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큐피트(Cupid)

2017. 8. 12. 04:03 from
-엄청 가볍게 휘리릭 쓴 글



"부탁이 있어요."
헛 것을 들었나. 카마사키는 귀가 이상해졌나 싶어 귓구멍을 파봤지만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얼굴 가득 물음표가 달려 있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부탁 좀 들어 주세요, 카마사키 씨. '부탁'이라고? 지금 나한테 '부탁'이 있다고 말한 게 맞나? 앞에 서 있는 후배가 내가 알던 그 시건방진 후타쿠치가 맞는 건가?
"뭐라고?"
"...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벌써부터 귓구멍 막혔어요? 부탁 좀 들어 달라고요."
"아... 후타쿠치가 맞긴 하군."
평소의 톡 쏘는 말투가 돌아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아까는 영 후타쿠치답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됐나 싶었었다. 그보다 후타쿠치가 '부탁'이란 말을 쓸 정도로 뭘 부탁하고 싶은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대체 뭐지?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미리 말하지만 물어봤다고 해서 들어준다는 건 아니야."
"...해요."
"뭐? 똑바로 말해. 하나도 안 들려."
"...모니와 씨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요."
분명 귀가 이상한 게 아닌데 또 헛 것이 들렸다. 모니와랑 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카마사키의 시선을 피하며 후타쿠치가 답지 않은 얼굴로 재차 말했다.
"제가 ...모니와 씨를 좋아하거든요."
"...하?"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수줍은 소녀처럼 말하는 저 녀석이 정녕 후타쿠치인가? 누가 후타쿠치의 탈이라도 쓴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녀석답지 않아 등 뒤로 소름이 끼치는 듯 했다. 평소같지 않은 후타쿠치에 당황한 카마사키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후타쿠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한 번 쉼호흡을 하더니 덥썩 카마사키의 어깨를 잡았다.
"카마사키 씨가 늘 말하던 B반의 타카하시 있죠."
"어, 어어...?! 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알 바 아니고요. 제가 모니와 씨랑 잘 되면 타카하시 소개해 드릴게요."
후타쿠치가 갈색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카마사키는 순간 동그란 갈색 눈이 인상 깊었던 타카하시가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교내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해 자꾸 신경 쓰이던 그녀였지만 쑥스러워서 말 한 번 걸어본 적 없었는데! 후타쿠치가 타카하시에 대한 제 은근한 마음을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둘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마사키는 어깨에 놓인 후타쿠치의 손을 떼내고는 힘껏 마주 쥐었다.
"나만 믿어라, 후타쿠치!"
후타쿠치가 빙그레 웃으며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근데 너 게이였냐? 니가 모니와를 좋아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게이라기보다는... 남자가 좋다는 생각은 모니와 씨가 처음이거든요. 그럼 바이가 되나? 바이인가 본데요?"
남의 말하냐?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데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하나도 없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이런 문제에까지 가볍다니 두 손 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데? 고백하는 거?"
"뜬금없이 뭔 고백이에요. 진짜 연애 한 번 못 해본 거 티내지 좀 말아요, 촌스럽게."
"그럼 뭐 어쩌라고. 도와달라는 자식이 뭐 이런 태도야?"
"다 A부터 Z까지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말하자면 저는 아직 고백할 단계는 아니라는 거죠. 모니와 씨랑 선후배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고요. 알아 듣겠어요?"
지금 고백했다간 마냥 어색해질 뿐이라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런, 유치원생한테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났다. 지는 뭐 처음부터 연애 잘했나? 잘난 척은.
"그러니까 뭐. 본론부터 얘기 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카마사키 씨는 모니와 씨랑 친구잖아요. 모니와 씨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세요."
"모니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뭐가 궁금한데?"
"기본적으로 뭘 좋아한다든지, 취미는 뭐고 이상형은 누군지. 보통 주말에는 뭘 하는지 등등. 카마사키 씨가 상상을 해 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뭐가 궁금하겠어요? 예를 들면 타카하시한테."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가만 타카하시를 떠올렸다. 사실 카마사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같은 학교, 한 살 연하라는 것과 외모가 귀엽다는 것밖에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까 다 궁금한데."
"그러니까 뭐든지 저한테 알려 달라고요. 이제 감이 좀 잡혀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잠깐 기달리라고 말하고는 후타쿠치는 제 가방에서 노트 하나와 볼펜을 꺼냈다. 대뜸 뭐하자는 거지?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후타쿠치가 울컥 짜증을 냈다.
"안 말해주고 뭐 해요?"
그걸 또 적어두려는 거였군. 후타쿠치는 벌써 볼펜을 손에 쥐고는 카마사키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받아쓰기 시험에서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초등학생 같아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 쓴다, 애 써."
킥킥대는 카마사키에게 열 받은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어깨 위를 볼펜 꼭지로 푹푹 찔렀다. 아프다고 피하면서도 카마사키의 웃음소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모니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날부터 후타쿠치는 틈이 날 때마다 카마사키를 찾아왔다. 연습시간에는 대부분 모니와와 함께 있으니 다가오는 건 그렇다 쳐도, 점심시간에도 3학년 교실 안으로까지 들어온다. 모니와를 보고 싶기는 한데 직접 찾아가기에는 일일이 핑계를 대는 것이 골치 아파서 아예 카마사키에게 가는 거였다. 처음엔 모니와의 반인 C반을 냅두고 왜 우리 반에 오는지 몰랐던 카마사키는 우연히 C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후타쿠치를 보고 깨달았다. 후타쿠치는 여기까지 뻔뻔하게 와 놓고 정작 모니와가 있는 교실 문턱은 넘지도 못하고 있는 거였다.
평소 행실대로 가벼운 연애만 하고 상대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시 할 것 같은 녀석이 중학생처럼 안달나 있는 모습이 너무 의외여서, 카마사키는 태연한 척 교실 안을 훔쳐보는 후타쿠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녀석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거겠지? 어떻게 사람이 아예 변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후타쿠치는 모니와를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다가가는 것도 망설이는 거지? 후타쿠치가 C반을 지나쳐 2반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 카마사키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부실에서 일지를 쓰던 모니와가 괜히 뺨을 긁으며 말했다. 카마사키는 그제야 제가 모니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거 아냐. 다 써 가냐?"
"으음. 조금만 더 쓰면 돼. 일부러 기다리게 해서 미안."
"괜찮아요, 모니와 씨. 카마사키 씨한테는 어차피 남아 도는 게 시간이니까요."
카마사키의 옆에 앉아 빈둥거리던 후타쿠치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은 틈만 나면 왜 나를 걸고 난리야? 동네 북이 따로 없다. 카마사키는 발을 뻗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건방진 자식, 선배도 모르는 놈, 이중인격 같으니.
"무슨 개소리냐.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뭘 안다고,"
"미안, 카맛치! 나 때문에..."
"아냐,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저 자식이 괜히 시비 걸어서 그런 거지. 넌 안 바쁘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할 일 없으면 가서 청소나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제 몸을 밀어내는 카마사키의 발을 잡아채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카마사키의 자세가 무너졌다. 저 자식이!
"신경 안 써주셔도 알아서 잘~하거든요?"
"이거 놔, 놓으라고."
"먼저 건드린게 누군데? 하여간 카마사키 씨가 말끝마다 튕기니까 제가 자꾸 건드리고 싶은 거 아니에요."
"튕기긴, 젠장, 개소리 하지 말고 놓으라고!"
카마사키의 발버둥에도 후타쿠치는 안간힘을 쓰며 카마사키의 발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둘 다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니라 모니와가 일지를 다 쓰고 나서 두 사람을 말리러 올 때까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엎치락 뒤치락 거렸다. 땀이 뻘뻘 나서는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모니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네 정말 사이 좋다. 응?"
"사이가 좋긴 누가, 저런 이중인격이랑!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저야말로 고릴라같은 선배랑은 친해질 마음 하나도 없거든요!"
너 말 다했냐, 카마사키 야말로 나이도 많으면서 초딩이냐. 가만히 냅두면 밤이 샐 때까지 저러고 있을 터라 모니와는 부실 불을 꺼버리고 문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후타쿠치와 카마사키가 부랴부랴 뛰쳐 나왔고 둘의 신경전도 끝이 났다.

[주말에 약속 잡아요]
부실 문을 잠그는 모니와의 뒤에서 후타쿠치가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 내내 이제는 슬슬 모니와와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그러더니. 후타쿠치가 모니와 쪽으로 턱을 까닥이며 카마사키에게 눈치를 줬다.
'타.카.하.시.'
소리없이 후타쿠치가 입술을 움직여 타카하시의 이름을 강조했다. 아, 타카하시. 카마사키는 왠지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교내에서 타카하시와 마주친 것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그 날 하루가 구름 위에 선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었는데.
뭘까? 카마사키는 순간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러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몰래 당황을 삼키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의 시선이 날아왔다. 후타쿠치는 왜? 하고 입술을 오므리고는 속삭였다. 그에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려 할 때, 모니와가 뒤를 돌았고 동시에 후타쿠치의 시선이 움직였다. 자석처럼 모니와를 향해.
"갈까?"
그래, 대답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약속, OK
. 모니와의 등 너머로 카마사키의 고갯짓을 발견한 후타쿠치가 들뜬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설레면 원래 저렇게 빛나 보이는 건가? 왠지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따라 웃었다.

모니와는 주말에 약속 있냐는 말에 눈동자를 댕그르르 굴리더니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심심해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같이 보러 가자든가, 서포터를 사러 가자든가(카마사키는 자신이 서포터를 안 낀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하다못해 연습 하자든가 카마사키는 핑계를 댈 생각도 못했다. 그냥이라니 모니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그러자고 말했다. 뒤늦게 후타쿠치도 함께라는 말을 하자 모니와가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약속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단지 무슨 이유로 만나자는 건지 궁금해하는 듯 긴장한 얼굴을 했다.
[약속 잡았어. 근데 만나서 뭐 하려고?]
집에 도착해 바로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도착했다.
[뭐라고 하면서 약속 잡았는데요?]
[그냥]
[그러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이라고 했다니까. 그냥 심심해서.]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왔던 답장이 몇 분이 지나고도 오지 않았다. 설마 문자 보내다 잠이라도 들었나? 카마사키는 답장이 안 오려나보다 생각하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방에 돌아오자 핸드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 대체 뭐야?
<뭐야, 왜.>
<뭐야, 왜?? 대체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후타쿠치가 미친듯이 짜증을 내며 말을 쏘아붙였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무리 내가 약속을 형편없이 잡았다고는 해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그래도 아까부터 기분 잡쳤는데 후타쿠치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야. 너야말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지 마라. 내가 제대로 말 못한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기냐?>
<......미안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러게 왜 약속을 잡아도 그렇게...>
아니아니, 이제 됐어요. 흥분으로 커졌던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나 한 번 상한 기분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대충 후타쿠치에게 약속 일정만 말해준 뒤 뭐라 말을 걸으려는 후타쿠치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중인격 같으니.
카마사키는 젖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안하고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한데 뭐 때문에 자신이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끝없이 답답하고 우울해져 갔다.
...외로워서 그런가. 분명 자신은 후타쿠치가 누군가를 애가 타게 좋아하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이래서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이라고 하는가 보다. 카마사키는 하루라도 빨리 모니와가 후타쿠치와 잘 되어서 타카하시를 소개받기를 바랐다. 나도 연애를 하면 외롭지 않게 될까? 사소한 거에 기뻐하며 빛나는 웃음을 짓게 될까? 카마사키는 그 때 봤던 후타쿠치를 생각하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카마사키가 아무렇게나 잡은 약속을 후타쿠치가 뭐라 수습했는지 모니와는 들뜬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낯선 조합에 긴장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영화보러 가자는 걸 제가 카마사키 씨한테 부탁했다고 말했어요."
"어."
"......"
"뭘 쳐다 봐. 왜? 할 말 있냐?"
"저번에는 제가,"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그 땐 미안했다. 좀 예민해져 있었나 봐.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모니와랑 잘 해 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괜찮다고 말했는데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무시하고 영화 포스터에만 주구장창 바라봤다. 카마사키의 취향도 아니고, 좋아하는 배우도 안 나오지만 포스터를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멀뚱히 후타쿠치와 모니와가 잘 되가는 꼴을 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서 그러니까 괜히 자신이 외로워지는 거다.
후타쿠치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서 포스터를 뺏어 갔다. 시선을 들자 후타쿠치가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 받아 하는 얼굴은 본 적 있지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 때문에? 카마사키가 왜 그러냐는 말을 하려는 찰나 후타쿠치가 도리어 물었다.
"화 났어요?"
"뭐?"
"저번에 그런 말 해서, 화 났냐고요. 왜 저 무시해요."
"화 안 났다니까. 나한텐 신경 끄고 넌 모니와나 챙겨. 기껏 약속 잡았는데 나랑 싸우면 뭐가 되겠냐?"
"......"
"가 봐. 나 진짜 화 안 났어."
다시 포스터를 뺏어 들고 손을 젓자 후타쿠치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모니와에게 갔다. 그래, 넌 얼른 모니와랑 잘 되서 나한테 타카하시나 소개 시켜 주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 카마사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씨에 애써 읽으려 노력했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 살면 안 된다고, 어른들이 툭하면 그러는 걸까? 허전한 옆자리도, 시큰거리는 가슴도, 답답한 기분도 무엇 하나 짜증나지 않은 게 없다. 내가 혼자라 그런가. 카마사키는 앞 좌석의 모니와와 후타쿠치를 보며 시큰둥하게 외로움에 대한 고찰을 했다. 관심도 없고 취향도 아닌 영화따위 애초에 볼 마음도 없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운드와 현란한 화면을 보다 카마사키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닥거리는 두 사람만 관찰했다. 이중인격. 후타쿠치는 아까 저와 실랑이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내내 싱글벙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모니와도 영화가 재밌는지 동그란 얼굴이 밤송이처럼 더 동그래 보였다.
살 맛 났구나. 완전히 커플 같아 보이는 모양새에 카마사키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 때 후타쿠치가 뒤에서 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보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잘 되가고 있다는 걸 확인해주는 그 잘난 웃음에 카마사키는 마주 웃어주지 못했다.
바라던 대로 다 잘 되가고 있는데. 후타쿠치는 모니와와 사귀고, 카마사키는 타카하시를 소개 받고.
곧 외롭지 않을 텐데, 왜 이다지도 가슴이 답답하고 모든 걸 후회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후타쿠치는 젤리를 질겅이며 내내 흥얼거렸다. 토요일에 모니와랑 영화를 봤던 기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C반으로 가버리지 왜 또 우리 반에 오는 건지.
"잘 되가냐?"
카마사키가 떠보듯이 말하자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말해 뭐하냐는 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도, 젤리가 질겅거리는 소리도 가만 있자니 짜증이 났다.
"그럼 C반에 가지, 왜 우리 반에 와? 안 그래도 2학년이 뻔뻔하게 3학년 교실 들어온다고 뭐라 한다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다."
"이상하네. 나한테 그런 말 한 사람 없는데. 그리고 같은 학생인데 3학년 교실이라고 못 들어갈 건 또 뭐야."
"3학년은 다들 너랑은 달라서 예민하거든? 알면 우리 반엔 이제 오지 마."
카마사키는 턱을 괴고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귀찮고 거슬리니 너네 반으로 가든지 모니와한테 가버리라는 듯 손을 내젓는 그의 뒤에서 후타쿠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카마사키 씨도 요즘 되게 예민한 거예요? 취직 못할까봐 걱정되서 그러는 거죠?"
"너! 너... 이..."
뭐라고 한 번 해보라는 듯한 얼굴에 헛소리 하지 말라든가, 닥치라든가 내뱉으려던 카마사키는 휙 고개를 돌려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지뢰를 밟혔음에도 지금은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카마사키가 반응을 안 하자 후타쿠치는 오히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야. 진짜 취업 못할까봐 신경 써요?"
"......"
"그래서 요즘에 기운이 없었던 거예요? 그거 때문에?"
"신경 꺼. 점심시간 다 끝나가니까 너네 반으로 가라, 이제 좀."
"대답해봐요. 정말 그것때문에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는 거냐고요."
이 자식이 비유를 해도 그딴... 카마사키는 화낼 기력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후타쿠치가 어떻게 받아들이던 지금은 그냥 우울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힘없이 펄럭이는 나부랭이처럼 손을 흔들자 후타쿠치가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가버렸다. 자식, 말 한 번 참 잘 듣는다. 곁에 있어도 거슬리고 없어도 거슬리는 모순된 기분에 카마사키는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슬슬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최근 자꾸 기력이 없어지는 것 같다.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려퍼졌다. 5교시는 영어라 듣기 싫어도 일어나 있어야 했다. 영어 선생님인 가와시마는 노처녀라 그런지 유난히 히스테릭해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꼴을 가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실 뒷편 사물함에서 영어 교과서를 꺼내려 일어나는데 뒷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문을 열 사람은 선생님뿐이 없는데 가와시마가 뒷문을 열 리가 없었다. 교실이 웅성거리며 뒷문을 연 사람에게로 이목이 주목되었다. 놀랍게도 후타쿠치가 서 있었다. 후타쿠치는 사물함 옆에 서 있던 카마사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어?"
"기운 차리라고요.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거 아니잖아요."
뛰어 왔는지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넥타이고 셔츠고 흐트러져 있는 모양새에 카마사키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후타쿠치가 억지로 카마사키의 영어 교과서 위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모나카였다. 가끔 당길 때마다 카마사키가 종종 사먹곤 하는, 매점에서 파는 모나카.
"......"
"...어..."
"......"
"너, 교실은..."
후타쿠치는 할 말을 쉬이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뒤늦게 카마사키가 시간을 확인하고 후타쿠치를 교실에서 내보내는 순간 앞문으로 가와시마가 들어왔다.
"뭐야! 거기, 2학년 아니야? 종이 울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 교실 하나 못 찾아가? 너! 2학년 몇 반이니!"
"아, 가와시마 선생님. 얘는 제가 뭘 부탁해서..."
일 났다. 가와시마가 오기 전에 내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놀라는 바람에 후타쿠치를 보낼 생각을 못했다. 게다가 2학년이니 잘못 하면 완전히 눈 밖에 날 상황이라 카마사키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카마사키의 앞으로 후타쿠치가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가 모범생인 척 눈썹을 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가와시마 선생님. 종이 울린 줄 미처 몰랐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수업을 시작해야 하니 나중에 따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뭐, 뭐어... 그, 그러렴. 얼른 너네 반으로 돌아가도록 해."
"실례했습니다."
후타쿠치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가와시마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교과서로 감쌌다. 하여간 뭐든 잘생겨야 되는 구나. 카마사키는 자리로 돌아가며 뒷문을 흘끗 보았다. 문을 닫는 틈 사이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후타쿠치는 모범생 가면을 벗고 피식 가볍게 입술을 휘었다.

믿기진 않지만 후타쿠치는 자신을 신경써준 거였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매점까지 가서 모나카를 사온 것이며, 제 앞에 서서 가와시마에게 죄송하다고 한 것이며. 대체 후타쿠치가 답지 않게 왜 그랬을까?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주고 간 모나카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모나카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말해준 적이 있나? 모나카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노인네 취향이라며 놀려댈 게 뻔해서 비교적 친한 사람들만 아는 사실인데.
아, 그러고보니 말했었다. 후타쿠치가 모니와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을 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라는 이유로 후타쿠치는 모니와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을 카마사키에게도 던지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자신에 대한 것도 말했었다. 말해 놓고도 후타쿠치가 기억해줄 줄은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녀석 의외로 기억력이 뛰어난 편인가 보군. 카마사키는 모나카를 먹을 생각은 안하고 손 안에 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기만 했다. 어쩐지 포장을 뜯고, 모나카를 먹어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점에서 파는 거일 뿐인데 누가 줬다는 것 만으로 의미가 부여된다니 참 허무하고 씁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나카를 먹어치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먹든 먹지 않든 어느 쪽이든 허무함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후타쿠치에 대해 궁금해졌다. 단순히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생일은 언제이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와 같은 기본적인 건 이미 알고 있다. 후타쿠치가 제 입으로 떠들어댈 때는 들어서 뭐하나 싶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들어놓길 잘했다 싶었다. 이토록 누군가 궁금해질 줄은 몰랐다. 카마사키가 무엇보다 후타쿠치에게 궁금한 것은, 후타쿠치의 마음이었다.
"넌 모니와가 왜 좋아?"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의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자니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도 카마사키가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괜히 물어봤다. 마음 속으로 땅굴을 수십 번을 파며 후회했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그냥, 그냥 궁금했다고 해 버릴까.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여려는 동시에 후타쿠치가 선수를 쳤다.
"왜 좋아하냐구요?"
"어, 어어...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니와는 남자인데 왜 좋아하나... 그냥 궁금해져서."
"으음."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것 같던 후타쿠치는 눈마저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이 좋아하는 이유가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걸까? 카마사키는 이런 게 왜 궁금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유를 몰라 답답하면서도 후타쿠치가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체 나는 저 자식에 대한 게 궁금해도 이딴 게 제일 궁금할까? 카마사키가 제 마음을 헤아려보는 동안 고민을 마쳤는지 후타쿠치가 눈을 떴다.
"착해서."
"... 그 뿐?"
"...작아서?"
"왜 의문형이냐?"
"...귀여워서...?"
왜 하는 말마다 이딴 식이지? 혹시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건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제대로 된 대답을 강요했다. 그러나 후타쿠티는 세 가지까지 말하고는 그만, 하고 외쳤다.
"아! 이딴 게 뭐가 중요해요.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지. 그보다, 이게 왜 궁금해요?"
"어?"
"내가 모니와 씨를 왜 좋아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왜 궁금해하는 거냐고요."
후타쿠치의 얼굴이 다가오면서 갈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깝게 보였다. 부담스러워 얼굴을 치우자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도망가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팔을 잡아챘다. 왜? 후타쿠치가 물었다. 물어봐주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냥."
"그냥?"
"...그냥 궁금했어."
진짜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물었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너가 좋아하는 사람을 너는 왜 좋아하는지. 왜 그 사람 앞에서 항상 빛이 나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지.
그냥...
인정한다. 난 어떻게 하면 너가 날 좋아해 줄 수 있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그것만 궁금했다.

[이번 주말에 약속, 중간고사]
한동안 뜸하더니. 카마사키는 어느새 와 있었던 문자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친절하게 핑곗거리도 가르쳐주다니 정말 애를 쓰는군.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으아아악, 하고 소리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사랑의 큐피트같은 걸 자처해서 이 지경이 되었나. 도와달라는 놈에게 반해버린 제 꼴이 처량하다.
그러지 말걸. 타카하시 따위, 귀엽긴 하지만 어차피 사귈 가능성도 없었는데 넘어가지 말걸 그랬다. 애초에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수백번을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제 와 후회를 해봤자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마사키는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이대로 고백도 못하고 차이는 건가. 남자한테 고백할 생각을 다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제 꼴이 우스운데 차이는 게 당연하다는 게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도와달라고 말만 안했어도 똑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나쁜 자식. 모든 일의 원흉 같으니. 짜증나는 놈. 어쩌다 저런 놈이 좋아졌을까.
아는 욕을 모두 후타쿠치에게 쏟아내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답장도 안한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문자를 보냈나.
[고백할 예정]
나쁜 개새끼. 나는 차일 게 뻔해서 고백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지는 잘 되가고 있다 이거지? 후타쿠치 개자식. 카마사키는 베개가 터질 때까지 울분을 쏟아냈다. 도움도 안 되는 자식! 개자식!
차마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혼자 화를 참다가 우울해졌다가 짜증을 냈다가 기어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슬퍼서는 아니고 분해서였다.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후타쿠치는 그렇다 쳐도, 카마사키에겐 모니와 또한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잘 되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시험기간에는 종종 모니와의 집에 가서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기에 주말 약속은 자연스럽게 모니와네 집에 가는 걸로 정해졌다. 후타쿠치는 모니와네 집에 처음 가는 거라며 전날부터 들떠서 전화를 걸어왔다. 속은 타들어가는데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 때문에 배가 아팠다. 카마사키의 사정을 모르는 후타쿠치는 근처 역에서 만나 같이 가자며 말했다. 그 말에 카마사키는 배가 아프다 못해 제 배가 뻥 뚫렸나 싶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탓이었다.
가뜩이나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데 고백에 들뜬 후타쿠치를 데리고 가서, 화기애애하게 고백 할 분위기를 만들고, 거기다 둘이 잘 되는 모습까지 내가 꼭 봐야 하나? 아니, 그런 변명을 내세울 필요없이 그저 싫었다. 도저히 못 볼 것 같았다. 어차피 잘 되가고 있다는데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러나 후타쿠치는 이제 둘이 만나도 괜찮지 않겠냐며 사양하는 카마사키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와준다면서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발 빼지 마세요. 차가운 말투에 핸드폰을 대고 있는 귀에서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결국 카마사키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참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어째서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걸까. 마음은 한 발자국도 집에서 나오기 싫었는데 몸은 머리와는 달리 잘도 움직였다. 카마사키는 가라앉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어 모자를 뒤집어 썼다. 모자를 쓰면 눈매가 더 사나워보여서 평소엔 질색을 하는데 얼굴을 숨기는 것에 있어선 모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비라도 오면 우산을 쓸텐데 날씨는 쓸데없이 화창했다.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예뻐서 더 짜증났다. 왜 하필 날씨도 이런거지.
"웬일로 일찍 왔네요? 전 이미 선물까지 준비했어요."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바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안그래도 쓸데없이 약속을 잘 지키는 자신에게 화가 난 참이었다. 일찍 도착하면 할 수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마음을 다잡을 새 없이 모니와네 집에 도착할 듯 하다. 카마사키는 모자를 다시 꾹 눌러쓰고는 후타쿠치에게 다가갔다. 평소보다 신경 쓴 태가 나는 후타쿠치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흘끗 시선을 주었다. 단지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있어도 잘생긴 놈이 그 주위를 환하게 비추듯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모자가 시야를 조금이라도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앞장섰다.

"뭘 선물까지 사 왔어?아무튼 고맙다. 아 그래도 집에 먹을 거 없었는데 같이 먹으면 되겠네."
차랑 같이 준비해갈게, 후타쿠치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모니와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방에 간 모니와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데리고 2층 모니와의 방으로 갔다. 카마사키야 워낙 둘 사이에 허물이 없다곤 쳐도 후타쿠치도 온다고 했는데 모니와의 방은 남자애의 방답게 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신경 좀 쓰지, 겉보기와 달리 깔끔한 걸 좋아하는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데나 앉아 있어. 얘는 사람이 온다는데 청소도 안 했네."
"왜 카마사키 씨가 치워요?"
"어? 그냥, 여기 오면 맨날 내가 정리해주거든. 내가 이런 걸 좀 못 참아서."
"흐응. 많이 와봤나 보죠? 너무 익숙한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카마사키 씨 방인줄 알겠어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건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날선 말투에 대꾸하려다 관두었다. 괜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진정하자, 카마사키.
"막연하게만 느꼈던 건데, 모니와 씨랑은 얼마나 친한 거예요? 두 사람이 제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것 같아서 조금 짜증나려고 하네."
손에 쥔 노트가 꾸깃하게 구겨졌다. 아, 이거 모니와 건데. 머리 한 편에 열 받지 말라는 만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전부터 쭉 조금씩 온도가 높아지던 가슴 속의 화는 식을 줄을 몰랐다.
"왜 대답을 안해요? 얼마나 친하냐고요. 설마 카마사키 씨, 모니와 씨한테 흑심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죠?"
"......"
"아니라고 해요. 지금 당장."
"......"
"카마사키 씨!"
대체 얼마나 모니와를 좋아하기에 그런 얼굴로 화내는 거지? 카마사키는 울컥 화를 내려다 후타쿠치의 애가 탄 얼굴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오해도,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이 상황도, 왜 이렇게 됐는지 가슴 속에 쌓인 억울함도,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비겁함도, 그 모든 것들을 쏟아내버리고 싶었는데. 넌 왜 모니와 하나때문에 세상이 다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사람처럼 초조해 하는 거야. 그런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게이도 아닌데 남자를 왜."
"......"
"너랑 모니와, 잘 되게 도와달라고 한 건 넌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냐?"
카마사키는 정리하던 것들을 마저 정리해 나갔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 모니와의 구겨진 노트가 보였다. 미안, 모니와. 내가 노트 망쳐 버렸네. 카마사키는 애써 종이를 펴보려 손바닥으로 노트 위를 꾹꾹 눌러봤지만 구겨진 종이가 이전처럼 말끔하게 펴질 리가 없었다. 이미 변한 것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백 잘 되길 빌게."
"......"
"너네 잘 어울려."
진심으로, 모자를 쓰길 잘했다. 카마사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야 후타쿠치 쪽으로 돌아섰다. 이 상황에서 공부라니 턱도 없다. 후타쿠치가 붙잡든 협박하든 가야 겠다고 다짐하며 카마사키는 바닥에 놨던 가방끈을 잡았다.
"역시 나 그냥..."
"어딜 가요? 나를 내버려 두고."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손목을 쥐고 말했다. 일전에 부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후타쿠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내가 더 센데도 불구하고 후타쿠치의 손 아래에선 무용지물이다.
"고백하려면 제3자는 빠져 줘야지. 니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너 고백하는 것까지 옆에서 들어줘야 하냐?"
"어린애 할게요. 그러면 죽어도 옆에 있어주기라도 할 건가요?"
"미쳤냐? 장난치지 말고 좋게 말할 때 이 손 놔라."
"싫은데."
개자식. 망할 개 같은, 이중인격. 너 때문에 나는 절대로 좋아할 일도 없을 녀석을 좋아하게 되버렸는데. 젠장. 빌어먹을.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 방향 그대로 카마사키를 밀어버렸다. 밀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카마사키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후타쿠치는 얼른 우위를 선점한 뒤 카마사키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자세를 다잡았다. 모자 아래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놓으라고,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싫은데."
"모니와! 모니와악!! 모,"
진짜 골때리네. 집이 떠나가도록 모니와를 부르는 카마사키를 내려다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목에 핏줄이 서도록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후타쿠치는 벌어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헉, 하고 카마사키가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후타쿠치는 본격적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후타쿠치의 혀가 카마사키의 입 안을 제맘대로 휘젖고 다니는 동안 카마사키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안심시키려는 듯 카마사키의 팔이며 얼굴이며 곳곳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굳어있던 몸이 점차 풀리면서 카마사키는 언뜻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끌거리는데 따듯해. 기분 좋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키스에 몰두해 있을 무렵 후타쿠치가 입술을 떼지 않고 웅얼거렸다.
"기분 좋아?"
"...응."
"내가 좋지?"
"...어?"
여직 쾌감에 잠겨 있는 카마사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는 듯 가볍게 키스하고 후타쿠치가 재차 물었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무슨 소리를,"
"그럼 평생 당신 게 되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뭘 했지? 가슴이 미친듯이 벌렁거렸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모니와, 모니와가.
"당신은 날 좋아해요."
"...웃기지 마. 저리 비켜."
"키스해줄게. 좋아한다고 말해 봐요."
"지랄하지 말고,"
"난 이제껏 지금만 기다려 왔어, 카마사키 씨."
그 순간 모자 챙 아래로 후타쿠치의 하관이 눈에 들어왔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과 그의 하관을 보며 일순 숨을 들이켰다. 웃고 있어.
"모, 모니와가."
"모니와 씨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니가 분명! 나한테 도와달라고, 모니와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
"그랬나?"
"이, 이 개 자식을 그냥. 미친놈. 너 때문에 내가, 내가...!"
속았다. 이 새끼가 날 감쪽같이 속이고 연극을 한 거였다. 카마사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들썩였다. 저런 새끼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민했는데. 이 망할 자식.
"내가 좋지?"
카마사키의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내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카마사키의 시야에 한 가득 후타쿠치가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빛나는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번 그 미소가 나를 향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었다. 기어코 카마사키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귓가에 후타쿠치가 속삭였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그럼 평생 카마사키 씨 옆에 있어줄 테니까.
"닥쳐, 이 망할 자식..!"
말이라도 못하면. 절대 가만 안 둘거다. 후타쿠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카마사키가 으르렁거렸다. 조금 젖은 눈가가 야하다고 생각하며 후타쿠치가 빛이 나도록 웃었다.




<Side track>

"부탁이 있어요."
뜬금없이 3학년 교실까지 찾아온 후타쿠치가 대뜸 말했다. 부활동 얘기는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부탁이라니 뭐를? 본능적으로 모니와는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어째 불안한데.
"카마사키 씨랑 잘 되게 부탁 좀 할게요."
 너네 화해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니와에게 후타쿠치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모니와 씨. 이렇게 감이 떨어져서야 어디 제대로 연애 해보겠어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겠죠?"
저, 저런...! 모니와는 부들부들 떨며 반박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딱 봐도 저보다 베테랑인 후타쿠치를 상대로 허세를 부려봤자 제 꼴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것을 과거 카마사키의 일화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후타쿠치와 카마사키의 실랑이를 옆에서 2년동안 봐 온 것이 이렇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너... 이렇게 해서까지 카맛치를 괴롭히고 싶은 거였어?"
초등학생 수준의 괴롭힘으로 아는 모니와가 후타쿠치에게 나무랐다. 탁, 후타쿠치가 제 이마를 감싸쥐었다. 선배를 과대평과했군요. 모니와 씨도 카마사키 씨만큼이나...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에 모니와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마사키 씨보다 별 나은 게 없군요, 모니와 씨. 공부 머리는 좋은데 이쪽은 영... 아무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말이죠...(생략)"
가만히 후타쿠치의 계획을 듣던 모니와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며 후타쿠치에게 말했다.
"후타쿠치 너... 카맛치를 좋아해?"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시합을 할 때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꾀를 부리는 건 나한테 통하지 않아,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타쿠치는 모니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기 입으로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비겁한 수였지만, 모니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후타쿠치가 너무나 환하게 웃어서 그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오히려 감격스러웠다.
"나만 믿어, 후타쿠치!"
이제야 좀 철이 드려나보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두 손을 잡고는 울먹거렸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
너무 되는대로 써버렸다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