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러브레터(2018)



(1)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카마사키는 자신이 또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세는 것조차 포기했을 만큼 자주 꾸게 되는 이 꿈을 요 몇 년간 이따금씩, 그러나 꾸준히 꾸고 있다. 꿈에서 자신은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3년 동안 땀을 흘렸던 고등학교 시절 체육관에 있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기억이 조작된 환상인지 모를 꿈에서 카마사키는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밤톨처럼 동그란 뒤통수라든지,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라든지 곧게 뻗은 팔다리라든지. 똑같은 남자의 몸을 뭐가 신기하다고 쳐다보는지 참 열심히도 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다. 이제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던 고등학교 후배.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멈춰 있는.

잠에 들었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카마사키는 눈을 깜빡이듯 잠에서 깨어났다. 슬슬 해가 밝아오는지 방 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팔뚝에서부터 싸하니 소름이 돋았다. 온몸을 덮치는 한기에 그제야 잠결에 또 이불을 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엔 잠버릇이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얌전하게 자지 못하게 되었다. 자유를 너무 맛본 탓이다.

간밤동안 이곳저곳 굳은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 들어 아침마다 스트레칭은 꼭 빠짐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고 오고 싶었지만 어김없이 내일로 미루었다. 역시 자신은 자유를 너무 맛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기를 써서 키웠던 근육은 방만해진 지금의 몸에서 이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 그래도 그 때의 노력이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제대로 된 운동을 안 하는 지금에도 나쁘지 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슬슬 찌뿌둥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머리가 몽롱했다. 사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신 터라 숙취로 인한 두통도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뇌가 두부가 된 것처럼 멍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목이 따끔한 걸 보니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듯 했다. 하필이면 할 일이 쌓인 날에 감기가 걸리다니 어지간히 재수 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얼굴이 빨갛다?”

파티션 위에 팔을 기대고 선 마코토가 말했다. 어젯밤 술에 진창 취했던 건 분명 나만이 아니었는데 숙취는커녕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억울했다. 감기라도 옮겨줄까 생각했는데 기침이 터져 나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당장 집에 가서 이불 덮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기야? 너 어제 또 자다가 이불 걷어찼지? 안 봐도 뻔하다, 새끼야.”

내가 걷어차고 싶어서 걷어차나.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네 자리로 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니 안 그래도 따끔했던 목이 누가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마코토는 퉁명스런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를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다시 카마사키의 책상에 찾아왔다.

마셔. 감기약도 챙겨왔으니까 먹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는 게 어떠냐?”

몸도 안 좋잖아, 하고 마코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카마사키는 말없이 마코토가 내민 감기약과 컵을 받고는 단숨에 약을 삼켰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은 목을 자극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카마사키는 고맙다고 짧게 말하고 마코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치에 마코토도 더 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제 자리에서 카마사키의 자리는 파티션에 가려져 서 있어도 카마사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코토는 자리에서 슬쩍 뒤꿈치를 들고 카마사키 쪽을 살폈다. 감기 기운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 된 주제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카마사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인 그의 동기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슬슬 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어제 술을 마시게 했던 건데 고집불통인 녀석은 기어코 감기를 달고서 출근하고야 말았다.

몇 년 동안 카마사키의 옆에서 일을 해 온 마코토의 생각에, 카마사키는 딱히 이 일이 미치게 좋아서 워커홀릭이 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일이 좋아서라기보다 일 때문에 바쁜 걸 좋아하는 듯 했다. 왜 그렇게까지 일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마코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좋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 억지로 상처를 후벼 팔 바에야 모든 게 좋아질 때까지 그 옆에서 카마사키를 지켜보고 싶었다. 둔한 카마사키는 마코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카마사키의 상태는 오전보다 더 나빠져 갔다. 임시방편으로 마코토가 줬던 약을 먹긴 했지만 처방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별 효과도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이 많은 날이라 반차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팀장에게 가 반차 신청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출근했을 때부터 반차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에 잘 갈 수 있겠냐며 물었다. 카마사키가 대답하려는 찰나 언제 온 건지 마코토가 자기가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럼, , 점심은.”

, 됐어. 너 목 아프니까 더 이상 말 하지 마. 너 보내고 바로 점심 먹으로 갈 테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카마사키가 대충 짐을 챙기는 사이 마코토는 컵에 물을 떠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아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이었다. 새삼 몽롱한 와중에도 카마사키는 이게 마코토의 세심한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여자한테 인기 있는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아파서 그런지 평소에는 안 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복도가 시끄러웠다.

맞다. 이번 달에 옆에 사무실이 들어온다고 하더니 오늘인가 보네?”

맞은편 복도에 축하 화환들이 줄지어 있었다. 회사명이, S-PLANT?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의외로 회사 규모는 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전에 맞은편 사무실에 있던 회사도 규모가 꽤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카마사키가 다니는 회사보다 2배는 클 게 분명했다.

“S-PLANT면 꽤 업계에서 알아주는 편이라던데. 몇 년 전에 세워진 회사이긴 한데 매년 급성장하는 데라고 하더라고, 친구가.”

마코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안을 훔쳐보았다. 그 쪽도 점심시간인지 눈대중으로 보아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미어캣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마코토를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없어진 걸 알면 알아서 오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물을 먹은 솜뭉치마냥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카마사키는 결국 모퉁이를 돌기 직전 벽에 기대어 섰다. 택시 잡아주겠다며 뭐하는 거냐, 망할 자식. 저것도 친구라고.

카마사키 씨?”

흐릿한 시야에 하얀 셔츠가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너무 새하얘서 카마사키는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잊어 버렸다. 시선을 조금 들어 올리니 베이지와 녹색이 적절하게 섞인 넥타이가 보였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넥타이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센스 좋네.

저기요. 카마사키 씨.”

남자가 성큼 다가와 카마사키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초점이 맞춰지며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꿨던 그거,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언제나 꿈인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에서 봤을 때와 남자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었던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잘려 있었지만 특유의 비대칭 앞머리는 여전했다. , 겨울 나뭇잎 같은 눈동자는 변함없었지만 그 눈은 투명한 안경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또.

오랜만인데 상태가 영 안 좋으시네요. 살아있긴 한 거에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제 목소리는 들려요?

시간이 지났어도 성격 참 건방지구나.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사람 열받게 하는 말투인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웠던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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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