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혹시 날 좋아해요?’

 

카마사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눈치 챈 뒤부터, 후타쿠치는 이따금 묻고 싶었다. 저 어색한 표정이나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신기했다. 카마사키 씨가 나를? 어쩐지 최근 이상하다 싶었더랬다. 점점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하더니 같이 있을 때면 좀처럼 집중하질 못했다. 왜 그러나 싶었지.

 

 

며칠 전 배구공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카마사키 씨는 바닥에 나뒹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연습이 중단되었고,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는 이유로 카마사키가 깨어날 때까지 후타쿠치가 남게 되었다.

 

자신을 보러 왔다는, 점심시간에 잠깐 보았던 타카하시라는 여자도 깜짝 놀란 얼굴로, 카마사키 군 괜찮겠지? 하며 은근히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얼굴이나 몸매도 꽤 취향에 맞았고 오메가 페로몬 또한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평소라면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했지만 여자는 눈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같은 반 남자애를 걱정하는 척하며 후타쿠치의 옆에 앉아 대놓고 쳐다보면서 시덥잖은 질문만 늘여놓았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대충 대답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놓고 꺼지라 했다.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울컥한 얼굴을 하고 나갔지만 후타쿠치는 코웃음만 나왔다.

 

여자는 여러모로 자신과 닮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세는 다를지라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은근히 깔보고 우러러보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 딱 그래 보였다. 보아하니 오메가인데다 예쁘다고 이전부터 주변에서 치켜세워졌을 게 뻔했다.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동족은 동족을 알아보기 때문인지 후타쿠치에게는 타카하시의 가식이 너무 잘 보였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눈치 없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 타쿠, .’

 

왠지 불쾌한 마음이 이는데 카마사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혹은 누군가를 쫓는 듯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더니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이름만 절박하게 불러댔다.

 

카마사키 씨?’

‘...타쿠, . 후타,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 일어나 봐요.’

아니, 아니야...’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 씨!’

 

울먹이는 목소리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후타쿠치는 결국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어 카마사키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카마사키의 몸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떨렸고, 눈이 떠졌다. 아주 짧은 순간,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이 멍하니 흔들리더니 고인 눈물이 흘렀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이기에 눈물까지 흘리며 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카마사키의 눈물을 훔쳤다. 멍하니 천장만 보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했다. 이상하게 울컥했다.

 

카마사키는 악몽을 꿨다며 멋쩍게 둘러댔다. 꿈을 꾸다 운 게 쪽팔렸는지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는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악몽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불렀나싶어 물어봤지만 카마사키는 당황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카마사키의 빨갛게 단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잠꼬대까지 한 줄은 몰랐겠지, 후타쿠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카마사키는 입을 꼭 다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하여간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카마사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이 흔들렸고, 당황하거나 궁지에 몰릴 때면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묘하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게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카마사키는 좀처럼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이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똥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게 불쌍해 보여서 이마를 적신 땀을 닦아주니 별안간 카마사키가 손을 후려쳤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얼굴 표정이나 눈빛, 행동과 말투 등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허겁지겁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쳐다보다 다시 한 번 카마사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단단하게 뻗어 있는 목덜미 뒤쪽,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곳을 만지자 아까보다 격한 반응이 나왔다. ,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니 카마사키의 몸이 발작하듯 뛰었다. 귓불부터 천천히 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차마 후타쿠치한테 변명도 못하고 부산스럽게 옷을 입더니 자신을 내비 두고 도망쳤다.

 

생각해보면 미심쩍게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흩어진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기분에 후타쿠치가 미소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 있지만, 카마사키 씨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저 반응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관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를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카마사키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마음을 꼭꼭 숨겨둘 가능성도 있었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씨가 고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와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은밀하게 카마사키를 떠보았다. 자꾸만 도망가는 시선을 굳이 따라가 얼굴을 마주하거나, 은근슬쩍 허리께나 등을 터치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평온했던 얼굴에 슬며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한 동안은 좋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는 카마사키의 반응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볼 때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쯤 나한테 고백할건데?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 해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까짓 거 한번쯤은 받아줄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마음을 숨겼다. 이쯤 되니 카마사키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괜히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이 여자 내 타입이네.”

난 단발머리.”

여자는 생머리가 진리 아니냐. 긴 생머리 찰랑거리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나도.”

 

연습이 끝나고 누군가 들고 온 잡지를 두고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단발머리가 취향이네, 긴 머리가 취향이네 실없는 소리가 오고 갔다. 후타쿠치도 슬쩍 끼어들어 잡지를 살펴보니 길거리 미남미녀 특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지만 절대 마주칠 일이 없는 예쁜 여자들이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드물게 관심을 보이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후타쿠치도 이런 거에 관심이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당연히 관심 없지, 멍청이들아.

 

후타쿠치도 이 중에서 좋아하는 타입 있어?”

이딴 잡지에,”

, 뭐 보고 있냐. 다들?”

 

잠시 감독에게 불려갔었던 몇몇 2학년들이 라커룸에 들어오다 한 군데에 모여 있는 1, 2학년들을 보고 뭐야, 뭐야 하며 다가왔다. 이상형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에 다들 오오~하며 후타쿠치의 손에 들린 잡지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뭐야, 후타쿠치. 너도 이런 거에 관심 있었냐? 그래서, 네 눈엔 누가 제일 예쁘냐?”

... ...”

뭔데 모여 있어?”

이 사람이 제일 취향인데요.”

 

카마사키를 발견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아무 사람이나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마사키의 시선이 후타쿠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역시 후타쿠치가 보는 눈이 있네. 여자는 자고로 하얗고, 작고 귀여워야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었군.”

...”

 

별 생각 없이 찍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마사키 씨와는 정 반대였다. 하얗지도 않고, 근육맨인데다, 귀엽지도 않다.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보다는... 뭐 굳이 말하자면 가학성을 자극하는 타입이지. 콕 찌르고, 휘두르고, 괴롭히고 싶은 그런 사람.

 

카마사키, 너도 볼래?”

, 그래.”

내가 볼 땐 카마사키 취향은 딱! 딱 이 사람이야. 어때?”

 

누군가 긴 머리의 청순한 타입의 여자를 가리켰다. 내 주변에도 카마사키랑 비슷한 친구가 있는데 걔가 이런 취향이라며 옆에서 조잘대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조용히 잡지를 읽어보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형이 그렇긴 하지. 신기하네, 딱 알아맞혔어.”

내 말이 맞지? ~ 나도 참 보는 눈치가 있다고.”

 

긴 머리에,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원피스에 구두만 신고 다닐 것 같은 이런 여자가 취향이라고? 미녀 부분을 지나 미남 부분을 넘겨보던 카마사키한테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빼내었다.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가리켰던 여자를 확인했다.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카마사키 씨가?

 

, 나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러냐.”

카마사키 씨도 참 꿈이 크시네요. 이만한 여자가 카마사키 씨를 만나줄 리가 없잖아요.”

이게 또 가만히 있는데 시비를 털어. 그래, 꿈이니까 크게 꾼다. 됐냐?”

그럼 꿈 깨요!”

냅둬, 뭔 상관이야. , 마저 보게.”

 

괜히 짜증나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던졌더니 카마사키가 요령 좋게 잡아챘다. 확 맞아버렸으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반사 신경은 좋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후타쿠치가 가버렸고, 그 모습을 카마사키가 잡지에 시선을 고정하던 눈을 들어 슬쩍 쳐다보았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을 내는지 옷을 갈아입는 후타쿠치의 등이 불끈거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근육이 오밀조밀 짜여있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감상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휘휘 젓고 잡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미녀 부분을 넘기고 미남 부분을 보는데 다들 잘생기긴 했다. 확실히 기자가 센스가 좋은지 사진도 잘 찍었고 잘생긴 사람들만 엄선한 게 티가 났다.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딱히 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게이라면 이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겠지.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이 몇몇 눈에 띠었다. 우스운 건, 그런 사람들한테 눈이 가다가도 그 사람들과 후타쿠치를 비교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 이 사람은 후타쿠치랑 머리 모양이 비슷하네. 저 사람은 후타쿠치보단 키가 좀 작고, 눈매도 다르고. 또 저 사람은 후타쿠치랑 닮긴 했지만 분위기가 틀려. 몇 번을 그러길 반복하다 카마사키는 잡지를 덮어 아무에게나 넘겼다. 누굴 봐도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만 눈에 보였다.

 

방금 전에는 청순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대충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잡지에 나온 여자들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안 갔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긴 했다. 긴 머리에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여자. 그런 여자들을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후타쿠치가 가리켰던 사진에만 신경이 쏠렸다. 결코 내가 후타쿠치의 상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후타쿠치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혹시라도 나와 공통점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자신과 공통점은 사람인 것 말고 없을 정도로 정반대였다. 작고, 귀여운 그런 여자. 나한테는 정말 가망이 없군.

 

카마사키 씨. 집에 안 가요?!”

 

카마사키가 우울함에 빠질 새도 없이 후타쿠치가 옷을 다 갈아입곤 다가왔다. 멍하니 앉아있던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카마사키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민망하게시리 후타쿠치는 그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마사키를 구경했다.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되었지만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최대한 빠르게 옷을 입었다. 또 근육 키우는 운동 했어요? 날이 갈수록 가슴이 커지잖아요, 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 후타쿠치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오늘은 무슨 일 없냐? 금요일인데.”

별로 없는데요. 왜요.”

그냥, 요즘은 매일 같이 하교하네. 작년에는 여자, 친구랑 만나기도 했잖아.”

 

티셔츠 위에 저지를 겹쳐 입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요전번에 타카하시가 물어봤을 때부터 궁금했었던 거였다. 없는 눈치로 살펴본 결과 지금은 후타쿠치에게 여자친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달라지곤 했으니까. 선후배 사이라면 이런 거쯤은 궁금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카마사키는 태연하게 가방을 정리하는 척 했다. 괜히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꺼내서 라커에 정리하다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반면 후타쿠치는 꾀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카마사키의 등을 관찰했다. 깜빡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요란하게 가방을 뒤적이는 모습에 그냥 스치듯 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 그런 척 해보이더니, 결국 아까부터 자신의 여자 취향이라든가 여자친구의 유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자신에 관련해서는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은근 심술이 나 장난을 쳤다.

 

주말이 있잖아요. 설마 제가 여자친구가 없겠어요?”

“... ?”

 

건전지가 다 된 시계처럼 똑딱, 하고 핸드폰을 집으려던 카마사키의 손이 한 순간 멈췄다. 속으로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꽤 컸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 그렇구나. 형식적인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에 자신의 손끝이 가방 속에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러냐, 병신같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까 저지를 껴입길 다행이었다. 카마사키는 주머니에 주먹을 쥔 손을 처넣었다.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잘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가자.”

... .”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조용했다. 사실이 아니길 내심 바랐던 게 사실로 밝혀져 기분이 가라앉은 카마사키는 둘째 치고, 후타쿠치도 그런 카마사키에게 실없는 장난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실 후타쿠치는 라커룸을 나올 때부터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적어도 카마사키가 당황한 얼굴을 보이거나 놀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태연하게 웃어넘기려고 노력한다던지.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래? 하고 싱거운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처럼 태연함을 가장하려 노력했다면 몰라도, 확연히 생기를 잃은 얼굴은 우울함을 내비치고 있어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떠보기가 망설여졌다. 밀고 당기며 장난치다 똑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같았다.

 

괜히 창밖을 구경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흘끗 카마사키를 보니 아까부터 쭉 무표정이다. 약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카마사키는 평소에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었다. 후타쿠치와 치고 박고 싸울 때는 흥분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배구를 할 때는 크게 웃기도, 힘들어 하기도 분해하기도 했다. 툭 건들면 파르르 반응하는 미모사처럼 건드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무표정은 영 어색했다. 차라리 침울해 하는 얼굴을 하던가,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후타쿠치는 공연히 아무 죄도 없는 카마사키를 탓했다.

 

그게 죄책감이라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에게 아무 말이나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마사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거의 다 와갔다.

 

나 먼저 내린다. ...... 주말 잘 보내라.”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하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카마사키가 말했다. 평범하게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이었지만 숨겨진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자친구랑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덜컹, 순간적으로 버스가 과속방지턱에 걸렸는지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후타쿠치의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할까 말까 곱씹었던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끼익, 하고 버스가 멈추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카마사키는 다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후타쿠치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오르내리는 얼굴이 익숙했는지 운전사가 내리지 않고 서 있는 카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카마사키 대신 후타쿠치가 고개를 저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지금 여자친구 없다고요.”

... ? 아까는 있다고 했잖아.”

 

네가 주말에 만난다며, 카마사키가 멍하니 후타쿠치를 내려 보았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후타쿠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카마사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 사뭇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런 거짓말을... 왜 했는데?”

그냥요. 굳이 말하자면 장난? 재밌으니까?”

뭐가 재밌다고,”

카마사키 씨 놀리는 게 재밌으니까요.”

“... , 하나도 안 재밌어.”

 

카마사키가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땅 끝까지 뚫을 기세로 가라앉았던 기분을 누가 확하고 끌어올린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려 했다. 카마사키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오른쪽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얘가 진짜 뭐라고 요 몇 개월을, 하루 종일 수 십 번도 넘게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지. 진짜, 나 진짜 어떻게 하냐.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후타쿠치가 진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냐.

 

요전번 꿈에 나왔던 타카하시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 때는 꿈에서 깨자마자 후타쿠치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지나갔었지만, 그 후 반에서 타카하시를 마주칠 때마다 멈칫하곤 했다. 답지 않게 여자애를 상대로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본능적으로 마음이 뒤틀렸다. 또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보러 올까, 만약 고백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다행히 무슨 일인지 그때 이후로 타카하시가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럴까 두려워했다. 떳떳하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은 타카하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정작 후타쿠치는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혼자만 애달파하는 게 싫었다. 그냥 조용히 사드라든다면 좋겠다고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하지만 카마사키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타쿠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마음은 차츰 커져만 갔다.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몇 번 맡아보지 못했던 희미한 체취도 좋았고 언제나 똑바로 직시해오는 다갈색의 눈동자도 좋았다. 빈 말이라도 후타쿠치의 모든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좋아졌고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차라리 싫은 점이 부각돼서 질려버렸다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그냥 저런 애였지, 하고 납득해버리고 만다.

 

... 그냥, 고백해버릴까. 시원하게 차이게.

 

후타쿠치한테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무슨 말이 되돌아올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분명 차일게 분명하고, 기대 같은 건 애초에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해본 적 없기에 차이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예상이 갈 정도다. 그보다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 후타쿠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가 두려웠다. 후타쿠치라면 자신을 경멸하거나 두고두고 약점으로 잡을지도 몰랐다. 싸늘하게 식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아파하는 것도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뭐해요?”

 

고개를 묻은 팔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바로 밑에서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와 눈이 맞았다. 재밌겠다며, 남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얼굴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악마가 깃든 천사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얼굴을 원망스럽게 보다 별안간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후타쿠치. ,”

?”

나 널, ......, 좋아, .”

뭐라고요?”

 

안 되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후타쿠치가 다시 캐물었다. 작아서 안 들렸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카마사키가 입을 달싹거리다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나왔다. 이대로 장난이었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아직은, 도망칠 수 있다.

 

똑바로 얘기하세요, 카마사키 씨. 답지 않게 피하지 마시고.”

 

덫에 걸린 생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다 카마사키가 홀린 듯이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또박 또박 흘러나온 말을 듣고 당황했는지 후타쿠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색하게 입술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카마사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 아니 뭘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내가 널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 .”

“...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원래는, 혼자 마음 정리하려고 했는데. ... 잘 안 되더라.”

“......”

그래서, 내 말은 그러니까... 차라리 차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한 거야.”

 

버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가득 차 미끌거렸다. 미칠 듯 뛰는 심장에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카마사키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달리고 있는 버스가 아니었다면 뛰쳐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마사키는 안절부절 못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고백 따위 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차마 빨리 나를 차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후타쿠치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마사키 씨가 절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 그렇겠지.”

좋아요, 그럼. 사귈까요?”

... 뭐라고?”

 

사귀자고요, 후타쿠치가 재차 말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어리둥절했다. 사귀자는 말이 내가 알고 있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맞나?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아무리 매사에 별 신경을 안 써도 그렇지, 가벼워도 너무 가볍잖아. 혹시라도 아까처럼 거짓말을 치는가 싶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장난으로 고백한거 아니다.”

사귀고 싶어서 고백한 건 아니고요? 카마사키 씨가 사귀자고 해서 사귀자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카마사키 씨야말로 저한테 지금 장난쳐요? 사귀자는데 왜 말을 못 믿어요? 먼저 고백한 건 그쪽 아닌가?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쏘아댔다. 연달아 쏟아지는 말에 카마사키가 어어, 하며 점점 말려들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가? 정말로 사귀자고 말하는 건가?

 

하지만, ?

 

그래서 지금 싫다 이거에요?”

 

격하게 숨을 몰아 내쉬더니 후타쿠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잔뜩 찡그린 눈가가 눈에 띄었다.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찌푸려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싫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상대와 사귀게 된다는데 싫어할 리 없었다. 다만 왜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얘기하는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후타쿠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보고 눈치가 없다지만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마사키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물었던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좋아.”

 

카마사키의 말을 듣자마자 후타쿠치가 이마에 닿은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챘다. 잡힌 손 아래로 순간 뿌듯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저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왕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제쳐 놓아야 했다. 그저 곁에 있을 수 있고, 딱 그만큼만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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