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저거다. 카마사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 안하냐?”

잠깐 쉬는 것 가지고 뭐라 하지 마! 네가 사장이야, 뭐야. 그보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너 혹시.”

혹시 뭐.”

혹시, 마코토가 말끝을 늘이며 손가락으로 애꿎은 파티션을 긁었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카마사키가 그러니까 혹시 뭐, 하고 한 번 더 물으니 흘끗거리며 눈치를 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카마사키가 모니터에 향했던 시선을 들고 마코토를 쳐다보자 마코토는 시선을 피하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애인 생겼냐?”

서류를 넘기던 카마사키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애인이라니, 무슨 소리냐는 눈짓에 마코토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너 요즘 자주 멍 때리고, 예전엔 야근도 불사하던 놈이 요 몇 주간 퇴근시간 딱딱 맞춰서 가려고 하고. 툭하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지를 않나. 네가 하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

그랬나? 마코토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최근 춘곤증 때문에 틈만 나면 졸았기도 했고,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긴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랬나 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마사키에게 마코토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지?”

있겠냐?”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하는 마코토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졌다. 애인이 없다는데 크게 안심하는 녀석을 괘씸하게 쳐다보자 하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없는데 네가 있을 리가 없지.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녀석에게 마침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던져 버릴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백발백중 저 면상에 명중시킬 자신이 있다. 카마사키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마코토가 한 손으로 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끝나고 한 잔 할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이제 술 안 마셔.”

카마사키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마코토가 있는 술자리에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허물없이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사이라 그런지 자중하자고 다짐을 해도 취하면 녀석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방심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다. 저번에도, 저 저번에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다. 언제나 정신을 차려보면 다음 날 아침이고, 전날 밤의 기억은 통째로 날아가 있다. 어쩌다 술에 취했는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야 별 실수가 없었다 해도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필름이 끊겨서 아무 기억도 없는 것도 영 찝찝하고, 최근 안 그래도 뉴스에서 취객을 상대로 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친하다지만 취할 때마다 마코토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내심 미안했던 터다.

나름 진지했던 카마사키의 거절을 마코토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얼마 안 가 말을 바꾸리라 생각하는 듯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럼 다른 사람 끼면 괜찮다는 거지? 마침 역 근처에 괜찮은 술집이 생겼다는데 오늘은 거기로 가야지~.”

안 간다니까. 다른 사람이 있으면 뭐해? 술자리에 너만 있으면 만날 필름 끊길 정도로 마시게 되서 싫다고.”

내가 언제는 너 안 바래다 준 적 있냐? 알아서 잘 모셔다 줄 테니까 이 형님만 믿어.”

형님 좋아하네. 난 진짜 안 내킨다니까?”

됐고, 형님만 믿어! 마코토가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저 자식은 동기에 나이도 동갑인데 항상 지가 연상인 것처럼 행세한단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형님이니 뭐니 안 그러면서 내 앞에서만 허세를 부리니까 더 짜증이 난다. 혹시 날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카마사키는 괜히 마코토의 까만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그래봤자 파티션에 가려져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하기에 누굴 부르나 싶었더니 마코토는 회사 사람들을 모았다.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회식 자리에 불과했겠지만, S-PLANT의 직원들도 부르는 바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자리가 되고 말았다.

오라고 한 당사자가 어디있나 둘러보니 마코토는 이미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대체 왜 오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카마사키는 이미 저마다 자리를 잡은 테이블을 둘러보다 제법 한산한 테이블에 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카마사키처럼 술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S-PLANT의 직원 세명이 앉아 있었다. 그다지 친목을 다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카마사키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형식적으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떠들썩한 주변과 달리 네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는 테이블은 외딴 섬처럼 조용했다.

 

 

우와, 여기 왜 이렇게 조용해요?”

각자 조용히 술을 즐기던 테이블로 후타쿠치가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맞은편의 직원에게 몇 마디 실없는 말을 건네고는 카마사키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카마사키 씨이, 하고 말을 늘이며 말을 걸었다.

설마 그 나이에 아직도 낯가리는 거예요? 중학생?”

낯을 가리긴 누가.”

누가 술자리에서 혼자 술만 마시고 있으니까 그렇죠.”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술자리는 질색이라고.”

,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니 뭐가, 라고 대꾸하려던 카마사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후타쿠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자신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허물없이 대하는 편이었다.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장난을 치고,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실없는 농담이나 따먹는 사람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걸 못 참아하고, 떠들썩한 걸 좋아했었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어떤 커다란 계기가 있어서 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이 싫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카마사키는 괜히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여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

그게 낯가리는 건데요.”

아무튼 간에. 그러는 너는 자리로 안 돌아가냐.

저긴 너무 귀찮게 해서.”

그리고는 빈 잔을 찾아 술을 채운다. 후타쿠치의 어깨 너머로 후타쿠치가 원래 있던 테이블 사람들이 이쪽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라처럼 고개를 쭉 내밀며 힐끔거리는 게 다들 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타쿠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쓸데없이 인기가 많아 피곤하다고 말하는 후타쿠치가 여느 때보다 얄미워 보였다.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짜증난다니까.

, 지금 여자친구 있냐?”

지금은 없어요. 얼마 전에 차였어요.”

네가 차였다고?”

일순 마시던 술을 뱉을 뻔 했다. 카마사키는 입가에 술이 흘렀나 싶어 괜히 턱을 닦았다. 후타쿠치 같은 녀석들도 차이는 구나. 일견 당연한 일인데 그 사실이 못내 믿기지 않았다. 전에 없던 흥미가 솟아 카마사키가 재차 물었다.

?”

바빠서요. 소홀해졌다나 뭐라나? 사무실 이전하니까 한동안 바빠질 거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러더라고요. 전화를 안 받는다는 둥, 주말에 왜 못 만나냐는 둥. 여자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요.”

후타쿠치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게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태도로 미루어보건대 별로 여자친구가 좋아서 사귄 게 아닌 듯싶었다. 후타쿠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 때도 그랬듯이 여전히 가벼운 연애를 즐기는 구나.

바쁘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당황을 삼켰다남의 연애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실례다. 내가 뭐라고 울컥한 거지. 그것도 한눈에 봐도 저보다 연애 경험이 많은 후타쿠치를 상대로 무슨 설교를 하는 거냐. 카마사키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얼버무리며 흘끗 쳐다보니 후타쿠치는 조금 놀란 눈치이긴 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피식 웃었다. 하나도 기분이 나빴다거나 불쾌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카마사키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 태연한 얼굴에 카마사키는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고 후회했다.

가만히 술잔을 채우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불쑥 빈 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술잔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후타쿠치가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카마사키 씨는 여자친구 없나보죠?”

여자친구는, 없지.”

왜요?”

바쁘니까.”

바쁜 건 핑계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사실 바빠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러나 더 자세한 속내를 털어놓기엔 내키지 않아 카마사키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핑계를 댈 만한 게 바쁘다는 것뿐이라 후타쿠치에게 트집이 잡혀 버렸지만. 하여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속으로 놀릴 건수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카마사키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후타쿠치를 쏘아보며 생각했다. 술이 당겼다. 잔을 비우자 쓴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연애를 뒤로 하는 건 핑계가 맞다. 상대를 정말 좋아한다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 사실을 카마사키는 얼마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연애는 감정이 있어야 할 수 있고, 감정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못 할 짓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한 뒤, 연애의 기회는 몇 번 찾아왔었다. 잘생기지도 않은 자신이 좋다며 고백하는 여자도 있었고, 제 쪽에서 먼저 호감을 느낀 여자도 있었다. 사귄 적도 있었고, 사귀지는 못했지만 연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적도 있었다.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꽤 좋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처음 한 연애는 별 거 아닌 일로 설레기도 했으며, 소소하게 이벤트를 챙기는 것도 꽤 재밌었다. 풋풋했다. 풋풋해서, 실수를 했다 생각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그땐 그게 마냥 기뻤었다. 남들과 같이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했었다. 좋아한다는 감정까진 아니어도 호감은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연애를 시작했고, 관계가 이어졌다. 하지만 감정이란 단순히 사귀기 시작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호감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한 호감에 그쳤다. 좋아서 설렌다고 느꼈던 건 그냥 낯선 상황에 대한 두근거림에 불과했고, 점차 함께 있어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허물뿐인 관계에 매어있는 기분이 들었고, 같이 있는 시간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함과 죄책감만 더해갔다.

억지로 사랑해야 한다고 되뇌어봤자 마음은 자신의 노력을 비웃듯이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사랑받으면 자신의 마음에도 사랑이 자라나리라 생각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았고 처음처럼 기쁘지도 않았다. 점점 죄책감이 쌓였고, 이를 눈치 챈 여자 친구가 끝내 이별을 통보했다. 어느새 마음이 바닥난 것이다. 사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처음 사귄 여자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다를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시작한 두 번째 연애도 같은 결과였다. 차라리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두 번째 여자 친구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탓했다.

진즉에 마음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카마사키는 후회했고, 그 뒤 사랑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겠지. 그 때는 흠뻑 사랑에 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지만 연애는 없었다. 마음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언젠가 쌀쌀한 바람이 목을 스치던 밤에,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 살아도 그럭저럭 살만 했고, 심심할 때면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과 술 한 잔을 마시면 되었다. 게다가 연애를 안 하니 돈은 쌓이기만 해서 모아놓은 돈이 꽤 되었고, 할 게 일밖에 없다보니 자연스레 실적이 쌓여서 남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사랑이 없는 대가가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한 건지도 모른다.

 

술자리를 마련한 당사자인 마코토는 모든 테이블을 돌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난 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시덥잖은 얘기로 시간을 때우며 술만 홀짝이던 카마사키는 이미 자신의 주량을 훌쩍 넘긴 채였고, 애초에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만 지키던 S-PLANT의 직원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카마사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놀았다. 어린애 재롱을 보듯 건방지게 턱을 괴고 있는 후타쿠치를 마코토는 흘끗 흘겨본 뒤 카마사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의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한 카마사키의 어깨를 제 쪽으로 당기니 술에 취해 늘어진 몸이 흐느적거리며 따라왔다. 허물없이 기대오는 게 꽤나 묵직했다.

얌마,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냐? 필름 끊기는 거 싫다더니.”

?”

, 이렇게, 많이, 마셨나고?”

어어어, 마코토. 너 이 짜식 왜 이제야 오냐. 

카마사키가 몽롱하게 풀어진 눈을 하고는 마코토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낯 가리는 거 아니라고, 하고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반복했다. 술자리에 나만 있으면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다고 투덜대더니 또 이렇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 그나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만 취한다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마코토는 한숨을 내쉬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단단히 안았다. 설마해서 요령껏 술을 자제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혹시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럴까 걱정돼서 마코토는 곯아떨어지기 직전인 카마사키를 타박했다.

어휴, 너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

? 네 책임.”

네가 뭐가 예쁘다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드문드문 끊기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졌다. 고개를 꾸벅꾸벅 거리더니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잠에 빠진 카마사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평상시엔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잠이 든 모습은 영락없이 순해빠졌다. 사나웠던 눈매며 올라간 눈썹이 기세를 잃고 축 쳐져있어서 다른 사람 같았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모습에 마코토는 저도 모르게 카마사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녀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어쩐지 자신뿐인 것 같아 뿌듯해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무심코 키스를 해버렸을 지도,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말로는 뭐라 타박했지만 마코토는 사실 이 순간이 좋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카마사키를 바래다주는 일은 마코토 본인만 아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마음껏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은근슬쩍 허리께며 허벅지를 만지는 것도, 술김이라 변명하며 제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도 카마사키를 안아보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술김에 라든가, 친구라는 관계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카마사키와 사귀고 싶었다. 제 마음을 자각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심지어 카마사키도 요 몇 년 간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일단 사귀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참을 카마사키의 얼굴을 구경한 뒤, 마코토는 시계를 확인했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은 터라 슬슬 파장하는 분위기였고, 주변 테이블도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마코토는 카마사키의 어깨에 자켓을 걸쳐준 뒤 어깨를 매고 일어섰다. 동시에 후타쿠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조용히 있어서 눈치를 못 챘는데 후타쿠치는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마사키의 고교 후배라는 후타쿠치라는 녀석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던 데다, 겉보기엔 잘생겼는데 생긴 대로 성격이 건방진 것도 싫었다. 행동과 말투가 가벼워서 도통 진심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가장 싫은 건, 카마사키와 꽤 친해 보인다는 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만에 만났다는 것 치고는 카마사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고, 카마사키도 은근히 저 녀석의 건방진 태도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받아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슬슬 나갈까요.”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예의상 말을 건네니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마코토는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카마사키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집까지 데려다 주려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아니, 이참에 막차가 끊겼다고 핑계를 대고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종종 그랬으니까 뭐. 그러나 마코토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후타쿠치가 마코토가 부축하고 있던 카마사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마코토에게 후타쿠치가 웃으며 말했다.

카마사키 씨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니요, 미즈하라 씨도 집에 들어가셔야죠. 막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그럼 야스시네서 하룻밤 신세를 지면되니까요.”

카마사키를 이쪽으로 달라는 듯이 마코토가 두 팔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후타쿠치는 그런 마코토에게 보란 듯이 카마사키를 안은 제 팔을 추켜올렸다. 축 늘어진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팔 안에 축 늘어졌고, 그 모습이 꼭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옆집이니 제가 데려다 드리는 게 효율적이죠.”

후타쿠치의 말에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을 구경하던 직원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끼어들었다. 귀찮았을 텐데 잘 됐네, 미즈하라. 그러나 마코토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후타쿠치의 어깨를 잡아챘다. 걸음을 옮기려던 후타쿠치가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았다.

잠깐만, 둘이 옆집이라고?”

. 그렇게 된지 꽤 됐는데 여태 모르셨어요?”

얼마나, 되었는데?”

, 한 달은 족히 넘었나. 아니 두 달은 됐나?”

…….”

아무튼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깨가 무거워서요.”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를 부축하고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후타쿠치가 싫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주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다. 게다가 제 앞에서 보란 듯이 잘난 척까지 하다니. 아까는 순간적으로 후타쿠치를 한 대 패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았었다. 왜 뜬금없이 카마사키와의 친분을 제게 과시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간에 짜증이 났다.

혹시 카마사키를 좋아하는 걸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거며, 조용히 쳐다보던 것 하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이 멋대로 끼어들 명분은 되지 못한다. 아까의 행동은 그저 저를 놀리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건방진 자식이, 마코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잔을 들이켰다. 물인 줄 알았더니 하필이면 누군가 물컵 채로 폭탄주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 하고 목구멍에서 가슴까지 화상이 난 듯 화끈거리고 따끔거렸다. 명백한 질투였다.

 

 

?”

카마사키는 뺨이 화끈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차츰 초점이 맞아졌다. 오렌지 빛으로 가득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집 앞이었다. 카마사키는 멍하니 벽을 보고 있다 주위를 살폈다. 술에 취해서 누가 바래다준 것 같은데 마코토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마코토라면 제 집 열쇠를 찾아서 침대까지 데려다 주었을 테니까. 오래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제 바로 옆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색 슬랙스를 따라 올라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야아, 이거 후타쿠치 아냐.”

깼으면 그만 집에 들어가시죠.”

네가 나 데려다 준거냐? 우와아, 웬일이야. 말도 안 돼.”

, 진짜 술주정 하고는. 이봐요, 카마사키 씨.”

이거 꿈인가. 저 자식이 나 데려다줄 리가 없는데.”

참나 가지가지 하고는. 저기요, 카마사키 씨.”

마코토는?”

술에 취할 때면 늘 마코토가 데려다줬는데 왜 네가 있어?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바지를 쭉 당기며 물었다. 마코토는? 후타쿠치가 얼굴을 팍 구기고 제 바지를 쥔 카마사키의 손을 뿌리쳤다.

기껏 바래다줬건만 그 사람은 대체 여기서 왜 찾아요?”

마코토가 매번.”

이봐요, 카마사키 씨. 데려다 준 사람은 저거든요.”

마코토는 침대까지 데려다줬는데.”

, 진짜 미친.”

후타쿠치는 잠시 이 사람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쳐야 하나 갈등했다. 정신이 들면 알아서 집에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술주정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데려다준다고 하지 말걸 그랬다. , 한숨을 쉬고 내려다보니 잠깐의 시간동안 카마사키가 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 진짜. 내가 이 사람이 있는 술자리에 다시 한 번 가나 봐라. 후타쿠치가 이를 악물고 카마사키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우고 들어올렸다. 술에 푹 절여진 몸이 물을 잔뜩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시발, 절로 욕이 나왔다.

카마사키를 들고 일어난 뒤는 더 난관이었다. 도통 어디에 열쇠를 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후타쿠치는 제 어깨에 멘 카마사키를 하마터면 집어 던질 뻔 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열쇠를 찾았지만 문을 열고 신발을 벗기고 침대까지 가는 길은 하나도 순탄치 않았다. 카마사키는 자꾸 바닥으로 늘어지려고 하지, 어깨 옆에서 간간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서 소름돋지, 침대까지 가는데 바닥은 난장판이지. 침대에 이르자마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으으.”

그 반동으로 카마사키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내가 다시는 이 인간이 있는 술자리에 가나 봐라. 했던 다짐을 되뇌고 후타쿠치는 잠시 카마사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까지 들쳐 매고 오느라 체력을 탕진해버린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난장판인 방에서는 자고 싶지 않았다. 왠지 평소보다 방 상태가 심한 것 같았다. 옆집인 걸 알고나서 수차례 들락날락 거렸지만 오늘은 가장 난장판이었다. 올 때마다 홧김에 잔소리를 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더니. 전형적인 혼자 사는 남자 같달까, 그보다 더 하달까. 고등학교 다닐 땐 꽤 깔끔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라커도 늘 깨끗하게 정리하고 데오드란트도 꼼꼼하게 챙기던 게 기억났다. 그런 점이 생긴 거랑 달라서 의외라고 생각했었지. 아니, 의외로 그 사람답다고 하나. 지나치게 성실하고 괜한 것에까지 꼼꼼해하던 점이 있었으니까.

사람 참 많이 변했다.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이 사람은 그보다 더 하다. 외모나 행동거지는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른이 되어서인가. 후타쿠치는 빨갛게 볼을 물들인 채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카마사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까 술집에서도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눈을 감으니 순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카마사키 씨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 주변에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곳저곳 건드렸을 게 분명한 남자였다. 눈빛부터가 틀렸다. 단순한 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욕정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구석구석 만지고, 키스하고, 욕구를 풀고 싶어 하던 게 제딴엔 숨기려 했으나 노골적으로 티가 났었다.

미즈하라 마코토라고 했지. 친구인 척 카마사키를 탐내던, 처음 봤을 때부터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하더니 역시나 기분 나쁜 남자다. 은근슬쩍 소유욕을 드러내려 하고, 유치한 도발에 눈을 부라리던 게 생각났다. 거머리 같은 자식.

그런데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인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후타쿠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히 애인은 없다고 했었지. 아니다, 여자 친구는 없다고 했었다. 그럼 남자 친구는 있다는 소리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사이가 가깝고, 스킨십도 서슴없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아까도 분명 그 남자는 어디 있냐며 칭얼대고, 항상 침대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고 했으면서 오늘 술자리에는 참석했고 심지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카마사키 씨가 게이였나? 그럼 낌새는 고등학교 때 전혀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많이 변했고, 성향이 바뀌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이런저런 정황들을 보면 그럴 지도 모른다.

그 거머리 같은 남자랑? 순간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카마사키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그 남자랑 사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아니, 사귀면 좀 괜찮은 사람을 사귀던가 하필이면 거머리 같은 남자랑. 후타쿠치는 불쾌한 속을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졌다. 후타쿠치는 마지막으로 침대 한 구석에 돌돌 말려진 이불을 카마사키에게 덮어주었다. 색색, 하고 깊이 잠든 얼굴을 보다 후타쿠치는 무의식적으로 카마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소 짧은 머리카락이 의외로 부드럽게 감겨 와서, 후타쿠치는 한동안 손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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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카마] 러브레터(2018)-(2)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타쿠치를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시절, 난 모든 상황을 뒤로 하고 감정을 앞세울 정도로 후타쿠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보고 싶다든가 같이 있고 싶다든가 바랐을 뿐이었다. 가벼운 감정이라 생각했기에 그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늘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 친구가 바뀌었고 그 모습을 보며 이 감정은 절대 내뱉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어찌 보면 사춘기 고교생으로서는 당연했던 것 같다. 남자를 좋아한다니, 고백하는 것 자체도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마음을 들켜서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하루라도 빨리 후타쿠치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마주치지 않으면, 졸업하면, 떠올리지 않으면 분명 얼마 안 가 감정이 퇴색되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 그 땐 그랬었지하고 가볍게 회상할 정도로 별 거 아닌 일이 되겠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감정인 줄로 알았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질질 끌고만 있을 감정인 줄 알고 있었다면, 그 때 어떻게든 했었을 텐데. 지금까지도 그 일만이 못내 후회로 남았다.

 

 

평소엔 밥을 먹는 건지 수다를 떠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입을 다문 적이 없던 마코토가 숟가락을 입에 물기만 한 채 카마사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몇 숟갈 먹지도 않았는지 거의 다 먹어가는 카마사키의 그릇에 비해 마코토의 그릇에는 아직도 음식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그런 마코토의 시선을 무시하다 카마사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마코토는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멍 때리네? 생각도 많아 보이고 너답지 않게 일에 집중도 못하고 말이야.”

별로. 평소랑 똑같은데?”

아니야. 저번에 감기 걸렸을 때부터 좀 이상해진 것 같아. 무슨 일 생겼어? 아니면 또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냐?”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냥 봄이라 나른해졌나 보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봄을 탄다니, 이제껏 계절을 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코토 역시 카마사키를 수상쩍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조차 요즘 무슨 이유로 기분이 싱숭생숭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다 먹었냐? 나 먼저 가버린다.”

매정하게 그러지 말고 기다려 줘라, . 너 때문에 난 목구멍에 밥도 안 들어가는데! 하여간 너는 머릿속에 일 생각밖에 없지?”

네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자식이 형님한테 말하는 것 하고는.”

지랄한다고 비웃어주니 마코토가 삐진 척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코토가 은근히 자신을 챙겨준다는 걸 알기에 카마사키는 빨리 먹으라고 야단치며 마코토를 채근했다. 그러는 사이 식당으로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들어오면서 조용했던 식당이 떠들썩해졌다. 비교적 캐주얼한 차림의 마코토와 카마사키와는 달리 셔츠와 정장 바지를 차려 입은 그들은 S-PLANT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과 이미 안면을 튼 마코토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카마사키 씨.”

아는 사람이 없어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던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착한 후배 모드를 장착한 채 다가왔다. 직장에서는 나름 성격을 죽이고 다니는지 평소보다 살가운 목소리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뭐야. 야스시 너 아는 사람도 있었어?”

고등학교 배구부 후배야. 후타쿠치 켄지.”

안녕하세요.”

. 난 미즈하라 마코토야. 야스시랑은 동기지. 이 녀석 친구는 몇 번 보긴 했어도 후배는 처음 보네? 별로 친하진 않았나봐?”

글쎄요.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후타쿠치는 마코토의 질문에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깔끔하게 말을 끊었다.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후타쿠치를 쳐다보며 마코토는 무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너 후배라는 자식, 꽤 건방지다? 피식 웃으며 빈정거리는 마코토를 보며 사람 눈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후배인 척 내숭을 떨었지만 본성을 숨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마코토는 한 눈에 후타쿠치의 성질을 눈치 챘다.

맞아. 학교 다닐 때도 성격이 저래서 선배들한테 툭하면 건방지다고 야단맞았었지.”

운동부라고 했었지? 그럼 꽤 험했겠네.”

그렇지는, 않았어. 운동부라고 다 그런 분위기는 아니니까.”

우리 학교는 꽤 심했는데. 선배한테 한 번이라도 눈에 잘못 들면 그 날 부로 부내 왕따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더라고. 은근히 주전 자리는 넘겨주지도 않고 순 잡일만 떠넘기고 그랬다고 하더라.”

, 학교마다 다른 거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마코토는 그런가보다 납득했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다테공고도 원래부터 분위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카마사키의 한 학년 위에까지는 마코토가 말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이지메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 가볍게 시비를 걸거나 핑계거리를 대가며 사소하게 괴롭히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이 3학년일 때는 그 수준이 절정에 이르렀다. 표적은 당연히 만만한 1학년, 그 중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후타쿠치였다.

그 때의 후타쿠치는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가뜩이나 철벽은 무슨 울타리도 되지 않는다며 조롱과 비아냥에 시달렸던 3학년은 누가 되었든 분노와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거고, 입부했을 때부터 특유의 말투와 가벼운 행동으로 오해받기 쉬웠던 후타쿠치가 잘못 걸렸던 것뿐이었다. 이런저런 괴롭힘에 시달렸던 후타쿠치는 몇 번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부내 싸움이 일으킬 뻔도, 퇴부하겠다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아마 카마사키를 비롯한 2학년들이 기를 써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후타쿠치는 애저녁에 배구를 그만뒀을 거다.

3학년이 졸업한 뒤에도 여전히 후타쿠치를 은근히 질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지메를 꾀하지는 못했다. 그 때 즈음엔 후타쿠치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이를 간 것도 이유였지만, 애초에 집단이 아닌 개인이 상대가 되면 그건 이지메가 아니라 그냥 싸움이었다.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그렇지 후타쿠치는 본래 끈질긴 성격이고, 그런 점에서 한 번 시비가 붙은 상대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게다가 당한 것의 곱절로 갚아주는 바람에 더 이상 후타쿠치를 건드는 사람이 없어졌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뭘.”

기분 좋아 보이잖아. 아까는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얼굴이었던 주제에.”

밥 다 먹었냐? 나 먼저 간다.”

, 진짜! 넌 대체 기다려줄 줄을 몰라! , 기다려. ! 야스시! 같이 가자고!”

예전엔 후타쿠치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한 번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각날까봐 두려웠다. 사그라졌던 마음에 다시 불씨가 타오를 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괜찮은 모양이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회사가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그런지 후타쿠치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일은 은근히 자주 있었다. 출근 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거나, 점심시간에 같은 식당에 가서 마주치거나, 아주 가끔 화장실에서 마주치거나 등등.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선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걸어왔다. 마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같은 미소는 거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섭섭하다거나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난 선후배 사이이니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것보다는물론 후타쿠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편하다고 생각했고 다행이라 여겼다. 애초에 후타쿠치와 재회하게 된 것이 달갑지도 않았고.

뭐야. 카마사키 씨 여기 살아요?”

그래서 주말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맨션 복도에서 후타쿠치가 예전처럼 말을 걸어온 게 좀처럼 현실 같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운동복을 입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카마사키의 옆집 문을 열고 있었다. 변함없이 툭툭 거리는 말투와 시큰둥한 표정과 부활동 때 질리도록 봤던 운동복 차림에 마치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네가 왜 거기 있는 거냐?

저번 주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요. 설마 우리 옆집인 거예요?”

……그런가 보네.”

회사는 맞은편에, 집은 옆집. 이거 거의 몰래 카메라 수준 아닌가.”

413, 414. 몇 년 만에 만난 후배가 옆집에 이사 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필이면 그냥 같은 맨션도 아니고 옆집이라니.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집 문과 자신의 집 문을 번갈아 보았다. 허탈하다. 걸어서 세 걸음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말문이 막힌 카마사키에게 다가간 후타쿠치는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카마사키의 집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들어가 봐도 되요?”

, . 그러든지 말든지.”

후타쿠치의 땀 냄새가 섞인 체향이 지척에서 맡아졌다. 카마사키가 숨을 멈추고 한 발자국 뒷걸음을 쳤다. 들어가라고 몸을 비켜준 걸로 알았는지 후타쿠치가 그럼, 하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버리려 했던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내려놓은 뒤, 카마사키는 멈췄던 숨을 뱉어냈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았다. 이건 마치, 그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좋지 않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집이랑 구조가 똑같네요. 여기서 산지는 얼마나 됐어요?”

. 3, 4년 되었나. 커피 마실래?”

그러든지요.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대답에 어쩌라는 거냐고 따져들 뻔했다. 회사 건물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태도에 그제야 후타쿠치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동시에 멀어졌다 생각했던 거리감이 순식간에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낯설었던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취직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나?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잖아요.”

그렇지. 예전에 살던 집은 너무 오래돼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더라고. 돈 모이자마자 바로 근처로 이사 온 거야.”

그래도 여긴 방음이 너무 안 좋아요. 옆집에서 뭐 하는지 다 들려서 짜증나 죽겠어요.”

그것 빼곤 살 만 하잖아. 여기, 커피.”

후타쿠치는 잔을 받아들였지만 마실 생각이 없는지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챙겨 줬더니 괜한 일을 했다. 후타쿠치가 할 일없이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어지럽게 늘여진 잡동사니들과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이불을 정리했다. 원래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집안이 더 엉망이었다.

보통 평일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빨래 말고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가 토요일 오후부터 슬슬 밀린 집안일을 하곤 하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남이 보기엔 자신을 구제할 길이 없는 게으름뱅이로 볼 게 뻔했다. 그만큼 방 안은 카오스와 같았다. 누구에게든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이었지만 하필이면 후타쿠치한테 보이다니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나마나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예상대로 방 안을 둘러보며 기분 나쁘게 큭큭거렸다.

카마사키 씨는 많이 변했네요. 예전엔 이 정도까지 더럽게 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설마 아직까지도 혼자 방도 못 치우는 거예요?”

알아서 잘 치우거든! 이건, 그러니까, 청소는 원래 토요일 점심때부터 몰아서 치워서 그런 거라고. 나름의 계획이 있단 말이다. 그리고 평소엔 이렇게까지 더럽게 어지럽혀 있지도 않아.”

몰아서. 그럼 평일에는?”

평일은 일이 바빠. 청소할 틈이 없다고.”

무슨 말을 해도 이 상황에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정리한다고 해서 깨끗해질 상태가 아닌지라 대충 치우다 관두었다. 어차피 가장 최악의 모습을 보였고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지금 어떻게 해 봤자.

후타쿠치 근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리는데 후타쿠치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주말이라 안경을 쓰지 않아 그런지 후타쿠치의 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투명하게 빛났다. 왜인지 눈빛이 차가워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게 착각이 아니었던지 후타쿠치는 은근히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의외로 가차 없네요, 카마사키 씨는.”

?”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정이 없다고 해야 할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떻게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왔어요? 카마사키 씨 빼고는 다들 연습할 때나 시합 때 한 번쯤은 보러 왔었는데.”

…….”

심지어 그 3학년들도 몇 번 왔었다고요, 인터하이 때.”

왜 그랬냐는 듯 따지는 말에 카마사키는 마주쳤던 시선을 피해버렸다.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할 바에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던 간에, 선배로서 매정한 짓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미안하다며 단답형으로 사과하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나무라듯 쳐다보다 팩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와서 쩨쩨하게 뭐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좀 궁금하더라고요. 그렇게 부활동에 열 올리던 사람이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걸까 하고.”

…….”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 때도 지금도 크게 신경 안 쓰니까.”

미안.”

말은 그렇게 해놓고 궁금하긴 했는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사과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싶긴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게 녀석답다. 뭐든 크게 아쉬워하는 일이 없고, 사람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카마사키가 알기로 녀석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주의라 뭐든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무례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를 못 느끼는 녀석이었다.

그런 이기적인 녀석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카마사키의 모습이 신기한지 마치 여름방학 관찰 숙제를 하는 초등학생마냥 카마사키를 관찰했다. 저번에 후타쿠치와 재회했을 때, 카마사키가 녀석의 변한 부분을 찾았던 것처럼 후타쿠치도 카마사키에게서 뭐가 변했는지를 찾는 눈치였다. 새삼스러울 만하지. 이제 알고 지냈던 시간보다 연락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오래 되었으니까.

몇 년 만에 보는 거죠?”

“2013년 봄에 졸업했으니까 딱 5년 만이네.”

확실히 오랜만이긴 하네요.”

그렇지.”

카마사키 씨는,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

그래?”

근데 변해도 중간이 없이 변했네요. 예전엔 고릴라 같았는데 지금은 곰 같아요. 근육들은 다 어디 갔데요? 이제 나이도 있는데 벌써부터 관리 안하면 나중에 배 나온다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 확실히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근육 남아 있어.”

아저씨가 따로 없어요.”

너랑 나랑 고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거 알고는 있는 거냐? 그리고 이 나이에 무슨 아저씨냐.”

후타쿠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 살 어린 것 가지고 유세 떠는 꼴이 같잖았다. 하여간 사람 신경 건드리는 데 타고난 녀석이다. 카마사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남아있던 커피를 모두 원샷했다. 사실 나이가지고 아저씨라 놀린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후타쿠치에 비해 형편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 분명 졸업하고 일에 치여 사느라 운동을 안 한 지 오래되긴 했다. 반면 녀석은 꾸준히 운동을 하는지하긴 아까도 운동복 차림이었으니, 모델마냥 몸이 좋았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도 덩치도 커져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땐 내가 조금 컸었는데. 몰려오는 자괴감에 다 비운 잔을 들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후타쿠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갈게요. 앞으로 신세 좀 많이 질 테니까 미리 잘 부탁해요.”

미리 사양한다.”

성격하고는. 그럼 월요일에 봐요.”

이러니까 같은 회사 다니는 것 같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후타쿠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확실히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는 묘하다. ‘나중에 봐요’, ‘또 봐요와 같은 막연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 날 꼭 보자고 약속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는 그냥 우연히 마주치는 정도지만.

왠지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괜히 귓가를 긁적였다. 슬슬 청소를 시작할까하고 방 안을 둘러보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거절할 것이지 사람 참 귀찮게 하는 자식이라니까. 카마사키는 기껏 내린 커피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싱크대에 커피를 흘려보냈다. 훅 퍼지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카마사키는 또 귓가를 긁적였다. 간질간질한 기분은 그 후로도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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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2)



최근 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카마사키 씨랑 뒹굴어도 모자를 판에 이게 무슨 거지같은 경우야. 아까부터 파란 불빛을 내뿜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 따닥, 하고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케이스 끼웠으니 괜찮겠지. 하긴 고장이 났어도 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으니까.

베개에 턱을 묻고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나뒹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려는지 카마사키 씨가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정신없이 울린 얼굴은 눈이고 코고 입술이고 전부 볼썽사납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아직까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보기만 해도 아플 지경이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카마사키 씨가 거울에 제 얼굴을 확인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지만.

. 더 자요.”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더 재우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목소리에 오히려 잠이 깰 판이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는 눈썹을 찡그리고 몇 번 몸을 뒤척거리다 다시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그러면서 잠결에 더운지 다리를 바둥거리더니 이불이 걷혔고 카마사키 씨의 맨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기 좋을 정도로 그을린 살결에 군데군데 빨간 점같이 생긴 것들이 다리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간밤 자신이 필사적으로 남긴 흔적들이었다.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카마사키 씨와 섹스를 할 때면 물고 깨물고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심해지는 편이었다. 보이는 곳부터 안 보이는 곳까지 잔뜩 마킹을 하고 싶어진다. 전희를 가질 때 매번 그러다보니 카마사키 씨는 자국이 남는 걸 질색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민감한 부위를 둘러싸고 깨물 듯 말 듯 애를 태우면 카마사키 씨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를 꾹 참으며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그러다 결국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로 휘감아 오면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쾌감이 오른다.

발가락 사이사이나 복사뼈 근처와 같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내가 남긴 흔적이 남았다 생각하면 가만있다가도 묘하게 흥분된다. 곱씹을수록 아침이라 반쯤 서있던 아래가 묵직해져갔다.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깨우고 N차전에 돌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발에 호되게 채일 게 뻔해 그저 잠에 취한 몸을 끌어안았다. 더운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 모른 척하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건 내 거다. 내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내 사람.

 

동거한 지 2. 멋도 모르고 사귀게 된 지 3. 헤어지자는 말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마사키 씨를 잡아챘지만 좋아하는 건지도 깨닫지 못했던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자신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다. 언제부턴가 마음 한 편에 차곡차곡 쌓이던 감정은, 이제는 그 감정이 없으면 자신조차 사라지게 될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미 어쩌지 못할 정도로 이 사람이 좋다는 것을.

처음 감정을 실감한 것은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고 자취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 즈음 나는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불만에 차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카마사키 씨는 취업준비로 이래저래 바빴고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라 괜히 여기저기 심술부리고 다녔지만.

카마사키 씨는 본인으로서는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생각보다 봉급이 좋다며 바로 자취를 준비해도 괜찮겠다고 웃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고 함께 기뻐해 줬다. 그럼 카마사키 씨 자취방에서 마음껏 야한 짓 해도 되겠네? 응큼한 마음에 좋아했는데 정작 자취할 곳이라고 꼽아둔 곳이 회사 근처였다. 학교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훨씬 더 멀어졌다. 가뜩이나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이대로 가다간 안 봐도 뻔했다. 장난하냐면서 아니꼽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자취할 생각에 실실대는 꼴이 짜증났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은 안 했던 건가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화를 버럭 내버리고 싶었지만 필시 회사에서 가까우면 그뿐인 게 훤히 보여서 뭐라 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왜 화가 나고,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거에 섭섭하다 느껴야 하는 거냐고. 어디든 자취하라지, 내 일도 아닌 일에 신경 쓰는 건 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나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확 김에 무작정 자취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대체 왜 반대하는 거냐고 따져 묻던 카마사키 씨는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시위하자 결국 자취를 포기했다. 들떠서 자취하게 되면 놀러오라며 나설 때는 언제고 다짜고짜 하지 말라는 내 말에 카마사키 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자취하겠다는 결정을 번복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마냥 태연히.

그 때 새삼, 애초에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겉으로 표가 나는 사람이라 어쩔 땐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선 어린애처럼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제에,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던 그 얼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어떻다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마냥 안타깝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욕심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저 사람이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평생 저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로부터 1년을 기다렸다. 졸업하기 무섭게 같이 살 집을 고르고 납치하듯 카마사키 씨를 낚아챘다. 독단적인 행동을 나무라는 카마사키 씨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억지를 쓰고 대답을 강요했다. 나랑 같이 살기 싫냐는, 뻔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카마사키 씨는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란 이름을 빌미로 카마사키 씨의 두 팔과 양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다. 나만 볼 수 있도록, 나 이외의 사람은 보지 못 하도록,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도록. 어디를 갔다 오든 돌아올 장소는 둘만의 집이 되도록. 동거 2년 차. 둘뿐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드르르륵. 바닥에 던져 버렸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거칠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냐고 시위하는 것 마냥 귀에 거슬렸다.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완전히 잡쳐 버렸다. 옆에서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아예 부서질 정도로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할 수 없이 카마사키 씨의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쓱 펴주고 몸을 일으켰다. 구석에서 부들거리는 핸드폰을 주워 방을 나섰다. 그냥 꺼버릴 작정으로 집어 들었던 건데 화면에 뜬 이름이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배로 더 귀찮게 할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켄지?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니.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무음이라 못 들었나 봐요.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어머, 얘는.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네 형한테 아직 연락 못 받았니?]

받았어요. 제가 이전부터 거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뭘 아직까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온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너도 참,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자취한다고 집 나가서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그렇다고 주말마다 집에 들르는 것도 아니고. 방학 때도 사정사정을 해야 한 번 들를까 말까 하잖니. 막내 너, 엄마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

전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대충 모자를 덮어쓰고 현관 밖 복도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엄마는 그동안 뭐가 그리 섭섭했는지 끊임없이 하소연을 늘여 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하는 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큰 집에 아들, 딸이라고 낳아놨더니 다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독립한다고 나가버려 서운하다는 등, 외롭다는 등의 투정이었다.

우성 오메가로 자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곱게 자라 와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나이에 안 맞게 철부지 같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막내인 자신은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인지 이미 클 대로 컸음에도 여전히 마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형이나 누나한테는 연락도 잘 안하면서 나한테만 난리라니까.

[듣고 있니, 켄지?]

. 듣고 있어요. 아무튼 전 진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니, 너도 정말. 그래, 이유나 한 번 들어 보자. 대체 형이랑 누나랑 아버지까지 다 온다는데 너만 왜 안온다고 버티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엄마 체면이 있지!]

자식이 몇인데 거길 우르르 갈 필요가 있어요? 전 빼주세요.”

[켄지! 정말 끝까지 이럴 거니!]

엄마야말로 이제 적당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눈을 한 카마사키 씨가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누가 보면 어쩌려고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여는 거야? 들어가라고 입을 뻐끔거리자 멍청하게 서 있던 카마사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따 들어가면 한 소리 해야지, .

[엄마도 이제 더는 못 참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번에는 절대로! 오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이 매정한 녀석아!]

분에 받힌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엄마, 하고 부를 틈도 없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끌고 갈 생각인 듯하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엄마에게 막내다운 살가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무참하게 씹혔다.

집에 들어가니 카마사키 씨는 빨랫줄에 널린 덜 마른 빨래마냥 소파에 엎드려 늘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오전의 밝은 햇빛이 비쳐 들어와 안 그래도 밝은 카마사키 씨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났다. 동그란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니 강아지처럼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기분을 또 묘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어머니셔?”

목이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데다 모래알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비단 아침이어서가 아니라 어젯밤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던 것도 한 몫 했을 테다. 카마사키 씨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쿠션에 얼굴을 푹 묻은 게 맛이 간 제 목소리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닌 모양이다. 이제껏 세지도 못할 정도로 경험했으면서 내숭은. , 아직도 첫날밤 지낸 새색시마냥 창피해 하는 게 카마사키 씨다워서 재밌긴 하지만.

, 언제나 하는 안부 전화죠.”

안부 전화라고 하기엔 네 표정이 영 별로던데. 엄마한테까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제가 어떻게 하는데요, 카마사키 씨?”

.”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손을 내려 턱을 잡고 들어 올렸더니 카마사키 씨는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입술이며 눈이며 퉁퉁 부어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못생겼어. 근데 이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니 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나 보다.

손 놔라.”

제가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주는데요. 그런 말 하면 섭섭하잖아요.”

아침부터 정신 나갔냐.”

카마사키 씨가 어떻게든 부은 눈을 뜨려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사적인 얼굴 위로 손바닥을 덮어 눈가를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니 카마사키 씨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려 왔다. 벌어진 틈 사이를 넘어 제 집처럼 활개를 쳤다. 맞닿은 부드러운 혀를 인사하듯 휘감아 올리고 보란 듯이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계까지 파고드는 침입자를 카마사키 씨는 괴로워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리듯 문을 열어주고는 벅찬 숨을 고른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주제에, 여전히 제게 얌전하다.

이런 점이 좋다.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아무 이유 없이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언제나 날 미치게 만든다. 너는 다르다고, 너만 특별하다고 일깨워주는 것 같다. 감정이 터질 줄 모르는 풍선처럼 자꾸만 커져간다. 이러다 어느 순간 팡,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이제 무슨 말로 내 감정을 당신한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다.

하고 싶어.”

더운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발정났냐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무언의 거부를 보인다. 카마사키 씨의 말대로, 아침부터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엎드려 있던 카마사키 씨의 위에 올라타며 입고 있는 거라곤 팬티밖에 없는 옷을 벗겨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 씨가 발을 휘두르며 밀어내려 하지만 팔에 닿는 다리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넌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 치곤, 읏차.”

……!”

기세 좋은데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카마사키 씨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채일 뻔한 걸 간신히 피하고 아까와는 달리 힘이 잔뜩 오른 양 다리를 잡아챘다. , 놓으라고! 성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카마사키 씨를 무시하고 빳빳하게 선 내 것을 카마사키 씨의 아래에 부딪혔다. , 슥 하고 아래위로 부드럽게 마찰하자 손에 잡힌 다리가 미칠 듯 요동을 쳤다. 하지만 자세가 불리해서 그런지 반항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사실 벗어나려고 하면 벗어날 수 있으면서 항상 이렇다니까. 그런 행동이 순순히 다리를 벌려주는 것보다 아래를 더 돋운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내가 좋아요? , 이것 봐.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벌떡벌떡 잘도 서네. 젊긴 젊어요, 그쵸?”

, . . 너 이 미친.”

좋죠. 말해 줘요, 좋다고.”

!”

말해 주세요, 카마사키 씨.”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했는지 카마사키 씨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괴롭히는 건 맞지만 뜻대로 말해주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게 괘씸했다. 서로의 것이 맞닿은 그대로 허리를 튕기듯 움직이며 동시에 카마사키 씨의 귓불을 깨물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 애원하듯 솜털이 간지러울 정도로 속삭이자 온 몸이 소스라치게 움찔거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순순히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조만간, 얘기해 볼까. 이제까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았던 진심을 고백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나올까. 역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창피해 하려나.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아 하겠지. 직접적인 고백은커녕 어렴풋한 가능성만 보인 말에도 못내 자신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좋아한다는 말에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

 

후타쿠치와 살게 된 이래 좀처럼 맞보지 못했던 한가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너무 한가로워서 혼자 있는 집이 썰렁하다 느낄 정도였다. 후타쿠치는 뭐가 그리 바쁜지 주말인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갔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마찬가지라 요 2주 간,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핏 듣기로는 집안 행사와 연관되어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냐 물어도 한숨만 내쉴 뿐 말해주지 않았다.

동거하고부터는 항상 회사와 집만 오고가는 생활을 하고, 여가 시간에 뭘 해도 후타쿠치와 함께였기에 몰랐는데 후타쿠치가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최근에는 습관처럼 심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여태껏 후타쿠치가 대놓고 눈치를 줘서 웬만해선 다른 사람과 약속도 못 잡았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이참에 모니와나 사사야, 혹은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오랜만에 집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안 그래도 집을 나오고부터 집이 적적해졌다며 외로워하시던데. 일단 점심을 먹고 전화를 해 봐야겠다.

집에 있던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렸다. 방에 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듯 했다. 혹시 후타쿠치인가, 화면을 확인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번호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이름도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어 광고인가 넘겨짚고 수신거부를 눌렀다. 어디서 개인 정보가 샜는지 최근 광고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똑같은 번호로 전화가 다시 왔다. 광고가 아닌가.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모르는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누구세요?”

[. 저 히로키예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흐릿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에 몇 없는 잘생긴 사람인데다 하도 성격이 살가워서 그랬는지 몇 주 전의 일인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 인상이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또 만나자고 말했었지. 연락처를 교환할 때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하기에 예의상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기억나. 근데 무슨 일로.”

[다행이다. ,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오늘? 시간은 있는데 왜?”

[아는 사람한테 영화표를 선물 받았는데 같이 영화 볼 사람 하나 없는 거 있죠? 그때 딱, 형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어요. 다행이다, 시간 있으시구나! 근데 주말인데 애인 분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히로키는 요즘 제일 재밌는 영화가 마침 2시간 뒤에 있다며 만나자고 말했다. 히로키가 말한 영화는 2주 전, 후타쿠치와 보려다 결국 못 보게 된 영화였다. 후타쿠치도 없고,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도 싫어서 누군가 만날까 생각하던 참이라 히로키에게 알겠다고 말하자 히로키는 들뜬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를 물었다. 본인은 영화 볼 사람도 없다고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뭘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나를 따르는 것 같더라니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지 모르겠다. 그저 사교성이 좋다고 보기엔 지나친 감이 있어 보였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 할게요. .]

그래, 이따 봐.”

[. 이따 볼게요, !]

말끝마다 형을 붙이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히로키의 형, 형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그것도 몇 십분 밖에 못 만난 사람한테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한단 말이야. 여자였으면 첫 눈에 반했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남자가 이러니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다단계나, 보증 같은 사기 치려고 이러는 건가? 본래 사기꾼이 제일 친절하고, 말도 잘하고, 의외로 겉보기도 멀쩡하다고 하던데. 하나, 하나 다 히로키잖아.

나갈 준비를 하려다 잠시 소파에 앉았다. 작정하고 속이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둔한 자신은 홀딱 넘어가 버릴 거다. 확실히 뭔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히로키를 사기꾼이라고 단정 짓기도 뭐하다. 원래부터 그런 애일 수도 있는데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봤을 때는 전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동생 삼고 싶다 생각했었지.

그래,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거겠지. 사람이 너무 착해도 남에게 의심 살 수 있겠구나, 내심 다짜고짜 의심부터 해버려 미안하다고 허공에 대고 히로키에게 사과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게 다 후타쿠치 때문이 아닌가. 그 자식이 하도 말과 행동이 가벼워서 매번 의심부터 하는 게 버릇이 된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그 자식은 대체 언제 어른이 되려나.

 

 

히로키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다 갈 때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착하면 전화하기로 했으니 히로키인가 싶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후타쿠치였다. 일이 꽤 많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집에 매여 있어야 한다고 했던 터라 더 바빠지기 전에 전화를 건 듯했다. 이번 주 들어서는 갈수록 피곤이 쌓이는지 많이 거칠어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왔다.

[뭐해요? ?]

아니, 밖인데.”

[그런 것 같네요.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 누구 만나기로 약속 했어요? 어젠 별 말 없었잖아.]

확실히 어제까지도 별 말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집에 가봐야 한다면서 투덜거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었다. 아는 사람 만나, 라고 말했더니 후타쿠치가 아는 사람 누구, 하고 물었다. 히로키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2주 전에 미팅에서 본 사람?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동생? 머뭇거리는 사이 후타쿠치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히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살살 흔들며 다가오는 걸 보는 사이에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는 사람, 누구.]

, 친구 아는 동생. 저번에 어쩌다 알게 됐어.”

[바로 대답 못하는 걸 보니 수상한데. 뭐야, 사실대로 말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진짜 그걸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거든. 아까 전화 왔는데 공짜 영화표 생겼다고 그래서 만난 거야.”

[여자?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왜 같이 영화를 봐요? 그 여자는 친구 하나 없데요? 아니, 친구가 없다고 해도 왜 굳이 카마사키 씨랑.]

, 남자야, 남자. 혼자 보긴 싫은데 이 시간에 한가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보지.”

! , 통화 중?”

[……? , . 카마사키 씨.]

, 나 잠깐 전화 좀. 후타쿠치?”

[…….]

통화 소리가 들릴까 히로키에게서 조금 떨어져 건물 구석으로 갔다. 후타쿠치, 부르는 소리에도 저쪽에선 숨소리만 들리고 대답이 없었다. 사귀던 초반에는 내가 누굴 만나던, 뭘 하던 별 관심도 없던 놈이 언젠가부터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친구든 가족이든 누가 되었건 후타쿠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늘 후타쿠치 중심으로, 모든 시간은 후타쿠치와 함께 보내길 원했다. 물론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할 리가 없다. 다만,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타인과 거리를 두길 원하는 게 나를 못 믿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이미 바람 난 전과가 있는 애인마냥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욱하는,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한숨이 나왔다. 내가 뭐 24시간 전담 대기조야, 뭐야? 저는 갈 데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하고 다니면서.

후우. 후타쿠치. 여보세요?”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하더니, 벌써 형 소리 듣는 사이인거네요? 보통 친해진 게 아닌가본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혀에 가시가 돋쳤는지 말끝마다 빈정대는 어조로 말하는 게 얄미워서 눈앞에 있었다면 발로 한 대 차주고 싶을 정도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내가 나이가 많고 아는 형 친구니까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보다 별로 안 친하다니까 왜 자꾸 빈정거리는 건데? 그리고 막말로 걔랑 내가 친하면 뭐. 뭐 어쩔 건데! 내가 게이도 아닌데 걔랑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그러냐? ?!”

[뭐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내가 이러는 게 한, 두 번 일인가? 그리고 애인이 난데없이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영화 보러 간다고 시시덕거리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그럼 냅다 잘 다녀와라 그래요? 것보다 그 새끼가 뭔데 그렇게 감싸주면서 나한테는 화를 내는 거예요?]

시시덕거린 적 없어!! 그리고 얘는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난 뭐 사람도 못 만나?! 내가 죄수야, 뭐야?!”

[시시덕거렸던 아니던, 상대가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싫다고요! 영화는 나랑 보면 되지, 다른 사람이랑 왜 봐요?!]

됐다, 됐어. 이 얘긴 나중에 집에 오면 다시 해.”

[, , 카마사키 씨!]

끊는다.”

뭘 잘했다고 신경질 팍팍 쓰면서 소리치고 있어? 도저히 후타쿠치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여자였으면 이 자식은 분명 의처증 남편 소리 들었을 게 뻔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피했는데도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얼굴로 몰리는 시선이 따가웠다. 대화 내용을 통해 나를 애인 몰래 바람피우는 게이로 보고 있는 모양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억울하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멀리서도 형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아하하.”

, 그래? , 들었어?”

히로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남잔데도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꼭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주위 사람들이 히로키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역시 이런 애가 사기꾼일 리가 없지.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그 땐 정신이 이상했던가 보다. 선하게 웃는 히로키를 보며 반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지라 높은 기대치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정말 환장하게 재밌었다. 화려한 액션 신과 선명한 색감,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운드에 눈과 귀가 즐거웠고, 곳곳에 숨겨져 있던 복선들을 회수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여운이 넘치는 엔딩까지 가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 했다. 괜히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던 게 아니었다.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조금 아쉽기도 했다. 원래라면 벌써 한 번 보고도 두, 세 번은 더 봤을 영화였는데. 평소엔 팜플렛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느라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가방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시간 나면 다음에 같이 올까.

진짜,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그쵸, ! 제가 본 영화들 중에 세 손가락에 꼽힐 것 같아요.”

상영관을 나오면서 히로키는 연신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까지 온몸으로 재밌었다는 걸 표현하는 게 의외였다. 겉모습은 꽤 성숙한데 하는 행동은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흥분했더니 배고프다. 형도 배고프죠? 근처에 제가 좋아하는 가게 있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요.”

? 그게.”

거기 진짜 맛있는 집인데. 지금까지 누구 데려갔다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요. 게다가 지금 시간이라면 웨이팅도 없을 테니까 딱 좋겠다!”

가요, 얼른 가요!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보다 히로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긴 평소보다 훨씬 영화에 몰입했던 만큼 배가 고프긴 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한데다 어차피 후타쿠치는 오늘도 밤늦게야 집에 올 것 같으니 히로키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그러고 보니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아무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는 거야 늘 있는 일상이지만, 싸우고 나서 메시지 하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싶다. 평소 같았으면 사과인 듯 사과 아닌 투정을 부리는 메시지가 와 있을 법 한데.

조금 심했나.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집착이 심한 걸 가지고 내가 너무 나무랐나? 제대로 대화를 끝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서 삐친 건 아닐까. 아니, 아니지. 그러게 누가 이런 일로 의심부터 하고 빈정거리래?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부터 낸 건 후타쿠치였다. 저는 매일같이 놀러 가고 뭐하는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주제에 나한테만 이러는 게 어디 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기분이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이번엔 절대 사과를 받기 전까지 화해하지 말아야지. 언제까지고 후타쿠치한테 일일이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 그렇지.

그래. 저녁은 내가 살게.”

정말요? 그럼 사양 않을게요. , 그럼 사람들 몰리기 전에 얼른 가요.”

상대방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 느껴 보라 이거야, 후타쿠치 자식. 너도 내가 언제 올지 모른 채로 그 텅 빈 집에 혼자 있어 보라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다 히로키에게 충동적으로 저녁 먹고 술도 마시러 가자고 말했다. 아예 자정을 넘겨서 가버려야지. 의지를 다지는 내 옆에서 히로키가 충견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들뜨다 못해 하늘을 날아다닐 것처럼 얼굴을 상기시키는 모습에 괜히 멋쩍어졌다. 이렇게 기뻐하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근데 얘는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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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