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2)



최근 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카마사키 씨랑 뒹굴어도 모자를 판에 이게 무슨 거지같은 경우야. 아까부터 파란 불빛을 내뿜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 따닥, 하고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케이스 끼웠으니 괜찮겠지. 하긴 고장이 났어도 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으니까.

베개에 턱을 묻고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나뒹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려는지 카마사키 씨가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정신없이 울린 얼굴은 눈이고 코고 입술이고 전부 볼썽사납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아직까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보기만 해도 아플 지경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카마사키 씨가 거울에 제 얼굴을 확인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지만.

. 더 자요.”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더 재우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목소리에 오히려 잠이 깰 판이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는 눈썹을 찡그리고 몇 번 몸을 뒤척거리다 다시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그러면서 잠결에 더운지 다리를 바둥거리더니 이불이 걷혔고 카마사키 씨의 맨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기 좋을 정도로 그을린 살결에 군데군데 빨간 점같이 생긴 것들이 다리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간밤 자신이 필사적으로 남긴 흔적들이었다.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카마사키 씨와 섹스를 할 때면 물고 깨물고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심해지는 편이었다. 보이는 곳부터 안 보이는 곳까지 잔뜩 마킹을 하고 싶어진다. 전희를 가질 때 매번 그러다보니 카마사키 씨는 자국이 남는 걸 질색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민감한 부위를 둘러싸고 깨물 듯 말 듯 애를 태우면 카마사키 씨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를 꾹 참으며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그러다 결국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로 휘감아 오면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쾌감이 오른다.

발가락 사이사이나 복사뼈 근처와 같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내가 남긴 흔적이 남았다 생각하면 가만있다가도 묘하게 흥분된다. 곱씹을수록 아침이라 반쯤 서있던 아래가 묵직해져갔다.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깨우고 N차전에 돌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발에 호되게 채일 게 뻔해 그저 잠에 취한 몸을 끌어안았다. 더운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 모른 척하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건 내 거다. 내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내 사람.

 

동거한 지 2. 멋도 모르고 사귀게 된 지 3. 헤어지자는 말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마사키 씨를 잡아챘지만 좋아하는 건지도 깨닫지 못했던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자신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언제부턴가 마음 한 편에 차곡차곡 쌓이던 감정은, 이제는 그 감정이 없으면 자신조차 사라지게 될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미 어쩌지 못할 정도로 이 사람이 좋다는 것을.

처음 감정을 실감한 것은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고 자취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 즈음 나는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불만에 차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카마사키 씨는 취업준비로 이래저래 바빴고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라 괜히 여기저기 심술부리고 다녔지만.

카마사키 씨는 본인으로서는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생각보다 봉급이 좋다며 바로 자취를 준비해도 괜찮겠다고 웃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고 함께 기뻐해 줬다. 그럼 카마사키 씨 자취방에서 마음껏 야한 짓 해도 되겠네? 응큼한 마음에 좋아했는데 정작 자취할 곳이라고 꼽아둔 곳이 회사 근처였다. 학교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훨씬 더 멀어졌다. 가뜩이나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이대로 가다간 안 봐도 뻔했다. 장난하냐면서 아니꼽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자취할 생각에 실실대는 꼴이 짜증났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은 안 했던 건가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화를 버럭 내버리고 싶었지만 필시 회사에서 가까우면 그뿐인 게 훤히 보여서 뭐라 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왜 화가 나고,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거에 섭섭하다 느껴야 하는 거냐고. 어디든 자취하라지, 내 일도 아닌 일에 신경 쓰는 건 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나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확 김에 무작정 자취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대체 왜 반대하는 거냐고 따져 묻던 카마사키 씨는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시위하자 결국 자취를 포기했다. 들떠서 자취하게 되면 놀러오라며 나설 때는 언제고 다짜고짜 하지 말라는 내 말에 카마사키 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자취하겠다는 결정을 번복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마냥 태연히.

그 때 새삼, 애초에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겉으로 표가 나는 사람이라 어쩔 땐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선 어린애처럼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제에,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던 그 얼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어떻다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마냥 안타깝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욕심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저 사람이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평생 저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로부터 1년을 기다렸다. 졸업하기 무섭게 같이 살 집을 고르고 납치하듯 카마사키 씨를 낚아챘다. 독단적인 행동을 나무라는 카마사키 씨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억지를 쓰고 대답을 강요했다. 나랑 같이 살기 싫냐는, 뻔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카마사키 씨는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란 이름을 빌미로 카마사키 씨의 두 팔과 양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다. 나만 볼 수 있도록, 나 이외의 사람은 보지 못 하도록,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도록. 어디를 갔다 오든 돌아올 장소는 둘만의 집이 되도록. 동거 2년 차. 둘뿐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드르르륵. 바닥에 던져 버렸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거칠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냐고 시위하는 것 마냥 귀에 거슬렸다.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완전히 잡쳐 버렸다. 옆에서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아예 부서질 정도로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할 수 없이 카마사키 씨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쓱 펴주고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서 부들거리는 핸드폰을 주워 방을 나섰다. 그냥 꺼버릴 작정으로 집어 들었던 건데 화면에 뜬 이름이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배로 더 귀찮게 할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켄지?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니.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무음이라 못 들었나 봐요.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어머, 얘는.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네 형한테 아직 연락 못 받았니?]

받았어요. 제가 이전부터 거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뭘 아직까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온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너도 참,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자취한다고 집 나가서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그렇다고 주말마다 집에 들르는 것도 아니고. 방학 때도 사정사정을 해야 한 번 들를까 말까 하잖니. 막내 너, 엄마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

전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대충 모자를 덮어쓰고 현관 밖 복도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엄마는 그동안 뭐가 그리 섭섭했는지 끊임없이 하소연을 늘여 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큰 집에 아들, 딸이라고 낳아놨더니 다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독립한다고 나가버려 서운하다는 등, 외롭다는 등의 투정이었다.

우성 오메가로 자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곱게 자라 와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나이에 안 맞게 철부지 같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막내인 자신은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인지 이미 클 대로 컸음에도 여전히 마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형이나 누나한테는 연락도 잘 안하면서 나한테만 난리라니까.

[듣고 있니, 켄지?]

. 듣고 있어요. 아무튼 전 진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니, 너도 정말. 그래, 이유나 한 번 들어 보자. 대체 형이랑 누나랑 아버지까지 다 온다는데 너만 왜 안온다고 버티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엄마 체면이 있지!]

자식이 몇인데 거길 우르르 갈 필요가 있어요? 전 빼주세요.”

[켄지! 정말 끝까지 이럴 거니!]

엄마야말로 이제 적당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눈을 한 카마사키 씨가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누가 보면 어쩌려고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거야? 들어가라고 입을 뻐끔거리자 멍청하게 서 있던 카마사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따 들어가면 한 소리 해야지, .

[엄마도 이제 더는 못 참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번에는 절대로! 오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이 매정한 녀석아!]

분에 받힌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엄마, 하고 부를 틈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끌고 갈 생각인 듯하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엄마에게 막내다운 살가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무참하게 씹혔다.

집에 들어가니 카마사키 씨는 빨랫줄에 널린 덜 마른 빨래마냥 소파에 엎드려 늘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오전의 밝은 햇빛이 비쳐 들어와 안 그래도 밝은 카마사키 씨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났다. 동그란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니 강아지처럼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기분을 또 묘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어머니셔?”

목이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데다 모래알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비단 아침이어서가 아니라 어젯밤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던 것도 한 몫 했을 테다. 카마사키 씨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쿠션에 얼굴을 푹 묻은 게 맛이 간 제 목소리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닌 모양이다. 이제껏 세지도 못할 정도로 경험했으면서 내숭은. , 아직도 첫날밤 지낸 새색시마냥 창피해 하는 게 카마사키 씨다워서 재밌긴 하지만.

, 언제나 하는 안부 전화죠.”

안부 전화라고 하기엔 네 표정이 영 별로던데. 엄마한테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제가 어떻게 하는데요, 카마사키 씨?”

.”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을 내려 턱을 잡고 들어 올렸더니 카마사키 씨는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입술이며 눈이며 퉁퉁 부어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못생겼어. 근데 이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니 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나 보다.

손 놔라.”

제가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주는데요. 그런 말 하면 섭섭하잖아요.”

아침부터 정신 나갔냐.”

카마사키 씨가 어떻게든 부은 눈을 뜨려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사적인 얼굴 위로 손바닥을 덮어 눈가를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니 카마사키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려 왔다. 벌어진 틈 사이를 넘어 제 집처럼 활개를 쳤다. 맞닿은 부드러운 혀를 인사하듯 휘감아 올리고 보란 듯이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계까지 파고드는 침입자를 카마사키 씨는 괴로워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리듯 문을 열어주고는 벅찬 숨을 고른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주제에, 여전히 제게 얌전하다.

이런 점이 좋다.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아무 이유 없이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언제나 날 미치게 만든다. 너는 다르다고, 너만 특별하다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감정이 터질 줄 모르는 풍선처럼 자꾸만 커져간다. 이러다 어느 순간 팡,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이제 무슨 말로 내 감정을 당신한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다.

하고 싶어.”

더운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발정났냐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무언의 거부를 보인다. 카마사키 씨의 말대로, 아침부터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엎드려 있던 카마사키 씨의 위에 올라타며 입고 있는 거라곤 팬티밖에 없는 옷을 벗겨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 씨가 발을 휘두르며 밀어내려 하지만 팔에 닿는 다리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넌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 치곤, 읏차.”

……!”

기세 좋은데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카마사키 씨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채일 뻔한 걸 간신히 피하고 아까와는 달리 힘이 잔뜩 오른 양 다리를 잡아챘다. , 놓으라고! 성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카마사키 씨를 무시하고 빳빳하게 선 내 것을 카마사키 씨의 아래에 부딪혔다. , 슥 하고 아래위로 부드럽게 마찰하자 손에 잡힌 다리가 미칠 듯 요동을 쳤다. 하지만 자세가 불리해서 그런지 반항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사실 벗어나려고 하면 벗어날 수 있으면서 항상 이렇다니까. 그런 행동이 순순히 다리를 벌려주는 것보다 아래를 더 돋운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내가 좋아요? , 이것 봐.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벌떡벌떡 잘도 서네. 젊긴 젊어요, 그쵸?”

, . . 너 이 미친.”

좋죠. 말해 줘요, 좋다고.”

!”

말해 주세요, 카마사키 씨.”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했는지 카마사키 씨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괴롭히는 건 맞지만 뜻대로 말해주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게 괘씸했다. 서로의 것이 맞닿은 그대로 허리를 튕기듯 움직이며 동시에 카마사키 씨의 귓불을 깨물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 애원하듯 솜털이 간지러울 정도로 속삭이자 온 몸이 소스라치게 움찔거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순순히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조만간, 얘기해 볼까. 이제까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았던 진심을 고백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나올까. 역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창피해 하려나.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아 하겠지. 직접적인 고백은커녕 어렴풋한 가능성만 보인 말에도 못내 자신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좋아한다는 말에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

 

후타쿠치와 살게 된 이래 좀처럼 맞보지 못했던 한가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너무 한가로워서 혼자 있는 집이 썰렁하다 느낄 정도였다. 후타쿠치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말인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갔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마찬가지라 요 2주 간,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핏 듣기로는 집안 행사와 연관되어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냐 물어도 한숨만 내쉴 뿐 말해주지 않았다.

동거하고부터는 항상 회사와 집만 오고가는 생활을 하고, 여가 시간에 뭘 해도 후타쿠치와 함께였기에 몰랐는데 후타쿠치가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최근에는 습관처럼 심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여태껏 후타쿠치가 대놓고 눈치를 줘서 웬만해선 다른 사람과 약속도 못 잡았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이참에 모니와나 사사야, 혹은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오랜만에 집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안 그래도 집을 나오고부터 집이 적적해졌다며 외로워하시던데. 일단 점심을 먹고 전화를 해 봐야겠다.

집에 있던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렸다. 방에 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듯 했다. 혹시 후타쿠치인가, 화면을 확인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번호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이름도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어 광고인가 넘겨짚고 수신거부를 눌렀다. 어디서 개인 정보가 샜는지 최근 광고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똑같은 번호로 전화가 다시 왔다. 광고가 아닌가.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모르는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누구세요?”

[. 저 히로키예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흐릿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에 몇 없는 잘생긴 사람인데다 하도 성격이 살가워서 그랬는지 몇 주 전의 일인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 인상이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또 만나자고 말했었지. 연락처를 교환할 때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하기에 예의상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기억나. 근데 무슨 일로.”

[다행이다. ,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오늘? 시간은 있는데 왜?”

[아는 사람한테 영화표를 선물 받았는데 같이 영화 볼 사람 하나 없는 거 있죠? 그때 딱, 형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어요. 다행이다, 시간 있으시구나! 근데 주말인데 애인 분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히로키는 요즘 제일 재밌는 영화가 마침 2시간 뒤에 있다며 만나자고 말했다. 히로키가 말한 영화는 2주 전, 후타쿠치와 보려다 결국 못 보게 된 영화였다. 후타쿠치도 없고,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도 싫어서 누군가 만날까 생각하던 참이라 히로키에게 알겠다고 말하자 히로키는 들뜬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물었다. 본인은 영화 볼 사람도 없다고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뭘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나를 따르는 것 같더라니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지 모르겠다. 그저 사교성이 좋다고 보기엔 지나친 감이 있어 보였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 할게요. .]

그래, 이따 봐.”

[. 이따 볼게요, !]

말끝마다 형을 붙이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히로키의 형, 형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그것도 몇 십분 밖에 못 만난 사람한테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한단 말이야. 여자였으면 첫 눈에 반했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남자가 이러니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다단계나, 보증 같은 사기 치려고 이러는 건가? 본래 사기꾼이 제일 친절하고, 말도 잘하고, 의외로 겉보기도 멀쩡하다고 하던데. 하나, 하나 다 히로키잖아.

나갈 준비를 하려다 잠시 소파에 앉았다. 작정하고 속이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둔한 자신은 홀딱 넘어가 버릴 거다. 확실히 뭔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히로키를 사기꾼이라고 단정 짓기도 뭐하다. 원래부터 그런 애일 수도 있는데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봤을 때는 전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동생 삼고 싶다 생각했었지.

그래,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거겠지. 사람이 너무 착해도 남에게 의심 살 수 있겠구나, 내심 다짜고짜 의심부터 해버려 미안하다고 허공에 대고 히로키에게 사과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하도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매번 의심부터 하는 게 버릇이 된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그 자식은 대체 언제 어른이 되려나.

 

 

히로키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다 갈 때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착하면 전화하기로 했으니 히로키인가 싶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후타쿠치였다. 일이 꽤 많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매여 있어야 한다고 했던 터라 더 바빠지기 전에 전화를 건 듯했다. 이번 주 들어서는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지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왔다.

[뭐해요? ?]

아니, 밖인데.”

[그런 것 같네요.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 누구 만나기로 약속 했어요? 어젠 별 말 없었잖아.]

확실히 어제까지도 별 말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집에 가봐야 한다면서 투덜거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었다. 아는 사람 만나, 라고 말했더니 후타쿠치가 아는 사람 누구, 하고 물었다. 히로키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2주 전에 미팅에서 본 사람?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동생? 머뭇거리는 사이 후타쿠치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히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살살 흔들며 다가오는 걸 보는 사이에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는 사람, 누구.]

, 친구 아는 동생. 저번에 어쩌다 알게 됐어.”

[바로 대답 못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뭐야, 사실대로 말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진짜 그걸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거든. 아까 전화 왔는데 공짜 영화표 생겼다고 그래서 만난 거야.”

[여자?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왜 같이 영화를 봐요? 그 여자는 친구 하나 없데요? 아니, 친구가 없다고 해도 왜 굳이 카마사키 씨랑.]

, 남자야, 남자. 혼자 보긴 싫은데 이 시간에 한가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보지.”

! , 통화 중?”

[……? , . 카마사키 씨.]

, 나 잠깐 전화 좀. 후타쿠치?”

[…….]

통화 소리가 들릴까 히로키에게서 조금 떨어져 건물 구석으로 갔다. 후타쿠치, 부르는 소리에도 저쪽에선 숨소리만 들리고 대답이 없었다. 사귀던 초반에는 내가 누굴 만나던, 뭘 하던 별 관심도 없던 놈이 언젠가부터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친구든 가족이든 누가 되었건 후타쿠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늘 후타쿠치 중심으로, 모든 시간은 후타쿠치와 함께 보내길 원했다. 물론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할 리가 없다. 다만,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타인과 거리를 두길 원하는 게 나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이미 바람 난 전과가 있는 애인마냥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욱하는,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한숨이 나왔다. 내가 뭐 24시간 전담 대기조야, 뭐야? 저는 갈 데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하고 다니면서.

후우. 후타쿠치. 여보세요?”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하더니, 벌써 형 소리 듣는 사이인거네요? 보통 친해진 게 아닌가본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혀에 가시가 돋쳤는지 말끝마다 빈정대는 어조로 말하는 게 얄미워서 눈앞에 있었다면 발로 한 대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내가 나이가 많고 아는 형 친구니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보다 별로 안 친하다니까 왜 자꾸 빈정거리는 건데? 그리고 막말로 걔랑 내가 친하면 뭐. 뭐 어쩔 건데! 내가 게이도 아닌데 걔랑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그러냐? ?!”

[뭐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내가 이러는 게 한, 두 번 일인가? 그리고 애인이 난데없이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영화 보러 간다고 시시덕거리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그럼 냅다 잘 다녀와라 그래요? 것보다 그 새끼가 뭔데 그렇게 감싸주면서 나한테는 화를 내는 거예요?]

시시덕거린 적 없어!! 그리고 얘는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난 뭐 사람도 못 만나?! 내가 죄수야, 뭐야?!”

[시시덕거렸던 아니던, 상대가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싫다고요! 영화는 나랑 보면 되지, 다른 사람이랑 왜 봐요?!]

됐다, 됐어. 이 얘긴 나중에 집에 오면 다시 해.”

[, , 카마사키 씨!]

끊는다.”

뭘 잘했다고 신경질 팍팍 쓰면서 소리치고 있어? 도저히 후타쿠치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여자였으면 이 자식은 분명 의처증 남편 소리 들었을 게 뻔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피했는데도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얼굴로 몰리는 시선이 따가웠다. 대화 내용을 통해 나를 애인 몰래 바람피우는 게이로 보고 있는 모양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억울하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멀리서도 형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아하하.”

, 그래? , 들었어?”

히로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남잔데도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꼭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주위 사람들이 히로키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역시 이런 애가 사기꾼일 리가 없지.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그 땐 정신이 이상했던가 보다. 선하게 웃는 히로키를 보며 반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지라 높은 기대치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정말 환장하게 재밌었다. 화려한 액션 신과 선명한 색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운드에 눈과 귀가 즐거웠고, 곳곳에 숨겨져 있던 복선들을 회수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여운이 넘치는 엔딩까지 가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 했다. 괜히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던 게 아니었다.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조금 아쉽기도 했다. 원래라면 벌써 한 번 보고도 두, 세 번은 더 봤을 영화였는데. 평소엔 팜플렛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느라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가방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시간 나면 다음에 같이 올까.

진짜,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쵸, ! 제가 본 영화들 중에 세 손가락에 꼽힐 것 같아요.”

상영관을 나오면서 히로키는 연신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온몸으로 재밌었다는 걸 표현하는 게 의외였다. 겉모습은 꽤 성숙한데 하는 행동은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흥분했더니 배고프다. 형도 배고프죠? 근처에 제가 좋아하는 가게 있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요.”

? 그게.”

거기 진짜 맛있는 집인데. 지금까지 누구 데려갔다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요. 게다가 지금 시간이라면 웨이팅도 없을 테니까 딱 좋겠다!”

가요, 얼른 가요!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보다 히로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긴 평소보다 훨씬 영화에 몰입했던 만큼 배가 고프긴 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한데다 어차피 후타쿠치는 오늘도 밤늦게야 집에 올 것 같으니 히로키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그러고 보니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아무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는 거야 늘 있는 일상이지만, 싸우고 나서 메시지 하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싶다. 평소 같았으면 사과인 듯 사과 아닌 투정을 부리는 메시지가 와 있을 법 한데.

조금 심했나.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집착이 심한 걸 가지고 내가 너무 나무랐나? 제대로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삐친 건 아닐까. 아니, 아니지. 그러게 누가 이런 일로 의심부터 하고 빈정거리래?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부터 낸 건 후타쿠치였다. 저는 매일같이 놀러 가고 뭐하는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주제에 나한테만 이러는 게 어디 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기분이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이번엔 절대 사과를 받기 전까지 화해하지 말아야지. 언제까지고 후타쿠치한테 일일이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 그렇지.

그래. 저녁은 내가 살게.”

정말요? 그럼 사양 않을게요. , 그럼 사람들 몰리기 전에 얼른 가요.”

상대방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 느껴 보라 이거야, 후타쿠치 자식. 너도 내가 언제 올지 모른 채로 그 텅 빈 집에 혼자 있어 보라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다 히로키에게 충동적으로 저녁 먹고 술도 마시러 가자고 말했다. 아예 자정을 넘겨서 가버려야지. 의지를 다지는 내 옆에서 히로키가 충견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들뜨다 못해 하늘을 날아다닐 것처럼 얼굴을 상기시키는 모습에 괜히 멋쩍어졌다. 이렇게 기뻐하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근데 얘는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13562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1)

-알파의 연애 외전



시작은 갑자기 울린 그룹 메시지 초대 알림이었다. 인간관계라곤 회사 사람들과 가끔 만나는 학생시절 친구들뿐인데다 매일같이 회사와 집만 반복하는 일상인 내게 새로운 그룹이 생길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 창에 뜬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초대 완료!]

[다행(이모티콘)]

옆에 있었더라면 분명 시끄럽게 떠들었을 게 상상될 만큼 핸드폰 진동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메시지들이 날아왔다. 뭐가 뭔지 파악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메시지 하나를 공지로 정했다.

[그럼 다음주 금요일 18:30 T가게에서 만납시다!(이모티콘)]

[ㅇㅋㅇㅋ]

[(이모티콘)]

난데없이 잡힌 약속에 유일하게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동기 녀석은 급하게 미팅에 빈자리가 생겼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나 애인 있는 거 알잖아. 걔가 알면 큰일 나.”

알지, 니 애인 극성맞은 거. 근데 진짜 어떡해, 올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다고! 이번 주에 출장 가는 사람도 많고, 그 날 딱 기념일인 사람도 많아서 너 말고는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단 말이야.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그냥 한 자리 비우면 되지. 난 진짜 안 돼.”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분위기도 구려지고, 그리고이미 한 달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라서 이대로 가면 다시는 미팅 안 잡힐 수도 있다고. 이번에 미팅 성사된 것도 진짜 기적에 가깝다니까. 제발, 카맛치. 제발!”

고작해야 미팅인데 뭐가 기적이라는 거야? 상대가 누군데?”

“A기업 비서 팀이야. 엄청 사정사정해서 겨우 약속 잡은 거라고.”

A기업이라면 손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였다. 대기업 비서 팀이라니 외모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있는 여자들이니 미팅이 잡혔다는 게 기적이라고 칭할 만 했다. 녀석이 징징거림을 들어주는 사이에도 뭐가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쉴 새 없이 메시지 알림이 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연이은 야근으로 피곤해 죽겠는데 핸드폰 너머 칭얼거림과 멈출 줄 모르는 진동에 귀가 멍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동기의 울먹임이 커져갔다.

~~! 내 평생의 소원이야! 절대 네 애인한테 안 들키게 내가 잘 할 게. 그냥 회사 동기랑 술 마시는 자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마음이 안 내키는데.”

와서 30분만 있다 가. ? 30!”

내 쪽의 사정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점에선 아는 사람들 중 제일인 놈이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령 좋게 거절할 말도 생각나지 않고, 더군다나 채팅창도 기세 좋게 분위기를 잡은 터라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일단 대답하니 내내 징징거리던 목소리가 단박에 반전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만하게 보였던 게 분명하다. 고맙다며 은인이라고 외치는 녀석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귓가에 이명소리가 맴돌았다.

미팅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진다. 물론 애인이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도 동기 녀석과 똑같은 상황이었겠지. 고등학교를 졸업해 취직하고, 바로 밤낮 안 가리고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미팅 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미팅이란 그저 두통을 유발하는 일일 뿐, 일말의 흥미도 없고 귀찮고 꺼림칙하기만 하다. 미팅에 갔다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모른 척 하고, 다른 무언가를 핑계 삼아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될지 무섭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상상만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묵직해져오는 기분이었다.

 

길고 길었던 삽질 끝에 후타쿠치와 제대로 사귀기 시작한 지 햇수로 3년 차가 되었다. 졸업하고 나는 바로 자재회사에 취직했고, 이듬해 후타쿠치는 대학에 진학했다. 취직이 결정되었을 때부터 회사 근처에서 독립하겠다는 말을 끈질기게 반대하던 후타쿠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거 얘기부터 꺼냈다. 각자 직장과 학교로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후타쿠치는 제멋대로 방을 계약해서 말도 없이 집까지 찾아와서는 부모님 앞에서 착한 후배인 냥 온갖 내숭을 떨었다. 그러더니 둘만 남게 되자 대뜸 짐이나 싸라며 재촉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충 짐을 옮긴 뒤였다. 그제야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에 화를 내니 후타쿠치는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나에게 따져 들었다.

그렇게 같이 사는 게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나는.’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요.’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과정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내심 예전부터 같이 살고 싶었기에 이 문제를 계속 문제 삼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가 시작되었고, 이제 동거 2년 차. 어느새 후타쿠치와 나는 각자 20살과 21살이 되었다.

 

이제 와?”

집에 돌아가면 열에 아홉은 후타쿠치가 먼저 집에 와 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후타쿠치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여유를 만끽했다. 강의며 학회며 정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비어 두었다. 딱히 다른 친구들하고 사방팔방 놀러 다니는 타입도 아니니 웬만한 시간에는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날 백수가 따로 없는 모습에 언젠가 아르바이트라던가, 동아리라던가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후타쿠치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물론 부잣집 도련님이니 아르바이트 안하냐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긴 해도, 그렇게 끈질기게 이어가던 배구에까지 손을 놓다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후타쿠치가 완벽하게 집벌레가 된 덕분에 나까지 회사와 집만 오고갈 뿐 다른 약속을 잡을 눈치가 안 보였다.

저녁 준비 다 했어. 씻고 나와.”

땡큐. , 오는 길에 케이크 사 왔어.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으려고.”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후타쿠치에게 보이게끔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렸다. 뭔지를 가늠하는 듯 가늘게 뜬 시선과 부딪혔다.

뭔데?”

네 건 레몬 타르트.”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

이제는 서로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훤히 파악하고 있다. 동거 초반에는 입맛이며 생활 습관이며 모든 게 달라서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는데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퇴근길에 우연히 후타쿠치가 좋아하는 걸 볼 때마다 챙겨주는 게 사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네 요리는 네 성격이랑 완전 딴판이란 말이야. 어떻게 너같이 삐뚤어진 성격으로 이런 걸 만드냐?”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성격하고 똑같이 요리는 잼병이죠. 누가 봐도 입맛 떨어지게 만들잖아요, 누구 얼굴처럼.”

타르트 안 먹겠다는 거지?”

카마사키 씨, 오늘 배 안 고프다는 거죠?”

매번 하는 말다툼이지만 매번 후타쿠치의 빈정거리는 얼굴을 볼 때마다 울컥 짜증이 솟았다. 항상 마지막에 이겼다는 얼굴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도 짜증이 난다. 이대로 말을 더 했다간 내 기분만 상할 게 분명해 입을 다물었다. 짜증을 참는 내 얼굴을 보며 후타쿠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일 저녁은 알아서 먹어요. 학회 때문에 저녁에 교수님이랑 모임이 생겨서요.”

, 내일?”

내일 뭐 있어요? 설마 혼자라고 외로워서 밥 못 챙겨먹겠다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일은 일전에 약속이 잡힌 미팅이 있다. 그 때 이후로 회사에서 몇 번이나 다시 거절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끈질기게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미팅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후타쿠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또 깜빡 잊어버렸지만. 대충 둘러댈까, 모른 척 할까 이번 주 내내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뭘 선택해도 뒤가 구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더니 그새 후타쿠치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눈치는 귀신같이 빠르기는. 원래도 남에게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후타쿠치 앞에서는 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일 회사 동기가 미팅 대타 좀 해달라고.”

미팅?”

우물쭈물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되물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다 해가던 요리도 중단하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가서 딱 30, 아니 20분만 앉아 있다가 와도 된데.”

“20분이든 10분이든 안 돼. 나가지 마요.”

잠깐이면 된다니까. 친한 동기 부탁이라서 계속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래.”

그 사람 부탁은 들어주고, 애인인 내 말은 안 들어주는 거예요? 대체 뭐가 더 중요해요?”

이미 기분이 팍 상한 듯 후타쿠치는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거짓말이 들키게 되면 상황이 더 복잡해 질까봐 솔직하게 말했던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알면서 뭘 물어?”

그럼 안 가는 거죠?”

아니, 진짜 10분만 자리 지키고 있다가 올게. 나도 한, 두 번 거절한 게 아니라서 어떻게 거절할 말이 없단 말이야.”

대체 누구에요, 그 동기라는 사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카마사키 씨한테 애인 있는 거 알고도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 그러니까. 진짜 미안해. 이번만 네가 이해해 주라.”

후타쿠치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솔직하게 말해버린 게 과연 옳았던 결정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후타쿠치는 대학생활으로, 나는 직장생활으로 이제는 각자 사회생활이 있다 보니 서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여러 번 비슷한 이유로 싸워서 다시는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게다가 미팅이라니 후타쿠치가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실제로 후타쿠치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엔 어쩔 수 없이 미팅에 끌려나갈까봐 자신 또한 온갖 걱정을 다 했었으니까.

여전히 딴 곳을 보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게 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긴 해도 후타쿠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끝나고 연락할게.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을 텐데, .”

그 동기라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요. 존나 재수 없어.”

알겠어. 얼른 밥이나 먹자.”

카마사키 씨도 재수 없어. 딴 맘 품었다간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재수 없다니 저 자식이 근데 진짜. 슬슬 기분이 상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백번 잘못했으니까 참아야지, 참아야.

어차피 그 동기라는 사람도 폭탄 하나 만들려고 카마사키 씨 데려가는 거라고요. 딱 봐도 여자한테 인기 없어 보이니까 카마사키 씨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겠죠.”

알겠으니까 이제 그 입 닥쳐.”

진짜 재수 없어. 카마사키 씨 주제에 미팅이라니.”

저걸 그냥 확. 틈만 나면 못된 말이나 처하는 입을 확 틀어주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울컥해서 뭐라 한 소리 하려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는 모나게 말해서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여전히 눈가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열 받은 눈치다.

제가 한 말마따나, 내가 여자한테 인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있어봤자 10분만 앉아있다 오겠다는데 뭘 저렇게 화를 내는지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딱히 후타쿠치가 날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나는 기분이어서,

타르트 지금 먹을래?”

미안한데 기분이 좋아진다.

 

보통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아침엔 통 일어나 있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후타쿠치가 이른 아침에도 깨어 있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레포트 때문에 자지 못했던 것 같았는데 별 일이었다. 후타쿠치는 수면부족으로 다크서클을 눈가에 달고 다니는 주제에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주위를 졸졸 따라다녔다. 옷을 고르는 내 옆에서 비웃음을 치거나, 아침을 먹는 내 앞에서 말없이 째려보기만 하기에 대체 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나갈 때가 되어서야 현관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미팅 끝나면 곧장 전화해요.”

쟤는 정말 뭘 걱정해서 저러는 건지, 이쯤 되니 후타쿠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이 말 하나 하려고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면서 깨어나 있었던 걸까. 진지하게 의처증 기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진다.

 

어제 후타쿠치가 빈정거리며 했던 말이 씨가 된 건지 이 미팅에서 나는 철저하게 폭탄이었다. 아니, 그 이하인 걸지도 모르겠다. 약속된 장소로 찾아가니 애초 이 미팅에 관심조차 없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이미 고교 동창처럼 친해져 있었다. 알고 보니 처음 생겼던 채팅방에서 미팅이 잡힌 그 날부터 다들 매일같이 수다를 떨어왔던 모양이었다. 누구의 안중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안 왔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싶어 무척이나 억울했다. 괜히 쓸데없는 일 때문에 후타쿠치와 싸운 셈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좀 시끄럽죠?”

그래도 이왕 왔으니 약속한 대로 10분 딱 채우고 얼른 나가버리자 생각하고 가만히 맥주만 들이키는데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의 중심에서 웃고 떠들던 남자였다. 여자들 전부 은근한 눈빛을 하고 이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눈에 띄었던 사람이었다.

, 아뇨. 안녕하세요.”

전 히로키라고 해요. 혹시 제일 마지막에 합류하신 분 아니세요? 다른 분들은 다 인사해서 혹시나.”

. 카마사키라고 합니다.”

히로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살갑게 웃으며 그 이후로도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후타쿠치하고 같은 나이의 대학생으로 미팅을 주도한 동기 녀석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나와는 아무 접점이 없어 보여 곧 분위기가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10분이 다 되도록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덕분에 심심할 틈은 없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난처했다. 히로키는 눈치가 없는지 알고도 그러는지 주위에서 여자들이 온갖 눈치를 보내고 있는데도 그 쪽은 눈빛도 안 주고 나한테만 말을 걸어왔다. 아예 등을 돌린 히로키를 대신해 10분 동안 나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맞봐야 했다.

,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이 뒤에 바로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만.”

갈수록 여자들의 눈빛이 험해지는 게 보여 10분이 딱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옆에서 대화에 낄 궁리만 하던 여자들은 내 말에 활짝 웃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왔다.

벌써 가시게요?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일이 있으시다니.”

아하하, 재밌게 놀다 가세요. 이치로, 먼저 간다.”

아쉬워하는 척 하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옆 테이블의 동기에게 일단 인사를 건넸는데 여자들에게 한눈 팔린 녀석은 내 말을 듣지도 못했다. 기껏 인사해 줬더니 새끼가. 회사에서 만나면 제대로 한 소리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진짜 오지 말걸. 괜한 시간 낭비했다. 가게를 나오며 바로 핸드폰을 꺼내 후타쿠치의 번호를 찍었다. 아침에 그렇게까지 말했을 정도면 지금쯤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 같이 가요.”

? 히로키 씨?”

뒤를 돌아보니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은 히로키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덩치도 큰 녀석이 살갑게 웃으며 뛰어 오는 모습이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그냥 히로키라고 부르세요!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카마사키 씨랑 친해지고 싶거든요. 그래도 괜찮죠?”

, , 어어. 근데 미팅은 어쩌고.”

전 원래 미팅 관심 없었어요. 이번에도 그냥 자리만 채워주려고 온 거지, 애초에 여자랑 사귈 맘도 없고.”

아까 미팅 자리에 있었던 여자들이 들었다면 아쉬워했을 말을 히로키는 서슴없이 했다. 히로키는 처음 봤을 때처럼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활짝 웃었다.

역까지 같이 가요, .”

, 그러지 뭐.”

사실 아직까지 낯선 감이 있어 혼자 가고 싶었지만 구김살 없이 웃는 얼굴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니까 괜찮겠지. 역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고. 그보다 히로키 옆에서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메시지만 달랑 보내면 바로 전화가 올 것 같고.

, 전화할 데 있으세요? 안 그래도 편의점에서 뭐 살 게 있었는데, 전 저쪽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올게요. 편하게 전화하세요.”

핸드폰을 들고 망설이는 걸 눈치 챘는지 히로키가 요령 좋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녀석이구나. 히로키가 편의점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후타쿠치? 약속대로 10분만 있다 바로 나왔어. 지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딴 수작 부린 거 아니죠? 집에 들어가서도 바로 전화해요.]

전화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음이 들리는 걸 보니 후타쿠치도 학회가 끝나고 뒤풀이에 간 모양이었다. 아마 본인은 가기 싫다고 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끌려갔겠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해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장소 안 가리고 할 말. 못할 말 잘도 하네. 생각하기가 무섭게 애인이니 집착이니 전화 너머로 사람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작은 무슨. 이따 다시 전화할게.”

[. 나도 바로 들어갈게요.]

어어.”

말은 그렇게 해도 후타쿠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하곤 전화를 걸어왔다. 직접적으로 말로 하진 않아도 미안하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처럼. 단지 이럴 때가 아니더라도, 가끔 후타쿠치가 살갑게 굴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남들이 들으면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몇 년이 지났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우습게도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게 진짠지 아닌지 믿기 힘들 때도 있다. 괜히 귓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까맣게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막연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멀리서 히로키가 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전화 다 하셨어요?”

, 미안. 자리 피해줘서 고마워.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머쓱한 기분에 사과를 하자 히로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편의점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커피 캔을 내밀었다.

커피 괜찮으시죠?”

괜찮긴 한데. 얼마야? 돈 줄게.”

연하에 학생인, 게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에게 얻어먹을 순 없어 돈을 내려는 나를 히로키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점점 난처해질 때쯤 히로키가 지갑을 쥔 내 손을 아래로 밀어냈다.

그럼 다음엔 형이 커피 사주세요. 이번엔 제가 사는 걸로 하고요. 그럼 됐죠?”

, 그러든지. 그럼 잘마실게.”

착한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슨 말을 해도 웃어주고,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하고 배려심이 엿보인다. 보통 착한 녀석이 아니었다. 주위에 이렇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녀석이 없어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형은 미팅 왜 나오셨어요? 잠깐 있다 가려던 걸 보면 역시 대타로?”

지하철 역 쪽으로 걸어가며 히로키가 물었다.

, 동기 녀석이 끈질겨서. 근데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을 걸 알았다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괜히 싸우기만 하고.”

여자친구? 부럽다~.”

, 애인. 넌 여자 친구 사귈 맘 없다며 뭐가 부럽냐?”

그거랑 이건 다르죠. 여자 친구는 어떤 분이세요? 형이라면 작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할 것 같은데.”

어떠냐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입은 더러운데 얼굴은 쓸데없이 잘생긴 건방진 놈이 되려나.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지만. 저 말을 실제로 하면 어떨까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사람 좋아 보이는 녀석이라도 벙찔 게 분명하겠지.

하하하,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와요? , 진짜 부럽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웃긴 상상을 해서 그래.”

역시 여자 친구 분도 베타겠죠?”

?”

형도 베타 맞으시죠?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베타는 보통 베타끼리 사귀니까 여자 친구 분도 베타 아니에요?”

그야 보통은 그렇다. 보통 베타는 베타끼리, 알파는 오메가와. 그 외의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합이 아니었다.

알파야. 내 애인.”

.”

예상대로 적잖게 놀랐는지 히로키는 으음, 하고 끙끙거렸다. 아마 사람 좋은 녀석으로서 내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알파와 베타는 보통 사귀는 경우가 드무니까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 저기.”

힘드시겠어요, .”

슬슬 지하철역에 다 와 가는데다 썩 달가운 주제도 아니라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히로키가 대뜸 말했다. 걱정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정도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얼떨결에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이 녀석에게 알파와 사귀고 있음을 고백했지만,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알파와, 게다가 후타쿠치와 사귀고 있다는 말을 주위 누구에게도 해본 적도, 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말하면 다들 어쩌려고 그래?, 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알파와 베타가 사귄다는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후타쿠치와 사귀는 걸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후타쿠치가 알파이고 내가 베타일 뿐인데 뭐가 힘들겠어. 사람 사귀는 게 다 똑같지, 뭐가 그리 다르다고, 힘들겠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왔다.

힘들긴, 뭐가 힘드냐.”

알파와 사귀면 항상 끝이 좋질 않잖아요. 지금은 학생이나 직장인이어도 결혼할 나이가 되면 집에서 오메가랑 결혼하라 난리도 아닐 테구요. 아무래도 잠깐 사귀는 게 아니라면, 아니 잠깐 사귀어도 항상 끝이.”

. 그렇긴 해도.”

주변에 비슷한 케이스가 꽤 많았어서 잘 알아요. 알파 남자와 베타 여자라던가, 베타 남자와 알파 여자라던가. 열이면 열 다 헤어졌어요. 알파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요.”

남자와 여자 사이인데도 그렇게 반대가 심할 정도면 남자와 남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 힘들지 않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고집했지만, 사실 힘들 것을 예상했다. 어차피 언젠가 끝이 날 관계라는 걸 알고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게 익숙해지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난 전혀 힘들지 않다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고. 새삼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 괜찮아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거에요? 전 그냥 형이 걱정이 되서.”

아니, 아니야. , 난 이제 가봐야겠다.”

잠시만, . 아무래도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바로 지하철 타면 멀미할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 있다 가세요.”

히로키는 다짜고짜 내 팔을 끌고 가더니 역 앞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손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점점 속이 안 좋아졌다. 할 수없이 울렁이는 배를 부여잡고 벤치에 앉았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배가 아픈지 모르겠다.

죄송해요. 제가 주변에서 그런 걸 많이 보다 보니까 좀 예민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 제가 괜한 말을 해서는.”

괜찮아. 그냥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그런가? 뒤늦게 취하는 것 같네.”

.”

난 잠깐 쉬었다 갈 테니까 너 먼저 갈래?”

아니에요, .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 진짜 저 때문에.”

끙끙거리며 눈치를 보는 게 진짜 대형견 같다. 몸은 다 큰 주제에 나이는 어려서, 자기가 잘못해도 애교밖에 부릴 줄 모르는 대형견. 그러고 본 후타쿠치도 그런 면이 있다. 어리광부리는 방식은 좀 많이 다르지만 의외로 어린 면이 있는 녀석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떠받들어오며 자라서 그런지 도련님 같은 면이 꽤 있다. 언제나 나보다 어른인 척 하는 주제에 지가 잘못하면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못하고 괜히 심술부리는 게 은근히 귀엽다. 젠장, 그럴 때마다 화는 화대로 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가끔씩 보이는 어린 모습을 나만 알고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후타쿠치는 모를 거다.

.”

, 형 웃었다. 왜 웃는 거예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큭큭. ,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

아하하, 다행이다. 진짜 다행.”

이만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신기하게 후타쿠치를 생각하니 아팠던 배가 가라앉았다. 옆에서 걱정하는 히로키에게 인사를 하고 개찰구를 넘는데 뒤에서 히로키가 형, 하고 불렀다. 개찰구 너머에서 히로키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 다음에 봐요!”

하도 손을 흔들기에 덩달아 마주 손을 흔들어주니 히로키가 방긋 웃었다. 후타쿠치랑 같은 나이인데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 후타쿠치도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다 곧바로 그만뒀다. 방긋 웃으면서 손인사하는 후타쿠치라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빨리 보고 싶다.

 

금방 오겠다던 후타쿠치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왔다. 막 씻고 나왔을 때 현관문이 열린 터라 얼떨결에 후타쿠치를 마중 나온 모양이 되었다. 얼굴 가득 못마땅함이 서려있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팔을 벌렸다. 신발은 벗을 생각도 안 하고 그 자세로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어 할 수 없이 다가가자 허리께를 안아왔다. 그리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거렸다.

다녀왔어요. 망할 조교 때문에 시비 털려가지고 바로 못 빠져나왔어요.”

수고했어. 그래도 이 정도면 일찍 온 건가?”

피곤해.”

물 받아줄까? 난 샤워만 해서 욕조 찰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답대신 후타쿠치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뒤풀이에서 얼마나 마셨는지 어깨에 닿은 숨결에 술 냄새가 났다. 더운 숨을 내쉬는데다 어깨에 닿은 뺨이 미묘하게 따뜻한 걸 보면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카마사키 씨는무슨 일 없었죠?”

고작 10분 있었는데 일은 무슨. 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바로 나왔어.”

잘했다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를 매단 채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샤워를 끝내 습기로 가득한 화장실에 후타쿠치를 밀어 내려고 했다. 후타쿠치가 모르는 척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자 나도 모르는 척 손을 잡아 뺐다. 밀려난 후타쿠치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했다.

씻고 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씻겨 줘요.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아.”

까불지 마라.”

후타쿠치는 술만 마시면 5살 어린애처럼 떼가 늘었다. 취하면 취할수록 그 정도와 함께 막말도 늘어나서 술에 취한 날이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몇 번 손이 잡히고 그걸 뿌리치는 실랑이가 오고가다 안 될 것 같았는지 후타쿠치는 잠자코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핀잔을 주거나 시비를 걸 때만 직설적이지 평소에는 솔직하게 뭘 해달라거나 어리광 부린 적이 없어서 사실 후타쿠치가 취해서 들어올 때면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한다.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솔직히 재밌다. 무엇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웬만한 건 기억하지 못해서 무슨 짓을 해도 안심이기도 하고.

물 마실래?”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타쿠치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마시고 있던 컵을 내밀자 거리낌 없이 컵을 비웠다.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조금이나마 술이 깬 듯 했다.

더 마시려면 네가 떠 마셔.”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다. 후타쿠치도 제정신인 걸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어깨가 잡혔다. 올려다보니 후타쿠치가 특유의 웃음을 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니 소파 등받이를 넘어 위로 올라탔다. 제대로 물기를 닦지 않은 몸이 닿자 티셔츠가 차갑게 젖어갔다.

, .”

뭘 당황하고 있어요?”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를 세우자 후타쿠치가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대로 등을 돌려 어깨를 잡은 후타쿠치가 기어코 내 무릎 사이에 허리를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옴짝달싹 못하게 갇혔다. 양치를 했어도 은근히 묻어 나오는 술 냄새에 고개를 가로젓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피곤하다며. 비켜.”

일주일이나 못 했잖아요. 오늘만 기다렸어.”

, , 웃기지마.”

답지 않게 닭살 돋는 멘트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큭큭거리며 웃는 내 위로 후타쿠치가 허리를 은근히 부비며 속삭였다. 하고 싶어. 팬티만 입어 살갗이 고스란히 드러난 다리에 후타쿠치의 맨 살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감기에 걸릴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던 공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부 아래가 묵직해져왔다. 후타쿠치의 말마따나 벌써 일주일동안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했던 섹스도 간신히 갈증만 채운 정도라 거의 이주일은 맘 놓고 욕구를 발산하지 못했다. 저번 주는 내 쪽의 연이은 야근 때문에, 이번 주는 후타쿠치가 학회 일로 바빴다. 그러니 몸을 부대끼는 것만으로도 바짝 달아오르는 게 당연했다.

카마사키 씨, 냄새 좋아.”

목덜미로 후타쿠치의 콧대가 닿았다. , 하고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후타쿠치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냄새가 좋아. 후타쿠치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오물거렸다. 끈덕지게 한 곳만 물고 늘어지는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왼쪽 목덜미에만 집착하던 후타쿠치는 반대쪽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들썩이는 허리 아래로 후타쿠치가 팔을 둘러싸고 꽉 끌어안았다.

내 또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자신의 성감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원래부터 목덜미는 성감대였다. 그걸 깨달은 건 후타쿠치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직 키스까지만 진도를 나갔을 때였는데, 후타쿠치는 유독 키스를 할 때 목덜미를 지분대는 습관이 있었다. 안 그래도 간질거리는데 야하게 목을 매만질 때마다 미치도록 손과 발끝이 저렸다. 몇 번이나 후타쿠치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목가를 만지면 움찔거리는 걸 꿰뚫은 후타쿠치는 더 야하게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었다. 한 번 헤어지고 난 뒤부터는 목덜미를 만지는 습관이 콧대를 부비고, 입술로 깨물고 빠는 정도로 진화했다. 냄새가 좋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민했던 구석은 후타쿠치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리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후타쿠치의 손길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잊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개봉한 영화를 내일 보러가자고 약속했었다. 까먹을까봐 그 날 바로 예매해 놨는데.

내일, , 영화 예매했는데.”

몇 시에?”

아으, 오전에, 열 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와 동시에 후타쿠치가 팬티 위로 돋아난 내 것을 잡아챘다.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성기를 사정없이 주물럭거리면서 입 밖으로 말이 되지 못한 정체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척이는 소리가 스피커를 켠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깟 영화가 뭐가 중요해요? 이렇게 섰잖아, 카마사키 씨.”

들려요? 완전 젖었잖아. 야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 아직 술에 취했어. 취한 게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천박한 말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빨리 하라는 말에 후타쿠치는 간만 볼 뿐 처음과 달리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성기만 잡힌 나만 애가 타서 허리를 들썩이는 꼴이다. 그 모습을 후타쿠치는 애교부리는 강아지를 보듯 웃으며 내려다보기만 했다. 건방진 놈, 속으로 욕하기 무섭게 후타쿠치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

, 이 개새끼야.”

왜 매번 나만 안달내야 하는 거냐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짓이기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내려왔다. 상을 주듯 가벼운 뽀뽀를 하며 후타쿠치는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 지었다. 후타쿠치가 원하는 대로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에도 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반쯤 드러나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보석 같았다. 쓸데없이 잘생겼어. 이럴 때마저 나는 매번 너에게 져주게 된다. 눈을 감으며 후타쿠치의 등을 팔으로 감쌌다.

 



(15614자)

Posted by 005500 :

07.

 

 

 

고작 3개월이었다. 작년 겨울, 2학년의 끝 무렵에 사귀기 시작해 올해 3월까지 왔다.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더 일찍 끝을 냈어야 했다고 아쉬워해야 할까. 후타쿠치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 말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내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잘한 것일까 하고. 이렇게 끝나는 게 괜찮을까, 하고. 걸어가는 동안 끝까지 다 버리지 못한 미련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카마사키는 그날 밤 남몰래 방에 틀어박혀 베개를 적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다. 어차피 알고 시작한 거 왜 새삼스레, 혼자 상처받아서 결국 후타쿠치와 헤어졌냐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몰랐던 거 아니었잖아. 다 알고 있었잖아. 멋대로 기대한 건 네가 아니었냐고, 마음 단단히 먹었던 주제에 얼마 못 가서 결국 포기하는 거냐고 자책했다. 이때껏 힘든 일들 다 참아 왔으면서 왜 지금 와서.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외면하려 했던 후타쿠치의 진심은 어떻게든, 언제가 되었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가슴이 무너질 듯 아플 게 분명해서 무턱대고 피했었지만 애초에 피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알량한 기대를 품은 게 잘못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데 말이다. 혹시, 하는 기대를 품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한 조각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스킨십에 설레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 이제 와 후회해봤자 다 지나간 일이다, 카마사키.”

 

카마사키는 혼잣말을 하며 합리화했다. 어차피 끝났는데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참을 베개에 코를 박고 훌쩍거리다 카마사키는 울어서 부은 눈을 비비다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대로 잤다간 내일 아침에 벌에 쏘인 사람처럼 얼굴이 팅팅 부을 게 분명했다. 힘내자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인데. 몇 번을 더 찬물로 세수하다 거울을 보니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얼굴이 있었다.

 

, 진짜 못생겼어.”

 

[, 진짜 못생겼어. 카마사키 씨 지금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언제였지, 저 말을 했던 게. 자신을 두고 못생겼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후타쿠치였지만 그 때의 상황은 머리에 박힌 듯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백했던 그 날,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나처럼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키스를 했었다.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눈을 가려주었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씨발.”

 

카마사키는 수도꼭지를 틀어 콸콸 쏟아지는 찬 물로 거칠게 세수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어느새 얼굴이며 손이며 빨갛게 달아올라 따가웠지만 카마사키는 멈추지 않았다. 피부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길 반복하다 조용히 세면대 위에 무너졌다. 격하게 숨을 토해내는 등이 급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물이 콸콸 쏟아지며 세면대 위를 빙글빙글 돌고 사라지길 반복하는데 그 거친 표면 위에 조금씩 눈물이 떨어졌다. , 똑 하고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결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씨발, 진짜... 진짜 개새끼...”

 

사정없이 흐르는 눈물을 카마사키가 손으로 훔쳤다. 울어서 그런지, 세수를 해서 그런지 흠뻑 젖은 눈가를 계속 닦아 내었지만 좀처럼 눈물은 멎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결국 포기하고 침대 위로 기어 들어갔다. 젖은 베개를 뒤집어 베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덮었다.

 

개새끼, 마음이 없으면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사귀자는 헛소리 따위 하지 말았어야지.

 

 

 

 

점심시간에 만난 모니와가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차마 카마사키의 얼굴에 손도 못 대고 모니와가 허둥지둥 거렸다.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 경 안 쓸 리가 있어?! 눈이며 얼굴이며 다... 이러고 학교를 어떻게 왔어...”

아무래도 아니야?”

...”

 

차가운 거라도 얼굴에 대고 있을래? 모니와가 당장이라도 캔음료를 사올 기세로 말했다. 모니와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니와를 만나기 전에 교실에서 한차례 듣고 오긴 했다. 엄청난 얼굴로 교실에 들어 온 카마사키를 두고 남자애들은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여자애들 중 두엇은 눈을 돌려 버렸었다. 카마사키는 창피해서 내내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그럴 수는 없었다.

 

. 이거 얼굴에 대고 있어.”

고맙다.”

 

모니와가 건네 준 캔을 들고 카마사키가 가장 부은 눈가를 문질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캔을 굴리는 카마사키를 모니와가 쳐다보았다. 카마사키를 알게 된 이후부터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모니와가 아는 카마사키는 가장 좋아하는 배구를 하면서도 시합에서 졌다는 이유로 우는 일도 없었고, 중학교 때 처음 사귄 여자애한테 가차 없이 차일 때조차도 머쓱하게 웃어넘기는 성격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데. 모니와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망설였다.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는데 카마사키가 말했다.

 

나 오늘 연습 못 갈 것 같은데.”

? 어어... ?!”

꼴이 말도 아니기도 하고.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네.”

많이 아파? 네가 연습을 쉴 정도로 아픈 거야? ?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모니와는 카마사키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나 확인해보았다. 카마사키가 자진해서 연습을 빠진다고 하다니 심각하게 아픈가 싶었던 것이다.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팔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카마사키는 모니와에게 좀 부탁할게, 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니와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카마사키가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카마사키를 찾았다. 어디에 있든 당장이라도 끌고 나가서 어제의 일을 다시 물어볼 셈이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헤어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카마사키와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카마사키 씨 어디 있어요? 안 보이네.”

, 카마사키는 오늘 연습 참여 안 해.”

?”

 

모니와는 오늘 연습할 메뉴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잠시,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후타쿠치에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후타쿠치가 씩씩거리며 왜요?! 하며 모니와를 다그쳤다. , 왜 나한테 화내는 거야.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모니와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자신의 페로몬이 흘러나온 것을 깨닫고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나도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연습 못 가겠다고 그러더라.”

...! , 유도 없이 무작정 보내주면 어떻게 해요?!”

 

, 진짜. 후타쿠치가 머리를 헤집으며 씩씩거렸다. 당장이라도 아까처럼 페로몬이 흘러나올 듯 위태로웠다. 모니와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요즘 둘이 친해보였으니까 혹시 후타쿠치라면 알지 않을까.

 

혹시 어제 카마사키 무슨 일 있었어?”

?”

아까 점심시간에 만났는데... 어제 엄청나게 울었나 보던데. 얼굴이 팅팅 부어가지고 말이 아니더라고.”

“... 울어요?”

. 뭐 아는 거 없어? 둘이 요즘 같이 다니잖아.”

 

후타쿠치? 모니와가 이름을 불렀지만 후타쿠치는 멍하니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후타쿠치가 대뜸 모니와의 어깨를 턱 잡았다. 모니와 씨~, 하며 말하는 말투가 영 불안했다.

 

, ?”

제가 오늘 배가 좀 아파서 연습을 못 할 것 같네요.”

? ,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팔하던 애가 뭘...”

배가 아프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아픈지 진단서라도 떼 와야 믿어주실 거예요? ? 카마사키 씨는 그냥 보내줬으면서 아픈 저는 기어코 연습해야 한다, 이거에요?”

아니, 아니 너는 안 아파 보이잖,”

!!! , 배 아파!!! 배 아파 죽겠네!!!”

 

후타쿠치가 모니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큰소리를 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버럭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주변에서 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바닥에 웅크리고 은근슬쩍 모니와의 다리를 퍽, 퍽 하고 찼다.

 

, 야 후타쿠치! , 그만해. 악, 아파!! 알았어, 알았어! 보내 줄게...!”

 

그 소리에 후타쿠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하고 뻔뻔하게 돌아서는 후타쿠치를 보며 모니와는 이마를 짚었다. 후타쿠치 아프데요? 하고 물어오는 후배에게 모니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후타쿠치한테 휩쓸렸던 친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후타쿠치는 그 길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마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사귀는 동안 몇 번이고 함께 내렸던 정류장에 도착해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절로 빨라지는 걸음에 금세 카마사키의 집에 도착했다. 그대로 벨을 울리려던 후타쿠치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어제 울었다는 말에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이 무작정 와버렸지만 잠깐 망설여졌다. 다음 날 얼굴이 팅팅 부을 정도로 울었다면 얼마나 울어댔던 거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찾아가도 되는 걸까, 후타쿠치는 잠시 시간을 재다 벨을 눌렀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기엔 지금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 궁금증이 너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 씨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둔 터라 카마사키네 집엔 좀처럼 부모님이 계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부모님이었다면 평범한 후배인 척 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저에요. 문 열어요.”

 

인터폰 너머로 카마사키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망설이고 있는 듯 숨소리만 들리는데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인터폰이 끊겼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관에 카마사키가 서 있었다. 과연 모니와 선배의 말대로 얼굴 여기저기 붇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타쿠치가 빤히 보고 있는 걸 눈치 채고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한 쪽 얼굴을 가렸다.

 

왜 왔냐? 연습복은 또 왜 입고 왔어.”

 

생각보다 카마사키의 말투가 덤덤했다. 창피한 듯 얼굴을 가리고 후타쿠치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잠시 보다 말없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 째고 왔어요.”

. , 연습을 째면 어떻게 해? 빨리 다시 가,”

카마사키 씨도 연습 안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안 가요.”

 

억지를 부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투에 카마사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곧이어 한숨을 내쉬더니 제 앞에 서 있는 후타쿠치의 등을 밀었다.

 

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가. 너 이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1학년 아니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3학년이거든요. 3학년이라고 이렇게 해이해져도 되는 겁니까?”

나는,”

나는, 뭐요. 뭔데요.”

나는 사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빠진 거야. 너랑은 경우가 달라.”

무슨 사정? 어제 애인이랑 헤어지기라도 했나 봐요?”

 

등을 떠미는 카마사키의 손길에도 힘을 주며 버티던 후타쿠치가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제 등에 놓인 손을 내리 치며 카마사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인가 봐요? 그래서 충격 받고 연습 빠지신 건가?”

 

마치 제3자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후타쿠치는 아무렇지 않게 카마사키의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냐고,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떠밀었다. 두어 걸음 뒷걸음친 후타쿠치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후타쿠치가 뭐라 쏘아 붙이려는데 카마사키가 더 빨랐다.

 

맞아. 나 어제 차였고, 당분간 네 얼굴 보고 싶지 않다.”

“......”

알겠으면 이제 가.”

 

개새끼. 진짜 개새끼.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후타쿠치의 언행에 카마사키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위층으로 오르려는데 뒤에서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가 그냥 갈 놈이 아니지. 좋아하는 사람이고 뭐고, 하루 종일 기분 잡치는데 한 소리 하려고 카마사키가 뒤를 돌았다.

 

...”

날 좋아한다면서요. 이거밖에 안돼요?”

 

당황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카마사키의 앞에서 후타쿠치가 씩씩거렸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헤어지겠다는 말을 해. 나를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었으면서. 어떻게 감히 나한테.

 

,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내가 무슨 순수 혈통개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만 찾아서 사귀고 결혼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 잠깐...”

당신 베타라고 그냥, 그냥 사귄 것도 아니고. 난 당신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 안 하는데 왜...!”

알았어, 그러니까 잠깐...”

날 좋아해서 사귄 거 아니에요?”

 

후타쿠치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말했다. 분해 죽겠다는 듯 얼굴 한 가득 인상을 찌푸리고 카마사키한테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안 말해요? 장난쳐? 가히 7살 어린애라고 봐도 좋을 만큼 후타쿠치는 떼를 썼다.

 

빨리 대답해요.”

“......”

어서 대답하,”

... 날 좋아해?”

“......”

날 좋아해서 사귄 거야?”

 

카마사키는 어제의 질문을 다시금 반복했다. 곧 죽어도 후타쿠치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카마사키는 그조차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물어보길 잘한 걸까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모른 척 했다. 진짜,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병신 같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 얼굴에 조금은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카마사키의 초조함을 아는지 후타쿠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나 카마사키 씨랑 그냥 사귄 거 아니에요.”

 

난 왜 언제나 이렇게, 너에게 쉽게 넘어가주는 걸까. 손해 보는 일인 게 분명한데도 어째서 늘 너의 건방진 행동과 말투를 다 받아주고, 가볍게 다가오는 스킨십을 뿌리치지 못하고. 날 그렇게 아프게 만들었던 너를, 난 왜 또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하물며 나를 좋아한다는 그 직접적인 말을 해준 것도 아닌데.

 

카마사키는 눈물로 뒤범벅된 후타쿠치의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울면서도 끝까지 분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바람에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제 얼굴을 덮은 손을 후타쿠치가 감쌌다.

 

카마사키 씨 아까 진짜 못생겼어요. 그러고 어떻게 학교까지 올 생각을 다 했지.”

 

후타쿠치는 제 눈도 팅팅 부어오른 주제에 끝까지 카마사키를 놀렸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겠는지 눈을 꼭 감은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봐 줄만한 건 그나마 잘생긴 얼굴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꼴사납게 부어 있다는 주제에. 누가 후타쿠치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남의 앞에서 항상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우위에 서서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알파가 평범한 베타의 앞에서 질질 짜다니.

 

후타쿠치가 눈을 덮은 카마사키의 손을 슬쩍 치우더니 실눈을 뜨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낄낄거리더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바보 같은 얼굴.”

,”

그렇게 내가 좋아요?”

 

그러는 너도 그러고 있으니 정말 못생겼다. 너야말로 그렇게 내가 좋으냐고 묻는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뒷목을 끌어 젖은 얼굴을 품에 안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끌려온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붙잡아왔다. 그리고는 카마사키에게 나를 빨리 대답하라고 웅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뜸을 들이며 대답해주지 않자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재촉했다.

 

좋아한다고 귓가에 작게 말해주자 후타쿠치가 그제야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게 마치 나도, 라고 대답하는 것 같아 카마사키는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서툰 첫사랑이었다.

 


(7835자)

Posted by 005500 :

06.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나란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의 종점까지 와 버렸기에 카마사키는 왔던 만큼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후타쿠치는 어떨지 몰라도 카마사키는 혼자 어색해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주변에 있던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진짜로 꿈은 아니겠지. 버스에서 졸다가 꾼 꿈이라면 어떡하지. 저 멀리 볼 것도 없는 길 너머만 보다 카마사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똥 못 눈 개새끼 같네요.”

“...... 자식 선배한테, 개새끼가 뭐냐. 건방지게.”

스스로 생각해도 강아지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다고 개새끼도 아니거든.”

 

개새끼나 개나, 후타쿠치가 코웃음 쳤다. 쟤는 왜 저렇게 태연하지?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하는 마음에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우리 진짜 사귀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후타쿠치가 확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봤단 봐요. 진짜 확,”

?”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목덜미를 보면서 내뱉었다.

 

물어버릴 테니까.”

베타를 물어봤자 별 거 있냐. 상처도 안 남을 걸.”

남는 지 안 남는지 한 번 해 볼까요? ?”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을 감쌌다. 빈 말이라도 가슴이 술렁였다. 목덜미를 물어버린다는 건 알파에게 있어 각인의 상징이었다. 예전보다 기술이 발달되어서 각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레이저로 손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각인은 독점욕과 소유욕을 드러내는 자국이었다. 자신의 것에 접근하지 말라는 알파의 사인. 페로몬이 없는 베타의 몸엔 남겨지지 않지만.

 

, 더럽게 안 오네.”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카마사키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택가가 모여 있는 길인데다 종점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 근처까지 오는 버스가 드물었다. 버스라도 타야지 어색함이 줄어들 것 같은데 참 더럽게도 안 온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텐데 뭘 그러고 있어요.”

 

후타쿠치는 정류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카마사키를 향해 손짓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앉으라고 말했다. 괜히 한 번 더 버스가 오는 방향을 확인했지만 올 기미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결국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서 카마사키가 머리를 굴리는데 바로 눈앞에 후타쿠치의 손이 튀어 나왔다.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차가운 감촉이 양 뺨에 닿았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볼을 한껏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제 손에 찌부러진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주무르니 붕어 입이 되었다가 말았다가 아주 재밌었다.

 

카마사키 씨, 설마 지금 긴장해요?”

어니거던. 이거 라.(아니거든. 이거 놔.)”

, 진짜 못생겼어. 지금 카마사키 씨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 지짜 너으라거!(, 진짜 놓으라고!)”

 

또 이렇게 시비를 턴다. 못생겼다는 말에 울컥한 카마사키가 제 뺨을 쥐고 있는 후타쿠치의 손을 뿌리치려 손을 올렸다. 후타쿠치의 손이 얼굴을 주무른 탓인지 못생겼다는 말에 창피해서 그런 건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에 굳이 힘을 주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얼굴에서 손을 뗐다. 볼썽사납게 빨개진 얼굴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완전히 굳은 카마사키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조심스럽게 카마사키의 반응을 살피며 맞닿은 입술을 물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맞추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 사이로 스르륵 하고 혀를 집어넣었다. 카마사키는 아예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여직 자신을 멀뚱히 볼 뿐이었다. 후타쿠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카마사키의 눈을 덮어버렸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카마사키가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하나, 둘씩 곤두세워졌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입 안을 배회하는 후타쿠치의 혀가 움직이는 거라든가, 옅게 맡아지는 특유의 체취라든가, 듣기 민망해질 정도로 질척이는 소리라든가. 후타쿠치가 예민한 입천장이나 여린 잇몸을 간질이다 목구멍을 파고들 것처럼 깊숙이 들이밀 때면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느끼는 지점만을 골라 집요하게 문지르면 후타쿠치의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힘없이 미끄러지려는 손에 간신히 힘을 줘 생명줄처럼 후타쿠치의 팔목을 쥐었다. 이제껏 해봤던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기분 좋은 쾌감에 젖어 멍하니 생각했다.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던 연애는 의외로 순조로워 보이는 듯 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란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둥둥 떠버린다. 조금 벅차다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며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시끄러워서 들킬까 마음 졸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전히, 가끔씩 혼자만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알고 시작한 관계였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는 걸 느낄 때면 두려웠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만큼이나 커졌는데, 과연 후타쿠치는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바라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리란 걸 알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내가 주는 만큼 받고 싶어진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노력했던 욕심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커져버렸다. 후타쿠치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조마조마 했다. 털끝만큼의 변화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냐? 속으로 수십 수백 번을 삼켰던 말이 치솟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 그 때 내 고백을 왜 받아줬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 다 영화를 볼 때면 뭘 챙겨먹는 타입은 아니라 티켓을 확인받고 곧바로 들어갔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중, 고등학생만 몇 명 있을 뿐 한산했다. 가운데 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때에 맞춰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봉하기 전부터 예고편이며 뉴스를 챙겨보면서 손꼽아 기대했던 영화였다. 좋아하던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이었기에 재미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스토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스크린을 보고, 상영관 전체를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가 들었지만 스스로 뭘 보고 있는지, 뭘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움직이던 태엽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는데 잡생각만 가득하다. 감흥없이 화면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습관처럼 후타쿠치의 손이 뻗어왔다. 팔걸이에 늘어진 제 손을 뒤집어 가닥가닥 얽어 잡는다.

 

사귀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후타쿠치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오히려 부끄럽다고 자신이 밀쳐 내거나 도망갔지 후타쿠치는 손을 잡거나 목덜미나 허리 같은 곳을 지분거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무릎을 쥐어 올 때면 물 흐르듯 키스를 해온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카마사키는 뻥 뚫린 공간에서 후타쿠치가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낯부끄럽긴 했지만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먼저 다가온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끝까지 밀쳐내지 못하고 후타쿠치가 서슴지 않게 하는 행동을 전부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좋으면서도 쓸쓸함에 휩싸였다. 스킨십이라는 달콤한 쾌락에 홀려 자신이 착각이란 바다에 홀연히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카마사키는 그대로 바다 속에 잠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왔던 의심이 떠오른다.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서 사귀는 거냐고.

 

 

뭐야, 허무하게 끝났네. 이거 속편 또 나오는 거 아니야? 그쵸, 카마사키 씨.”

? 어어...”

 

어느새 영화가 끝났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후타쿠치가 결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연신 투덜댔다. 아예 집중하지 못했던 카마사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의자에 앉아 불만스럽게 다리를 까닥이던 후타쿠치는 별안간 카마시키를 올려봤다. 안 나가냐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카마사키를 향해 건방지게 손짓했다.

 

안 돼. 사람 아직 있잖아.”

 

출입구 쪽에 직원이 한 명 서있었다. 뒤처리를 하기 위해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리는지 유일하게 남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교복 넥타이를 쥐어 당겼다. 불식간에 당겨지는 바람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후타쿠치 위에 엎어졌다. 순간 팔걸이를 쥐었길 다행이었지 꼴사납게 부딪칠 뻔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뭐라 타박하려는데 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 하고 가볍게 몇 번 입을 부딪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입술을 앙 물어버렸다.

 

! 뭐 하는 짓이야!”

영화 보는 내내 딴 생각 하길래요. 이제 정신 차렸어요?”

그렇다고 입술을 물어버리냐? 아프잖아.”

그러게 누가 나랑 같이 있는데 딴 짓 하랬나.”

 

, 저 빌어먹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깨물었는지 입술이 화끈했다. 다른 사람이 볼 까 무서워 카마사키는 아픈 게 가라앉을 때까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다. 그 모양을 보고 옆에서 후타쿠치가 꼴좋다며 웃어대기에 주먹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퍽 쳐버렸다. ! 하는 소리를 내며 거의 고꾸라질 뻔 했지만 아쉽게도 넘어지진 않았다. 후타쿠치는 아프다며 연신 등을 문지르더니 입을 가리고 있는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 떼어내는 척 했다. 안간힘을 쓰며 입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는 카마사키와 손을 내리려는 후타쿠치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오고 갔다. 결국 참다못한 카마사키가 무릎으로 후타쿠치를 밀어내는 것으로 유치한 투닥거림이 끝이 났다.

 

 

영화관에서 나와 오늘은 라면이 당긴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끌고 근처 라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맛집이라고 알아주는 집인지라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할 수없이 다른 곳을 가려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후타쿠치의 이름을 불렀다. 근처 사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후타쿠치와 안면이 있는 듯 합석하겠냐 물어왔다. 4인용 테이블에 2명분의 자리가 남아 있기에 별 고민 않고 자리에 앉았다. 늘 먹는 메뉴를 주문하니 옆에 앉은 처음 후타쿠치를 불렀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후타쿠치 친구신가요?”

아뇨. 배구부 선뱁니다. 카마사키 야스시입니다.”

선배님이셨군요. 전 후타쿠치 중학교 때 친구인 타마키 쇼우타에요.”

언제 또 본다고 통성명이냐. 먹던 라면이나 먹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타마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타박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성격 더럽구나, 후타쿠치, 라며 타마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지냈냐는 말이 오고 갔다. 꽤 친한 사이였던 듯 타마키는 후타쿠치를 서슴없이 대했다.

 

, 맞다. 그러고 보니 걔랑은 어떻게 됐냐?”

누구.”

 

때마침 주문했던 라면이 나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점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휘휘 저으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던 카마사키는 면발을 두고 국물을 떴다.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났다.

걔 있잖아. 이름이 뭐였지? 니시우라였던가, 니시하라였던가.”

니시하라. 걔가 왜?”

헤어졌어?”

, 뜨거.”

 

뜨겁다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먹었더니 그대로 혀에 데어버렸다. 대화를 나누던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시선이 모아져 카마사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찬물을 들이켰다. 조심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말하곤 타마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 하던 중이었지? 다시 이야기가 오고 갔다.

 

, 니시하라랑 헤어졌냐고. 그 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귀었잖아.”

지금이 언젠데 아직도 사귀겠냐?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지.”

그렇긴 한데, 설마 싶어서 물어봤지. , 진짜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몇 개월을 안 가냐.”

“3개월 정도 갔나.”

 

라면 좀 먹자며 후타쿠치는 말을 대충 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식은 면을 후루룩 먹는 동안 타마키는 그 옆에서 자기 친구와 떠들었다. 어지간히 재밌는지 니시하라라는 여자와 언제 사귀었고, 사귈 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타마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손님이 거의 빠져나간 가게에 후타쿠치의 연애 이야기만 들렸다.

 

언제였지? 크리스마스 파티 때였나, 아마 니시하라가 먼저 고백했었지? 진짜 그 때 애들이 다 놀라가지고 남자애들은 후타쿠치 질투하고, 여자애들은 니시하라 질투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니시하라가 좀 예뻤냐. 잡지 모델까지 하고 그때껏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잖아. 자기 눈 높다고 고백해오는 남자애들 다 뻥뻥 차버렸었지. 근데 후타쿠치랑 딱 사귄다고 그래서 애들이 참 언행일치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좀 소름끼치려고 그런다? 그 때가 언젠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 스토커야?”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 약간 세기의 커플 같았어. 엄청 유명했다고. 아직도 중학교 친구들 만나면 가끔 얘기 나온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타마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타마키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네가 얼마 안 갈 줄은 예상했었지. 근데 3개월이 뭐냐.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오래 간 게 3... 4개월? 빠르면 한 달도 안 갔었지?”

헤어질 만하니까 헤어진 거지.”

왜 헤어졌는데?”

몰라. 그냥 질렸었나보지.”

 

나쁜 남자! 타마키가 분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 옆에서 타마키의 친구도 질린 얼굴을 했다. 태연하게 라면을 먹는 후타쿠치를 보며 타마키가 분해하다 표적을 바꿔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카마사키 씨! 선배가 봐도 완전 나쁜 남자죠, 맞죠! 쟤 고등학교 가서도 여자친구 몇 개월에 한 번씩 갈아 치우나요?”

, 어어?”

적당히 해라, ? 카마사키 씨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리니까.”

 

후타쿠치는 남자의 공공의 적, 이라며 타마키는 바로 옆에 앉은 카마사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다 후타쿠치가 던진 휴지조각에 맞았다. 얼굴에 맞고 테이블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다시 들어 올려 타마키가 후타쿠치에게 던지며 말했다.

 

내가 친구로서 얘기하는데, 후타쿠치 너 그러면 안 된다. 단기속성 특강도 아니고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었던 거야.”

그냥.”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너나 잘하시지.”

 

후타쿠치는 여전히 궁시렁거리는 타마키를 외면하고 카마사키를 향해 가자고 눈짓했다. 뒤늦게 타마키가 뒤에서 불러댔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밀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가는 내내 고개를 저어댔다.

 

 

집에 가요?”

 

정처 없이 걷다 후타쿠치가 넌지시 말했다. 라면집에서 타마키를 피해 나오느라 이 뒤에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직 시간은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헤어지기에도, 어디를 또 가기에도 애매했다. 카마사키는 잠시 고민하다 그럴까, 대답했다.

 

영화를 보고, 밥까지 먹었으니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주말을 앞둔 번화가를 걷고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애매하다 생각하는 시간에도 거리는 친구며 애인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울이라 하기엔 늦고, 봄이라 하기엔 이른 계절은 저녁이 되자 아직은 겨울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교복에 저지까지 껴입었지만 휑하게 드러난 목을 스치는 칼바람에 카마사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유난히 날씨가 쌀쌀하다.

 

사람들에 치이고, 바람에 치이느라 잔뜩 어깨를 오그라들고 걸어가는데 손가락 사이로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타쿠치가 모른 척하며 손가락 두어 개를 잡아온 것이었다. 누가 볼 새라 카마사키가 손을 물리려는데 후타쿠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잡은 손가락을 당겨 카마사키를 말없이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쥔 손가락 사이에서부터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카마사키는 핀잔을 주는 대신 걸음을 빨리 했다. 찬바람에 카마사키의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 또 고백 받네.”

 

창밖을 보며 사사야가 말했다. 열린 창 아래로 교사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후타쿠치는 가만히 제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며 고백하는 여자애를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서 몇 번째냐. 신입생들 사이에서 후타쿠치 인기가 장난 아니라더라.”

남자가 후타쿠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데. 안 그러냐?”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지.”

“... 아무튼 잘생긴 게 최고네.”

최고지, 아무렴. , 찼나봐.”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여자아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꽤 멀어졌을 무렵 뒤에서 친구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몰려왔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후타쿠치가 있는 방향을 보며 삿대질하는 것이 아마도 욕인 것이 분명한 말을 하는가 싶다. 나란히 창가에 매달려 구경하던 남자들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딱하다며 누군가는 울지마! 라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이제 한명 쯤 사귈 때도 됐는데. 안 그러냐, 카맛치?”

? ... 런가?”

너 요즘 후타쿠치랑 자주 붙어 다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쟤가 작년 이맘때쯤에는 여자친구를 아주 달에 한 번은 바꾸는 것 같았는데, 가을쯤부터는 한 명도 안 사귀었지?”

 

그랬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이곤 창 아래를 내다보았다. 이미 후타쿠치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한동안 시선을 괜히 좌우로 돌렸다가 슬쩍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아예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여전히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밑을 보는 카마사키의 옆으로 사사야가 몸을 기대왔다.

 

그래도 아예 희망고문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카마사키의 시선을 따라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던 사사야가 말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카마사키는 시선을 돌려 사사야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웬 희망고문?”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후타쿠치랑 사귀어도 사귀는 느낌이 안 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후타쿠치는 우성 알파라고 번듯하게 출세할 게 뻔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생각을 해 봐. 상대는 몇 없는 우성 알파고, 내가 그만한 우성 오메가가 아닌 이상은 뭐가 좋다고 나랑 사귀겠어? 내가 뭐라고.”

꼭 우성 오메가랑 결혼하라는 법도 없잖아. 좋아하면...”

 

카마사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사야는 그 순진한 질문에 그게 아니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란 게 참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고. 우성은 우성집단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공공연히 우성만 만난단 말이야. 우성끼리 결혼하면 그 자녀도 우성인 경우일 확률이 높으니까. 아주 드물게 열성 오메가나 평범한 베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일부고. 그래서 보통은 끼리끼리 만난다 이거지.”

 

급에 맞게. 사샤야가 덧붙였다.

 

그래서 그게 희망고문이랑 무슨 상관인데?”

넌 후타쿠치가 여자애들이랑 왜 사귄다고 생각해? 사귀어도 얼마 안 가 헤어지는 이유는 또 뭐라고 생각하고.”

좋으니까 사귀었겠지. 뭔가 안 맞아서 헤어지고...”

장담하는데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을걸. 그냥 just for fun이야. 그러니까 오래 안 가지.”

 

심심풀이일 뿐 별 의미 없을 거라며 사사야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폈다. 조금 있으면 종 친다며 카마사키의 등을 찰싹 두드리곤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사야가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망하니 창밖을 쳐다보다 수업종이 울리는 소리에 카마사키도 교실로 들어갔다. 은연중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사람은 모른 체 하려고 해도 기어코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진다. 알면 다친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분명 물어보면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카마사키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번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한번쯤은 후타쿠치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무섭다고 피했던 질문.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평소처럼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차리다 라커룸에 아무도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 3개월이나 무난하게 사귀어 왔으면, 그래도 뭔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지금 자신이 하는 질문이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카마사키는 바랐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에 핸드폰에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뒷북쳐요? 사귄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런 걸 물어요?”

됐고, 대답이나 해 봐.”

왜 사귀긴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사귀고 있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더 바라는 거예요?”

뭘 바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후타쿠치의 발이 불만스럽게 까닥이기 시작했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요.

 

“... 그냥?”

예에. , 이제 가요 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챘다. 빨리 가자며 그대로 당겼지만 탁, 하고 카마사키가 팔을 뺐다. 후타쿠치가 아연한 표정으로 뿌리쳐진 제 손을 보다 다시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살풋 찌푸려졌다.

 

아니, 잠깐만. 그냥이라고? 그냥 사귀는 거야?”

왜 자꾸 물어요, 진짜. 이제 와서 왜,”

너 날, 좋아하긴 해?”

 

후타쿠치가 숨을 삼켰다.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후타쿠치를 지켜 보다 카마사키가 눈을 지르감았다. , 기어코 너는. 역시나 너는.

 

대답하지 못하던 후타쿠치의 얼굴이 눈을 감았는데도 훤히 되살아났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려오는 감각에 카마사키는 조용히 숨을 들이 내쉬길 반복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귀를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내 귀가 고장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좀 덜 아플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잠시였다. 복받치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인내심 덕분인지, 남몰래 감정을 삭였던 보람인지 카마사키는 망설임 없이 후타쿠치에게 진심을 말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전부 고백하는 것을 끝으로 그만두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고백 따위 하지 말고 조용히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냥 헤어질까. 그냥 사귀었던 거니 헤어지는 것도 너한텐 아무 일도 아니겠네.”

뭐라고요? 갑자기 헤어지잔 얘기는 왜...”

 

언젠가 이런 적이 또 있지 않았나? 후타쿠치는 가만히 서서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얘기하는 카마사키를 보다 생각했다. 감정이 허물어진 사람처럼 카마사키의 안색이 창백했다.

 

난 분명 너를 좋아하는데, 아니 갈수록 좋아. 그건 틀림없어. 근데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으면서, 점점 힘들다.”

 

그만하고 싶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너도 날 딱히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잖아.”

 

사실이다. 자신은 딱히 카마사키 씨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카마사키 씨가 고백해 왔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했고, 더 이상 술래잡기 하고 싶지 않아 사귀자고 말했었다. 내가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된 줄 알았다.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마주 대할 줄 알았다.

 

나 같은 베타보다 더 좋은 사람 수두룩하잖아. 여자인데다 오메가고, 네 이상형에 맞는 그런 사람 아주 조금만 둘러봐도 여럿 있고. 어차피 언젠가는 너도 우성 오메가를 만날 테고.

 

서로 각인할 수도 있고, 페로몬을 맡을 수도 있고, 굳이 억제제를 챙겨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만날 거잖아. 카마사키가 말을 잇다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카마사키의 하얗게 질린 뺨이 떨리고 있었다.

 

카마사키 씨,”

맞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한가?”

잠깐 말을,”

... 난 네가 아니면 안 되지만, 넌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지. 상관없잖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을 끊어버렸다. 듣고 싶지 않는다는 듯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는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을 나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나간 뒤에도 라커룸에 남아 카마사키가 했었던 말을 곱씹었다.

 

이별은 낯설지 않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왔던 만큼 헤어짐을 겪어 왔다. 후타쿠치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기도, 상대방이 그러기도 했다.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후타쿠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지 않았다. 언제나 시원하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하고 보내 주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헤어지자 했던 여자가 오히려 화를 내기도 했지만 후타쿠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하기때문에 사귄 게 아니었으니까.

 

카마사키 씨와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름없이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다. 그렇기에 헤어지자고 말한 카마사키 씨의 말도 시원하게 납득하고 보내줬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마사키 씨의 말을 들으면서 후타쿠치가 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는 지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저, 창백하게 질린 카마사키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싶었다. 자신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모르고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카마사키의 양 손가락을 잡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그 뿐이었다. 그냥 닿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했다.




(12610자)

Posted by 005500 :

05.

 

 

혹시 날 좋아해요?’

 

카마사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눈치 챈 뒤부터, 후타쿠치는 이따금 묻고 싶었다. 저 어색한 표정이나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신기했다. 카마사키 씨가 나를? 어쩐지 최근 이상하다 싶었더랬다. 점점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하더니 같이 있을 때면 좀처럼 집중하질 못했다. 왜 그러나 싶었지.

 

 

며칠 전 배구공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카마사키 씨는 바닥에 나뒹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연습이 중단되었고,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는 이유로 카마사키가 깨어날 때까지 후타쿠치가 남게 되었다.

 

자신을 보러 왔다는, 점심시간에 잠깐 보았던 타카하시라는 여자도 깜짝 놀란 얼굴로, 카마사키 군 괜찮겠지? 하며 은근히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얼굴이나 몸매도 꽤 취향에 맞았고 오메가 페로몬 또한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평소라면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했지만 여자는 눈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같은 반 남자애를 걱정하는 척하며 후타쿠치의 옆에 앉아 대놓고 쳐다보면서 시덥잖은 질문만 늘여놓았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대충 대답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놓고 꺼지라 했다.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울컥한 얼굴을 하고 나갔지만 후타쿠치는 코웃음만 나왔다.

 

여자는 여러모로 자신과 닮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세는 다를지라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은근히 깔보고 우러러보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 딱 그래 보였다. 보아하니 오메가인데다 예쁘다고 이전부터 주변에서 치켜세워졌을 게 뻔했다.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동족은 동족을 알아보기 때문인지 후타쿠치에게는 타카하시의 가식이 너무 잘 보였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눈치 없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 타쿠, .’

 

왠지 불쾌한 마음이 이는데 카마사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혹은 누군가를 쫓는 듯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더니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이름만 절박하게 불러댔다.

 

카마사키 씨?’

‘...타쿠, . 후타,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 일어나 봐요.’

아니, 아니야...’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 씨!’

 

울먹이는 목소리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후타쿠치는 결국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어 카마사키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카마사키의 몸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떨렸고, 눈이 떠졌다. 아주 짧은 순간,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이 멍하니 흔들리더니 고인 눈물이 흘렀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이기에 눈물까지 흘리며 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카마사키의 눈물을 훔쳤다. 멍하니 천장만 보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했다. 이상하게 울컥했다.

 

카마사키는 악몽을 꿨다며 멋쩍게 둘러댔다. 꿈을 꾸다 운 게 쪽팔렸는지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는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악몽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불렀나싶어 물어봤지만 카마사키는 당황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카마사키의 빨갛게 단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잠꼬대까지 한 줄은 몰랐겠지, 후타쿠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카마사키는 입을 꼭 다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하여간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카마사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이 흔들렸고, 당황하거나 궁지에 몰릴 때면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묘하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게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카마사키는 좀처럼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이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똥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게 불쌍해 보여서 이마를 적신 땀을 닦아주니 별안간 카마사키가 손을 후려쳤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얼굴 표정이나 눈빛, 행동과 말투 등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허겁지겁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쳐다보다 다시 한 번 카마사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단단하게 뻗어 있는 목덜미 뒤쪽,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곳을 만지자 아까보다 격한 반응이 나왔다. ,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니 카마사키의 몸이 발작하듯 뛰었다. 귓불부터 천천히 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차마 후타쿠치한테 변명도 못하고 부산스럽게 옷을 입더니 자신을 내비 두고 도망쳤다.

 

생각해보면 미심쩍게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흩어진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기분에 후타쿠치가 미소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 있지만, 카마사키 씨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저 반응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관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를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카마사키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마음을 꼭꼭 숨겨둘 가능성도 있었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씨가 고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와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은밀하게 카마사키를 떠보았다. 자꾸만 도망가는 시선을 굳이 따라가 얼굴을 마주하거나, 은근슬쩍 허리께나 등을 터치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평온했던 얼굴에 슬며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한 동안은 좋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는 카마사키의 반응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볼 때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쯤 나한테 고백할건데?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 해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까짓 거 한번쯤은 받아줄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마음을 숨겼다. 이쯤 되니 카마사키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괜히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이 여자 내 타입이네.”

난 단발머리.”

여자는 생머리가 진리 아니냐. 긴 생머리 찰랑거리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나도.”

 

연습이 끝나고 누군가 들고 온 잡지를 두고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단발머리가 취향이네, 긴 머리가 취향이네 실없는 소리가 오고 갔다. 후타쿠치도 슬쩍 끼어들어 잡지를 살펴보니 길거리 미남미녀 특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지만 절대 마주칠 일이 없는 예쁜 여자들이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드물게 관심을 보이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후타쿠치도 이런 거에 관심이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당연히 관심 없지, 멍청이들아.

 

후타쿠치도 이 중에서 좋아하는 타입 있어?”

이딴 잡지에,”

, 뭐 보고 있냐. 다들?”

 

잠시 감독에게 불려갔었던 몇몇 2학년들이 라커룸에 들어오다 한 군데에 모여 있는 1, 2학년들을 보고 뭐야, 뭐야 하며 다가왔다. 이상형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에 다들 오오~하며 후타쿠치의 손에 들린 잡지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뭐야, 후타쿠치. 너도 이런 거에 관심 있었냐? 그래서, 네 눈엔 누가 제일 예쁘냐?”

... ...”

뭔데 모여 있어?”

이 사람이 제일 취향인데요.”

 

카마사키를 발견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아무 사람이나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마사키의 시선이 후타쿠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역시 후타쿠치가 보는 눈이 있네. 여자는 자고로 하얗고, 작고 귀여워야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었군.”

...”

 

별 생각 없이 찍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마사키 씨와는 정 반대였다. 하얗지도 않고, 근육맨인데다, 귀엽지도 않다.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보다는... 뭐 굳이 말하자면 가학성을 자극하는 타입이지. 콕 찌르고, 휘두르고, 괴롭히고 싶은 그런 사람.

 

카마사키, 너도 볼래?”

, 그래.”

내가 볼 땐 카마사키 취향은 딱! 딱 이 사람이야. 어때?”

 

누군가 긴 머리의 청순한 타입의 여자를 가리켰다. 내 주변에도 카마사키랑 비슷한 친구가 있는데 걔가 이런 취향이라며 옆에서 조잘대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조용히 잡지를 읽어보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형이 그렇긴 하지. 신기하네, 딱 알아맞혔어.”

내 말이 맞지? ~ 나도 참 보는 눈치가 있다고.”

 

긴 머리에,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원피스에 구두만 신고 다닐 것 같은 이런 여자가 취향이라고? 미녀 부분을 지나 미남 부분을 넘겨보던 카마사키한테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빼내었다.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가리켰던 여자를 확인했다.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카마사키 씨가?

 

, 나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러냐.”

카마사키 씨도 참 꿈이 크시네요. 이만한 여자가 카마사키 씨를 만나줄 리가 없잖아요.”

이게 또 가만히 있는데 시비를 털어. 그래, 꿈이니까 크게 꾼다. 됐냐?”

그럼 꿈 깨요!”

냅둬, 뭔 상관이야. , 마저 보게.”

 

괜히 짜증나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던졌더니 카마사키가 요령 좋게 잡아챘다. 확 맞아버렸으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반사 신경은 좋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후타쿠치가 가버렸고, 그 모습을 카마사키가 잡지에 시선을 고정하던 눈을 들어 슬쩍 쳐다보았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을 내는지 옷을 갈아입는 후타쿠치의 등이 불끈거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근육이 오밀조밀 짜여있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감상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휘휘 젓고 잡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미녀 부분을 넘기고 미남 부분을 보는데 다들 잘생기긴 했다. 확실히 기자가 센스가 좋은지 사진도 잘 찍었고 잘생긴 사람들만 엄선한 게 티가 났다.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딱히 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게이라면 이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겠지.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이 몇몇 눈에 띠었다. 우스운 건, 그런 사람들한테 눈이 가다가도 그 사람들과 후타쿠치를 비교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 이 사람은 후타쿠치랑 머리 모양이 비슷하네. 저 사람은 후타쿠치보단 키가 좀 작고, 눈매도 다르고. 또 저 사람은 후타쿠치랑 닮긴 했지만 분위기가 틀려. 몇 번을 그러길 반복하다 카마사키는 잡지를 덮어 아무에게나 넘겼다. 누굴 봐도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만 눈에 보였다.

 

방금 전에는 청순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대충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잡지에 나온 여자들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안 갔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긴 했다. 긴 머리에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여자. 그런 여자들을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후타쿠치가 가리켰던 사진에만 신경이 쏠렸다. 결코 내가 후타쿠치의 상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후타쿠치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혹시라도 나와 공통점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자신과 공통점은 사람인 것 말고 없을 정도로 정반대였다. 작고, 귀여운 그런 여자. 나한테는 정말 가망이 없군.

 

카마사키 씨. 집에 안 가요?!”

 

카마사키가 우울함에 빠질 새도 없이 후타쿠치가 옷을 다 갈아입곤 다가왔다. 멍하니 앉아있던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카마사키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민망하게시리 후타쿠치는 그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마사키를 구경했다.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되었지만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최대한 빠르게 옷을 입었다. 또 근육 키우는 운동 했어요? 날이 갈수록 가슴이 커지잖아요, 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 후타쿠치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오늘은 무슨 일 없냐? 금요일인데.”

별로 없는데요. 왜요.”

그냥, 요즘은 매일 같이 하교하네. 작년에는 여자, 친구랑 만나기도 했잖아.”

 

티셔츠 위에 저지를 겹쳐 입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요전번에 타카하시가 물어봤을 때부터 궁금했었던 거였다. 없는 눈치로 살펴본 결과 지금은 후타쿠치에게 여자친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달라지곤 했으니까. 선후배 사이라면 이런 거쯤은 궁금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카마사키는 태연하게 가방을 정리하는 척 했다. 괜히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꺼내서 라커에 정리하다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반면 후타쿠치는 꾀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카마사키의 등을 관찰했다. 깜빡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요란하게 가방을 뒤적이는 모습에 그냥 스치듯 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 그런 척 해보이더니, 결국 아까부터 자신의 여자 취향이라든가 여자친구의 유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자신에 관련해서는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은근 심술이 나 장난을 쳤다.

 

주말이 있잖아요. 설마 제가 여자친구가 없겠어요?”

“... ?”

 

건전지가 다 된 시계처럼 똑딱, 하고 핸드폰을 집으려던 카마사키의 손이 한 순간 멈췄다. 속으로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꽤 컸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 그렇구나. 형식적인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에 자신의 손끝이 가방 속에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러냐, 병신같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까 저지를 껴입길 다행이었다. 카마사키는 주머니에 주먹을 쥔 손을 처넣었다.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잘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가자.”

... .”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조용했다. 사실이 아니길 내심 바랐던 게 사실로 밝혀져 기분이 가라앉은 카마사키는 둘째 치고, 후타쿠치도 그런 카마사키에게 실없는 장난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실 후타쿠치는 라커룸을 나올 때부터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적어도 카마사키가 당황한 얼굴을 보이거나 놀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태연하게 웃어넘기려고 노력한다던지.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래? 하고 싱거운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처럼 태연함을 가장하려 노력했다면 몰라도, 확연히 생기를 잃은 얼굴은 우울함을 내비치고 있어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떠보기가 망설여졌다. 밀고 당기며 장난치다 똑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같았다.

 

괜히 창밖을 구경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흘끗 카마사키를 보니 아까부터 쭉 무표정이다. 약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카마사키는 평소에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었다. 후타쿠치와 치고 박고 싸울 때는 흥분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배구를 할 때는 크게 웃기도, 힘들어 하기도 분해하기도 했다. 툭 건들면 파르르 반응하는 미모사처럼 건드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무표정은 영 어색했다. 차라리 침울해 하는 얼굴을 하던가,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후타쿠치는 공연히 아무 죄도 없는 카마사키를 탓했다.

 

그게 죄책감이라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에게 아무 말이나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마사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거의 다 와갔다.

 

나 먼저 내린다. ...... 주말 잘 보내라.”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하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카마사키가 말했다. 평범하게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이었지만 숨겨진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자친구랑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덜컹, 순간적으로 버스가 과속방지턱에 걸렸는지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후타쿠치의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할까 말까 곱씹었던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끼익, 하고 버스가 멈추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카마사키는 다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후타쿠치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오르내리는 얼굴이 익숙했는지 운전사가 내리지 않고 서 있는 카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카마사키 대신 후타쿠치가 고개를 저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지금 여자친구 없다고요.”

... ? 아까는 있다고 했잖아.”

 

네가 주말에 만난다며, 카마사키가 멍하니 후타쿠치를 내려 보았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후타쿠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카마사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 사뭇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런 거짓말을... 왜 했는데?”

그냥요. 굳이 말하자면 장난? 재밌으니까?”

뭐가 재밌다고,”

카마사키 씨 놀리는 게 재밌으니까요.”

“... , 하나도 안 재밌어.”

 

카마사키가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땅 끝까지 뚫을 기세로 가라앉았던 기분을 누가 확하고 끌어올린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려 했다. 카마사키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오른쪽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얘가 진짜 뭐라고 요 몇 개월을, 하루 종일 수 십 번도 넘게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지. 진짜, 나 진짜 어떻게 하냐.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후타쿠치가 진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냐.

 

요전번 꿈에 나왔던 타카하시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 때는 꿈에서 깨자마자 후타쿠치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지나갔었지만, 그 후 반에서 타카하시를 마주칠 때마다 멈칫하곤 했다. 답지 않게 여자애를 상대로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본능적으로 마음이 뒤틀렸다. 또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보러 올까, 만약 고백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다행히 무슨 일인지 그때 이후로 타카하시가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럴까 두려워했다. 떳떳하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은 타카하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정작 후타쿠치는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혼자만 애달파하는 게 싫었다. 그냥 조용히 사드라든다면 좋겠다고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하지만 카마사키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타쿠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마음은 차츰 커져만 갔다.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몇 번 맡아보지 못했던 희미한 체취도 좋았고 언제나 똑바로 직시해오는 다갈색의 눈동자도 좋았다. 빈 말이라도 후타쿠치의 모든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좋아졌고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차라리 싫은 점이 부각돼서 질려버렸다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그냥 저런 애였지, 하고 납득해버리고 만다.

 

... 그냥, 고백해버릴까. 시원하게 차이게.

 

후타쿠치한테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무슨 말이 되돌아올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분명 차일게 분명하고, 기대 같은 건 애초에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해본 적 없기에 차이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예상이 갈 정도다. 그보다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 후타쿠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가 두려웠다. 후타쿠치라면 자신을 경멸하거나 두고두고 약점으로 잡을지도 몰랐다. 싸늘하게 식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아파하는 것도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뭐해요?”

 

고개를 묻은 팔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바로 밑에서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와 눈이 맞았다. 재밌겠다며, 남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얼굴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악마가 깃든 천사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얼굴을 원망스럽게 보다 별안간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후타쿠치. ,”

?”

나 널, ......, 좋아, .”

뭐라고요?”

 

안 되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후타쿠치가 다시 캐물었다. 작아서 안 들렸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카마사키가 입을 달싹거리다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나왔다. 이대로 장난이었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아직은, 도망칠 수 있다.

 

똑바로 얘기하세요, 카마사키 씨. 답지 않게 피하지 마시고.”

 

덫에 걸린 생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다 카마사키가 홀린 듯이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또박 또박 흘러나온 말을 듣고 당황했는지 후타쿠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색하게 입술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카마사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 아니 뭘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내가 널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 .”

“...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원래는, 혼자 마음 정리하려고 했는데. ... 잘 안 되더라.”

“......”

그래서, 내 말은 그러니까... 차라리 차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한 거야.”

 

버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가득 차 미끌거렸다. 미칠 듯 뛰는 심장에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카마사키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달리고 있는 버스가 아니었다면 뛰쳐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마사키는 안절부절 못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고백 따위 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차마 빨리 나를 차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후타쿠치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마사키 씨가 절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 그렇겠지.”

좋아요, 그럼. 사귈까요?”

... 뭐라고?”

 

사귀자고요, 후타쿠치가 재차 말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어리둥절했다. 사귀자는 말이 내가 알고 있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맞나?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아무리 매사에 별 신경을 안 써도 그렇지, 가벼워도 너무 가볍잖아. 혹시라도 아까처럼 거짓말을 치는가 싶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장난으로 고백한거 아니다.”

사귀고 싶어서 고백한 건 아니고요? 카마사키 씨가 사귀자고 해서 사귀자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카마사키 씨야말로 저한테 지금 장난쳐요? 사귀자는데 왜 말을 못 믿어요? 먼저 고백한 건 그쪽 아닌가?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쏘아댔다. 연달아 쏟아지는 말에 카마사키가 어어, 하며 점점 말려들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가? 정말로 사귀자고 말하는 건가?

 

하지만, ?

 

그래서 지금 싫다 이거에요?”

 

격하게 숨을 몰아 내쉬더니 후타쿠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잔뜩 찡그린 눈가가 눈에 띄었다.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찌푸려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싫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상대와 사귀게 된다는데 싫어할 리 없었다. 다만 왜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얘기하는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후타쿠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보고 눈치가 없다지만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마사키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물었던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좋아.”

 

카마사키의 말을 듣자마자 후타쿠치가 이마에 닿은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챘다. 잡힌 손 아래로 순간 뿌듯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저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왕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제쳐 놓아야 했다. 그저 곁에 있을 수 있고, 딱 그만큼만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야 한다.

 

 

 (11693자)

Posted by 005500 :

04.

  

 

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후타쿠치가 다가올 때마다 눈이 가고, 손이 부산스러워졌으며, 심장이 반응했다. 시끄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눈에 띨까 카마사키는 괜히 가슴팍을 확인하게 되었다. 되도록 후타쿠치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 카마사키는 스스로의 행동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행여나 너무 쳐다보지는 않았을까 일부러 딴 곳에 시선을 두고, 유독 후타쿠치의 목소리만 크게 들려도 신경 쓰지 않으려 바쁘게 움직였다.

 

불현 듯 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카마사키는 조용히 마음을 접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표현한다거나, 고백한다는 일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그야 결말이 눈에 선하니까. 자신은 평범한 베타인데다, 심지어 예쁘거나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남자고 심지어 후타쿠치와는 만날 때마다 싸웠다. 반쯤 장난식이어도 이런 자신이 후타쿠치에게 연애의 대상이 될 리가 없다. 뭐가 아쉬워서 주변을 맴도는 예쁘고 매력 있는 오메가와 여자들을 두고 후타쿠치가 나를 봐 줄까. 짝사랑이라면 조금은 기대하고 설렐 법도 하지만 상대가 상대고,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아예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것과 달리 한 번 깨달은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아무리 카마사키가 다른 곳에 신경 쓰려 노력해도 여전히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놀리러 다가왔고, 게다가 별 이유 없이 거절하면 예전처럼 짜증내고 화낼까 무서워 집에 같이 가자는 말도 거절하지 못했다. 말 하나, 행동 하나, 심지어 시선 하나에도 하릴없이 휘둘렸다. 보이면 보여서 좋았고, 목소리가 들리면 들려서 좋았고, 그저 주변에 후타쿠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마사키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후타쿠치와 헤어져 집으로 향할 때면 몇 번이고 그만두자, 어쩌려고 그러냐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찌나 가벼운지 밤중에 실없이 도착한 라인 하나에도 카마사키는 설렜다. 설레고 기분이 고양되면서도 그런 자신이 짜증나 견딜 수가 없었다.

 

미쳤나 봐.”

 

정말 어떡해야 하지. 포기하기는커녕 점점 마음이 커져가 초조해진다. 이러다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대체 나는 왜 후타쿠치를 좋아해서 이런 생고생을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이렇게 마음을 꼭꼭 숨기려고 아등바등 하는 일도, 가망 없는 짝사랑에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짝사랑 포기하는 법]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봤더니 꽤 글이 많았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고백하다 차였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경우, 그리고 고백도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며 좋아하는 경우. 수많은 글들의 제목을 훑어보다 짝사랑을 포기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글에 댓글이 가장 많이 달려 있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가망이 없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시간이 해결해주리란 믿음으로 참아 내거나. 둘째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니, 상대에게서 떠나거나.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절대적이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려고 결심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을 잃지 않고 인내심으로 극복하는 것뿐이다.’

 

전학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교에서 종일 마주치니 두 번째 방법은 불가능하다. 졸업하려면 아직도 1년 하고도 반이나 남았고, 그때까지 후타쿠치를 짝사랑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으라고...

 

짝사랑을 포기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

?!”

 

등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와 핸드폰을 가져갔다. 카마사키는 기겁하며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지만 상대의 손이 더 빨랐다.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카마사키는 머리가 하얘졌다.

 

, 핸드폰 내 놔. 후타쿠치.”

헤에. 카마사키 씨 설마 짝사랑 중?”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을 이리 저리 피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첫째, 시간이 해결해 준다. 둘째, 멀어진다. 셋째, 어이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 내 놓으라고! 죽는다!”

아하하. 얼굴 새빨개졌어요.”

닥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금방이라도 목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다. 카마사키는 급하게 핸드폰 화면을 끄고 후타쿠치를 지나치려 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카마사키의 마음을 알고 그러는지 아닌지 후타쿠치를 그 뒤를 졸졸 따라왔다.

 

설마 순진하게 그런 시답잖은 글을 믿는 건 아니죠?”

믿든 말든.”

그래서 카마사키 씨는 몇 번? 첫째? 둘째?”

신경 꺼라. 제발.”

, 설마 셋째는 아니겠죠.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고요?”

 

아주 제대로 걸렸다. 카마사키는 입을 다물고 후타쿠치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빨리 화장실이든 교실이든 후타쿠치를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후타쿠치는 뻔뻔스럽게 2학년 교실에까지 들어와 카마사키의 앞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이면 매점 근처에서 죽을 치는 앞자리 하마다가 원망스러웠다. 카마사키는 앞에서 뒤를 돌아보고 앉은 후타쿠치를 못 본 척 책을 꺼냈다. 펼치자마자 후타쿠치의 팔이 탁 놓여졌다.

 

네 교실 안 가냐?”

점심시간이잖아요. 간만에 재밌을 것 같으니까 얘기 해봐요.”

“... 무슨 얘기.”

무슨 얘기겠어요. 카마사키 씨 짝사랑 이야기지. 설마 카마사키 씨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을 줄이야. 대체 누구에요? 같은 반? 설마 지금 근처에 있어요?”

... 경 끄라 그랬지.”

, 진짜로 근처에 있어요?”

 

후타쿠치는 대놓고 반을 둘러보며 짧은 머리? 긴 머리? , 혹시 저 여자? 하고 카마사키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다 한 곳을 빤히 쳐다보더니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 저 사람이 여기선 제일 낫네. 저 여자에요?”

 

저절로 후타쿠치의 시선을 따라가니 같은 반 타카하시였다. 긴 머리에 피부가 비칠 듯 새하얗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귀엽다며 반 남자애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여자애였다. 게다가 오메가였다. 카마사키는 혹시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후타쿠치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타쿠치는 턱에 손을 괴곤 타카하시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미세하게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카마사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정도면 카마사키 씨가 포기할 법도 하네요. 나 정도는 되야... , 쳐다본다.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데?”

“......안 가냐?”

화났어요? 저 여자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죠?”

화 안 났으니까, 이만 가. 점심시간 다 끝나간다.”

 

후타쿠치의 팔을 툭 밀어내고 책을 펼쳤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가장하며 카마사키는 책을 팔락팔락 넘기며 집중하는 척 했다. 후타쿠치의 시선이 얼굴에 닿아 긴장하기가 무섭게 종소리가 울렸다.

 

저 가요.”

.”

 

책을 보며 말했지만 처음부터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마사키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입술을 깨물었다. 후타쿠치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교실을 나가고 나서야 카마사키는 잊은 숨을 밭아 내었다. 답답함에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틀어 보니 타카하시였다. 수줍은 얼굴로 다가온 타카하시는 아무도 없는 교실 뒷문을 보며 말했다.

 

카마사키 군. 아까 걔는 후타쿠치 켄지 군이지?”

... .”

같은 배구부라더니 사이가 좋은가봐. 교실까지 놀러온 걸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

듣던 대로 잘생겼더라. 혹시 걔 지금 여자친구 있어?”

 

알아서 뭐 하게? 카마사키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 했다. 사실 카마사키도 후타쿠치와 여자 얘기를 하거나 했던 적은 없기에 지금 후타쿠치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예전에야 연습이 끝나고 여자애와 같이 돌아가거나 하면 그런가보다 했었지. 근데 생각해보니 요 최근 사이에는 항상 같이 하교했고, 확실히 여자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드물어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타쿠치가 여자친구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후타쿠치 지금 여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미안, 잘 모르겠어. 그런 얘기는 잘 안 해서.”

그래? 흐음...”

 

카마사키는 초조함을 달래며 타카하시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후타쿠치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같은 반이 되고나서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자신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겠지. 카마사키는 괜히 책을 넘겼다. 타카하시가 빨리 제 자리로 가기를 바랐다.

 

오늘도 배구부 연습 해?”

“... ?”

괜찮다면 연습 구경하러 가도 될까?”

 

그 순간 영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부탁할게! 타카하시는 양 손을 모으며 눈을 찡긋하곤 가버렸다. 정말 싫다. 무엇보다 저렇게 작고 예쁜 여자애한테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혹시라도 후타쿠치가 저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어 버리면 어쩌나 초조해하는 게 끔찍했다.

 

 

수업이 어떻게 되가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수업이 다 끝나자마자 타카하시는 눈을 반짝이며 카마사키에게 다가왔고, 그런 두 사람을 모두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여자애들한테는 이미 은근슬쩍 말해 놓았는지 잘해보라는 말이 나왔다. 고백이라도 하려는 눈치였다. 타카하시가 들뜬 목소리로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카마사키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뭐라 둘러댈 말도 없어 솔직하게 후타쿠치에 대해 얘기하는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 저 분은 누구세요?”

어어~? 혹시 카마사키 씨 여자친구?!”

 

예상했던 대로 타카하시를 2층에 데려다주고 오자 사방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이 쏟아졌다. 후타쿠치 보러 온 거야, 라는 말에 다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짜증나는 인기남이네. 누구보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랐었던 사사야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사사야한테 괜히 발로 장난치는데 마침 후타쿠치가 왔다. 이미 타카하시를 발견했는지 그 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뭐에요. 저 여자 왜 왔어요?”

너 보러 왔단다, 후타쿠치!”

 

휙휙, 하는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 자식. 인기 많은 녀석! 모니와가 툭툭 후타쿠치를 쳤다. 솜방망이 주먹에 후타쿠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 채 구석으로 끌었다. 답지 않게 카마사키의 표정을 살피며 난색을 보였다.

 

나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알아. 타카하시가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더라.”

 

카마사키는 슬쩍 후타쿠치에게 잡힌 팔을 빼내었다. 맨 팔에 닿은 감촉이 그대로 팔위에 멍으로 남을 것 같았다. 괜히 팔을 문지르며 지나가려고 하자 후타쿠치가 앞을 가로막았다. 저 사람 짝사랑하는 거 아니었어요? 남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진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카마사키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잘해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카마사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후타쿠치를 두고 지나갔다.

 

, 차라리 모른 척 할걸 그랬다. 시선이 가도, 마음이 울렁여도, 생각에 떠올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 걸 그랬다. 스스로에게 시시한 변명이라도 해줄 걸 그랬다고, 카마사키는 연습하는 내내 생각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설레며 좋아하게 될 줄 알았다면 눈치 채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마음 졸이며 애먼 사람에게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카맛치! 조심...!”

“...?”

 

뒤를 돌아보자마자 쾅! 하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 충격에 절로 무릎이 고꾸라지며 나뒹굴었다. 얼얼한 통증보다 누가 머릿속에서 종을 치는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이 하얗게 새며 주변에서 카맛치! 카마사키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앞에 타카하시와 후타쿠치가 서 있다.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처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두 사람은 딱 붙어 있었다.

 

고마워요, 카마사키 씨.’

?’

카마사키 군. 고마워! 덕분에 우리 사귀게 되었어.’

 

타카하시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악수를 건넸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마주 잡자 경쾌하게 손이 흔들렸다. 어안이 벙벙한 카마사키가 무슨 말이냐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손을 떼어내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둘이 사귄다구요. 카마사키 씨 덕분에.’

?’

카마사키 씨도 저한테 도움이 될 날이 오네요. , 카마사키 씨 짝사랑은 안됐지만 여기까지인걸로.’

무슨, ,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귀어?’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지만 후타쿠치는 타카하시의 손을 마주 잡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저러할까. , 후타쿠치? 카마사키의 더듬거리는 말에 후타쿠치가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맞춤했다.

 

서로 좋아하면 시간이 무슨 상관인가요.’

뭐라고?’

, 카마사키 씨에겐 상관있겠군요. 제가 몰라봤어요.’

 

끔찍하다. 누가 산채로 몸을 갈기갈기 도려내는 기분이다. 으스러지는 마음에 차라리 심장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랐다. 카마사키가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지르감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쳐왔다.

 

걱정 말아요. 짝사랑은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후타쿠치.’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찾으시던가.’

,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의 가장 장점은 인내심이잖아요.’

후타, 후타쿠치. 잠깐만 기다려봐.’

잘됐네요.’

아니, 아니야 후타쿠치.’

 

안녕이란 말을 남기고 타카하시와 후타쿠치가 멀어졌다. 그 잔상을 뒤쫓으며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연신 불렀지만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쳐 돌아왔다. 까만 어둠에서 카마사키는 정신없이 내달리다 몇 번이나 넘어졌다. 무릎이 아파.

 

“...키 씨.”

“....”

카마사키 씨!”

 

거짓말처럼 어둠이 가시고 형광등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먹은 듯 반짝이는 불빛에 카마사키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눈을 훔쳤다. 얼굴을 적시는 것이 제 눈물이라는 것을 안 카마사키가 뛸 듯 놀라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다. 모조리 꿈이었어... 정말 꿈이었나?

 

정신 들어요?”

... ? .”

 

후타쿠치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아까의 연장선상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타카하시는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안도하다 볼을 흐르는 느낌에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아까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후타쿠치의 눈빛에 카마사키가 대충 둘러댔다.

 

... 아니, 악몽을 꿔서.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무슨 악몽이었는데요?”

? , 몰라. 기억이 안 나. 원래 깨어나면 기억 안 나잖아.”

그래요? 근데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심장이 철렁였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잠자다 잠꼬대라도 했나 싶어 카마사키가 입을 다물었다. 카마사키의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제 이름을 자꾸 부르시던데요.”

?”

꿈에서 제가 죽기라도 했어요? 너무 절박하게 부르길래 제가 깨운 거에요.”

... 글쎄. , 그랬나.”

땀이 이렇게 많이 났네.”

 

후타쿠치가 식은땀이 난 카마사키의 이마에 손을 대려는데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 손을 휘둘렀다. 찰싹, 하고 후타쿠치의 손이 떨어졌다. 지나치게 격한 반응에 후타쿠치는 물론이고 때린 장본인인 카마사키도 놀라 눈이 커졌다.

 

, 내가 닦을게. 더럽잖아.”

 

뒤늦게 카마사키가 근처에 있던 휴지를 뽑아 이마를 닦으며 얼버무렸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고 시비를 걸 법도 한데 후타쿠치는 별 말이 없었다. 대신 챙겨온 카마사키의 가방을 뒤적이더니 수건과 티셔츠를 건넸다.

 

땀 식으면 감기 걸리니까 닦아요. 옷도 갈아입고.”

, 고맙다.”

 

대충 이마며 목이며 땀을 닦곤 카마사키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뭐에 쫓기는 사람마냥 카마사키는 서둘러 몸을 닦았다. 맨몸을 보이는 거야 익숙한 일이었지만 후타쿠치가 앞에 있으니 어쩐지 신경 쓰였다. 물론 후타쿠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괜히 그랬다.

 

, 목 뒤도 제대로 닦아요.”

어디?”

여기. 목 뒤에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잖아요.”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

 

차가운 감촉에 카마사키의 몸이 움찔 굳으며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당황한 눈이 이리저리 뒹굴었다. 차마 이번엔 뭐라 변명하기가 그랬는지 카마사키는 모른 척 티셔츠를 입었다. 이제 가자, 하고 말하며 후타쿠치를 두고 일어서 걸어가는데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후타쿠치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괜히 매만지고 있다는 것을. 후타쿠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라라?




(7977자)

Posted by 005500 :

 

03.

 

 

2층 끝 쪽 방은 문이 열려 있어 밖에서도 내부가 보였는데 단숨에 카마사키의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낯익은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카마사키는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데 특유의 체취가 풍겼다. 깊고 진한, 사람을 홀리기 위해 알파와 오메가가 풍기는 페로몬과는 달랐다. 연습하고 씻을 때마다 맡을 수 있었던 바디 워시의 냄새가 은은하게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무슨 바디 워시를 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방으로 들어섰다.

 

 

뭐하냐?”

 

집에 있던 빵이며 음료수를 챙겨서 올라왔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뻔뻔하게 대자로 누워 카마사키가 왔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에서 냄새 나요.”

? 냄새 난다고?”

 

꽤 깨끗하다고 생각했는데 방에서 냄새가 난다니 충격적이었다. 혹시 쓰레기통을 안 비웠나 확인해봤지만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카마사키가 머쓱하게 미안, 하고 창문을 열려고 하자 후타쿠치가 침대에서 일어나 막았다.

 

됐어요. 그나저나 바디 워시 뭐 써요.”

그냥 집에 있는 거 대충 쓰는데. ? 별로냐?”

좀 특이해서요.”

이건데.”

 

카마사키가 가방에서 꺼내 온 휴대용 용기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평범하게 시원한 향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카마사키의 냄새는 이것보다는 마른 풀잎의 냄새가 났고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뚜껑을 닫고 카마사키에게 돌려주니 아까부터 냄새 운운해서 신경 쓰였던 카마사키가 킁킁거리며 바디 워시를 다시 확인했다. 그냥 평범한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냐? 뜬금없이.”

궁금한 게 많은 나이잖아요.”

 

하여간 진짜 뻔뻔하네. 지난 몇 주 동안 자신을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했으면서. 카마사키가 코웃음 쳤다.

 

웃기네. 관심도 없었으면,”

“......”

...”

“......”

아니, 관심이 있었으면 해서 말한 게 아니라.”

몰랐네요? 거리 두자고 할 때는 언제고 제가 관심주길 바랐다니.”

말이 헛 나온 거거든. 그런 거 절대 아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듯 후타쿠치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한쪽 입가가 삐죽 올라간 모양에 카마사키는 재차 말실수 했다며 자신을 타박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말은 마치... 관심을 못 받아서 혼자 삐친 사람 같지 않은가. 아니, 내가 왜 저 자식의 관심을 바라는데? 그러다 요사이 있었던 일을 생각해내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한테 따지듯 물었다. 순순히 후타쿠치를 집까지 데리고 온 데에는 카마사키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너야말로 그 때부터 왜 그러는데? 왜 답지 않게 무시하고 그러냐?”

제가 뭘요? 카마사키 선배선배취급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전 거기에 따라줬을 뿐이고요.”

그게 무슨 선배취급 하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이런 말을 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듯했다. 시치미를 뚝 떼며 카마사키가 가져온 우롱차를 마시며 카마사키의 반응을 구경했다. 속 터지는 쪽은 카마사키였다.

 

아무래도 네가 오해한 모양인데. 그 때 내 말은 이런 식으로 데면데면해지자고 했던 게 아니었어. 그래도 내가 선배니까 조금은 날 존중해달라는 거였고. 미운 7살도 아니고 왜 그렇게 비뚤어지게 받아들여?”

미운 17살이니까요.”

그렇게 좀 가볍게 말하지 마! 하여간 너는 항상...”

그래서 어땠어요?”

?”

 

후타쿠치가 홀짝거리며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카마사키를 향해 물었다.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카마사키를 골리던 얼굴이 낯설게 변했다. 주변에 알파나 오메가가 있었다면 본능적으로 몸이 덜덜 떨릴 만큼 후타쿠치의 페로몬이 팍, 팍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발산되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지만 카마사키는 순간적으로 후타쿠치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과 분위기에 당황한 카마사키가 어어, 거리자 후타쿠치가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카마사키의 등 너머로 후타쿠치의 팔이 놓이면서 반쯤 후타쿠치에게 덮인 자세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였던 간에 선배 뜻대로 해드렸잖아요, ‘선배취급. 만족하세요? 그동안 어땠어요.”

뭐가 어땠냐니. 그나저나 팔 좀 치워. 답답해.”

싫은데요? 제대로 대답해요. 어떤 기분이셨어요?”

 

힘으로 밀면 그대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카마사키는 꼼짝도 못했다. 힘을 쓰기 이전에 덫에 걸린 먹잇감처럼 후타쿠치의 눈빛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온 탓인지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후타쿠치의 체취가 맡아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자신은 베타이기에 한 번도 누군가의 페로몬을 맡아본 적도 없고 맡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페로몬도 이런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떻기에 다들 후타쿠치에게 홀리는지.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거든.”

하하. 그래요?”

그래! 오히려 그, 뭐냐 그동안 얹힌 게 가라앉듯이 속 편하더라!”

 

정말요? 그러셨어요? 후타쿠치가 말할 때마다 몸이 조금씩 더 기울어지며 다가왔다. 조금만 고개를 틀면 그대로 서로의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후타쿠치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 숨이 카마사키의 뺨에 닿았다. 긴장해서인지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게 느껴졌다. 뭐야, 무서워. 카마사키는 없는 빈틈을 찾아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애초에 비켜날 곳이 없었다. 오히려 몸을 움직일수록 그 틈을 맞추기라도 하듯 거리가 좁혀졌다.

 

거짓말.”

아닌데.”

다 티 나거든요. 카마사키 씨. 거짓말 할 때마다 눈이 흔들리잖아.”

뻥 치지 마. 안 그랬어.”

 

거짓말처럼 후타쿠치가 몸을 뒤로 물렸다. 후타쿠치가 팔을 치우고 멀어지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공기가 트이면서 답답함이 가셨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이 다가왔다. 정신 차리지 않았으면 뒤따라 다가갔을 지도 몰랐다. 아찔한 상상에 카마사키는 불편하게 움츠러들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카마사키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꽤나 상처였다고요?”

 

후타쿠치가 가면을 쓰듯 눈썹을 내리곤 불쌍한 얼굴을 지었다. 가식인 게 훤히 보이는 표정에 카마사키의 입에서 저절로 시큰둥한 말이 터져 나왔다.

 

상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속아 넘어가 줄 생각은 없어요?”

없다, 그런 거. 장난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말에 카마사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순간적으로 후타쿠치의 낯빛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카마사키를 뚫어버리려는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X 열 받았었다 이거에요.”

, 야 존X는 좀...”

아 죄송. X X 열 받았었다고요, 빌어먹을 카마사키 씨 때문에.”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잔뜩 찡그린 눈가에서 지금껏 내비치지 않았던 후타쿠치의 감정이 삐죽삐죽 솟아나왔다. 후타쿠치는 참아왔던 화를 한 번에 푸는 사람처럼 그 때부터 온갖 욕을 다 하며 카마사키를 몰아 세웠다. 귀를 따갑게 만드는 욕에 카마사키가 막으려 했지만 어찌나 감정을 싣고 말하는지 도중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카마사키가 어버버하는 사이 후타쿠치는 이제 끝이 났는지 마지막으로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한숨에 흐트러졌다.

 

뭐 때문에 선배취급 운운하면서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그건 알아야겠네요.”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고,”

X, 이제 와서 선배취급 받고 싶다는 말 하면 제가 믿을 것 같아요?”

근데 이 새끼가 왜 자꾸 욕질이냐.”

아 됐으니까 빨리 말하라고요! 왜 그랬어요, 대체!”

 

코너에 몰렸다. 후타쿠치의 말처럼 애초에 처음부터 후타쿠치가 하는 짓을 웬만하면 받아주었던 카마사키였기에 선배취급 받고 싶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았다. 뒤늦게 대접받고 싶을 수도 있었지만 카마사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이를 후타쿠치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대접받고 싶길 원했지. 뭐만 하면 후배니까요, 라는 말을 면죄부처럼 입에 달고 살았었다. 도저히 지어낼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카마사키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 다들 안 좋게 봐서...”

다들? 누가요? 모니와 선배가요? 아니면 사사야 선배?”

아니, 걔네 말고! 걔네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카마사키 씨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거네요?”

... 아닌데. 그런 적 없어.”

누군데요, 그 새끼가?”

그냥 알려고 들지 마. 귀찮아져.”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카마사키의 말대로 모니와나 사사야 선배들은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같은 학년인 애들은 카마사키에게 그렇게 말할 입장이 못 되었고, 게다가 귀찮아진다는 말로 보면 자신이 알게 된다면 트러블이 생길 사람이 분명했다. 자신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배구부 내에서라면 몇몇으로 좁혀졌다. 유치하게 사소한 일로 트집 잡길 좋아했던 3학년 알파 새끼들 중 한 명이 틀림없다. 그렇게 뒤에서 뒷담화를 까더니 기어코.

어처구니없는 가정에 답지 않게 흥분하는 바람에 후타쿠치는 아까부터 잔뜩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긴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카마사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보기완 달리 밀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겠지.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남의 일에 참견했었다며 후타쿠치가 이를 갈았다. 그나저나 그와는 별개로, 이 사람을 어떻게 한다? 솔직히 아무리 그런 얘기를 들었겠기로서니 남의 말만 듣고 자신에게 선을 그으려 한 저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고 싶어요?”

, 글쎄?”

카마사키 씨가 선택해요. 속 편하게 살고 싶어요?”

 

당연하지, 모니와나 사사야였다면 옆에서 이렇게 거들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후타쿠치한테 시비 털리느라 힘들었잖아. 없으니까 편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카마사키는 요 몇 주 간 한 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 때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봤을 때 언제가 더 나았냐고 묻는다면 카마사키는 주저 없이 그 이전이라 말할 것이다. 남들의 말마따나 후타쿠치와 매번 싸우기만 하고 가끔은 지나친 장난에 질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좋았다.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게 된다면 매저키스트냐고 불릴게 뻔했지만 카마사키는 그랬다. 뭐를 했고 어땠었고를 떠나 그 때를 생각하면 즐거웠다. 시시하고 유치한 장난에 서로 타박하다가 마주쳤던 장난기 섞인 눈이 요즘 따라 자주 떠올랐다. 그러다가도 냉담한 후타쿠치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 때의 일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들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오히려 후타쿠치에게 무시 받았을 때가 힘들었다. 매번 지나치던 길에서 갑자기 투명한 유리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고.

 

됐어요. 이제부터 선배대접 해드릴게요, 카마사키 선배.”

 

한동안 고민하는 카마사키를 두고 후타쿠치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 팍 하는 소리에서 언짢음이 느껴졌다.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탁탁 발걸음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가버렸다.

 

후타쿠치, 잠깐. !”

 

어찌나 빨리 갔는지 카마사키가 뒤따라 나와 1층으로 내려갔는데 후타쿠치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는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카마사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자리를 떴다. 다시금 오버랩되는 상황에 카마사키가 급하게 신발을 구겨 신고 달려 나갔다. 멀리서 후타쿠치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 기다려 봐, !”

, ! 따라오지 마요!”

 

카마사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자 후타쿠치가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홱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더 씩씩대는 걸음걸이가 꼭 나 열 받았음, 하는 티가 확연히 드러났다. 끝까지 무시하는 저 태도 좀 봐라, 건방지게. 속으로 욕하며 카마사키가 있는 힘껏 달려가 후타쿠치의 가방을 낚아챘다. 동시에 후타쿠치가 화를 내며 뒤 돌아섰다.

 

왜 따라,”

!”

“......”

“....”

뭐라고요?”

들었잖아.”

아니요?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못 들었는데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왜 쟤한테 사과를 하고 있지?, 라고 깨달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얼버무리려는데 그걸 예민하게 알아채곤 후타쿠치가 재차 물어왔다. 이러니까 나 혼자 잘못한 사람 같잖아. 애초에 사람 무시하고 건방지게 굴었던 게 누군데. 내심 속에 쌓였던 일들이 다시 한 번 카마사키의 뇌리에 스쳤다. 어쩌다 눈이 마주쳤을 때면 싸늘한 얼굴로 대놓고 고개를 훽 돌려버렸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무시했지. 생각해보니 열 받게 한 행동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사과를 받아도 모자랄 지경에 사과 따위 할까보냐. 절대 먼저 사과하지 않을 테다.

 

아냐. 말이 잘못 나왔어.”

?”

... 잘 가라.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버스 정류장 있으니까...”

 

예전 일로 꽁해 하는 게 남자답진 않지만 애초에 후타쿠치 놈과 관련해서는 항상 유치해졌다. 카마사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 후타쿠치를 내버려두고 발을 떼려고 했는데 덥석 팔이 잡혔다.

 

이랬다 저랬다, 장난해요? 미안하다고 했으면 똑바로 말 해야지, 말 해놓고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어딨어요?”

잘못 말한 거라니까. 이것 좀 놔.”

빨리 사과해요. 나한테 그런 말 했던 거 사과하라고요.”

참나, 너야말로 사과해!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듣고 대놓고 무시하고, 비아냥거렸던 게 누군데?”

 

울컥한 카마사키가 잡힌 팔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애초에 후타쿠치보다 힘이 세기에 마음만 먹으면 문제없었다. 후타쿠치는 뿌리쳐진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곤 서로 말없이 상대방을 노려보다 카마사키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렸다. 유치원 애들도 이렇게 안 싸우겠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미안하니까 빨리 사과해요.”

?”

사과했잖아요. 이제 카마사키 씨가 나한테 사과하라고요.”

너 이 자식. 그게 사과냐?”

예에. 그러니까 사과해요, 빨리.”

 

아까보다 한층 더 인상을 찌푸리곤 후타쿠치가 재촉했다. 고집을 꺾지 않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카마사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했다. 하여간 진짜 제멋대로다.

 

미안하니까 너야말로 그만 노려봐.”

 

못이긴 척 사과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인상을 탁 풀곤 보란 듯이 턱을 들어 올렸다. 마치 내가 봐줬다, 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카마사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평하게 각자 사과하고, 사과 받았는데 오히려 손해 본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무슨 의도였던 간에 먼저 선을 긋고 밀어낸 쪽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려던 마음은 없었지만 다시금 후타쿠치에게 말려들어 버렸다. 하여간 후타쿠치와 관련해서는 좀처럼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 말리고, 휘둘리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얼마 못 참고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사과 했으니까 이전같이 행동하기만 해 봐라, ?”

제가 어쨌는데요?”

“...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별로 그런 적 없는데요. 카마사키 씨 자의식 과잉이 심하시네요.”

!”

 

언제 데면데면했었냐는 듯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렇게 얼마동안을 길거리에 서서 투닥거렸다. 싸우느라 굳어있던 얼굴이 점점 풀어졌다. 카마사키는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려는 것을 모른 척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면서 어둑어둑해지자 후타쿠치는 이제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곤 카마사키를 향해 돌아봤다.

 

둔한 주제에 다른 사람 눈치 볼 생각은 꿈에서 깨세요, 시간 낭비니까.”

 

카마사키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피식 웃더니 가버렸다. 내가 둔하긴 뭐가 둔하다는 거야. 멀어지는 후타쿠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를 걸어가는 후타쿠치의 걸음걸이가 아까 신경질을 쓰던 때와 달리 여유로웠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후타쿠치의 머리카락이 태양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눈을 떼지 못했다.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잘도 잡아채는구나.

 

이때는 그저 그 뿐이라 생각했다. 워낙 튀는 사람이니까 시선이 갔었던 거겠지.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도 있었으니 자연스레 신경 쓰였던 거라고, 이때는 그리 생각했다. 그 이전부터 마음 한 편에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8027자)

Posted by 005500 :

 

02.

 

 

후타쿠치가 달라졌다.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더 이상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애초에 친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주 기본적인 대답만 해줄 뿐 사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다. 한동안 고민하다 어젯밤 보낸 라인에는 읽었다는 표시만 보일 뿐 답장이 없었다.

 

후타쿠치, 잠깐만.”

?”

... 왜 어제 라인 답장 안 해줬냐?”

하하. 라인 해도 되나요?”

 

후타쿠치가 웃으며 말했다. 웃고 있음에도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

건방지게 어떻게 선배하고 라인을 해요.”

, 전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라면... 네가 오해했나본데,”

아니요.”

?”

오해 안 했는데요. 애초에 제가 선배 취급을 안 해드렸던 게 죄송하죠.”

 

지금까지 죄송했습니다, 선배. 하고 후타쿠치는 자기 할 말만 끝내곤 돌아섰다. 카마사키가 당황한 목소리로 어, ! 잠깐만! 하고 불러도 후타쿠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갈 길을 갔다. 그 이후로도 몇 번 후타쿠치와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피했다. 연습 도중이라 자리를 피하지 못할 때에는 이전에 태연한 표정으로 카마사키를 놀렸던 때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을 끊었다.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카마사키 한정이었다. 평소처럼 다른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장난을 치면서도 카마사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주변에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싸웠냐는 말이 돌았다. 다들 후타쿠치에게 물어보긴 어려우니까 비교적 편한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카마사키는 싸운 건 아닌데, 라고 얼버무리며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싸운 건 아닌데 뭐지? 지금 상황은 절교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좀 편해지지 않았어?”

 

연습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사사야가 말했다. 항상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휘둘려지는 것을 옆에서 봐 왔기에 사사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좀 서먹해지긴 했어도 이제 시비도 안 걸고, 제대로 선배취급 해주잖아.”

, .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해서 표적을 바꿔서 다른 애들한테 시비 걸고 다니지도 않아. 그럼 잘 된 거지.”

 

쟤가 좀 철이 들었나봐, 모니와가 옆에서 거들었다. 카마사키는 그런가, 하고 대답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면 늘 찾아오던 후타쿠치가 없으니 편했다. 주변에서 말리기에 바빴던 모니와도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슬쩍 돌아보니 후타쿠치는 아오네 옆에서 턱을 괴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카마사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렸다.

 

거의 모르는 사람 취급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모니와가 덧붙였다. ‘거의가 아니라 이 정도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 나을 법 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일상이 이렇게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을 카마사키는 최근에 깨달았다. 예나 지금이나 딱히 새로울 것 없이 하루하루가 단조로웠지만 예전에는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학교에 가는 일이 기대가 되고, 매일 배구에 매진하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혀 그런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지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자꾸 후타쿠치가 생각났다. 절교 아닌 절교를 해서 그런지 자꾸 후타쿠치가 마음에 걸렸다. 수업을 듣다가 멍하니 있을 때면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 그렇게 확 태도를 바꿀 정도로 내 말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복도에서 후타쿠치를 스치듯 만날 때면 예전처럼 인사를 주고받고 싶고, 배구 연습을 하다 합이 잘 맞을 때면 가끔 그랬듯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 눈에 밟혔다. 그저 후타쿠치가 눈에 띄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서건 무의식적으로 후타쿠치를 찾게 되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후타쿠치에게 흘러도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카마사키는 왠지 모르게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요즘의 자신은 뭐에 홀린 사람마냥 하나만 생각했다. 게다가 눈에 밟히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무서운 거였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누구와 함께이거나 혼자이거나를 막론하고 후타쿠치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마냥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직도 싸우고 있어? 화해했어? 주변에서 눈치 보며 물어오던 후배들이나 친구들도 이제는 후타쿠치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후타쿠치와 한 공간에 있으면 마치 두 사람만 각각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다가가도 닿지 않았고 마주치지 않았다. 홀로 우주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기분에 답답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어느새 몇 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카마사키 선배.”

 

여느 때와 같이 연습이 다 끝나고 정리를 하는데 후타쿠치가 말을 걸었다. 그 때 이후로 후타쿠치가 먼저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방심하고 있던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랐다. 두 팔 가득 물병을 안고 정리하려던 카마사키의 팔에서 물병 두 세 개가 떨어졌다.

 

으악.”

 

데굴데굴 굴러가는 물병을 집으려고 허리를 숙이려는데 후타쿠치가 먼저 물병을 주웠다. 여기요, 하고 카마사키의 팔에 물병을 얹었는데 다시 물병이 굴러 떨어졌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입이 그대로 멈췄다.

 

...”

그냥 제가 들고 갈게요.”

, . 고맙다.”

 

평소 같았으면 미련하게 물통을 그렇게 들고 있냐며 타박하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후타쿠치는 대신 카마사키가 들고 있던 물병들 중 몇 개를 더 가져가 정리했다. 1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다들 후타쿠치를 어렵게 생각하는지라 연습이 끝나고도 좀처럼 뒷정리를 해본 적이 없었던 후타쿠치였기에 의외였다. 게다가 최근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기까지 했으니 갑자기 일을 거들어주는 후타쿠치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베푸는 호의라고 보기엔 후타쿠치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충 정리한 뒤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부탁한다 말하고 체육관을 나오려는데 후타쿠치가 말을 걸어왔다.

 

집으로 바로 가요?”

그래야지.”

그럼 같이 가요.”

 

후타쿠치와 카마사키는 같은 동네에 살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데다 타고 가는 버스가 같았다. 딱히 일부러 시간을 맞추거나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연습이 끝난 뒤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하교하곤 했다. 그 때 이후론 언제나 후타쿠치가 먼저 쌩하니 가버렸지만. 카마사키는 여전히 후타쿠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전처럼 다가왔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하교하는 두 사람을 보고 배구부 사람들이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니와는 후타쿠치를 흘끗 쳐다보곤 카마사키에게 화해했어?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새 없이 후타쿠치가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모니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모니와 선배도 같이 가나요?”

? 아니, 난 사사야랑 갈 건데...”

그럼 가요, 카마사키 선배.”

어어... 그럼, 내일 보자.”

 

카마사키는 모르겠지만 모니와는 후타쿠치가 다가오자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억제제는 항상 복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가끔씩 후타쿠치의 알파 페로몬이 뿜어져 나올 때가 있다. 후타쿠치같은 우성이 아니기에 모니와는 발현하고 나서부터 한 번도 알파 페로몬을 절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끔, 페로몬이 너무 강하거나, 미성숙한 아이들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 커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페로몬이 터지듯 뿜어져 나온다고 들었다. 후타쿠치가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 분명 뭔가에 자극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대체 뭐 때문에 후타쿠치의 감정이 폭발한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니와는 굳었던 어깨를 주무르며 카마사키와 함께 걸어가는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살펴봤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뭔가 말을 할 거라 생각해 기다렸지만 후타쿠치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나서도 별 말이 없기에 뭐지 싶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서 뭐라 말을 걸어도 후타쿠치는 생각에 잠겼는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뭔가 대화를 나눠야 지난 며칠 동안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아무 말도 못해보고 버스가 도착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보다 집이 더 가까웠기에 내리려고 준비하는데 그제야 내내 딴 곳을 보던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얼굴을 보니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나 먼저 내린다.”

저도 내려요.”

?”

 

후타쿠치는 다짜고짜 내린다는 말을 하곤 당황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 카마사키의 등을 떠밀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버스에서 내리자 후타쿠치는 대뜸 어느 쪽이에요? 하고 물었다.

 

뭐가 어느 쪽이야?”

선배네 집이요.”

우리 집은 왜?”

그럼 제가 여기까지 와서 어딜 가겠어요? 사방이 주택가인데.”

아니, ! 말 한 마디도 없이 오는 사람이 어딨냐?”

 

카마사키가 황당해하던 말던 후타쿠치는 다리 아프다며 카마사키를 재촉했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지만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카마사키는 할 수 없이 후타쿠치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카마사키의 뒤를 따라왔다. 카마사키로서는 도통 왜 이러는지 감이 안 잡혀서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후타쿠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카마사키의 말을 무시했다.

 

다행히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안을 둘러보던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사키 선배다운 집이네요.”

그게 무슨 뜻이냐?”

별 뜻 없어요.”

 

어깨를 으쓱하곤 후타쿠치는 집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느꼈는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낯선 공간에 들어왔음에도 마치 제 집처럼 당당하게 활보하며 돌아 다녔다. 그러다 거실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카마사키의 중학생 때 사진을 발견하곤 풉하고 웃으며 진짜 촌스러웠네요라고 말해 카마사키의 신경을 건드렸다.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진이었는데 솔직히 카마사키조차 제정신으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한 사진이었다. 중학교 때 배구 경기에서 얼굴에 공을 맞고 코피를 흘리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현상했을 당시 버린다고 찢어버리겠다고 안간힘을 썼었는데 결국 엄마한테 지고 말았다. 그 때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그런 사진을 후배한테, 그것도 후타쿠치한테 보이다니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사진 놔두면 부끄럽지도 않아요? 완전 흑역산데.”

너한테 보이다니 죽고 싶네.”

그래요? 그나저나 선배 방은 어디에요?”

, 2층 끝 쪽 방인데 들어가 있어라. 뭐 마실 거라도 챙겨서 올라갈게.”

 

카마사키는 은근슬쩍 액자를 뒤집어놓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카마사키의 얼굴이며 귀와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얼굴에 후타쿠치는 오랜만에 유쾌했다. 배고프니까 뭐 맛있는 거라도 갖고 오라고 말하고는 후타쿠치는 피식거리며 카마사키의 방으로 갔다.

 



(5422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알파의 연애

 

 

우성 알파 후타쿠치 x 베타 카마사키

 

 

 

01.

 

지잉, 하고 라인이 도착했다는 진동음이 울렸다. 이제 막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려던 카마사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였다. 화면이 켜진 핸드폰에 익숙한 이름으로부터 메시지가 떠 있었다.

 

[끝났어요?]

 

답장을 하기도 전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체육관 근처로 와요.]

 

먼저 질문한 주제에 연달아 일방적인 통보를 내린 메시지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지가 키우는 개도 아니고, 오라 마라야. 젠장. 애초에 방과 후에 함께 하교하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괜히 마음이 그랬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카마사키는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다들 분주하게 하교하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들이 오고 갔다. 어디 가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마사키가 체육관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다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의외였다.

 

멀리서 보이는 두 명의 실루엣에 카마사키는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은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복도나 식당 등에서 오고 가며 마주쳤을 지도 모르지만 카마사키에게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우성 오메가 중 한 사람이다. 귀하게 자란 티가 곳곳에서 풍기는 그녀는 2학년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나서 알파고, 오메가고, 베타고 남자건 여자건 한 번쯤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왜 방과 후에 체육관 건물 뒤에 서 있는지, 모르고 싶었지만 예상이 갔다. 카마사키는 두 사람을 보다 조용히 몸을 숨겼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어 일일이 세어 봤지만 그것도 열 손가락을 넘어가자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만뒀다. 스스로 목격한 것만 해도 그 정도니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하면 그 수가 상당할 터였다. 잠시 상상해보다 절로 밀려오는 우울함에 카마사키는 한숨을 삼켰다. 애초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울해지는 기분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은 쌀쌀해진 날씨에 가방에서 저지를 꺼내 입던 카마사키를 향해 기다렸던 사람이 다가왔다. 방금 전에 고백 받은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왔으면 연락을 해야죠. 한참 기다렸네.”

바빠 보여서.”

 

카마사키의 말에 후타쿠치는 아, 봤어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예쁜 여자에, 우성 오메가에게 고백 받았음에도 후타쿠치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의 남자라면 성질에 상관없이, 짝이 있더라도 한 번쯤 흔들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고백조차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는 신기했다. 뭘까?

 

그건 그렇고, 오늘 영화 보러 가기로 했던 거 안 잊었죠? 빨리 가요.”

 

카마사키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을 확인하며 재빠르게 앞서가던 후타쿠치가 손짓하며 재촉했다.

 

뭘까? 앞서가는 후타쿠치의 등을 보다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왜 일까? 아무리 내가 먼저 고백했고, 사귀기 시작한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카마사키는 여전히 후타쿠치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굼벵이에요? 영화 시간 놓치면 안 된다니까!”

, ! 간다고, !”

 

계속되는 후타쿠치의 재촉에 결국 카마사키가 성큼 다가갔다. 어플을 통해 시간표를 확인하던 후타쿠치가 앞으로 3분 뒤에 버스가 도착한다는 말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막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에 맞춰 버스가 왔다. 하교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버스는 자리가 널널했고 두 사람은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핸드폰으로 영화 예고편을 확인하고, 각종 후기를 보다보니 어느새 영화관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둘이서 이 영화관에 온 것도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었다. 처음에 어색하게 앉아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자연스럽게 옆에 나란히 앉고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영 적응이 안 되지만 영화를 보다 가끔 손도 잡는다. 믿기지 않을 일이다.

 

 

후타쿠치와 카마사키는 사귀고 있다. 놀랍게도 오메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베타에 평범한 남자인 자신과 후타쿠치가 벌써 사귄 지 3개월이 되었다. 매일 투닥거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두 사람은 잘 지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실은 카마사키에게는 오래된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고백했기로서니, 얘는 왜 나랑 사귀는 거지? 후타쿠치가 왜 자신과 사귀는 지 알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후타쿠치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카마사키가 2학년이 되고, 후타쿠치가 배구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호감이 있었다. 카마사키는 그 때까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평범한 베타였기에 더욱 같은 동성의 남자를 좋아하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기본적으로 예쁘고 귀여운 여자가 지나갈 때면 여타 평범한 남자들과 비슷하게 저절로 눈길이 갔고, 비록 소꿉장난 수준이었지만 중학교 때는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후타쿠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외모가 잘생겼다는 점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그 때는 그냥 자연스레 눈길이 갔고 그러다보니 마음도 갔다. 처음엔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후타쿠치는 모두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으니까.

 

후타쿠치는 입학했을 때부터 배구부뿐만 아니라 교내에서도 유명했다. 베타는 느낄 수 없지만 오메가들의 말에 의하면 후타쿠치의 페로몬은 냄새를 맡기만 해도 성적인 쾌감이 오를 정도라고 했고 알파들은 주변에 있기만 해도 위축되는 기분이 든다며 질색했다. 학기 초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몇몇 오메가들이 후타쿠치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결국 보다 못한 학교 측에서 후타쿠치에게 페로몬 억제제를 복용하기를 권하는 일도 있었다. 억제제를 복용한 뒤로부터는 그런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드물어지긴 했으나 후타쿠치에게는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백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우성 알파라는 점을 제외해도 후타쿠치는 모두에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단순히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었다.

 

그렇기에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가 단순히 후타쿠치가 눈에 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태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외모가 가장 빼어나진 않더라도 그 특유의 분위기라던가, 남들이 말하는 우성 형질의 기운 때문이라 생각했다. 정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특별하다는 첫인상에 호감을 가졌던 것도 잠시뿐이었고 후타쿠치가 배구부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나고 난 뒤 카마사키는 절실히 깨달았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이었기 때문일까,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하고 잘났다는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후타쿠치는 매사에 제멋대로인 점도 있었고 남을 놀리길 좋아했다. 선배들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하고, 오히려 3학년들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 하마터면 큰 싸움이 일어 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카마사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갖고 트집을 잡거나 놀리기를 좋아했다.

 

, 카마사키 씨. 제발.”

?”

근육 자랑하려고 소매 그렇게 걷는 겁니까? 웃기잖아요.”

. 아니거든! 땀이 많이 나서 걷은 거야.”

아직 여름 아니거든요?”

더위를 많이 탄다고!”

 

카마사키가 억울하다는 듯이 해명했지만 후타쿠치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카마사키는 재차 열이 솟았다.

 

그래요? ...”

, 진짜. , 근육 자랑 같은 거 아니라니까. 소매가 길어서 덥기도 하고, 블로킹할 때 불편해서 그런 거라고.”

누가 뭐래요? 왜 해명을 하고 그래요. 누가 보면 제가 카마사키 씨한테 뭐라고 나무란 사람처럼 보이겠어요.”

네가 뭐라고 했잖아!”

 

일방적으로 후타쿠치가 시비를 걸면 카마사키는 무시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나중에는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울컥해서 반박하면 후타쿠치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뭐라고 했나요?’, ‘별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나?’ 같은 말을 했고, 그 얼굴에 열이 받은 카마사키가 욱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치한 말장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언제나 보다 못한 모니와가 아오네를 시켜 말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카마사키가 뭔가를 할 때는 물론이고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후타쿠치는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 왔다. 처음엔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장난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일부러 찾아와 말을 거는 것에 초반에는 이상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열 받게 하는 말을 해도 다 받아주고 웃으며 넘겼었다. 그러나 점점 횟수가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지는 행동에 카마사키는 결국 후타쿠치를 그냥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다 받아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카마사키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인내심이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후타쿠치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로 비춰졌고, 그런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를 몇몇 3학년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처음 배구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후타쿠치를 고깝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몇몇 알파들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비뚤어진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하루는 3학년 알파 선배들 중 한 명이 카마사키를 불러냈다.

 

카마사키. 너 후타쿠치 너무 받아주는 것 아니냐?”

?”

아무리 그래도 네가 선배인데, 그렇게 선배한테 막 대하는 행동은 아니지. 우성 알파라고 베타한테 함부로 그러는 걸로밖에 안 보이고.”

아뇨, 걔가 딱히 그러려고 그런 건,”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말을 끊었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멍청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네가 베타라서 모르나본데, 우성은 원래 열성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깔보는 새끼들이야.”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들어라, ?”

 

그리곤 그는 카마사키에게 욱했던 것이 신경 쓰였는지, 아니면 나이 어린 후배를 뒷담화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갔다. 딱히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3학년 알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베타인 카마사키는 애초에 우성과 열성의 형질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지만 알파와 오메가들은 달랐다. 나중에 스치듯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내니 알파인 모니와는 질색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모르겠지만 후타쿠치는 좀 그렇지. 내가 딱히 열성은 아닌데도 후타쿠치가 억제제 깜빡하고 안 먹고 온 날에는 다가가기가 힘들더라.”

그러냐?”

그냥 그건 본능적인거야. 자연스럽게 나쁜 마음이 드는 거라고.”

그래도 너도 알고 있잖아. 걔가 좀 재수 없게 말하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닌 거.”

나도 알지. 근데 나나 너처럼 다른 선배들이나 동기들, 후배들도 후타쿠치를 이해해주지는 않는 게 문제라는거야.”

“...그런가?”

 

모니와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딱히 그 선배들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후타쿠치한테 적당히 선을 그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적당히 받아주기 힘든데.”

너가 아니면 걔를 누가 받아줘.”

 

네가 받아주면 어떠냐는 말에 모니와의 얼굴이 하얘졌다. 나쁜 애가 아닌걸 알지만 친해지긴 힘들다는 말에 카마사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카마사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오메가나 알파였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후타쿠치를 멀리했을지 모른다. 안 그래도 삐뚤어진 놈인데 그 성질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하고 생각하니 후타쿠치의 처지가 좀 불쌍해졌다. 동시에 헛웃음이 났다. 우성 알파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을 거다.

 

고민하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와 적정한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후타쿠치 성격 상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말하면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했고, 자기 선에서 조절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희미하게 달라진 카마사키의 태도에 후타쿠치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잘못 먹었어요?”

“... 아니거든. 마침 잘 됐다.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뭐에요.”

 

막상 단도직입적으로 거리를 두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일단 말을 꺼냈으니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의 눈빛에 자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말해요. 저 바빠요.”

연습 다 끝났는데 뭐가 바쁘냐. 아니,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카마사키는 큼큼, 목을 다듬고 괜히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후타쿠치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에 카마사키가 말했다.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날 선배답게 대해줬으면 해.”

예에?”

 

카마사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묘해지는 표정에 카마사키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 살 차이이긴 해도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고... , 점점 네가 날 막 대하는 것 같거든.”

... 그래서요?”

그러니까 선후배 사이니까 조금의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 그래요? 대수롭지 않은 듯 한 후타쿠치의 대답에 카마사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저 특유의 말을 늘이는 말투. 알게 된 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후타쿠치의 버릇 중 하나였다. 후타쿠치는 종종 마음에 안 내키는 대답을 해야 할 때나, 사이가 나쁜 선배들 앞에서 저런 말투를 썼다.

 

그러니까 카마사키 선배말은,”

...”

고작 한 살 많지만 선배취급 받고 싶다?”

, 말을 해도...”

이제 와서?”

 

받아줄 땐 언제고 어이없네. 후타쿠치는 대놓고 카마사키를 비아냥거렸다. 카마사키는 자신의 말에 후타쿠치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후타쿠치는 이상하게 자신에게만 막 대했지 다른 애들이나 선배들한테는 기본적인 선배 취급을 해 주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아주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기에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피식거리며 헛웃음을 짓던 후타쿠치의 얼굴에 점점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자 카마사키는 뭐가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실수했구나 싶었다.

 

저기 후타쿠치,”

아 좋아요.”

?”

 

후타쿠치는 건방지고 가끔 재수 없는 말을 해도, 나쁜 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툭툭 시비를 거는 일에 욱하면서도 탁구공처럼 받아치는 말장난이 유치하고 재밌기도 했다. 가끔 서로 말도 안 되는 말이 나오면 서로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면서 장난치기도 했다. 남들은 후타쿠치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다고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후타쿠치가 봐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좋다고요. 이제부터 카마사키 선배, 선배 취급 해드릴게요.”

후타쿠치. 내 말은...”

거리를 두자고요?”

, 잠깐 내 말을,”

 

카마사키는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석고상이 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꼼짝도 못하고 후타쿠치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후타쿠치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후타쿠치가 기계적인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나는...”

카마사키 선배.”

 

후타쿠치는 그 말을 하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두고 뒤돌아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에 아까 보았던 표정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분노가 느껴졌다. 멀어지는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차마 숨도 쉬지 못하고 바라보던 카마사키가 숨을 토했다. 뭔가 잘못 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7812자)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