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고작 3개월이었다. 작년 겨울, 2학년의 끝 무렵에 사귀기 시작해 올해 3월까지 왔다.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더 일찍 끝을 냈어야 했다고 아쉬워해야 할까. 후타쿠치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 말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내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잘한 것일까 하고. 이렇게 끝나는 게 괜찮을까, 하고. 걸어가는 동안 끝까지 다 버리지 못한 미련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카마사키는 그날 밤 남몰래 방에 틀어박혀 베개를 적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다. 어차피 알고 시작한 거 왜 새삼스레, 혼자 상처받아서 결국 후타쿠치와 헤어졌냐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몰랐던 거 아니었잖아. 다 알고 있었잖아. 멋대로 기대한 건 네가 아니었냐고, 마음 단단히 먹었던 주제에 얼마 못 가서 결국 포기하는 거냐고 자책했다. 이때껏 힘든 일들 다 참아 왔으면서 왜 지금 와서.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외면하려 했던 후타쿠치의 진심은 어떻게든, 언제가 되었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가슴이 무너질 듯 아플 게 분명해서 무턱대고 피했었지만 애초에 피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알량한 기대를 품은 게 잘못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데 말이다. 혹시, 하는 기대를 품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한 조각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스킨십에 설레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 이제 와 후회해봤자 다 지나간 일이다, 카마사키.”

 

카마사키는 혼잣말을 하며 합리화했다. 어차피 끝났는데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참을 베개에 코를 박고 훌쩍거리다 카마사키는 울어서 부은 눈을 비비다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대로 잤다간 내일 아침에 벌에 쏘인 사람처럼 얼굴이 팅팅 부을 게 분명했다. 힘내자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인데. 몇 번을 더 찬물로 세수하다 거울을 보니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얼굴이 있었다.

 

, 진짜 못생겼어.”

 

[, 진짜 못생겼어. 카마사키 씨 지금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언제였지, 저 말을 했던 게. 자신을 두고 못생겼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후타쿠치였지만 그 때의 상황은 머리에 박힌 듯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백했던 그 날,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나처럼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키스를 했었다.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눈을 가려주었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씨발.”

 

카마사키는 수도꼭지를 틀어 콸콸 쏟아지는 찬 물로 거칠게 세수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어느새 얼굴이며 손이며 빨갛게 달아올라 따가웠지만 카마사키는 멈추지 않았다. 피부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길 반복하다 조용히 세면대 위에 무너졌다. 격하게 숨을 토해내는 등이 급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물이 콸콸 쏟아지며 세면대 위를 빙글빙글 돌고 사라지길 반복하는데 그 거친 표면 위에 조금씩 눈물이 떨어졌다. , 똑 하고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결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씨발, 진짜... 진짜 개새끼...”

 

사정없이 흐르는 눈물을 카마사키가 손으로 훔쳤다. 울어서 그런지, 세수를 해서 그런지 흠뻑 젖은 눈가를 계속 닦아 내었지만 좀처럼 눈물은 멎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결국 포기하고 침대 위로 기어 들어갔다. 젖은 베개를 뒤집어 베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덮었다.

 

개새끼, 마음이 없으면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사귀자는 헛소리 따위 하지 말았어야지.

 

 

 

 

점심시간에 만난 모니와가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차마 카마사키의 얼굴에 손도 못 대고 모니와가 허둥지둥 거렸다.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 경 안 쓸 리가 있어?! 눈이며 얼굴이며 다... 이러고 학교를 어떻게 왔어...”

아무래도 아니야?”

...”

 

차가운 거라도 얼굴에 대고 있을래? 모니와가 당장이라도 캔음료를 사올 기세로 말했다. 모니와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니와를 만나기 전에 교실에서 한차례 듣고 오긴 했다. 엄청난 얼굴로 교실에 들어 온 카마사키를 두고 남자애들은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여자애들 중 두엇은 눈을 돌려 버렸었다. 카마사키는 창피해서 내내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그럴 수는 없었다.

 

. 이거 얼굴에 대고 있어.”

고맙다.”

 

모니와가 건네 준 캔을 들고 카마사키가 가장 부은 눈가를 문질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캔을 굴리는 카마사키를 모니와가 쳐다보았다. 카마사키를 알게 된 이후부터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모니와가 아는 카마사키는 가장 좋아하는 배구를 하면서도 시합에서 졌다는 이유로 우는 일도 없었고, 중학교 때 처음 사귄 여자애한테 가차 없이 차일 때조차도 머쓱하게 웃어넘기는 성격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데. 모니와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망설였다.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는데 카마사키가 말했다.

 

나 오늘 연습 못 갈 것 같은데.”

? 어어... ?!”

꼴이 말도 아니기도 하고.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네.”

많이 아파? 네가 연습을 쉴 정도로 아픈 거야? ?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모니와는 카마사키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나 확인해보았다. 카마사키가 자진해서 연습을 빠진다고 하다니 심각하게 아픈가 싶었던 것이다.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팔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카마사키는 모니와에게 좀 부탁할게, 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니와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카마사키가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카마사키를 찾았다. 어디에 있든 당장이라도 끌고 나가서 어제의 일을 다시 물어볼 셈이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헤어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카마사키와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카마사키 씨 어디 있어요? 안 보이네.”

, 카마사키는 오늘 연습 참여 안 해.”

?”

 

모니와는 오늘 연습할 메뉴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잠시,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후타쿠치에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후타쿠치가 씩씩거리며 왜요?! 하며 모니와를 다그쳤다. , 왜 나한테 화내는 거야.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모니와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자신의 페로몬이 흘러나온 것을 깨닫고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나도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연습 못 가겠다고 그러더라.”

...! , 유도 없이 무작정 보내주면 어떻게 해요?!”

 

, 진짜. 후타쿠치가 머리를 헤집으며 씩씩거렸다. 당장이라도 아까처럼 페로몬이 흘러나올 듯 위태로웠다. 모니와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요즘 둘이 친해보였으니까 혹시 후타쿠치라면 알지 않을까.

 

혹시 어제 카마사키 무슨 일 있었어?”

?”

아까 점심시간에 만났는데... 어제 엄청나게 울었나 보던데. 얼굴이 팅팅 부어가지고 말이 아니더라고.”

“... 울어요?”

. 뭐 아는 거 없어? 둘이 요즘 같이 다니잖아.”

 

후타쿠치? 모니와가 이름을 불렀지만 후타쿠치는 멍하니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후타쿠치가 대뜸 모니와의 어깨를 턱 잡았다. 모니와 씨~, 하며 말하는 말투가 영 불안했다.

 

, ?”

제가 오늘 배가 좀 아파서 연습을 못 할 것 같네요.”

? ,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팔하던 애가 뭘...”

배가 아프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아픈지 진단서라도 떼 와야 믿어주실 거예요? ? 카마사키 씨는 그냥 보내줬으면서 아픈 저는 기어코 연습해야 한다, 이거에요?”

아니, 아니 너는 안 아파 보이잖,”

!!! , 배 아파!!! 배 아파 죽겠네!!!”

 

후타쿠치가 모니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큰소리를 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버럭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주변에서 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바닥에 웅크리고 은근슬쩍 모니와의 다리를 퍽, 퍽 하고 찼다.

 

, 야 후타쿠치! , 그만해. 악, 아파!! 알았어, 알았어! 보내 줄게...!”

 

그 소리에 후타쿠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하고 뻔뻔하게 돌아서는 후타쿠치를 보며 모니와는 이마를 짚었다. 후타쿠치 아프데요? 하고 물어오는 후배에게 모니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후타쿠치한테 휩쓸렸던 친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후타쿠치는 그 길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마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사귀는 동안 몇 번이고 함께 내렸던 정류장에 도착해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절로 빨라지는 걸음에 금세 카마사키의 집에 도착했다. 그대로 벨을 울리려던 후타쿠치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어제 울었다는 말에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이 무작정 와버렸지만 잠깐 망설여졌다. 다음 날 얼굴이 팅팅 부을 정도로 울었다면 얼마나 울어댔던 거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찾아가도 되는 걸까, 후타쿠치는 잠시 시간을 재다 벨을 눌렀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기엔 지금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 궁금증이 너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 씨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둔 터라 카마사키네 집엔 좀처럼 부모님이 계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부모님이었다면 평범한 후배인 척 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저에요. 문 열어요.”

 

인터폰 너머로 카마사키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망설이고 있는 듯 숨소리만 들리는데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인터폰이 끊겼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관에 카마사키가 서 있었다. 과연 모니와 선배의 말대로 얼굴 여기저기 붇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타쿠치가 빤히 보고 있는 걸 눈치 채고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한 쪽 얼굴을 가렸다.

 

왜 왔냐? 연습복은 또 왜 입고 왔어.”

 

생각보다 카마사키의 말투가 덤덤했다. 창피한 듯 얼굴을 가리고 후타쿠치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잠시 보다 말없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 째고 왔어요.”

. , 연습을 째면 어떻게 해? 빨리 다시 가,”

카마사키 씨도 연습 안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안 가요.”

 

억지를 부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투에 카마사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곧이어 한숨을 내쉬더니 제 앞에 서 있는 후타쿠치의 등을 밀었다.

 

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가. 너 이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1학년 아니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3학년이거든요. 3학년이라고 이렇게 해이해져도 되는 겁니까?”

나는,”

나는, 뭐요. 뭔데요.”

나는 사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빠진 거야. 너랑은 경우가 달라.”

무슨 사정? 어제 애인이랑 헤어지기라도 했나 봐요?”

 

등을 떠미는 카마사키의 손길에도 힘을 주며 버티던 후타쿠치가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제 등에 놓인 손을 내리 치며 카마사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인가 봐요? 그래서 충격 받고 연습 빠지신 건가?”

 

마치 제3자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후타쿠치는 아무렇지 않게 카마사키의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냐고,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떠밀었다. 두어 걸음 뒷걸음친 후타쿠치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후타쿠치가 뭐라 쏘아 붙이려는데 카마사키가 더 빨랐다.

 

맞아. 나 어제 차였고, 당분간 네 얼굴 보고 싶지 않다.”

“......”

알겠으면 이제 가.”

 

개새끼. 진짜 개새끼.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후타쿠치의 언행에 카마사키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위층으로 오르려는데 뒤에서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가 그냥 갈 놈이 아니지. 좋아하는 사람이고 뭐고, 하루 종일 기분 잡치는데 한 소리 하려고 카마사키가 뒤를 돌았다.

 

...”

날 좋아한다면서요. 이거밖에 안돼요?”

 

당황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카마사키의 앞에서 후타쿠치가 씩씩거렸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헤어지겠다는 말을 해. 나를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었으면서. 어떻게 감히 나한테.

 

,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내가 무슨 순수 혈통개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만 찾아서 사귀고 결혼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 잠깐...”

당신 베타라고 그냥, 그냥 사귄 것도 아니고. 난 당신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 안 하는데 왜...!”

알았어, 그러니까 잠깐...”

날 좋아해서 사귄 거 아니에요?”

 

후타쿠치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말했다. 분해 죽겠다는 듯 얼굴 한 가득 인상을 찌푸리고 카마사키한테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안 말해요? 장난쳐? 가히 7살 어린애라고 봐도 좋을 만큼 후타쿠치는 떼를 썼다.

 

빨리 대답해요.”

“......”

어서 대답하,”

... 날 좋아해?”

“......”

날 좋아해서 사귄 거야?”

 

카마사키는 어제의 질문을 다시금 반복했다. 곧 죽어도 후타쿠치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카마사키는 그조차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물어보길 잘한 걸까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모른 척 했다. 진짜,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병신 같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 얼굴에 조금은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카마사키의 초조함을 아는지 후타쿠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나 카마사키 씨랑 그냥 사귄 거 아니에요.”

 

난 왜 언제나 이렇게, 너에게 쉽게 넘어가주는 걸까. 손해 보는 일인 게 분명한데도 어째서 늘 너의 건방진 행동과 말투를 다 받아주고, 가볍게 다가오는 스킨십을 뿌리치지 못하고. 날 그렇게 아프게 만들었던 너를, 난 왜 또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하물며 나를 좋아한다는 그 직접적인 말을 해준 것도 아닌데.

 

카마사키는 눈물로 뒤범벅된 후타쿠치의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울면서도 끝까지 분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바람에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제 얼굴을 덮은 손을 후타쿠치가 감쌌다.

 

카마사키 씨 아까 진짜 못생겼어요. 그러고 어떻게 학교까지 올 생각을 다 했지.”

 

후타쿠치는 제 눈도 팅팅 부어오른 주제에 끝까지 카마사키를 놀렸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겠는지 눈을 꼭 감은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봐 줄만한 건 그나마 잘생긴 얼굴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꼴사납게 부어 있다는 주제에. 누가 후타쿠치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남의 앞에서 항상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우위에 서서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알파가 평범한 베타의 앞에서 질질 짜다니.

 

후타쿠치가 눈을 덮은 카마사키의 손을 슬쩍 치우더니 실눈을 뜨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낄낄거리더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바보 같은 얼굴.”

,”

그렇게 내가 좋아요?”

 

그러는 너도 그러고 있으니 정말 못생겼다. 너야말로 그렇게 내가 좋으냐고 묻는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뒷목을 끌어 젖은 얼굴을 품에 안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끌려온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붙잡아왔다. 그리고는 카마사키에게 나를 빨리 대답하라고 웅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뜸을 들이며 대답해주지 않자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재촉했다.

 

좋아한다고 귓가에 작게 말해주자 후타쿠치가 그제야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게 마치 나도, 라고 대답하는 것 같아 카마사키는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서툰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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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나란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의 종점까지 와 버렸기에 카마사키는 왔던 만큼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후타쿠치는 어떨지 몰라도 카마사키는 혼자 어색해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주변에 있던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진짜로 꿈은 아니겠지. 버스에서 졸다가 꾼 꿈이라면 어떡하지. 저 멀리 볼 것도 없는 길 너머만 보다 카마사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똥 못 눈 개새끼 같네요.”

“...... 자식 선배한테, 개새끼가 뭐냐. 건방지게.”

스스로 생각해도 강아지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다고 개새끼도 아니거든.”

 

개새끼나 개나, 후타쿠치가 코웃음 쳤다. 쟤는 왜 저렇게 태연하지?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하는 마음에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우리 진짜 사귀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후타쿠치가 확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봤단 봐요. 진짜 확,”

?”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목덜미를 보면서 내뱉었다.

 

물어버릴 테니까.”

베타를 물어봤자 별 거 있냐. 상처도 안 남을 걸.”

남는 지 안 남는지 한 번 해 볼까요? ?”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을 감쌌다. 빈 말이라도 가슴이 술렁였다. 목덜미를 물어버린다는 건 알파에게 있어 각인의 상징이었다. 예전보다 기술이 발달되어서 각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레이저로 손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각인은 독점욕과 소유욕을 드러내는 자국이었다. 자신의 것에 접근하지 말라는 알파의 사인. 페로몬이 없는 베타의 몸엔 남겨지지 않지만.

 

, 더럽게 안 오네.”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카마사키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택가가 모여 있는 길인데다 종점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 근처까지 오는 버스가 드물었다. 버스라도 타야지 어색함이 줄어들 것 같은데 참 더럽게도 안 온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텐데 뭘 그러고 있어요.”

 

후타쿠치는 정류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카마사키를 향해 손짓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앉으라고 말했다. 괜히 한 번 더 버스가 오는 방향을 확인했지만 올 기미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결국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서 카마사키가 머리를 굴리는데 바로 눈앞에 후타쿠치의 손이 튀어 나왔다.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차가운 감촉이 양 뺨에 닿았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볼을 한껏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제 손에 찌부러진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주무르니 붕어 입이 되었다가 말았다가 아주 재밌었다.

 

카마사키 씨, 설마 지금 긴장해요?”

어니거던. 이거 라.(아니거든. 이거 놔.)”

, 진짜 못생겼어. 지금 카마사키 씨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 지짜 너으라거!(, 진짜 놓으라고!)”

 

또 이렇게 시비를 턴다. 못생겼다는 말에 울컥한 카마사키가 제 뺨을 쥐고 있는 후타쿠치의 손을 뿌리치려 손을 올렸다. 후타쿠치의 손이 얼굴을 주무른 탓인지 못생겼다는 말에 창피해서 그런 건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에 굳이 힘을 주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얼굴에서 손을 뗐다. 볼썽사납게 빨개진 얼굴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완전히 굳은 카마사키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조심스럽게 카마사키의 반응을 살피며 맞닿은 입술을 물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맞추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 사이로 스르륵 하고 혀를 집어넣었다. 카마사키는 아예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여직 자신을 멀뚱히 볼 뿐이었다. 후타쿠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카마사키의 눈을 덮어버렸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카마사키가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하나, 둘씩 곤두세워졌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입 안을 배회하는 후타쿠치의 혀가 움직이는 거라든가, 옅게 맡아지는 특유의 체취라든가, 듣기 민망해질 정도로 질척이는 소리라든가. 후타쿠치가 예민한 입천장이나 여린 잇몸을 간질이다 목구멍을 파고들 것처럼 깊숙이 들이밀 때면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느끼는 지점만을 골라 집요하게 문지르면 후타쿠치의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힘없이 미끄러지려는 손에 간신히 힘을 줘 생명줄처럼 후타쿠치의 팔목을 쥐었다. 이제껏 해봤던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기분 좋은 쾌감에 젖어 멍하니 생각했다.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던 연애는 의외로 순조로워 보이는 듯 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란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둥둥 떠버린다. 조금 벅차다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며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시끄러워서 들킬까 마음 졸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전히, 가끔씩 혼자만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알고 시작한 관계였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는 걸 느낄 때면 두려웠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만큼이나 커졌는데, 과연 후타쿠치는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바라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리란 걸 알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내가 주는 만큼 받고 싶어진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노력했던 욕심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커져버렸다. 후타쿠치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조마조마 했다. 털끝만큼의 변화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냐? 속으로 수십 수백 번을 삼켰던 말이 치솟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 그 때 내 고백을 왜 받아줬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 다 영화를 볼 때면 뭘 챙겨먹는 타입은 아니라 티켓을 확인받고 곧바로 들어갔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중, 고등학생만 몇 명 있을 뿐 한산했다. 가운데 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때에 맞춰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봉하기 전부터 예고편이며 뉴스를 챙겨보면서 손꼽아 기대했던 영화였다. 좋아하던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이었기에 재미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스토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스크린을 보고, 상영관 전체를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가 들었지만 스스로 뭘 보고 있는지, 뭘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움직이던 태엽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는데 잡생각만 가득하다. 감흥없이 화면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습관처럼 후타쿠치의 손이 뻗어왔다. 팔걸이에 늘어진 제 손을 뒤집어 가닥가닥 얽어 잡는다.

 

사귀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후타쿠치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오히려 부끄럽다고 자신이 밀쳐 내거나 도망갔지 후타쿠치는 손을 잡거나 목덜미나 허리 같은 곳을 지분거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무릎을 쥐어 올 때면 물 흐르듯 키스를 해온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카마사키는 뻥 뚫린 공간에서 후타쿠치가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낯부끄럽긴 했지만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먼저 다가온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끝까지 밀쳐내지 못하고 후타쿠치가 서슴지 않게 하는 행동을 전부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좋으면서도 쓸쓸함에 휩싸였다. 스킨십이라는 달콤한 쾌락에 홀려 자신이 착각이란 바다에 홀연히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카마사키는 그대로 바다 속에 잠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왔던 의심이 떠오른다.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서 사귀는 거냐고.

 

 

뭐야, 허무하게 끝났네. 이거 속편 또 나오는 거 아니야? 그쵸, 카마사키 씨.”

? 어어...”

 

어느새 영화가 끝났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후타쿠치가 결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연신 투덜댔다. 아예 집중하지 못했던 카마사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의자에 앉아 불만스럽게 다리를 까닥이던 후타쿠치는 별안간 카마시키를 올려봤다. 안 나가냐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카마사키를 향해 건방지게 손짓했다.

 

안 돼. 사람 아직 있잖아.”

 

출입구 쪽에 직원이 한 명 서있었다. 뒤처리를 하기 위해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리는지 유일하게 남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교복 넥타이를 쥐어 당겼다. 불식간에 당겨지는 바람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후타쿠치 위에 엎어졌다. 순간 팔걸이를 쥐었길 다행이었지 꼴사납게 부딪칠 뻔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뭐라 타박하려는데 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 하고 가볍게 몇 번 입을 부딪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입술을 앙 물어버렸다.

 

! 뭐 하는 짓이야!”

영화 보는 내내 딴 생각 하길래요. 이제 정신 차렸어요?”

그렇다고 입술을 물어버리냐? 아프잖아.”

그러게 누가 나랑 같이 있는데 딴 짓 하랬나.”

 

, 저 빌어먹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깨물었는지 입술이 화끈했다. 다른 사람이 볼 까 무서워 카마사키는 아픈 게 가라앉을 때까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다. 그 모양을 보고 옆에서 후타쿠치가 꼴좋다며 웃어대기에 주먹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퍽 쳐버렸다. ! 하는 소리를 내며 거의 고꾸라질 뻔 했지만 아쉽게도 넘어지진 않았다. 후타쿠치는 아프다며 연신 등을 문지르더니 입을 가리고 있는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 떼어내는 척 했다. 안간힘을 쓰며 입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는 카마사키와 손을 내리려는 후타쿠치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오고 갔다. 결국 참다못한 카마사키가 무릎으로 후타쿠치를 밀어내는 것으로 유치한 투닥거림이 끝이 났다.

 

 

영화관에서 나와 오늘은 라면이 당긴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끌고 근처 라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맛집이라고 알아주는 집인지라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할 수없이 다른 곳을 가려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후타쿠치의 이름을 불렀다. 근처 사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후타쿠치와 안면이 있는 듯 합석하겠냐 물어왔다. 4인용 테이블에 2명분의 자리가 남아 있기에 별 고민 않고 자리에 앉았다. 늘 먹는 메뉴를 주문하니 옆에 앉은 처음 후타쿠치를 불렀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후타쿠치 친구신가요?”

아뇨. 배구부 선뱁니다. 카마사키 야스시입니다.”

선배님이셨군요. 전 후타쿠치 중학교 때 친구인 타마키 쇼우타에요.”

언제 또 본다고 통성명이냐. 먹던 라면이나 먹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타마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타박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성격 더럽구나, 후타쿠치, 라며 타마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지냈냐는 말이 오고 갔다. 꽤 친한 사이였던 듯 타마키는 후타쿠치를 서슴없이 대했다.

 

, 맞다. 그러고 보니 걔랑은 어떻게 됐냐?”

누구.”

 

때마침 주문했던 라면이 나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점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휘휘 저으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던 카마사키는 면발을 두고 국물을 떴다.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났다.

걔 있잖아. 이름이 뭐였지? 니시우라였던가, 니시하라였던가.”

니시하라. 걔가 왜?”

헤어졌어?”

, 뜨거.”

 

뜨겁다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먹었더니 그대로 혀에 데어버렸다. 대화를 나누던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시선이 모아져 카마사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찬물을 들이켰다. 조심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말하곤 타마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 하던 중이었지? 다시 이야기가 오고 갔다.

 

, 니시하라랑 헤어졌냐고. 그 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귀었잖아.”

지금이 언젠데 아직도 사귀겠냐?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지.”

그렇긴 한데, 설마 싶어서 물어봤지. , 진짜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몇 개월을 안 가냐.”

“3개월 정도 갔나.”

 

라면 좀 먹자며 후타쿠치는 말을 대충 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식은 면을 후루룩 먹는 동안 타마키는 그 옆에서 자기 친구와 떠들었다. 어지간히 재밌는지 니시하라라는 여자와 언제 사귀었고, 사귈 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타마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손님이 거의 빠져나간 가게에 후타쿠치의 연애 이야기만 들렸다.

 

언제였지? 크리스마스 파티 때였나, 아마 니시하라가 먼저 고백했었지? 진짜 그 때 애들이 다 놀라가지고 남자애들은 후타쿠치 질투하고, 여자애들은 니시하라 질투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니시하라가 좀 예뻤냐. 잡지 모델까지 하고 그때껏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잖아. 자기 눈 높다고 고백해오는 남자애들 다 뻥뻥 차버렸었지. 근데 후타쿠치랑 딱 사귄다고 그래서 애들이 참 언행일치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좀 소름끼치려고 그런다? 그 때가 언젠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 스토커야?”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 약간 세기의 커플 같았어. 엄청 유명했다고. 아직도 중학교 친구들 만나면 가끔 얘기 나온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타마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타마키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네가 얼마 안 갈 줄은 예상했었지. 근데 3개월이 뭐냐.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오래 간 게 3... 4개월? 빠르면 한 달도 안 갔었지?”

헤어질 만하니까 헤어진 거지.”

왜 헤어졌는데?”

몰라. 그냥 질렸었나보지.”

 

나쁜 남자! 타마키가 분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 옆에서 타마키의 친구도 질린 얼굴을 했다. 태연하게 라면을 먹는 후타쿠치를 보며 타마키가 분해하다 표적을 바꿔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카마사키 씨! 선배가 봐도 완전 나쁜 남자죠, 맞죠! 쟤 고등학교 가서도 여자친구 몇 개월에 한 번씩 갈아 치우나요?”

, 어어?”

적당히 해라, ? 카마사키 씨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리니까.”

 

후타쿠치는 남자의 공공의 적, 이라며 타마키는 바로 옆에 앉은 카마사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다 후타쿠치가 던진 휴지조각에 맞았다. 얼굴에 맞고 테이블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다시 들어 올려 타마키가 후타쿠치에게 던지며 말했다.

 

내가 친구로서 얘기하는데, 후타쿠치 너 그러면 안 된다. 단기속성 특강도 아니고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었던 거야.”

그냥.”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너나 잘하시지.”

 

후타쿠치는 여전히 궁시렁거리는 타마키를 외면하고 카마사키를 향해 가자고 눈짓했다. 뒤늦게 타마키가 뒤에서 불러댔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밀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가는 내내 고개를 저어댔다.

 

 

집에 가요?”

 

정처 없이 걷다 후타쿠치가 넌지시 말했다. 라면집에서 타마키를 피해 나오느라 이 뒤에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직 시간은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헤어지기에도, 어디를 또 가기에도 애매했다. 카마사키는 잠시 고민하다 그럴까, 대답했다.

 

영화를 보고, 밥까지 먹었으니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주말을 앞둔 번화가를 걷고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애매하다 생각하는 시간에도 거리는 친구며 애인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울이라 하기엔 늦고, 봄이라 하기엔 이른 계절은 저녁이 되자 아직은 겨울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교복에 저지까지 껴입었지만 휑하게 드러난 목을 스치는 칼바람에 카마사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유난히 날씨가 쌀쌀하다.

 

사람들에 치이고, 바람에 치이느라 잔뜩 어깨를 오그라들고 걸어가는데 손가락 사이로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타쿠치가 모른 척하며 손가락 두어 개를 잡아온 것이었다. 누가 볼 새라 카마사키가 손을 물리려는데 후타쿠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잡은 손가락을 당겨 카마사키를 말없이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쥔 손가락 사이에서부터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카마사키는 핀잔을 주는 대신 걸음을 빨리 했다. 찬바람에 카마사키의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 또 고백 받네.”

 

창밖을 보며 사사야가 말했다. 열린 창 아래로 교사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후타쿠치는 가만히 제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며 고백하는 여자애를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서 몇 번째냐. 신입생들 사이에서 후타쿠치 인기가 장난 아니라더라.”

남자가 후타쿠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데. 안 그러냐?”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지.”

“... 아무튼 잘생긴 게 최고네.”

최고지, 아무렴. , 찼나봐.”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여자아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꽤 멀어졌을 무렵 뒤에서 친구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몰려왔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후타쿠치가 있는 방향을 보며 삿대질하는 것이 아마도 욕인 것이 분명한 말을 하는가 싶다. 나란히 창가에 매달려 구경하던 남자들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딱하다며 누군가는 울지마! 라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이제 한명 쯤 사귈 때도 됐는데. 안 그러냐, 카맛치?”

? ... 런가?”

너 요즘 후타쿠치랑 자주 붙어 다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쟤가 작년 이맘때쯤에는 여자친구를 아주 달에 한 번은 바꾸는 것 같았는데, 가을쯤부터는 한 명도 안 사귀었지?”

 

그랬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이곤 창 아래를 내다보았다. 이미 후타쿠치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한동안 시선을 괜히 좌우로 돌렸다가 슬쩍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아예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여전히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밑을 보는 카마사키의 옆으로 사사야가 몸을 기대왔다.

 

그래도 아예 희망고문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카마사키의 시선을 따라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던 사사야가 말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카마사키는 시선을 돌려 사사야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웬 희망고문?”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후타쿠치랑 사귀어도 사귀는 느낌이 안 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후타쿠치는 우성 알파라고 번듯하게 출세할 게 뻔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생각을 해 봐. 상대는 몇 없는 우성 알파고, 내가 그만한 우성 오메가가 아닌 이상은 뭐가 좋다고 나랑 사귀겠어? 내가 뭐라고.”

꼭 우성 오메가랑 결혼하라는 법도 없잖아. 좋아하면...”

 

카마사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사야는 그 순진한 질문에 그게 아니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란 게 참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고. 우성은 우성집단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공공연히 우성만 만난단 말이야. 우성끼리 결혼하면 그 자녀도 우성인 경우일 확률이 높으니까. 아주 드물게 열성 오메가나 평범한 베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일부고. 그래서 보통은 끼리끼리 만난다 이거지.”

 

급에 맞게. 사샤야가 덧붙였다.

 

그래서 그게 희망고문이랑 무슨 상관인데?”

넌 후타쿠치가 여자애들이랑 왜 사귄다고 생각해? 사귀어도 얼마 안 가 헤어지는 이유는 또 뭐라고 생각하고.”

좋으니까 사귀었겠지. 뭔가 안 맞아서 헤어지고...”

장담하는데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을걸. 그냥 just for fun이야. 그러니까 오래 안 가지.”

 

심심풀이일 뿐 별 의미 없을 거라며 사사야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폈다. 조금 있으면 종 친다며 카마사키의 등을 찰싹 두드리곤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사야가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망하니 창밖을 쳐다보다 수업종이 울리는 소리에 카마사키도 교실로 들어갔다. 은연중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사람은 모른 체 하려고 해도 기어코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진다. 알면 다친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분명 물어보면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카마사키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번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한번쯤은 후타쿠치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무섭다고 피했던 질문.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평소처럼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차리다 라커룸에 아무도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 3개월이나 무난하게 사귀어 왔으면, 그래도 뭔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지금 자신이 하는 질문이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카마사키는 바랐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에 핸드폰에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뒷북쳐요? 사귄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런 걸 물어요?”

됐고, 대답이나 해 봐.”

왜 사귀긴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사귀고 있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더 바라는 거예요?”

뭘 바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후타쿠치의 발이 불만스럽게 까닥이기 시작했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요.

 

“... 그냥?”

예에. , 이제 가요 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챘다. 빨리 가자며 그대로 당겼지만 탁, 하고 카마사키가 팔을 뺐다. 후타쿠치가 아연한 표정으로 뿌리쳐진 제 손을 보다 다시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살풋 찌푸려졌다.

 

아니, 잠깐만. 그냥이라고? 그냥 사귀는 거야?”

왜 자꾸 물어요, 진짜. 이제 와서 왜,”

너 날, 좋아하긴 해?”

 

후타쿠치가 숨을 삼켰다.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후타쿠치를 지켜 보다 카마사키가 눈을 지르감았다. , 기어코 너는. 역시나 너는.

 

대답하지 못하던 후타쿠치의 얼굴이 눈을 감았는데도 훤히 되살아났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려오는 감각에 카마사키는 조용히 숨을 들이 내쉬길 반복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귀를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내 귀가 고장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좀 덜 아플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잠시였다. 복받치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인내심 덕분인지, 남몰래 감정을 삭였던 보람인지 카마사키는 망설임 없이 후타쿠치에게 진심을 말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전부 고백하는 것을 끝으로 그만두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고백 따위 하지 말고 조용히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냥 헤어질까. 그냥 사귀었던 거니 헤어지는 것도 너한텐 아무 일도 아니겠네.”

뭐라고요? 갑자기 헤어지잔 얘기는 왜...”

 

언젠가 이런 적이 또 있지 않았나? 후타쿠치는 가만히 서서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얘기하는 카마사키를 보다 생각했다. 감정이 허물어진 사람처럼 카마사키의 안색이 창백했다.

 

난 분명 너를 좋아하는데, 아니 갈수록 좋아. 그건 틀림없어. 근데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으면서, 점점 힘들다.”

 

그만하고 싶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너도 날 딱히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잖아.”

 

사실이다. 자신은 딱히 카마사키 씨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카마사키 씨가 고백해 왔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했고, 더 이상 술래잡기 하고 싶지 않아 사귀자고 말했었다. 내가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된 줄 알았다.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마주 대할 줄 알았다.

 

나 같은 베타보다 더 좋은 사람 수두룩하잖아. 여자인데다 오메가고, 네 이상형에 맞는 그런 사람 아주 조금만 둘러봐도 여럿 있고. 어차피 언젠가는 너도 우성 오메가를 만날 테고.

 

서로 각인할 수도 있고, 페로몬을 맡을 수도 있고, 굳이 억제제를 챙겨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만날 거잖아. 카마사키가 말을 잇다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카마사키의 하얗게 질린 뺨이 떨리고 있었다.

 

카마사키 씨,”

맞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한가?”

잠깐 말을,”

... 난 네가 아니면 안 되지만, 넌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지. 상관없잖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을 끊어버렸다. 듣고 싶지 않는다는 듯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는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을 나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나간 뒤에도 라커룸에 남아 카마사키가 했었던 말을 곱씹었다.

 

이별은 낯설지 않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왔던 만큼 헤어짐을 겪어 왔다. 후타쿠치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기도, 상대방이 그러기도 했다.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후타쿠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지 않았다. 언제나 시원하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하고 보내 주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헤어지자 했던 여자가 오히려 화를 내기도 했지만 후타쿠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하기때문에 사귄 게 아니었으니까.

 

카마사키 씨와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름없이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다. 그렇기에 헤어지자고 말한 카마사키 씨의 말도 시원하게 납득하고 보내줬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마사키 씨의 말을 들으면서 후타쿠치가 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는 지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저, 창백하게 질린 카마사키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싶었다. 자신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모르고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카마사키의 양 손가락을 잡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그 뿐이었다. 그냥 닿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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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혹시 날 좋아해요?’

 

카마사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눈치 챈 뒤부터, 후타쿠치는 이따금 묻고 싶었다. 저 어색한 표정이나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신기했다. 카마사키 씨가 나를? 어쩐지 최근 이상하다 싶었더랬다. 점점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하더니 같이 있을 때면 좀처럼 집중하질 못했다. 왜 그러나 싶었지.

 

 

며칠 전 배구공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카마사키 씨는 바닥에 나뒹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연습이 중단되었고,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는 이유로 카마사키가 깨어날 때까지 후타쿠치가 남게 되었다.

 

자신을 보러 왔다는, 점심시간에 잠깐 보았던 타카하시라는 여자도 깜짝 놀란 얼굴로, 카마사키 군 괜찮겠지? 하며 은근히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얼굴이나 몸매도 꽤 취향에 맞았고 오메가 페로몬 또한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평소라면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했지만 여자는 눈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같은 반 남자애를 걱정하는 척하며 후타쿠치의 옆에 앉아 대놓고 쳐다보면서 시덥잖은 질문만 늘여놓았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대충 대답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놓고 꺼지라 했다.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울컥한 얼굴을 하고 나갔지만 후타쿠치는 코웃음만 나왔다.

 

여자는 여러모로 자신과 닮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세는 다를지라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은근히 깔보고 우러러보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 딱 그래 보였다. 보아하니 오메가인데다 예쁘다고 이전부터 주변에서 치켜세워졌을 게 뻔했다.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동족은 동족을 알아보기 때문인지 후타쿠치에게는 타카하시의 가식이 너무 잘 보였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눈치 없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 타쿠, .’

 

왠지 불쾌한 마음이 이는데 카마사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혹은 누군가를 쫓는 듯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더니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이름만 절박하게 불러댔다.

 

카마사키 씨?’

‘...타쿠, . 후타,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 일어나 봐요.’

아니, 아니야...’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 씨!’

 

울먹이는 목소리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후타쿠치는 결국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어 카마사키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카마사키의 몸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떨렸고, 눈이 떠졌다. 아주 짧은 순간,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이 멍하니 흔들리더니 고인 눈물이 흘렀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이기에 눈물까지 흘리며 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카마사키의 눈물을 훔쳤다. 멍하니 천장만 보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했다. 이상하게 울컥했다.

 

카마사키는 악몽을 꿨다며 멋쩍게 둘러댔다. 꿈을 꾸다 운 게 쪽팔렸는지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는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악몽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불렀나싶어 물어봤지만 카마사키는 당황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카마사키의 빨갛게 단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잠꼬대까지 한 줄은 몰랐겠지, 후타쿠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카마사키는 입을 꼭 다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하여간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카마사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이 흔들렸고, 당황하거나 궁지에 몰릴 때면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묘하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게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카마사키는 좀처럼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이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똥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게 불쌍해 보여서 이마를 적신 땀을 닦아주니 별안간 카마사키가 손을 후려쳤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얼굴 표정이나 눈빛, 행동과 말투 등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허겁지겁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쳐다보다 다시 한 번 카마사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단단하게 뻗어 있는 목덜미 뒤쪽,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곳을 만지자 아까보다 격한 반응이 나왔다. ,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니 카마사키의 몸이 발작하듯 뛰었다. 귓불부터 천천히 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차마 후타쿠치한테 변명도 못하고 부산스럽게 옷을 입더니 자신을 내비 두고 도망쳤다.

 

생각해보면 미심쩍게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흩어진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기분에 후타쿠치가 미소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 있지만, 카마사키 씨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저 반응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관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를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카마사키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마음을 꼭꼭 숨겨둘 가능성도 있었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씨가 고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와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은밀하게 카마사키를 떠보았다. 자꾸만 도망가는 시선을 굳이 따라가 얼굴을 마주하거나, 은근슬쩍 허리께나 등을 터치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평온했던 얼굴에 슬며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한 동안은 좋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는 카마사키의 반응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볼 때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쯤 나한테 고백할건데?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 해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까짓 거 한번쯤은 받아줄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마음을 숨겼다. 이쯤 되니 카마사키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괜히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이 여자 내 타입이네.”

난 단발머리.”

여자는 생머리가 진리 아니냐. 긴 생머리 찰랑거리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나도.”

 

연습이 끝나고 누군가 들고 온 잡지를 두고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단발머리가 취향이네, 긴 머리가 취향이네 실없는 소리가 오고 갔다. 후타쿠치도 슬쩍 끼어들어 잡지를 살펴보니 길거리 미남미녀 특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지만 절대 마주칠 일이 없는 예쁜 여자들이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드물게 관심을 보이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후타쿠치도 이런 거에 관심이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당연히 관심 없지, 멍청이들아.

 

후타쿠치도 이 중에서 좋아하는 타입 있어?”

이딴 잡지에,”

, 뭐 보고 있냐. 다들?”

 

잠시 감독에게 불려갔었던 몇몇 2학년들이 라커룸에 들어오다 한 군데에 모여 있는 1, 2학년들을 보고 뭐야, 뭐야 하며 다가왔다. 이상형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에 다들 오오~하며 후타쿠치의 손에 들린 잡지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뭐야, 후타쿠치. 너도 이런 거에 관심 있었냐? 그래서, 네 눈엔 누가 제일 예쁘냐?”

... ...”

뭔데 모여 있어?”

이 사람이 제일 취향인데요.”

 

카마사키를 발견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아무 사람이나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마사키의 시선이 후타쿠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역시 후타쿠치가 보는 눈이 있네. 여자는 자고로 하얗고, 작고 귀여워야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었군.”

...”

 

별 생각 없이 찍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마사키 씨와는 정 반대였다. 하얗지도 않고, 근육맨인데다, 귀엽지도 않다.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보다는... 뭐 굳이 말하자면 가학성을 자극하는 타입이지. 콕 찌르고, 휘두르고, 괴롭히고 싶은 그런 사람.

 

카마사키, 너도 볼래?”

, 그래.”

내가 볼 땐 카마사키 취향은 딱! 딱 이 사람이야. 어때?”

 

누군가 긴 머리의 청순한 타입의 여자를 가리켰다. 내 주변에도 카마사키랑 비슷한 친구가 있는데 걔가 이런 취향이라며 옆에서 조잘대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조용히 잡지를 읽어보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형이 그렇긴 하지. 신기하네, 딱 알아맞혔어.”

내 말이 맞지? ~ 나도 참 보는 눈치가 있다고.”

 

긴 머리에,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원피스에 구두만 신고 다닐 것 같은 이런 여자가 취향이라고? 미녀 부분을 지나 미남 부분을 넘겨보던 카마사키한테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빼내었다.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가리켰던 여자를 확인했다.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카마사키 씨가?

 

, 나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러냐.”

카마사키 씨도 참 꿈이 크시네요. 이만한 여자가 카마사키 씨를 만나줄 리가 없잖아요.”

이게 또 가만히 있는데 시비를 털어. 그래, 꿈이니까 크게 꾼다. 됐냐?”

그럼 꿈 깨요!”

냅둬, 뭔 상관이야. , 마저 보게.”

 

괜히 짜증나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던졌더니 카마사키가 요령 좋게 잡아챘다. 확 맞아버렸으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반사 신경은 좋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후타쿠치가 가버렸고, 그 모습을 카마사키가 잡지에 시선을 고정하던 눈을 들어 슬쩍 쳐다보았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을 내는지 옷을 갈아입는 후타쿠치의 등이 불끈거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근육이 오밀조밀 짜여있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감상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휘휘 젓고 잡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미녀 부분을 넘기고 미남 부분을 보는데 다들 잘생기긴 했다. 확실히 기자가 센스가 좋은지 사진도 잘 찍었고 잘생긴 사람들만 엄선한 게 티가 났다.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딱히 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게이라면 이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겠지.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이 몇몇 눈에 띠었다. 우스운 건, 그런 사람들한테 눈이 가다가도 그 사람들과 후타쿠치를 비교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 이 사람은 후타쿠치랑 머리 모양이 비슷하네. 저 사람은 후타쿠치보단 키가 좀 작고, 눈매도 다르고. 또 저 사람은 후타쿠치랑 닮긴 했지만 분위기가 틀려. 몇 번을 그러길 반복하다 카마사키는 잡지를 덮어 아무에게나 넘겼다. 누굴 봐도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만 눈에 보였다.

 

방금 전에는 청순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대충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잡지에 나온 여자들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안 갔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긴 했다. 긴 머리에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여자. 그런 여자들을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후타쿠치가 가리켰던 사진에만 신경이 쏠렸다. 결코 내가 후타쿠치의 상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후타쿠치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혹시라도 나와 공통점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자신과 공통점은 사람인 것 말고 없을 정도로 정반대였다. 작고, 귀여운 그런 여자. 나한테는 정말 가망이 없군.

 

카마사키 씨. 집에 안 가요?!”

 

카마사키가 우울함에 빠질 새도 없이 후타쿠치가 옷을 다 갈아입곤 다가왔다. 멍하니 앉아있던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카마사키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민망하게시리 후타쿠치는 그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마사키를 구경했다.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되었지만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최대한 빠르게 옷을 입었다. 또 근육 키우는 운동 했어요? 날이 갈수록 가슴이 커지잖아요, 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 후타쿠치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오늘은 무슨 일 없냐? 금요일인데.”

별로 없는데요. 왜요.”

그냥, 요즘은 매일 같이 하교하네. 작년에는 여자, 친구랑 만나기도 했잖아.”

 

티셔츠 위에 저지를 겹쳐 입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요전번에 타카하시가 물어봤을 때부터 궁금했었던 거였다. 없는 눈치로 살펴본 결과 지금은 후타쿠치에게 여자친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달라지곤 했으니까. 선후배 사이라면 이런 거쯤은 궁금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카마사키는 태연하게 가방을 정리하는 척 했다. 괜히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꺼내서 라커에 정리하다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반면 후타쿠치는 꾀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카마사키의 등을 관찰했다. 깜빡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요란하게 가방을 뒤적이는 모습에 그냥 스치듯 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 그런 척 해보이더니, 결국 아까부터 자신의 여자 취향이라든가 여자친구의 유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자신에 관련해서는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은근 심술이 나 장난을 쳤다.

 

주말이 있잖아요. 설마 제가 여자친구가 없겠어요?”

“... ?”

 

건전지가 다 된 시계처럼 똑딱, 하고 핸드폰을 집으려던 카마사키의 손이 한 순간 멈췄다. 속으로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꽤 컸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 그렇구나. 형식적인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에 자신의 손끝이 가방 속에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러냐, 병신같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까 저지를 껴입길 다행이었다. 카마사키는 주머니에 주먹을 쥔 손을 처넣었다.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잘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가자.”

... .”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조용했다. 사실이 아니길 내심 바랐던 게 사실로 밝혀져 기분이 가라앉은 카마사키는 둘째 치고, 후타쿠치도 그런 카마사키에게 실없는 장난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실 후타쿠치는 라커룸을 나올 때부터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적어도 카마사키가 당황한 얼굴을 보이거나 놀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태연하게 웃어넘기려고 노력한다던지.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래? 하고 싱거운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처럼 태연함을 가장하려 노력했다면 몰라도, 확연히 생기를 잃은 얼굴은 우울함을 내비치고 있어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떠보기가 망설여졌다. 밀고 당기며 장난치다 똑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같았다.

 

괜히 창밖을 구경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흘끗 카마사키를 보니 아까부터 쭉 무표정이다. 약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카마사키는 평소에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었다. 후타쿠치와 치고 박고 싸울 때는 흥분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배구를 할 때는 크게 웃기도, 힘들어 하기도 분해하기도 했다. 툭 건들면 파르르 반응하는 미모사처럼 건드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무표정은 영 어색했다. 차라리 침울해 하는 얼굴을 하던가,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후타쿠치는 공연히 아무 죄도 없는 카마사키를 탓했다.

 

그게 죄책감이라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에게 아무 말이나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마사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거의 다 와갔다.

 

나 먼저 내린다. ...... 주말 잘 보내라.”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하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카마사키가 말했다. 평범하게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이었지만 숨겨진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자친구랑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덜컹, 순간적으로 버스가 과속방지턱에 걸렸는지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후타쿠치의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할까 말까 곱씹었던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끼익, 하고 버스가 멈추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카마사키는 다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후타쿠치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오르내리는 얼굴이 익숙했는지 운전사가 내리지 않고 서 있는 카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카마사키 대신 후타쿠치가 고개를 저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지금 여자친구 없다고요.”

... ? 아까는 있다고 했잖아.”

 

네가 주말에 만난다며, 카마사키가 멍하니 후타쿠치를 내려 보았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후타쿠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카마사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 사뭇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런 거짓말을... 왜 했는데?”

그냥요. 굳이 말하자면 장난? 재밌으니까?”

뭐가 재밌다고,”

카마사키 씨 놀리는 게 재밌으니까요.”

“... , 하나도 안 재밌어.”

 

카마사키가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땅 끝까지 뚫을 기세로 가라앉았던 기분을 누가 확하고 끌어올린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려 했다. 카마사키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오른쪽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얘가 진짜 뭐라고 요 몇 개월을, 하루 종일 수 십 번도 넘게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지. 진짜, 나 진짜 어떻게 하냐.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후타쿠치가 진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냐.

 

요전번 꿈에 나왔던 타카하시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 때는 꿈에서 깨자마자 후타쿠치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지나갔었지만, 그 후 반에서 타카하시를 마주칠 때마다 멈칫하곤 했다. 답지 않게 여자애를 상대로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본능적으로 마음이 뒤틀렸다. 또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보러 올까, 만약 고백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다행히 무슨 일인지 그때 이후로 타카하시가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럴까 두려워했다. 떳떳하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은 타카하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정작 후타쿠치는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혼자만 애달파하는 게 싫었다. 그냥 조용히 사드라든다면 좋겠다고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하지만 카마사키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타쿠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마음은 차츰 커져만 갔다.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몇 번 맡아보지 못했던 희미한 체취도 좋았고 언제나 똑바로 직시해오는 다갈색의 눈동자도 좋았다. 빈 말이라도 후타쿠치의 모든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좋아졌고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차라리 싫은 점이 부각돼서 질려버렸다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그냥 저런 애였지, 하고 납득해버리고 만다.

 

... 그냥, 고백해버릴까. 시원하게 차이게.

 

후타쿠치한테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무슨 말이 되돌아올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분명 차일게 분명하고, 기대 같은 건 애초에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해본 적 없기에 차이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예상이 갈 정도다. 그보다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 후타쿠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가 두려웠다. 후타쿠치라면 자신을 경멸하거나 두고두고 약점으로 잡을지도 몰랐다. 싸늘하게 식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아파하는 것도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뭐해요?”

 

고개를 묻은 팔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바로 밑에서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와 눈이 맞았다. 재밌겠다며, 남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얼굴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악마가 깃든 천사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얼굴을 원망스럽게 보다 별안간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후타쿠치. ,”

?”

나 널, ......, 좋아, .”

뭐라고요?”

 

안 되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후타쿠치가 다시 캐물었다. 작아서 안 들렸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카마사키가 입을 달싹거리다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나왔다. 이대로 장난이었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아직은, 도망칠 수 있다.

 

똑바로 얘기하세요, 카마사키 씨. 답지 않게 피하지 마시고.”

 

덫에 걸린 생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다 카마사키가 홀린 듯이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또박 또박 흘러나온 말을 듣고 당황했는지 후타쿠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색하게 입술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카마사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 아니 뭘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내가 널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 .”

“...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원래는, 혼자 마음 정리하려고 했는데. ... 잘 안 되더라.”

“......”

그래서, 내 말은 그러니까... 차라리 차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한 거야.”

 

버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가득 차 미끌거렸다. 미칠 듯 뛰는 심장에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카마사키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달리고 있는 버스가 아니었다면 뛰쳐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마사키는 안절부절 못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고백 따위 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차마 빨리 나를 차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후타쿠치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마사키 씨가 절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 그렇겠지.”

좋아요, 그럼. 사귈까요?”

... 뭐라고?”

 

사귀자고요, 후타쿠치가 재차 말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어리둥절했다. 사귀자는 말이 내가 알고 있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맞나?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아무리 매사에 별 신경을 안 써도 그렇지, 가벼워도 너무 가볍잖아. 혹시라도 아까처럼 거짓말을 치는가 싶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장난으로 고백한거 아니다.”

사귀고 싶어서 고백한 건 아니고요? 카마사키 씨가 사귀자고 해서 사귀자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카마사키 씨야말로 저한테 지금 장난쳐요? 사귀자는데 왜 말을 못 믿어요? 먼저 고백한 건 그쪽 아닌가?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쏘아댔다. 연달아 쏟아지는 말에 카마사키가 어어, 하며 점점 말려들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가? 정말로 사귀자고 말하는 건가?

 

하지만, ?

 

그래서 지금 싫다 이거에요?”

 

격하게 숨을 몰아 내쉬더니 후타쿠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잔뜩 찡그린 눈가가 눈에 띄었다.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찌푸려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싫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상대와 사귀게 된다는데 싫어할 리 없었다. 다만 왜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얘기하는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후타쿠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보고 눈치가 없다지만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마사키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물었던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좋아.”

 

카마사키의 말을 듣자마자 후타쿠치가 이마에 닿은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챘다. 잡힌 손 아래로 순간 뿌듯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저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왕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제쳐 놓아야 했다. 그저 곁에 있을 수 있고, 딱 그만큼만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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