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下)


   

 

한창 출근 시간이 되자 전철 안은 흡사 지옥과 같았다. 꾸역꾸역 전철 안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중간에 자리를 양보하느라 그 틈바구니 사이에 서게 된 후타쿠치는 압사당해 죽을 것 같은 고통에도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학교를 지나쳐가는 방향의 전철에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회사원들이 후타쿠치를 땡땡이치는 양아치처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타쿠치는 다다음 역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오전 719, 그 순간 후타쿠치는 오로지 하나만 바랐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그 집에 카마사키가 있기를.

먹먹해진 귓가에 모니와 씨가 했던 말들이 맴돌았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한껏 자랑을 했다고 했다. 술에 취했는지 감정에 취했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랑하는데, 모니와의 눈에는 카마사키 또한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카마사키가 직접 말한 게 아니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모니와는 재차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지. 그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얼굴이었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은 어떨까. 못 견디게 궁금하면서도 절대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3자가 봤을 때 한 눈에 알아챌 정도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을 그 얼굴이 보고 싶으면서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해버릴 것 같다. 제발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그러지 말았으면 소원했다. 날 향한 게 아니라면 차라리 눈을 가리자. 내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보지 못하게. 나조차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니 그 사람의 눈을 가려야겠다.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작정 뛰었다. 버스로 5분 거리의 카마사키 씨 집까지 가는 데에는 간신히 10분정도 걸린 듯 했다. 집에 몇 시에 나오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회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아직 카마사키 씨는 집에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밭은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올랐다. 지난 수개월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아파트는 그 때와 다름없이 어디는 말끔하고 어디는 낡았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도 이 집에 왔었던 것처럼 낯선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204호에 이르러 후타쿠치는 그 앞에서 잠시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여름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간신히 되돌아왔다.

어느 정도 숨소리가 편해진 뒤 후타쿠치는 벨을 눌렀다. 얇은 문 너머로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예상대로 카마사키는 아직 출근 전인지 안에서 타닥타닥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카마사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기 전, 후타쿠치는 짧게 숨을 들이 쉬었다.

누구,”

넥타이를 매던 중이었는지 카마사키는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후타쿠치가 집 앞에 서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카마사키는 말을 잃고 놀란 얼굴을 했다. 어버버거리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며 후타쿠치는 내심 안도했다. 최악의 경우엔 문전박대 당하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출근 몇 시에 해요?”

? , 8. 아니, 810분 정도까진 괜찮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736분이었다. 적어도 30분은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대답대신 몸을 비켜주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방은 마지막으로 봤었을 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여전한 분위기와 변함없이 카마사키 씨의 체취가 느껴졌다. 괜히 방 안을 둘러보는 후타쿠치의 등 뒤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차라도 줄까?”

어제도 만난 사이마냥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변함없는 건 카마사키 씨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당황하던 얼굴은 벌써 무덤덤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라 후타쿠치는 조금 놀랐다. 카마사키 씨의 성격으로 봐서 이렇게 태연한 모습을 할 줄 몰랐다. 하긴, 그게 뭐가 그리 충격적이라고.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을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는 새삼 실감하는 감정의 차이에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저 넥타이를 매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마사키가 그 모습을 봤을 리가 없었다.

녹차랑 커피, , 아니면 차라리 역 앞에 카페를 갈까?”

아뇨, 됐어요.”

그럼, 그러든지. 그러고 보니 봄고 예선전 끝났다며? 모니와한테 들었어. 이번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갈 수가 없었어. 미안, 준결승전은 꼭 가고 싶었는데.”

직장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선배들도 매번 온 건 아니라서 미안해할 것까진 아니에요.”

그래도 미안했다. 마지막이었잖아.”

별로 카마사키 씨가 안 왔었어도 상관없었어요.”

그야 그랬겠지.”

사실은 몇 번이고 경기장 입구를 확인했었다. 선배들에게 카마사키는 일이 있어서 못 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경기장 곳곳을 헤맸다.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오겠지. 인터하이 때는 몇 번이나 응원하러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오겠지.

하지만 결국 카마사키 씨는 예선 기간 내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가운데 정작 보고 싶은 얼굴은 끝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경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정말 미치도록 그 사람이 그리웠다. 응원이고 뭐고 상관없이 한 번만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마주치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든 좋으니 보고 싶었던 거다. 경기에서 졌다는 분함, 고교 배구가 끝났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이제 이 경기장을 나가야 한다는 씁쓸함이 배가 되었다.

봄고도 끝났는데 요즘은 뭐 해? 진로는 이미 다 정했지?”

궁금해요?”

, 앞으로도 배구 계속 할 건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가는지 궁금하긴 하지. 듣기로 아오네는 추천이 거의 정해졌다면서? 너는,”

제 진로가 왜 궁금해요?”

어딘가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꼬박꼬박 묻고 대답하던 카마사키가 말을 멈췄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흘렀다. 얼마 안 있어 카마사키가 말했다.

궁금해 하면 안 되냐?”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한 그 말의 저의를 알고 있다. 카마사키 씨는 단순히 후배를 신경써주는 것뿐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적당한 관심일 뿐이다.

여자 친구 생기셨다고요.”

?”

모니와 씨가 그러던데요. 카마사키 씨가 제일 먼저 배신할 줄은 몰랐다고, 여자 친구 생긴 게 틀림없다면서.”

무슨, 그런 거 아니야.”

, 아직 사귀는 건 아닌가 봐요? 설마 고백할 타이밍이라도 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카마사키 씨라면 우물쭈물 하다가 분명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텐데.”

.”

연애는 이쪽이 훨씬 경험치가 높으니까, 원하신다면 코치라도 해드릴까요?”

후타쿠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마도 화가 나 있을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수록 가슴이 조여 왔다. 지끈지끈, 아프다.

내가 누구한테 고백하든 누구랑 사귀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침부터 시비 털려고 찾아 왔냐?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나가.”

,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아무 상관없는 거, 씨발, 안다고요.”

너 미쳤냐? 몇 달 만에 찾아와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

잘 지냈어요?”

?”

뜬금없이 묻는 안부에 카마사키가 황당해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니, 하고 부정하며 카마사키의 말을 막았다.

아니, 그냥 대답하지마세요.”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후타쿠치는 가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침묵이 흘렀다. 카마사키는 수그러진 후타쿠치의 뒤통수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칼이 이리저리 뻗쳐 있는 걸 발견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나보다고 납득하려는데 목가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목덜미 언저리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아침에 틀어놨던 날씨 예보가 떠올랐다. 오늘은 땀이 나기는커녕 기침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유난히 쌀쌀한 날씨라고 했었다. 순간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어땠는데?”

……같았어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놓칠까봐 카마사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미칠 것 같았어요.”

…….”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유 없이 화가 났다가 짜증이 났다가,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가. 감정이 마구 널을 뛰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

미쳐가는 기분이에요.‘

미칠 것 같다는 말과는 달리 후타쿠치의 목소리는 사뭇 담담하게 들렸다. 등을 돌리고 서 있어 후타쿠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그랬는데?”

…….”

한동안 왜 안 왔냐?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개무시하고 뻔질나게 찾아오더니. 내가 여자 친구 생겼다는 게 그렇게 놀라웠어?”

그런 거 아니라면서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봐. 왜 이제야 찾아와서 영문 모를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지 대답해 보라고.”

그 여자 좋아해요?”

후타쿠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목소리에는 아직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묻는 걸까.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말하는 바와 목소리가 달라서일까, 그 괴리감에 카마사키는 있지도 않은 여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질 것 같아.”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쿵쿵, 심장이 울리는 소리로 방 안이 가득해졌다. 어느새 나는 후타쿠치를 좋아하게 됐나? 깨닫자마자 그동안 묵혀왔던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한동안 뭘 해도 허전한 기분이었던 원인이 이 때문이었나. 그 순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실에 안도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왜 좋은데요?”

그러니까……,”

…….”

같이 있으면 좋아.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편하고 즐겁고.”

…….”

무엇보다 그냥 자꾸 생각나거든. 눈에 안 보이니 얼굴을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지금쯤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카마사키는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보인 후타쿠치의 모습에 놀라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그저 좋았다.

넌 그런 사람 없냐?”

대답해 봐, 후타쿠치.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그런 사람 없냐고. 그 때 그 마음이 변함없다면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말해 봐. 내가 짐작하는 그대로가 맞아?

있어요.”

누군데?”

. 후타쿠치는 들이키던 숨을 멈추고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언젠가부터 빠듯하게 말아 쥐고 있던 주먹에 손가락이 아려왔다. 하얗게 질린 주먹에 꾸역꾸역 손가락을 펴보지만 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다시금 곱아 들었다. 어딘가에 애써 힘을 주지 않고서는 서 있기가 벅찰 정도로 후타쿠치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후타쿠치를 기다리지 않고 카마사키가 재차 말했다.

?”

후타쿠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카마사키 씨가 잘못 말한 걸거다.

무슨 소리에요?”

그 때 너, 나한테 키스했잖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거 장난이었냐?”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렸다. 후타쿠치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백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나겠지. 몇 년 동안 구질구질하게 혼자 앓아왔던 짝사랑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는 거다. 해피엔딩이 아닌 배드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장난이었다는 거야?”

애매한 대답에 카마사키가 다른 쪽으로 받아들였는지 따지며 물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두려움에 후타쿠치는 순간 망설였다. 장난이었다고 하면 아직은 마지막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여기까지 와서도 늘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찌질한 새끼. 후타쿠치는 스스로를 환멸하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카마사키 씨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벅차게 차오르려는 숨소리가 카마사키 씨의 귀에 들리지 않기를. 후타쿠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왜 허구한 날 오냐고 물었었죠. 좋아서 그랬어요.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별 시덥잖은 핑계를 갖다 대가면서 카마사키 씨를 만나러 간 거였어요.”

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후타쿠치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코끝이 찡해지고 있었다. 씨발, 꼴사납게 우는 건 절대 안 되는데.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는 눈이 아려올 정도로 눈에 힘을 줬다. 있는 힘껏 힘을 준 덕분일까, 다행히 촉촉하게 젖어가던 눈가가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코끝은 찡했지만 마른 눈가에 후타쿠치가 안도했을 무렵 내내 침묵하던 카마사키가 입을 열었다. 방금 후배 남자에게 고백 받은 사람치고는 목소리에 어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예요.”

그래서 넌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고. 이렇게 다 체념했다는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

…….”

그 날 이후로 벌써 4 개월 남짓 지났다.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냐고.”

공백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든 말해보려 했지만 후타쿠치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과 그 때의 상황을 비롯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름날의 자신과, 배구라는 핑계로 모든 걸 뒤로 했던 4개월간 나는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카마사키 씨의 말처럼 뭘 하고 싶은 걸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짝사랑에 갈피를 못 잡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카마사키 씨의 둔한 신경을 탓하며 아무 말도 못하는 겁쟁이였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노력해왔다고 자위했지만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 그 모든 것은 허사일 뿐이었다. 정작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면서 왜 내 마음을 알지 못하냐고 떼를 쓸 뿐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원인을 카마사키 씨에게 덮어버리고 이것 보라며, 가능성 따위 1%도 없다며 가망 없는 현실을 자조했다. 뭣 하나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포기해버린 것은 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경멸해요?”

…….”

남자를,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를 경멸하고 있냐고요.”

아니.”

그럼.”

…….”

그렇다면.”

후타쿠치는 해야 할 말을 고르는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지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 후타쿠치의 뒤에서 카마사키는 아래로 흐르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 사이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본래의 피부색보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들에 카마사키는 애가 탔다. 모든 게 끝났다는 어조로 진심을 고백한 후타쿠치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전부 체념하고 있을까.

초침이 시계를 한 바퀴 빙 돌았을 무렵 후타쿠치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좋아해도, 되요?”

…….”

난 그냥, 카마사키 씨를 좋아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수도 없이 그만두고 지워버리려 했는데 결과는 항상 똑같았어요. 뭘 어떻게 해도 좋아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이제는, 이대로 계속된다면 이제,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요. 그냥, 내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한없이 계속.”

…….”

그러다보면 시간에 닳고 닳아서 감정이 문드러져 없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기 전에 언젠가 카마사키 씨가,”

마른 헛기침을 하며 후타쿠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콜록,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후타쿠치의 뒤통수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 여전히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날 생각해줄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

정말 사소한 거라도, 아무 것도 아닌 흔적에서 나를 생각하고 신경 써주었으면.”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불시에 돌려지고 짧은 숨을 들이키는 후타쿠치의 입술에 카마사키가 닿았다. 꾹 다문 입술이 아주 잠깐 부딪혔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후타쿠치는 시공간이 멈춘 듯했다. 꿈인가, 잠시 헤매던 시야에 인상을 찌푸린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보였다. 다물다 못해 살짝 즈려물고 있는 입술은 빨갛게 달아올라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아랫입술에서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키스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서툰 입맞춤의 흔적이었다.

, 엄청나게 둔해서 네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네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돌려서 말하는 것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아.”

알아요.”

너도 알다시피 너랑 나는 싸우지 않을 날보다 싸울 날이 더 많을 거고. 대부분 다 네 탓일 테지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

난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널 좋아하지 않아.”

…….”

그래도 괜찮아?”

카마사키는 마지막 말을 할 때만큼은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카마사키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후타쿠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후타쿠치가 무슨 수를 써도 못 잊을 만큼 좋아한다면, 자신은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후타쿠치가 그 격차로 상처받는 게 보기 싫었다.

넌 내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아. 솔직히 남자에다 후배인 널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네가 키스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

널 만나지 않았던 4개월 동안 난 계속 너에 대해 생각했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신경 쓰였으니까.”

쌀쌀한 11월이다. 밖은 손끝을 시리게 할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고, 집 안에도 어렴풋이 한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마사키는 이마에 살포시 땀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로 꼼지락거리게 되는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 손바닥에도 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널 좋아한다고는 하지 않아. 그래도 난, 그동안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

널 좋아할 것 같아, 후타쿠치.”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카마사키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감정 앞에 금방 막 자란 조그만 감정을 들이대기가 벅차고 아까웠다. 아직 다 자라지는 않은 감정이 만개할 즈음, 후타쿠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 또한 후타쿠치를 좋아할 때, 그 때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좋아해도 되겠냐고 절절하게 묻는 후타쿠치의 입장에선 희망고문이라도 하는 거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지금은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바라건대 후타쿠치가 거절하지 않기를.

나랑 사귈래?”

카마사키의 신경이 온통 후타쿠치 쪽으로 흘렀다. 심장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며 자신이 이만큼 두근거린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초조함에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다. 머리 한 편에 출근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는 듯 했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째깍째깍, 얼마나 초침소리를 들었을까. 카마사키가 슬쩍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려는 순간 미동도 없던 후타쿠치가 손을 들었다.

오른쪽 가슴에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조금씩, 천천히 손을 들어 마주 닿은 몸을 끌어안았다, 후타쿠치가 그랬듯이. 귓가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타쿠치가 얼굴을 묻고 있는 왼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일 뿐, 후타쿠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어깨에도 눈물 흔적은 남지 않았다. 좋아해요. 나직하게, 그러나 억누른 목소리는 한 마디만 반복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는 가만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한 번, 두 번, 후타쿠치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흔적이 남았다. 비로소 사랑이 흔적을 남겼다.




(10007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中)




준결승까지 올라갔어.”

그래? 잘했네.”

가게에 들어서는 카마사키를 향해 초장부터 내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니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졸업하고도 간간이 보던 얼굴이지만 근래 들어 참 드물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낯선 얼굴을 하곤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왜 안 왔어? 인터하이 때는 매일같이 오겠다고 난리더니.”

그냥, . 요즘 회사 일이 바쁘기도 하고. 굳이 나까지 안 가도 다른 애들이 있잖아.”

거짓말 치지 마. 아닌 거 다 알아.”

모니와의 말에 카마사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잔이나 비운 술잔과 친구를 번갈아 보다 모니와는 말없이 카마사키의 잔을 채워주었다.

무슨 일인지 봄고 기간 내내 카마사키는 배구부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은퇴하고 나서도 뻔질나게 놀러 오고, 인터하이 때는 꼬박꼬박 찾아왔던 주제에 갑자기 생판 남인 사람마냥 연습 때에도, 경기 때도 못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하게 웃을 뿐 대답을 회피하기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마사키의 성격 상 아무 일도 없이 그러는 건 아닌 게 분명했지만 본인은 말해주지 않으니 모니와는 결국 모든 경기가 끝나고서야 후배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예선시합 전에 보러 갔었던 때부터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더니 원인은 후타쿠치에게 있는 듯 했다. 경기를 앞둔 긴장으로 보기엔 이렇게까지 신경이 예민해진 적은 없는지라 그 즈음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만나면 항상 서로 티격태격하던 사이이긴 하지만 뒤끝이 있었던 적은 없는데. 모니와는 평소보다 담담해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이름을 듣자마자 별거 아닌 근황을 말하던 입을 다물었다. 모니와의 눈을 피해 카마사키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답지 않게 내내 조용하더라.”

.”

건방진 건 여전하지만.”

.”

무슨 일 있어?, 하고 모니와는 말을 꺼내고 싶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카마사키가 그랬듯이, 후타쿠치도 후배들은커녕 아오네에게 조차 별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걸 보면 두 사람 모두 얘기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대체 뭐기에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모니와는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카마사키에게 무언의 시위를 표했지만 그런 모니와를 카마사키는 끝까지 모른척했다.

, 모니와.”

한참을 대화를 피하고 술만 마시던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

내가 머, 뭐 마래줄 게, 있는데.”

사정없이 꼬인 혀로 카마사키가 더듬더듬 말했다. 모니와는 이미 한계치까지 마신 카마사키의 손에서 술잔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빠져나가는 술잔을 따라가는 손에 물이 든 컵을 대신 쥐어 주며 모니와는 말해보라며 카마사키를 재촉했다.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손에 쥔 게 술잔은 아니라는 걸 아는지 카마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컵을 만지작거렸다. 말하다 말고 컵에 신경을 뺏긴 카마사키에게 모니와가 재차 물었다.

뭐를 말하고 싶은데?”

, 맞아. 말 해줄 거.”

오늘 내내 무표정에 가깝던 카마사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오른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헤집어대는 게 짜증이 났다기보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걔 있잖아, 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중에 어떤 애가 그러는데.”

.”

내가 아는 애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니와는 카마사키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신의 얘기임을 눈치 챘다. 본능적으로 아는 애라고 포장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니까 내가 아는 애의 아는 애가 고등학교 후밴데, 친하친한가? 아씨,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후배란 자식이 말이야. 그 자식이.”

그 자식이 왜?”

젠장, 그 자식이 나한테, 아니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한테 가, 갑자기.”

갑자기?”

,”

?”

악 소리를 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 마구잡이로 쥔 까만 머리카락이 불쌍해 보였다. 술 때문에 빨개진 건지 어떤지 목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양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카마사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한테 키스를 했어. 그 자시기 나한테 갑자기. 근데 그래놓고 암 말도 안하고 .”

, ?! 잠깐, 뭐라고?”

한 번도 아니고 며, 몇 번이나, 젠장.”

, 그러니까 누가 너한테?”

모니와. , 그 자식이 나한테 왜 그랬지? 말로 하는 걸로는 부족해서, 그래서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날 괴롭히는 건가? 새끼, 나 첫키스도 아직이었던 거 어떻게 알아가지고.”

그러니까 누가.”

중얼중얼 첫키스가 어쨌네, 신종 이지메냐며 횡설수설 거리던 카마사키의 고개가 끝내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푸흣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풋풋거렸다. 미쳤나보다고 모니와가 사색에 질리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실은 다 알아. 젠장, 내가 암만 눈치가 없어도 다 안다고. 있지, 모니와. 나 어떡해.”

그니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오.”

어떡해, 존나존나, 걔 나 조아하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걔가 날.”

그러니까 걔가 누군지 말해달라고! 모니와가 미친놈처럼 큭큭거리는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봤지만 카마사키는 뭐라 웅얼거리기만 할뿐 일어나지 않았다.

쿠치, 미쳤나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고부터 이렇게까지 마신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카마사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하지 않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출근했어야 했으면 쓰러졌을 지도 몰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카마사키는 안도했다.

어제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셨더라? 꽤 오랜만에 모니와랑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봄고 얘기 좀 하다가그러다가, 맞아, 모니와가 후타쿠치 얘기를 꺼냈었다. 가만있으면 자꾸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계속 술을 들이켰던 게 기억이 났다. 최대한 후타쿠치 얘기를 피하려고 회사 일만 얘기하면서 퍼마셨지.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시다가 어느 부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 왠지 예감이 안 좋다. 술김에 모니와한테 잔뜩 주정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이마를 쥐어짜며 어제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모니와가 잔뜩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던 것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요상하게 눈빛이 반짝이던데, 대체 무슨 얘기를 했지? 이불 밖으로 손끝을 더듬으니 핸드폰이 잡혔다. 배터리가 없는지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보조배터리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그 잠깐 사이에도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은 켜지자마자 징징 소리를 내며 한참동안이나 부들거렸다. 거의 다 모니와로부터 온 라인이었다.

[배신자. 대체 그 자식이라는게 누구야?]

제일 처음에 온 라인은 그 자식이 누구냐는 얘기였다. 그 자식? 카마사키는 곧바로 화면을 내렸다.

[까먹었을게 뻔하지]

[어제 너가 첫키스 얘기해줌]

[누가 너 좋아한다며]

[이모티콘]

[이모티콘]

[얼굴 새빨개져서 부끄러워함]

[사진]

[사진]

[사진]

[이모티콘]

채팅창에 줄줄이 올라온 건 난리부르스를 추는 캐릭터 이모티콘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사진들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온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웬만큼 취했을 거라곤 예감했었지만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카마사키는 최대한 사진을 외면하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꿈이었으면 하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두통 때문에 머리가 사정없이 아팠다. 그나저나 모니와한테 후타쿠치 얘기까지 해버렸나? 첫키스니, 그 자식이니 하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술김에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누가 그랬는지까지 말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으아. 으아으아.”

그 자식이 후타쿠치란 걸 알면, 모니와 기절할 지도. 카마사키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분명하게 그 일이 언제 일어났더라. 한창 열대야가 시작되었을 때니 벌써 몇 달도 전의 이야기다. 방학을 맞이해 여름합숙을 앞둔 후타쿠치가 언제나와 같이 놀러 왔었고,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날이 너무 더웠다는 것 정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배어나올 정도라 후타쿠치도, 자신도 선풍기 바람 하나에만 의존해 더위에 지쳐 있었다. 아니,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날은 유난히 처음부터 후타쿠치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기운 넘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후타쿠치가 별안간 키스를 해왔던 때. 처음에는 후타쿠치와 입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저 눈앞에 늘 보던 얼굴이 평소보다 가까웠다는 것만 알았다. 그저 너무 더워서, 지나치게 가까이에 보이는 얼굴이 신기루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입술에 닿은 후타쿠치의 입술이 순간 움찔하고 떨리지 않았다면 계속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을 거다. 정신을 차리고 후타쿠치를 밀어내려 했을 땐 이미 어깻죽지를 잡히고 재차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비틀고 기울어지는 고갯짓에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스치는 이마가 간지러웠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입술을 깨물고, 기어코 혀를 들이밀어 입 안 곳곳을 문지르던 후타쿠치는 한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깜짝 놀라 나를 밀쳤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사이, 후타쿠치의 얼굴이 빠르게 무너져갔다. 숨이 턱 막힌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 모습이 금기를 저지른 어린아이 같았다. 정면으로 마주친 캐러멜 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지려던 말이 목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굳어 있던 후타쿠치는 도망치듯 일어나 방을 나갔다. 들고 왔었던 가방만 남긴 채,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뻔질나게 울려대던 벨소리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야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자주 얼굴을 봤으니 친해진 건 맞지만 단순히 선후배로서 친분이 쌓인 것이라 생각했다. 후타쿠치가 느닷없이 입술을 들이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 이후로 후타쿠치를 만난 적이 없으니 어느 하나 분명하진 않지만, 그 때의 그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 방면으로 경험도 없고 눈치도 없더라도 그건 분명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했던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 자취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늘어난 연락들, 그 때의 키스와 결정적으로 그 때의 저질렀다는 표정.

이제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는 사이 시간이 수개월이나 흘렀다. 처음 몇 주간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느 때와 같이 언젠가 태연한 얼굴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안 온다는 걸 깨달았을 땐 꽤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내심 후련한데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약간 화도 났다. 실수였던 아니던 뭐든 간에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따져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후타쿠치가 오지 않는 게 허무했다. 집에 있으면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있어야 할 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 크게 느껴지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낯설었고, 혼자 먹는 저녁이 맛이 없었다. 평소에 옆에서 딴지를 걸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렇게 드나들더니 집안 곳곳에 후타쿠치의 흔적이 잔뜩 남아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도 번번이 후타쿠치가 떠올랐다. 자취를 시작한 뒤 딱히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한 적은 없었는데 그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지나치게 허전함을 느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애매하게 지난 시간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즈음 마침 모니와랑 사사야가 봄고 예선을 앞두고 응원 차 연습을 보러 가겠냐고 물어왔을 땐 기회라고 생각했다. 핑계가 생겼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일단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고, 뭔가 해결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집을 나설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아무 연락도 없는 건 날 피하는 거라고, 이제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고를 앞두고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면 안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갑작스런 일이 생겼다며 핑계를 댔다.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회피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 도망치니 되돌아가는 게 더 무서워졌다. 온갖 이유를 대가며 거절하다 상황을 파악했을 땐 모든 경기가 끝난 뒤였다. 그나마 있던 핑계거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피하기도, 다가가기도, 그렇다고 그냥 멈춰 있을 수도 없는데 뭘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니 근데 왜, 내가 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걔가 나를 좋아하는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대체 내가 왜 틈만 날 때마다 그 자식 생각만 하는 거냐. 어째서 내가 그 자식이 옆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쓸쓸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데?

대체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건지.

 

 

 

오랜만에 들은 그 사람의 소식은 전혀 반가울 만한 게 아니었다.

봄고 예선전까지 남아있던 3학년들은 잠시 뒷전으로 미루었던 취업과 진학 등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유난히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시린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가을비 치고는 대차게 내렸던 어젯밤 비와 더불어 예년보다 낮은 기온 때문에 그날따라 아침 등굣길이 쌀쌀했다. 수 년 동안 반복됐던 아침연습 덕분인지 후타쿠치는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아직도 고교배구가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근 시간보다 한참 앞섰기 때문인지 역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철을 기다리는데 맞은 편 플랫폼에 선 여자의 나풀거리는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팔랑팔랑 낙엽이 길가에 뒹굴 듯이 팔락거렸다. 멍하니 쳐다보는데 스카프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매무새를 정리하며 눈이 마주치지 않은 사람처럼 딴청을 부렸다. 후타쿠치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관심 있어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한 것 같았다. 여자는 예민해서 편하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보이는 행동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니까. 그만큼 착각도 많이 하지만 사람 사귀는 것에 있어서 예민하다고 나쁠 건 없다. 그러다 자연스레 예민하지 않은 남자가 떠올랐다. 솟아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전철이 다가온다는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철에 타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모니와였다. 뭘 하는지 핸드폰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모니와의 옆에 앉았다.

모니와 씨.”

어라? 후타쿠치. 완전 우연이다! 어떻게 전철에서 다 만나네.”

후타쿠치가 말을 걸고서야 모니와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만남에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반짝하고 커다래졌다. 카마사키와 같이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된 모니와는 회사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카마사키를 제외하곤 선배가 양복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신선했다. 거의 1년은 입었을 텐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감색의 양복차림이 아직도 어색해 보였다.

아빠 양복 빌려 입은 중학생 같아요. 뭐야, 넥타이 색깔이 촌스럽잖아요.”

중학생이라는 발언에 모니와가 충격을 받은 듯 괜히 소매를 정리했다. 이 넥타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라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넥타이를 쓰다듬던 모니와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랄만한 거 알려줄까?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괘씸하니까 너한텐 말해줄게.”

제가 괘씸하다고요?”

아니, 너 말고. 진짜 걔가 제일 먼저 배신을 때릴 줄이야!”

누가 배신을 때려요.”

모니와는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후타쿠치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 이야기든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후타쿠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하나도 안 놀라기만 해 봐라. 가는 길에 내내 괴롭혀 줘야지, 하고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먹던 후타쿠치는 이어지는 모니와의 말에 귀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고요?”

카마사키, 사귀는 여자 있나봐.”

사귀는, 여자.

카마사키 씨가.

순간 느낀 감정은 뭐랄까, 억울함이었다. 또 답답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고장 난 것 마냥 모든 게 멈춰지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귓가에는 모니와 씨가 계속해서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귓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콩닥콩닥 잘만 뛰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진 기분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피가 찢겨진 가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모든 감각이 아득해져갔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완벽하게 제로.

아직도 지독하게 더웠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짜증날 정도로 후덥지근했던 방, 들리는 거라곤 가끔씩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이따금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로 덥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 입술이 맞닿았을 때 덜컥 숨을 들이키던 소리.

내가 대체 왜 그랬지.

그 날은 여러모로 기분이 영 별로였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여름방학과 동시에 시작된 배구부 집중 연습 때문에 학기 중일 때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이 지나치게 더웠다. 덕분에 샤워를 했는데도 카마사키 씨를 찾아가는 도중에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셋째로는 그냥 별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딱히 그 날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랬다. 언젠가부터 카마사키 씨를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감정이 요동쳤다.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얽인 실타래가 있어서 그걸 풀고 싶은데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애타고 초조하고 짜증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즈음엔 오랫동안 질질 끌어왔던 짝사랑에 나도 모르게 지쳐가던 중이었다. 아무 변화도 없는 관계가 지겨웠다.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몸짓에 화가 났다. 그 무신경함이 원망스러웠다. 가끔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붙들고 따지고 싶었다. 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느냐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왜 모르냐고. 정작 고백할 용기는 없는 주제에 멋대로 탓하고 원망했다.

이렇게까지 찌질해질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충동적으로 키스해버린 데다 일을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그 날의 나를 죽도록 패주고 싶다. 그 날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지만. 배구를 핑계로 삼아 나는 또 한 번 도망쳤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게 무서웠다. 경멸의 눈빛으로 날 볼 까봐, 혐오스럽다는 듯 말할까봐.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봐, 나는 그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끝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게 결국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주구장창 내가 먼저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나러 가지 않으니 만날 일도, 하물며 연락도 없다. 혹시 이미 카마사키 씨는 모든 걸 끝낸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는데 왜 연락하지 않는 걸까.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연락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미 나를 싫어하게 된 거면 어떡하나. 어쩌면, 나는 벌써 잊혀 진 걸까.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와 카마사키 씨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구나. 고작해야 선후배 관계로 정리될 뿐, 평범하고 흔한 사이. 갑자기 연락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이라는 사실이 잔인하다.

차라리 그 때 도망치지 않고 고백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힘들어 하는 일은 없었을까. 차라리 고백해서 차였다면 지금쯤 좋아했던 감정을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누군가와 사귀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혹시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까?

도망쳤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나는 왜 자꾸 도망치기만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그 집에 찾아가 이미 오래 전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간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지는 게 있을 지도 모른다. 근데 왜 발걸음은 생각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는 건지. 한 걸음 다가가는 게 어째서 이다지도 무서운 건지...

 

 

 

(10140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上)

- 0601 후타카마의 날 기념 뻘글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5정거장, 역에서 내려 버스로 5분 정도를 또 가면 외벽은 깔끔하지만 내부는 썩 좋지 않은 그럭저럭한 아파트에 도착한다. 8가구가 사는 이 아파트에는 대부분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자취하고 있다. 2, 204호에는 카마사키가 산다.

또 왔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그나저나 집에 있으면 환기 좀 하죠? 벌써부터 혼자 사는 아저씨 냄새 나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풍기는 카마사키의 냄새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며 말했다. 카마사키가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의 방에는 그 특유의 냄새가 배었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몰랐던 체취가 몇 개월이 지나자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거든. 그리고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주제에 어린 척 하지 마라.”

말과는 달리 카마사키는 조용히 베란다 문을 열었다. 집 냄새가 그 조금 열린 틈으로 날아갈 리 없지만 후타쿠치는 이 집에 올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문을 열게 했다. 그러면 단 둘뿐인 좁은 방에 바깥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은은한 소음이 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진짜 왜 허구한 날 찾아 와. 놀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걱정 안 해도 연습은 잘하고 있거든요? 완전 순조롭게 돼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 하러 오냐고, 만날. 와서 하는 것도 없고 금방 있다가 가잖아.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피곤하지도 않아? 너 친구 없어서 심심해서 오는 거지?”

카마사키 씨보다 친구 많거든요? 됐고,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요?”

네가 이렇게 성격이 드러우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서 먹을 거 찾지 말고 네가 먹을 거 사오는 게 맞는 거 아니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카마사키가 냉장고를 확인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먹을 건 없었다. 방금 저녁을 해결한 참이라 남은 밥도 없었고, 늘 아침으로 먹던 식빵조차 마침 오늘 아침밥으로 다 먹었다. 하다못해 소면도, 과자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언제나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나카와 컵라면뿐이었다.

나가서 뭐 먹을래?”

카마사키는 텅텅 비어 유독 찬 공기를 내뿜는 냉장고를 조용히 닫았다. 무슨 일인지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는 후배에게 또 컵라면을 내주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았지만 빈곤한 자취생에게 컵라면 말고는 내줄 것이 없고, 어쩌다보니 올 때마다 컵라면만 먹이고 있다.

라멘 콜?”

.”

둘이 나가도 열에 여덟은 라멘을 먹지만, 컵라면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 카마사키는 지갑을 챙기고 불을 껐다. 알고 보면 후타쿠치 이 녀석, 우리 집 근처에 라멘 맛집 때문에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안하냐고 비아냥거리던 후타쿠치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카마사키의 취업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교에서 실습할 때 관심 있었던 회사에 에라 모르겠다, 면서 무작정 이력서를 보낸 것이 서류 통과로, 면접으로 이어졌고 며칠을 안절부절 못하며 전화를 기다린 결과 합격 전화를 받았다. 지원한 카마사키 본인이 가장 놀라웠을 만큼 카마사키의 취업활동은 금세 끝났다. 취업 준비생을 노린 사기가 아닐까 걱정하면서 카마사키는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고,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이제는 꽤 회사 생활에 익숙해졌다.

혼자 살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환경이 변한 것도, 생활 습관이 변한 것도 아니라 후타쿠치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배구부 녀석들과 집들이 겸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후타쿠치는 일주일에 적어도 3, 4번은 찾아왔다. 평일에는 연습이 끝나고 어둑해진 저녁에, 주말에는 늦어도 점심 전에. 딱히 와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이다 돌아간다. , 두 달도 아니고 벌써 몇 개월을 그러고 있으니 카마사키가 뭐 하러 오냐고 매번 묻지만 후타쿠치는 매번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거나 그게 중요해요? 하고 되묻기만 하니 이제는 더 이상 물어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가끔 연습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찾아올 때면 저도 모르게 왜? 하고 묻게 된다.

애초에 이렇게 매일같이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던가, 나랑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씨가 배구부를 은퇴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도, 같은 동네도 아닌 곳으로 카마사키 씨가 가버렸고 카마사키 씨가 없는 날이 반복되었다. 늘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습관처럼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밖에 카마사키 씨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2년 동안 익숙해진 체육관, 빈 코트 위에서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손으로 훔치던 카마사키 씨를 가만히 떠올린다. 만지면 적당히 손에 감길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을 상상한다. 손을 뻗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텅 빈 손바닥이 아무도 없는 코트만큼이나 허무했다.

연애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연애를 해봤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꽤 연애를 즐겨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애는 심플했다. 고백을 받으면 사귀고, 적당히 마음 가는 상대가 있으면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하고, 며칠의 밤이 지나면 연애가 시작되곤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끔은 조금 먼 곳으로 놀러 가거나 하다보면 어느새 서로가 연애하기에 맞지 않거나 질려서 자연스럽게 끝나는 연애.

만나고, 고백하고, 사귀고, 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심플한 연애 사이클에 익숙했던 내게 처음으로 공략법을 알 수 없는 상대가 바로 카마사키 씨였다. 애초에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그 남자는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던 데다가, 서로 성격도 맞지 않아 만나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길 일수였다. 그런 남자를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더라. 외모도, 성격도 취향에 한참 벗어나고 하물며 취미조차 맞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 왜 좋아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바보 같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에 상관없이 깨닫고 보니 사랑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말 한 마디에 감정이 널을 뛰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쉬운 연애만 해왔던 만큼 스킨십도 쉽게 단계를 밟던 자신이었지만, 카마사키 씨를 향한 연애는 스킨십의 단계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사실은 연애라고 하지도 못하는 짝사랑이니 계단조차 밟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른 척, 실수인 척, 온갖 척을 갖다 대며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카마사키 씨를 상대로는 이상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가득 차올랐는데 고백하지도, 닿지도 못한다. 닿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닿은 손끝에서부터 흘러넘쳐 그 사람에게로 향할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만약 감정의 형태나 크기가 고스란히 보인다면 아마 나는 그 날로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경멸섞인 눈은 별로 두렵지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두렵다. 이런 사랑을 알게 된 뒤부터,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그 남자가 되어 버렸다.

 

연습 정말 잘하고 있는 거냐? 왜 만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연습 땡땡이치고 오는 거면 출입금지령 내릴 거야.”

신경 쓰지 마시고 카마사키 씨는 방 청소나 좀 하시죠? 올 때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니까. 혼자 살 감당이 안 되면 자취를 시작하지를 말던가. 집에 밥 없으면 그냥 굶거나 컵라면이나 모나카로 떼우죠? 안 봐도 뻔해.”

그냥 난 모나카랑 라면을 좋아하는 거야.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말고 그만 찾아 와.”

뻔질나게 카마사키의 자취방을 들락날락하며 알게 된 사실은, 카마사키는 집에 컵라면과 모나카만 박스 채로 쌓아두고 좀처럼 밥을 챙겨 먹질 않는다는 거였다. 아침은 항상 토스트와 잼,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저녁은 대충 밥이랑 계란 후라이 혹은 소세지 볶음. 최소한의 요리를 위한 야채도 없고 양념은 케찹뿐이다. 과일은 말할 것도 없이 냉장고에 있는 걸 본 적도 없다.

본가가 회사에서 먼 것도 아닌데 왜 자취하는 거예요? 고교데뷔처럼 직장인데뷔라도 하는 거?”

그런 거 아니라고. , 됐고 라면이나 처먹어.”

노란 머리가 그리워도 뭐 어쩔 수 없죠. 이제 직장인이니까요, 그쵸? , 봄고 예선 시작하기 전에 머리 염색이나 할까봐. 코트에서 확 띄게.”

너랑 얘기하면 열 받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노랗게 염색했던 카마사키 씨의 머리는 직장인이 되면서 본연의 까만 머리색으로 돌아갔다. 딱히 염색이 금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노란색과 같이 튀는 색은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3년 동안 노란색이었던 머리가 중학생 때와 같이 까맣고 짧은 머리로 돌아가자 퍽 우울했는지 카마사키 씨에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색하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날 때면 쓸어 올릴 만큼 머리가 자라지도 않은 주제에 머리카락을 가만두질 못한다. 짧은 머리를 부스러트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 후타쿠치.”

왜요.”

직장인데뷔라는 말이 짜증났는지 말없이 라면만 먹던 카마사키가 목을 축이며 말했다. 어느새 그릇은 깨끗이 비워진 뒤였다.

너 말이야, 이왕 우리 집에 올 거면 오는 길에 먹을 거라도 사 오든가 해. 아니면 와서 뭐 해먹던가.”

귀찮으니까 내가 해주진 못하겠고. 대답 않고 라면을 비우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는 괜히 테이블에 휴지를 조각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근데 얘는 라면을 가닥가닥 나눠서 먹나,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여기까지 오는 돈이 얼만데요. 밥 정도는 카마사키 씨가 쏴요.”

누가 오랬냐.”

전 학생. 그쪽은 직장인.”

너 용돈 많이 받는 거 다 알거든? 너네 집 부자잖아.”

전 후배. 그쪽은 선배.”

누가 오랬냐고.”

찌익, 찌익 하고 카마사키의 손에서 휴지조각이 찢어져 내렸다. 주인이 본다면 질색을 할 정도로 어느새 휴지조각이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카마사키가 눈치를 보며 휴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 후타쿠치는 라면 그릇을 다 비우고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치울 텐데. 쓸데없는 곳에서 부지런하단 말이야.

누가 오랬냐, 퉁명스럽게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생각나 후타쿠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쓸데없는 곳까지 성실한 게 짜증나. 오면 그냥 오는 거지, 이유가 왜 필요해. 가끔씩 카마사키가 내뱉는 무신경한 말에 일일이 상처받는 자신이 화가 난다. 뭐 하러 와, 왜 왔냐, 누가 오래? 마치 난 너를 요만큼도 신경 안 써’, 라고 말하는 행동과 말투에 가끔 엉덩이를 발로 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바보 아니야? 내가 이렇게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못 보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보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냐고.

카마사키 씨가 오자고 했으니까 카마사키 씨가 쏴요.”

영수증을 내밀자 카마사키가 질렸다는 눈빛을 하다 고개를 휙 돌렸다. 배가 불러 빙글거리는 후타쿠치가 얄미워 죽겠다는 게 까만 뒤통수만으로도 느껴졌다.

오지 마, 이제. 너 이러려고 자꾸 꼬르륵거리는 소리 내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거지? 맞지?”

그렇게 돈이 없어요? 빌려줘요?”

꺼져. 나가 있어. 돈 있으니까 빨리 꺼져.”

라면 값도 못 낼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냉장고가 텅텅 빈 이유가 있었던 거네요.”

, , ! 열 받게 하지 말고 집에 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자마자 카마사키는 손을 휘적거리며 후타쿠치를 보냈다. 끝까지 돈 빌려 줄까요? 따위의 말을 내뱉는 후타쿠치한테 하마터면 기어코 주먹을 날릴 뻔했다. 뒷걸음치며 멀어지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카마사키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저 자식.

폼 잡으면서 뒤로 걸어가긴. 가다 확 넘어져 버려라.

 

 

마음이란 분명 나의마음일 텐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빌어먹게 아이러니하다. 이제까지의 내 연애놀이를 봐왔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기겁할 것이 분명하다. 쿨하게, 깔끔하게 맺고 끊음을 분명하게 했던 내가 맺는 것도, 끊는 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까. 그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짝사랑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짝사랑을 몇 년 동안 하는 애들이 왜 그런 줄 알아?”

어쩌다보니 짝사랑 상담을 해주게 된 나메츠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들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재로선 나메츠밖에 없다.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빨라서 알게 된 주제에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며 떠보기에 그냥 말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메츠는 그 때부터 인터넷에서 되도 않는 지식들로 조언을 한답시고 까불고 있다.

우유부단해서. 멘탈이 약하니까.”

아니,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아서 끝도 나지 않는 거야. 시작하자마자 HP가 한 방에 닳든 말든 일단 시작을 해야 게임이 끝나는 거라고.”

언제나처럼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말일 줄 알았는데 나메츠의 말은 뜻밖이었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라든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라든가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말할 줄 알았는데, 하고 의아해하는데 나메츠의 눈이 반짝였다.

고백 해, 후타쿠치! 일단 시작을 하란 말이야, 멍청아. 게임 스타트!”

게임 스타트, 하고 게임 오버 하라는 말이지? 지려고 시작하는 게임이 어디 있냐, 멍청아.”

카마사키 선배 졸업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거 아니야? 이대로 계속 짝사랑만 하겠다고?”

연애에 있어선 너 정말 너답지 않구나, 제멋대로 상담이랍시고 자리를 잡고 떠들어대던 나메츠는 항상 이 말을 반복했다. 나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말이라던가, 뻔히 보이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못 본 척 회피하고 있다고. 찌질한 겁쟁이란 말도 태어나 처음으로 나메츠에게 들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거. 고백도 못하고 혼자서 감정 삭이는 주제에 나중에 카마사키 선배 여자친구 생겼다고 질투하지나 말아라, ?”

, 하고 휘슬을 불며 나메츠가 일어섰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하나, 둘 씩 체육관에 늘어져 있던 부원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제로라도 끈질기게 밀어붙여야 하는 게 맞잖아. 네가 언제부터 공이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었어? 점수를 따려면 먼저 공격해야지.”

……솔직하게 제로는 아니거든?”

제로는 아니지만 제로에 수렴하지.”

, 하고 연습을 재개한다는 휘슬이 다시 울렸다.

 

 

나메츠의 말이 맞다. 솔직히 말해 카마사키 씨와 연애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서 언젠가는 제로에 수렴할 게 분명하다. 끈질기게 카마사키 씨 집에 찾아가지만 단 둘이 방 안에 있어도 긴장감이 흐르기는커녕 나를 의식한다는 눈치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또 왔어? 란 말이 안녕이란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제로에 수렴하고 있다.

여름에 합숙 일정 잡혔겠네. 늘 가던 거기로?”

거기 말고 또 어디로 가겠어요. 그나저나 진짜 돈 없어서 에어컨도 못 고치고 있어요? 더워서 뒤지겠네.”

저번 주에 기사가 온다고 약속해놓고 안 온 거라고. 너 자꾸 나보고 돈 없다고 무시하는데, 제대로 돈 벌고 있거든? 너만 안 오면 통장에 차곡차곡 돈도 쌓이고 있었을 거거든?”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것도 모자라 연신 부채질을 하던 카마사키가 바닥에 찰싹 누워 꿈틀거렸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지라 윗옷이며 바지며 다 벗은 지 오래라 팬티 한 장만 걸친 몸이 노골적으로 눈에 띄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땀이 밴 살갗이 유난히 촉촉해 보인다.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살인 더위야.”

죽겠다.”

진짜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구나, 젠장. 더운데다 우울함까지 겹치면 정말 짜증나서 죽을 것 같아 후타쿠치는 대놓고 카마사키의 몸을 훑어보았다. 배구부 생활을 하며 볼 곳 안 볼 곳도 어쩌다보니 다 봤고, 자취방에서도 수없이 본 몸인데 막상 노골적으로 살펴보려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워서 머리가 몽롱해져서 그런 건가.

은퇴하고 난 뒤, 카마사키는 딱히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헬스장이라도 가서 기껏 키워놓은 근육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영 시간이 안 나는 듯 했다. 전체적인 골격은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그대로였지만 아무래도 근육이 많이 빠져 있었다. 뒷모습뿐이지만 만지면 예전과는 달리 마냥 단단하지만은 아닐 것 같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만 같은 곳까지 손을 뻗다 후타쿠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 다가갔다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이미 충분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으면 닿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후타쿠치는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드러누운 카마사키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고, 스킨십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카마사키를 만진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누군가를 만지는 게 처음도 아닌데 항상 카마사키의 앞에서는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마냥 아무 것도 못한다.

짜증나.”

만지고 싶다. 입술로, 코로, 두 손과 다리로, 내 몸의 모든 곳을 통해 카마사키 씨를 만지고 싶다. 옆에 있어도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저 남자의 몸에 나를 남기고 싶어.

수전증이야?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웃기지 마요. 카마사키 씨가 징그럽게 다 벗고 누운 게 짜증나서 손이 떨리는 거예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 아직까진 그래도 괜찮거든. 근육이 좀 빠지긴 했지만 심한 정도도 아니고.”

하는 말과는 달리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카마사키는 양 팔을 쭉 뻗고는 근육을 확인했다. 배구를 하던 시기에는 근육 키우기에 열중했을 정도로 근육에 집착했기에 카마사키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눈썹을 찡그리곤 한참동안이나 제 팔뚝을 만져보던 카마사키가 돌연 후타쿠치 쪽으로 다가갔다.

, 네가 한 번 만져 봐봐. 내가 보기엔 많이 빠진 것 같지는 않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땀 묻어서 싫어요. 게다가 카마사키 씨 체온 높아서 만지면 기분 나쁠 것 같고.”

다가온 만큼 후타쿠치가 물러서며 말했지만 카마사키는 끈질기게 다가가며 팔을 들이밀었다.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닿은 어깨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카마사키의 맨 살갗에 후타쿠치는 미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닿지 않으려고, 애먼 곳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온 신경이 오른쪽 어깨에 몰린 지 오래였다.

조금 만지는 걸로 안 죽어, 자식아. 빨리 확인해 봐, 너 때문에 자꾸 신경 쓰이잖아.”

, 진짜 싫다니.”

끈질기게 물어지는 카마사키를 피해 후타쿠치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카마사키가 기어코 후타쿠치의 손을 잡고 제 팔뚝으로 이끌었다.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후타쿠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눈치 없는 카마사키는 제 손인 것 마냥 후타쿠치의 손을 제 팔뚝 이곳저곳에 갖다 대었다.

어때?”

…….”

역시 좀 빠지긴 했지? 한창 키웠을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좀. 그래도 이 정도면 딱 좋은 수준 아닌가?”

…….”

뭐냐. 너 왜 말이 없어.”

그제야 후타쿠치가 아무 말도 않고 제 손에 이끌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마사키가 물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후타쿠치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진짜 수전증 아니야? 너 손이 좀 부들거리는.”

,”

?”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의문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약간 짧은 올라간 눈썹과, 답답한 걸 싫어해서 항상 드러나 있는 말끔한 이마가 유난히 눈에 들어찼다. 이제는 꽤 낯이 익은 검은 머리카락은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에 살풋 갈대처럼 흐트러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후타쿠치, 하고 부르는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채 귀에 들리기도 전에 후타쿠치는 그대로 고개를 비틀었다. 밤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9892자)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