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2)



최근 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카마사키 씨랑 뒹굴어도 모자를 판에 이게 무슨 거지같은 경우야. 아까부터 파란 불빛을 내뿜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 따닥, 하고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케이스 끼웠으니 괜찮겠지. 하긴 고장이 났어도 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으니까.

베개에 턱을 묻고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나뒹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려는지 카마사키 씨가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정신없이 울린 얼굴은 눈이고 코고 입술이고 전부 볼썽사납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아직까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보기만 해도 아플 지경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카마사키 씨가 거울에 제 얼굴을 확인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지만.

. 더 자요.”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더 재우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목소리에 오히려 잠이 깰 판이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는 눈썹을 찡그리고 몇 번 몸을 뒤척거리다 다시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그러면서 잠결에 더운지 다리를 바둥거리더니 이불이 걷혔고 카마사키 씨의 맨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기 좋을 정도로 그을린 살결에 군데군데 빨간 점같이 생긴 것들이 다리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간밤 자신이 필사적으로 남긴 흔적들이었다.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카마사키 씨와 섹스를 할 때면 물고 깨물고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심해지는 편이었다. 보이는 곳부터 안 보이는 곳까지 잔뜩 마킹을 하고 싶어진다. 전희를 가질 때 매번 그러다보니 카마사키 씨는 자국이 남는 걸 질색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민감한 부위를 둘러싸고 깨물 듯 말 듯 애를 태우면 카마사키 씨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를 꾹 참으며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그러다 결국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로 휘감아 오면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쾌감이 오른다.

발가락 사이사이나 복사뼈 근처와 같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내가 남긴 흔적이 남았다 생각하면 가만있다가도 묘하게 흥분된다. 곱씹을수록 아침이라 반쯤 서있던 아래가 묵직해져갔다.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깨우고 N차전에 돌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발에 호되게 채일 게 뻔해 그저 잠에 취한 몸을 끌어안았다. 더운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 모른 척하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건 내 거다. 내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내 사람.

 

동거한 지 2. 멋도 모르고 사귀게 된 지 3. 헤어지자는 말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마사키 씨를 잡아챘지만 좋아하는 건지도 깨닫지 못했던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자신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언제부턴가 마음 한 편에 차곡차곡 쌓이던 감정은, 이제는 그 감정이 없으면 자신조차 사라지게 될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미 어쩌지 못할 정도로 이 사람이 좋다는 것을.

처음 감정을 실감한 것은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고 자취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 즈음 나는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불만에 차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카마사키 씨는 취업준비로 이래저래 바빴고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라 괜히 여기저기 심술부리고 다녔지만.

카마사키 씨는 본인으로서는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생각보다 봉급이 좋다며 바로 자취를 준비해도 괜찮겠다고 웃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고 함께 기뻐해 줬다. 그럼 카마사키 씨 자취방에서 마음껏 야한 짓 해도 되겠네? 응큼한 마음에 좋아했는데 정작 자취할 곳이라고 꼽아둔 곳이 회사 근처였다. 학교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훨씬 더 멀어졌다. 가뜩이나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이대로 가다간 안 봐도 뻔했다. 장난하냐면서 아니꼽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자취할 생각에 실실대는 꼴이 짜증났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은 안 했던 건가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화를 버럭 내버리고 싶었지만 필시 회사에서 가까우면 그뿐인 게 훤히 보여서 뭐라 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왜 화가 나고,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거에 섭섭하다 느껴야 하는 거냐고. 어디든 자취하라지, 내 일도 아닌 일에 신경 쓰는 건 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나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확 김에 무작정 자취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대체 왜 반대하는 거냐고 따져 묻던 카마사키 씨는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시위하자 결국 자취를 포기했다. 들떠서 자취하게 되면 놀러오라며 나설 때는 언제고 다짜고짜 하지 말라는 내 말에 카마사키 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자취하겠다는 결정을 번복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마냥 태연히.

그 때 새삼, 애초에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겉으로 표가 나는 사람이라 어쩔 땐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선 어린애처럼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제에,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던 그 얼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어떻다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마냥 안타깝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욕심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저 사람이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평생 저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로부터 1년을 기다렸다. 졸업하기 무섭게 같이 살 집을 고르고 납치하듯 카마사키 씨를 낚아챘다. 독단적인 행동을 나무라는 카마사키 씨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억지를 쓰고 대답을 강요했다. 나랑 같이 살기 싫냐는, 뻔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카마사키 씨는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란 이름을 빌미로 카마사키 씨의 두 팔과 양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다. 나만 볼 수 있도록, 나 이외의 사람은 보지 못 하도록,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도록. 어디를 갔다 오든 돌아올 장소는 둘만의 집이 되도록. 동거 2년 차. 둘뿐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드르르륵. 바닥에 던져 버렸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거칠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냐고 시위하는 것 마냥 귀에 거슬렸다.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완전히 잡쳐 버렸다. 옆에서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아예 부서질 정도로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할 수 없이 카마사키 씨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쓱 펴주고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서 부들거리는 핸드폰을 주워 방을 나섰다. 그냥 꺼버릴 작정으로 집어 들었던 건데 화면에 뜬 이름이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배로 더 귀찮게 할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켄지?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니.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무음이라 못 들었나 봐요.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어머, 얘는.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네 형한테 아직 연락 못 받았니?]

받았어요. 제가 이전부터 거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뭘 아직까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온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너도 참,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자취한다고 집 나가서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그렇다고 주말마다 집에 들르는 것도 아니고. 방학 때도 사정사정을 해야 한 번 들를까 말까 하잖니. 막내 너, 엄마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

전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대충 모자를 덮어쓰고 현관 밖 복도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엄마는 그동안 뭐가 그리 섭섭했는지 끊임없이 하소연을 늘여 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큰 집에 아들, 딸이라고 낳아놨더니 다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독립한다고 나가버려 서운하다는 등, 외롭다는 등의 투정이었다.

우성 오메가로 자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곱게 자라 와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나이에 안 맞게 철부지 같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막내인 자신은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인지 이미 클 대로 컸음에도 여전히 마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형이나 누나한테는 연락도 잘 안하면서 나한테만 난리라니까.

[듣고 있니, 켄지?]

. 듣고 있어요. 아무튼 전 진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니, 너도 정말. 그래, 이유나 한 번 들어 보자. 대체 형이랑 누나랑 아버지까지 다 온다는데 너만 왜 안온다고 버티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엄마 체면이 있지!]

자식이 몇인데 거길 우르르 갈 필요가 있어요? 전 빼주세요.”

[켄지! 정말 끝까지 이럴 거니!]

엄마야말로 이제 적당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눈을 한 카마사키 씨가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누가 보면 어쩌려고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거야? 들어가라고 입을 뻐끔거리자 멍청하게 서 있던 카마사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따 들어가면 한 소리 해야지, .

[엄마도 이제 더는 못 참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번에는 절대로! 오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이 매정한 녀석아!]

분에 받힌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엄마, 하고 부를 틈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끌고 갈 생각인 듯하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엄마에게 막내다운 살가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무참하게 씹혔다.

집에 들어가니 카마사키 씨는 빨랫줄에 널린 덜 마른 빨래마냥 소파에 엎드려 늘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오전의 밝은 햇빛이 비쳐 들어와 안 그래도 밝은 카마사키 씨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났다. 동그란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니 강아지처럼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기분을 또 묘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어머니셔?”

목이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데다 모래알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비단 아침이어서가 아니라 어젯밤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던 것도 한 몫 했을 테다. 카마사키 씨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쿠션에 얼굴을 푹 묻은 게 맛이 간 제 목소리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닌 모양이다. 이제껏 세지도 못할 정도로 경험했으면서 내숭은. , 아직도 첫날밤 지낸 새색시마냥 창피해 하는 게 카마사키 씨다워서 재밌긴 하지만.

, 언제나 하는 안부 전화죠.”

안부 전화라고 하기엔 네 표정이 영 별로던데. 엄마한테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제가 어떻게 하는데요, 카마사키 씨?”

.”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을 내려 턱을 잡고 들어 올렸더니 카마사키 씨는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입술이며 눈이며 퉁퉁 부어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못생겼어. 근데 이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니 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나 보다.

손 놔라.”

제가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주는데요. 그런 말 하면 섭섭하잖아요.”

아침부터 정신 나갔냐.”

카마사키 씨가 어떻게든 부은 눈을 뜨려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사적인 얼굴 위로 손바닥을 덮어 눈가를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니 카마사키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려 왔다. 벌어진 틈 사이를 넘어 제 집처럼 활개를 쳤다. 맞닿은 부드러운 혀를 인사하듯 휘감아 올리고 보란 듯이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계까지 파고드는 침입자를 카마사키 씨는 괴로워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리듯 문을 열어주고는 벅찬 숨을 고른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주제에, 여전히 제게 얌전하다.

이런 점이 좋다.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아무 이유 없이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언제나 날 미치게 만든다. 너는 다르다고, 너만 특별하다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감정이 터질 줄 모르는 풍선처럼 자꾸만 커져간다. 이러다 어느 순간 팡,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이제 무슨 말로 내 감정을 당신한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다.

하고 싶어.”

더운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발정났냐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무언의 거부를 보인다. 카마사키 씨의 말대로, 아침부터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엎드려 있던 카마사키 씨의 위에 올라타며 입고 있는 거라곤 팬티밖에 없는 옷을 벗겨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 씨가 발을 휘두르며 밀어내려 하지만 팔에 닿는 다리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넌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 치곤, 읏차.”

……!”

기세 좋은데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카마사키 씨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채일 뻔한 걸 간신히 피하고 아까와는 달리 힘이 잔뜩 오른 양 다리를 잡아챘다. , 놓으라고! 성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카마사키 씨를 무시하고 빳빳하게 선 내 것을 카마사키 씨의 아래에 부딪혔다. , 슥 하고 아래위로 부드럽게 마찰하자 손에 잡힌 다리가 미칠 듯 요동을 쳤다. 하지만 자세가 불리해서 그런지 반항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사실 벗어나려고 하면 벗어날 수 있으면서 항상 이렇다니까. 그런 행동이 순순히 다리를 벌려주는 것보다 아래를 더 돋운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내가 좋아요? , 이것 봐.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벌떡벌떡 잘도 서네. 젊긴 젊어요, 그쵸?”

, . . 너 이 미친.”

좋죠. 말해 줘요, 좋다고.”

!”

말해 주세요, 카마사키 씨.”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했는지 카마사키 씨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괴롭히는 건 맞지만 뜻대로 말해주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게 괘씸했다. 서로의 것이 맞닿은 그대로 허리를 튕기듯 움직이며 동시에 카마사키 씨의 귓불을 깨물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 애원하듯 솜털이 간지러울 정도로 속삭이자 온 몸이 소스라치게 움찔거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순순히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조만간, 얘기해 볼까. 이제까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았던 진심을 고백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나올까. 역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창피해 하려나.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아 하겠지. 직접적인 고백은커녕 어렴풋한 가능성만 보인 말에도 못내 자신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좋아한다는 말에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

 

후타쿠치와 살게 된 이래 좀처럼 맞보지 못했던 한가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너무 한가로워서 혼자 있는 집이 썰렁하다 느낄 정도였다. 후타쿠치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말인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갔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마찬가지라 요 2주 간,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핏 듣기로는 집안 행사와 연관되어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냐 물어도 한숨만 내쉴 뿐 말해주지 않았다.

동거하고부터는 항상 회사와 집만 오고가는 생활을 하고, 여가 시간에 뭘 해도 후타쿠치와 함께였기에 몰랐는데 후타쿠치가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최근에는 습관처럼 심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여태껏 후타쿠치가 대놓고 눈치를 줘서 웬만해선 다른 사람과 약속도 못 잡았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이참에 모니와나 사사야, 혹은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오랜만에 집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안 그래도 집을 나오고부터 집이 적적해졌다며 외로워하시던데. 일단 점심을 먹고 전화를 해 봐야겠다.

집에 있던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렸다. 방에 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듯 했다. 혹시 후타쿠치인가, 화면을 확인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번호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이름도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어 광고인가 넘겨짚고 수신거부를 눌렀다. 어디서 개인 정보가 샜는지 최근 광고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똑같은 번호로 전화가 다시 왔다. 광고가 아닌가.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모르는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누구세요?”

[. 저 히로키예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흐릿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에 몇 없는 잘생긴 사람인데다 하도 성격이 살가워서 그랬는지 몇 주 전의 일인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 인상이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또 만나자고 말했었지. 연락처를 교환할 때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하기에 예의상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기억나. 근데 무슨 일로.”

[다행이다. ,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오늘? 시간은 있는데 왜?”

[아는 사람한테 영화표를 선물 받았는데 같이 영화 볼 사람 하나 없는 거 있죠? 그때 딱, 형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어요. 다행이다, 시간 있으시구나! 근데 주말인데 애인 분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히로키는 요즘 제일 재밌는 영화가 마침 2시간 뒤에 있다며 만나자고 말했다. 히로키가 말한 영화는 2주 전, 후타쿠치와 보려다 결국 못 보게 된 영화였다. 후타쿠치도 없고,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도 싫어서 누군가 만날까 생각하던 참이라 히로키에게 알겠다고 말하자 히로키는 들뜬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물었다. 본인은 영화 볼 사람도 없다고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뭘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나를 따르는 것 같더라니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지 모르겠다. 그저 사교성이 좋다고 보기엔 지나친 감이 있어 보였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 할게요. .]

그래, 이따 봐.”

[. 이따 볼게요, !]

말끝마다 형을 붙이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히로키의 형, 형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그것도 몇 십분 밖에 못 만난 사람한테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한단 말이야. 여자였으면 첫 눈에 반했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남자가 이러니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다단계나, 보증 같은 사기 치려고 이러는 건가? 본래 사기꾼이 제일 친절하고, 말도 잘하고, 의외로 겉보기도 멀쩡하다고 하던데. 하나, 하나 다 히로키잖아.

나갈 준비를 하려다 잠시 소파에 앉았다. 작정하고 속이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둔한 자신은 홀딱 넘어가 버릴 거다. 확실히 뭔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히로키를 사기꾼이라고 단정 짓기도 뭐하다. 원래부터 그런 애일 수도 있는데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봤을 때는 전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동생 삼고 싶다 생각했었지.

그래,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거겠지. 사람이 너무 착해도 남에게 의심 살 수 있겠구나, 내심 다짜고짜 의심부터 해버려 미안하다고 허공에 대고 히로키에게 사과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하도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매번 의심부터 하는 게 버릇이 된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그 자식은 대체 언제 어른이 되려나.

 

 

히로키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다 갈 때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착하면 전화하기로 했으니 히로키인가 싶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후타쿠치였다. 일이 꽤 많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매여 있어야 한다고 했던 터라 더 바빠지기 전에 전화를 건 듯했다. 이번 주 들어서는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지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왔다.

[뭐해요? ?]

아니, 밖인데.”

[그런 것 같네요.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 누구 만나기로 약속 했어요? 어젠 별 말 없었잖아.]

확실히 어제까지도 별 말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집에 가봐야 한다면서 투덜거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었다. 아는 사람 만나, 라고 말했더니 후타쿠치가 아는 사람 누구, 하고 물었다. 히로키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2주 전에 미팅에서 본 사람?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동생? 머뭇거리는 사이 후타쿠치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히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살살 흔들며 다가오는 걸 보는 사이에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는 사람, 누구.]

, 친구 아는 동생. 저번에 어쩌다 알게 됐어.”

[바로 대답 못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뭐야, 사실대로 말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진짜 그걸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거든. 아까 전화 왔는데 공짜 영화표 생겼다고 그래서 만난 거야.”

[여자?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왜 같이 영화를 봐요? 그 여자는 친구 하나 없데요? 아니, 친구가 없다고 해도 왜 굳이 카마사키 씨랑.]

, 남자야, 남자. 혼자 보긴 싫은데 이 시간에 한가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보지.”

! , 통화 중?”

[……? , . 카마사키 씨.]

, 나 잠깐 전화 좀. 후타쿠치?”

[…….]

통화 소리가 들릴까 히로키에게서 조금 떨어져 건물 구석으로 갔다. 후타쿠치, 부르는 소리에도 저쪽에선 숨소리만 들리고 대답이 없었다. 사귀던 초반에는 내가 누굴 만나던, 뭘 하던 별 관심도 없던 놈이 언젠가부터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친구든 가족이든 누가 되었건 후타쿠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늘 후타쿠치 중심으로, 모든 시간은 후타쿠치와 함께 보내길 원했다. 물론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할 리가 없다. 다만,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타인과 거리를 두길 원하는 게 나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이미 바람 난 전과가 있는 애인마냥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욱하는,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한숨이 나왔다. 내가 뭐 24시간 전담 대기조야, 뭐야? 저는 갈 데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하고 다니면서.

후우. 후타쿠치. 여보세요?”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하더니, 벌써 형 소리 듣는 사이인거네요? 보통 친해진 게 아닌가본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혀에 가시가 돋쳤는지 말끝마다 빈정대는 어조로 말하는 게 얄미워서 눈앞에 있었다면 발로 한 대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내가 나이가 많고 아는 형 친구니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보다 별로 안 친하다니까 왜 자꾸 빈정거리는 건데? 그리고 막말로 걔랑 내가 친하면 뭐. 뭐 어쩔 건데! 내가 게이도 아닌데 걔랑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그러냐? ?!”

[뭐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내가 이러는 게 한, 두 번 일인가? 그리고 애인이 난데없이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영화 보러 간다고 시시덕거리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그럼 냅다 잘 다녀와라 그래요? 것보다 그 새끼가 뭔데 그렇게 감싸주면서 나한테는 화를 내는 거예요?]

시시덕거린 적 없어!! 그리고 얘는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난 뭐 사람도 못 만나?! 내가 죄수야, 뭐야?!”

[시시덕거렸던 아니던, 상대가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싫다고요! 영화는 나랑 보면 되지, 다른 사람이랑 왜 봐요?!]

됐다, 됐어. 이 얘긴 나중에 집에 오면 다시 해.”

[, , 카마사키 씨!]

끊는다.”

뭘 잘했다고 신경질 팍팍 쓰면서 소리치고 있어? 도저히 후타쿠치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여자였으면 이 자식은 분명 의처증 남편 소리 들었을 게 뻔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피했는데도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얼굴로 몰리는 시선이 따가웠다. 대화 내용을 통해 나를 애인 몰래 바람피우는 게이로 보고 있는 모양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억울하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멀리서도 형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아하하.”

, 그래? , 들었어?”

히로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남잔데도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꼭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주위 사람들이 히로키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역시 이런 애가 사기꾼일 리가 없지.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그 땐 정신이 이상했던가 보다. 선하게 웃는 히로키를 보며 반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지라 높은 기대치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정말 환장하게 재밌었다. 화려한 액션 신과 선명한 색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운드에 눈과 귀가 즐거웠고, 곳곳에 숨겨져 있던 복선들을 회수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여운이 넘치는 엔딩까지 가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 했다. 괜히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던 게 아니었다.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조금 아쉽기도 했다. 원래라면 벌써 한 번 보고도 두, 세 번은 더 봤을 영화였는데. 평소엔 팜플렛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느라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가방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시간 나면 다음에 같이 올까.

진짜,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쵸, ! 제가 본 영화들 중에 세 손가락에 꼽힐 것 같아요.”

상영관을 나오면서 히로키는 연신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온몸으로 재밌었다는 걸 표현하는 게 의외였다. 겉모습은 꽤 성숙한데 하는 행동은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흥분했더니 배고프다. 형도 배고프죠? 근처에 제가 좋아하는 가게 있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요.”

? 그게.”

거기 진짜 맛있는 집인데. 지금까지 누구 데려갔다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요. 게다가 지금 시간이라면 웨이팅도 없을 테니까 딱 좋겠다!”

가요, 얼른 가요!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보다 히로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긴 평소보다 훨씬 영화에 몰입했던 만큼 배가 고프긴 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한데다 어차피 후타쿠치는 오늘도 밤늦게야 집에 올 것 같으니 히로키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그러고 보니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아무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는 거야 늘 있는 일상이지만, 싸우고 나서 메시지 하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싶다. 평소 같았으면 사과인 듯 사과 아닌 투정을 부리는 메시지가 와 있을 법 한데.

조금 심했나.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집착이 심한 걸 가지고 내가 너무 나무랐나? 제대로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삐친 건 아닐까. 아니, 아니지. 그러게 누가 이런 일로 의심부터 하고 빈정거리래?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부터 낸 건 후타쿠치였다. 저는 매일같이 놀러 가고 뭐하는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주제에 나한테만 이러는 게 어디 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기분이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이번엔 절대 사과를 받기 전까지 화해하지 말아야지. 언제까지고 후타쿠치한테 일일이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 그렇지.

그래. 저녁은 내가 살게.”

정말요? 그럼 사양 않을게요. , 그럼 사람들 몰리기 전에 얼른 가요.”

상대방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 느껴 보라 이거야, 후타쿠치 자식. 너도 내가 언제 올지 모른 채로 그 텅 빈 집에 혼자 있어 보라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다 히로키에게 충동적으로 저녁 먹고 술도 마시러 가자고 말했다. 아예 자정을 넘겨서 가버려야지. 의지를 다지는 내 옆에서 히로키가 충견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들뜨다 못해 하늘을 날아다닐 것처럼 얼굴을 상기시키는 모습에 괜히 멋쩍어졌다. 이렇게 기뻐하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근데 얘는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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