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上)

- 0601 후타카마의 날 기념 뻘글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5정거장, 역에서 내려 버스로 5분 정도를 또 가면 외벽은 깔끔하지만 내부는 썩 좋지 않은 그럭저럭한 아파트에 도착한다. 8가구가 사는 이 아파트에는 대부분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자취하고 있다. 2, 204호에는 카마사키가 산다.

또 왔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그나저나 집에 있으면 환기 좀 하죠? 벌써부터 혼자 사는 아저씨 냄새 나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풍기는 카마사키의 냄새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며 말했다. 카마사키가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의 방에는 그 특유의 냄새가 배었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몰랐던 체취가 몇 개월이 지나자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거든. 그리고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주제에 어린 척 하지 마라.”

말과는 달리 카마사키는 조용히 베란다 문을 열었다. 집 냄새가 그 조금 열린 틈으로 날아갈 리 없지만 후타쿠치는 이 집에 올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문을 열게 했다. 그러면 단 둘뿐인 좁은 방에 바깥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은은한 소음이 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진짜 왜 허구한 날 찾아 와. 놀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걱정 안 해도 연습은 잘하고 있거든요? 완전 순조롭게 돼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 하러 오냐고, 만날. 와서 하는 것도 없고 금방 있다가 가잖아.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피곤하지도 않아? 너 친구 없어서 심심해서 오는 거지?”

카마사키 씨보다 친구 많거든요? 됐고,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요?”

네가 이렇게 성격이 드러우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서 먹을 거 찾지 말고 네가 먹을 거 사오는 게 맞는 거 아니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카마사키가 냉장고를 확인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먹을 건 없었다. 방금 저녁을 해결한 참이라 남은 밥도 없었고, 늘 아침으로 먹던 식빵조차 마침 오늘 아침밥으로 다 먹었다. 하다못해 소면도, 과자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언제나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나카와 컵라면뿐이었다.

나가서 뭐 먹을래?”

카마사키는 텅텅 비어 유독 찬 공기를 내뿜는 냉장고를 조용히 닫았다. 무슨 일인지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는 후배에게 또 컵라면을 내주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았지만 빈곤한 자취생에게 컵라면 말고는 내줄 것이 없고, 어쩌다보니 올 때마다 컵라면만 먹이고 있다.

라멘 콜?”

.”

둘이 나가도 열에 여덟은 라멘을 먹지만, 컵라면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 카마사키는 지갑을 챙기고 불을 껐다. 알고 보면 후타쿠치 이 녀석, 우리 집 근처에 라멘 맛집 때문에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안하냐고 비아냥거리던 후타쿠치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카마사키의 취업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교에서 실습할 때 관심 있었던 회사에 에라 모르겠다, 면서 무작정 이력서를 보낸 것이 서류 통과로, 면접으로 이어졌고 며칠을 안절부절 못하며 전화를 기다린 결과 합격 전화를 받았다. 지원한 카마사키 본인이 가장 놀라웠을 만큼 카마사키의 취업활동은 금세 끝났다. 취업 준비생을 노린 사기가 아닐까 걱정하면서 카마사키는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고,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이제는 꽤 회사 생활에 익숙해졌다.

혼자 살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환경이 변한 것도, 생활 습관이 변한 것도 아니라 후타쿠치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배구부 녀석들과 집들이 겸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후타쿠치는 일주일에 적어도 3, 4번은 찾아왔다. 평일에는 연습이 끝나고 어둑해진 저녁에, 주말에는 늦어도 점심 전에. 딱히 와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이다 돌아간다. , 두 달도 아니고 벌써 몇 개월을 그러고 있으니 카마사키가 뭐 하러 오냐고 매번 묻지만 후타쿠치는 매번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거나 그게 중요해요? 하고 되묻기만 하니 이제는 더 이상 물어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가끔 연습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찾아올 때면 저도 모르게 왜? 하고 묻게 된다.

애초에 이렇게 매일같이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던가, 나랑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씨가 배구부를 은퇴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도, 같은 동네도 아닌 곳으로 카마사키 씨가 가버렸고 카마사키 씨가 없는 날이 반복되었다. 늘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습관처럼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밖에 카마사키 씨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2년 동안 익숙해진 체육관, 빈 코트 위에서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손으로 훔치던 카마사키 씨를 가만히 떠올린다. 만지면 적당히 손에 감길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을 상상한다. 손을 뻗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텅 빈 손바닥이 아무도 없는 코트만큼이나 허무했다.

연애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연애를 해봤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꽤 연애를 즐겨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애는 심플했다. 고백을 받으면 사귀고, 적당히 마음 가는 상대가 있으면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하고, 며칠의 밤이 지나면 연애가 시작되곤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끔은 조금 먼 곳으로 놀러 가거나 하다보면 어느새 서로가 연애하기에 맞지 않거나 질려서 자연스럽게 끝나는 연애.

만나고, 고백하고, 사귀고, 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심플한 연애 사이클에 익숙했던 내게 처음으로 공략법을 알 수 없는 상대가 바로 카마사키 씨였다. 애초에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그 남자는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던 데다가, 서로 성격도 맞지 않아 만나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길 일수였다. 그런 남자를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더라. 외모도, 성격도 취향에 한참 벗어나고 하물며 취미조차 맞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 왜 좋아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바보 같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에 상관없이 깨닫고 보니 사랑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말 한 마디에 감정이 널을 뛰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쉬운 연애만 해왔던 만큼 스킨십도 쉽게 단계를 밟던 자신이었지만, 카마사키 씨를 향한 연애는 스킨십의 단계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사실은 연애라고 하지도 못하는 짝사랑이니 계단조차 밟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른 척, 실수인 척, 온갖 척을 갖다 대며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카마사키 씨를 상대로는 이상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가득 차올랐는데 고백하지도, 닿지도 못한다. 닿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닿은 손끝에서부터 흘러넘쳐 그 사람에게로 향할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만약 감정의 형태나 크기가 고스란히 보인다면 아마 나는 그 날로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경멸섞인 눈은 별로 두렵지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두렵다. 이런 사랑을 알게 된 뒤부터,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그 남자가 되어 버렸다.

 

연습 정말 잘하고 있는 거냐? 왜 만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연습 땡땡이치고 오는 거면 출입금지령 내릴 거야.”

신경 쓰지 마시고 카마사키 씨는 방 청소나 좀 하시죠? 올 때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니까. 혼자 살 감당이 안 되면 자취를 시작하지를 말던가. 집에 밥 없으면 그냥 굶거나 컵라면이나 모나카로 떼우죠? 안 봐도 뻔해.”

그냥 난 모나카랑 라면을 좋아하는 거야.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말고 그만 찾아 와.”

뻔질나게 카마사키의 자취방을 들락날락하며 알게 된 사실은, 카마사키는 집에 컵라면과 모나카만 박스 채로 쌓아두고 좀처럼 밥을 챙겨 먹질 않는다는 거였다. 아침은 항상 토스트와 잼,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저녁은 대충 밥이랑 계란 후라이 혹은 소세지 볶음. 최소한의 요리를 위한 야채도 없고 양념은 케찹뿐이다. 과일은 말할 것도 없이 냉장고에 있는 걸 본 적도 없다.

본가가 회사에서 먼 것도 아닌데 왜 자취하는 거예요? 고교데뷔처럼 직장인데뷔라도 하는 거?”

그런 거 아니라고. , 됐고 라면이나 처먹어.”

노란 머리가 그리워도 뭐 어쩔 수 없죠. 이제 직장인이니까요, 그쵸? , 봄고 예선 시작하기 전에 머리 염색이나 할까봐. 코트에서 확 띄게.”

너랑 얘기하면 열 받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노랗게 염색했던 카마사키 씨의 머리는 직장인이 되면서 본연의 까만 머리색으로 돌아갔다. 딱히 염색이 금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노란색과 같이 튀는 색은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3년 동안 노란색이었던 머리가 중학생 때와 같이 까맣고 짧은 머리로 돌아가자 퍽 우울했는지 카마사키 씨에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색하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날 때면 쓸어 올릴 만큼 머리가 자라지도 않은 주제에 머리카락을 가만두질 못한다. 짧은 머리를 부스러트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 후타쿠치.”

왜요.”

직장인데뷔라는 말이 짜증났는지 말없이 라면만 먹던 카마사키가 목을 축이며 말했다. 어느새 그릇은 깨끗이 비워진 뒤였다.

너 말이야, 이왕 우리 집에 올 거면 오는 길에 먹을 거라도 사 오든가 해. 아니면 와서 뭐 해먹던가.”

귀찮으니까 내가 해주진 못하겠고. 대답 않고 라면을 비우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는 괜히 테이블에 휴지를 조각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근데 얘는 라면을 가닥가닥 나눠서 먹나,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여기까지 오는 돈이 얼만데요. 밥 정도는 카마사키 씨가 쏴요.”

누가 오랬냐.”

전 학생. 그쪽은 직장인.”

너 용돈 많이 받는 거 다 알거든? 너네 집 부자잖아.”

전 후배. 그쪽은 선배.”

누가 오랬냐고.”

찌익, 찌익 하고 카마사키의 손에서 휴지조각이 찢어져 내렸다. 주인이 본다면 질색을 할 정도로 어느새 휴지조각이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카마사키가 눈치를 보며 휴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 후타쿠치는 라면 그릇을 다 비우고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치울 텐데. 쓸데없는 곳에서 부지런하단 말이야.

누가 오랬냐, 퉁명스럽게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생각나 후타쿠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쓸데없는 곳까지 성실한 게 짜증나. 오면 그냥 오는 거지, 이유가 왜 필요해. 가끔씩 카마사키가 내뱉는 무신경한 말에 일일이 상처받는 자신이 화가 난다. 뭐 하러 와, 왜 왔냐, 누가 오래? 마치 난 너를 요만큼도 신경 안 써’, 라고 말하는 행동과 말투에 가끔 엉덩이를 발로 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바보 아니야? 내가 이렇게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못 보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보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냐고.

카마사키 씨가 오자고 했으니까 카마사키 씨가 쏴요.”

영수증을 내밀자 카마사키가 질렸다는 눈빛을 하다 고개를 휙 돌렸다. 배가 불러 빙글거리는 후타쿠치가 얄미워 죽겠다는 게 까만 뒤통수만으로도 느껴졌다.

오지 마, 이제. 너 이러려고 자꾸 꼬르륵거리는 소리 내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거지? 맞지?”

그렇게 돈이 없어요? 빌려줘요?”

꺼져. 나가 있어. 돈 있으니까 빨리 꺼져.”

라면 값도 못 낼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냉장고가 텅텅 빈 이유가 있었던 거네요.”

, , ! 열 받게 하지 말고 집에 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자마자 카마사키는 손을 휘적거리며 후타쿠치를 보냈다. 끝까지 돈 빌려 줄까요? 따위의 말을 내뱉는 후타쿠치한테 하마터면 기어코 주먹을 날릴 뻔했다. 뒷걸음치며 멀어지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카마사키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저 자식.

폼 잡으면서 뒤로 걸어가긴. 가다 확 넘어져 버려라.

 

 

마음이란 분명 나의마음일 텐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빌어먹게 아이러니하다. 이제까지의 내 연애놀이를 봐왔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기겁할 것이 분명하다. 쿨하게, 깔끔하게 맺고 끊음을 분명하게 했던 내가 맺는 것도, 끊는 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까. 그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짝사랑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짝사랑을 몇 년 동안 하는 애들이 왜 그런 줄 알아?”

어쩌다보니 짝사랑 상담을 해주게 된 나메츠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들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재로선 나메츠밖에 없다.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빨라서 알게 된 주제에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며 떠보기에 그냥 말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메츠는 그 때부터 인터넷에서 되도 않는 지식들로 조언을 한답시고 까불고 있다.

우유부단해서. 멘탈이 약하니까.”

아니,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아서 끝도 나지 않는 거야. 시작하자마자 HP가 한 방에 닳든 말든 일단 시작을 해야 게임이 끝나는 거라고.”

언제나처럼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말일 줄 알았는데 나메츠의 말은 뜻밖이었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라든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라든가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말할 줄 알았는데, 하고 의아해하는데 나메츠의 눈이 반짝였다.

고백 해, 후타쿠치! 일단 시작을 하란 말이야, 멍청아. 게임 스타트!”

게임 스타트, 하고 게임 오버 하라는 말이지? 지려고 시작하는 게임이 어디 있냐, 멍청아.”

카마사키 선배 졸업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거 아니야? 이대로 계속 짝사랑만 하겠다고?”

연애에 있어선 너 정말 너답지 않구나, 제멋대로 상담이랍시고 자리를 잡고 떠들어대던 나메츠는 항상 이 말을 반복했다. 나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말이라던가, 뻔히 보이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못 본 척 회피하고 있다고. 찌질한 겁쟁이란 말도 태어나 처음으로 나메츠에게 들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거. 고백도 못하고 혼자서 감정 삭이는 주제에 나중에 카마사키 선배 여자친구 생겼다고 질투하지나 말아라, ?”

, 하고 휘슬을 불며 나메츠가 일어섰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하나, 둘 씩 체육관에 늘어져 있던 부원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제로라도 끈질기게 밀어붙여야 하는 게 맞잖아. 네가 언제부터 공이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었어? 점수를 따려면 먼저 공격해야지.”

……솔직하게 제로는 아니거든?”

제로는 아니지만 제로에 수렴하지.”

, 하고 연습을 재개한다는 휘슬이 다시 울렸다.

 

 

나메츠의 말이 맞다. 솔직히 말해 카마사키 씨와 연애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서 언젠가는 제로에 수렴할 게 분명하다. 끈질기게 카마사키 씨 집에 찾아가지만 단 둘이 방 안에 있어도 긴장감이 흐르기는커녕 나를 의식한다는 눈치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또 왔어? 란 말이 안녕이란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제로에 수렴하고 있다.

여름에 합숙 일정 잡혔겠네. 늘 가던 거기로?”

거기 말고 또 어디로 가겠어요. 그나저나 진짜 돈 없어서 에어컨도 못 고치고 있어요? 더워서 뒤지겠네.”

저번 주에 기사가 온다고 약속해놓고 안 온 거라고. 너 자꾸 나보고 돈 없다고 무시하는데, 제대로 돈 벌고 있거든? 너만 안 오면 통장에 차곡차곡 돈도 쌓이고 있었을 거거든?”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것도 모자라 연신 부채질을 하던 카마사키가 바닥에 찰싹 누워 꿈틀거렸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지라 윗옷이며 바지며 다 벗은 지 오래라 팬티 한 장만 걸친 몸이 노골적으로 눈에 띄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땀이 밴 살갗이 유난히 촉촉해 보인다.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살인 더위야.”

죽겠다.”

진짜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구나, 젠장. 더운데다 우울함까지 겹치면 정말 짜증나서 죽을 것 같아 후타쿠치는 대놓고 카마사키의 몸을 훑어보았다. 배구부 생활을 하며 볼 곳 안 볼 곳도 어쩌다보니 다 봤고, 자취방에서도 수없이 본 몸인데 막상 노골적으로 살펴보려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워서 머리가 몽롱해져서 그런 건가.

은퇴하고 난 뒤, 카마사키는 딱히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헬스장이라도 가서 기껏 키워놓은 근육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영 시간이 안 나는 듯 했다. 전체적인 골격은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그대로였지만 아무래도 근육이 많이 빠져 있었다. 뒷모습뿐이지만 만지면 예전과는 달리 마냥 단단하지만은 아닐 것 같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만 같은 곳까지 손을 뻗다 후타쿠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 다가갔다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이미 충분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으면 닿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후타쿠치는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드러누운 카마사키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고, 스킨십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카마사키를 만진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누군가를 만지는 게 처음도 아닌데 항상 카마사키의 앞에서는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마냥 아무 것도 못한다.

짜증나.”

만지고 싶다. 입술로, 코로, 두 손과 다리로, 내 몸의 모든 곳을 통해 카마사키 씨를 만지고 싶다. 옆에 있어도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저 남자의 몸에 나를 남기고 싶어.

수전증이야?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웃기지 마요. 카마사키 씨가 징그럽게 다 벗고 누운 게 짜증나서 손이 떨리는 거예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 아직까진 그래도 괜찮거든. 근육이 좀 빠지긴 했지만 심한 정도도 아니고.”

하는 말과는 달리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카마사키는 양 팔을 쭉 뻗고는 근육을 확인했다. 배구를 하던 시기에는 근육 키우기에 열중했을 정도로 근육에 집착했기에 카마사키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눈썹을 찡그리곤 한참동안이나 제 팔뚝을 만져보던 카마사키가 돌연 후타쿠치 쪽으로 다가갔다.

, 네가 한 번 만져 봐봐. 내가 보기엔 많이 빠진 것 같지는 않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땀 묻어서 싫어요. 게다가 카마사키 씨 체온 높아서 만지면 기분 나쁠 것 같고.”

다가온 만큼 후타쿠치가 물러서며 말했지만 카마사키는 끈질기게 다가가며 팔을 들이밀었다.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닿은 어깨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카마사키의 맨 살갗에 후타쿠치는 미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닿지 않으려고, 애먼 곳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온 신경이 오른쪽 어깨에 몰린 지 오래였다.

조금 만지는 걸로 안 죽어, 자식아. 빨리 확인해 봐, 너 때문에 자꾸 신경 쓰이잖아.”

, 진짜 싫다니.”

끈질기게 물어지는 카마사키를 피해 후타쿠치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카마사키가 기어코 후타쿠치의 손을 잡고 제 팔뚝으로 이끌었다.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후타쿠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눈치 없는 카마사키는 제 손인 것 마냥 후타쿠치의 손을 제 팔뚝 이곳저곳에 갖다 대었다.

어때?”

…….”

역시 좀 빠지긴 했지? 한창 키웠을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좀. 그래도 이 정도면 딱 좋은 수준 아닌가?”

…….”

뭐냐. 너 왜 말이 없어.”

그제야 후타쿠치가 아무 말도 않고 제 손에 이끌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마사키가 물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후타쿠치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진짜 수전증 아니야? 너 손이 좀 부들거리는.”

,”

?”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의문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약간 짧은 올라간 눈썹과, 답답한 걸 싫어해서 항상 드러나 있는 말끔한 이마가 유난히 눈에 들어찼다. 이제는 꽤 낯이 익은 검은 머리카락은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에 살풋 갈대처럼 흐트러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후타쿠치, 하고 부르는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채 귀에 들리기도 전에 후타쿠치는 그대로 고개를 비틀었다. 밤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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