?”

뒤늦게 아카아시를 불러 봤지만 이미 체육관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곤 전혀,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너 전혀, 나한테 그런, 그런 말 해본 적도 없잖아. 오히려 매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으면서.

Posted by 005500 :

[아카보쿠] He will be loved.

 

 

 

정말 그럴까?’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는 게, 정말로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한 방 안이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악몽을 꾸느라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던 숨이 목구멍을 찢고 나오듯 터져 나왔다. 숨을 쉬는데도 폐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불편하게 들썩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눈을 감았다. 스스로 예민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 날의 일만큼은 보쿠토에게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가슴에 남았다. 평소와 같은 날을 지내다가도 가끔씩, 불현듯 다가와 보쿠토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하아... ...”

 

그리고 꿈을 꾼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재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곤 했다. 보쿠토는 감은 눈 위를 양 손으로 누르며 그대로 침대에 힘없이 쓰러졌다. 땀이 베인 이마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닿아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여전히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여린 목소리는 무정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어떤 평범한 하루에,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함께 동네 골목을 거닐었었다. 어느새 노을이 져 가는 하늘에 하나 둘 씩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다. 요 최근 들어 보쿠토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다.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고, 특히나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 마음에도 아이가 너무 좋아서 항상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돌변한 아이의 태도와, 잔인하게 쏘아 붙이는 날 선 말은 그 때의 어린 보쿠토가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밤에는 온 몸이 쑤셔 죽을 만큼 아팠고, 끙끙대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뒤 정신을 차렸을 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보쿠토는 아픈 와중에도 계속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어째서 그런 말을 했냐고 묻고 싶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이가 이사를 가고 동네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고 했다. 아이가 어디로 갔냐는 물음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그대로 보쿠토의 가슴에 박혔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일까, 보쿠토는 그 뒤에도 한동안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가슴통증을 느끼거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렇게 몇 번 아프고 난 뒤에야 보쿠토는 아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때가 언제인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 학교 가기 싫다...”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보쿠토는 꾹꾹 마사지하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이 가시길 기다렸다. 어두웠던 방안이 창밖의 햇빛으로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보쿠토는 침대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방 너머로 보쿠토의 엄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비척거리며 일어날 수 있었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보쿠토가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사립 후쿠로다니 학원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다. 1년에 천 만 원이 넘는 학비에도 매년 입시생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부자 학교라 불리는 만큼 교내 시설이 대학교 시설에 견줄 만큼 훌륭했고, 전국 각지에서 스카우트 해 온 선생님들과 체계적으로 잡힌 교육 시스템이 유명했다. 졸업생들 중에서는 해외, 국내 유수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부터 언론계, 연예계, 그리고 스포츠계 등 여러 방면에서 전국적으로 활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도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후쿠로다니 유학을 가기 위해 몰려 왔고, 아카아시 케이지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아카아시 스스로는 딱히 터무니없을 만큼 비싼 학비를 들여서까지 후쿠로다니 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일찍이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카아시를 키운 그녀는 아카아시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원했다. 아빠가 없어도 죽은 남편의 몫까지 사랑해주겠다며 그녀는 아카아시를 보살피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아카아시는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나중에야 그게 부족하다 못해 과분한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없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아카아시는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랑받았다. 또래 애들보다 일찍 철이 든 아카아시는 엄마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돈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몇 번 말해봤지만 언제나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기 때문도 있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가족인 아들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심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통 큰 씀씀이를 어쩔 수 없이 다 받아 주었지만 아카아시도 비싼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려는 엄마를 이번만큼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후쿠로다니 학원 설명회를 듣고 왔다며 테이블에 책자를 펴 놓고 설명해주었지만 아카아시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에 저녁을 먹으며 엄마가 스치듯 설명회에 갈까, 하고 얘기를 꺼냈던 것을 잊지 않고 아카아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카아시가 보기에도 후쿠로다니 학원은 훌륭한 학교임에 틀림없었다. 살인적일 만큼 비싼 학비가 아니라면 아카아시가 먼저 얘기를 꺼냈을 지도 모를 만큼 욕심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학비에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진학하고 싶지 않았기에 책자를 천천히 살펴보는 엄마에게 말했다. 주변에 좋은 공립학교가 충분히 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진학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그녀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아카아시의 말에 납득하는 듯 했던 그녀는 결국 아카아시 몰래 후쿠로다니 학원 입시시험에 등록하고는 시험 보기 일주일 전에야 아카아시에게 고백했다. 벙찐 아카아시를 향해 푸하하, 크게 웃으며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아카아시에게 시험만이라도 보라고 했고, 이후 합격한 아카아시에게 기왕 합격했으니 진학하라며 멋대로 교복을 맞춰왔다. 그렇게 아카아시는 얼떨결에 후쿠로다니 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매스컴을 자주 탄 학교인 만큼 교내 시설은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교실이 있는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에는 양 쪽으로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있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꽃잎이 떨어졌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머리와 어깨에, 가방 등에 꽃잎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해 아름다웠지만 아카아시는 괜히 곱게 보지 못했다. 하얗고 예쁜 건물이나 하늘하늘하게 내리는 벚꽃 비가 그만큼 돈을 들인 결과 같았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며 가방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나가며 건물로 들어섰다. 다들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신발을 갈아 신는데 사방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아카아시처럼 신입생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발그레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에 그들의 기대와 설렘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시끄러운 복도를 지나 마찬가지로 어수선한 교실에 들어서 아카아시는 대충 빈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고교데뷔? 교실을 둘러보니 벌써 각자 인사를 했는지 둘, 셋씩 모여 떠들고 있었다. 아니면, 아카아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아카아시 혼자만 이 학교에 진학한 것과 달리 서로 이전부터 일면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감정을 숨기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모든 것이 낯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카아시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고, 점점 학교에 적응해갔다. 멋대로 일을 벌인 엄마에게 아카아시 나름대로 소리 없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스스로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아카아시도 엄마의 결정에 쉽게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을 그대로 넘기면 그 다음에도 엄마에게 휘둘릴 게 뻔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엄마가 시무룩한 얼굴로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쭈물하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지... 아직 화났니?”

“......아니요. 별로...”

학교 다니는 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알아. 하지만, 엄마는 항상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었어.”

 

아카아시 또한 충분히 알고 있다.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굳이 거짓말을 해 가고 고집을 피우면서까지 제멋대로 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영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제가 별 수 있는가. 어차피 다니기로 한 학교에 계속 불만을 가져 봤자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뿐더러 엄마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아카아시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서 도시락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번만 넘어가 드릴 거예요. 다음엔 절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케이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웃어주고 아카아시는 문을 열었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아카아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제멋대로야, 우리 엄마는.

 

새 학기가 시작되며 후쿠로다니 학원에는 동아리며 부활동의 신입을 받는 일로 분주해졌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앞 운동장에 마련된 부스에 각종 스포츠 부활동과 게임, 소설, 애니메이션 등등 취미 동아리를 홍보하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신입생들로 북적였다. 후쿠로다니 학원은 딱히 부활동이 필수는 아니었지만 일단 가입하면 재학 중인 선배들과 졸업한 선배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다들 하나쯤은 가입하는 추세였다.

 

아카아시 또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매점에 들렀다가 구경하자는 말에 덩달아 부스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홍보 멘트가 쏟아졌다.

 

신입생, 게임 좋아해? 방과 후에 게임 잔뜩 할 수 있어~”

너 운동 잘 해 보이는데, 농구부 어떠니?”

문예창작 동아리에 드세요! OO 문학대상을 받으신 선배님들과 만나는 자리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며 부스를 구경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카아시는 딱히 동아리나 부활동에 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꽤 전력을 다하면서까지 배구부를 들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와서까지 배구를 할 마음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중학교 때 배구부 들었다고 했지? 배구부도 가 볼래? 후쿠로다니 배구부 완전 강호라고 소문났어.”

, 난 별로...”

배구부 저기 있다! , 완전 사람 많아.”

 

사양하는 아카아시를 끌고 친구들이 배구부 부스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멀리서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자 배구부와 남자 배구부 부스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어느 한 쪽도 입부 신청서를 내고 있는 줄이 짧지 않았다.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서 온 아카아시는 대충 구경하는 척 하다 돌아갈 셈으로 부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줄을 설 정도로 강호인가, 아카아시는 배구부 홍보 포스터를 하나 집었다.

 

후쿠로다니는 거의 매번 전국 진출 하는 모양이더라. 전국 대회에서도 꽤 손꼽혀.”

저번 봄고 때는 완전 난리가 아니었지? 대형 신인 출현이라나, 뭐라나. 작년에 엄청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날아다녔다더라.”

나도 들어 봤는데... 이름이 뭐더라? 무슨 토끼 어쩌구였는데...”

 

토끼 어쩌구? 이름에 토끼()가 들어가나 보지? 아카아시는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작년 인터하이와 봄고에 전국 진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연혁들을 보니 듣던 대로 꽤 잘 나가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가 포스터 뒤편에도 글이 있을까 뒤집어보는데 등 너머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고, 회색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머리를 잔뜩 올려 세운 남자가 양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커다란 금안이 아카아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씨익 웃어보였다.

 

! 배구부 들어오려고? 그렇게 포스터만 보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신청서 작성해!”

, 아뇨. 전 그냥 구경만...”

어라? 아카아시 중학교 때 배구부였다며. 고등학교에서는 안하는 거야?”

뭐야, 중학교 때 배구 했었어? 그럼 계속 해야지. , 이리 와. 신청서는 저기서 작성하면 돼.”

 

아카아시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아카아시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끌고 갔다. 얼른 얼른, 하고 신청서를 작성하는 테이블로 이끌더니 대뜸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 신청서 여기.”

전 배구부 안 들어갈 건데요.”

 

아카아시는 제게로 내밀어진 종이와 펜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카아시의 말에 남자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카아시에게 질문했다.

 

? 중학교 때 배구 했다면서 왜 계속 안하는 건데?”

 

이런 질문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는 게 굉장히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이 사람은?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자신이 부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배구를 그만둔 거였다면 어쩌려고. 아카아시는 언뜻 어린아이의 얼굴과 비슷한 순진한 얼굴을 보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사정이 있습니다.”

배구가 싫어졌어?”

“... 그건, 아니지만요. 각자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까요.”

뭐야. 배구가 싫어진 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있는 거네?”

 

아까부터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본 얼굴이 자신의 일인 것 마냥 해맑게 웃고 있어서 아카아시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던 종이를 뒤집어 손바닥에 대고 뭔가를 끼적였다.

 

여기, 오늘 수업 끝나고 배구부 견학할 수 있으니까 구경하러 와.”

? 전 괜찮...”

꼭 와!”

 

남자는 사양하는 아카아시에게 억지로 종이를 쥐게 하곤 근처에 몰려있는 또 다른 신입생들에게 달려갔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라며 여기저기에 말을 거는 모습이 신이 나 보였다. 아카아시가 종이를 다시 넘겨주려고 다가가는데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 가자!”

, .”

 

결국 구겨진 종이를 돌려주지 못한 채 아카아시는 교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 체육관 오후 4]

 

교실에 돌아와 사정없이 구겨진 살살 펴보니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손바닥에 대고 쓰는 바람에 글씨는 삐치고 볼펜에 박혀 이곳저곳 구멍 나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분명 옆에 테이블이 있었는데... 아카아시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빤히 쳐다보다 반으로 접고 접어 그대로 책상서랍에 넣었다.

 

배구는 좋아했다. 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든 배구부에서 배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확실히 재미를 느꼈고, 주변에서 잘한다며 칭찬을 듣기도 했다. 잘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으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스포츠 부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중, 고등학생이 그러하듯이 아카아시 또한 언젠가는 지게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에 조금 회의감을 느꼈다. 이길 땐 뛸 듯이 좋지만 질 때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점점 좋아질수록 나중엔 괴로운 감정이 커져만 갔다. 중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 지고 말았을 때는 그 허무함이 극에 달했었다. 재밌어서 시작한 건데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생각했다.

 

역시 배구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 비싼 돈 들여 좋은 학교까지 왔는데 배구에 시간 낭비할 수는 없겠지. 좋은 학교인 만큼 여타 학교에 다 있는 동아리, 부활동들은 물론이고 좀 더 실용적인 동아리도 있었으니까. 역시 그런 동아리를 드는 게 나을 거다. 아카아시는 서랍에 집어넣은 종이를 다시 한 번 깊숙이 밀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듯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는 몇 번이고 종이를 밀어냈다.

 

 

이미 체육관은 그 유명하다는 배구부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멋있다, 신기하다는 말소리와 코트에 밀린 끼익끼익 거리는 발소리,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익숙한 소리를 따라 아카아시는 인파를 비집고 슬며시 체육관에 들어섰다. 환한 조명아래 코트가 반짝이는 것처럼 빛났다. 트레이닝을 하는 사람들과, 코트를 누비며 연습경기를 하는 사람들로 체육관이 분주했다. 아카아시는 커다란 체육관에 한 번 놀랐고, 강호라고 불리는 만큼 부원들이 많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남자가 높이 날아올라 스파이크를 날리는 모습에 가장 놀랐다. 남자가 내리친 공이 바닥을 맞고 크게 튀어 올랐다. 주변에서 우와~! 하는 함성소리가 났고 누군가는 최강 보쿠토라며 소리쳤다.

 

헤이헤이헤이~!”

 

저 사람이 아까 말했던 보쿠토 코타로인가. 아카아시는 점심시간에 대뜸 신청서를 내밀고 배구 안하냐며 물었던 보쿠토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양 손을 번쩍 들고 코트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보쿠토를 처음 보는 신입생들은 웃기다면서 피식거렸고 2, 3학년들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보쿠토는 코트를 누비며 꽤 수준 높은 블록을 피하고, 뚫으며 점수를 따냈다. 보쿠토는 1점을 땄으면서 10점을 따 낸 것처럼 유난스럽게 행동했지만, 그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보쿠토가 배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리고 역시 강호답게 한 사람의 에이스만으로 팀이 이끌어지는 게 아니었다. 존재감이 확실한 보쿠토를 제외하고도 연습 게임에 참여하는 부원들 모두가 실력이 출중했다. 리시브며, 스파이크며 서브까지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후쿠로다니 배구부가 특별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보다 같은 팀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부원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보쿠토의 존재였다. ‘그냥잘하는 에이스가 아니라 뭔가특별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시종일관 웃음을 지우지 않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근데 저 사람 되게 웃긴 게, 가끔 경기하다가 엄청 시무룩해진다더라.”

시무룩해진다고?”

. 그게 엄청 심해서 작년 봄고에서도 큰일 날 뻔 했데. 잘하긴 하는데... 가끔 쓸모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에이, 설마. 저렇게 팔팔 날아다니는 사람이?”

나도 주변에서 들은 얘기긴 한데... 아닌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던데, 확실하지 않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에 아카아시는 헛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저 사람이 시무룩해진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 아카아시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세트포인트가 되었다. 점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져 있기에 다들 조금쯤은 안심하고 보고 있는데, 서브 차례였던 보쿠토의 공이 네트에 맞아 떨어졌다.

 

, 아깝다.”

조금만 더 높았으면 됐을 텐데.”

그래도 1점만 더 따면 되니까.”

 

보쿠토 파이팅, 돈마이라며 여기저기서 1학년들이 보쿠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면 그에 답하듯 손을 흔들어 보이던 보쿠토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쥐락펴락하기만 했다. 가끔씩 이상하다는 듯이 보쿠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일이지?”

 

아카아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코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런 보쿠토를 보던 한 선배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다른 선배들에게 손짓했다. 허공을 몇 번 가르는 손짓에 보쿠토를 제외한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 포인트이니 만큼 마지막은 보쿠토가 화려하게 장식하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경기는 조금 싱겁게 끝나버렸다. 얼른 끝내버리자고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보쿠토 쪽의 선배들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다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서브를 실패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조용한 보쿠토 쪽을 쳐다보다, 묘하게 안심한 얼굴의 다른 선배들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비단 아카아시 뿐만 아니라 경기를 쭉 지켜보던 1학년들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추가적으로 입부 신청서를 쓸 수 있다며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선배들이 1학년들을 이끌었다. 연습시합을 보던 내내 대단하다, 멋있다며 말을 남발하던 몇몇 1학년들이 신청서를 쓰러 몰려갔다. 아카아시는 아직 경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빈 코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역시 강호교는 다르다고 해야 하나, 코트 위에 있던 선배들 모두가 멋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실력이 차원이 달랐다. 서브도, 스파이크도, 리시브나 세터의 토스까지 몇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보쿠토란 사람의 존재감이란.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여느 또래 애들처럼 연예인과 같은 특정 한 사람에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봐도 예쁘다, 노래를 잘하네, 춤을 잘 추네, 와 같은 일반적인 감상 외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거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든가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든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노력해도 닿을 수 있고 없고 그런 차원에 있어서 연예인과 보쿠토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배구를 하기에 저렇게 배구를 즐기면서 할 수 있지? 저 사람과 같이 배구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가슴이 복받쳐오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저 사람과 배구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배구부에 들어감으로써 예상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아카아시는 그러한 생각들을 갈무리해버렸다. 여전히 손바닥에 뭐가 묻은 사람처럼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보쿠토를 힐끔 보다 아카아시는 걸음을 돌렸다.

 

그냥 단순하게, 다시 배구를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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