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큐피트(Cupid)

2017. 8. 12. 04:03 from
-엄청 가볍게 휘리릭 쓴 글



"부탁이 있어요."
헛 것을 들었나. 카마사키는 귀가 이상해졌나 싶어 귓구멍을 파봤지만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얼굴 가득 물음표가 달려 있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부탁 좀 들어 주세요, 카마사키 씨. '부탁'이라고? 지금 나한테 '부탁'이 있다고 말한 게 맞나? 앞에 서 있는 후배가 내가 알던 그 시건방진 후타쿠치가 맞는 건가?
"뭐라고?"
"...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벌써부터 귓구멍 막혔어요? 부탁 좀 들어 달라고요."
"아... 후타쿠치가 맞긴 하군."
평소의 톡 쏘는 말투가 돌아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아까는 영 후타쿠치답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됐나 싶었었다. 그보다 후타쿠치가 '부탁'이란 말을 쓸 정도로 뭘 부탁하고 싶은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대체 뭐지?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미리 말하지만 물어봤다고 해서 들어준다는 건 아니야."
"...해요."
"뭐? 똑바로 말해. 하나도 안 들려."
"...모니와 씨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요."
분명 귀가 이상한 게 아닌데 또 헛 것이 들렸다. 모니와랑 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카마사키의 시선을 피하며 후타쿠치가 답지 않은 얼굴로 재차 말했다.
"제가 ...모니와 씨를 좋아하거든요."
"...하?"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수줍은 소녀처럼 말하는 저 녀석이 정녕 후타쿠치인가? 누가 후타쿠치의 탈이라도 쓴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녀석답지 않아 등 뒤로 소름이 끼치는 듯 했다. 평소같지 않은 후타쿠치에 당황한 카마사키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후타쿠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한 번 쉼호흡을 하더니 덥썩 카마사키의 어깨를 잡았다.
"카마사키 씨가 늘 말하던 B반의 타카하시 있죠."
"어, 어어...?! 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알 바 아니고요. 제가 모니와 씨랑 잘 되면 타카하시 소개해 드릴게요."
후타쿠치가 갈색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카마사키는 순간 동그란 갈색 눈이 인상 깊었던 타카하시가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교내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해 자꾸 신경 쓰이던 그녀였지만 쑥스러워서 말 한 번 걸어본 적 없었는데! 후타쿠치가 타카하시에 대한 제 은근한 마음을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둘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마사키는 어깨에 놓인 후타쿠치의 손을 떼내고는 힘껏 마주 쥐었다.
"나만 믿어라, 후타쿠치!"
후타쿠치가 빙그레 웃으며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근데 너 게이였냐? 니가 모니와를 좋아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게이라기보다는... 남자가 좋다는 생각은 모니와 씨가 처음이거든요. 그럼 바이가 되나? 바이인가 본데요?"
남의 말하냐?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데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하나도 없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이런 문제에까지 가볍다니 두 손 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데? 고백하는 거?"
"뜬금없이 뭔 고백이에요. 진짜 연애 한 번 못 해본 거 티내지 좀 말아요, 촌스럽게."
"그럼 뭐 어쩌라고. 도와달라는 자식이 뭐 이런 태도야?"
"다 A부터 Z까지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말하자면 저는 아직 고백할 단계는 아니라는 거죠. 모니와 씨랑 선후배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고요. 알아 듣겠어요?"
지금 고백했다간 마냥 어색해질 뿐이라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런, 유치원생한테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났다. 지는 뭐 처음부터 연애 잘했나? 잘난 척은.
"그러니까 뭐. 본론부터 얘기 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카마사키 씨는 모니와 씨랑 친구잖아요. 모니와 씨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세요."
"모니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뭐가 궁금한데?"
"기본적으로 뭘 좋아한다든지, 취미는 뭐고 이상형은 누군지. 보통 주말에는 뭘 하는지 등등. 카마사키 씨가 상상을 해 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뭐가 궁금하겠어요? 예를 들면 타카하시한테."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가만 타카하시를 떠올렸다. 사실 카마사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같은 학교, 한 살 연하라는 것과 외모가 귀엽다는 것밖에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까 다 궁금한데."
"그러니까 뭐든지 저한테 알려 달라고요. 이제 감이 좀 잡혀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잠깐 기달리라고 말하고는 후타쿠치는 제 가방에서 노트 하나와 볼펜을 꺼냈다. 대뜸 뭐하자는 거지?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후타쿠치가 울컥 짜증을 냈다.
"안 말해주고 뭐 해요?"
그걸 또 적어두려는 거였군. 후타쿠치는 벌써 볼펜을 손에 쥐고는 카마사키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받아쓰기 시험에서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초등학생 같아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 쓴다, 애 써."
킥킥대는 카마사키에게 열 받은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어깨 위를 볼펜 꼭지로 푹푹 찔렀다. 아프다고 피하면서도 카마사키의 웃음소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모니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날부터 후타쿠치는 틈이 날 때마다 카마사키를 찾아왔다. 연습시간에는 대부분 모니와와 함께 있으니 다가오는 건 그렇다 쳐도, 점심시간에도 3학년 교실 안으로까지 들어온다. 모니와를 보고 싶기는 한데 직접 찾아가기에는 일일이 핑계를 대는 것이 골치 아파서 아예 카마사키에게 가는 거였다. 처음엔 모니와의 반인 C반을 냅두고 왜 우리 반에 오는지 몰랐던 카마사키는 우연히 C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후타쿠치를 보고 깨달았다. 후타쿠치는 여기까지 뻔뻔하게 와 놓고 정작 모니와가 있는 교실 문턱은 넘지도 못하고 있는 거였다.
평소 행실대로 가벼운 연애만 하고 상대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시 할 것 같은 녀석이 중학생처럼 안달나 있는 모습이 너무 의외여서, 카마사키는 태연한 척 교실 안을 훔쳐보는 후타쿠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녀석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거겠지? 어떻게 사람이 아예 변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후타쿠치는 모니와를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다가가는 것도 망설이는 거지? 후타쿠치가 C반을 지나쳐 2반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 카마사키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부실에서 일지를 쓰던 모니와가 괜히 뺨을 긁으며 말했다. 카마사키는 그제야 제가 모니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거 아냐. 다 써 가냐?"
"으음. 조금만 더 쓰면 돼. 일부러 기다리게 해서 미안."
"괜찮아요, 모니와 씨. 카마사키 씨한테는 어차피 남아 도는 게 시간이니까요."
카마사키의 옆에 앉아 빈둥거리던 후타쿠치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은 틈만 나면 왜 나를 걸고 난리야? 동네 북이 따로 없다. 카마사키는 발을 뻗어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건방진 자식, 선배도 모르는 놈, 이중인격 같으니.
"무슨 개소리냐.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뭘 안다고,"
"미안, 카맛치! 나 때문에..."
"아냐,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저 자식이 괜히 시비 걸어서 그런 거지. 넌 안 바쁘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할 일 없으면 가서 청소나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제 몸을 밀어내는 카마사키의 발을 잡아채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카마사키의 자세가 무너졌다. 저 자식이!
"신경 안 써주셔도 알아서 잘~하거든요?"
"이거 놔, 놓으라고."
"먼저 건드린게 누군데? 하여간 카마사키 씨가 말끝마다 튕기니까 제가 자꾸 건드리고 싶은 거 아니에요."
"튕기긴, 젠장, 개소리 하지 말고 놓으라고!"
카마사키의 발버둥에도 후타쿠치는 안간힘을 쓰며 카마사키의 발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둘 다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니라 모니와가 일지를 다 쓰고 나서 두 사람을 말리러 올 때까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엎치락 뒤치락 거렸다. 땀이 뻘뻘 나서는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모니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네 정말 사이 좋다. 응?"
"사이가 좋긴 누가, 저런 이중인격이랑!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저야말로 고릴라같은 선배랑은 친해질 마음 하나도 없거든요!"
너 말 다했냐, 카마사키 야말로 나이도 많으면서 초딩이냐. 가만히 냅두면 밤이 샐 때까지 저러고 있을 터라 모니와는 부실 불을 꺼버리고 문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후타쿠치와 카마사키가 부랴부랴 뛰쳐 나왔고 둘의 신경전도 끝이 났다.

[주말에 약속 잡아요]
부실 문을 잠그는 모니와의 뒤에서 후타쿠치가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 내내 이제는 슬슬 모니와와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그러더니. 후타쿠치가 모니와 쪽으로 턱을 까닥이며 카마사키에게 눈치를 줬다.
'타.카.하.시.'
소리없이 후타쿠치가 입술을 움직여 타카하시의 이름을 강조했다. 아, 타카하시. 카마사키는 왠지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교내에서 타카하시와 마주친 것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그 날 하루가 구름 위에 선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었는데.
뭘까? 카마사키는 순간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러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몰래 당황을 삼키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의 시선이 날아왔다. 후타쿠치는 왜? 하고 입술을 오므리고는 속삭였다. 그에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려 할 때, 모니와가 뒤를 돌았고 동시에 후타쿠치의 시선이 움직였다. 자석처럼 모니와를 향해.
"갈까?"
그래, 대답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약속, OK
. 모니와의 등 너머로 카마사키의 고갯짓을 발견한 후타쿠치가 들뜬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설레면 원래 저렇게 빛나 보이는 건가? 왠지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따라 웃었다.

모니와는 주말에 약속 있냐는 말에 눈동자를 댕그르르 굴리더니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심심해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같이 보러 가자든가, 서포터를 사러 가자든가(카마사키는 자신이 서포터를 안 낀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하다못해 연습 하자든가 카마사키는 핑계를 댈 생각도 못했다. 그냥이라니 모니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그러자고 말했다. 뒤늦게 후타쿠치도 함께라는 말을 하자 모니와가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약속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단지 무슨 이유로 만나자는 건지 궁금해하는 듯 긴장한 얼굴을 했다.
[약속 잡았어. 근데 만나서 뭐 하려고?]
집에 도착해 바로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도착했다.
[뭐라고 하면서 약속 잡았는데요?]
[그냥]
[그러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이라고 했다니까. 그냥 심심해서.]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왔던 답장이 몇 분이 지나고도 오지 않았다. 설마 문자 보내다 잠이라도 들었나? 카마사키는 답장이 안 오려나보다 생각하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방에 돌아오자 핸드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 대체 뭐야?
<뭐야, 왜.>
<뭐야, 왜?? 대체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약속을 잡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후타쿠치가 미친듯이 짜증을 내며 말을 쏘아붙였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무리 내가 약속을 형편없이 잡았다고는 해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그래도 아까부터 기분 잡쳤는데 후타쿠치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야. 너야말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지 마라. 내가 제대로 말 못한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기냐?>
<......미안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러게 왜 약속을 잡아도 그렇게...>
아니아니, 이제 됐어요. 흥분으로 커졌던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나 한 번 상한 기분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대충 후타쿠치에게 약속 일정만 말해준 뒤 뭐라 말을 걸으려는 후타쿠치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중인격 같으니.
카마사키는 젖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안하고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웠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한데 뭐 때문에 자신이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끝없이 답답하고 우울해져 갔다.
...외로워서 그런가. 분명 자신은 후타쿠치가 누군가를 애가 타게 좋아하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이래서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이라고 하는가 보다. 카마사키는 하루라도 빨리 모니와가 후타쿠치와 잘 되어서 타카하시를 소개받기를 바랐다. 나도 연애를 하면 외롭지 않게 될까? 사소한 거에 기뻐하며 빛나는 웃음을 짓게 될까? 카마사키는 그 때 봤던 후타쿠치를 생각하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카마사키가 아무렇게나 잡은 약속을 후타쿠치가 뭐라 수습했는지 모니와는 들뜬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낯선 조합에 긴장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영화보러 가자는 걸 제가 카마사키 씨한테 부탁했다고 말했어요."
"어."
"......"
"뭘 쳐다 봐. 왜? 할 말 있냐?"
"저번에는 제가,"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그 땐 미안했다. 좀 예민해져 있었나 봐.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모니와랑 잘 해 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괜찮다고 말했는데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무시하고 영화 포스터에만 주구장창 바라봤다. 카마사키의 취향도 아니고, 좋아하는 배우도 안 나오지만 포스터를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멀뚱히 후타쿠치와 모니와가 잘 되가는 꼴을 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서 그러니까 괜히 자신이 외로워지는 거다.
후타쿠치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서 포스터를 뺏어 갔다. 시선을 들자 후타쿠치가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 받아 하는 얼굴은 본 적 있지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 때문에? 카마사키가 왜 그러냐는 말을 하려는 찰나 후타쿠치가 도리어 물었다.
"화 났어요?"
"뭐?"
"저번에 그런 말 해서, 화 났냐고요. 왜 저 무시해요."
"화 안 났다니까. 나한텐 신경 끄고 넌 모니와나 챙겨. 기껏 약속 잡았는데 나랑 싸우면 뭐가 되겠냐?"
"......"
"가 봐. 나 진짜 화 안 났어."
다시 포스터를 뺏어 들고 손을 젓자 후타쿠치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모니와에게 갔다. 그래, 넌 얼른 모니와랑 잘 되서 나한테 타카하시나 소개 시켜 주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 카마사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씨에 애써 읽으려 노력했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 살면 안 된다고, 어른들이 툭하면 그러는 걸까? 허전한 옆자리도, 시큰거리는 가슴도, 답답한 기분도 무엇 하나 짜증나지 않은 게 없다. 내가 혼자라 그런가. 카마사키는 앞 좌석의 모니와와 후타쿠치를 보며 시큰둥하게 외로움에 대한 고찰을 했다. 관심도 없고 취향도 아닌 영화따위 애초에 볼 마음도 없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운드와 현란한 화면을 보다 카마사키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닥거리는 두 사람만 관찰했다. 이중인격. 후타쿠치는 아까 저와 실랑이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내내 싱글벙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모니와도 영화가 재밌는지 동그란 얼굴이 밤송이처럼 더 동그래 보였다.
살 맛 났구나. 완전히 커플 같아 보이는 모양새에 카마사키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 때 후타쿠치가 뒤에서 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보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잘 되가고 있다는 걸 확인해주는 그 잘난 웃음에 카마사키는 마주 웃어주지 못했다.
바라던 대로 다 잘 되가고 있는데. 후타쿠치는 모니와와 사귀고, 카마사키는 타카하시를 소개 받고.
곧 외롭지 않을 텐데, 왜 이다지도 가슴이 답답하고 모든 걸 후회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후타쿠치는 젤리를 질겅이며 내내 흥얼거렸다. 토요일에 모니와랑 영화를 봤던 기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C반으로 가버리지 왜 또 우리 반에 오는 건지.
"잘 되가냐?"
카마사키가 떠보듯이 말하자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말해 뭐하냐는 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도, 젤리가 질겅거리는 소리도 가만 있자니 짜증이 났다.
"그럼 C반에 가지, 왜 우리 반에 와? 안 그래도 2학년이 뻔뻔하게 3학년 교실 들어온다고 뭐라 한다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다."
"이상하네. 나한테 그런 말 한 사람 없는데. 그리고 같은 학생인데 3학년 교실이라고 못 들어갈 건 또 뭐야."
"3학년은 다들 너랑은 달라서 예민하거든? 알면 우리 반엔 이제 오지 마."
카마사키는 턱을 괴고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귀찮고 거슬리니 너네 반으로 가든지 모니와한테 가버리라는 듯 손을 내젓는 그의 뒤에서 후타쿠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카마사키 씨도 요즘 되게 예민한 거예요? 취직 못할까봐 걱정되서 그러는 거죠?"
"너! 너... 이..."
뭐라고 한 번 해보라는 듯한 얼굴에 헛소리 하지 말라든가, 닥치라든가 내뱉으려던 카마사키는 휙 고개를 돌려 후타쿠치를 외면했다. 지뢰를 밟혔음에도 지금은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카마사키가 반응을 안 하자 후타쿠치는 오히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야. 진짜 취업 못할까봐 신경 써요?"
"......"
"그래서 요즘에 기운이 없었던 거예요? 그거 때문에?"
"신경 꺼. 점심시간 다 끝나가니까 너네 반으로 가라, 이제 좀."
"대답해봐요. 정말 그것때문에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는 거냐고요."
이 자식이 비유를 해도 그딴... 카마사키는 화낼 기력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후타쿠치가 어떻게 받아들이던 지금은 그냥 우울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힘없이 펄럭이는 나부랭이처럼 손을 흔들자 후타쿠치가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가버렸다. 자식, 말 한 번 참 잘 듣는다. 곁에 있어도 거슬리고 없어도 거슬리는 모순된 기분에 카마사키는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슬슬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최근 자꾸 기력이 없어지는 것 같다.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려퍼졌다. 5교시는 영어라 듣기 싫어도 일어나 있어야 했다. 영어 선생님인 가와시마는 노처녀라 그런지 유난히 히스테릭해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꼴을 가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실 뒷편 사물함에서 영어 교과서를 꺼내려 일어나는데 뒷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문을 열 사람은 선생님뿐이 없는데 가와시마가 뒷문을 열 리가 없었다. 교실이 웅성거리며 뒷문을 연 사람에게로 이목이 주목되었다. 놀랍게도 후타쿠치가 서 있었다. 후타쿠치는 사물함 옆에 서 있던 카마사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어?"
"기운 차리라고요.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거 아니잖아요."
뛰어 왔는지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넥타이고 셔츠고 흐트러져 있는 모양새에 카마사키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후타쿠치가 억지로 카마사키의 영어 교과서 위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모나카였다. 가끔 당길 때마다 카마사키가 종종 사먹곤 하는, 매점에서 파는 모나카.
"......"
"...어..."
"......"
"너, 교실은..."
후타쿠치는 할 말을 쉬이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뒤늦게 카마사키가 시간을 확인하고 후타쿠치를 교실에서 내보내는 순간 앞문으로 가와시마가 들어왔다.
"뭐야! 거기, 2학년 아니야? 종이 울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 교실 하나 못 찾아가? 너! 2학년 몇 반이니!"
"아, 가와시마 선생님. 얘는 제가 뭘 부탁해서..."
일 났다. 가와시마가 오기 전에 내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놀라는 바람에 후타쿠치를 보낼 생각을 못했다. 게다가 2학년이니 잘못 하면 완전히 눈 밖에 날 상황이라 카마사키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카마사키의 앞으로 후타쿠치가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보니 후타쿠치가 모범생인 척 눈썹을 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가와시마 선생님. 종이 울린 줄 미처 몰랐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수업을 시작해야 하니 나중에 따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뭐, 뭐어... 그, 그러렴. 얼른 너네 반으로 돌아가도록 해."
"실례했습니다."
후타쿠치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가와시마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교과서로 감쌌다. 하여간 뭐든 잘생겨야 되는 구나. 카마사키는 자리로 돌아가며 뒷문을 흘끗 보았다. 문을 닫는 틈 사이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후타쿠치는 모범생 가면을 벗고 피식 가볍게 입술을 휘었다.

믿기진 않지만 후타쿠치는 자신을 신경써준 거였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매점까지 가서 모나카를 사온 것이며, 제 앞에 서서 가와시마에게 죄송하다고 한 것이며. 대체 후타쿠치가 답지 않게 왜 그랬을까?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주고 간 모나카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모나카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말해준 적이 있나? 모나카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노인네 취향이라며 놀려댈 게 뻔해서 비교적 친한 사람들만 아는 사실인데.
아, 그러고보니 말했었다. 후타쿠치가 모니와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을 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라는 이유로 후타쿠치는 모니와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을 카마사키에게도 던지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자신에 대한 것도 말했었다. 말해 놓고도 후타쿠치가 기억해줄 줄은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녀석 의외로 기억력이 뛰어난 편인가 보군. 카마사키는 모나카를 먹을 생각은 안하고 손 안에 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기만 했다. 어쩐지 포장을 뜯고, 모나카를 먹어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점에서 파는 거일 뿐인데 누가 줬다는 것 만으로 의미가 부여된다니 참 허무하고 씁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나카를 먹어치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먹든 먹지 않든 어느 쪽이든 허무함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후타쿠치에 대해 궁금해졌다. 단순히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생일은 언제이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와 같은 기본적인 건 이미 알고 있다. 후타쿠치가 제 입으로 떠들어댈 때는 들어서 뭐하나 싶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들어놓길 잘했다 싶었다. 이토록 누군가 궁금해질 줄은 몰랐다. 카마사키가 무엇보다 후타쿠치에게 궁금한 것은, 후타쿠치의 마음이었다.
"넌 모니와가 왜 좋아?"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의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자니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도 카마사키가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괜히 물어봤다. 마음 속으로 땅굴을 수십 번을 파며 후회했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그냥, 그냥 궁금했다고 해 버릴까.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입을 여려는 동시에 후타쿠치가 선수를 쳤다.
"왜 좋아하냐구요?"
"어, 어어...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니와는 남자인데 왜 좋아하나... 그냥 궁금해져서."
"으음."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것 같던 후타쿠치는 눈마저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이 좋아하는 이유가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걸까? 카마사키는 이런 게 왜 궁금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유를 몰라 답답하면서도 후타쿠치가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체 나는 저 자식에 대한 게 궁금해도 이딴 게 제일 궁금할까? 카마사키가 제 마음을 헤아려보는 동안 고민을 마쳤는지 후타쿠치가 눈을 떴다.
"착해서."
"... 그 뿐?"
"...작아서?"
"왜 의문형이냐?"
"...귀여워서...?"
왜 하는 말마다 이딴 식이지? 혹시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건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제대로 된 대답을 강요했다. 그러나 후타쿠티는 세 가지까지 말하고는 그만, 하고 외쳤다.
"아! 이딴 게 뭐가 중요해요.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지. 그보다, 이게 왜 궁금해요?"
"어?"
"내가 모니와 씨를 왜 좋아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왜 궁금해하는 거냐고요."
후타쿠치의 얼굴이 다가오면서 갈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깝게 보였다. 부담스러워 얼굴을 치우자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도망가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팔을 잡아챘다. 왜? 후타쿠치가 물었다. 물어봐주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냥."
"그냥?"
"...그냥 궁금했어."
진짜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물었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너가 좋아하는 사람을 너는 왜 좋아하는지. 왜 그 사람 앞에서 항상 빛이 나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지.
그냥...
인정한다. 난 어떻게 하면 너가 날 좋아해 줄 수 있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그것만 궁금했다.

[이번 주말에 약속, 중간고사]
한동안 뜸하더니. 카마사키는 어느새 와 있었던 문자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친절하게 핑곗거리도 가르쳐주다니 정말 애를 쓰는군.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으아아악, 하고 소리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사랑의 큐피트같은 걸 자처해서 이 지경이 되었나. 도와달라는 놈에게 반해버린 제 꼴이 처량하다.
그러지 말걸. 타카하시 따위, 귀엽긴 하지만 어차피 사귈 가능성도 없었는데 넘어가지 말걸 그랬다. 애초에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수백번을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제 와 후회를 해봤자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마사키는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이대로 고백도 못하고 차이는 건가. 남자한테 고백할 생각을 다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제 꼴이 우스운데 차이는 게 당연하다는 게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도와달라고 말만 안했어도 똑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나쁜 자식. 모든 일의 원흉 같으니. 짜증나는 놈. 어쩌다 저런 놈이 좋아졌을까.
아는 욕을 모두 후타쿠치에게 쏟아내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답장도 안한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문자를 보냈나.
[고백할 예정]
나쁜 개새끼. 나는 차일 게 뻔해서 고백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지는 잘 되가고 있다 이거지? 후타쿠치 개자식. 카마사키는 베개가 터질 때까지 울분을 쏟아냈다. 도움도 안 되는 자식! 개자식!
차마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혼자 화를 참다가 우울해졌다가 짜증을 냈다가 기어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슬퍼서는 아니고 분해서였다.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후타쿠치는 그렇다 쳐도, 카마사키에겐 모니와 또한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잘 되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시험기간에는 종종 모니와의 집에 가서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기에 주말 약속은 자연스럽게 모니와네 집에 가는 걸로 정해졌다. 후타쿠치는 모니와네 집에 처음 가는 거라며 전날부터 들떠서 전화를 걸어왔다. 속은 타들어가는데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 때문에 배가 아팠다. 카마사키의 사정을 모르는 후타쿠치는 근처 역에서 만나 같이 가자며 말했다. 그 말에 카마사키는 배가 아프다 못해 제 배가 뻥 뚫렸나 싶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탓이었다.
가뜩이나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데 고백에 들뜬 후타쿠치를 데리고 가서, 화기애애하게 고백 할 분위기를 만들고, 거기다 둘이 잘 되는 모습까지 내가 꼭 봐야 하나? 아니, 그런 변명을 내세울 필요없이 그저 싫었다. 도저히 못 볼 것 같았다. 어차피 잘 되가고 있다는데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러나 후타쿠치는 이제 둘이 만나도 괜찮지 않겠냐며 사양하는 카마사키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와준다면서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발 빼지 마세요. 차가운 말투에 핸드폰을 대고 있는 귀에서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결국 카마사키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참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어째서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걸까. 마음은 한 발자국도 집에서 나오기 싫었는데 몸은 머리와는 달리 잘도 움직였다. 카마사키는 가라앉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어 모자를 뒤집어 썼다. 모자를 쓰면 눈매가 더 사나워보여서 평소엔 질색을 하는데 얼굴을 숨기는 것에 있어선 모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비라도 오면 우산을 쓸텐데 날씨는 쓸데없이 화창했다.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예뻐서 더 짜증났다. 왜 하필 날씨도 이런거지.
"웬일로 일찍 왔네요? 전 이미 선물까지 준비했어요."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바로 후타쿠치와 눈이 마주쳤다. 안그래도 쓸데없이 약속을 잘 지키는 자신에게 화가 난 참이었다. 일찍 도착하면 할 수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마음을 다잡을 새 없이 모니와네 집에 도착할 듯 하다. 카마사키는 모자를 다시 꾹 눌러쓰고는 후타쿠치에게 다가갔다. 평소보다 신경 쓴 태가 나는 후타쿠치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흘끗 시선을 주었다. 단지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있어도 잘생긴 놈이 그 주위를 환하게 비추듯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모자가 시야를 조금이라도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앞장섰다.

"뭘 선물까지 사 왔어?아무튼 고맙다. 아 그래도 집에 먹을 거 없었는데 같이 먹으면 되겠네."
차랑 같이 준비해갈게, 후타쿠치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모니와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방에 간 모니와를 뒤로 하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데리고 2층 모니와의 방으로 갔다. 카마사키야 워낙 둘 사이에 허물이 없다곤 쳐도 후타쿠치도 온다고 했는데 모니와의 방은 남자애의 방답게 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신경 좀 쓰지, 겉보기와 달리 깔끔한 걸 좋아하는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데나 앉아 있어. 얘는 사람이 온다는데 청소도 안 했네."
"왜 카마사키 씨가 치워요?"
"어? 그냥, 여기 오면 맨날 내가 정리해주거든. 내가 이런 걸 좀 못 참아서."
"흐응. 많이 와봤나 보죠? 너무 익숙한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카마사키 씨 방인줄 알겠어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건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날선 말투에 대꾸하려다 관두었다. 괜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진정하자, 카마사키.
"막연하게만 느꼈던 건데, 모니와 씨랑은 얼마나 친한 거예요? 두 사람이 제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것 같아서 조금 짜증나려고 하네."
손에 쥔 노트가 꾸깃하게 구겨졌다. 아, 이거 모니와 건데. 머리 한 편에 열 받지 말라는 만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전부터 쭉 조금씩 온도가 높아지던 가슴 속의 화는 식을 줄을 몰랐다.
"왜 대답을 안해요? 얼마나 친하냐고요. 설마 카마사키 씨, 모니와 씨한테 흑심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죠?"
"......"
"아니라고 해요. 지금 당장."
"......"
"카마사키 씨!"
대체 얼마나 모니와를 좋아하기에 그런 얼굴로 화내는 거지? 카마사키는 울컥 화를 내려다 후타쿠치의 애가 탄 얼굴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오해도,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이 상황도, 왜 이렇게 됐는지 가슴 속에 쌓인 억울함도,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비겁함도, 그 모든 것들을 쏟아내버리고 싶었는데. 넌 왜 모니와 하나때문에 세상이 다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사람처럼 초조해 하는 거야. 그런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게이도 아닌데 남자를 왜."
"......"
"너랑 모니와, 잘 되게 도와달라고 한 건 넌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냐?"
카마사키는 정리하던 것들을 마저 정리해 나갔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 모니와의 구겨진 노트가 보였다. 미안, 모니와. 내가 노트 망쳐 버렸네. 카마사키는 애써 종이를 펴보려 손바닥으로 노트 위를 꾹꾹 눌러봤지만 구겨진 종이가 이전처럼 말끔하게 펴질 리가 없었다. 이미 변한 것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백 잘 되길 빌게."
"......"
"너네 잘 어울려."
진심으로, 모자를 쓰길 잘했다. 카마사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야 후타쿠치 쪽으로 돌아섰다. 이 상황에서 공부라니 턱도 없다. 후타쿠치가 붙잡든 협박하든 가야 겠다고 다짐하며 카마사키는 바닥에 놨던 가방끈을 잡았다.
"역시 나 그냥..."
"어딜 가요? 나를 내버려 두고."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손목을 쥐고 말했다. 일전에 부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후타쿠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내가 더 센데도 불구하고 후타쿠치의 손 아래에선 무용지물이다.
"고백하려면 제3자는 빠져 줘야지. 니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너 고백하는 것까지 옆에서 들어줘야 하냐?"
"어린애 할게요. 그러면 죽어도 옆에 있어주기라도 할 건가요?"
"미쳤냐? 장난치지 말고 좋게 말할 때 이 손 놔라."
"싫은데."
개자식. 망할 개 같은, 이중인격. 너 때문에 나는 절대로 좋아할 일도 없을 녀석을 좋아하게 되버렸는데. 젠장. 빌어먹을.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 방향 그대로 카마사키를 밀어버렸다. 밀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카마사키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후타쿠치는 얼른 우위를 선점한 뒤 카마사키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자세를 다잡았다. 모자 아래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놓으라고,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싫은데."
"모니와! 모니와악!! 모,"
진짜 골때리네. 집이 떠나가도록 모니와를 부르는 카마사키를 내려다보며 후타쿠치가 중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목에 핏줄이 서도록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후타쿠치는 벌어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헉, 하고 카마사키가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후타쿠치는 본격적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후타쿠치의 혀가 카마사키의 입 안을 제맘대로 휘젖고 다니는 동안 카마사키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안심시키려는 듯 카마사키의 팔이며 얼굴이며 곳곳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굳어있던 몸이 점차 풀리면서 카마사키는 언뜻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끌거리는데 따듯해. 기분 좋다. 카마사키가 멍하니 키스에 몰두해 있을 무렵 후타쿠치가 입술을 떼지 않고 웅얼거렸다.
"기분 좋아?"
"...응."
"내가 좋지?"
"...어?"
여직 쾌감에 잠겨 있는 카마사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는 듯 가볍게 키스하고 후타쿠치가 재차 물었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무슨 소리를,"
"그럼 평생 당신 게 되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뭘 했지? 가슴이 미친듯이 벌렁거렸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모니와, 모니와가.
"당신은 날 좋아해요."
"...웃기지 마. 저리 비켜."
"키스해줄게. 좋아한다고 말해 봐요."
"지랄하지 말고,"
"난 이제껏 지금만 기다려 왔어, 카마사키 씨."
그 순간 모자 챙 아래로 후타쿠치의 하관이 눈에 들어왔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과 그의 하관을 보며 일순 숨을 들이켰다. 웃고 있어.
"모, 모니와가."
"모니와 씨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니가 분명! 나한테 도와달라고, 모니와랑 잘 되게 도와달라고...!"
"그랬나?"
"이, 이 개 자식을 그냥. 미친놈. 너 때문에 내가, 내가...!"
속았다. 이 새끼가 날 감쪽같이 속이고 연극을 한 거였다. 카마사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들썩였다. 저런 새끼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민했는데. 이 망할 자식.
"내가 좋지?"
카마사키의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내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카마사키의 시야에 한 가득 후타쿠치가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빛나는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번 그 미소가 나를 향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었다. 기어코 카마사키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귓가에 후타쿠치가 속삭였다. 내가 좋다고 말해요. 그럼 평생 카마사키 씨 옆에 있어줄 테니까.
"닥쳐, 이 망할 자식..!"
말이라도 못하면. 절대 가만 안 둘거다. 후타쿠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카마사키가 으르렁거렸다. 조금 젖은 눈가가 야하다고 생각하며 후타쿠치가 빛이 나도록 웃었다.




<Side track>

"부탁이 있어요."
뜬금없이 3학년 교실까지 찾아온 후타쿠치가 대뜸 말했다. 부활동 얘기는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부탁이라니 뭐를? 본능적으로 모니와는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어째 불안한데.
"카마사키 씨랑 잘 되게 부탁 좀 할게요."
 너네 화해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니와에게 후타쿠치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모니와 씨. 이렇게 감이 떨어져서야 어디 제대로 연애 해보겠어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겠죠?"
저, 저런...! 모니와는 부들부들 떨며 반박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딱 봐도 저보다 베테랑인 후타쿠치를 상대로 허세를 부려봤자 제 꼴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것을 과거 카마사키의 일화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후타쿠치와 카마사키의 실랑이를 옆에서 2년동안 봐 온 것이 이렇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너... 이렇게 해서까지 카맛치를 괴롭히고 싶은 거였어?"
초등학생 수준의 괴롭힘으로 아는 모니와가 후타쿠치에게 나무랐다. 탁, 후타쿠치가 제 이마를 감싸쥐었다. 선배를 과대평과했군요. 모니와 씨도 카마사키 씨만큼이나...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에 모니와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마사키 씨보다 별 나은 게 없군요, 모니와 씨. 공부 머리는 좋은데 이쪽은 영... 아무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말이죠...(생략)"
가만히 후타쿠치의 계획을 듣던 모니와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며 후타쿠치에게 말했다.
"후타쿠치 너... 카맛치를 좋아해?"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시합을 할 때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꾀를 부리는 건 나한테 통하지 않아,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타쿠치는 모니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기 입으로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비겁한 수였지만, 모니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후타쿠치가 너무나 환하게 웃어서 그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오히려 감격스러웠다.
"나만 믿어, 후타쿠치!"
이제야 좀 철이 드려나보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두 손을 잡고는 울먹거렸다. 모니와가 후타쿠치의 큐피트가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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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되는대로 써버렸다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본심(本心)

2017. 8. 9. 20:36 from

[후타카마] 본심(本心)

 

 

[저게 뭐가 잘 생겼냐? 그냥 비실비실하게 생긴 거지.]

주위에서 그의 외모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남자는 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남자답지 못한 외모라고 혹평을 하던 남자는 근처에서 얘기를 엿들은 여자들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무시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남자는 그딴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리시브 연습이나 더 하자며 처음 말을 꺼낸 후배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코트 위로 가 버렸다. 옆에 있던 여자는 어느새 눈매를 사납게 치켜뜨더니 남자의 질투란 꼴사납다고 비웃었다. 대화의 중심 소재였던 그는 여자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코트 위에서 움직이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벌써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남자는 리시브를 받아내지 못한 후배의 옆에 나란히 서서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었다.

남자는 늘 그렇다. 세상사람 모두가 관심 있어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제가 관심 있는 것에만 시선을 둔다. 배구, 혹은 그의 친구. 그 밖에도 남자가 관심 있는 것들이 많을 테지만 그는 아직 남자의 관심사가 그 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은 남자의 시야 밖에 있다는 거다. 그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남자를 건드려보고 싶은 본능이 생겼다. 어쩐지 남자의 시선에 들어서고 싶다. 그건 남들은 다 날 신경 쓰는데 너는 왜 아니냐는 오기에 가까웠다. 툭툭,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다혈질이라 툭, 하고 건들면 건드는 대로 그를 인식했다. 그가 남자의 시야에 들어섰을 때 처음 느꼈던 건, 의외로 기분이 묘했다는 거. 남자의 시선은 화살처럼 날아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그가 원했던 건 남자가 자신을 봐 주는 게 맞긴 했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잠깐의 마주침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보다는 감정이 섞인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남자는 졸업할 때까지 그가 원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시선, 잠깐의 마주침에 그치지 않았다.

 

 

, 하나도 안 변했네! 7년 만에 만난 거 맞아?”

이 새끼 완전 아저씨 다 됐어. 이거이거 배 나온 것 좀 봐라~ 결혼했다고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니냐?”

설마 네가 제일 먼저 결혼했을 줄이야. 형수는 너 고등학교 때 어땠는지 다 아냐? 아니, 알 리가 없지. 알면 네가 결혼할 수 있을 리가, 아 새끼야 이거 치워라!”

닥쳐라, 닥쳐. 내가 한 마디 충고하겠는데 결혼은 늦을수록 좋은 거야. 알겠냐, 총각들아.”

아하하하, 술집을 통째로 빌린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앉은 테이블마다 결혼 얘기며, 직장 얘기며,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배구부 선후배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라 그런지 몇 년 분의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9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파장할 기미가 안 보였다.

내 결혼 얘기는 됐고, 너네는 어떠냐? 설마 아직까지 동정인 건 아니겠지?”

이미 가정을 이뤄 똥배가 나올 정도로 여유로워진 사사야가 테이블을 둘러보며 말했다. 결혼했다고 코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사야의 시선이 카마사키에게 멈췄다. 처음부터 모니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은근히 인기가 많아 논외의 대상이었다. 궁금한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기 없어 보이는 카마사키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받은 카마사키가 울컥 화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를 봐! 내가 뭐, 설마 아직까지 동정일 줄 아냐?”

아니면 마는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럼 지금 애인은 있어?”

지금은 없어.”

역시나, 하고 모니와와 사사야가 한숨을 뱉었다. 지금 없는 거지 이전엔 분명히 있었다니까? 카마사키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모니와와 사사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받은 카마사키가 테이블에 있던 술을 닥치는 대로 마셔대기 시작했다.

진짜라니까. 너희들 내 말 못 믿냐?”

아니야. 믿지 그럼. 그래서 여자 친구는 얼마나 사귀어 봤는데? 제일 오래 간 건 얼마나?”

두세 명 정도. 6개월은 갔나.”

두 명이면 두 명이고 세 명이면 세 명이지. 두세 명은 뭐야? 설마 너는 사귄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아니었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니면 사귀는 거로 치기엔 너무 빨리 헤어진 거 아니야?”

모니와의 말이 정답인 모양이었다. 카마사키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는지 처음 와 본 가게의 인테리어가 어떻다는 둥 꼬치가 맛있다는 둥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미끼를 문 물고리를 어부가 그냥 놓아줄 리 없었다. 모니와는 대체 얼마나 사귀었기에 사귀는 걸로도 안치려는 거냐며 카마사키를 닦달했다. 그 옆에서 사사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참을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끅끅거렸다.

일주일? 삼일?”

제발, 모니와.”

혹시 하루는 아니겠지.”

그만하랬잖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모니와는 눈치껏 장난을 거두었다. 만나게 되고 처음으로 테이블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옛날부터 연애에는 지나치게 어리숙했던 저의 친구는 아직까지도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고, 하루 만에 헤어진 기억은 그의 지뢰가 된 듯 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하루는 심하긴 하다. 모니와는 장난이었지만 결국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 그러고 보니.

후타쿠치 말이야. 의외이지 않았어?”

?”

그 녀석 졸업하고 배구 그만뒀잖아. 난 사실 의외로 후타쿠치는 배구에 진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다른 쪽으로 갈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하긴 나도 후타쿠치는 대학 가서 배구 할 줄 알았는데.”

. 하긴 의외였긴 하지.”

그런데도 되게 납득이 가지 않냐? 되게 잘 어울리잖아.”

후타쿠치가 배우라니.”

아이돌이면 몰라도 배우라니. 사사야가 꼬치를 뜯어먹으며 말했다. 그 말에 카마사키와 모니와도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술집에 있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한 번쯤 후타쿠치에 대해 떠들 것이다. 고등학교 때도 튀는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후타쿠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대학을 진학하지도, 취직을 하지도 않았다. 돌연 몇 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갑자기 TV에 나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비록 역할은 작은 단역 수준이었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외모로 후타쿠치는 단숨에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주목받는 신인 치고는 결코 비중이 큰 역할이 와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 덕분인지 후타쿠치는 반짝 스타에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연기 실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2년 전부터는 명실상부하게 가장 주목받는 20대 남자 배우 중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스크린이고 TV, 인터넷, 잡지 등 연예 매체란 매체에는 후타쿠치의 얼굴이 도배하고 있을 정도다.

이 정도까지 성공했으니 그런 연예인과 같은 학교, 게다가 같은 부활동을 했던 게 다테공고 배구부 사람들에게는 은근한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옛날에는 건방지고 얼굴만 잘났다고 툭하면 비아냥거리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들 후타쿠치를 들먹이면서 혹시라도 이 자리에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역시 안 오겠지? 후타쿠치.”

당연하지. 걔가 좀 바쁘냐? 지금 한창 드라마 촬영하고 있다잖아. 그리고 안 바빠도 후타쿠치가 이런 데 올 리도 없고.”

하긴. 걔 성격 상 동창회 같은 거 올 리가 없지. 근데 난 솔직히 동창회 오면서 후타쿠치 오는 거 꽤 기대했는데.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하지 않냐? 화면으로 볼 땐 고등학교 때랑 달라진 거 없어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 궁금하잖아.”

너네 술 안 마시냐? 나 다른 테이블로 간다?”

아까부터 닥치는 대로 술만 마셔대던 카마사키가 불평했다. 카마사키는 아까의 지뢰로 인한 상처가 가시지 않은 건지 구겨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마셔, 마신다고. 건배~!”

카맛치 너는 후타쿠치가 궁금하지도 않아? 너네 꽤 친하지 않았나.”

친하긴 개뿔이.”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왜 옛날에 후타쿠치가 막 들어왔을 때 말이야. 아이돌 같은 애 있다고 소문나서 연습하는 데 여자애들이 막 몰려왔던 거 기억 나?”

당연하지. 난 후타쿠치가 잘생긴 건 알았어도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는데 그 때 다른 학교에서도 왔었잖아.”

모니와와 사사야는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이랬었지, 저랬었지 하는 말을 들으며 카마사키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자리에도 없는 자식 얘기를 뭘 저렇게 신이 나서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도 말이 많은 녀석들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그런지 입이 다물 새가 없다.

, 카맛치. 듣고 있냐? 뭘 술만 퍼마시고 있어, 꿀꿀하게.”

걔가 뭐 그리 잘생겼다고 난리야? 그냥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사람 얼굴인데.”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은 맞지만 그게 뭐. 어차피 남자 얼굴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카마사키의 말에 모니와가 사사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 자식도 하나도 안 변했네? 그 때 카마사키가 거의 유일했지, 아마? 대놓고 후타쿠치한테 저게 뭐가 잘생겼냐고 말했던 사람이.”

후타쿠치 엄청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잖아. 입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친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선배란 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걔도 생각도 못했겠지.”

그러고보니 그 때부터인가? 후타쿠치가 카맛치한테 일일이 시비걸고 다니던 게. 혹시 카맛치 그 때부터 찍힌 거 아냐?”

푸하하핫, 그랬나봐! 찍혔었나봐! 뭐가 웃긴지 사사야가 테이블을 탕탕 쳐대가면서 웃어댔다. 그 옆의 모니와는 그래도 카마사키의 눈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아보는 듯 했지만 큭큭거리는 소리와 들썩이는 어깨가 신경 안 써주느니만 못했다. 카마사키는 이 놈들을 한 대 쥐어 팰까 고민하며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너네 맞을래?”

, 아니. 큭큭근데 카맛치 진짜로, 정말로 후타쿠치가 잘생겼다고 느껴본 적 없어?”

누가 안 잘생겼데? 객관적으로 잘난 얼굴이란 건 나도 알아. 근데 그게 뭐 어쨌냐는 거지.”

그냥 보이는 거 말고, 그렇게 느껴본 적 없냐고. 사람 외모라는 게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 사실 옛날에 걔가 남자인데도 가끔씩 얼굴 보면 설렜다니까. 물론 내가 게이라는 건 아니고.”

호모가 된 걸 축하해, 모니와.”

사사야가 모니와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모니와는 아니라니까, 신경질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 원래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잘생기고 예쁘면 본능적으로 설레는 거야. 안 그럴 리가 있냐? 심지어 우린 남잔데 시각적인 거에 얼마나 약하냐고. 잘난 인간이 빤히 쳐다보면 그게 이성으로 끌리든 안 끌리든 눈이 제대로 달렸다면 반응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카맛치. 너는 어때? 그런 적 없었어?”

술에 취해서 그런지 모니와의 긍정을 바라는 눈동자가 까만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후타쿠치를 상대로 설렜던 적이 있냐고? 카마사키는 반쯤 남은 잔을 원샷하고는 말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절대로 그래 본 적 없다. 후타쿠치한테 설렌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카마사키는 코웃음 쳤다. 남자를 상대로 무슨.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라며 카마사키가 술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영 재미도 없는 이야기만 듣고 있자니 술맛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곱씹다 최근까지 어떻게 살아 왔냐는 근황까지 얘기하고 보면 더 이상 공통의 화젯거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남자들은 이럴 경우 으레 여자 이야기를 하곤 한다.

선배는 벌써 결혼하셨다고요? 우와, 아직 26살인데 요즘으로 치면 빨랐네요. 예뻐요?”

설마 사고 친 거 아니에요? 아하하, 아야.”

이 자식은 여대생이랑 지금 동거하고 있데요. 발랑 까져가지곤.”

카마사키와 모니와, 사사야만 있던 테이블에 이곳, 저곳을 방랑하던 후배들이 합류했다. 결혼이니 연애니 카마사키로서는 달가운 화제가 아니었지만 사사야가 결혼했다는 말에 화제는 금방 연애니 결혼이니 여자와 관련된 걸로 바뀌었다. 아까와 똑같은 말이 나온다면 이번에야 말로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카마사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나한테는 제발 어떠냐고 물어보지 마라.

대학교 들어가면 당장 여자 친구 사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미팅을 수십 번을 하고서야 겨우 사귀었다니까요? 그래도 금방 헤어졌지만.”

얼마나 갔는데? 한 달?”

에이, 한 달은 심했다. 두 달은 갔던 것 같아요. 오래 되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후배의 말에 모니와와 사사야의 시선이 카마사키에게로 향했다. 측은한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카마사키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네 왜 자꾸 나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거냐?

그래도 요즘엔 다 가볍게 사귀는 추세인지라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지 않나요? 6개월 이상을 간 적이 없다니까요. 하하하. 그만큼 여러 여자 만날 수 있긴 하지만.”

“1년 이상 사귀면 진짜 대단한 거야. , 사사야 선배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어요? 사고 친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냥, . 오래 사귀기도 했고, 계속 같이 있다 보니까 자연스레 그런 흐름으로 흘러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에이, 설마. 그 전에도 몇 명 있었지.”

아직 결혼에 대해 막연한 상상만 가지고 있는 후배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사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진지한 연애는 따분하고 시시하다고 말했던 주제에 참 모순적이다. 사사야는 제 연애담을 말하는 게 쑥스러우면서 자랑스러운 모양인지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끊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가 점점 서로 호감을 갖게 돼서 사귀게 되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근데 확실히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었어. 그냥, 그냥 막연하게 이 사람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만의 미래를 상상해도 행복했거든.”

신기해, 후배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미 다들 20살을 훌쩍 넘어 2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사사야 혼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카마사키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순간 이상하게도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이 테이블만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전 이제까지 연애는 해봤어도 사랑은 해본 적 없던 것 같아요.”

나도.”

다들 술에 취해 감성에 젖었나. 조용해지다 못해 심해까지 가라앉을 것 같은 분위기에 카마사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다들 왜 이러냐. 술이나 마시자고.”

마셔, 마셔.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해 봐도 다들 축 늘어졌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돌리는 카마사키를 향해 후배가 물었다. 그러는 선배는 사랑 해 본 적 있어요?

?”

사랑 해 본 적 있어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던 가게가 일순 조용해졌던 건 그 때였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이는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안 들어왔지만 가게에 들어서는 누군가는 모두의 시선의 한 번에 사로잡았다. 다들 기대하면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후타쿠치가 들어온 것이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후타쿠치는 어쩐지 조명을 받지 않았어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래서 연예인인가 보다, 하고 멍하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야. 역시 연예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 후타쿠치, 너 더 잘생겨진 것 같다.”

그런가요? 선배들은 변한 게 없네요, 아하하.”

연예인이 왔다며 호들갑 치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인사하던 후타쿠치는 마지막으로 가게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후타쿠치의 이름만 들어봤다던 후배들은 그를 연예인을 보듯실제로 연예인이지만, 쳐다보았다. 후타쿠치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사야가 주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지금 되게 바쁜 시기 아니야?”

. 바쁘긴 해요.”

다들 엄청 놀란 거 봤냐? 동창회 있다고는 알려줬다지만 네가 정말로 올 줄은 몰랐거든.”

하긴 제가 좀 비싼 몸이긴 하죠. 마침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서 겸사겸사 와본 거예요.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기도 하고.”

후타쿠치는 예전과는 달리 말투가 살가워져 있었다. 모니와는 네가 나온 영화랑 드라마 챙겨보고 있다면서 나중에 사인이나 해달라고 말했다. 후타쿠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 후배와 인사를 나누더니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향해 대뜸 술잔을 내밀었다. 마침 제 잔에 술을 따르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카마사키 씨는 여전하네요. 아직도 촌스럽게 노란 머리에요? 질리지도 않아요?”

신경 꺼. 그러는 넌 되게 변했다.”

별로 변한 거 없어요. 술 많이 마셨나보죠? 얼굴이 완전 새빨간데.”

원숭이 엉덩이 같아. 후타쿠치가 키득거렸다. 카마사키는 본인도 아까부터 열이 오르고 있다는 걸 알아 말없이 후타쿠치의 잔에 제 잔을 갖다 대었다. , 하고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가벼웠다. 만날 TV에서만 보던 얼굴과 술을 마시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후타쿠치와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같이 있으면 할 말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도 아니고 단순한 부활동 후배라고 하기에도 뭣한 상대인데 게다가 연예인이 되어서 나타난 자식에게 묘하게 거리감이 들었다. 그러나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는지 카마사키에게 뭐 하고 지냈냐며 물었다. 어떻게 계속 직장은 다니시나 보네요? 얄밉게 시비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뭐, 별 다른 거 없이 직장만 다니고 있지. 너야 말로 뭐 하고 지냈냐고 묻는 것도 이상한가? 인터넷에서 다들 떠들어대고 있으니까.”

제 기사를 보긴 하나 봐요?”

보이니까 보는 거지. 게다가 여자들이 다들 네 얘기만 떠들어대니까.”

누구, 설마 여자 친구도 있어요?”

후타쿠치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내가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거에 놀라는 건지 이쯤 되니 게이라는 헛소문이라도 돌았었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지만, 하고 카마사키가 대꾸했다. 그냥 있다고 허세라도 부릴까 싶었지만 실상을 아는 녀석들이 주위에 있으니 그러지도 못한다는 게 원통하다. 보나마나 후타쿠치가 또 놀릴까 싶어 카마사키는 아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럼 이전에는 있었다는 거네요? 헤에, 카마사키 씨가~?”

예상대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놀림조로 말을 걸었다. 몇 명이나 있었는데요? 그럼 동정 딱지는 뗐겠네요? 어떻게 사귀었었는데요? , 이런 촌스런 머리를 하고도 여자 친구를 사귈 수가 있구나~.

닥치고 신경 꺼. 몇 명을 사귀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말투니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전 여친하고는 왜 헤어졌어요? 얼마나 갔었는데요.”

신경 끄라,”

이런 기회가 날마다 오는 줄 알아요? 이대로 평생 여자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어보다 혼자 죽을 셈이에요? 오랜만이니까 코치 해주겠다고요. 뭐 어때요? 오늘이 지나면 카마사키 씨랑 제가 언제 또 만나겠어요?”

…….”

이런 얘기는 원래 별 상관없는 사람한테 하는 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후타쿠치가 턱을 괴고는 말했다. 이 자식, 틀림없이 재밌어 하는 게 분명하다. 선심 쓰듯 말하지만 아직도 저를 놀리는 게 뻔해서 울컥 짜증이 났다. , 그래. 오늘 보면 언제 볼 지도 모르는 녀석이니까 못 말할 것도 없다. 네가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코치해준다는 둥 젠체하는 건지 한 번 해 봐라, 망할 자식아. 카마사키는 씩씩거리며 후타쿠치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이야기를 풀었다. 카마사키의 뒤에서 모니와와 사사야가 애처로운 듯이 카마사키를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카마사키는 외모가 그렇게 못나지도, 성격이 그렇게 나쁘지도, 벌이가 그렇게 시원찮지도 않은 평범한 남자다. 아니, 오목조목 따져보면 그렇게라고 치부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점도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연애에 있어서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연애 고자인 셈이다.

사람의 몸에 연애 세포란 게 진짜 있다면 자신은 그게 극단적으로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번인가의 썸을 타고, 두 세 번의 연애를 해 봤지만 그 때마다 카마사키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러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를 몰라 혼자 전전긍긍하다 결국 차이거나, 혹은 아무 말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기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얼마 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무성애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데? 카마사키는 누군가에게 관심이 간 적은 있지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두근두근한 설렘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고,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고 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사정이 있겠거니 납득하다보니 상대는 언제나 카마사키에게 왜 질투를 안하냐며 채근했고 그 때마다 카마사키는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느낌인데?”

하소연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진심으로 후타쿠치에게 상담받는 격이 되었다. 카마사키는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느라 우울함에 가득 찬데다 술김에 휩쓸려 낯간지러운 질문을 후타쿠치에게 던졌다. 사랑이 뭐냐니 맨 정신으로는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이다.

글쎄요.”

의외로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의 질문을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가장 구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카마사키는 제가 술에 취하긴 취했나보다 생각했다. 카마사키는 대답을 해주기는커녕 반문하는 후타쿠치에게 제대로 대답하라며 턱을 괴고 있는 팔을 툭 쳤다.

아까 너 오기 전에 후배 하나가 그러더라. 자기는 연애는 해봤어도 사랑은 해본 적 없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사랑해본 적 있냐는 거야.”

그래서?”

말문이 턱 막히던데. 연애를 그렇게 해본 녀석도 모르는데 나 같은 연애 고자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정말 해본 적 없어요?”

가게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지 평소엔 투명하리만치 빛나던 후타쿠치의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여 보였다. 낙엽이 생각나게 하는 그 눈을 보며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없지, 해본 적 있을 리가. 후타쿠치는 빈 잔을 채우려는 카마사키의 손을 치우고 대신 물이 든 컵을 쥐어주었다.

아까부터 엄청 마시고 있는 거 알고는 있어요? 취하면 바래다주는 사람도 없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퍼마시는 건지 모르겠네. 벌써 술 취했어요?”

나 필름 끊긴 적 없거든?”

오늘 처음 끊기려나 보네요? 진짜 대책 없네.”

시끄러, 임마. 너야말로 아까부터 비겁하게 물만 마시고 있잖아. 꼴에 연예인이라고 이미지 관리하는 거야 뭐야. 너 건방져졌다?”

그게 하루 이틀 일이에요? 만날 건방지다 뭐다 화냈던 건 카마사키 씨잖아요.”

알긴 아냐면서 제 잔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빈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너야말로 벌써 취한 건 아니겠지?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후타쿠치가 이마를 찌푸리고는 잔을 비웠다. 카마사키는 큭큭거리며 후타쿠치의 턱에 흐르는 술을 손으로 훔쳐 주며 말했다.

자식, 칠칠맞기는. 너 취했지?”

손 안 치워요? 카마사키 씨야말로 지금 술주정 부리고 있거든요? 얼굴은 무슨 토마토처럼 빨개져가지고 완전 꼴사납거든요?”

시끄러. 너는, 너도.”

제 얼굴을 꼴사나운지 살피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보란 듯이 얼굴을 드밀었다. 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요? 의기양양한 눈빛이 말하는 바를 읽고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솟아 잘난 척 하지 말라고 쏘아 붙이려 했다. 그런데 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조명에 그리워져 있던 그늘이 사라지면서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 카마사키는 홀린 듯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삼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보며 이 자식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주변 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미친 듯이 잘생겼다고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릿결이나, 반쯤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와 캬라멜이 생각나게 하는 갈색의 눈동자와, 보기 좋게 뻗은 코는 물론이고 어디를 봐도 잘났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외모였다. 후타쿠치가 뭐가 잘생겼냐며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라는 말을 변명처럼 내뱉었던 카마사키였지만 사실은 그도 후타쿠치의 얼굴은 동성임에도 지나치게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다. 남자인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게 이상한 것 같아서 언제나 부정해왔지만 사실은.

너 잘생겼네.”

저도 모르게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순간 후타쿠치한테 설레 본 적 없냐던 모니와의 말이 떠올랐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한다고 넘겼지만 사실은.

잘생겼다.”

설렌 적 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블랙홀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데. 그만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동성이고 이성이고 상관없이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이 자식은 성격은 개차반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잘생겼는지 하늘도 참 공평하시다.

문득 후타쿠치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났다. 무슨 애가 저렇게 생겼나 생각했는데. TV에서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후광이 비치는 듯 했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커피를 수십 잔은 마신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안 보려고 필사적으로 피했는데. 후타쿠치가 하도 시비를 걸어서 그것도 다 헛짓거리가 된 셈이었지만. 그 때는 남자를 상대로 설렌다는 게 병이라도 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마냥 이상하다고, 미친 게 틀림없다고. 다른 사람을 상대로는 이런 적 없었는데 왜 후타쿠치 상대로만 이러는 걸까. 카마사키는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는 느낌이 거슬리면서도 좋아서 묘하다고 생각했다눈을 뗄 수가 없었다.

 

후타쿠치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카마사키와 시선을 마주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주 무아지경이구만. 이러다간 밤 새겠다며 후타쿠치는 조금씩 몽롱해지는 카마사키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있다 조심스레 손을 떼니 카마사키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꼭 감겨져 있었다. 벽에 기댄 그대로 잠이 든 카마사키를 보는 후타쿠치의 미소가 보다 더 깊어졌다.

 

후타쿠치는 제 외모에 대해 별 생각해본 적 없지만 지금은 꽤 만족하고 있다. 술에 취해 푹 늘어진 몸을 다시 한 번 고쳐 안으며 후타쿠치는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 연예인이 된 것도 딱히 큰 목표가 있어서 결정한 것도 아니라 이제껏 어떤 보람도 느껴본 적 없지만, 지금은 꽤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매니저의 도움으로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 몸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며칠 밤을 새도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후타쿠치는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자신의 맨션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지는 몸을 그대로 침대로 뉘이니 푹신한 침대가 마음에 드는지 카마사키가 기분 좋은 듯 한숨을 쉬었다. 금세 방 안에 술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허리 위에 올라타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서둘러 풀어버리다 손가락을 멈추기를 반복했다. 당장이라도 나체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곤히 잠든 상대를 아직은 깨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번갈아가며 후타쿠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후타쿠치는 어느새 드러난 카마사키의 상체를 빤히 쳐다보다 가만히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술에 취해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쇄골부터, 보기 좋게 발달한 가슴팍을 거쳐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복근까지 후타쿠치의 손이 스쳐지나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긴 하지만 역시 단단한 남자의 몸이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따듯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실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손바닥 아래 있는 몸이 카마사키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후타쿠치는 한숨을 내쉬며 카마사키의 상체 위로 허리를 굽혔다.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때문에 고스란히 드러난 목덜미 위로 후타쿠치가 입술을 묻었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후타쿠치는 일순 숨을 멈추고 입술에 닿은 피부를 실감했다.

아주 오래 전, 막연하게 이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신경을 건드려 봐도 그 시선에 자신이 기대하던 감정이 스며들어 있던 적이 없었는데. 후타쿠치는 입술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카마사키의 맥박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것이 그의 맥박인지 제 심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위의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끄러울 정도로 귀를 따갑게 했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 눈에 감정이 섞인 것을 본 순간, 후타쿠치는 이제야 자신이 오래 전부터 바라왔던 것을 손에 쥐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본인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원하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단순한 시선, 잠깐의 마주침보다 더 한 남자의 마음을.

잠시 후, 입술 사이로 후타쿠치의 숨결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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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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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카마사키는 자신이 또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세는 것조차 포기했을 만큼 자주 꾸게 되는 이 꿈을 요 몇 년간 이따금씩, 그러나 꾸준히 꾸고 있다. 꿈에서 자신은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3년 동안 땀을 흘렸던 고등학교 시절 체육관에 있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기억이 조작된 환상인지 모를 꿈에서 카마사키는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밤톨처럼 동그란 뒤통수라든지,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라든지 곧게 뻗은 팔다리라든지. 똑같은 남자의 몸을 뭐가 신기하다고 쳐다보는지 참 열심히도 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를 보는지 알고 있다. 이제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던 고등학교 후배.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멈춰 있는.

잠에 들었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카마사키는 눈을 깜빡이듯 잠에서 깨어났다. 슬슬 해가 밝아오는지 방 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팔뚝에서부터 싸하니 소름이 돋았다. 온몸을 덮치는 한기에 그제야 잠결에 또 이불을 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엔 잠버릇이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얌전하게 자지 못하게 되었다. 자유를 너무 맛본 탓이다.

간밤동안 이곳저곳 굳은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 들어 아침마다 스트레칭은 꼭 빠짐없이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고 오고 싶었지만 어김없이 내일로 미루었다. 역시 자신은 자유를 너무 맛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기를 써서 키웠던 근육은 방만해진 지금의 몸에서 이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 그래도 그 때의 노력이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제대로 된 운동을 안 하는 지금에도 나쁘지 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슬슬 찌뿌둥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머리가 몽롱했다. 사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신 터라 숙취로 인한 두통도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뇌가 두부가 된 것처럼 멍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목이 따끔한 걸 보니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듯 했다. 하필이면 할 일이 쌓인 날에 감기가 걸리다니 어지간히 재수 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얼굴이 빨갛다?”

파티션 위에 팔을 기대고 선 마코토가 말했다. 어젯밤 술에 진창 취했던 건 분명 나만이 아니었는데 숙취는커녕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억울했다. 감기라도 옮겨줄까 생각했는데 기침이 터져 나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당장 집에 가서 이불 덮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기야? 너 어제 또 자다가 이불 걷어찼지? 안 봐도 뻔하다, 새끼야.”

내가 걷어차고 싶어서 걷어차나.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네 자리로 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내니 안 그래도 따끔했던 목이 누가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마코토는 퉁명스런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를 쳐다보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 다시 카마사키의 책상에 찾아왔다.

마셔. 감기약도 챙겨왔으니까 먹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는 게 어떠냐?”

몸도 안 좋잖아, 하고 마코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카마사키는 말없이 마코토가 내민 감기약과 컵을 받고는 단숨에 약을 삼켰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은 목을 자극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카마사키는 고맙다고 짧게 말하고 마코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치에 마코토도 더 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제 자리에서 카마사키의 자리는 파티션에 가려져 서 있어도 카마사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코토는 자리에서 슬쩍 뒤꿈치를 들고 카마사키 쪽을 살폈다. 감기 기운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 된 주제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카마사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인 그의 동기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슬슬 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어제 술을 마시게 했던 건데 고집불통인 녀석은 기어코 감기를 달고서 출근하고야 말았다.

몇 년 동안 카마사키의 옆에서 일을 해 온 마코토의 생각에, 카마사키는 딱히 이 일이 미치게 좋아서 워커홀릭이 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일이 좋아서라기보다 일 때문에 바쁜 걸 좋아하는 듯 했다. 왜 그렇게까지 일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마코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좋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 억지로 상처를 후벼 팔 바에야 모든 게 좋아질 때까지 그 옆에서 카마사키를 지켜보고 싶었다. 둔한 카마사키는 마코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카마사키의 상태는 오전보다 더 나빠져 갔다. 임시방편으로 마코토가 줬던 약을 먹긴 했지만 처방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별 효과도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이 많은 날이라 반차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12시가 되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팀장에게 가 반차 신청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출근했을 때부터 반차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 팀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에 잘 갈 수 있겠냐며 물었다. 카마사키가 대답하려는 찰나 언제 온 건지 마코토가 자기가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럼, , 점심은.”

, 됐어. 너 목 아프니까 더 이상 말 하지 마. 너 보내고 바로 점심 먹으로 갈 테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카마사키가 대충 짐을 챙기는 사이 마코토는 컵에 물을 떠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아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듯한 물이었다. 새삼 몽롱한 와중에도 카마사키는 이게 마코토의 세심한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여자한테 인기 있는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아파서 그런지 평소에는 안 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복도가 시끄러웠다.

맞다. 이번 달에 옆에 사무실이 들어온다고 하더니 오늘인가 보네?”

맞은편 복도에 축하 화환들이 줄지어 있었다. 회사명이, S-PLANT?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의외로 회사 규모는 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전에 맞은편 사무실에 있던 회사도 규모가 꽤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카마사키가 다니는 회사보다 2배는 클 게 분명했다.

“S-PLANT면 꽤 업계에서 알아주는 편이라던데. 몇 년 전에 세워진 회사이긴 한데 매년 급성장하는 데라고 하더라고, 친구가.”

마코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안을 훔쳐보았다. 그 쪽도 점심시간인지 눈대중으로 보아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마사키는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미어캣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마코토를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없어진 걸 알면 알아서 오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물을 먹은 솜뭉치마냥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카마사키는 결국 모퉁이를 돌기 직전 벽에 기대어 섰다. 택시 잡아주겠다며 뭐하는 거냐, 망할 자식. 저것도 친구라고.

카마사키 씨?”

흐릿한 시야에 하얀 셔츠가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너무 새하얘서 카마사키는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잊어 버렸다. 시선을 조금 들어 올리니 베이지와 녹색이 적절하게 섞인 넥타이가 보였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넥타이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센스 좋네.

저기요. 카마사키 씨.”

남자가 성큼 다가와 카마사키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초점이 맞춰지며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꿨던 그거,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언제나 꿈인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에서 봤을 때와 남자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었던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잘려 있었지만 특유의 비대칭 앞머리는 여전했다. , 겨울 나뭇잎 같은 눈동자는 변함없었지만 그 눈은 투명한 안경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또.

오랜만인데 상태가 영 안 좋으시네요. 살아있긴 한 거에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제 목소리는 들려요?

시간이 지났어도 성격 참 건방지구나.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사람 열받게 하는 말투인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웠던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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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