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He will be loved.

 

 

 

정말 그럴까?’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는 게, 정말로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한 방 안이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악몽을 꾸느라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던 숨이 목구멍을 찢고 나오듯 터져 나왔다. 숨을 쉬는데도 폐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불편하게 들썩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눈을 감았다. 스스로 예민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 날의 일만큼은 보쿠토에게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가슴에 남았다. 평소와 같은 날을 지내다가도 가끔씩, 불현듯 다가와 보쿠토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하아... ...”

 

그리고 꿈을 꾼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재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곤 했다. 보쿠토는 감은 눈 위를 양 손으로 누르며 그대로 침대에 힘없이 쓰러졌다. 땀이 베인 이마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닿아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여전히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여린 목소리는 무정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어떤 평범한 하루에,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함께 동네 골목을 거닐었었다. 어느새 노을이 져 가는 하늘에 하나 둘 씩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다. 요 최근 들어 보쿠토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다.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고, 특히나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 마음에도 아이가 너무 좋아서 항상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돌변한 아이의 태도와, 잔인하게 쏘아 붙이는 날 선 말은 그 때의 어린 보쿠토가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밤에는 온 몸이 쑤셔 죽을 만큼 아팠고, 끙끙대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뒤 정신을 차렸을 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보쿠토는 아픈 와중에도 계속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어째서 그런 말을 했냐고 묻고 싶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이가 이사를 가고 동네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고 했다. 아이가 어디로 갔냐는 물음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그대로 보쿠토의 가슴에 박혔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일까, 보쿠토는 그 뒤에도 한동안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가슴통증을 느끼거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렇게 몇 번 아프고 난 뒤에야 보쿠토는 아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때가 언제인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 학교 가기 싫다...”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보쿠토는 꾹꾹 마사지하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이 가시길 기다렸다. 어두웠던 방안이 창밖의 햇빛으로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보쿠토는 침대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방 너머로 보쿠토의 엄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비척거리며 일어날 수 있었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보쿠토가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사립 후쿠로다니 학원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다. 1년에 천 만 원이 넘는 학비에도 매년 입시생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부자 학교라 불리는 만큼 교내 시설이 대학교 시설에 견줄 만큼 훌륭했고, 전국 각지에서 스카우트 해 온 선생님들과 체계적으로 잡힌 교육 시스템이 유명했다. 졸업생들 중에서는 해외, 국내 유수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부터 언론계, 연예계, 그리고 스포츠계 등 여러 방면에서 전국적으로 활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도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후쿠로다니 유학을 가기 위해 몰려 왔고, 아카아시 케이지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아카아시 스스로는 딱히 터무니없을 만큼 비싼 학비를 들여서까지 후쿠로다니 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일찍이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카아시를 키운 그녀는 아카아시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원했다. 아빠가 없어도 죽은 남편의 몫까지 사랑해주겠다며 그녀는 아카아시를 보살피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아카아시는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나중에야 그게 부족하다 못해 과분한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없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아카아시는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랑받았다. 또래 애들보다 일찍 철이 든 아카아시는 엄마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돈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몇 번 말해봤지만 언제나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기 때문도 있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가족인 아들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심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통 큰 씀씀이를 어쩔 수 없이 다 받아 주었지만 아카아시도 비싼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려는 엄마를 이번만큼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후쿠로다니 학원 설명회를 듣고 왔다며 테이블에 책자를 펴 놓고 설명해주었지만 아카아시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에 저녁을 먹으며 엄마가 스치듯 설명회에 갈까, 하고 얘기를 꺼냈던 것을 잊지 않고 아카아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카아시가 보기에도 후쿠로다니 학원은 훌륭한 학교임에 틀림없었다. 살인적일 만큼 비싼 학비가 아니라면 아카아시가 먼저 얘기를 꺼냈을 지도 모를 만큼 욕심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학비에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진학하고 싶지 않았기에 책자를 천천히 살펴보는 엄마에게 말했다. 주변에 좋은 공립학교가 충분히 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진학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그녀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아카아시의 말에 납득하는 듯 했던 그녀는 결국 아카아시 몰래 후쿠로다니 학원 입시시험에 등록하고는 시험 보기 일주일 전에야 아카아시에게 고백했다. 벙찐 아카아시를 향해 푸하하, 크게 웃으며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아카아시에게 시험만이라도 보라고 했고, 이후 합격한 아카아시에게 기왕 합격했으니 진학하라며 멋대로 교복을 맞춰왔다. 그렇게 아카아시는 얼떨결에 후쿠로다니 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매스컴을 자주 탄 학교인 만큼 교내 시설은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교실이 있는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에는 양 쪽으로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있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꽃잎이 떨어졌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머리와 어깨에, 가방 등에 꽃잎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해 아름다웠지만 아카아시는 괜히 곱게 보지 못했다. 하얗고 예쁜 건물이나 하늘하늘하게 내리는 벚꽃 비가 그만큼 돈을 들인 결과 같았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며 가방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나가며 건물로 들어섰다. 다들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신발을 갈아 신는데 사방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아카아시처럼 신입생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발그레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에 그들의 기대와 설렘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시끄러운 복도를 지나 마찬가지로 어수선한 교실에 들어서 아카아시는 대충 빈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고교데뷔? 교실을 둘러보니 벌써 각자 인사를 했는지 둘, 셋씩 모여 떠들고 있었다. 아니면, 아카아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아카아시 혼자만 이 학교에 진학한 것과 달리 서로 이전부터 일면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감정을 숨기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모든 것이 낯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카아시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고, 점점 학교에 적응해갔다. 멋대로 일을 벌인 엄마에게 아카아시 나름대로 소리 없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스스로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아카아시도 엄마의 결정에 쉽게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을 그대로 넘기면 그 다음에도 엄마에게 휘둘릴 게 뻔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엄마가 시무룩한 얼굴로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쭈물하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지... 아직 화났니?”

“......아니요. 별로...”

학교 다니는 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알아. 하지만, 엄마는 항상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었어.”

 

아카아시 또한 충분히 알고 있다.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굳이 거짓말을 해 가고 고집을 피우면서까지 제멋대로 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영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제가 별 수 있는가. 어차피 다니기로 한 학교에 계속 불만을 가져 봤자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뿐더러 엄마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아카아시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서 도시락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번만 넘어가 드릴 거예요. 다음엔 절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케이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웃어주고 아카아시는 문을 열었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아카아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제멋대로야, 우리 엄마는.

 

새 학기가 시작되며 후쿠로다니 학원에는 동아리며 부활동의 신입을 받는 일로 분주해졌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앞 운동장에 마련된 부스에 각종 스포츠 부활동과 게임, 소설, 애니메이션 등등 취미 동아리를 홍보하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신입생들로 북적였다. 후쿠로다니 학원은 딱히 부활동이 필수는 아니었지만 일단 가입하면 재학 중인 선배들과 졸업한 선배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다들 하나쯤은 가입하는 추세였다.

 

아카아시 또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매점에 들렀다가 구경하자는 말에 덩달아 부스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홍보 멘트가 쏟아졌다.

 

신입생, 게임 좋아해? 방과 후에 게임 잔뜩 할 수 있어~”

너 운동 잘 해 보이는데, 농구부 어떠니?”

문예창작 동아리에 드세요! OO 문학대상을 받으신 선배님들과 만나는 자리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며 부스를 구경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카아시는 딱히 동아리나 부활동에 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꽤 전력을 다하면서까지 배구부를 들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와서까지 배구를 할 마음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중학교 때 배구부 들었다고 했지? 배구부도 가 볼래? 후쿠로다니 배구부 완전 강호라고 소문났어.”

, 난 별로...”

배구부 저기 있다! , 완전 사람 많아.”

 

사양하는 아카아시를 끌고 친구들이 배구부 부스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멀리서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자 배구부와 남자 배구부 부스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어느 한 쪽도 입부 신청서를 내고 있는 줄이 짧지 않았다.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서 온 아카아시는 대충 구경하는 척 하다 돌아갈 셈으로 부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줄을 설 정도로 강호인가, 아카아시는 배구부 홍보 포스터를 하나 집었다.

 

후쿠로다니는 거의 매번 전국 진출 하는 모양이더라. 전국 대회에서도 꽤 손꼽혀.”

저번 봄고 때는 완전 난리가 아니었지? 대형 신인 출현이라나, 뭐라나. 작년에 엄청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날아다녔다더라.”

나도 들어 봤는데... 이름이 뭐더라? 무슨 토끼 어쩌구였는데...”

 

토끼 어쩌구? 이름에 토끼()가 들어가나 보지? 아카아시는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작년 인터하이와 봄고에 전국 진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연혁들을 보니 듣던 대로 꽤 잘 나가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가 포스터 뒤편에도 글이 있을까 뒤집어보는데 등 너머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고, 회색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머리를 잔뜩 올려 세운 남자가 양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커다란 금안이 아카아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씨익 웃어보였다.

 

! 배구부 들어오려고? 그렇게 포스터만 보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신청서 작성해!”

, 아뇨. 전 그냥 구경만...”

어라? 아카아시 중학교 때 배구부였다며. 고등학교에서는 안하는 거야?”

뭐야, 중학교 때 배구 했었어? 그럼 계속 해야지. , 이리 와. 신청서는 저기서 작성하면 돼.”

 

아카아시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아카아시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끌고 갔다. 얼른 얼른, 하고 신청서를 작성하는 테이블로 이끌더니 대뜸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 신청서 여기.”

전 배구부 안 들어갈 건데요.”

 

아카아시는 제게로 내밀어진 종이와 펜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카아시의 말에 남자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카아시에게 질문했다.

 

? 중학교 때 배구 했다면서 왜 계속 안하는 건데?”

 

이런 질문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는 게 굉장히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이 사람은?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자신이 부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배구를 그만둔 거였다면 어쩌려고. 아카아시는 언뜻 어린아이의 얼굴과 비슷한 순진한 얼굴을 보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사정이 있습니다.”

배구가 싫어졌어?”

“... 그건, 아니지만요. 각자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까요.”

뭐야. 배구가 싫어진 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있는 거네?”

 

아까부터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본 얼굴이 자신의 일인 것 마냥 해맑게 웃고 있어서 아카아시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던 종이를 뒤집어 손바닥에 대고 뭔가를 끼적였다.

 

여기, 오늘 수업 끝나고 배구부 견학할 수 있으니까 구경하러 와.”

? 전 괜찮...”

꼭 와!”

 

남자는 사양하는 아카아시에게 억지로 종이를 쥐게 하곤 근처에 몰려있는 또 다른 신입생들에게 달려갔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라며 여기저기에 말을 거는 모습이 신이 나 보였다. 아카아시가 종이를 다시 넘겨주려고 다가가는데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 가자!”

, .”

 

결국 구겨진 종이를 돌려주지 못한 채 아카아시는 교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 체육관 오후 4]

 

교실에 돌아와 사정없이 구겨진 살살 펴보니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손바닥에 대고 쓰는 바람에 글씨는 삐치고 볼펜에 박혀 이곳저곳 구멍 나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분명 옆에 테이블이 있었는데... 아카아시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빤히 쳐다보다 반으로 접고 접어 그대로 책상서랍에 넣었다.

 

배구는 좋아했다. 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든 배구부에서 배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확실히 재미를 느꼈고, 주변에서 잘한다며 칭찬을 듣기도 했다. 잘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으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스포츠 부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중, 고등학생이 그러하듯이 아카아시 또한 언젠가는 지게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에 조금 회의감을 느꼈다. 이길 땐 뛸 듯이 좋지만 질 때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점점 좋아질수록 나중엔 괴로운 감정이 커져만 갔다. 중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 지고 말았을 때는 그 허무함이 극에 달했었다. 재밌어서 시작한 건데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생각했다.

 

역시 배구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 비싼 돈 들여 좋은 학교까지 왔는데 배구에 시간 낭비할 수는 없겠지. 좋은 학교인 만큼 여타 학교에 다 있는 동아리, 부활동들은 물론이고 좀 더 실용적인 동아리도 있었으니까. 역시 그런 동아리를 드는 게 나을 거다. 아카아시는 서랍에 집어넣은 종이를 다시 한 번 깊숙이 밀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듯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는 몇 번이고 종이를 밀어냈다.

 

 

이미 체육관은 그 유명하다는 배구부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멋있다, 신기하다는 말소리와 코트에 밀린 끼익끼익 거리는 발소리,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익숙한 소리를 따라 아카아시는 인파를 비집고 슬며시 체육관에 들어섰다. 환한 조명아래 코트가 반짝이는 것처럼 빛났다. 트레이닝을 하는 사람들과, 코트를 누비며 연습경기를 하는 사람들로 체육관이 분주했다. 아카아시는 커다란 체육관에 한 번 놀랐고, 강호라고 불리는 만큼 부원들이 많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남자가 높이 날아올라 스파이크를 날리는 모습에 가장 놀랐다. 남자가 내리친 공이 바닥을 맞고 크게 튀어 올랐다. 주변에서 우와~! 하는 함성소리가 났고 누군가는 최강 보쿠토라며 소리쳤다.

 

헤이헤이헤이~!”

 

저 사람이 아까 말했던 보쿠토 코타로인가. 아카아시는 점심시간에 대뜸 신청서를 내밀고 배구 안하냐며 물었던 보쿠토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양 손을 번쩍 들고 코트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보쿠토를 처음 보는 신입생들은 웃기다면서 피식거렸고 2, 3학년들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보쿠토는 코트를 누비며 꽤 수준 높은 블록을 피하고, 뚫으며 점수를 따냈다. 보쿠토는 1점을 땄으면서 10점을 따 낸 것처럼 유난스럽게 행동했지만, 그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보쿠토가 배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리고 역시 강호답게 한 사람의 에이스만으로 팀이 이끌어지는 게 아니었다. 존재감이 확실한 보쿠토를 제외하고도 연습 게임에 참여하는 부원들 모두가 실력이 출중했다. 리시브며, 스파이크며 서브까지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후쿠로다니 배구부가 특별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보다 같은 팀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부원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보쿠토의 존재였다. ‘그냥잘하는 에이스가 아니라 뭔가특별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시종일관 웃음을 지우지 않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근데 저 사람 되게 웃긴 게, 가끔 경기하다가 엄청 시무룩해진다더라.”

시무룩해진다고?”

. 그게 엄청 심해서 작년 봄고에서도 큰일 날 뻔 했데. 잘하긴 하는데... 가끔 쓸모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에이, 설마. 저렇게 팔팔 날아다니는 사람이?”

나도 주변에서 들은 얘기긴 한데... 아닌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던데, 확실하지 않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에 아카아시는 헛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저 사람이 시무룩해진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 아카아시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세트포인트가 되었다. 점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져 있기에 다들 조금쯤은 안심하고 보고 있는데, 서브 차례였던 보쿠토의 공이 네트에 맞아 떨어졌다.

 

, 아깝다.”

조금만 더 높았으면 됐을 텐데.”

그래도 1점만 더 따면 되니까.”

 

보쿠토 파이팅, 돈마이라며 여기저기서 1학년들이 보쿠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면 그에 답하듯 손을 흔들어 보이던 보쿠토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쥐락펴락하기만 했다. 가끔씩 이상하다는 듯이 보쿠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일이지?”

 

아카아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코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런 보쿠토를 보던 한 선배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다른 선배들에게 손짓했다. 허공을 몇 번 가르는 손짓에 보쿠토를 제외한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 포인트이니 만큼 마지막은 보쿠토가 화려하게 장식하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경기는 조금 싱겁게 끝나버렸다. 얼른 끝내버리자고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보쿠토 쪽의 선배들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다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서브를 실패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조용한 보쿠토 쪽을 쳐다보다, 묘하게 안심한 얼굴의 다른 선배들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비단 아카아시 뿐만 아니라 경기를 쭉 지켜보던 1학년들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추가적으로 입부 신청서를 쓸 수 있다며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선배들이 1학년들을 이끌었다. 연습시합을 보던 내내 대단하다, 멋있다며 말을 남발하던 몇몇 1학년들이 신청서를 쓰러 몰려갔다. 아카아시는 아직 경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빈 코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역시 강호교는 다르다고 해야 하나, 코트 위에 있던 선배들 모두가 멋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실력이 차원이 달랐다. 서브도, 스파이크도, 리시브나 세터의 토스까지 몇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보쿠토란 사람의 존재감이란.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여느 또래 애들처럼 연예인과 같은 특정 한 사람에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봐도 예쁘다, 노래를 잘하네, 춤을 잘 추네, 와 같은 일반적인 감상 외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거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든가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든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노력해도 닿을 수 있고 없고 그런 차원에 있어서 연예인과 보쿠토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배구를 하기에 저렇게 배구를 즐기면서 할 수 있지? 저 사람과 같이 배구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가슴이 복받쳐오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저 사람과 배구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배구부에 들어감으로써 예상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아카아시는 그러한 생각들을 갈무리해버렸다. 여전히 손바닥에 뭐가 묻은 사람처럼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보쿠토를 힐끔 보다 아카아시는 걸음을 돌렸다.

 

그냥 단순하게, 다시 배구를 해보고 싶었다.

 

 

 

Posted by 005500 :

[오이이와] 흩어진 꿈 6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했어도 아침 해는 뜬다. 전날 밤을 설친 탓인지 반쯤 친 커텐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아침 연습을 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며칠 새 몸이 게을러진 기분이다. 찌뿌둥하고, 일어나기 싫다. 학교는 더더욱 가기 싫었다. 얼마 후에 보아야 할 오이카와의 얼굴이 무서울 뿐이다.


결석할까.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 봤다. 몽롱한 정신에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어제 오이카와와 절교했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합의 하에 끝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이 그만두면 그 관계는 이미 운명을 다 한거나 마찬가지다. 오이카와는 어제,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오이카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났으니, 어느 하나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는 오이카와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는 언제나 모 아니면 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고 싶기도 하고, 좋아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고백하고 싶기도 하고, 고백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하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기 힘들어서 그저 흐르는 대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고백하고 싶지 않았지만 고백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결정이었지만,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나와 오이카와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변하는 거다. 내가 친구라는 관계를 버렸으니, 남은 것은 오이카와의 선택뿐이다. 오이카와는 과연 뭐라고 할까.


오이카와네 집과는 옆집이라 거의 항상 같이 학교에 가지만, 딱히 시간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집에서 나온 사람이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한다. 어쩔 땐 일찍 가기도 했고, 어쩔 땐 지각도 했지만 늘 함께 했다. 아침 7시 반, 아직 벨이 울리지 않았다. 7시 35분이 되면 지각을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출발해야 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별 의미 없는 시간은 기다려도 잘 흐르지 않았다. 1분이 1시간과 같이 느껴질 때쯤에 벨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오이카와는 없었다. 대신 오이카와네 엄마가 있었고, 어머니 계시냐고 물었다.


-어머, 근데 하지메 아직 학교 안 갔니? 벌써 간 줄 알았는데.

-이제 가려구요.

-토오루는 일찍이 나갔던데. 별일이네, 같이 안가고.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오이카와네 엄마의 말에 적당히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이카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친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해도 완전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오이카와가 나를 잡고 설명해보라고 다그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거나 최소한의 이해는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닥친 상황은 아주 작게 피어오르던 기대를 후, 하고 날려 보냈다. 언제나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하다. 먼저 내쳐버린 주제에, 뭘 기대했던 것인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일에 일희일비하다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늘 타던 버스가 오는 시간을 빗겨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도착해 버스를 아직 타지 못한 것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앞을 내버려두고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여서, 말을 걸지 않고 그 뒤에 줄을 섰다. 오늘따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거리에는 둘만이 우두커니 존재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분을 기다렸을까, 버스가 도착했다. 정류장과 마찬가지로 버스 안에도 사람이 별로 없어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먼저 버스에 탄 오이카와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오이카와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2인석 자리에 앉았다. 아는 척 하지 않는다는 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15분. 평소와 다름없는 거리의 풍경을 보다가 옆자리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표정한 표정의 오이카와는 성질을 내듯 옆자리에 놓여 있던 내 가방을 바닥에 툭, 하고 던지듯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다리를 떨며 앞을 보고 있었고, 보란 듯이 입을 내미는 모습이 평소와 같았다. 표정부터 행동까지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한껏 내보이고 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학교에 다가올수록 오이카와의 발은 정도가 심해지며 달달 떨렸고 입술은 나올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나왔다. ‘다음은 아오바죠사이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자 오이카와는 떨던 발을 멈추고 입도 제대로 했다. 그리곤 내 쪽으로 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피할 수도 없이 정면에 자리한 오이카와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어린 애 같은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표정이 있지도 않았다. 오이카와는 버스가 멈추기 직전까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와쨩은 어떻게 아무 말도 없어?

-......

-내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왜 말이 없어...


버스가 멈춤과 동시에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제일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뒤늦게 내려온 내 앞에 오이카와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방과 후에, 집에 같이 가.

-......어.

-맛키쨩하고 같이는 안 돼. 나하고만 같이 가는 거니까.


그래, 라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교문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던 나는 그런 오이카와의 등을 얼마동안 보고 있다가 뒤늦게 발을 떼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거에 안심해야 하는 걸까? 아는 척을 해줘서 다행이라고, 잠깐이지만 투정 부리듯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는 것에 기뻐했어야 하는 거였나.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오이카와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날이 너무 많아서 나는 판단을 내리길 포기했다. 그저 사실 그대로, 그랬구나 하고 기억에 남겨둘 뿐이다.


어제와 같이 일상적인 하루가 흘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하나마키가 잠깐 찾아 왔지만 대화를 나눌 기력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어제의 일로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말없이 옆에서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다가 반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하나마키가 어제 거짓말 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뭐 하러 오이카와한테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해서 이 사단이 나게 했냐고 나무라려다가 그만 뒀다. 하나 하나 따지기엔, 방과 후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마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와이즈미. 같이 가자.

-아, 오늘은 안돼.


수업이 다 끝나고 하나마키가 다시 찾아 왔다. 어지간히 나를 걱정하는 듯 해보여서 어제의 일을 얘기해줄까 하다, 반 뒷문에 서 있는 오이카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뒷문에 계속 서서 하나마키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가려던 애들이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의 분위기에 발을 돌려 앞문으로 발을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랑 할 말이 있어서. 미안, 내일 보자.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이카와 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앞문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말도 없고 미동 없이 서 있던 오이카와에게 다가가니 불량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렸다. 평소였다면 무슨 재수 없는 행동이라고 타박할 법 했지만 조용히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장난치기 어려웠다. 먼저 발을 떼는 오이카와를 따라 걸었다. 모두가 바쁘게 하교하는 복도는 어수선했다. 복도를 지나쳐 신발장으로 가는 내내 마주치는 배구부 후배라던가, 같은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나와 인사하면서도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마도 같이 하교하는 길이 아니었으면 나를 붙잡아 오이카와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엔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고, 나 또한 오이카와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아침의 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결과든 오이카와와 나의 관계가 변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부디, 최악의 상황은 피하길 바랄 뿐이다.


버스를 타고,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잠깐 얘기 좀 하자며 근처 공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서로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원은 어렸을 적부터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이다. 여기서 함께 탐험 놀이도 했고, 배구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좀처럼 온 적이 없지만 잠깐 안 왔다고 낯설게 느껴질 만큼은 아니었다. 원래도 크기가 큰 공원은 아니었기에 사람이 별로 없지만, 쌀쌀한 날씨 탓에 공원 안에는 운동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근처 나무 벤치에 앉았다. 툭툭,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


벤치에 앉은 후, 잠시 조용하던 오이카와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어제 이와쨩이 했던 말 말인데...

-어.

-생각해봤는데, 이와쨩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별로,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정말?

-...응.


나는 거짓말을 했다.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날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중학교 3학년 봄이었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학교의 모두가 들떠 있었다. 학교로 들어가는 길에 줄지어져 있는 벚꽃나무들이 새하얀 꽃을 피워내고, 바람에 꽃잎이 흩날려 거리가 하얗게 물드는 봄이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것 같은 감각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움직이고 주위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3월의 어느 날, 매일 보는 얼굴인데 그날따라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날, 다른 학교와의 연습 시합에서 오이카와가 올려준 토스를 내가 성공시키고 마침내 이겼을 때, 오이카와는 성공했다! 라는 표정으로 나를 가볍게 안았다. 어깨에 둘러진 팔은 배구를 하느라 땀에 축축해져 있었고 나 또한 땀을 흘려 헉헉 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쿵쿵,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배구를 하느라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인지 오이카와 때문인지 헷갈렸다. 마주 닿은 몸에 오이카와의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 나처럼 크게 뛰는 심장소리가 귀에 박혔다. 오이카와가 멀어지고, 천천히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3학년이 되고 첫 시합에 이겨 흥분에 겨워하는 부원들과 오이카와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모두가 들떠있는 가운데 내 귓가에 고동소리가 맴돌았다. 쿵쿵, 여전히 가슴이 뛰었고 어수선한 주변에서 오이카와만이 시선에 꽂혔다. 나는 불현듯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오이카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오래 간직해온 마음을 오이카와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서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에 꽤 오랫동안 우정이 아닌 감정이 섞여 왔다는 것에 대한 오이카와의 반응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적당하게 대답한 내 말에 오이카와는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어 보였다.


-생각해 봤는데, 이와쨩이 나를 좋아한다는거...

-어.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걸 착각한 거 아냐?

-...뭐?


오이카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임을 알게 했다. 나는 오이카와가 어제의 고백을 오이카와의 상식선에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다. 몇 시간 사이에 몇 년 동안 쌓아 온 마음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울컥 분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양 손을 꼼지락대었다. 한동안 말을 고르는 듯 조용하더니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는데, 이와쨩이 나를 연애 상대로 봤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

-어... 뭐, 오이카와상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하하.

-......

-나를 친구로서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 마음을 연애감정이라고 착각한게 아닐까?

-......


오이카와의 말은 나 또한 몇 년 동안의 짝사랑을 하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내가 오이카와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인지 연애 상대로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차츰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단정 짓게 되면서 내 감정이 친한 친구에 대한, 남들보다 조금 더 밀도 있는 애정이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가끔씩 닿아오는 손길이나, 마주치는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리면 부정하고 부정하다 기어코 인정하고 말았다. 이 감정은 친구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쓰리는 마음은 상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봐주길 바라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라고.


-어제 충동적으로 말해버렸지만...

-...응.

-잠깐의 착각으로 너한테 쉽게 고백한 거 아니야.

-......

-착각이 아닐까 고민했던 때는 이미 지났어, 나한테는.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꼼지락대는 양 손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에 빠지면 오이카와는 금세 자신만의 세계로 빠진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가려진 시야에서, 대답을 고르고 있겠지. 그 대답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서웠지만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의 고백으로 나는 어떻게든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우리,

-...어.

-친구로는 안 되는 거야?

-......

-지금까지처럼 친구로... 지내는건 안 되는 거야?

-...나에겐 무리야.


이와쨩! 오이카와는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오이카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잔인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를.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너와의 관계를 포기하려는 나를 오이카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이카와의 눈이 원망으로 가득 찼다. 그 눈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워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더는 괴로움에 힘들어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오이카와와 인연을 끊더라도, 지금은 오이카와의 곁에 남아 있을 힘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너를 친구로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

-... 네게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싶어.

-...이, 이와쨩은 지금도 오이카와상의... 하나뿐인 친구야.

-아니.


모든 힘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주의를 기울여서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손을 말아 쥐었다.


-난 네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오이카와.

-이와쨩...

-미안한데 내가 더 이상 견디질 못하겠어. 나, 네가 좋다.

-...이와...

-너도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짧게 내뱉은 한숨이 하얗게 바스라지며 사라졌다. 저녁 해가 지며 나무며, 사람들이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회피하듯 바닥만을 보고 있자니 벤치에 앉아 뭉뚝하던 나와 오이카와의 그림자도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내가 고개를 숙여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그림자 또한 고개가 숙여진 모습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오이카와의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이게 나와 오이카와의 마지막이다.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치 이제 발을 떼라고 내 몸을 당겨오는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와쨩, 미안.

-...아니, 나야말로 미안하다. 친구... 계속 하지 못해서.

-그, 아... 이와쨩...

-나 먼저 갈게. 미안.

-이와...


나는 발길을 돌려 집 방향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워낙 집이 가깝다 보니 집에 들어가게 되어서도 오이카와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 먹을 수도 있고, 어쨌든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을 쥐었다 피며 무작정 걸었다. 어차피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동네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냥 발이 가는 데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대답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시나리오의 하나였다. 내가 고백을 하면 오이카와가 어떻게 반응을 할까 하는 주제에 대한 시나리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가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혼자서 상상해왔던 것만큼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럴 줄 알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내 안에 작은 기대가 남아있었나 보다. 그 작은 티끌에서 천천히 마음이 부식되는 것 같다.


-아...


배가 쓰라리다. 먹먹하게, 가슴에 멍울이 든 것처럼 답답해져온다.


-윽... 흐...


입에서 색색거리는 소리가 나며 내 의지와 달리 입가가 떨려왔다.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그대로 울음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굳은 손바닥을 억지로 들어 올려 입을 감쌌다. 해질녘, 붉게 물든 땅바닥에 뚝뚝 거리며 눈물이 검은 자국을 새겼다.


나를 네가 사랑해줬으면 바랐는데.


멍하니 땅바닥을 보며 호흡을 고르다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빨간 저녁노을에 흩어진 구름들이 물들어진 하늘이 아름다웠다. 태양은 저 너머로 사라지면서도 끝까지 새빨간 빛을 내뿜으며 구름을 물들이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오이카와를 좋아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끝이 다가온 만큼, 아직은 보답 받지 못한 내 감정에 가슴이 아프겠지만 얼마 안가 사라질 것이다. 흔적도 없이,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랑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망연하게 그러길 바랐다.



(849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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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이와] 흩어진 꿈 4.5

 

 

 

 

하나마키는 어떤 의미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18살의 고등학생에게 10년 이상 지속되온 관계란 그들에게 평생과도 같은 거라서, 좀처럼 그 사이에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관계, 우정일 뿐이라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없는건 아니지. 하나마키는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이와이즈미에게는 안될 일이지만, 상관없다. 어짜피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질질 끄는 것이 이와이즈미에게도 괴로울 뿐이다. 그럴 바에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이와이즈미를 위한 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와이즈미에 대한 첫인상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화려하게 생긴 단짝에 상대적으로 가려지는 것도 있고, 이와이즈미 자체가 남들 앞에 스스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용하다거나, 소심하다거나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는 처음에만 존재감이 없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낯을 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외모와 센스있는 말솜씨. 반면에 오이카와는 한 눈에도 아이돌 뺨치게 사람의 이목을 끄는 녀석이었다. 얼굴만 잘생길뿐 속알맹이는 형편없을지도, 라는 주변 남자들의 찌질한 질투 섞인 기대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진중한 성격이었다. 엄청나게 가벼워 보이는 외모와의 갭이 인상 깊었다.


첫인상이 어떠하던 두 녀석 모두 배구에 진지했다. 특히 오이카와는 배구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위치가 바뀌는 타입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둘은 초등학생 때부터 배구클럽을 같이 다니는 일종의 파트너였다. 세터와 에이스, 핀치에 몰릴 때면 팀의 돌파구로 찾는 깊은 신뢰 관계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10년 이상의 우정, 세터와 에이스 사이의 신뢰. 하나마키는 자신에게 저런 친구가 없다는 것이 저절로 아쉬워질 만큼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타인의 시선에서 볼 때 특별해 보였다. 그러나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그리고 마츠카와와 친해지면서 하나마키는 절로 눈치를 챘다. 그 관계, 어쩌면 얼마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남달랐다. 하나마키가 중학교 시절 겪었던, 낯익은 감정이 그 시선에 담겨 있었다.


하나마키는 게이다. 깨닫게 된 것은 중학교 때로,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성 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을만큼 태연하지만 처음엔 아니었다. '보통'이 아닌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그 두려움, '남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것 같다는 불안함. 꽤 좋아했던 첫 사랑에게 받은 '상처'는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혼란과 상처 이후 하나마키는 크게 변했다. 이성애자인 '척'하는 노력을 했고, 여자를 밝히는 '척' 했다. 일부러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기도 했다. 결코 키스를 넘어서는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동성애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냥 똑같은 사람의 입술인데도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행위 자체가 하나마키에게는 고역이었다. 처음 여자와 입이 닿았을 때,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는 하나마키를 여자는 귀엽다는 듯 보았다. 실상 하나마키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친거였다. 그 다음날 하나마키는 바로 헤어졌다. 애초에 마음이 가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애꿎은 여자애를 이용했다는 마음에 속이 편하지 않았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하나마키는 깨달았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이건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대신 배구를 선택했다. 혈기 왕성한 성욕을 누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왜 여자친구가 없냐는 고등학생 특유의 의미없는 질문에 혹시라도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 도피처로 삼은 배구지만 하나마키는 자신도 모르게 배구에 점점 빠졌다. 게이냐,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세계였다. 스파이크를 칠 때마다 알게 모르게 하나마키의 안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렸고, 또 팀원들이 좋았다. 오직 승리라는 하나의 목적만을 바라보다보면, 지금까지 하나마키를 괴롭게 했던 것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팀원 모두가 하나마키의 연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배구부에는 하나마키의 취향에 맞는 남자가 없었다. 하나마키의 취향은 운동부와 거리가 멀었다. 일단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하얀 피부였으면 좋겠고, 키는 남자답게 좀 컸으면 좋겠다. 눈높이가 맞으면 더 좋고, 그리고 자상해보이는 상냥한 얼굴이면 그야말로 스트라이크 존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배구부에 없다. 하나마키보다 하얀 사람은 꼽아봐야 오이카와, 쿠니미 정도. 쿠니미는 키가 큰 편은 아니니까 제외. 오이카와는 얼굴이 취향이 아니니까 제외.


하나마키는 이상형이 주위에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연애보다 배구가 낫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성욕은 오른손과 영상 속에서 신음을 내는 이상형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나 꼭 이상형이 연애 대상이 되리란 법이 없듯,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하나마키의 눈에 들었다.


-하나마키. 서브 폼 좋은데?


이와이즈미는 칭찬에 박하지 않다. 1학년 때부터 같은 학년의 마츠카와와 스스럼없이 지내며 알게 모르게 마츠카와가 실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됬다고, 언젠가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비단 마츠카와 뿐 아니라 배구부원들은 모두 이와이즈미를 좋게 생각했다.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사람을 나쁘게 볼 사람은 없으니까.


-뭐, 내 폼이 좀 깔끔하긴 하지?


이와이즈미와 그렇게 친하지 않을 무렵이라 하나마키는 부러 능글맞게 대답했다. 오이카와에게 그러는 것처럼 타박을 할까? 아니면 정색하며 장난을 칠지도 모른다고 하나마키가 기대를 할 때, 이와이즈미는 활짝 웃으며 하나마키의 어깨를 툭 쳤다. 맞아, 진짜 깔끔해서 넋놓고 봤어! 하나마키는 어쩐지 불식간에 총에 맞은 것 같았다. 뭐지. 이와이즈미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본 건 아니었는데 하나마키는 절로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오이카와가 항상 장난치는 것과는 달리 이와이즈미는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잘생겼다고 하기도 뭐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얼굴이라 한마디로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후배 중 한 명은 오이카와 선배가 자꾸 그렇게 말하시니 진짜로 그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버렸다고 당황해하며 이와이즈미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오이키와에게 배구공을 있는 힘껏 던져 분을 풀었다.


그러니까 이와이즈미는 객관적으로 봐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짧게 자른 머리는 삐죽거리고, 눈썹과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간 모양이다. 버릇처럼 항상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삐죽 나와있다. 그나마 남들과 달리 차분한 녹색의 눈이 매력적이긴 하다. 그러니까 하나마키의 이상형과 완전히 반대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이와이즈미의 웃는 얼굴은 마치 꽃이 필리 없다고 생각한 풀떼기에 갑자기 하얗고 탐스러운 봉오리가 만개한 것과 같았다. 날이 선 눈매는 장난기 있는 아이처럼 변했고, 불만이 있어보이는 고집스런 입이 환하게 웃는 입매가 되자 이와이즈미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다.


하나마키는 그 찰나의 순간 이후, 이와이즈미를 이성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니 그건 웃음 한 방에 반해버린 것과 같았다. 어딜 봐도 하나마키의 이상형에 맞는 구석이 없는데 자꾸 시선이 갔다. 뾰족한 짧은 머리를 부스스 쓰다듬고 싶고, 올라간 눈매를 만져보고 싶고,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조금 내려다보아야 하는 키도,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근육은 탄탄하게 잡혀 있지만 어딘가 골격이 크지 않아 아담해보이는 체구도 좋았다. 양 팔로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의 주변을 서성였다. 남몰래 이와이즈미가 입을 대었던 물통에 입을 대보기도 하는 부끄러운 짓도 해보고, 팀원들 모르게 이와이즈미에게만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물론 마츠카와가 발견해버려서 있던 간식을 다 뺏기긴 했다).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고, 혹시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을 좇다 오이카와를 발견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계속 이와이즈미에 신경을 집중했던 하나마키조차 며칠이 걸려 알아챌 수 있었던 만큼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친구로서 보는 것인지, 좋아하기에 보는 것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는 그 얼굴이 중학교 시절의 자신과 닮았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지만 이와이즈미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몰랐더라도 이와이즈미가 게이인 자신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누구에게나 자상하니까.


예상대로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의 커밍아웃에 놀라긴 했지만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혹시 나를 좋아해서 커밍아웃을 한건가? 하는 의심도 없어 오히려 하나마키는 김이 샜다. 그 이후, 같은 동성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때문인지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에게 기대는 일이 많아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이카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하나마키에게 털어 놓았다. 체념하듯 고백하는 목소리는 담담했고, 얘기가 다 끝난 뒤에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하나마키는 뜻밖에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좋아하게 된 지 꽤 되었다는 사실과 절대로 이루어질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하나마키는 그런 이와이즈미의 속마음을 알아 차렸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의 신뢰관계, 작은 틈도 보이지 않을만큼 깊은 우정이기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는 거였다. 가장 소중하니까 손 댈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였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 하나마키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 결심을 어렵게 털어놓은 것만 봐도 이와이즈미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어서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혹시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깨닫고 어쭙잖은 동정을 베풀거나 하면 곤란했다.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와 보다 더 친해진 뒤, 하나마키는 종종 오이카와의 시선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장난처럼 이와이즈미를 타박하곤 했고, 하나마키에게 질투난다고 투정부렸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와이즈미는 말했지만 하나마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친구사이 만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오이카와의 독점욕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오이카와가 유별나거나, 친구로서가 아닌 감정이 섞여 있거나.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의 관계. 하나마키는 그 둘의 관계를 그렇게 결론지었다. 오이카와가 자기도 모르게 독점욕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녀석,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의 시간, 관계를 참을 수 없이 질투했다. 저렇게 애매모호한 행동은 반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가 하루라도 빨리 오이카와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일부러 냉정하게 이와이즈미의 기대를 짓눌렀다. 상처받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마음이 아팠지만, 더 상처받기를 바랐다. 그리고 도쿄로 대학교를 가겠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하나마키의 초조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가 진학하게 될 도쿄에 간다면, 이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포기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언제나 오이카와에게 시선이 가버리는 이와이즈미다. 더군다나 누구보다 더 오이카와에게 무른 이와이즈미니, 질질 끌려 다닐게 뻔했다.


-그럼 나랑 같은 대학으로 가, 이와이즈미.

-어?

-또 오이카와 바보가 되게 할 순 없으니까.


하나마키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잠시 망설였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진로 조사서를 뺏어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고작 종이 한 장, 고작 몇 글자에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나와의 거리는 좁혀지겠지.


집으로 가는 길, 교문 앞에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땅바닥을 툭툭 차는 모습이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이와이즈미에게 두고 먼저 나오니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맛키, 하고 부르며 아는채하는 것과 달리, 시선은 빗겨져 이와이즈미를 찾는다.


-이와쨩하고 요즘 매일 같이 있네? 부활동도 없는데 둘이 뭐했어?

-뭐, 꼭 별일 있어야 같이 있나?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만 어딘가 조용하게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지 조용했다. 친구긴 하지만 애인도 아니면서, 같잖은 질투심을 보이는 오이카와가 재수 없다.


-궁금해?

-...궁금하면 가르쳐 줄 거야, 맛키?

-가르쳐 주지. 나랑 하지메가 뭐 했는지.

-하지메?


이와이즈미를 이름(하지메)로 부르는 것에 오이카와는 동요했다. 시선이 흔들리며 웃는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메랑 데이트 했어, 집에 가는 길에는 네가 있으니까 별 수 있나.

-...하? 데, 데이트?

-그럼 나 먼저 간다, 귀갓길은 너한테 양보할게.


하나마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뒤에서 오이카와가 자신의 이름을 연신 불렀지만 쫓아오진 않았다. 곧 있으면 이와이즈미가 나오기 때문이겠지.


-야! 야! 하나마키! 데이트라니 무슨 뜻이야!

-알아서 생각해~ 잘 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오이카와에게 정말로 이와이즈미와 사귄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너보다 이와이즈미에게 가까운 사람은 나라고, 넌 친구 이상은 될 수 있지만 애인은 될 수 없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유치한 질투나 계속 해라, 오이카와. 오랜만에 귀갓길이 즐거웠다.


그러나 다음날, 누가 봐도 전날 울어서 팅팅 부은 눈으로 나타난 이와이즈미를 보고 하나마키는 그새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멋쩍은 듯 웃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누가 들어도 티가 나는 거짓말을 하는 이와이즈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상처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나마키는 늘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어하는 이와이즈미를 보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발갛게 부어 오른 눈가에 하나마키의 가슴이 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눈의 붓기를 빼기 위해 차가운 손수건을 대주거나 말없이 이와이즈미의 곁에 있어주는 것 이외에는 없다. 하나마키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시간이 흘러 이와이즈미의 감정이 퇴색되기를. 방해물이 또 다시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전에 그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7304자)



--------------



5편이 완결은 아닙니다... 근데 갈수록 전개가 힘들어지네요ㅠㅠ


4.5는 하나마키 외전인데 길어져서 여기서 마감해요. 나중에 오이카와 외전도 꼭 쓰고 싶은데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야 쓸 수 있어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ㅠ.ㅜ


마음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별것도 아닌 소설 읽어주셔서 부끄럽지만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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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이와] 흩어진 꿈 5

 

 

 

오후 5시를 넘겨,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쌀쌀한 날씨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공원에 도착한 뒤, 시간이 흘러도 말이 없었다.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는지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서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귀가하는 학생들이 수없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용한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 또한 오이카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까지 오이카와가 내게 친구로서 독점욕이 많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신뢰관계로 이루어진 우리 우정, 그것 이외에 오이카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같은 남자이고, 오이카와는 동성애자가 아니고, 하나씩 없어지는 선택지에 남은 것이 우정밖에 없다. 그러나 방금 전의 오이카와의 행동, 그리고 예전부터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던 오이카와의 독점욕이 단순히 친구의 친구를 질투하기 때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혹시?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 그리고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에 기대를 접었다. 춥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목소리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장난처럼 얘기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애들처럼 보호본능을 일으킬 리가 없는 남자다운 체구에, 성격도 나쁘다. 습관처럼 오이카와의 등짝을 얼마나 때렸는지 셀 수도 없고, 배구공을 날린 적도 너무 많다. 애초에 친구였으니 그런 대상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헛된 기대는 쉽게 흩어졌고 우울한 마음만이 남았다. 선택지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다. 남들과 달리 유별나게 친구에게 질투심이 강한 오이카와.


-오이카와.

-......

-예전에 내가 말했었지. 가장 친한 친구는 앞으로도 너일거라고.


가슴이 답답하고, 아까부터 차가웠던 손이 찌릿했다. 뻣뻣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친구라고 해도 지금까지처럼 항상 같이 있을 순 없어.

-이와쨩.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네 행동, 억지 부리는 거라는 거.


고개를 돌린 곳에, 새하얗게 안색이 변한 오이카와가 서 있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 해가 저물어 밤이 찾아와 어둑해진 하늘 아래 오이카와의 새하얀 얼굴만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 너는 너의 인생이 있을 거고, 나는 나의 인생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이와쨩. 난 이와쨩하고 함께 있고 싶어.


오이카와는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나만큼 차갑게 식은 오이카와의 손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두워진 시야에 오이카와의 하얀 손이 낯설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본 오이카와의 얼굴 또한 만져보지 않아도 차갑게 식어있는 것 같다.


-이와쨩은 나랑 같이 있는게 싫어진거야?


오이카와의 말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만들었다. 내가 오이카와에게 바라는 관계와, 오이카와가 나에게 바라는 관계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우정과 사랑, 나는 오이카와에게 사랑을 바라고 오이카와는 나에게 우정을 바란다. 감정의 형태가 달라도,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에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나는 왜 오이카와를 좋아하게 됐지. 서로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되어서 괴로워질 바에는 좋아하지 말걸. 좋아한다는 마음을 애초에 깨닫지 말걸. 오이카와를 좋아하지 말걸...


-이와쨩, 왜 우는거야!


오이카와의 말에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는지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손가락에 눈물이 묻었다. 나는 문득 괴로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닿지 못할 내 마음, 포기하자고 수십, 수백 번을 결심하고 되새겼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이카와의 얼굴, 손짓, 말 하나 하나에 스러져가는 마음의 불씨가 타올랐다.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난 뒤, 언젠가 오이카와와 집 앞에서 헤어져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하고 오이카와만 좋아하게 될 지도 몰라. 첫사랑도 오이카와, 끝사랑도 오이카와. 오이카와가 나중에 결혼해도 그 옆에서 오이카와를 축하해주며 마음을 썩히게 될까? 아니면 그때는 면역이 생겨서 지금만큼 아프지는 않을까? 나 왜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 하는거지?


-이와쨩, 나랑 같이 도쿄 가자고 한 말이 그렇게 싫은거야? 그래서 우는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는 눈물을 멈추지 않는 내 얼굴을 연신 손으로 닦아내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이 너무 상냥해서 싫다.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오이카, 와.

-응, 이와쨩.


살아온 시간동안, 나는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멋대로 일을 벌린 적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적도 없다. 또래 애들보다 어른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철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로 한다.


-나 이제 너랑 친구 안할래.

-뭐?

-나, 나는.

-이와쨩!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를 할 수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쿄로 대학갈 것.

배구는 취미로만 하기로 결심한다.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질 것.


나는 괴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오이카와와 친구를 그만둔다.


-좋아해.

-......!

-나, 너 좋아한다.

-......뭐, 이와쨩.

-...미안, 그러니까 너랑 친구 그만둘래.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놓았다. 얼굴 위로 오이카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그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행여나, 혹시나 오이카와가 따라올까 무서워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나가 충분히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학생들이 귀가할 시간을 훌쩍 넘겨서인지 버스 안에는 두, 세 명의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맨 뒷좌석에 앉았다. 어차피 사람이 없는 버스이기에 옆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고백해버렸다. 저질러 버렸어.

기어코 고백해버렸다. 나 편하자고, 내가 괴로워했던 감정을 오이카와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10년을 훌쩍 넘긴 시간동안 친구였던 오이카와에게 친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오이카와와의 우정을 버렸다. 이제 오이카와와 나 사이에 남겨진 관계가 없다.


흐려지는 시야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한 버스 안에 혹시라도 울음이 터져나올까 두려웠다. 엎드려 앞좌석에 얼굴을 숨겼다. 벅차오는 숨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시합에서 져본 적을 제외하곤 남들 있는 곳에서 울어본 적이 없는데. 버스 안에서 끅끅 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어떡하지, 내가 오이카와를 버려 버렸다.




(3323자)

--------------------------------------------------------------------------------------


아ㅏㅏㅏㅏㅏㅏㅏ 한계가... 이 뒤는 상상에... 맡기면...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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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카와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곳이었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카페는 오이카와와 몇 번, 아니면 어쩌다 가본 적밖에 없었기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작지 않은 규모에도 사람이 꽤 가득 차있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끌고 창가자리로 가서 앉더니 그 옆에 나를 앉혔다. 이어서 따라온 하나마키가 맞은편에 앉았다. 멀리서 마츠카와가 보였다. 마츠카와는 유니폼인지 하얀 셔츠에 앞치마 비슷한걸 허리에 매고 있었다. 언뜻 앞에서 보면 치마를 입은 것 같아 우스웠다. 나만 그렇게 느낀게 아닌지 테이블로 다가오는 마츠카와를 보고 하나마키가 큭큭 거렸다.


-큭, 마, 마츠카와. 유니폼 잘 어울리는데?

-아하하하하! 맛층 진짜! 사진 찍어도 돼?

-이미 찍고 있잖아.


찰칵, 찰칵 하고 오이카와는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츠카와는 스스로도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이 카페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는 것을 아는지 가만히 있다가 오이카와의 핸드폰을 내리 눌렀다.


-나중에 보내줄게, 맛층!

-필요 없거든? 주문이나 해라.


마츠카와는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들을 봐도 도통 무슨 메뉴인지 모르겠다. 그런 나에 비해 하나마키는 익숙하게 메뉴를 살피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별 관심이 없는듯 종이만 넘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으며 가까이 기대 왔다.


-이와짱 뭘 시킬지 몰라서 그러고 있는거야? 오이카와상이 추천해줄까?


열심히 손가락으로 메뉴를 집으며 살피던 하나마키가 오이카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커피 못마신다고 그랬으니까 무난하게 아이스티나 에이드 종류는 어때?

-음, 뭐... 일단 보고.


레몬에이드, 자몽에이드, 블루레몬에이드, 블루베리에이드, 크랜베리에이드, 유자에이드... 종류도 많았다. 


-그럼 나는 블루레몬에이드.

-일단 나는 카페라떼랑, 그리고... 야, 여기 슈크림은 맛있냐?

-안 먹어봐서 모르겠는데.

-맛층, 이럴땐 무조건 맛있다고 해야 하는거 아니야?

-어, 슈크림 맛있어.


하나마키는 인상을 찌푸리고 뭐냐고 핀잔을 주었다. 마츠카와는 뻔뻔한 얼굴로 슈크림도 하나, 주문하고 오이카와에게 눈짓했다.


-난 녹차라떼 진하게.

-더 시킬거 없지?

-그리고 서비스 부탁해, 맛층~!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프런트로 갔고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하나마키는 카페를 두리번거렸고 오이카와는 말없이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발을 까닥거렸다. 여기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하고 하나마키가 먼저 운을 뗐다.


-마츠카와랑은 안 어울리지만.

-확실히 마츠카와는 뭐랄까, 카페 알바생이라기보다 술집 알바생같은 느낌이지.

-아무도 쟤한테 주문 못하겠네. 진짜 인상 험악하다니까.


운동부여서 체격이 큰 탓도 있지만 마츠카와는 초면에 좋은 인상을 받기 힘든 타입이었다. 제멋대로 삐죽거리는 반곱슬 머리에, 눈은 날카롭고 특히 눈썹이 박력있게 올라간 모양이다. 처음 마츠카와를 봤을 때 3학년인줄 알았으니 말은 다 한거다. 과연 처음 보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직에 마츠카와가 얼만큼 버텨낼 수 있을지가 흥미로울 정도였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에 대해서 떠드는 사이에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다. 오이카와의 녹차라떼, 하나마키의 카페라떼와 슈크림, 그리고 블루레몬에이드가 차례대로 놓였다. 처음 시킨 블루레몬에이드는 푸른 물감이 위에서 아래로 퍼지는 것 같이 보였다. 밝은 파란 색감이 여름의 바다같다. 마시면 싸르르하고 톡톡 튈 것 같은 탄산 방울이 보인다.


-사실 블루레몬에이드가 뭔지도 모르고 시킨건데.

-뭐, 레몬에이드랑 블루레몬에이드랑... 별 차이 없지 않나?


얼음 위, 음료 표면에 동그랗게 떠 있는 레몬은 보는 것 만큼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할 만큼 시큼해보인다. 한모금 마신 블루레몬에이드는 생각과는 달리 일반적인 레몬에이드의 맛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레몬에이드 맛인데?

-보기에 예쁘잖아. 파랗고, 청량해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마키의 말에 공감했다. 눈 앞의 음료는 정말로 여름에 마시기 좋아 보일만큼 청량하다. 노란색 빨대로 빙글빙글 휘젖자 노란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얼음이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보니, 오이카와도 나처럼 빨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녹차라떼를 휘젖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시킨 녹차라떼는 둘이서 왔을 때를 기억나게 했다. 둘이서 카페를 올 만한 일이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별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갔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방과 후에 오이카와에게 이끌려 들어가거나, 주말에 시내에 나갔다가 쉬러 들어가거나. 남자끼리 카페에 들어간다는게 처음엔 왠지 쪽팔리기도 했다. 머릿속의 이미지에서 카페는 어쩌다 스치듯 본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가본 카페가 생각보다 달라서 놀랐고, 그런 나를 보고 오이카와가 손가락으로 볼을 쿡쿡 찌르며 놀렸었다. 


오이카와와 카페를 갈 때, 메뉴를 선택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처음 카페에 갔을 때 메뉴를 읽길 포기한 이후로 오이카와에게 그냥 맡겨버린 탓이다. 오이카와는 한 가지 메뉴를 고집하진 않았지만 내 음료는 언제나 녹차라떼를 시켰다. 녹차라떼는 그렇게 달지도 않아서 입맛에 맞아 내심 맘에 들었었다.


눈 앞의 블루레몬에이드는 예쁘지만 내 입맛에 조금 달았다. 녹차라떼나 시킬걸 그랬나 싶다. 그래도 보기에 예쁘니까 후회는 없다. 사실 블루레몬에이드는 이름부터 그냥 끌렸다. 밝고, 파랗고,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시킨 거였다. 조금 더 사실을 말하자면 내 안에 오이카와의 이미지랑 맞았다. 오이카와는 항상 밝게 웃고 다니고, 주위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가끔 얄미운 소리를 하거나 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손이 올라가게 만드는 녀석이지만, 누구나 오이카와를 좋아한다.


물론 시키고 나서야 왜 이걸 시켰는지 깨달았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고 당황스럽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금방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 대학 어디 갈지 정했냐?


하나마키가 슈크림을 먹다 말고 말했다.  크림이 입가에 묻어 있어 티슈를 건넸다.


-음, S대학교로 갈까 생각 중인데.

-S대학교?


티슈로 입가를 닦던 하나마키는 오이카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마 오이카와를 아는 누구라도 오이카와가 S대학교를 가겠다고 한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왜 S대학교로 가려는거야?

-이와쨩이랑 같이 살려고~

-야, 난 그러겠다고 한 적 없어...!


하나마키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짓더니, 남은 슈크림을 입 안에 다 넣었다. 기껏 닦은 입가에 다시 크림이 묻었다. 어제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그러했듯이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의 결론을 내린 채였고 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어제는 스스로가 바보같아서 울다가 잠들었고, 뭔가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도 그럴 생각이야?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말에 나를 돌아봤다.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이 웃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억지로 웃고 있다.


-그게 잘, 모르겠는데. 어제서야 쟤가 얘길 꺼낸거라서.

-이와이즈미는 진짜로 오이카와 엄마야?

-하나마키!


하나마키는 어쩐지 분한 얼굴이었다. 뭐에 분해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마키에게 해왔던 얘기들이 있었기에 어제처럼, 평소와 같이 오이카와에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야 했다. 그러나 돌아본 오이카와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 예의상의 웃음도 아닌, 하물며 진짜 웃음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와쨩은 오이카와상이랑 앞으로도 함께라고, 맛키쨩.

-이와이즈미.

-...어?

-이제 끝낼 때가 왔다고 했잖아.

-아. 그건,


지금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면 오이카와가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역시나 힐끗 쳐다본 오이카와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마냥 굳어 있었다. 끝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이카와가 아직은 모른다는 것에 안심해야 하는건가.


-이와쨩, 무슨 말이야? 끝낸다니.

-그러니까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래서?

-앞으로는 새로운... 인맥을 쌓아볼까, 하는...


오이카와는 아예 몸을 옆으로 돌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충분히 가까웠던 거리가 확 좁아졌고, 오이카와의 팔이 내 허벅지를 잡았다. 어제처럼 횡설수설하며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다가,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덜그럭, 하고 테이블 위의 블루레몬에이드의 얼음이 녹아서 움직였다.


-맛키, 이와쨩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이와쨩이 헛소리를 하고 있잖아.


하나마키는 아까 전의 분해하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어느 새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페라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나마키의 손이 똑똑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오이카와, 이제 더 이상 이와이즈미랑 ‘언제나 함께’가 아니야.

-하하, 맛키쨩도 이상한 소리를 하네?


똑똑, 하는 소리는 꽤 장난스러워서, 이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하나마키는 눈앞의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환하게 웃은 하나마키가 블루레몬에이드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을 덮었다. 손을 마주 잡더니, 깍지를 끼었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하나마키의 얼굴을 보다가, 나와 하나마키가 마주 쥔 손을 내려 보았다.


-오이카와.

-하, 뭐하는 거야, 지금?

-이와이즈미는 졸업하면 나랑 동거할거야.

-...뭐?

-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하기로 했고. 그렇지, 이와이즈미?


왼쪽 허벅지가 조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말없이 나를 볼 뿐이다. 이제는 입가에 달렸던 억지 웃음도 사라진 얼굴이었다. 말해봐, 이와쨩. 오이카와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시선으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있다.


-학교는 같은, 곳으로 갈까 했는데.

-......

-도, 동거는... 아! 아파, 쿠소카와!


오이카와는 조용히 눈썹을 찡그렸다. 아프다는 내 말에 내 허벅지를 부숴트릴 것처럼 쥐던 힘을 뺐다. 미안, 하고 중얼거리곤 이제는 허벅지 대신 팔뚝을 잡았다.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어, 하는 사이에 오이카와는 나를 끌고 갔고 뒤돌아본 하나마키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오이카와와 나를, 정확히는 우리의 중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프론트 근처에서 디저트 따위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던 마츠카와는 서비스는, 하고 외쳤지만 동시에 카페를 나와 버렸다.



오이카와는 카페를 나오고도 한참을 나를 끌고 갔다. 그냥 무작정 앞으로 가는 듯 방향의 변화가 하나 없었다. 도중에 오이카와에게 붙들린 팔을 빼보려고 했지만 있는 힘껏 쥐고 있는지 뺄 수가 없었다. 십여 분을 그대로 앞을 향해 걸었을까, 언젠가 로드워크 중에 스쳐지나간 적이 있는 작은 공원 앞에 멈췄다.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내 팔뚝에서 손을 뗐다.

그대로 오이카와는 우뚝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합 중, 서브권이 오이카와에게 있을 때 상대편 팀이 타임아웃을 불렀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눈을 감고, 입을 닫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다.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면 찡그린 눈가와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하나마키와 조금 더 친해졌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에게 신경 썼다. 내가 좋냐, 하나마키가 좋냐는 유치한 질문을 하며 섭섭하다는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자기보다 하나마키와 더 친해질까 두려워하는 친구 사이의 질투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였기에 오이카와의 이러한 질투는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더 잘 알았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을 당시에 처음 오이카와가 내 친구를 질투했다. 나와 오이카와는 같은 반이 아니었고, 간간히 쉬는 시간에야 얼굴을 보았다. 막 학기가 시작된 참이라 부활동도 시작하기 전이었고, 나는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에 긴장하면서도 설렘을 가졌었다. 어색한 첫 만남이 반복되던 그 때에 오이카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꽤 맘이 잘 맞을 것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 앞자리에 앉은 타케루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남자다운 성격이 인상 깊은 애였다. 자리가 가까우니 얘기하기도 쉬웠고, 무엇보다 축구부였기에 같은 운동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작정 공을 차는 것을 좋아했기에 같이 놀기에도 좋았다. 점심시간에 가끔씩 축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을 뛰어 놀았다.


타케루와 친해지면서 오이카와와는 자연스럽게 부활동 시간 외에는 마주치는 일이 줄었다. 방과 후 배구부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타케루와 함께였고, 오이카와는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초등학교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여자에게 상냥한 오이카와는 여자애들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아직 오이카와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닫기 전이었기 때문에 도와달라는 듯 난처한 눈빛을 보내는 오이카와를 휙 지나치곤 했다. 그럴 때는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계속 칭얼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타케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자기네 반에 놀러오라는 말을 계속 무시하자 기어코 여자애들을 겨우 뿌리치고 우리 반에 찾아오고 난 뒤부터다.


-이와쨩! 내가 쉬는 시간마다 놀러오라고, 했는데... 누구야?

-아, 타케루라고 친구.

-안녕! 너가 3반 오이카와 토오루구나? 난 타카키 타케루라고 해.

-안녕. 반가워.


오이카와는 드물게 낯을 가렸다.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타케루를 보다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메한테 말 많이 들었어. 너네 소꿉친구라며?

-하지메?

-응. 아, 그러고보니 넌 하지메를 특이하게 부르네?


오이카와는 하지메, 하지메...라고 중얼거리더니 수업종이 치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부활동 시간에 다시 본 오이카와는 다시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유독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귀갓길이 어색한 내가 몇 번 장난을 쳐봤지만 반응도 미미했다. 그러다 타케루에 대한 얘기를 꺼내 봤는데, 오이카와가 아까와는 달리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고 타케루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처음 봤지만 내가 타케루와 마음이 맞는 것처럼 오이카와도 타케루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카키랑 많이 친해졌나보네?

-타카키... 아, 타케루? 응.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나랑 잘 맞아.

-헤에...


너랑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말하던 나는 오이카와의 표정에 말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화가 난 표정인데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러게, 나랑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타카키.

-그, 그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우리 셋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냐면,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던 거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타카키와 조금도 친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쉬는 시간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가며 우리 반에 찾아왔고, 점심시간에는 배구분데 왜 축구를 하고 있냐며 억지로 배구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타카키와 거리도 멀어져, 가까워졌던 사이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오이카와도 좋았지만 타카키와도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주말에도 타카키와 놀려고 약속을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오이카와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울먹였다. 왜 내가 있는데 걔랑 놀려고 하냐는 말과 함께 입술을 부들부들 떨더니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이와쨩이랑 제일 친한 친구는 난데. 왜 그 못생긴 애랑 놀려고 하는거야, 이와쨩...!

-야, 야 오이카와. 갑자기 울긴 왜 울어...!


오이카와는 서툴게 달래는 나를 보고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었다. 으와아아아앙, 하고 우는 소리에 거실에 있던 엄마가 올라왔고 대뜸 나를 때렸다. 왜 토오루를 울리고 그러냐며 오이카와를 달랬고, 오이카와는 그 후로도 몇 분을 울었다. 한 짓도 없는데 맞은 억울함에 삐죽 입술이 튀어나온 나를, 오이카와는 울어서 팅팅 부은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나마 봐 줄만한 얼굴이 조금이나마 못생겨진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하여튼 오이카와는 예나 지금이나 울보다.


-나랑 제일 친한 친구는 오늘도 내일도 너뿐이야.

-영원히 나랑 제일 친한거지?

-응. 그러니까 바보같이 울지 마. 너 지금 엄청 못생겼어.

-윽, 그래도 이와쨩보다는 안 못생겼어...


얄미운 소리를 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이카와는, 부은 눈 때문에 웃긴 모양새라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중엔 큭큭거리며 웃는 나를 보고 오이카와도 바보처럼 하하하고 웃었다.


나는 단순해서 오이카와가 왜 그렇게 타카키를 경계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오이카와가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모습을 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오이카와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로, 나는 오이카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내가 다른 애들과 친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오이카와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그런 오이카와를 나무라기도 하고, 짜증도 냈지만 예전과는 달리 헤헤 웃으며 이와쨩, 하는 오이카와를 끝까지 내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친구로서 내가 그렇게 좋은가 생각했다. 물론 내가 오이카와를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는 오이카와의 그런 행동들에 혹시나 싶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어느 누구도 소꿉친구를 상대로 친구의 친구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를 가차 없이 뭉겠던 일이 오이카와의 첫 여자친구였고, 그 이후로 나는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저 오이카와는 친구인 나에 대한 독점욕이 조금 과할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854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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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_눈물은_무기(feat.오이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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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이와] 흩어진 꿈 3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오이카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진지한 대화를 피해갔다.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와쨩, 뭐가 그렇게 혼란스러워?

-뭐?

-아니 그게.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어?

-......몰라...


오이카와는 말을 줄였다. 오히려 계속 고민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답지 않게 조용한 귀갓길이 이어졌고, 우리 집에 먼저 다다랐을 때야 오이카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러자는 얘기야.

-......

-쉽게 생각해, 이와쨩.

-...어, 그래. 쉽게 생각...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별 말 하지 않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이카와가 먼저 발을 떼었다. 내일 보자, 이와쨩.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철컥, 하고 오이카와의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쉽게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그 얘기가 당연했을 수도 있다. 물론 도쿄에 함께 가서, 독립을 한다고 해도 옆집, 또는 룸셰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꿉친구니까. 이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을 세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세는 것이 더 빠를 만큼 서로를 잘 아니까. 우리가 단순히 친구였다면, 오이카와의 말은 당연히 생각해봄직한 쉽고 편한 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가슴이 퍽 막히는 것 같다. 나는 오이카와의 친구라는 사실이 답답했다. 답답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했다. 우정이란 우리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오이카와를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앓기만 할 뿐이다. 오직 친구로서 나를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볼 때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오이카와에게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다. 사실은 나와 너는 다르다고.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은 감정으로 너를 보고, 너와 손을 잡고 싶고, 키스하고 싶다. 언제고 여자 친구에게 밀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관계가 아니라, 언제고 너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싶다. 나를 좋아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만약에 고백하면.

오이카와는 분명 난처하게 웃을거다. 온 몸으로 미안해하며 거절하겠지. 그렇게 수많은 여자애들이 오이카와에게 고백을 해왔고 거절당했지만, 거절에서 끝나지 못하고 짝사랑을 계속 했다.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호감을 가지는 상대,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상대에겐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니까, 그런 오이카와에게 거절당했다고 해서 짝사랑을 끝낼 수가 없었을 거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런 애들을 보았고, 가끔은 거절당하는 여자애들에 나를 이입했다. 내가 만약에 고백하면, 저렇게 거절당하겠지. 남자지만 제일 친한 친구니까 누구보다 더 어쩔 줄 몰라하다 미안하다고 하겠지. 미안해, 이와쨩. 받아줄 수 없어서 미안해, 이와쨩.


나는 당장의 충동을 멈췄다.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꾹, 하고 깨문 입술 사이로 끅, 끅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 처지가 비참하다. 나는 고백 하지도 못하는 병신이다. 거절당하는 상상만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다못해 그냥 같은 반 친구였더라면, 졸업식 날 미친 척 하며 고백해 볼 텐데. 마지막이 있으니까. 그러나 오이카와와 나 사이에 마지막이란 언제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끝이 있을까.


끝이 없다면, 끝을 만들어 볼까. 잠깐 스치듯 생각했다가 그만 두었다. 가슴이 아팠다. 바보같이 나는 오이카와와 끝을 내는 것보다 그래도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질질 짜면서도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한다. 병신, 병신하고 중얼거리다 눈물로 축축한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 바보같이 울어도 별다른 좋은 해결책이 없다. 휴지를 뽑아 킁, 하고 코를 풀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하하, 하하... 진짜로 끝이 없어.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으면 좋았겠다. 이럴 바에야 좋아한다는 감정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 날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마키가 다가왔다.


-왜 그래? 눈이 빨갛네.

-아, 응. 잠을 못자서.


아침에도 집 앞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이었다. 깜짝 놀라며 이와쨩, 눈이 왜그래?! 밤새 야한거 본거야? 라고 말하기에 등짝을 날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나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대답해주기 난처하다.


-잠을 왜 못잤어?

-어? 그냥, 그냥 잠이 안와서.


하나마키는 잠깐만,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포털 검색어 따위 보고 있는데 눈에 축축한게 씌워졌다.


-악! 뭐, 뭐야?

-눈 많이 빨개. 축축해도 이거 쓰고 있어, 이와이즈미.


몇 번 본 적 있는 하나마키의 손수건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에 적셔 왔는지 축축하다.


-야, 주려면 잘 짜서 줘야지. 옷까지 다 젖겠어.

-짜줄까?

-뭘 짜줘. 내가 짤게.


한 손으로 손수건을 짜자 주르륵 물이 흘렀다. 아무튼 뭔가 하나씩은 허술하다니까. 그래도 마음은 고맙지만.


-땡큐. 시원하네.

-이제 나밖에 없지?

-큭. 응, 너밖에 없네.


하나마키는 한동안 앞자리에 앉아서 어제의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 떠들었다. 하나마키와 근래 들어 둘이서 같이 있다 보니 이것저것 알게 되었는데, 하나마키는 집에 가면 TV를 몇 시간이고 본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다큐 등 종류를 따지지 않고 본다고 한다. 나는 집에 가면 씻고 밥 먹고, 그냥 일찍 자거나 게임하거나, 노래를 듣다가 자버리기 때문에 하나마키가 해주는 얘기들이 다 신기했다.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에 대한 이슈라던가,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의 내용이라든가 듣다 보니 재밌기도 했다.


-그래서, 그 T라는 가수가 새로 앨범 발표했다고 예능에 나왔는데,


신나게 말을 하던 하나마키가 멈추었다. 북적거리는 교실의 소음은 여전히 계속 들렸지만 하나마키는 말을 잇지 않았다.


-왜 그래? 말을 하다 말아.

-어, 오이카와가 왔네.


계속 손수건을 눈에 대고 있던 터라, 손수건을 떼고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시야가 잡히지 않았다. 검은 어둠이 앞에 있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깜빡거리는 눈 위로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본능적으로 오이카와의 손임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손이 차가운 편이다. 하얗고 긴, 남자답게 단단한 손은 차갑기까지 해서 가끔 오이카와의 손에 닿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맛키랑 이와쨩이랑 또 같이 있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길래 오이카와상 온 줄도 모르고 있어?

-뭐, 평범한 이야기지.

-오이카와, 이 손 뭐냐.


눈에 닿은 손은 처음 닿았을 때보다 차갑지 않아서 시원했다. 솔직히 오이카와의 손은 기분 좋았다.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얼굴을 감싸지는 착각이 들게 했다.


-이와쨩, 눈 피곤한 것 같아서. 내 손 시원하지?

-...뭐, 계속 이러고 있어라.


오이카와는 하하, 웃더니 손을 치웠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가 안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눈이 아직 뻑뻑한 것 같아 몇 번 깜빡였다. 앞자리의 하나마키는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책상 옆에 앉아 책상 위로 팔을 엎드리고 있었다.


-요즘 둘이서만 노니까 섭섭한데?

-뭘, 징그럽게 섭섭하데...


오이카와가 온 뒤로 말이 없던 하나마키가 고개를 돌렸다. 똑바로 오이카와를 보며 드물게 무표정인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랑 더 친해지려고 둘이 있는거지.


오이카와가 하나마키의 말에 입을 열려는 순간 종이 울렸다. 애초에 오이카와도 하나마키도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야 했다. 먼저 일어난 건 오이카와였다.


-맛키.


하나마키는 고개를 들지 않고 시선만 올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힘내?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상보다 이와쨩에게 가까워지진 못하겠지만.


피식 웃으며 하나마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앞자리의 주인이 왔던 참이었다. 종이 쳤는데도 자기네 반으로 돌아가지 않는 하나마키와 오이카와가 주위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야, 둘 다 돌아가. 종 쳤어.


결국 일어나 말없이 서로를 보며 서 있는 하나마키와 오이카와의 등을 떠밀었다. 밀지마, 이와쨩! 하고 투덜거리는 오이카와에 비해 하나마키는 얌전히 등에 떠밀려 걸었다.


-나가, 나가. 너네 반으로 빨리 가라, 응?

-이와쨩, 점심 같이 먹자.

-어, 그러던지.


나도, 하나마키는 짧게 말하고 옆 반의 앞문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그 옆 반이기에 조금 더 가야 했다. 오이카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아서는 순간, 이와쨩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문에 반쯤 몸을 기대고 손을 흔들었다. 하얗고 긴 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점심은 하나마키와 나, 오이카와 그리고 마츠카와까지 넷이서 먹었다. 요즘 나 왕따시키냐며 마츠카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마츠카와는 넷 중에서 유일하게 반이 아래층이라서 쉬는 시간에 잠깐 보기 힘들었다.

언제나 부활동 시간에 보았기에 얼굴을 보는 것이 퍽 오랜만이었다.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마츠카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 뭐냐 역 근처에 카페에서 일한다.


오이카와와 하나마키가 큭큭거리며 웃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무슨 수로 사장님이 널 뽑았냐며 오이카와가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팩우유를 빨대에 꽂았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큭큭, 노, 놀러가도 되냐?

-놀러와. 서비스 해줄게 몰래.




그렇게 방과 후에 마츠카와가 일하는 카페로 놀러가게 되었다. 남자들끼리 카페에 갈 일이 드문데다 이 조합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마츠카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먼저 가버리고, 셋이서 같이 가게 됐다.


-카페 가는거 오랜만이야.

-그래? 난 누나랑 주말에 가끔 카페 투어해.


슈크림이 맛있는 베이커리를 찾아서, 하나마키는 덧붙였다. 생긴 것처럼 입맛이 애같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가볼래? 거기 슈크림이 내 인생 슈크림이거든.

-헤에, 그래?

-이와쨩은 단거 별로 안 좋아해.


오이카와는 맞지? 라고 물으며 나를 보고, 하나마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침부터 느꼈지만 하나마키를 상대로 오이카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나에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얄미운 태도다.


-카페에 슈크림만 있는건 아니니까. 그치? 거기 라떼도 맛있어.

-음, 뭐... 그렇지.

-이와쨩은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자서 마시면 안 돼.


하나마키의 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도 오이카와는 태연하게 저만치 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앞서 걸었다.


-가자, 하나마키.

-......어~ 가자, 이와이즈미.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였다. 어쩐지 토라진 애처럼 서있는 하나마키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자 하나마키가 순순히 끌려왔다. 마츠카와가 일하는 카페가 바로 앞이었다.


-이와쨩, 들어가자.


오이카와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하나마키의 팔을 이끌던 손이 떼졌고, 어어 하는 사이에 오이카와에게 끌려갔다. 뒤돌아보니 하나마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닿은 오이카와의 팔에 또 정신 못 차리게 의식하면서도 오이카와의 행동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남자끼리 어깨동무쯤이야, 친한 사이에는 무의식적으로 하기도 하고 시합 중에 점수를 땄을 때는 끌어안기까지 하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오이카와랑은 중학교 때 이후로 그랬던 적이 없다. 오이카와랑 시합할 때나, 시합이 끝나고 나서 파이팅의 의미 외에는 신체적으로 접촉한 적이 없었다.


당연한가, 그냥 친구니까. 근데 항상 같이 다녔던 넷 중에서 제일 대화가 없는 마츠카와랑도 매번 어깨동무 했는데. 하나마키도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이카와를 의식하는 나를, 오이카와가 눈치 채고 피했나...?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걸 고민하는 내가 이상한건가?


이래서 짝사랑이 싫다. 상대방의 아주 작은 행동에도 하나, 하나 의미를 가지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보통의 관계와 의미를 비교하고, 내게 했던 행동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절로 미간이 좁아진다.





(584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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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이와] 흩어진 꿈 2

 

 

 

짝사랑하는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와 오이카와가 사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는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에게 그러했듯이 오이카와의 손이 내 볼을 감싼다. 춥지, 하고 웃는 미소가 아름답다. 오이카와의 빛나는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면 깨닫는다. 어두운 공간, 오직 빛나는 오이카와.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웃어주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전 여자친구였지. 꿈임을 깨닫는다. 부서진 꿈에 잠이 깼어도 눈을 뜨기가 힘겨웠다.


그런 꿈을 꾼 다음부터 난 바보같이 오이카와가 나에게도 그렇게 웃어준 적이 있을까 궁금했다. 언제나 방긋거리며 웃고 다니는 오이카와였지만 그런 미소를 본 적은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다. 괜히 오기가 나서 손으로 오이카와의 입을 죽 늘어트리며 웃게 해 보기도 했고, 어디선가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얼굴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웃었다. 누군가가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웃는 웃음은 결국 보지 못했다.


몇 개월 동안 오이카와의 웃음소리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누굴 보고 웃는지, 왜 웃는지, 혹시라도 그때 그 웃음을 짓고 있는지. 날 보고 웃을 땐 어떠한지. 오이카와의 전 여자친구이자 첫 여자친구는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겨울이 되면 ‘춥네’, ‘춥지’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머리에 윙윙 울렸다. 오이카와가 배구에 다시 빠지게 되었지만, 어쩌다 등굣길에, 시내에서 그 여자애를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초조하고, 이런 초조함을 느끼는 내가 싫었다.


오이카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를 때, 나는 종종 오이카와와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언제나 곁에 있는 든든한 소꿉친구. 옆집에 사는 친구. 배구를 함께 하는 친구. 주장과 부주장. 지금까지의 관계를 거슬러서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생각하면 설렘으로 벅찼던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순 없을까.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와 하나마키를 만나고, 포기하라는 하나마키의 말에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 나와 오이카와는 연인이 될 수 없다. 그건 하나마키가 게이란 것을 알게 되고, 오이카와에 대한 내 속마음을 고백하고,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맘속으로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 실패로 끝났을 때,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마키에 기대 훌쩍거리며 나는 결심했다.


-하나마키.

-응.

-이제 결심했어.

-......

-이제 끝낼거야.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꿈이었던 전국 진출. 그만큼 오래 나의 꿈이었던 오이카와. 우리의 꿈이 끝남으로서 나도 나의 꿈을 접기로 결심했다.




눈물 질질 짜며 독하게 결심했음에도 나는 당장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혼자 아프고, 자책하고, 심지어 상대를 원망하게 만드는 짝사랑을 좋아서 계속 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결심 이전에 수천 번의 결심이 있었다. 항상 같이 등교하는 길, 아직 끝나지 않은 배구, 앞으로 있을 대학입시. 아직 곁에 오이카와가 있었기에 단단하게 마음먹었던 결심은 쉽게 부스러지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마키는 그저 바보라고 불렀다. 바보야, 아직도 뭐하고 있어. 세 살 바보는 여든까지 간다. 나는 욱하는 마음에 하나마키의 등짝을 때렸다. 그래도 하나마키는 어서 포기하라던가, 그때의 결심은 뭐였어, 라던가 나무라지 않았다.


-대학 어디 갈 거야?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진로 조사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의자를 뒤로 돌리고 앉아 있는 하나마키가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배구부는 끝났지만 대학이 남았다. 오이카와는 일찍이 도쿄의 유명한 사립대학에서 스포츠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한 번도 전국에 진출한 적이 없는 미야기의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몇 개의 대학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감독님이 말했다. 추천을 받았지만 선택지가 많았기에 방과 후 오이카와는 감독님과 상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도 센다이 시의 한 대학에서 추천을 받았다. 오이카와는 반드시 거절하고 도쿄로 가자고 했다. 이와쨩, 언제나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철없는 어린 애 같은 투정이었다.


-음, P대학교 추천받긴 했는데.

-갈 거야?

-아니. 도쿄로 갈 거야.


하나마키는 손으로 장난치던 볼펜 돌리기를 멈췄다. 톡톡, 하고 책상을 두들겼다. 저기요, 이와이즈미 씨.


-바보, 바보 거렸더니 진짜 바보가 된 거야?

-아니야, 너가 생각하는거.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


하나마키는 아마도, 내가 오이카와를 따라서 도쿄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에 미련한 소꿉친구 역할 계속 하기로 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이카와 따라서 가는거 아니야.

-그럼.

-예전부터, 대학은 도쿄로 가고 싶었어. 가도 전문대학이겠지만.

-기각.

-뭐?

-안 된다고. 도쿄는 안 돼, 다른 데 알아봐.


물론 하나마키가 온전히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단호한 대답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왜 도쿄로 대학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상한 침묵이 이어지다, 하나마키가 물었다. 빙글빙글, 하나마키의 손에서 돌아가다 톡톡, 책상을 치던 볼펜은 다시 도로록, 책상 위를 굴렀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하나마키는 이상한 대답을 들은 것 마냥 나를 쳐다봤다. 웃기고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정말로 언젠가부터 도쿄에 가고 싶었다. 도쿄는 넓다. 미야기에 비해선 좁디 좁은 땅이지만 어쩐지 넓은 곳 같다. 도쿄에 가면, 미야기에서의 일들은 과거로 남을 뿐,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 오이카와쯤은 단숨에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어디 대학?

-생각해둔 대학은 딱히 없는데. 성적에 맞춰서 가야 하니까.

-그럼 나랑 같은 대학으로 가, 이와이즈미.

-어?

-또 오이카와 바보가 되게 할 순 없으니까.


하나마키는 씩 웃었다. 어차피 배구로 대학 가려는 마음은 없었기에 2학년 때부터 가려고 생각했던 대학이 있다고 말하며 진로조사서에 M전문대학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내 진로조사서도 가져가 M전문대학을 적었다. 깔끔한 글씨는 하나마키의 것과는 달리 꾹꾹 눌러써져 있었다.


하나마키라면 옆에서 내 짝사랑이 빨리 끝나게 도와줄 것이다. 다정하지만 현실적인 하나마키. 오이카와에게 가졌던 손톱만큼의 기대도 무참히 뭉게버리는 잔인한 하나마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본심이 슬그머니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마키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깔끔한 하나마키의 글씨, 진하게 적힌 글씨가 너무 단호해 보였다.


감독님과의 상담이 끝났는지 오이카와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야? 묻는 하나마키에게 말없이 오이카와의 이름이 빛나는 액정을 보여 주었다.


-어.

-이와쨩! 어디야? 나 방금 감독님하고 얘기 끝났는데.

-어, 나 아직 학교. 하나마키랑 교실에 있는데.

-...맛키쨩이랑?

-응.


하나마키가 가방을 매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놓인 진로조사서를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일어났다. 전화기 너머로 오이카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앞서 가는 하나마키의 등을 보며 나는 괜히 머쓱함을 느꼈다. 하나마키는 내 짝사랑을 알고, 이제는 그만두겠다는 호기로운 결심의 증인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오이카와와 나, 하나마키가 같이 있을 때면 어딘가 눈치가 보였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툭 꺼내 바닥에 놓은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 하고 나를 불렀다.


-왜?


꾹꾹, 신발의 뒷굽이 눌리지 않게 손가락을 걸고 신발을 신은 하나마키는 밖을 힐끔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나랑 같은 대학 간다는거, 오이카와한테 말하지 마.

-어... 왜?

-그냥. 오이카와가 몰랐으면 좋겠어.


먼저 간다, 하고 하나마키가 등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 교문 앞에 오이카와가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땅바닥을 괜히 툭툭 차던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발견했는지 맛키~라고 부르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오이카와는 멀어지는 하나마키를 불렀지만 하나마키는 뒤도 안돌아본다.


-맛키!

-야.

-어?! 이, 이와쨩! 아니 맛키가 오이카와상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가!

-간다.

-이와쨩도 오이카와상의 말 무시하는거야?!


오이카와는 삐진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카라스노와 시합에서 진 후, 이렇게 싱글벙글하게 웃는 건 처음인데.


-뭐 좋은 일 있냐? 기분 나쁘게 실실 웃고 있게.

-헤헤, 이와쨩 귀신! 어떻게 알았어, 오이카와상 기분 좋은거!

-뭐야.

-후후훗. 놀랍게도! 오이카와상이 도쿄 S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 S대학교로 간다고?


S대학교라면, 나쁘지 않은 학교지만 오이카와는 더 좋은 학교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아는 대학교만 해도 T대학교라던가, O대학교라던가... S대학교 배구팀이 그렇게 강한 팀도 아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명해보라는 눈빛을 보내자 오이카와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짐작했는지 실없이 웃었다.


-S대학교로 가면, 장학금이라든가 주택지원 같은거 받을 수 있데.

-그...게 있으면 좋지만, 딱히 그런거 없어도 아줌마가 지원해주시잖아...?

-흠, 아니! 나 도쿄가면 자립할거니까!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자립하겠다고,

-이와쨩하고 같이 자립할거야.

-...아?


말문이 턱 막혔다. 자립이라니, 오이카와네 형편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은데 나랑 자립한다고? 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쿠소카와.

-어째서, 이와쨩?

-왜라니. 그런 일로 니 진로를 정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다른 대학으로 가도, 이와쨩 나랑 같이 살 거지?

-뭐?

-도쿄까지 가서 오이카와상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살면 외로워서 죽어.


오이카와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알고 있다. 저 녀석이 이럴 때면, 괜히 쳐진 눈썹을 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언젠가 장화신은 고양이에 나온 그 못된 사기꾼 고양이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때면, 솔직히 어떤 요구를 해도 거절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애의 얼굴이 바로 앞이고, 눈은 쓸데없이 초롱초롱하고, 투정을 부리듯 이와쨩, 하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도쿄에 가면...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이와쨩, 오이카와상이 외로워 죽어도 괜찮은거야?

-웃, 기지마.

-오이카와상 진심인데?

-난, 나는... 나는, 싫,

-이와쨩.


나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갈색 눈에 내가 비친다. 꼴사납게 부들거리고 있다. 덥썩하고 내 손을 쥔 오이카와의 손이 부들거리는게 보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손이 떨리는게 아니다. 내 손이, 내 손이 나도 모르는 새 잘게 떨리고 있다.


-이와쨩. 왜 떨어?

-무슨. 추, 추우니까! 니, 니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썰렁해서, 그래서.


횡설수설, 되는 데로 내뱉은 입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손이 잡혀 있다. 오이카와는 꼬옥, 손에 힘을 주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와쨩, 못생겼어.


집에 가자! 오이카와는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머리가 멍했다. 설마 진짜로 같이 사는건 아니겠지?


-야, 잠깐. 잠깐, 쿠소카와!


때마침 온 버스를 보고 오이카와가 뛰어, 이와쨩! 하며 뛰었다.






나는. 나는 도쿄로 가서, 미야기를 떠나,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짝사랑을 정리하고...

여전히 오이카와의 친구로 남겠다고 결심했는데.





(563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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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이와] 흩어진 꿈 1

 

 

 

 

 

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쿄로 대학갈 것.

배구는 취미로만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질 것.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오이카와란, 오이카와에게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했던 친구다.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부터 함께였다고 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러 지금의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이 아니었을 때는 많았지만 같은 학교가 아닌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 클럽에 같이 들어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서 부활동을 했으니 어지간히 같이 있었다. 거기다 더해서 서로가 옆집이라 등, 하교를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잠자는 것만 제외하고 서로의 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이인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 것은, 그렇게 충동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이카와에게 나는 둘도 없는 소꿉친구고, 나에게도 오이카와는 그렇다. 우리 둘 사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오이카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다.






중학교 때였던가. 오이카와와 내가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게.

오이카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에 푹 빠졌던 오이카와는 어느샌가 승리에 집착했다. 그 해 봄고, 시라토리자와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영입하고 처음으로 결승전에서 붙었다. 올해 꼭 전국으로 진출하자며 파이팅을 외쳤던 오이카와는 새로운 벽을 부술 수 없었다. 아무리 블로킹으로 막고, 피해도 시라토리자와에 이길 수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생긴 커다란 벽이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집착했다. 그리고 다음 해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카게야마가 들어왔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세터, 같은 포지션의 천재의 등장에 오이카와가 초조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언제나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 사람의 속마음을 콕콕 쑤시던 오이카와의 미소에 금이 갔다.


이길 수 없는 라이벌의 등장, 천재의 등장.

초조해진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걱정했다.

우시지마에게 집착하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잔인했다.

무너지는 오이카와를 보며 절망했다.

카게야마를 증오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마침내 오이카와가 이성을 잃고 카게야마에게 달려들 때, 나는 오이카와를 막아섰다. 너와 우시지마의 일이 아니고, 너와 카게야마의 일이 아니다. 우리와 시라토리자와의 일이다. 나는 오이카와가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싫었다. 단순한 아는 사이, 친구 사이의 일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가진 관계가 두려웠다.


우시지마로부터 오이카와의 관심이 수그러질 때 쯤,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원래부터 교내 아이돌취급 받았던 오이카와가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집 앞에서 만나 학교까지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오이카와의 팔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오이카와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좋은 아침, 하고 인사했다.


어리둥절하게 여자애를 바라보는 나에게 오이카와는 여자친구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안녕 반가워 이와이즈미, 라고 말하는 여자애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멍청한 얼굴로 안녕, 이라고 했었겠지. 어제부터 사귀게 되었다고 오이카와는 덧붙였다. 춥다, 그지?라고 묻는 여자의 발간 볼에 오이카와가 손을 들어 감쌌다. 응, 춥네. 누가 봐도 갓 사귄 연인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감히 너가?


나는 도망치듯 오이카와를 제쳐 앞서 걸었다. 나 먼저 간다, 떨리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다. 오이카와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존재, 나에게 오이카와는 가장 가까운 존재. 이제는 그 관계가 영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이성이 아니었으므로 아는 사람, 그 정도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저 여자애는? 내가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형성된 그 관계를 부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나는...


홀로 괴로워하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머리는 뜨거웠고, 멍했다. 혼자 분노했고, 혼자 슬퍼했다. 저절로 굳는 얼굴을 조절할 수가 없어 핑계를 대고 등, 하교를 따로 했다. 오이카와는 여자친구와 자신을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고맙다고 했다. 핸드폰 액정을 깨질 듯 눌렀다.


내가 혼자만의 감정에 휩싸여 수천 번 울음을 참았을 때, 오이카와가 시무룩한 얼굴로 집에 찾아왔다. 우울한 목소리로 헤어졌다고 말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조금도. 왜냐하면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이성에 눈을 뜬 남자애. 나조차 오이카와를 생각하면 몇 초만에 아래가 뜨거워 지는데 오이카와라고 다를 바 없었다. 성에 눈을 뜬 오이카와. 여자를 경험한 오이카와.


그 날 이후, 오이카와는 우울한 기색이었다. 그 좋아하는 배구를 할 때도 평소와 같지 않아서 배구클럽 감독님이 내게 오이카와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하자 감독님은 나보고 어떻게 해보라고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때는 내가 오이카와를 위로해서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아진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유치한 질투였다.


‘이와이즈미가 어떻게 좀 해봐’라는 말을 며칠 동안 들었을 때쯤, 차곡차곡 쌓인 질투와 걱정, 원망이 한 번에 폭발했다.


“정신차려! 여자가 걔 한 명뿐이냐?”

“이, 이와쨩...”

“그렇게 멍하게 분위기 흐리게 할 거면 그만 가! 배구 때려치우고 헤어진 여자 친구한테 가던지 새롭게 사귀던지 어떻게 하라고!”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상은 그저,”

“가! 꼴도 보기 싫어!”


그건 결코 오이카와를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오이카와를 생각했다면 왜 여자친구와 헤어졌는지, 그렇게 후회하고 슬퍼할거면 용서를 빌던지 해서 다시 사귀라고 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오이카와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했다. 배구는 또 다시 핑계거리였다.


씩씩대는 소꿉친구가 자신을 위로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오이카와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주변에서 듣고, 또 들었을 말일 텐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오이카와는 다시 배구를 연습했다. 우시와카 쨩하고 토비오 쨩에게 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해, 이와쨩. 오이카와는 배구의 세계에 빠졌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 오이카와가 여자친구를 사귈까, 매일 걱정하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교내 아이돌, 미야기 현의 아이돌로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배구부 연습게임을 할 때도 교내 학생들이 찾아와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고 인터하이나 봄고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각자의 학교 배구부를 응원하러 온 타교생들이 오이카와를 응원하게 될 만큼, 오이카와는 인기를 끌었다. 나는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애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이카와가 여자애들에게 둘러 쌓여있을 때마다 속으로 조바심이 일었다. 저 여자애들 중에서 누군가와 사귀게 될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오이카와가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부터 오이카와에게 말을 험하게 했던 것 같다.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방법이었다. 누구보다 오이카와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좋아하면서 동시에 오이카와가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나와 같지 않음을 원망했다. 가끔 심할 때면 자책감이 들었다.


-이와이즈미, 그건 좀 심했어.


속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오이카와에게 풀었을 때, 하나마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생긴 친구였다. 배구부 팀원이기도 한 하나마키는 자상하고 기본적으로 성실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게이였다. 또, 내가 오이카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단 한사람이었다. 나를 나무라면서도 하나마키는 더한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자책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남몰래 하나마키의 뒤에서 운 적이 있다. 억울하고, 슬프고, 원망스러움이 내 안을 가득 채웠을 때다. 오이카와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가 아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와 카게야마에게 다시 집착하게 된 것도 아니다. 그저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내 안에서 한계에 다다른 듯 갑자기 터진 거다. 어쩌면 처음으로 같은 성향의 하나마키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 혼자 억누른 감정,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그 절박함. 그러나 오이카와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하나마키는 다정했고, 나를 좋아했다. 그건 게이로서 이성을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다르지만 친구로서 나를 좋아했음은 틀림없다. 하나마키는 가망 없어 보이는 사랑에 목매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응원해주지 못했다. 그저 얼른 짝사랑을 끝내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게이이고, 오이카와를 좋아한다는 말을 고백했을 때 하나마키는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했다.


하나마키는 중학교 때,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어쩌다 사귀게 되었고, 얼마 안 가 헤어졌다고 했다. 좋아해서 사귀었는데 왜 얼마 못 갔냐는 내 질문에 하나마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노말은 게이완 달라. 노말이 게이와 사귀는 건 그저 잠깐의 장난에 불과해. 하나마키와 사귀었던 그 노말은 하나마키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하나마키가 게이였다는 것에 놀랐고, 신기했고, 친구와 멀어지는 것이 그때는 두려웠다고 한다. 한계가 보이는 관계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같은 성향이어서 그런지,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어서 그런지 나는 하나마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쨩 변했다며 툴툴거렸다. 언젠가 오이카와와 하교하는 길에 오이카와가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맛키쨩이 나보다 좋아, 이와쨩?


나는 덧없이 웃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알까. 내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너를 좋아했는지 알까...


-닭살 돋는 말 하지 마, 쿠소카와!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곧 이상하게 허물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이와쨩이 맛키쨩하고만 노니까 그렇지.


나는, 새삼스럽게 절친의 친구를 질투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오이카와가 내게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질투까지

일까? 친구 사이가 깨지지 않는 한, 거기까지일 뿐일까. 그 사실에 허무하고, 그저 친구의 친구에게 질투하는 것임에도 조금 기쁘다는 사실이 우울했다.


-하나마키가 너랑 같냐.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너 뿐이야, 라는 듯한 말에 오이카와는 허물어진 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덮었다. 그치? 이와쨩한테는 오이카와상 뿐이지? 오이카와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으쓱했다.


맞아. 나에게는 너 뿐이지.

그게 나는 너무 좋으면서 슬프다.



그리고 고3 겨울, 준결승전에서 카라스노와의 시합에서 패배했다. 마지막 공, 오이카와가 나에게 주었던 그 공은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 팀은 졌고, 카라스노는 이겼다. 시합이 끝나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등을 오이카와가 세게 쳤다. 곧이어 하나마키, 마츠카와가 쳤다. 결국 6년 동안 가고 싶었던 전국 진출이라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는 오이카와의 꿈을 함께 하지 못했다. 앞으로 함께 이뤄갈 꿈이 있을까.


윗옷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고 정렬했다. 응원팀 앞에 서 인사를 하기 전, 오이카와의 시선이 잠깐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각자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오이카와를 마주볼 자신이 나지 않아 모른 척 오이카와의 옆을 스쳤다. 이와쨩, 하는 오이카와의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분하겠지. 누구보다 분할 사람이 오이카와일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공이 떠있건, 떨어지는 순간 끝이야. 떨어지는 공이 잔인하다. 6년 동안 간절하게 원해올 만큼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춰서 바닥에 떨어지지 말아 주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6명이 강한 쪽이 이기는 거야,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나였다. 오이카와는 알까. 강한 6명이 더 강할 거라는 걸. 내가 좀 더 배구를 잘했으면 결과는 바뀌었을 지도 몰라, 덧없는 생각이 줄을 이었다.


-이와이즈미.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내 위로 하나마키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인 내 어깨 위로 하나마키의 턱이 얹혔다. 힘없이 늘어진 손이 하나마키의 손으로 덮어졌다.


-울지마. 내가 있어.

-......

-그동안 잘 했어. 이와이즈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마지막 공이 떨어지는 잔상인 것 같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오이카와와 나를 이었던 가장 강렬한 유대. 우리들이 꾸었던 오래된 꿈. 흩어지는 시야가 조각난 꿈인 것 마냥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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