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나란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의 종점까지 와 버렸기에 카마사키는 왔던 만큼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후타쿠치는 어떨지 몰라도 카마사키는 혼자 어색해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주변에 있던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진짜로 꿈은 아니겠지. 버스에서 졸다가 꾼 꿈이라면 어떡하지. 저 멀리 볼 것도 없는 길 너머만 보다 카마사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똥 못 눈 개새끼 같네요.”

“...... 자식 선배한테, 개새끼가 뭐냐. 건방지게.”

스스로 생각해도 강아지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다고 개새끼도 아니거든.”

 

개새끼나 개나, 후타쿠치가 코웃음 쳤다. 쟤는 왜 저렇게 태연하지?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하는 마음에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우리 진짜 사귀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후타쿠치가 확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봤단 봐요. 진짜 확,”

?”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목덜미를 보면서 내뱉었다.

 

물어버릴 테니까.”

베타를 물어봤자 별 거 있냐. 상처도 안 남을 걸.”

남는 지 안 남는지 한 번 해 볼까요? ?”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을 감쌌다. 빈 말이라도 가슴이 술렁였다. 목덜미를 물어버린다는 건 알파에게 있어 각인의 상징이었다. 예전보다 기술이 발달되어서 각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레이저로 손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각인은 독점욕과 소유욕을 드러내는 자국이었다. 자신의 것에 접근하지 말라는 알파의 사인. 페로몬이 없는 베타의 몸엔 남겨지지 않지만.

 

, 더럽게 안 오네.”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카마사키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택가가 모여 있는 길인데다 종점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 근처까지 오는 버스가 드물었다. 버스라도 타야지 어색함이 줄어들 것 같은데 참 더럽게도 안 온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텐데 뭘 그러고 있어요.”

 

후타쿠치는 정류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카마사키를 향해 손짓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앉으라고 말했다. 괜히 한 번 더 버스가 오는 방향을 확인했지만 올 기미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결국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서 카마사키가 머리를 굴리는데 바로 눈앞에 후타쿠치의 손이 튀어 나왔다.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차가운 감촉이 양 뺨에 닿았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볼을 한껏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제 손에 찌부러진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주무르니 붕어 입이 되었다가 말았다가 아주 재밌었다.

 

카마사키 씨, 설마 지금 긴장해요?”

어니거던. 이거 라.(아니거든. 이거 놔.)”

, 진짜 못생겼어. 지금 카마사키 씨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 지짜 너으라거!(, 진짜 놓으라고!)”

 

또 이렇게 시비를 턴다. 못생겼다는 말에 울컥한 카마사키가 제 뺨을 쥐고 있는 후타쿠치의 손을 뿌리치려 손을 올렸다. 후타쿠치의 손이 얼굴을 주무른 탓인지 못생겼다는 말에 창피해서 그런 건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에 굳이 힘을 주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얼굴에서 손을 뗐다. 볼썽사납게 빨개진 얼굴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완전히 굳은 카마사키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조심스럽게 카마사키의 반응을 살피며 맞닿은 입술을 물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맞추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 사이로 스르륵 하고 혀를 집어넣었다. 카마사키는 아예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여직 자신을 멀뚱히 볼 뿐이었다. 후타쿠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카마사키의 눈을 덮어버렸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카마사키가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하나, 둘씩 곤두세워졌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입 안을 배회하는 후타쿠치의 혀가 움직이는 거라든가, 옅게 맡아지는 특유의 체취라든가, 듣기 민망해질 정도로 질척이는 소리라든가. 후타쿠치가 예민한 입천장이나 여린 잇몸을 간질이다 목구멍을 파고들 것처럼 깊숙이 들이밀 때면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느끼는 지점만을 골라 집요하게 문지르면 후타쿠치의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힘없이 미끄러지려는 손에 간신히 힘을 줘 생명줄처럼 후타쿠치의 팔목을 쥐었다. 이제껏 해봤던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기분 좋은 쾌감에 젖어 멍하니 생각했다.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던 연애는 의외로 순조로워 보이는 듯 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란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둥둥 떠버린다. 조금 벅차다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며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시끄러워서 들킬까 마음 졸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전히, 가끔씩 혼자만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알고 시작한 관계였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는 걸 느낄 때면 두려웠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만큼이나 커졌는데, 과연 후타쿠치는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바라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리란 걸 알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내가 주는 만큼 받고 싶어진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노력했던 욕심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커져버렸다. 후타쿠치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조마조마 했다. 털끝만큼의 변화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냐? 속으로 수십 수백 번을 삼켰던 말이 치솟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 그 때 내 고백을 왜 받아줬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 다 영화를 볼 때면 뭘 챙겨먹는 타입은 아니라 티켓을 확인받고 곧바로 들어갔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중, 고등학생만 몇 명 있을 뿐 한산했다. 가운데 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때에 맞춰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봉하기 전부터 예고편이며 뉴스를 챙겨보면서 손꼽아 기대했던 영화였다. 좋아하던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이었기에 재미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스토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스크린을 보고, 상영관 전체를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가 들었지만 스스로 뭘 보고 있는지, 뭘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움직이던 태엽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는데 잡생각만 가득하다. 감흥없이 화면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습관처럼 후타쿠치의 손이 뻗어왔다. 팔걸이에 늘어진 제 손을 뒤집어 가닥가닥 얽어 잡는다.

 

사귀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후타쿠치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오히려 부끄럽다고 자신이 밀쳐 내거나 도망갔지 후타쿠치는 손을 잡거나 목덜미나 허리 같은 곳을 지분거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무릎을 쥐어 올 때면 물 흐르듯 키스를 해온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카마사키는 뻥 뚫린 공간에서 후타쿠치가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낯부끄럽긴 했지만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먼저 다가온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끝까지 밀쳐내지 못하고 후타쿠치가 서슴지 않게 하는 행동을 전부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좋으면서도 쓸쓸함에 휩싸였다. 스킨십이라는 달콤한 쾌락에 홀려 자신이 착각이란 바다에 홀연히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카마사키는 그대로 바다 속에 잠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왔던 의심이 떠오른다.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서 사귀는 거냐고.

 

 

뭐야, 허무하게 끝났네. 이거 속편 또 나오는 거 아니야? 그쵸, 카마사키 씨.”

? 어어...”

 

어느새 영화가 끝났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후타쿠치가 결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연신 투덜댔다. 아예 집중하지 못했던 카마사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의자에 앉아 불만스럽게 다리를 까닥이던 후타쿠치는 별안간 카마시키를 올려봤다. 안 나가냐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카마사키를 향해 건방지게 손짓했다.

 

안 돼. 사람 아직 있잖아.”

 

출입구 쪽에 직원이 한 명 서있었다. 뒤처리를 하기 위해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리는지 유일하게 남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교복 넥타이를 쥐어 당겼다. 불식간에 당겨지는 바람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후타쿠치 위에 엎어졌다. 순간 팔걸이를 쥐었길 다행이었지 꼴사납게 부딪칠 뻔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뭐라 타박하려는데 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 하고 가볍게 몇 번 입을 부딪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입술을 앙 물어버렸다.

 

! 뭐 하는 짓이야!”

영화 보는 내내 딴 생각 하길래요. 이제 정신 차렸어요?”

그렇다고 입술을 물어버리냐? 아프잖아.”

그러게 누가 나랑 같이 있는데 딴 짓 하랬나.”

 

, 저 빌어먹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깨물었는지 입술이 화끈했다. 다른 사람이 볼 까 무서워 카마사키는 아픈 게 가라앉을 때까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다. 그 모양을 보고 옆에서 후타쿠치가 꼴좋다며 웃어대기에 주먹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퍽 쳐버렸다. ! 하는 소리를 내며 거의 고꾸라질 뻔 했지만 아쉽게도 넘어지진 않았다. 후타쿠치는 아프다며 연신 등을 문지르더니 입을 가리고 있는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 떼어내는 척 했다. 안간힘을 쓰며 입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는 카마사키와 손을 내리려는 후타쿠치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오고 갔다. 결국 참다못한 카마사키가 무릎으로 후타쿠치를 밀어내는 것으로 유치한 투닥거림이 끝이 났다.

 

 

영화관에서 나와 오늘은 라면이 당긴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끌고 근처 라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맛집이라고 알아주는 집인지라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할 수없이 다른 곳을 가려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후타쿠치의 이름을 불렀다. 근처 사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후타쿠치와 안면이 있는 듯 합석하겠냐 물어왔다. 4인용 테이블에 2명분의 자리가 남아 있기에 별 고민 않고 자리에 앉았다. 늘 먹는 메뉴를 주문하니 옆에 앉은 처음 후타쿠치를 불렀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후타쿠치 친구신가요?”

아뇨. 배구부 선뱁니다. 카마사키 야스시입니다.”

선배님이셨군요. 전 후타쿠치 중학교 때 친구인 타마키 쇼우타에요.”

언제 또 본다고 통성명이냐. 먹던 라면이나 먹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타마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타박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성격 더럽구나, 후타쿠치, 라며 타마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지냈냐는 말이 오고 갔다. 꽤 친한 사이였던 듯 타마키는 후타쿠치를 서슴없이 대했다.

 

, 맞다. 그러고 보니 걔랑은 어떻게 됐냐?”

누구.”

 

때마침 주문했던 라면이 나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점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휘휘 저으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던 카마사키는 면발을 두고 국물을 떴다.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났다.

걔 있잖아. 이름이 뭐였지? 니시우라였던가, 니시하라였던가.”

니시하라. 걔가 왜?”

헤어졌어?”

, 뜨거.”

 

뜨겁다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먹었더니 그대로 혀에 데어버렸다. 대화를 나누던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시선이 모아져 카마사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찬물을 들이켰다. 조심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말하곤 타마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 하던 중이었지? 다시 이야기가 오고 갔다.

 

, 니시하라랑 헤어졌냐고. 그 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귀었잖아.”

지금이 언젠데 아직도 사귀겠냐?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지.”

그렇긴 한데, 설마 싶어서 물어봤지. , 진짜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몇 개월을 안 가냐.”

“3개월 정도 갔나.”

 

라면 좀 먹자며 후타쿠치는 말을 대충 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식은 면을 후루룩 먹는 동안 타마키는 그 옆에서 자기 친구와 떠들었다. 어지간히 재밌는지 니시하라라는 여자와 언제 사귀었고, 사귈 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타마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손님이 거의 빠져나간 가게에 후타쿠치의 연애 이야기만 들렸다.

 

언제였지? 크리스마스 파티 때였나, 아마 니시하라가 먼저 고백했었지? 진짜 그 때 애들이 다 놀라가지고 남자애들은 후타쿠치 질투하고, 여자애들은 니시하라 질투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니시하라가 좀 예뻤냐. 잡지 모델까지 하고 그때껏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잖아. 자기 눈 높다고 고백해오는 남자애들 다 뻥뻥 차버렸었지. 근데 후타쿠치랑 딱 사귄다고 그래서 애들이 참 언행일치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좀 소름끼치려고 그런다? 그 때가 언젠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 스토커야?”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 약간 세기의 커플 같았어. 엄청 유명했다고. 아직도 중학교 친구들 만나면 가끔 얘기 나온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타마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타마키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네가 얼마 안 갈 줄은 예상했었지. 근데 3개월이 뭐냐.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오래 간 게 3... 4개월? 빠르면 한 달도 안 갔었지?”

헤어질 만하니까 헤어진 거지.”

왜 헤어졌는데?”

몰라. 그냥 질렸었나보지.”

 

나쁜 남자! 타마키가 분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 옆에서 타마키의 친구도 질린 얼굴을 했다. 태연하게 라면을 먹는 후타쿠치를 보며 타마키가 분해하다 표적을 바꿔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카마사키 씨! 선배가 봐도 완전 나쁜 남자죠, 맞죠! 쟤 고등학교 가서도 여자친구 몇 개월에 한 번씩 갈아 치우나요?”

, 어어?”

적당히 해라, ? 카마사키 씨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리니까.”

 

후타쿠치는 남자의 공공의 적, 이라며 타마키는 바로 옆에 앉은 카마사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다 후타쿠치가 던진 휴지조각에 맞았다. 얼굴에 맞고 테이블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다시 들어 올려 타마키가 후타쿠치에게 던지며 말했다.

 

내가 친구로서 얘기하는데, 후타쿠치 너 그러면 안 된다. 단기속성 특강도 아니고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었던 거야.”

그냥.”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너나 잘하시지.”

 

후타쿠치는 여전히 궁시렁거리는 타마키를 외면하고 카마사키를 향해 가자고 눈짓했다. 뒤늦게 타마키가 뒤에서 불러댔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밀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가는 내내 고개를 저어댔다.

 

 

집에 가요?”

 

정처 없이 걷다 후타쿠치가 넌지시 말했다. 라면집에서 타마키를 피해 나오느라 이 뒤에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직 시간은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헤어지기에도, 어디를 또 가기에도 애매했다. 카마사키는 잠시 고민하다 그럴까, 대답했다.

 

영화를 보고, 밥까지 먹었으니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주말을 앞둔 번화가를 걷고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애매하다 생각하는 시간에도 거리는 친구며 애인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울이라 하기엔 늦고, 봄이라 하기엔 이른 계절은 저녁이 되자 아직은 겨울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교복에 저지까지 껴입었지만 휑하게 드러난 목을 스치는 칼바람에 카마사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유난히 날씨가 쌀쌀하다.

 

사람들에 치이고, 바람에 치이느라 잔뜩 어깨를 오그라들고 걸어가는데 손가락 사이로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타쿠치가 모른 척하며 손가락 두어 개를 잡아온 것이었다. 누가 볼 새라 카마사키가 손을 물리려는데 후타쿠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잡은 손가락을 당겨 카마사키를 말없이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쥔 손가락 사이에서부터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카마사키는 핀잔을 주는 대신 걸음을 빨리 했다. 찬바람에 카마사키의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 또 고백 받네.”

 

창밖을 보며 사사야가 말했다. 열린 창 아래로 교사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후타쿠치는 가만히 제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며 고백하는 여자애를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서 몇 번째냐. 신입생들 사이에서 후타쿠치 인기가 장난 아니라더라.”

남자가 후타쿠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데. 안 그러냐?”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지.”

“... 아무튼 잘생긴 게 최고네.”

최고지, 아무렴. , 찼나봐.”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여자아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꽤 멀어졌을 무렵 뒤에서 친구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몰려왔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후타쿠치가 있는 방향을 보며 삿대질하는 것이 아마도 욕인 것이 분명한 말을 하는가 싶다. 나란히 창가에 매달려 구경하던 남자들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딱하다며 누군가는 울지마! 라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이제 한명 쯤 사귈 때도 됐는데. 안 그러냐, 카맛치?”

? ... 런가?”

너 요즘 후타쿠치랑 자주 붙어 다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쟤가 작년 이맘때쯤에는 여자친구를 아주 달에 한 번은 바꾸는 것 같았는데, 가을쯤부터는 한 명도 안 사귀었지?”

 

그랬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이곤 창 아래를 내다보았다. 이미 후타쿠치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한동안 시선을 괜히 좌우로 돌렸다가 슬쩍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아예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여전히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밑을 보는 카마사키의 옆으로 사사야가 몸을 기대왔다.

 

그래도 아예 희망고문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카마사키의 시선을 따라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던 사사야가 말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카마사키는 시선을 돌려 사사야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웬 희망고문?”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후타쿠치랑 사귀어도 사귀는 느낌이 안 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후타쿠치는 우성 알파라고 번듯하게 출세할 게 뻔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생각을 해 봐. 상대는 몇 없는 우성 알파고, 내가 그만한 우성 오메가가 아닌 이상은 뭐가 좋다고 나랑 사귀겠어? 내가 뭐라고.”

꼭 우성 오메가랑 결혼하라는 법도 없잖아. 좋아하면...”

 

카마사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사야는 그 순진한 질문에 그게 아니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란 게 참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고. 우성은 우성집단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공공연히 우성만 만난단 말이야. 우성끼리 결혼하면 그 자녀도 우성인 경우일 확률이 높으니까. 아주 드물게 열성 오메가나 평범한 베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일부고. 그래서 보통은 끼리끼리 만난다 이거지.”

 

급에 맞게. 사샤야가 덧붙였다.

 

그래서 그게 희망고문이랑 무슨 상관인데?”

넌 후타쿠치가 여자애들이랑 왜 사귄다고 생각해? 사귀어도 얼마 안 가 헤어지는 이유는 또 뭐라고 생각하고.”

좋으니까 사귀었겠지. 뭔가 안 맞아서 헤어지고...”

장담하는데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을걸. 그냥 just for fun이야. 그러니까 오래 안 가지.”

 

심심풀이일 뿐 별 의미 없을 거라며 사사야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폈다. 조금 있으면 종 친다며 카마사키의 등을 찰싹 두드리곤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사야가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망하니 창밖을 쳐다보다 수업종이 울리는 소리에 카마사키도 교실로 들어갔다. 은연중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사람은 모른 체 하려고 해도 기어코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진다. 알면 다친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분명 물어보면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카마사키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번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한번쯤은 후타쿠치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무섭다고 피했던 질문.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평소처럼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차리다 라커룸에 아무도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 3개월이나 무난하게 사귀어 왔으면, 그래도 뭔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지금 자신이 하는 질문이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카마사키는 바랐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에 핸드폰에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뒷북쳐요? 사귄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런 걸 물어요?”

됐고, 대답이나 해 봐.”

왜 사귀긴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사귀고 있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더 바라는 거예요?”

뭘 바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후타쿠치의 발이 불만스럽게 까닥이기 시작했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요.

 

“... 그냥?”

예에. , 이제 가요 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챘다. 빨리 가자며 그대로 당겼지만 탁, 하고 카마사키가 팔을 뺐다. 후타쿠치가 아연한 표정으로 뿌리쳐진 제 손을 보다 다시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살풋 찌푸려졌다.

 

아니, 잠깐만. 그냥이라고? 그냥 사귀는 거야?”

왜 자꾸 물어요, 진짜. 이제 와서 왜,”

너 날, 좋아하긴 해?”

 

후타쿠치가 숨을 삼켰다.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후타쿠치를 지켜 보다 카마사키가 눈을 지르감았다. , 기어코 너는. 역시나 너는.

 

대답하지 못하던 후타쿠치의 얼굴이 눈을 감았는데도 훤히 되살아났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려오는 감각에 카마사키는 조용히 숨을 들이 내쉬길 반복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귀를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내 귀가 고장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좀 덜 아플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잠시였다. 복받치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인내심 덕분인지, 남몰래 감정을 삭였던 보람인지 카마사키는 망설임 없이 후타쿠치에게 진심을 말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전부 고백하는 것을 끝으로 그만두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고백 따위 하지 말고 조용히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냥 헤어질까. 그냥 사귀었던 거니 헤어지는 것도 너한텐 아무 일도 아니겠네.”

뭐라고요? 갑자기 헤어지잔 얘기는 왜...”

 

언젠가 이런 적이 또 있지 않았나? 후타쿠치는 가만히 서서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얘기하는 카마사키를 보다 생각했다. 감정이 허물어진 사람처럼 카마사키의 안색이 창백했다.

 

난 분명 너를 좋아하는데, 아니 갈수록 좋아. 그건 틀림없어. 근데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으면서, 점점 힘들다.”

 

그만하고 싶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너도 날 딱히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잖아.”

 

사실이다. 자신은 딱히 카마사키 씨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카마사키 씨가 고백해 왔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했고, 더 이상 술래잡기 하고 싶지 않아 사귀자고 말했었다. 내가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된 줄 알았다.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마주 대할 줄 알았다.

 

나 같은 베타보다 더 좋은 사람 수두룩하잖아. 여자인데다 오메가고, 네 이상형에 맞는 그런 사람 아주 조금만 둘러봐도 여럿 있고. 어차피 언젠가는 너도 우성 오메가를 만날 테고.

 

서로 각인할 수도 있고, 페로몬을 맡을 수도 있고, 굳이 억제제를 챙겨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만날 거잖아. 카마사키가 말을 잇다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카마사키의 하얗게 질린 뺨이 떨리고 있었다.

 

카마사키 씨,”

맞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한가?”

잠깐 말을,”

... 난 네가 아니면 안 되지만, 넌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지. 상관없잖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을 끊어버렸다. 듣고 싶지 않는다는 듯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는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을 나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나간 뒤에도 라커룸에 남아 카마사키가 했었던 말을 곱씹었다.

 

이별은 낯설지 않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왔던 만큼 헤어짐을 겪어 왔다. 후타쿠치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기도, 상대방이 그러기도 했다.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후타쿠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지 않았다. 언제나 시원하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하고 보내 주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헤어지자 했던 여자가 오히려 화를 내기도 했지만 후타쿠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하기때문에 사귄 게 아니었으니까.

 

카마사키 씨와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름없이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다. 그렇기에 헤어지자고 말한 카마사키 씨의 말도 시원하게 납득하고 보내줬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마사키 씨의 말을 들으면서 후타쿠치가 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는 지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저, 창백하게 질린 카마사키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싶었다. 자신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모르고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카마사키의 양 손가락을 잡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그 뿐이었다. 그냥 닿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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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