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下)


   

 

한창 출근 시간이 되자 전철 안은 흡사 지옥과 같았다. 꾸역꾸역 전철 안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중간에 자리를 양보하느라 그 틈바구니 사이에 서게 된 후타쿠치는 압사당해 죽을 것 같은 고통에도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학교를 지나쳐가는 방향의 전철에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회사원들이 후타쿠치를 땡땡이치는 양아치처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타쿠치는 다다음 역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오전 719, 그 순간 후타쿠치는 오로지 하나만 바랐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그 집에 카마사키가 있기를.

먹먹해진 귓가에 모니와 씨가 했던 말들이 맴돌았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한껏 자랑을 했다고 했다. 술에 취했는지 감정에 취했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랑하는데, 모니와의 눈에는 카마사키 또한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카마사키가 직접 말한 게 아니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모니와는 재차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지. 그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얼굴이었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은 어떨까. 못 견디게 궁금하면서도 절대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3자가 봤을 때 한 눈에 알아챌 정도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을 그 얼굴이 보고 싶으면서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해버릴 것 같다. 제발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그러지 말았으면 소원했다. 날 향한 게 아니라면 차라리 눈을 가리자. 내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보지 못하게. 나조차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니 그 사람의 눈을 가려야겠다.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작정 뛰었다. 버스로 5분 거리의 카마사키 씨 집까지 가는 데에는 간신히 10분정도 걸린 듯 했다. 집에 몇 시에 나오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회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아직 카마사키 씨는 집에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밭은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올랐다. 지난 수개월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아파트는 그 때와 다름없이 어디는 말끔하고 어디는 낡았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도 이 집에 왔었던 것처럼 낯선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204호에 이르러 후타쿠치는 그 앞에서 잠시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여름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간신히 되돌아왔다.

어느 정도 숨소리가 편해진 뒤 후타쿠치는 벨을 눌렀다. 얇은 문 너머로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예상대로 카마사키는 아직 출근 전인지 안에서 타닥타닥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카마사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기 전, 후타쿠치는 짧게 숨을 들이 쉬었다.

누구,”

넥타이를 매던 중이었는지 카마사키는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후타쿠치가 집 앞에 서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카마사키는 말을 잃고 놀란 얼굴을 했다. 어버버거리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며 후타쿠치는 내심 안도했다. 최악의 경우엔 문전박대 당하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출근 몇 시에 해요?”

? , 8. 아니, 810분 정도까진 괜찮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736분이었다. 적어도 30분은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대답대신 몸을 비켜주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방은 마지막으로 봤었을 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여전한 분위기와 변함없이 카마사키 씨의 체취가 느껴졌다. 괜히 방 안을 둘러보는 후타쿠치의 등 뒤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차라도 줄까?”

어제도 만난 사이마냥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변함없는 건 카마사키 씨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당황하던 얼굴은 벌써 무덤덤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라 후타쿠치는 조금 놀랐다. 카마사키 씨의 성격으로 봐서 이렇게 태연한 모습을 할 줄 몰랐다. 하긴, 그게 뭐가 그리 충격적이라고.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을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는 새삼 실감하는 감정의 차이에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저 넥타이를 매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마사키가 그 모습을 봤을 리가 없었다.

녹차랑 커피, , 아니면 차라리 역 앞에 카페를 갈까?”

아뇨, 됐어요.”

그럼, 그러든지. 그러고 보니 봄고 예선전 끝났다며? 모니와한테 들었어. 이번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갈 수가 없었어. 미안, 준결승전은 꼭 가고 싶었는데.”

직장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선배들도 매번 온 건 아니라서 미안해할 것까진 아니에요.”

그래도 미안했다. 마지막이었잖아.”

별로 카마사키 씨가 안 왔었어도 상관없었어요.”

그야 그랬겠지.”

사실은 몇 번이고 경기장 입구를 확인했었다. 선배들에게 카마사키는 일이 있어서 못 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경기장 곳곳을 헤맸다.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오겠지. 인터하이 때는 몇 번이나 응원하러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오겠지.

하지만 결국 카마사키 씨는 예선 기간 내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가운데 정작 보고 싶은 얼굴은 끝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경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정말 미치도록 그 사람이 그리웠다. 응원이고 뭐고 상관없이 한 번만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마주치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든 좋으니 보고 싶었던 거다. 경기에서 졌다는 분함, 고교 배구가 끝났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이제 이 경기장을 나가야 한다는 씁쓸함이 배가 되었다.

봄고도 끝났는데 요즘은 뭐 해? 진로는 이미 다 정했지?”

궁금해요?”

, 앞으로도 배구 계속 할 건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가는지 궁금하긴 하지. 듣기로 아오네는 추천이 거의 정해졌다면서? 너는,”

제 진로가 왜 궁금해요?”

어딘가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꼬박꼬박 묻고 대답하던 카마사키가 말을 멈췄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흘렀다. 얼마 안 있어 카마사키가 말했다.

궁금해 하면 안 되냐?”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한 그 말의 저의를 알고 있다. 카마사키 씨는 단순히 후배를 신경써주는 것뿐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적당한 관심일 뿐이다.

여자 친구 생기셨다고요.”

?”

모니와 씨가 그러던데요. 카마사키 씨가 제일 먼저 배신할 줄은 몰랐다고, 여자 친구 생긴 게 틀림없다면서.”

무슨, 그런 거 아니야.”

, 아직 사귀는 건 아닌가 봐요? 설마 고백할 타이밍이라도 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카마사키 씨라면 우물쭈물 하다가 분명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텐데.”

.”

연애는 이쪽이 훨씬 경험치가 높으니까, 원하신다면 코치라도 해드릴까요?”

후타쿠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마도 화가 나 있을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수록 가슴이 조여 왔다. 지끈지끈, 아프다.

내가 누구한테 고백하든 누구랑 사귀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침부터 시비 털려고 찾아 왔냐?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나가.”

,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아무 상관없는 거, 씨발, 안다고요.”

너 미쳤냐? 몇 달 만에 찾아와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

잘 지냈어요?”

?”

뜬금없이 묻는 안부에 카마사키가 황당해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니, 하고 부정하며 카마사키의 말을 막았다.

아니, 그냥 대답하지마세요.”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후타쿠치는 가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침묵이 흘렀다. 카마사키는 수그러진 후타쿠치의 뒤통수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칼이 이리저리 뻗쳐 있는 걸 발견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나보다고 납득하려는데 목가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목덜미 언저리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아침에 틀어놨던 날씨 예보가 떠올랐다. 오늘은 땀이 나기는커녕 기침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유난히 쌀쌀한 날씨라고 했었다. 순간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어땠는데?”

……같았어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놓칠까봐 카마사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미칠 것 같았어요.”

…….”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유 없이 화가 났다가 짜증이 났다가,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가. 감정이 마구 널을 뛰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

미쳐가는 기분이에요.‘

미칠 것 같다는 말과는 달리 후타쿠치의 목소리는 사뭇 담담하게 들렸다. 등을 돌리고 서 있어 후타쿠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그랬는데?”

…….”

한동안 왜 안 왔냐?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개무시하고 뻔질나게 찾아오더니. 내가 여자 친구 생겼다는 게 그렇게 놀라웠어?”

그런 거 아니라면서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봐. 왜 이제야 찾아와서 영문 모를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지 대답해 보라고.”

그 여자 좋아해요?”

후타쿠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목소리에는 아직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묻는 걸까.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말하는 바와 목소리가 달라서일까, 그 괴리감에 카마사키는 있지도 않은 여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질 것 같아.”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쿵쿵, 심장이 울리는 소리로 방 안이 가득해졌다. 어느새 나는 후타쿠치를 좋아하게 됐나? 깨닫자마자 그동안 묵혀왔던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한동안 뭘 해도 허전한 기분이었던 원인이 이 때문이었나. 그 순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실에 안도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왜 좋은데요?”

그러니까……,”

…….”

같이 있으면 좋아.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편하고 즐겁고.”

…….”

무엇보다 그냥 자꾸 생각나거든. 눈에 안 보이니 얼굴을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지금쯤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카마사키는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보인 후타쿠치의 모습에 놀라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그저 좋았다.

넌 그런 사람 없냐?”

대답해 봐, 후타쿠치.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그런 사람 없냐고. 그 때 그 마음이 변함없다면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말해 봐. 내가 짐작하는 그대로가 맞아?

있어요.”

누군데?”

. 후타쿠치는 들이키던 숨을 멈추고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언젠가부터 빠듯하게 말아 쥐고 있던 주먹에 손가락이 아려왔다. 하얗게 질린 주먹에 꾸역꾸역 손가락을 펴보지만 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다시금 곱아 들었다. 어딘가에 애써 힘을 주지 않고서는 서 있기가 벅찰 정도로 후타쿠치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후타쿠치를 기다리지 않고 카마사키가 재차 말했다.

?”

후타쿠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카마사키 씨가 잘못 말한 걸거다.

무슨 소리에요?”

그 때 너, 나한테 키스했잖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거 장난이었냐?”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렸다. 후타쿠치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백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나겠지. 몇 년 동안 구질구질하게 혼자 앓아왔던 짝사랑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는 거다. 해피엔딩이 아닌 배드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장난이었다는 거야?”

애매한 대답에 카마사키가 다른 쪽으로 받아들였는지 따지며 물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두려움에 후타쿠치는 순간 망설였다. 장난이었다고 하면 아직은 마지막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여기까지 와서도 늘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찌질한 새끼. 후타쿠치는 스스로를 환멸하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카마사키 씨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벅차게 차오르려는 숨소리가 카마사키 씨의 귀에 들리지 않기를. 후타쿠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왜 허구한 날 오냐고 물었었죠. 좋아서 그랬어요.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별 시덥잖은 핑계를 갖다 대가면서 카마사키 씨를 만나러 간 거였어요.”

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후타쿠치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코끝이 찡해지고 있었다. 씨발, 꼴사납게 우는 건 절대 안 되는데.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는 눈이 아려올 정도로 눈에 힘을 줬다. 있는 힘껏 힘을 준 덕분일까, 다행히 촉촉하게 젖어가던 눈가가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코끝은 찡했지만 마른 눈가에 후타쿠치가 안도했을 무렵 내내 침묵하던 카마사키가 입을 열었다. 방금 후배 남자에게 고백 받은 사람치고는 목소리에 어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예요.”

그래서 넌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고. 이렇게 다 체념했다는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

…….”

그 날 이후로 벌써 4 개월 남짓 지났다.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냐고.”

공백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든 말해보려 했지만 후타쿠치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과 그 때의 상황을 비롯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름날의 자신과, 배구라는 핑계로 모든 걸 뒤로 했던 4개월간 나는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카마사키 씨의 말처럼 뭘 하고 싶은 걸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짝사랑에 갈피를 못 잡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카마사키 씨의 둔한 신경을 탓하며 아무 말도 못하는 겁쟁이였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노력해왔다고 자위했지만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 그 모든 것은 허사일 뿐이었다. 정작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면서 왜 내 마음을 알지 못하냐고 떼를 쓸 뿐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원인을 카마사키 씨에게 덮어버리고 이것 보라며, 가능성 따위 1%도 없다며 가망 없는 현실을 자조했다. 뭣 하나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포기해버린 것은 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경멸해요?”

…….”

남자를,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를 경멸하고 있냐고요.”

아니.”

그럼.”

…….”

그렇다면.”

후타쿠치는 해야 할 말을 고르는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지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 후타쿠치의 뒤에서 카마사키는 아래로 흐르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 사이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본래의 피부색보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들에 카마사키는 애가 탔다. 모든 게 끝났다는 어조로 진심을 고백한 후타쿠치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전부 체념하고 있을까.

초침이 시계를 한 바퀴 빙 돌았을 무렵 후타쿠치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좋아해도, 되요?”

…….”

난 그냥, 카마사키 씨를 좋아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수도 없이 그만두고 지워버리려 했는데 결과는 항상 똑같았어요. 뭘 어떻게 해도 좋아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이제는, 이대로 계속된다면 이제,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요. 그냥, 내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한없이 계속.”

…….”

그러다보면 시간에 닳고 닳아서 감정이 문드러져 없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기 전에 언젠가 카마사키 씨가,”

마른 헛기침을 하며 후타쿠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콜록,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후타쿠치의 뒤통수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 여전히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날 생각해줄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

정말 사소한 거라도, 아무 것도 아닌 흔적에서 나를 생각하고 신경 써주었으면.”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불시에 돌려지고 짧은 숨을 들이키는 후타쿠치의 입술에 카마사키가 닿았다. 꾹 다문 입술이 아주 잠깐 부딪혔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후타쿠치는 시공간이 멈춘 듯했다. 꿈인가, 잠시 헤매던 시야에 인상을 찌푸린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보였다. 다물다 못해 살짝 즈려물고 있는 입술은 빨갛게 달아올라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아랫입술에서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키스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서툰 입맞춤의 흔적이었다.

, 엄청나게 둔해서 네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네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돌려서 말하는 것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아.”

알아요.”

너도 알다시피 너랑 나는 싸우지 않을 날보다 싸울 날이 더 많을 거고. 대부분 다 네 탓일 테지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

난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널 좋아하지 않아.”

…….”

그래도 괜찮아?”

카마사키는 마지막 말을 할 때만큼은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카마사키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후타쿠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후타쿠치가 무슨 수를 써도 못 잊을 만큼 좋아한다면, 자신은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후타쿠치가 그 격차로 상처받는 게 보기 싫었다.

넌 내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아. 솔직히 남자에다 후배인 널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네가 키스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

널 만나지 않았던 4개월 동안 난 계속 너에 대해 생각했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신경 쓰였으니까.”

쌀쌀한 11월이다. 밖은 손끝을 시리게 할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고, 집 안에도 어렴풋이 한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마사키는 이마에 살포시 땀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로 꼼지락거리게 되는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 손바닥에도 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널 좋아한다고는 하지 않아. 그래도 난, 그동안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

널 좋아할 것 같아, 후타쿠치.”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카마사키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감정 앞에 금방 막 자란 조그만 감정을 들이대기가 벅차고 아까웠다. 아직 다 자라지는 않은 감정이 만개할 즈음, 후타쿠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 또한 후타쿠치를 좋아할 때, 그 때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좋아해도 되겠냐고 절절하게 묻는 후타쿠치의 입장에선 희망고문이라도 하는 거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지금은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바라건대 후타쿠치가 거절하지 않기를.

나랑 사귈래?”

카마사키의 신경이 온통 후타쿠치 쪽으로 흘렀다. 심장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며 자신이 이만큼 두근거린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초조함에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다. 머리 한 편에 출근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는 듯 했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째깍째깍, 얼마나 초침소리를 들었을까. 카마사키가 슬쩍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려는 순간 미동도 없던 후타쿠치가 손을 들었다.

오른쪽 가슴에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조금씩, 천천히 손을 들어 마주 닿은 몸을 끌어안았다, 후타쿠치가 그랬듯이. 귓가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타쿠치가 얼굴을 묻고 있는 왼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일 뿐, 후타쿠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어깨에도 눈물 흔적은 남지 않았다. 좋아해요. 나직하게, 그러나 억누른 목소리는 한 마디만 반복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는 가만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한 번, 두 번, 후타쿠치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흔적이 남았다. 비로소 사랑이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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