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진단메이커 연성

2017. 2. 28. 15:09 from

트위터 진단메이커 연성소재 활용/뭔지 모를 썰체/짧음


[후타카마] 진단메이커 연성

> '당신이 툭, 깨뜨리기 전에 난 이미 깨질 만큼 깨졌다.'

> 짝사랑 소재, 후타>카마



카마사키가 후타쿠치 절대 이성으로 안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후타쿠치가 고백해와도 매번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 않고 오히려 미쳤냐고 정도껏 하라고 그랬으면 좋겠다.

후타쿠치가 백번 천번 말하고 진짜라고, 진심이라고, 절대 장난같은 거 아니라고 말해도 카마사키가 귓등으로도 안 들었으면. 후타쿠치가 속터져서 나중엔 화내고 짜증내도 카마사키는 오히려 얘가 왜 그러나 생각할듯.

카마사키는 남자가 연애 상대가 될 것이라고 요만큼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고, 딱히 게이에 대해서 혐오하거나 그런건 아니고 애초에 그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 받아들여본 적 없는? 사람이었으면.

한마디로 말해서 무관심한거. 그리고 딱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다는 사람인걸로. 거기다 대상이 후타쿠치니까 '그럴 리 없다'라고 단정해버릴 것 같고. 후타쿠치는 속터지고 원망스럽고 화나고 암튼 펄쩍 뛰는데 할 말이 없다.

애초에 후타쿠치가 지금까지 카마사키한테 해온 게 있으니까. 뭐 장난삼아 그런거였겠지만 어찌됐던 자기가 카마사키를 좋아한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게 후타쿠치 입장에서도 좀 이해가 가고, 그럼에도 정도가 있지. 이만큼 말했으면 좀 알아달라는 심정일듯.

근데 카마사키가 매번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서 끝내 졸업할 때까지 내 마음 하나 전달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대답 하나 듣지 못했으면. 마지막까지 계속 그런 카마사키한테 상처받는 후타쿠치 보고 싶다.

후타쿠치는 남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상처받을 사람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계속 거부당하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반복되면서 상처가 쌓일 듯. 그러면서도 성격상 카마사키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행동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후타쿠치의 태연한 모습이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을거고. 무튼 후타쿠치는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엄청 상처받고 그게 스스로 느끼기보다 심각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자기 속마음을 다른 사람한테 쉽게 내비치지 못하게 된다던가. 좋아하는 감정에 신물났으면. 그렇게 짝사랑에 남몰래 속썩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이후로도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하겠는거.

내가 먼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거에 두려움이 커져서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그런 자신을 눈치 못 챘으면... 그냥 난 그런가보다 싶은거. 그러다 사랑같은거 나랑 안맞나 생각하겠지.

그리고 나중에 배구부 동창회같은데서 카마사키랑 후타쿠치 재회하면, 카마사키는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것 없는 얼굴로 웃으면서 인사할듯. 후타쿠치는 그 얼굴보고 기분 확 나빠지겠지. 고등학교 때 열나게 차였던거 생각나는데 정작 찬 본인은 태평하고 자기가 얼마나 상대방한테 상처를 줬는지 1도 모르는게 분할 거다.

그래도 후타쿠치는 그런 감정 표현 안하고 예전처럼 카마사키한테 틱틱대면서 인사하고 놀리고 그러겠지. 생각보다 마음이 편한 것에 안도하고.

별로 그 때 이후로 카마사키에 대한 감정을 곱씹어본 적은 없기에,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정말로 그렇게 좋아했던 마음이 이젠 없구나 알게될 듯. 그땐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다는 것에 왠지 마음이 복잡해지겠지.

별거 아니구나, 감정이 사그라든다는 거. 허무한 마음에 후타쿠치는 동창회 내내 남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씁쓸한 마음일 듯. 이상하게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데 카마사키 쪽은 시선 한 번 주지 못하고 그렇게 동창회가 끝나겠지.

반면 카마사키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후타쿠치 얼굴에 반가움을 느꼈을 거. 취업하고 난 뒤로는 제대로 얼굴 보는 건 처음이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요즘 뭐하냐 근황같은거 묻고 싶은데 후타쿠치랑 눈이 안마주치는거.

말을 걸어도 대충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그러다 결국에는 자리를 옮기는 것에 카마사키는 이상함을 느끼겠지. 예전에도 이렇게 서먹했었나,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전혀 짐작도 못하겠어서 동창회 내내 딴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

1차에 먼저 돌아간 후타쿠치와 달리 카마사키는 2차, 3차까지 남을 듯. 내내 딴생각하면서도 계속 술 마시고, 마시다 다들 취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다들 하나씩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거지.

사소하게는 배구하다가 있었던 일들부터 라커룸에 누가 야한 잡지를 갖고 왔었다는 이야기를 거쳐 누가 옆반의 누구를 좋아했었다는 이야기를 다들 낄낄거리면서 폭로하는거.

카마사키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취해 듣겠지. 그러다 누가 후타쿠치 얘기 꺼내라.

남들보다 월등하게 눈에 띄었던 후타쿠치에 대한 에피소드가 끝이 없이 이어지겠지. 옆학교에서부터 상급생, 후배까지 고루고루 고백받았다는 이야기, 이벤트 날이 되면 혼자 들고갈 수 없을 정도로 양 손에 선물로 가득했다더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업할 때까지 아무와도 사귀지 않았지, 누군가의 말에 다들 맞아, 그래 하며 긍정하는거. 카마사키는 그랬구나, 의외인데? 생각하는데 그 중에 1년 후배인 애가 말하는 거다.

모르셨냐고, 우리 3학년 올라가서부터 알게 됐는데 후타쿠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누가 고백해도 다 거절하고 그랬다고, 한동안 그 상대방이 누군지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고 말하는거. 그 말에 다들 놀라워 하겠지.

카마사키도 예외없이 후타쿠치의 의외의 면에 오, 그래? 하는데 후배가 또 말을 이었음.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참 대단하다고, 듣기로는 후타쿠치가 그렇게 고백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고 거절하기 일수였다더라고요.

결국 후타쿠치가 졸업할 때까지 그 사람이 누군지 다들 알아내지 못했고, 결국 후타쿠치는 몇 년동안 짝사랑했다는 이야기에 다다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오오~ 그러면서 의외인데? 하고 말하는거. 

순정파였네, 그런데 후타쿠치가 좋아했다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고, 어떻게 사람 고백을 듣지도 않고 거절하냐고, 냉정한 사람이네 라고 너무하다고 하는거.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고 다들 눈을 빛내는데  카마사키 혼자 얼굴 새하얘져라.

혹시 그 때 후타쿠치가 귀에 닳도록 말했던 그게 진짜, 진심이었나? 카마사키는 완전히 패닉에 빠지겠지. 후타쿠치가 했었던 말들과 행동, 표정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거다. 그 때는 눈치채지 못했었던, 미세하게 부들거리던 목소리나 고개를 돌릴 때 언뜻 보였던 찡그린 얼굴이나,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화를 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는거.

그렇게 멍하니 과거를 되돌아보다 카마사키는 다시금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해버린다. 설마 후타쿠치가 나를.

그렇게 혼자 혼란에 빠진 카마사키 옆에서 처음 말을 꺼냈던 후배가 아, 맞다! 하고 놀라운 걸 발견했다는듯이 말했음. 그리곤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인데, 하고 입을 손으로 가린채 비밀을 터놓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음.

저만 아는 이야기인데, 그 상대방이라는 사람 아마 한 학년 위의 3학년이었던 것 같더라고요. 3학년 졸업식 끝나고 우연히 후타쿠치를 만났는데 완전히 넋이 빠져서 걸어가더라고요. 그게 겉으로는 멀쩡해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바로 옆에서 인사하는데도 못 들었는지 스쳐지나가던데요. 이상하다 싶어서 뒤를 따라갔더니 혼자 라커룸에 들어가더래요? 연습도 없는 날이었는데. 근데 조금 있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봤더니...

글쎄 혼자 눈물 뚝뚝 흘리면서 울다가 갑자기 발로 바닥을 쿵쿵 치고 비품 던지고 막... 완전 난리가 아니라서 말리려고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후배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빌어먹을 새끼, 이제 안녕이라고. 끝이라고 안좋아 할거라고 그러더라고요.

무슨 뜻이겠어요? 으스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단한 진실을 밝혀낸 사람처럼 후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음. 졸업하는 3학년 중에 한 명이었겠지 않겠냐며, 근데 후타쿠치도 참 아무리 차인 사람이라도 그렇지. 빌어먹을 새끼가 뭐랍니까, 안 그래요? 여자한테.

후타쿠치가 어지간히 그 사람을 좋아했나보다고 놀라워했음. 카마사키 빼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카보쿠]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0) 2017.05.04
[아카보쿠] 청포도  (0) 2017.03.25
[후타카마] 끝  (0) 2017.01.17
[후타카마] 너의 이기  (4) 2017.01.11
[야마츠키] 거스러미  (0) 2016.12.24
Posted by 005500 :

04.

  

 

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후타쿠치가 다가올 때마다 눈이 가고, 손이 부산스러워졌으며, 심장이 반응했다. 시끄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눈에 띨까 카마사키는 괜히 가슴팍을 확인하게 되었다. 되도록 후타쿠치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 카마사키는 스스로의 행동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행여나 너무 쳐다보지는 않았을까 일부러 딴 곳에 시선을 두고, 유독 후타쿠치의 목소리만 크게 들려도 신경 쓰지 않으려 바쁘게 움직였다.

 

불현 듯 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카마사키는 조용히 마음을 접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표현한다거나, 고백한다는 일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그야 결말이 눈에 선하니까. 자신은 평범한 베타인데다, 심지어 예쁘거나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남자고 심지어 후타쿠치와는 만날 때마다 싸웠다. 반쯤 장난식이어도 이런 자신이 후타쿠치에게 연애의 대상이 될 리가 없다. 뭐가 아쉬워서 주변을 맴도는 예쁘고 매력 있는 오메가와 여자들을 두고 후타쿠치가 나를 봐 줄까. 짝사랑이라면 조금은 기대하고 설렐 법도 하지만 상대가 상대고,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아예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것과 달리 한 번 깨달은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아무리 카마사키가 다른 곳에 신경 쓰려 노력해도 여전히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놀리러 다가왔고, 게다가 별 이유 없이 거절하면 예전처럼 짜증내고 화낼까 무서워 집에 같이 가자는 말도 거절하지 못했다. 말 하나, 행동 하나, 심지어 시선 하나에도 하릴없이 휘둘렸다. 보이면 보여서 좋았고, 목소리가 들리면 들려서 좋았고, 그저 주변에 후타쿠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마사키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후타쿠치와 헤어져 집으로 향할 때면 몇 번이고 그만두자, 어쩌려고 그러냐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찌나 가벼운지 밤중에 실없이 도착한 라인 하나에도 카마사키는 설렜다. 설레고 기분이 고양되면서도 그런 자신이 짜증나 견딜 수가 없었다.

 

미쳤나 봐.”

 

정말 어떡해야 하지. 포기하기는커녕 점점 마음이 커져가 초조해진다. 이러다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대체 나는 왜 후타쿠치를 좋아해서 이런 생고생을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이렇게 마음을 꼭꼭 숨기려고 아등바등 하는 일도, 가망 없는 짝사랑에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짝사랑 포기하는 법]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봤더니 꽤 글이 많았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고백하다 차였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경우, 그리고 고백도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며 좋아하는 경우. 수많은 글들의 제목을 훑어보다 짝사랑을 포기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글에 댓글이 가장 많이 달려 있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가망이 없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시간이 해결해주리란 믿음으로 참아 내거나. 둘째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니, 상대에게서 떠나거나.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절대적이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려고 결심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을 잃지 않고 인내심으로 극복하는 것뿐이다.’

 

전학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교에서 종일 마주치니 두 번째 방법은 불가능하다. 졸업하려면 아직도 1년 하고도 반이나 남았고, 그때까지 후타쿠치를 짝사랑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으라고...

 

짝사랑을 포기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

?!”

 

등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와 핸드폰을 가져갔다. 카마사키는 기겁하며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지만 상대의 손이 더 빨랐다.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카마사키는 머리가 하얘졌다.

 

, 핸드폰 내 놔. 후타쿠치.”

헤에. 카마사키 씨 설마 짝사랑 중?”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을 이리 저리 피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첫째, 시간이 해결해 준다. 둘째, 멀어진다. 셋째, 어이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 내 놓으라고! 죽는다!”

아하하. 얼굴 새빨개졌어요.”

닥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금방이라도 목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다. 카마사키는 급하게 핸드폰 화면을 끄고 후타쿠치를 지나치려 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카마사키의 마음을 알고 그러는지 아닌지 후타쿠치를 그 뒤를 졸졸 따라왔다.

 

설마 순진하게 그런 시답잖은 글을 믿는 건 아니죠?”

믿든 말든.”

그래서 카마사키 씨는 몇 번? 첫째? 둘째?”

신경 꺼라. 제발.”

, 설마 셋째는 아니겠죠.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고요?”

 

아주 제대로 걸렸다. 카마사키는 입을 다물고 후타쿠치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빨리 화장실이든 교실이든 후타쿠치를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후타쿠치는 뻔뻔스럽게 2학년 교실에까지 들어와 카마사키의 앞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이면 매점 근처에서 죽을 치는 앞자리 하마다가 원망스러웠다. 카마사키는 앞에서 뒤를 돌아보고 앉은 후타쿠치를 못 본 척 책을 꺼냈다. 펼치자마자 후타쿠치의 팔이 탁 놓여졌다.

 

네 교실 안 가냐?”

점심시간이잖아요. 간만에 재밌을 것 같으니까 얘기 해봐요.”

“... 무슨 얘기.”

무슨 얘기겠어요. 카마사키 씨 짝사랑 이야기지. 설마 카마사키 씨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을 줄이야. 대체 누구에요? 같은 반? 설마 지금 근처에 있어요?”

... 경 끄라 그랬지.”

, 진짜로 근처에 있어요?”

 

후타쿠치는 대놓고 반을 둘러보며 짧은 머리? 긴 머리? , 혹시 저 여자? 하고 카마사키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다 한 곳을 빤히 쳐다보더니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 저 사람이 여기선 제일 낫네. 저 여자에요?”

 

저절로 후타쿠치의 시선을 따라가니 같은 반 타카하시였다. 긴 머리에 피부가 비칠 듯 새하얗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귀엽다며 반 남자애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여자애였다. 게다가 오메가였다. 카마사키는 혹시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후타쿠치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타쿠치는 턱에 손을 괴곤 타카하시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미세하게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카마사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정도면 카마사키 씨가 포기할 법도 하네요. 나 정도는 되야... , 쳐다본다.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데?”

“......안 가냐?”

화났어요? 저 여자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죠?”

화 안 났으니까, 이만 가. 점심시간 다 끝나간다.”

 

후타쿠치의 팔을 툭 밀어내고 책을 펼쳤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가장하며 카마사키는 책을 팔락팔락 넘기며 집중하는 척 했다. 후타쿠치의 시선이 얼굴에 닿아 긴장하기가 무섭게 종소리가 울렸다.

 

저 가요.”

.”

 

책을 보며 말했지만 처음부터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마사키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입술을 깨물었다. 후타쿠치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교실을 나가고 나서야 카마사키는 잊은 숨을 밭아 내었다. 답답함에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틀어 보니 타카하시였다. 수줍은 얼굴로 다가온 타카하시는 아무도 없는 교실 뒷문을 보며 말했다.

 

카마사키 군. 아까 걔는 후타쿠치 켄지 군이지?”

... .”

같은 배구부라더니 사이가 좋은가봐. 교실까지 놀러온 걸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

듣던 대로 잘생겼더라. 혹시 걔 지금 여자친구 있어?”

 

알아서 뭐 하게? 카마사키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 했다. 사실 카마사키도 후타쿠치와 여자 얘기를 하거나 했던 적은 없기에 지금 후타쿠치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예전에야 연습이 끝나고 여자애와 같이 돌아가거나 하면 그런가보다 했었지. 근데 생각해보니 요 최근 사이에는 항상 같이 하교했고, 확실히 여자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드물어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타쿠치가 여자친구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후타쿠치 지금 여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미안, 잘 모르겠어. 그런 얘기는 잘 안 해서.”

그래? 흐음...”

 

카마사키는 초조함을 달래며 타카하시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후타쿠치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같은 반이 되고나서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자신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겠지. 카마사키는 괜히 책을 넘겼다. 타카하시가 빨리 제 자리로 가기를 바랐다.

 

오늘도 배구부 연습 해?”

“... ?”

괜찮다면 연습 구경하러 가도 될까?”

 

그 순간 영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부탁할게! 타카하시는 양 손을 모으며 눈을 찡긋하곤 가버렸다. 정말 싫다. 무엇보다 저렇게 작고 예쁜 여자애한테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혹시라도 후타쿠치가 저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어 버리면 어쩌나 초조해하는 게 끔찍했다.

 

 

수업이 어떻게 되가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수업이 다 끝나자마자 타카하시는 눈을 반짝이며 카마사키에게 다가왔고, 그런 두 사람을 모두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여자애들한테는 이미 은근슬쩍 말해 놓았는지 잘해보라는 말이 나왔다. 고백이라도 하려는 눈치였다. 타카하시가 들뜬 목소리로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카마사키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뭐라 둘러댈 말도 없어 솔직하게 후타쿠치에 대해 얘기하는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 저 분은 누구세요?”

어어~? 혹시 카마사키 씨 여자친구?!”

 

예상했던 대로 타카하시를 2층에 데려다주고 오자 사방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이 쏟아졌다. 후타쿠치 보러 온 거야, 라는 말에 다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짜증나는 인기남이네. 누구보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랐었던 사사야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사사야한테 괜히 발로 장난치는데 마침 후타쿠치가 왔다. 이미 타카하시를 발견했는지 그 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뭐에요. 저 여자 왜 왔어요?”

너 보러 왔단다, 후타쿠치!”

 

휙휙, 하는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 자식. 인기 많은 녀석! 모니와가 툭툭 후타쿠치를 쳤다. 솜방망이 주먹에 후타쿠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 채 구석으로 끌었다. 답지 않게 카마사키의 표정을 살피며 난색을 보였다.

 

나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알아. 타카하시가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더라.”

 

카마사키는 슬쩍 후타쿠치에게 잡힌 팔을 빼내었다. 맨 팔에 닿은 감촉이 그대로 팔위에 멍으로 남을 것 같았다. 괜히 팔을 문지르며 지나가려고 하자 후타쿠치가 앞을 가로막았다. 저 사람 짝사랑하는 거 아니었어요? 남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진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카마사키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잘해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카마사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후타쿠치를 두고 지나갔다.

 

, 차라리 모른 척 할걸 그랬다. 시선이 가도, 마음이 울렁여도, 생각에 떠올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 걸 그랬다. 스스로에게 시시한 변명이라도 해줄 걸 그랬다고, 카마사키는 연습하는 내내 생각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설레며 좋아하게 될 줄 알았다면 눈치 채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마음 졸이며 애먼 사람에게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카맛치! 조심...!”

“...?”

 

뒤를 돌아보자마자 쾅! 하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 충격에 절로 무릎이 고꾸라지며 나뒹굴었다. 얼얼한 통증보다 누가 머릿속에서 종을 치는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이 하얗게 새며 주변에서 카맛치! 카마사키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앞에 타카하시와 후타쿠치가 서 있다.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처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두 사람은 딱 붙어 있었다.

 

고마워요, 카마사키 씨.’

?’

카마사키 군. 고마워! 덕분에 우리 사귀게 되었어.’

 

타카하시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악수를 건넸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마주 잡자 경쾌하게 손이 흔들렸다. 어안이 벙벙한 카마사키가 무슨 말이냐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손을 떼어내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둘이 사귄다구요. 카마사키 씨 덕분에.’

?’

카마사키 씨도 저한테 도움이 될 날이 오네요. , 카마사키 씨 짝사랑은 안됐지만 여기까지인걸로.’

무슨, ,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귀어?’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지만 후타쿠치는 타카하시의 손을 마주 잡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저러할까. , 후타쿠치? 카마사키의 더듬거리는 말에 후타쿠치가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맞춤했다.

 

서로 좋아하면 시간이 무슨 상관인가요.’

뭐라고?’

, 카마사키 씨에겐 상관있겠군요. 제가 몰라봤어요.’

 

끔찍하다. 누가 산채로 몸을 갈기갈기 도려내는 기분이다. 으스러지는 마음에 차라리 심장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랐다. 카마사키가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지르감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쳐왔다.

 

걱정 말아요. 짝사랑은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후타쿠치.’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찾으시던가.’

,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의 가장 장점은 인내심이잖아요.’

후타, 후타쿠치. 잠깐만 기다려봐.’

잘됐네요.’

아니, 아니야 후타쿠치.’

 

안녕이란 말을 남기고 타카하시와 후타쿠치가 멀어졌다. 그 잔상을 뒤쫓으며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연신 불렀지만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쳐 돌아왔다. 까만 어둠에서 카마사키는 정신없이 내달리다 몇 번이나 넘어졌다. 무릎이 아파.

 

“...키 씨.”

“....”

카마사키 씨!”

 

거짓말처럼 어둠이 가시고 형광등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먹은 듯 반짝이는 불빛에 카마사키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눈을 훔쳤다. 얼굴을 적시는 것이 제 눈물이라는 것을 안 카마사키가 뛸 듯 놀라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다. 모조리 꿈이었어... 정말 꿈이었나?

 

정신 들어요?”

... ? .”

 

후타쿠치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아까의 연장선상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타카하시는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안도하다 볼을 흐르는 느낌에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아까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후타쿠치의 눈빛에 카마사키가 대충 둘러댔다.

 

... 아니, 악몽을 꿔서.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무슨 악몽이었는데요?”

? , 몰라. 기억이 안 나. 원래 깨어나면 기억 안 나잖아.”

그래요? 근데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심장이 철렁였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잠자다 잠꼬대라도 했나 싶어 카마사키가 입을 다물었다. 카마사키의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제 이름을 자꾸 부르시던데요.”

?”

꿈에서 제가 죽기라도 했어요? 너무 절박하게 부르길래 제가 깨운 거에요.”

... 글쎄. , 그랬나.”

땀이 이렇게 많이 났네.”

 

후타쿠치가 식은땀이 난 카마사키의 이마에 손을 대려는데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 손을 휘둘렀다. 찰싹, 하고 후타쿠치의 손이 떨어졌다. 지나치게 격한 반응에 후타쿠치는 물론이고 때린 장본인인 카마사키도 놀라 눈이 커졌다.

 

, 내가 닦을게. 더럽잖아.”

 

뒤늦게 카마사키가 근처에 있던 휴지를 뽑아 이마를 닦으며 얼버무렸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고 시비를 걸 법도 한데 후타쿠치는 별 말이 없었다. 대신 챙겨온 카마사키의 가방을 뒤적이더니 수건과 티셔츠를 건넸다.

 

땀 식으면 감기 걸리니까 닦아요. 옷도 갈아입고.”

, 고맙다.”

 

대충 이마며 목이며 땀을 닦곤 카마사키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뭐에 쫓기는 사람마냥 카마사키는 서둘러 몸을 닦았다. 맨몸을 보이는 거야 익숙한 일이었지만 후타쿠치가 앞에 있으니 어쩐지 신경 쓰였다. 물론 후타쿠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괜히 그랬다.

 

, 목 뒤도 제대로 닦아요.”

어디?”

여기. 목 뒤에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잖아요.”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

 

차가운 감촉에 카마사키의 몸이 움찔 굳으며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당황한 눈이 이리저리 뒹굴었다. 차마 이번엔 뭐라 변명하기가 그랬는지 카마사키는 모른 척 티셔츠를 입었다. 이제 가자, 하고 말하며 후타쿠치를 두고 일어서 걸어가는데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후타쿠치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괜히 매만지고 있다는 것을. 후타쿠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라라?




(7977자)

Posted by 005500 :

 

03.

 

 

2층 끝 쪽 방은 문이 열려 있어 밖에서도 내부가 보였는데 단숨에 카마사키의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낯익은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카마사키는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데 특유의 체취가 풍겼다. 깊고 진한, 사람을 홀리기 위해 알파와 오메가가 풍기는 페로몬과는 달랐다. 연습하고 씻을 때마다 맡을 수 있었던 바디 워시의 냄새가 은은하게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무슨 바디 워시를 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방으로 들어섰다.

 

 

뭐하냐?”

 

집에 있던 빵이며 음료수를 챙겨서 올라왔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뻔뻔하게 대자로 누워 카마사키가 왔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에서 냄새 나요.”

? 냄새 난다고?”

 

꽤 깨끗하다고 생각했는데 방에서 냄새가 난다니 충격적이었다. 혹시 쓰레기통을 안 비웠나 확인해봤지만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카마사키가 머쓱하게 미안, 하고 창문을 열려고 하자 후타쿠치가 침대에서 일어나 막았다.

 

됐어요. 그나저나 바디 워시 뭐 써요.”

그냥 집에 있는 거 대충 쓰는데. ? 별로냐?”

좀 특이해서요.”

이건데.”

 

카마사키가 가방에서 꺼내 온 휴대용 용기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평범하게 시원한 향이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카마사키의 냄새는 이것보다는 마른 풀잎의 냄새가 났고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뚜껑을 닫고 카마사키에게 돌려주니 아까부터 냄새 운운해서 신경 쓰였던 카마사키가 킁킁거리며 바디 워시를 다시 확인했다. 그냥 평범한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냐? 뜬금없이.”

궁금한 게 많은 나이잖아요.”

 

하여간 진짜 뻔뻔하네. 지난 몇 주 동안 자신을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했으면서. 카마사키가 코웃음 쳤다.

 

웃기네. 관심도 없었으면,”

“......”

...”

“......”

아니, 관심이 있었으면 해서 말한 게 아니라.”

몰랐네요? 거리 두자고 할 때는 언제고 제가 관심주길 바랐다니.”

말이 헛 나온 거거든. 그런 거 절대 아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듯 후타쿠치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한쪽 입가가 삐죽 올라간 모양에 카마사키는 재차 말실수 했다며 자신을 타박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말은 마치... 관심을 못 받아서 혼자 삐친 사람 같지 않은가. 아니, 내가 왜 저 자식의 관심을 바라는데? 그러다 요사이 있었던 일을 생각해내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한테 따지듯 물었다. 순순히 후타쿠치를 집까지 데리고 온 데에는 카마사키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너야말로 그 때부터 왜 그러는데? 왜 답지 않게 무시하고 그러냐?”

제가 뭘요? 카마사키 선배선배취급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전 거기에 따라줬을 뿐이고요.”

그게 무슨 선배취급 하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이런 말을 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듯했다. 시치미를 뚝 떼며 카마사키가 가져온 우롱차를 마시며 카마사키의 반응을 구경했다. 속 터지는 쪽은 카마사키였다.

 

아무래도 네가 오해한 모양인데. 그 때 내 말은 이런 식으로 데면데면해지자고 했던 게 아니었어. 그래도 내가 선배니까 조금은 날 존중해달라는 거였고. 미운 7살도 아니고 왜 그렇게 비뚤어지게 받아들여?”

미운 17살이니까요.”

그렇게 좀 가볍게 말하지 마! 하여간 너는 항상...”

그래서 어땠어요?”

?”

 

후타쿠치가 홀짝거리며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카마사키를 향해 물었다.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카마사키를 골리던 얼굴이 낯설게 변했다. 주변에 알파나 오메가가 있었다면 본능적으로 몸이 덜덜 떨릴 만큼 후타쿠치의 페로몬이 팍, 팍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발산되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지만 카마사키는 순간적으로 후타쿠치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과 분위기에 당황한 카마사키가 어어, 거리자 후타쿠치가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카마사키의 등 너머로 후타쿠치의 팔이 놓이면서 반쯤 후타쿠치에게 덮인 자세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였던 간에 선배 뜻대로 해드렸잖아요, ‘선배취급. 만족하세요? 그동안 어땠어요.”

뭐가 어땠냐니. 그나저나 팔 좀 치워. 답답해.”

싫은데요? 제대로 대답해요. 어떤 기분이셨어요?”

 

힘으로 밀면 그대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카마사키는 꼼짝도 못했다. 힘을 쓰기 이전에 덫에 걸린 먹잇감처럼 후타쿠치의 눈빛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온 탓인지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후타쿠치의 체취가 맡아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자신은 베타이기에 한 번도 누군가의 페로몬을 맡아본 적도 없고 맡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페로몬도 이런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떻기에 다들 후타쿠치에게 홀리는지.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거든.”

하하. 그래요?”

그래! 오히려 그, 뭐냐 그동안 얹힌 게 가라앉듯이 속 편하더라!”

 

정말요? 그러셨어요? 후타쿠치가 말할 때마다 몸이 조금씩 더 기울어지며 다가왔다. 조금만 고개를 틀면 그대로 서로의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후타쿠치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 숨이 카마사키의 뺨에 닿았다. 긴장해서인지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게 느껴졌다. 뭐야, 무서워. 카마사키는 없는 빈틈을 찾아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애초에 비켜날 곳이 없었다. 오히려 몸을 움직일수록 그 틈을 맞추기라도 하듯 거리가 좁혀졌다.

 

거짓말.”

아닌데.”

다 티 나거든요. 카마사키 씨. 거짓말 할 때마다 눈이 흔들리잖아.”

뻥 치지 마. 안 그랬어.”

 

거짓말처럼 후타쿠치가 몸을 뒤로 물렸다. 후타쿠치가 팔을 치우고 멀어지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공기가 트이면서 답답함이 가셨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이 다가왔다. 정신 차리지 않았으면 뒤따라 다가갔을 지도 몰랐다. 아찔한 상상에 카마사키는 불편하게 움츠러들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카마사키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꽤나 상처였다고요?”

 

후타쿠치가 가면을 쓰듯 눈썹을 내리곤 불쌍한 얼굴을 지었다. 가식인 게 훤히 보이는 표정에 카마사키의 입에서 저절로 시큰둥한 말이 터져 나왔다.

 

상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속아 넘어가 줄 생각은 없어요?”

없다, 그런 거. 장난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말에 카마사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순간적으로 후타쿠치의 낯빛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카마사키를 뚫어버리려는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X 열 받았었다 이거에요.”

, 야 존X는 좀...”

아 죄송. X X 열 받았었다고요, 빌어먹을 카마사키 씨 때문에.”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잔뜩 찡그린 눈가에서 지금껏 내비치지 않았던 후타쿠치의 감정이 삐죽삐죽 솟아나왔다. 후타쿠치는 참아왔던 화를 한 번에 푸는 사람처럼 그 때부터 온갖 욕을 다 하며 카마사키를 몰아 세웠다. 귀를 따갑게 만드는 욕에 카마사키가 막으려 했지만 어찌나 감정을 싣고 말하는지 도중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카마사키가 어버버하는 사이 후타쿠치는 이제 끝이 났는지 마지막으로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한숨에 흐트러졌다.

 

뭐 때문에 선배취급 운운하면서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그건 알아야겠네요.”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고,”

X, 이제 와서 선배취급 받고 싶다는 말 하면 제가 믿을 것 같아요?”

근데 이 새끼가 왜 자꾸 욕질이냐.”

아 됐으니까 빨리 말하라고요! 왜 그랬어요, 대체!”

 

코너에 몰렸다. 후타쿠치의 말처럼 애초에 처음부터 후타쿠치가 하는 짓을 웬만하면 받아주었던 카마사키였기에 선배취급 받고 싶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았다. 뒤늦게 대접받고 싶을 수도 있었지만 카마사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이를 후타쿠치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대접받고 싶길 원했지. 뭐만 하면 후배니까요, 라는 말을 면죄부처럼 입에 달고 살았었다. 도저히 지어낼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카마사키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 다들 안 좋게 봐서...”

다들? 누가요? 모니와 선배가요? 아니면 사사야 선배?”

아니, 걔네 말고! 걔네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카마사키 씨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거네요?”

... 아닌데. 그런 적 없어.”

누군데요, 그 새끼가?”

그냥 알려고 들지 마. 귀찮아져.”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카마사키의 말대로 모니와나 사사야 선배들은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같은 학년인 애들은 카마사키에게 그렇게 말할 입장이 못 되었고, 게다가 귀찮아진다는 말로 보면 자신이 알게 된다면 트러블이 생길 사람이 분명했다. 자신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배구부 내에서라면 몇몇으로 좁혀졌다. 유치하게 사소한 일로 트집 잡길 좋아했던 3학년 알파 새끼들 중 한 명이 틀림없다. 그렇게 뒤에서 뒷담화를 까더니 기어코.

어처구니없는 가정에 답지 않게 흥분하는 바람에 후타쿠치는 아까부터 잔뜩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긴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카마사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보기완 달리 밀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겠지.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남의 일에 참견했었다며 후타쿠치가 이를 갈았다. 그나저나 그와는 별개로, 이 사람을 어떻게 한다? 솔직히 아무리 그런 얘기를 들었겠기로서니 남의 말만 듣고 자신에게 선을 그으려 한 저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고 싶어요?”

, 글쎄?”

카마사키 씨가 선택해요. 속 편하게 살고 싶어요?”

 

당연하지, 모니와나 사사야였다면 옆에서 이렇게 거들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후타쿠치한테 시비 털리느라 힘들었잖아. 없으니까 편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카마사키는 요 몇 주 간 한 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 때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봤을 때 언제가 더 나았냐고 묻는다면 카마사키는 주저 없이 그 이전이라 말할 것이다. 남들의 말마따나 후타쿠치와 매번 싸우기만 하고 가끔은 지나친 장난에 질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좋았다.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게 된다면 매저키스트냐고 불릴게 뻔했지만 카마사키는 그랬다. 뭐를 했고 어땠었고를 떠나 그 때를 생각하면 즐거웠다. 시시하고 유치한 장난에 서로 타박하다가 마주쳤던 장난기 섞인 눈이 요즘 따라 자주 떠올랐다. 그러다가도 냉담한 후타쿠치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 때의 일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들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오히려 후타쿠치에게 무시 받았을 때가 힘들었다. 매번 지나치던 길에서 갑자기 투명한 유리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고.

 

됐어요. 이제부터 선배대접 해드릴게요, 카마사키 선배.”

 

한동안 고민하는 카마사키를 두고 후타쿠치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 팍 하는 소리에서 언짢음이 느껴졌다.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탁탁 발걸음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가버렸다.

 

후타쿠치, 잠깐. !”

 

어찌나 빨리 갔는지 카마사키가 뒤따라 나와 1층으로 내려갔는데 후타쿠치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순간적으로 카마사키는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카마사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자리를 떴다. 다시금 오버랩되는 상황에 카마사키가 급하게 신발을 구겨 신고 달려 나갔다. 멀리서 후타쿠치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 기다려 봐, !”

, ! 따라오지 마요!”

 

카마사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자 후타쿠치가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홱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더 씩씩대는 걸음걸이가 꼭 나 열 받았음, 하는 티가 확연히 드러났다. 끝까지 무시하는 저 태도 좀 봐라, 건방지게. 속으로 욕하며 카마사키가 있는 힘껏 달려가 후타쿠치의 가방을 낚아챘다. 동시에 후타쿠치가 화를 내며 뒤 돌아섰다.

 

왜 따라,”

!”

“......”

“....”

뭐라고요?”

들었잖아.”

아니요?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못 들었는데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왜 쟤한테 사과를 하고 있지?, 라고 깨달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얼버무리려는데 그걸 예민하게 알아채곤 후타쿠치가 재차 물어왔다. 이러니까 나 혼자 잘못한 사람 같잖아. 애초에 사람 무시하고 건방지게 굴었던 게 누군데. 내심 속에 쌓였던 일들이 다시 한 번 카마사키의 뇌리에 스쳤다. 어쩌다 눈이 마주쳤을 때면 싸늘한 얼굴로 대놓고 고개를 훽 돌려버렸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무시했지. 생각해보니 열 받게 한 행동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사과를 받아도 모자랄 지경에 사과 따위 할까보냐. 절대 먼저 사과하지 않을 테다.

 

아냐. 말이 잘못 나왔어.”

?”

... 잘 가라.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버스 정류장 있으니까...”

 

예전 일로 꽁해 하는 게 남자답진 않지만 애초에 후타쿠치 놈과 관련해서는 항상 유치해졌다. 카마사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 후타쿠치를 내버려두고 발을 떼려고 했는데 덥석 팔이 잡혔다.

 

이랬다 저랬다, 장난해요? 미안하다고 했으면 똑바로 말 해야지, 말 해놓고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어딨어요?”

잘못 말한 거라니까. 이것 좀 놔.”

빨리 사과해요. 나한테 그런 말 했던 거 사과하라고요.”

참나, 너야말로 사과해!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듣고 대놓고 무시하고, 비아냥거렸던 게 누군데?”

 

울컥한 카마사키가 잡힌 팔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애초에 후타쿠치보다 힘이 세기에 마음만 먹으면 문제없었다. 후타쿠치는 뿌리쳐진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곤 서로 말없이 상대방을 노려보다 카마사키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렸다. 유치원 애들도 이렇게 안 싸우겠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미안하니까 빨리 사과해요.”

?”

사과했잖아요. 이제 카마사키 씨가 나한테 사과하라고요.”

너 이 자식. 그게 사과냐?”

예에. 그러니까 사과해요, 빨리.”

 

아까보다 한층 더 인상을 찌푸리곤 후타쿠치가 재촉했다. 고집을 꺾지 않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카마사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했다. 하여간 진짜 제멋대로다.

 

미안하니까 너야말로 그만 노려봐.”

 

못이긴 척 사과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인상을 탁 풀곤 보란 듯이 턱을 들어 올렸다. 마치 내가 봐줬다, 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카마사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평하게 각자 사과하고, 사과 받았는데 오히려 손해 본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무슨 의도였던 간에 먼저 선을 긋고 밀어낸 쪽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려던 마음은 없었지만 다시금 후타쿠치에게 말려들어 버렸다. 하여간 후타쿠치와 관련해서는 좀처럼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 말리고, 휘둘리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얼마 못 참고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사과 했으니까 이전같이 행동하기만 해 봐라, ?”

제가 어쨌는데요?”

“...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별로 그런 적 없는데요. 카마사키 씨 자의식 과잉이 심하시네요.”

!”

 

언제 데면데면했었냐는 듯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렇게 얼마동안을 길거리에 서서 투닥거렸다. 싸우느라 굳어있던 얼굴이 점점 풀어졌다. 카마사키는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려는 것을 모른 척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면서 어둑어둑해지자 후타쿠치는 이제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곤 카마사키를 향해 돌아봤다.

 

둔한 주제에 다른 사람 눈치 볼 생각은 꿈에서 깨세요, 시간 낭비니까.”

 

카마사키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피식 웃더니 가버렸다. 내가 둔하긴 뭐가 둔하다는 거야. 멀어지는 후타쿠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카마사키가 중얼거렸다.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를 걸어가는 후타쿠치의 걸음걸이가 아까 신경질을 쓰던 때와 달리 여유로웠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후타쿠치의 머리카락이 태양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눈을 떼지 못했다.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잘도 잡아채는구나.

 

이때는 그저 그 뿐이라 생각했다. 워낙 튀는 사람이니까 시선이 갔었던 거겠지.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도 있었으니 자연스레 신경 쓰였던 거라고, 이때는 그리 생각했다. 그 이전부터 마음 한 편에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8027자)

Posted by 005500 :

 

02.

 

 

후타쿠치가 달라졌다.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더 이상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애초에 친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주 기본적인 대답만 해줄 뿐 사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다. 한동안 고민하다 어젯밤 보낸 라인에는 읽었다는 표시만 보일 뿐 답장이 없었다.

 

후타쿠치, 잠깐만.”

?”

... 왜 어제 라인 답장 안 해줬냐?”

하하. 라인 해도 되나요?”

 

후타쿠치가 웃으며 말했다. 웃고 있음에도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

건방지게 어떻게 선배하고 라인을 해요.”

, 전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라면... 네가 오해했나본데,”

아니요.”

?”

오해 안 했는데요. 애초에 제가 선배 취급을 안 해드렸던 게 죄송하죠.”

 

지금까지 죄송했습니다, 선배. 하고 후타쿠치는 자기 할 말만 끝내곤 돌아섰다. 카마사키가 당황한 목소리로 어, ! 잠깐만! 하고 불러도 후타쿠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갈 길을 갔다. 그 이후로도 몇 번 후타쿠치와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피했다. 연습 도중이라 자리를 피하지 못할 때에는 이전에 태연한 표정으로 카마사키를 놀렸던 때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을 끊었다.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카마사키 한정이었다. 평소처럼 다른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장난을 치면서도 카마사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주변에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싸웠냐는 말이 돌았다. 다들 후타쿠치에게 물어보긴 어려우니까 비교적 편한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카마사키는 싸운 건 아닌데, 라고 얼버무리며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싸운 건 아닌데 뭐지? 지금 상황은 절교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좀 편해지지 않았어?”

 

연습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사사야가 말했다. 항상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휘둘려지는 것을 옆에서 봐 왔기에 사사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좀 서먹해지긴 했어도 이제 시비도 안 걸고, 제대로 선배취급 해주잖아.”

, .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해서 표적을 바꿔서 다른 애들한테 시비 걸고 다니지도 않아. 그럼 잘 된 거지.”

 

쟤가 좀 철이 들었나봐, 모니와가 옆에서 거들었다. 카마사키는 그런가, 하고 대답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면 늘 찾아오던 후타쿠치가 없으니 편했다. 주변에서 말리기에 바빴던 모니와도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슬쩍 돌아보니 후타쿠치는 아오네 옆에서 턱을 괴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카마사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렸다.

 

거의 모르는 사람 취급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모니와가 덧붙였다. ‘거의가 아니라 이 정도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 나을 법 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일상이 이렇게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을 카마사키는 최근에 깨달았다. 예나 지금이나 딱히 새로울 것 없이 하루하루가 단조로웠지만 예전에는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학교에 가는 일이 기대가 되고, 매일 배구에 매진하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혀 그런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지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자꾸 후타쿠치가 생각났다. 절교 아닌 절교를 해서 그런지 자꾸 후타쿠치가 마음에 걸렸다. 수업을 듣다가 멍하니 있을 때면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 그렇게 확 태도를 바꿀 정도로 내 말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복도에서 후타쿠치를 스치듯 만날 때면 예전처럼 인사를 주고받고 싶고, 배구 연습을 하다 합이 잘 맞을 때면 가끔 그랬듯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 눈에 밟혔다. 그저 후타쿠치가 눈에 띄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서건 무의식적으로 후타쿠치를 찾게 되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후타쿠치에게 흘러도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카마사키는 왠지 모르게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요즘의 자신은 뭐에 홀린 사람마냥 하나만 생각했다. 게다가 눈에 밟히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무서운 거였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누구와 함께이거나 혼자이거나를 막론하고 후타쿠치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마냥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직도 싸우고 있어? 화해했어? 주변에서 눈치 보며 물어오던 후배들이나 친구들도 이제는 후타쿠치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후타쿠치와 한 공간에 있으면 마치 두 사람만 각각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다가가도 닿지 않았고 마주치지 않았다. 홀로 우주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기분에 답답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어느새 몇 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카마사키 선배.”

 

여느 때와 같이 연습이 다 끝나고 정리를 하는데 후타쿠치가 말을 걸었다. 그 때 이후로 후타쿠치가 먼저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방심하고 있던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랐다. 두 팔 가득 물병을 안고 정리하려던 카마사키의 팔에서 물병 두 세 개가 떨어졌다.

 

으악.”

 

데굴데굴 굴러가는 물병을 집으려고 허리를 숙이려는데 후타쿠치가 먼저 물병을 주웠다. 여기요, 하고 카마사키의 팔에 물병을 얹었는데 다시 물병이 굴러 떨어졌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입이 그대로 멈췄다.

 

...”

그냥 제가 들고 갈게요.”

, . 고맙다.”

 

평소 같았으면 미련하게 물통을 그렇게 들고 있냐며 타박하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후타쿠치는 대신 카마사키가 들고 있던 물병들 중 몇 개를 더 가져가 정리했다. 1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다들 후타쿠치를 어렵게 생각하는지라 연습이 끝나고도 좀처럼 뒷정리를 해본 적이 없었던 후타쿠치였기에 의외였다. 게다가 최근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기까지 했으니 갑자기 일을 거들어주는 후타쿠치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베푸는 호의라고 보기엔 후타쿠치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충 정리한 뒤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부탁한다 말하고 체육관을 나오려는데 후타쿠치가 말을 걸어왔다.

 

집으로 바로 가요?”

그래야지.”

그럼 같이 가요.”

 

후타쿠치와 카마사키는 같은 동네에 살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데다 타고 가는 버스가 같았다. 딱히 일부러 시간을 맞추거나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연습이 끝난 뒤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하교하곤 했다. 그 때 이후론 언제나 후타쿠치가 먼저 쌩하니 가버렸지만. 카마사키는 여전히 후타쿠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전처럼 다가왔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하교하는 두 사람을 보고 배구부 사람들이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니와는 후타쿠치를 흘끗 쳐다보곤 카마사키에게 화해했어?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새 없이 후타쿠치가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모니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모니와 선배도 같이 가나요?”

? 아니, 난 사사야랑 갈 건데...”

그럼 가요, 카마사키 선배.”

어어... 그럼, 내일 보자.”

 

카마사키는 모르겠지만 모니와는 후타쿠치가 다가오자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억제제는 항상 복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가끔씩 후타쿠치의 알파 페로몬이 뿜어져 나올 때가 있다. 후타쿠치같은 우성이 아니기에 모니와는 발현하고 나서부터 한 번도 알파 페로몬을 절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끔, 페로몬이 너무 강하거나, 미성숙한 아이들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 커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페로몬이 터지듯 뿜어져 나온다고 들었다. 후타쿠치가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 분명 뭔가에 자극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대체 뭐 때문에 후타쿠치의 감정이 폭발한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니와는 굳었던 어깨를 주무르며 카마사키와 함께 걸어가는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살펴봤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뭔가 말을 할 거라 생각해 기다렸지만 후타쿠치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나서도 별 말이 없기에 뭐지 싶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서 뭐라 말을 걸어도 후타쿠치는 생각에 잠겼는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뭔가 대화를 나눠야 지난 며칠 동안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아무 말도 못해보고 버스가 도착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보다 집이 더 가까웠기에 내리려고 준비하는데 그제야 내내 딴 곳을 보던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얼굴을 보니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나 먼저 내린다.”

저도 내려요.”

?”

 

후타쿠치는 다짜고짜 내린다는 말을 하곤 당황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 카마사키의 등을 떠밀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버스에서 내리자 후타쿠치는 대뜸 어느 쪽이에요? 하고 물었다.

 

뭐가 어느 쪽이야?”

선배네 집이요.”

우리 집은 왜?”

그럼 제가 여기까지 와서 어딜 가겠어요? 사방이 주택가인데.”

아니, ! 말 한 마디도 없이 오는 사람이 어딨냐?”

 

카마사키가 황당해하던 말던 후타쿠치는 다리 아프다며 카마사키를 재촉했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지만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카마사키는 할 수 없이 후타쿠치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카마사키의 뒤를 따라왔다. 카마사키로서는 도통 왜 이러는지 감이 안 잡혀서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후타쿠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카마사키의 말을 무시했다.

 

다행히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안을 둘러보던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사키 선배다운 집이네요.”

그게 무슨 뜻이냐?”

별 뜻 없어요.”

 

어깨를 으쓱하곤 후타쿠치는 집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느꼈는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낯선 공간에 들어왔음에도 마치 제 집처럼 당당하게 활보하며 돌아 다녔다. 그러다 거실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카마사키의 중학생 때 사진을 발견하곤 풉하고 웃으며 진짜 촌스러웠네요라고 말해 카마사키의 신경을 건드렸다.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진이었는데 솔직히 카마사키조차 제정신으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한 사진이었다. 중학교 때 배구 경기에서 얼굴에 공을 맞고 코피를 흘리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현상했을 당시 버린다고 찢어버리겠다고 안간힘을 썼었는데 결국 엄마한테 지고 말았다. 그 때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그런 사진을 후배한테, 그것도 후타쿠치한테 보이다니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사진 놔두면 부끄럽지도 않아요? 완전 흑역산데.”

너한테 보이다니 죽고 싶네.”

그래요? 그나저나 선배 방은 어디에요?”

, 2층 끝 쪽 방인데 들어가 있어라. 뭐 마실 거라도 챙겨서 올라갈게.”

 

카마사키는 은근슬쩍 액자를 뒤집어놓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카마사키의 얼굴이며 귀와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얼굴에 후타쿠치는 오랜만에 유쾌했다. 배고프니까 뭐 맛있는 거라도 갖고 오라고 말하고는 후타쿠치는 피식거리며 카마사키의 방으로 갔다.

 



(5422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알파의 연애

 

 

우성 알파 후타쿠치 x 베타 카마사키

 

 

 

01.

 

지잉, 하고 라인이 도착했다는 진동음이 울렸다. 이제 막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려던 카마사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였다. 화면이 켜진 핸드폰에 익숙한 이름으로부터 메시지가 떠 있었다.

 

[끝났어요?]

 

답장을 하기도 전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체육관 근처로 와요.]

 

먼저 질문한 주제에 연달아 일방적인 통보를 내린 메시지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지가 키우는 개도 아니고, 오라 마라야. 젠장. 애초에 방과 후에 함께 하교하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괜히 마음이 그랬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카마사키는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다들 분주하게 하교하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들이 오고 갔다. 어디 가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마사키가 체육관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다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의외였다.

 

멀리서 보이는 두 명의 실루엣에 카마사키는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은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복도나 식당 등에서 오고 가며 마주쳤을 지도 모르지만 카마사키에게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우성 오메가 중 한 사람이다. 귀하게 자란 티가 곳곳에서 풍기는 그녀는 2학년에서 가장 예쁘다고 소문나서 알파고, 오메가고, 베타고 남자건 여자건 한 번쯤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왜 방과 후에 체육관 건물 뒤에 서 있는지, 모르고 싶었지만 예상이 갔다. 카마사키는 두 사람을 보다 조용히 몸을 숨겼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어 일일이 세어 봤지만 그것도 열 손가락을 넘어가자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만뒀다. 스스로 목격한 것만 해도 그 정도니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하면 그 수가 상당할 터였다. 잠시 상상해보다 절로 밀려오는 우울함에 카마사키는 한숨을 삼켰다. 애초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울해지는 기분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은 쌀쌀해진 날씨에 가방에서 저지를 꺼내 입던 카마사키를 향해 기다렸던 사람이 다가왔다. 방금 전에 고백 받은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왔으면 연락을 해야죠. 한참 기다렸네.”

바빠 보여서.”

 

카마사키의 말에 후타쿠치는 아, 봤어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예쁜 여자에, 우성 오메가에게 고백 받았음에도 후타쿠치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의 남자라면 성질에 상관없이, 짝이 있더라도 한 번쯤 흔들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고백조차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는 신기했다. 뭘까?

 

그건 그렇고, 오늘 영화 보러 가기로 했던 거 안 잊었죠? 빨리 가요.”

 

카마사키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을 확인하며 재빠르게 앞서가던 후타쿠치가 손짓하며 재촉했다.

 

뭘까? 앞서가는 후타쿠치의 등을 보다 카마사키가 생각했다.

왜 일까? 아무리 내가 먼저 고백했고, 사귀기 시작한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카마사키는 여전히 후타쿠치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굼벵이에요? 영화 시간 놓치면 안 된다니까!”

, ! 간다고, !”

 

계속되는 후타쿠치의 재촉에 결국 카마사키가 성큼 다가갔다. 어플을 통해 시간표를 확인하던 후타쿠치가 앞으로 3분 뒤에 버스가 도착한다는 말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막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에 맞춰 버스가 왔다. 하교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버스는 자리가 널널했고 두 사람은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핸드폰으로 영화 예고편을 확인하고, 각종 후기를 보다보니 어느새 영화관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둘이서 이 영화관에 온 것도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었다. 처음에 어색하게 앉아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자연스럽게 옆에 나란히 앉고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영 적응이 안 되지만 영화를 보다 가끔 손도 잡는다. 믿기지 않을 일이다.

 

 

후타쿠치와 카마사키는 사귀고 있다. 놀랍게도 오메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베타에 평범한 남자인 자신과 후타쿠치가 벌써 사귄 지 3개월이 되었다. 매일 투닥거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두 사람은 잘 지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실은 카마사키에게는 오래된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고백했기로서니, 얘는 왜 나랑 사귀는 거지? 후타쿠치가 왜 자신과 사귀는 지 알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후타쿠치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카마사키가 2학년이 되고, 후타쿠치가 배구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호감이 있었다. 카마사키는 그 때까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평범한 베타였기에 더욱 같은 동성의 남자를 좋아하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기본적으로 예쁘고 귀여운 여자가 지나갈 때면 여타 평범한 남자들과 비슷하게 저절로 눈길이 갔고, 비록 소꿉장난 수준이었지만 중학교 때는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후타쿠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외모가 잘생겼다는 점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그 때는 그냥 자연스레 눈길이 갔고 그러다보니 마음도 갔다. 처음엔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후타쿠치는 모두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으니까.

 

후타쿠치는 입학했을 때부터 배구부뿐만 아니라 교내에서도 유명했다. 베타는 느낄 수 없지만 오메가들의 말에 의하면 후타쿠치의 페로몬은 냄새를 맡기만 해도 성적인 쾌감이 오를 정도라고 했고 알파들은 주변에 있기만 해도 위축되는 기분이 든다며 질색했다. 학기 초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몇몇 오메가들이 후타쿠치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결국 보다 못한 학교 측에서 후타쿠치에게 페로몬 억제제를 복용하기를 권하는 일도 있었다. 억제제를 복용한 뒤로부터는 그런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드물어지긴 했으나 후타쿠치에게는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백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우성 알파라는 점을 제외해도 후타쿠치는 모두에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단순히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었다.

 

그렇기에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가 단순히 후타쿠치가 눈에 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태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외모가 가장 빼어나진 않더라도 그 특유의 분위기라던가, 남들이 말하는 우성 형질의 기운 때문이라 생각했다. 정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특별하다는 첫인상에 호감을 가졌던 것도 잠시뿐이었고 후타쿠치가 배구부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나고 난 뒤 카마사키는 절실히 깨달았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이었기 때문일까,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하고 잘났다는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후타쿠치는 매사에 제멋대로인 점도 있었고 남을 놀리길 좋아했다. 선배들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하고, 오히려 3학년들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 하마터면 큰 싸움이 일어 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카마사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갖고 트집을 잡거나 놀리기를 좋아했다.

 

, 카마사키 씨. 제발.”

?”

근육 자랑하려고 소매 그렇게 걷는 겁니까? 웃기잖아요.”

. 아니거든! 땀이 많이 나서 걷은 거야.”

아직 여름 아니거든요?”

더위를 많이 탄다고!”

 

카마사키가 억울하다는 듯이 해명했지만 후타쿠치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카마사키는 재차 열이 솟았다.

 

그래요? ...”

, 진짜. , 근육 자랑 같은 거 아니라니까. 소매가 길어서 덥기도 하고, 블로킹할 때 불편해서 그런 거라고.”

누가 뭐래요? 왜 해명을 하고 그래요. 누가 보면 제가 카마사키 씨한테 뭐라고 나무란 사람처럼 보이겠어요.”

네가 뭐라고 했잖아!”

 

일방적으로 후타쿠치가 시비를 걸면 카마사키는 무시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나중에는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울컥해서 반박하면 후타쿠치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뭐라고 했나요?’, ‘별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나?’ 같은 말을 했고, 그 얼굴에 열이 받은 카마사키가 욱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치한 말장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언제나 보다 못한 모니와가 아오네를 시켜 말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카마사키가 뭔가를 할 때는 물론이고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후타쿠치는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 왔다. 처음엔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장난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일부러 찾아와 말을 거는 것에 초반에는 이상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열 받게 하는 말을 해도 다 받아주고 웃으며 넘겼었다. 그러나 점점 횟수가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지는 행동에 카마사키는 결국 후타쿠치를 그냥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다 받아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카마사키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인내심이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후타쿠치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로 비춰졌고, 그런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를 몇몇 3학년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처음 배구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후타쿠치를 고깝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몇몇 알파들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비뚤어진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하루는 3학년 알파 선배들 중 한 명이 카마사키를 불러냈다.

 

카마사키. 너 후타쿠치 너무 받아주는 것 아니냐?”

?”

아무리 그래도 네가 선배인데, 그렇게 선배한테 막 대하는 행동은 아니지. 우성 알파라고 베타한테 함부로 그러는 걸로밖에 안 보이고.”

아뇨, 걔가 딱히 그러려고 그런 건,”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말을 끊었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멍청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네가 베타라서 모르나본데, 우성은 원래 열성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깔보는 새끼들이야.”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들어라, ?”

 

그리곤 그는 카마사키에게 욱했던 것이 신경 쓰였는지, 아니면 나이 어린 후배를 뒷담화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갔다. 딱히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3학년 알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베타인 카마사키는 애초에 우성과 열성의 형질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지만 알파와 오메가들은 달랐다. 나중에 스치듯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내니 알파인 모니와는 질색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모르겠지만 후타쿠치는 좀 그렇지. 내가 딱히 열성은 아닌데도 후타쿠치가 억제제 깜빡하고 안 먹고 온 날에는 다가가기가 힘들더라.”

그러냐?”

그냥 그건 본능적인거야. 자연스럽게 나쁜 마음이 드는 거라고.”

그래도 너도 알고 있잖아. 걔가 좀 재수 없게 말하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닌 거.”

나도 알지. 근데 나나 너처럼 다른 선배들이나 동기들, 후배들도 후타쿠치를 이해해주지는 않는 게 문제라는거야.”

“...그런가?”

 

모니와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딱히 그 선배들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후타쿠치한테 적당히 선을 그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적당히 받아주기 힘든데.”

너가 아니면 걔를 누가 받아줘.”

 

네가 받아주면 어떠냐는 말에 모니와의 얼굴이 하얘졌다. 나쁜 애가 아닌걸 알지만 친해지긴 힘들다는 말에 카마사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카마사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오메가나 알파였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후타쿠치를 멀리했을지 모른다. 안 그래도 삐뚤어진 놈인데 그 성질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하고 생각하니 후타쿠치의 처지가 좀 불쌍해졌다. 동시에 헛웃음이 났다. 우성 알파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을 거다.

 

고민하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와 적정한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후타쿠치 성격 상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말하면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했고, 자기 선에서 조절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희미하게 달라진 카마사키의 태도에 후타쿠치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잘못 먹었어요?”

“... 아니거든. 마침 잘 됐다.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뭐에요.”

 

막상 단도직입적으로 거리를 두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일단 말을 꺼냈으니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의 눈빛에 자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말해요. 저 바빠요.”

연습 다 끝났는데 뭐가 바쁘냐. 아니,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카마사키는 큼큼, 목을 다듬고 괜히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후타쿠치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에 카마사키가 말했다.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날 선배답게 대해줬으면 해.”

예에?”

 

카마사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묘해지는 표정에 카마사키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 살 차이이긴 해도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고... , 점점 네가 날 막 대하는 것 같거든.”

... 그래서요?”

그러니까 선후배 사이니까 조금의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 그래요? 대수롭지 않은 듯 한 후타쿠치의 대답에 카마사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저 특유의 말을 늘이는 말투. 알게 된 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후타쿠치의 버릇 중 하나였다. 후타쿠치는 종종 마음에 안 내키는 대답을 해야 할 때나, 사이가 나쁜 선배들 앞에서 저런 말투를 썼다.

 

그러니까 카마사키 선배말은,”

...”

고작 한 살 많지만 선배취급 받고 싶다?”

, 말을 해도...”

이제 와서?”

 

받아줄 땐 언제고 어이없네. 후타쿠치는 대놓고 카마사키를 비아냥거렸다. 카마사키는 자신의 말에 후타쿠치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후타쿠치는 이상하게 자신에게만 막 대했지 다른 애들이나 선배들한테는 기본적인 선배 취급을 해 주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아주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기에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피식거리며 헛웃음을 짓던 후타쿠치의 얼굴에 점점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자 카마사키는 뭐가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실수했구나 싶었다.

 

저기 후타쿠치,”

아 좋아요.”

?”

 

후타쿠치는 건방지고 가끔 재수 없는 말을 해도, 나쁜 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툭툭 시비를 거는 일에 욱하면서도 탁구공처럼 받아치는 말장난이 유치하고 재밌기도 했다. 가끔 서로 말도 안 되는 말이 나오면 서로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면서 장난치기도 했다. 남들은 후타쿠치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다고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후타쿠치가 봐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좋다고요. 이제부터 카마사키 선배, 선배 취급 해드릴게요.”

후타쿠치. 내 말은...”

거리를 두자고요?”

, 잠깐 내 말을,”

 

카마사키는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석고상이 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꼼짝도 못하고 후타쿠치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후타쿠치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후타쿠치가 기계적인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나는...”

카마사키 선배.”

 

후타쿠치는 그 말을 하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카마사키를 두고 뒤돌아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에 아까 보았던 표정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분노가 느껴졌다. 멀어지는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차마 숨도 쉬지 못하고 바라보던 카마사키가 숨을 토했다. 뭔가 잘못 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7812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끝

2017. 1. 17. 04:07 from

[후타카마]

 

네임버스/연성문장 ‘there was a pause.(잠시 침묵이 흘렀다.)’

후타>카마

 

 

 

수십 년 전부터 유행처럼 희귀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병은, 신체의 한 부분에 가려움과 통증이 동반되면서 푸른 멍이 생기며 일주일정도 시간이 지나면 살갗에 글자가 새겨졌다. 이 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했지만 어째서 이 병이 발병하는지에 대해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여러 추측들과 경험들로 미루어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 병의 특이점 몇 가지뿐이었다.

첫째, 이 병은 성별과 나이, 인종에 상관없이 발병한다. 그 시기 또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특별하게 단정할 수 없지만 보편적으로 2차 성징이 진행되는 청소년기부터 30대 초반까지 가장 많이 발병한다. 둘째로, 글자는 신기하게도 그 사람의 모국어로 나타나며 크기나 글씨체, 색깔 또한 다양하다. 이 역시 보통 검은색 글자에 콩알만한 크기가 대부분이다. 셋째로, 레이저 장비를 통해 문신처럼 글자를 지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흔적이 남는다. 넷째로, 글자는 보통 짝을 이룬다. 생전 모르는 타인의 이름일 수도, 면식이 있는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에게도 본인의 이름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이를 낭만적이라고 여겨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 자주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이 병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인기를 끌자 사람들은 이 병을 홍선병(紅線病)이라고 불렀다. 운명의 붉은 실이 맺어진 연인들처럼 이름이 새겨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름이 새겨지고 난 뒤에는 딱히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낙인처럼 평생 신체에 남을 뿐이었다.

5%의 발병률을 가진 이 병은 큰 증상이 없고, 매체가 만든 이미지 때문인지 병이 발병한 사람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기이한 현상을 몰았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그들의 연인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빨간색으로 이름을 새기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붉은 실로 새겨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과는 반대로, 아이러니하게 실제로 병이 발병한 사람들은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숨겼다. 눈에 띄는 곳에 이름이 나타나면 누가 볼세라 이름을 지우거나 그 위에 새로운 무늬를 덧씌웠다. 결과적으로 진짜로 병이 발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후타쿠치는 목 부분이 가려워졌다. 겨울이니 모기에 물린 것도 아니고, 딱히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목만 간지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목이 새빨갛도록 긁고 있었다. 대충 연고를 발라 봤는데 신기하게도 가려운 것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긁었는지 목이 꽤 따가웠던지라 후타쿠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빨간 목가를 바라보다 후타쿠치는 연고를 덧바르고 그 위에 밴드를 붙이고 평소와 같이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후타쿠치는 누가 바늘로 목을 쑤시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발작하듯 잠에서 깼다.

, 아 뭐야 진짜...!”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릴 정도로 목이 아팠다. 따끔거리는 목을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후타쿠치는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갑작스레 빛이 밝혀져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후타쿠치는 필사적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살폈다. 정확히는 목을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붉기만 했던 목이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거울을 보다 후타쿠치는 설마, 하는 생각을 했다. 하도 유행처럼 번지기에 후타쿠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홍선병’. 하도 같은 반 여자애들이 난리를 쳐대기에 이 병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렵기만 하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멍이 들기 시작하고, 며칠이 또 지나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황당한 병.

, 진짜 미치겠네.”

그대로 화장실 문을 닫고 후타쿠치는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켰다. 아직까지 가시지 않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포털에 을 쳤더니 그 밑에 홍선병이 관련검색어로 나타났다. <붉은 연인>, <그 이름에 대해서>, <NAME> 등 홍선병을 주제로 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을 무시하고 후타쿠치는 홍선병에 대한 10가지 진실이라는 블로그 글을 눌렀다. 하나씩 나열되는 글을 읽다 평생 흔적이 남는다는 것을 보고 후타쿠치는 그대로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말도 안 돼.

 

며칠 후 후타쿠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목에 나타난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보통은 콩만 하다더니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카마사키 야스시(鎌先靖志)’,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남자 이름 같았다. 그로부터 1년 뒤, 후타쿠치는 이름의 장본인을 찾게 되었다. 후타쿠치보다 한 살 많은 배구부 선배, 남자였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다. 카마사키 야스시라는 이름이 흔하진 않아도 이 넓은 일본 땅에 한 사람 뿐일 리 없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우연히 본 카마사키의 노트에 적힌 이름을 보고 후타쿠치는 가만히 눈을 질끈 감았다. 글자가 나타난 뒤 하루에도 수십 번 보았던 글씨와 판박이였다. 그냥 랜덤으로 글씨가 새겨지는 거 아니었냐고, 후타쿠치는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 답답함을 참기만 했다. 그도 그럴게, 후타쿠치 본인을 제외하고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후타쿠치가 홍선병에 걸린 사실을 몰랐다. 이름이 나타난 뒤로 여름에도 굳이 시트를 붙이고 다니고, 언제나 목이 가려지는 옷만을 고집했다. 왜 항상 목을 가리고 다니냐는 물음에 큰 상처가 있어서 가린다는 말로 변명을 했기에 아무도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남자 이름이 새겨졌다는 걸 누구한테 알리냐고.

후타쿠치로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글씨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에 짝이 있다면 후타쿠치의 짝은 카마사키였다. 듣기로 카마사키는 아직 홍선병이 발병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의 몸에도 후타쿠치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 때가 올 때까지 후타쿠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시트로 목을 감았다.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부러 얘기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것 때문에 받은 정신적인 고통을 그 또한 맛 봐야 한다는 심술이었다. 그런 본심은 은연중에 카마사키를 대하는 말투나 행동에 나타나곤 했다.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선배가 하는 말은 지나칠 수 있었지만 카마사키의 말이라면 달랐다. 뭐든 걸고넘어지고 싶었다. 아주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어느 날은 연습을 하고 쉬는 도중에 카마사키가 당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대해 말을 꺼냈다. 우습게도 그 드라마 또한 홍선병에 걸린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청률이 꽤 나오는 드라마인지라 드물게 하나 둘씩 사람이 모였다.

그게 몸에 이름이 새겨진다는 거잖아. 자기 이름도 아니고 다른 사람 이름이 새겨진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

카마사키는 그러면서 모니와 선배에게 너는 그런 거 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다는 말에 나도, 하고 덧붙이면서도 괜히 팔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후타쿠치는 남몰래 웃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당신 몸에도 이름이 나타날걸요.

과학적으로 근거는 없다지만 여자애들이 난리가 날 만해. 운명처럼 나타나는 거잖아.”

하긴.”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신이 난 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면 나랑 카마사키 씨가 운명이라는 거냐.

설마 카마사키 씨, 붉은 실이라느니 운명이라느니 믿는 거 아니죠?”

, 런거 아니거든? 누가 그런 이야기를...!”

고개를 저으면서 카마사키는 시선을 피했다. 입을 꼭 다문 그 모습을 보다 후타쿠치가 말했다.

생각보다 소녀 취향이시네요?”

아니라니까.”

울컥하는 목소리로 카마사키가 눈을 흘겼다. 그러다 카마사키의 시선이 후타쿠치의 얼굴에서 목으로 내려갔다. 곧이어 카마사키가 헹,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야말로 목에 그거, 이름 새겨진 거 아냐? 항상 가리고 다니잖아.”

카마사키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후타쿠치의 목을 쳐다보았다. 시트를 붙이고 난 뒤로 자신에게 닿아오는 시선에 익숙해진 후타쿠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카마사키의 비웃음 섞인 말에 기분이 아니꼬워진 후타쿠치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음 지었다.

맞아요. 제 목에 카마사키 이름이 있거든요.”

장난처럼 가볍게 던진 말을 누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후타쿠치의 말투부터가 가벼웠고, 홍선병은 그리 흔한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카마사키 또한 후타쿠치의 말에 질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장난으로도 하지 마라.”

뭐 그러지 않으리란 법도 없잖아요?”

카마사키의 대답은 평소의 말투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후타쿠치는 그날따라 카마사키의 밀어내는 말이 거슬렸다. 어차피 당신도 내 이름이 새겨질 날이 올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언제나와 같은 장난스런 말이었다. 그럼에도 가벼운 그 말이 비수처럼 후타쿠치의 가슴에 박혔다. 그 말의 어디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후타쿠치조차 알 수 없었지만 숨이 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 뒤로 후타쿠치는 틈 날 때마다 카마사키를 살피기 시작했다. 언제 병이 발병하나 눈을 부릅뜨고 카마사키가 어딘가 가려워하지 않나, 몸에 멍이 들지는 않았다 찾았다. 나는 일 년도 전에 이름이 나타나는 바람에 매일 시트를 붙이고 다니는데, 그 당사자는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괘씸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나를 쳐다보냐?”

끈질기게 쫓아오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느꼈는지 카마사키가 다가와 물었다. 한참 전에 눈치 챘는지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는 말투였다.

그런 적 없는데요. 자의식 과잉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넌 말을 해도.”

쳐다본 적 없는데 카마사키 씨가 먼저 그랬잖습니까?”

카마사키는 평소보다 삐뚤게 대답하는 후타쿠치를 보다 한숨을 쉬곤 대답했다.

됐다, 됐어. 다 내 착각인가 보다.”

뒤 돌아 걸어가는 카마사키의 등을 후타쿠치는 뚫어지게 쳐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 진짜 언제나 되어야 이름이 나타나는 건데?

기다리다 뒈져버리겠네.”

작게 말했음에도 귀신같이 후타쿠치의 말을 들었는지 카마사키가 고개를 돌려 후타쿠치를 쳐다보았다. , 하고 시선을 회피하는 후타쿠치를 발견하고 카마사키는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삐뚤어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쟤는 다른 애들은 고사하고 왜 맨날 나한테만 저러나 몰라.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 챘음에도 끝까지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후타쿠치를 보다 카마사키는 누구 들으라는 듯 푹, 크게 한숨을 쉬었다.

 

홍선병 발생 시기

후타쿠치는 사이트에 줄줄이 나오는 블로그 글들 중에서 가장 조회 수가 많은 글을 클릭했다. 사족은 건너뛰면서 빠르게 훑어 내리자 원했던 정보가 나왔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이라는 점이 흠이었지만.

홍선병이 발생하는 시기는 보통 청소년기부터 30대 초반까지가 일반적이다.’

이럴 거면 써 놓지나 말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 창을 닫았다. 설마 30대가 될 때까지 병에 걸리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까지 이름을 숨기고 다녀야 하나? 아니, 애초에 카마사키에게 이름이 나타난다고 해도 뭐가 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억울하지 않은가. 나는 이름이 새겨졌는데 상대방은 그걸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내 이름이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게. 공평하게 내 이름도 새겨져 있어야 공평한 거 아냐. 후타쿠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삼켰다. 참 하나,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 없는 병이었다. 운명이니 낭만적이니, 붉은 실이 아니라 주홍글씨가 따로 없다. 공개적 수치플 아니냐고.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살피는 것을 그만 뒀다. 어차피 발병하게 된다면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학교에 다니는 이상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름이 새겨지고 난 뒤는 몰라도 그 전조 현상은 후타쿠치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후타쿠치는 여전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목에 시트를 붙이고 이름을 숨겼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음에도 자연스럽게 카마사키에게 향하는 시선을 애써 다잡으며, 또 다시 일 년이 지났다. 후타쿠치는 2학년이 되었고, 카마사키는 3학년이 되었고 마지막 인터하이를 마쳤다.

카마사키 씨, 안 보이네요?”

인터하이가 끝나고 며칠 뒤 2학년과 3학년이 인수인계를 하기로 모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며 묻는 오바라의 말에 모니와가 말했다.

, ... 카마사키는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이요?”

모니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 싶어 후타쿠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카마사키에게 라인을 보냈다. 답을 바로 주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답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대화창을 확인해보니 카마사키는 라인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이상했다. 후타쿠치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인터하이가 끝났어도 그 때문에 오래 좌절할 사람이 아니었다. 열심이었던 만큼 결과에 승복하고 언제나 그 다음을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이 카마사키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후타쿠치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카마사키의 반으로 직행했다. 한창 3학년이 등교하느라 떠들썩한 복도를 지나 3-A반에 도착했다. 교실 밖에서 살피니 카마사키가 자리에 엎드려 앉아 있었다. 2학년인 후타쿠치가 반에 들어서자 3학년들이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후타쿠치는 답지 않게 엎드려 있는 카마사키만 눈에 들어왔다.

카마사키 씨.”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책상을 손등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흠칫하고 카마사키의 등이 움직였지만 카마사키는 일어나지 않았다.

, , 뭐냐. 후타쿠치.”

카마사키는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 사람 같았다. 후타쿠치가 다시 한 번 카마사키의 책상을 두드렸지만 카마사키는 미동도 않았다. 그 모습이 카마사키 답지 않았기에 후타쿠치는 이상함을 느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보다 먼저 걱정이 앞섰다. 참 이상할 노릇이었다.

어디 아파요? 왜 일어나지를 않아요.”

,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일어나 봐요.”

그러나 카마사키는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고개를 숙여 책상 아래를 살펴보다 틈새 사이로 카마사키와 눈이 마주쳤다. 거짓말을 들킨 사람처럼 카마사키의 눈이 당황스럽게 커졌고, 후타쿠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

후타쿠치는 그대로 엎드리고 앉은 카마사키의 양 팔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카마사키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끌고 나왔다. 때마침 종이 울렸고 복도에 흩어져있던 3학년들이 각자의 반으로 들어갔다. 후타쿠치는 뒤에서 뭐라 말하는 카마사키의 말을 들은 채도 안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너 제정신이냐?”

카마사키는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선생님에게 들켰다간 큰일 날 상황이었다. 그런 카마사키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타쿠치는 전에 없이 눈을 반짝이며 카마사키의 교복 셔츠 단추를 벗겼다.

, ...! ! 이 미친, 너 뭐, 하는...!”

, 들키기 싫으면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진짜...”

어딘가 들뜬 목소리를 한 후타쿠치에 카마사키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난데없이 3학년 교실에 찾아와서 화장실로 끌고 가더니만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카마사키가 뒤늦게 문고리를 열고 나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렇게 하기엔 칸이 너무 작았다. 몸을 뒤척이는 카마사키는 유리한 자세를 한 후타쿠치에게 쉽게 제압당했다. 순식간에 단추가 풀린 셔츠를 젖히고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상체를 살폈다. 가슴, , 팔이나 등, 일단 눈에 띄는 곳에는 이름이 없었다. 사실은 내심 자신처럼 목가에 이름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곧이어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벨트를 잡자 카마사키는 발작하듯 후타쿠치의 손목을 잡아챘다. 당황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얼굴이 당황해서 그런 것임을 알지만 기분이 묘했다. 정신없이 이름을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깨닫고 보니 모두 교실에 있는 시간에 둘 만이 화장실 좁은 칸에 함께 있는 거였다. 잠시 고장 난 것처럼 후타쿠치의 움직임이 멈췄다. 뚫어질 듯 자신의 얼굴에만 시선을 주는 후타쿠치의 눈을 피해 카마사키가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까 좁은 칸 안에 둘만 있는 게 실감이 나서 이상하고 어색했다. 카마사키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다 후타쿠치를 밀었다.

,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여기부터 나가자.”

그래도 되요?”

“...? 그래도 되냐니, 뭐가...”

후타쿠치가 어느새 카마사키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며 웃었다. 전 상관없는데, 이대로 나가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얘 뭐야?

, 너 무슨...! 이 손 당장 안 놔...?!”

필사적으로 바지를 움켜쥐는 카마사키를 비웃으며 후타쿠치가 힘을 주어 카마사키의 바지를 내렸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죽일 듯 노려보다 양 팔을 감싸고 얼굴을 가렸다. 수치심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개졌다. 후타쿠치는 빨갛게 물든 카마사키의 목을 뿌듯하게 보다 시선을 내렸다.

어디 있을까...?”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허벅지, 무릎에 이어 종아리까지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뒤에도 살펴봤지만 이름은 여전히 아무데도 없었다. 의아함에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팬티를 잡고 내리려는 순간 카마사키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바지를 부여잡던 것과 달리 카마사키가 팬티가 쭈그러들 정도로 힘을 주었다.

, 적당히 해라. 후타쿠치.”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에 후타쿠치가 확신했다. 일주일동안 배구부에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던 것. 이상할 정도로 불안한 표정. 직감적으로 팬티에 숨겨진 곳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카마사키 또한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굳은 표정이었지만 후타쿠치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이름이 새겨지고 난 뒤로부터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이름의 장본인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내 이름이 언제 새겨질지 기다려왔다. 후타쿠치는 전에 없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카마사키가 방심한 틈을 타 카마사키의 팬티를 내렸다.

!”

카마사키가 바로 국부를 가렸지만 그 쪽에는 이름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바로 카마사키를 끌어안은 자세로 카마사키의 엉덩이 부분을 확인했다.

.”

, 너 진짜...!”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후타쿠치가 가만히 카마사키의 엉덩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손길에 카마사키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거... 뭐라고 읽죠?”

“......”

후타쿠치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카마사키의 몸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 하나 손가락을 쓸어내리며 이름을 확인했다.

하하, 환장하겠네.”

... 라고 적혀 있는데?”

몰라요? 뭐가 있는지?”

카마사키는 자신이 발가벗겨 후타쿠치에게 안겨있는 자세인 것도 까먹었는지 태평하게 물어왔다. 며칠 동안 미칠 듯이 가렵고 따가워서 홍선병인지는 알았지만 후타쿠치처럼 카마사키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하필 스스로 살피기 어려운 부위라 이름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카마사키가 말했다. 후타쿠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조용한 공간에 흐트러지다 후타쿠치가 말했다.

제 이름이 적혀 있네요.”

거짓말...”

카마사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맞아요.

거짓말입니다.

빌어먹게도 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네요.

 

 

 

----------------------------------------------------------

 

완성하고 바로 올려서 수정x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카보쿠] 청포도  (0) 2017.03.25
[후타카마] 진단메이커 연성  (0) 2017.02.28
[후타카마] 너의 이기  (4) 2017.01.11
[야마츠키] 거스러미  (0) 2016.12.24
[후타카마] 후일담  (0) 2016.12.14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너의 이기

2017. 1. 11. 02:18 from

 

* 나중에 재회하는 이야기

* 고등학교 때 둘이 잠시 사귀었다는 설정(후타쿠치>카마사키)

* 먼저 사귀자고 한건 후타쿠치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것도 후타쿠치일 것 같다.

 

 

 

 

[후타카마] 너의 이기

 

 

짧지 않은 시간동안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사람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과천선이란 말은 당연히 믿지 않는다. 헛소리지.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올 것이고, 만약 변한다고 해도 본연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 사귄다는 말을 들으면 우습다. 애초에 헤어질 사람들이 다시 만난다고 해도 똑같은 이유로 다시 이별을 하게 될 텐데, 왜 사귀는가 싶다. 이별의 이유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서로 맞춰가며 살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영역과 생각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지. 똑같은 이유, 똑같은 결말.

 

다시 만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하겠죠. 아직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으면 더더욱. 안 그래요?”

 

대학에 들어가 만난 여자와 4년을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 최근에 또다시 사귀기로 했다는 모니와 선배는 굳은 얼굴이었다. 다시 사귄다고 말하면 내가 뭐 잘됐다고 축하라도 해줄 줄 알았나? 네 말이 틀리다는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사람한테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기 마련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딱 맞는 사람일 순 없어, 후타쿠치.”

 

절로 웃음이 났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둘도 없는 것처럼, 서로의 모든 것이 다 어울릴 순 없는 거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잘 만날 수 있을까? 후타쿠치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점이 있으니까 조금씩 맞춰나가며 사는 거야. 똑같은 이유로 헤어졌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다시 사귀기로 한 거고.”

그러니까,”

 

후타쿠치는 상체를 기울여 모니와 선배에게 다가갔다. 동그란 눈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모니와 선배는 굳은 얼굴임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애초에 고등학교 때부터 그다지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성격은 변함없는 선배다. 세상 일이 다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 텐데.

 

, 그럼 선배가 증명해 보던지요.”

 

선배 말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 모니와는 후타쿠치를 노려보다 얼마 마시지 않은 맥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 원샷. 후타쿠치가 놀리듯 말을 걸었지만 모니와는 그대로 맥주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나갔다. 좀 심했나. 후타쿠치는 모니와가 떠난 자리와 빈 맥주잔을 보다 시큰둥하게 남은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선배한테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일 뿐이다. 한 번 안 돼서 헤어진 사람은 결국 또 다시 헤어지게 될 뿐이다. 그럴 바에야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지. 모니와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후타쿠치 씨. 다음 목요일에 오사카로 출장 좀 다녀와야겠는데요?”

?”

 

상사인 이케다가 서류를 내밀었다. 처음 보는 회사에 대한 내역이었다. 설마 하는 눈으로 이케다를 보자 이케다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이번에 새로 맺은 거래처인데 말이야. 새로 체결한 김에 가서 계약서도 쓰고, 눈도장도 찍어야하지 않겠어? 오사카라서 좀 멀긴 하지만.”

하하하. 그렇죠. 새로 계약했으니 얼굴 맞대고 한 번 봐야죠.”

그렇지? 하하.”

 

이케다가 실없이 웃었다. 하하하, 눈도장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저번 주부터 일이 꼬이는 바람에 밀린 일이 얼만데 오사카 출장이라니. 새 거래처면 나 같은 말단 말고 당신 같은 사람이 가야하는 게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사였다. 오늘따라 머리가 벗겨진 이케다의 이마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잘 부탁해요, 후타쿠치 씨. 알았지?”

, . . 그럼요.”

 

영락없이 이번 주는 모조리 야근이다.

 

 

 

, 진짜. 진짜 언젠가 때려치우지.”

 

출장 가는 전날까지 야근을 하는 바람에 피곤이 쌓일 만큼 쌓였다. 후타쿠치는 비척거리며 자리에 일어나 회사에서 정해준 숙소로 발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전에 도착해 거래처 미팅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가자마자 눈 좀 붙일 생각에 후타쿠치는 걸음을 서둘렀다. 숙소까지 가는 지하철에 타 핸드폰을 확인하자 메시지가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난 모니와 선배였다.

 

[내가 증명한다, 후타쿠치.]

 

하여튼 성실한 선배다. 건방진 후배한테 화 한번 제대로 내지도 않는 모니와 선배는 이런 때조차도 선배다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사귀는 거겠지.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지.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나을 텐데. 모니와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선배는 틀렸다.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뿐이다. 후타쿠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피곤에 절은 몸이 그대로 축 늘어지고 조용히 수마가 찾아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은 오랜만이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 근처에 자취하고 있어서 딱히 지하철을 탈 이유도 없었고, 대학 때도 기숙사에 살아 마찬가지였다.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느라 지하철타고 어디 갈 틈도 없었고. 고등학교때는 가끔 탔는데. 고등학교도 집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서 통학할 수 있었지만 가끔씩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아니, 가끔이 아닌가. 꽤 자주였던 것 같다. 그냥 어디 놀러가느라 탔던 게 아니라, 규칙적으로 자주... 왜였지? 지하철을 탈 만한 일이 나한테 있었나?

 

“...

“...쿠치, 후타쿠치.”

 

, 지하철에서 그대로 잤나보다. 누군가 어깨를 거세게 흔들며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사정없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떴다. 누군지 몰라도 한소리 하려고 얼굴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

일어났어?”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와,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게 먼 든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이 사람이 내 앞에 서있는 거지? 후타쿠치가 멍하니 카마사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게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머리를 염색했고, 군데군데 검은색 뿌리가 자라나있는 모습과 짙은 눈썹. 꾸준히 운동을 계속하는지 셔츠 위로 희미하게 근육이 드러나는 것까지 똑같았다.

 

, 그랬다. 고등학교 때 탈 이유도 없었던 지하철을 꾸준히 탔던 건 이 사람 때문이었다. 일부러 집 방향과 반대인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기도 했고, 가끔씩 함께 먼 곳으로 놀러가기도 했었다. 몇 년 동안 이 사람에 대해서 떠올려본 적이 없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 시절의 일들이 반짝거리며 하나, 둘씩 떠올랐다. 후타쿠치는 멍하니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다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고등학생 때 알았다. 어렸을 적부터 반반한 얼굴과 큰 키, 머리도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서인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고,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학년을 불문하고 고백을 수십 번 받았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좋아한다며 편지며 선물을 건네는 여자들은, 뭐 솔직히 귀여웠다. 이렇게 나를 좋아해준다니 그렇구나. 그러나 그 뿐이었다. 몇 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자들과 사귀어 봤지만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예쁘기는 하지만 그 뿐이었기에 사귀는 것은 별 대단한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한때 성적 쾌감에 빠져든 적은 있지만 그것도 잠시로, 얼마 안 있어 흥미를 잃은 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성적 쾌감은 쾌감일 뿐이고 그 뒤의 허무함이 너무 컸으니까 안 하느니만 못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던 따라오는 시선들과 고백해오는 여자들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같은 반 녀석들은 게이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놀려 댔고, 부럽다는 눈빛을 했다. 연애에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뭘 해야 재밌으려나 싶을 때 배구부에 들었다. 솔직히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배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배구도 하지 않으면 일상이 죽을 만큼 지루했다. 다시 선배가 생긴다는 건 싫었지만 배구는 싫지 않으니까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3학년들은 틈만 나면 시비를 걸며 몰아댔다. 그 날도 그랬다. 갑자기 연습을 하다가 3학년 중 한 사람이 제대로 블로킹을 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불러내더니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밀며 시비를 걸었다.

 

, 선배가 말하는데 왜 그따위로 쳐다 보냐? 불만 있어?”

. 아닙니다.”

? 너 지금 내 앞에서 한숨 쉬냐?”

 

있는 힘껏 힘을 내서 어깨를 밀어내는 것에 절로 뒤로 밀려났다. 선배랍시고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싶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말 한 번 해보지 않았던 2학년 선배였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선배. 이만 하시죠.”

? , 카마사키 후배라고 위해주는 척 하냐?”

이 녀석 건방진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배구는 진지하게 하는 것 같은데요. 블로킹도 제대로 하고요.”

뭐가 제대로야? ?”

저희 때보단 낫잖아요!”

 

남자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3학년을 이끌고 코트를 나갔다. 꼴 보기 싫었던 3학년을 치워준 건 좋았지만 그때 결심했다. 아무리 재미없어지더라도 이딴 배구부 나가고 말 거라고. 선배랍시고 시비 걸고 군기 잡는 게 싫어서 중학생 때도 한바탕 했었다. 다시 반복할 바에야 그냥 나가고 만다. 그렇게 연습이 끝나고 정리를 시작하는데 남자가 손짓했다.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또 시비 거는 건가 싶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차피 나가게 될 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표정을 풀지 않고 따라가자 남자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자식 진짜 건방지네?”

뭐에요. 시비 걸려고 부르셨습니까?”

 

남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퍽퍽 때리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저 사람들 자기 실력 부족한 거 알아서 괜히 저러는 거니까.”

됐습니다. 어차피 저 나갈 거니까요.”

? , 안 돼. 너 건방져도 배구 잘하던데? 내가 3학년 되면 네 건방짐 다 참아줄 테니까 그만두지 마.”

?”

 

남자는 이후로도 어깨를 퍽퍽 치며 절대로 그만두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말끝마다 건방지긴 하지만, 건방져도, 라고 말하지를 않나 네가 사람을 좀 열 받게 하긴 하더라, 라고 하면서도 그만두지 말라고 말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남자는 기어코 나를 잡으며 계속 배구부에 남게 했다.

 

그리고 카마사키 야스시가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깨달았다. 결코 첫 눈에 반했던 게 아니다. 애초에 남자고. 카마사키 씨의 말처럼 시비를 걸던 3학년들이 은퇴하고 나자 카마사키 씨는 내 건방진 말투와 행동을 다 받아주었다. 울컥해서 반응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장난 같은 투닥거림이 반복되고, 콕 찌르면 팍 하고 반응하는 게 재밌어서 일부러 건방지게 말을 걸었다. 깨닫고 보니 계속 카마사키 씨의 주변을 맴돌았다. 저절로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갔다. 처음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염색한 노란 머리도 시간이 흐르자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어서 좋았다. 단순한 사고방식이나 배구에 열혈인 점도 좋았다. 그렇게 하나, 하나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사소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냥 마음이 갔다.

 

같은 남자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가 3학년, 인터하이가 끝나고 은퇴하고 나자 문제가 생겼다. 당연하듯 함께했던 부활동 시간이 사라졌다. 볼 일이 없으면 만나지 못할 만큼 카마사키 씨도 나도 바빠졌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부리나케 달려가 체육관으로 달려가도 카마사키 씨는 없었다. 같은 학년도 아닌 카마사키 씨와는 학교에서 잠깐 마주치는 것 외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데, 오히려 불이 붙은 것처럼 안달이 났다. 이대로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게 된다면 그저 고등학교 선, 후배로밖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서로에게 연결고리가 그 뿐이라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여름합숙에 은퇴한 3학년들이 찾아왔다. 아이스크림이며 간식 등을 들고 놀러왔다는 말을 하며 카마사키 씨는 언제나 그렇듯 잘하고 있느냐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좋으면서도 괜히 분했다. 은퇴하고 난 뒤의 카마사키 씨는 운동량이 줄어 근육이 좀 빠지긴 했어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한가하세요? 취업 활동 하셔야죠?”

얌마. 니가 말 안 해도 잘하고 있거든!”

너 모르는구나?”

 

옆에서 선배들이 사 온 간식들을 나눠주던 나메츠가 카마사키 씨를 향해 물었다.

 

카마사키 선배, 꽤 좋은 데서 내정될 것 같다고 들었는데요.”

? 어떻게 알았냐?”

어쩌다 들어서요. 정말이에요?”

... 오사카 쪽에 건너건너 아는 분이 계셔서.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별 다른 곳이 없다면 아마 그 쪽으로 갈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카마사키 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듣기로 좋은 회사가 아니냐면서 나메츠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는 말을 했다. 그 옆에서 나는 멀뚱하게 듣기만 했다. 오사카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이대로 카마사키 씨가 졸업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수선해지는데 원거리라니 생각도 못했다.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에 카마사키 씨의 팔을 잡고 체육관을 나왔다. 무작정 끌고 가는 것에 카마사키 씨가 당황하며 말을 하는 것이 들렸지만 팔을 놓을 수 없었다. 놓으면 그대로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왜 그래? 할 말 있어?”

저요.”

너 뭐.”

 

화가 났다. 얼빵한 얼굴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조급한데. 당장이라도 우리 사이에 뭐라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저랑 사귀어요.”

?”

 

뭘 잘못 들었냐는 표정으로 카마사키 씨가 되물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오히려 내 가슴이 시끄럽게 울렸다.

 

좋아하니까 사귀자고요.”

장난 하냐?”

 

사람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장난이냐며 피식 웃는 얼굴에 울컥했다. 카마사키 씨가 은퇴하고 난 뒤로 몇 번이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노란 뒤통수만 봐도 그대로 달려가고 싶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뭣도 모르게 웃는 얼굴조차 좋았다.

 

그대로 카마사키 씨의 뒷목을 잡고 키스를 했다. 당황해서 얼굴이며 팔을 버둥거리는 몸을 벽에 밀어붙이고 혀까지 집어넣자 카마사키 씨는 눈을 질끈 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혀가 입천장을 간질일 때마다 눈썹이 찡그려지고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때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모습 하나 하나에 손가락이 찌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항상 이렇게 휘두르고 싶었다.

 

, 하아. ...!”

 

얼굴이 빨갛게 익은 카마사키 씨가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 뒷걸음쳤다. 본능적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양 손을 내밀어 어깨를 밀어댔다.

 

너 이 새끼...! 장난도 정도껏,”

, 장난?”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장난으로 치부하려는 카마사키 씨에게 다가갔다.

깨를 미는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카마사키 씨가 동시에 몸을 물렸다. 주춤거리던 몸이, 그 등이 벽에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카마사키 씨가 물었다. 진심이냐고.

 

아무리 저라도 이런 농담 안 합니다.”

 

조용하게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눈을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의심에 가득한 얼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몸을 카마사키 씨는 밀어내지 않았다. 멍하니 얼이 빠진 얼굴을 보다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흠칫하며 물러서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벽에 닿은 등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아까와 달리 입술을 여러 번 잘근거리고 깨물어 보았지만 카마사키 씨는 입술을 달싹일 뿐 다물지 않았다. 닫히지 않은 그 틈이, 물러나지 않는 몸이 나를 받아들인다는 허락의 의미인 것 같았다. 그대로 혀를 들이밀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코가네가와였다.

 

카마사키 선배! 후타쿠치 선배! 어디 있어요?”

 

화들짝 놀란 카마사키 씨가 퍽하고 나를 밀었다. 무의식적으로 온 힘을 실었는지 맞은 어깨가 꽤 아팠다.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카마사키 씨가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코가네가와와 마주친 카마사키 씨가 코가네가와의 등을 밀며 걸어가고 있었다.

 

, 어어! 무슨 일이야?”

연습 다시 시작한데요. 근데 후타쿠치 선배는요? 혹시 못 보셨어요?”

, 글쎄? 난 호, 혼자 있었는데.”

 

근데 선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요? 더위 먹으셨어요? 코가네가와가 걱정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카마사키 씨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귀는 물론이고 목까지 빨갛게 물든 카마사키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다.

 

연습이 끝났을 때 카마사키 씨는 먼저 돌아가고 난 뒤였다. 아무 말도 안하고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아까는 조금이라도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사소한 일로도 기분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면서도 기분은 더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더 신경질이 났다. 이대로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결국 불이 꺼진 방을 조심스럽게 나왔다. 바람이라도 쐬면서 터질 듯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여름이라 열시가 넘었음에도 밖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게다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오히려 기분이 다운될 정도였다. 하염없이 걷다 적당한 곳에 앉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늘어져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밤중에 누군가 싶었지만 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누구든 나중에 뭐라 하면 자고 있었다고 핑계를 댈 셈이었다. 그러나 웅웅거리는 진동은 끊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 뭐야 진짜.”

 

누가 걸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전화한 거였으면 각오하라는 마음이었다.

 

후타쿠치?”

 

입술에 풀이 발라진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운 것에 눌린 것 마냥 답답했던 가슴이 팍 하고 터진 것 같았다.

 

카마사키... ?”

 

전화기 너머로 카마사키 씨의 멋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색하게 웃는 소리와 긴장했는지 드문드문 끊기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놀라서 중간에 그냥 가버렸다며, 아까 장난으로 치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진심이니까 나도 진심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그저 생각해보겠다는 말 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직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국에는 나를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 이후로 카마사키 씨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한 번도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사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카마사키 씨에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귀면 된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 진심인 녀석에게 어중간하게 받아줄 수 없다며 답을 미뤘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 속으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할 때 카마사키 씨는 내가 바라던 답을 해주었다.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일 잘 끝났냐?”

, 그냥 인사 치레였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잘 끝내야지, 하고 카마사키가 어느새 다 비운 그릇을 보다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말했다.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3시간이 흐른 기분이다. 그냥 무시하고 숙소로 돌아갈 걸 그랬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내리려던 곳을 한참 지나쳐 서둘러 내리려는 후타쿠치를 붙잡고 카마사키가 명함을 건넸다. 모처럼 만에 술 한 잔 마시자면서. 후타쿠치가 자신의 명함을 챙겨서 카마사키에게 건넬 틈도 없이 지하철 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지하철을 바라보다 후타쿠치는 시계를 확인하고 말없이 택시를 잡았다. 얼마나 잔건지 숙소에 들렀다 가기엔 미팅 시간까지 촉박했다. 할 수없이 거래처 근처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멍하니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그제야 카마사키의 명함을 꺼내 살펴보니 여전히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긴, 쉽게 이직할 사람이 아니었다.

 

술 한 잔 하자니.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때 이후로 이미 몇 년이지, 5년이나 흘렀다. 애초에 사귀던 사이 이전에 고등학교 선, 후배였으니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명함을 가지고 이리 저리 장난치다 툭 하고 날려 보냈다. 그렇다 하더라도 둘이 마주 앉아 예전의 일을 추억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테이블 위로 명함이 미끄러지다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토도독거리는 소리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후타쿠치의 손가락 끝에서 반복되었다. 토도독, 토도독. 그리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새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그대로 가방과 겉옷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지하철 역 근처에 위치한 카페라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했던 그 소리에 후타쿠치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씨, 진짜.

 

솔직히 말해 오래 전 헤어졌던 남자를 마주하는 건 꺼려졌다. 하물며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버렸던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난 뒤, 명함이 아니라 납을 단 것처럼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 명함에 쓰인 전화번호와 익숙한 이름 네 글자가 자꾸 뇌리에 떠다녔다. 미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눈앞에 두고 후타쿠치는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카마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으면 만나는 거고, 안 받으면 안 만나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를 내기를 걸며 발신음을 들었다. 세 번만 기다리다 끊기로 하자, 마음먹었을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후타쿠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렇게 카마사키가 아는 술집에서 만난 게 방금 전의 일이다. 서로 반가운 척 인사를 하고, 메뉴를 고르고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마셨다. 궁금하지도 않은 회사 이야기를 나누고, 모니와 선배나 아오네, 코가네가와같이 가끔씩 연락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잘못 길을 든 사람처럼 정작 궁금했던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침묵이 다가올 성 싶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나 곧이어 어떤 말로도 덮여지지 않는 화제가 나왔다.

 

,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말이야.”

?”

그 때.”

 

헤어지던 날,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그저 카마사키의 말을 기다렸다.

 

미안했다.”

“... 뭐가요?”

 

카마사키는 맥주잔을 쥐고 망설이다 조용히 잔을 비웠다. ,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이후로 생각해 봤는데, 내가 조금 무신경했나 싶었어.”

“......”

내가 널 이기적인 놈이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니었나 싶더라고.”

 

하하, 카마사키가 맥없이 웃었다. 아까 새로 주문한 안주를 들고 온 종업원에게 카마사키는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 이제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다.”

다 지난 일인데 뭐 어때요.”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다시금 5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카마사키 씨는 스스로 이기적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기적인 선택을 강요했었다. 나는 카마사키 씨에게 나의 이기를, 카마사키 씨는 나에게 그의 이기를. 좁혀지지 않는 대화는 점차 갈등을 쌓았고 충동적으로 나는 헤어지자 말했었다. 절대 굽혀주지 않는 카마사키 씨가 미웠었다. 늘 못이긴 척 내게 한 수 접어주던 사람이었지만, 그 때만큼 간절하게 그가 내 말을 들어주길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 순간, 단 한 번 카마사키 씨가 스스로 욕심을 부렸을 때 나는 그것조차 참지 못했다. 그 때는 어렸었다. 그래서 이별을 고집했다. 나중에야 고집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카마사키 씨를 찾아갔을 땐 이미 늦었었다.

 

그래도 계속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어.”

됐다니깐요.”

미안했다.”

 

잘못한 것은 딱히 카마사키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사람마냥 카마사키는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후타쿠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는 카마사키의 옆모습을 보다 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따갑게 탄산이 목을 찔렀다. 후타쿠치는 차마 카마사키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 또한 변한 게 없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건방지게 상대방을 휘두르기만 할 뿐 맞춰주질 못한다.

 

내일 다시 돌아간다고?”

출장이니까 다시 가야죠. 카마사키 씨는 내일 회사 안가십니까?”

간다, . 가야지. 얌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웠다.”

술 냄새 나거든요? 저리 떨어져요.”

 

귀엽지 않은 녀석! 카마사키는 술에 취해 킥킥거리며 비틀거렸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기에 지하철 개찰구를 앞에 두고 헤어지자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인사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후타쿠치에게 잘 가라고 하면서도 옷깃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잘 가라니까. 진짜.”

, 놔야 가죠! 놔요!”

, 근데 모니와 진짜로 아직 그 여자랑 사귄다냐... 내가 들은 것만 해도 만나고 헤어지고 몇 번을 반복했던데...”

 

그러니까 모니와 선배 얘기는 술집에서도 몇 번이나 물어봤었고 몇 번이나 다시 대답했다고, 후타쿠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카마사키가 손을 흔들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옷을 붙잡힌 후타쿠치의 손도 함께 흔들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후타쿠치가 고개를 기울였다.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

 

진짜 잘 가라, 카마사키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카마사키의 고개 숙인 목가가 발갛게 물들여 있었다. 후타쿠치는 그 뒷모습을 보다 뒤늦게 카마사키를 불렀지만 카마사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멀리서 지하철이 도착했다는 벨소리가 울렸다.

 

 

 

도쿄에 돌아오고 나서도 오사카에서 있던 일이 마음에 밟혔다. 정확히는 자꾸 카마사키 씨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그 모습,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던 그 말의 의도가 궁금했다. 만났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걸 왜 좋다고 했을까. 어차피 다시 헤어지게 될 게 뻔한데. 카마사키 씨 또한 모니와 선배같이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

 

후타쿠치는 깊이 고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해치우는 성격이었고, 불가능하다 싶으면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찾았다. 인간관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는 사람은 칼같이 정리되었고 누구 하나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귀던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더라도, 한 번 관계가 수틀린 사람은 다시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끊긴 인연을 매듭지어 봤자 그 매듭은 언젠가 풀리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마사키 또한 그렇다. 이미 오래 전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것도 후타쿠치가 먼저 헤어지자 말했으니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우연히 오사카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잠깐일 뿐이지, 계속 연락을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카마사키 씨와 헤어지고 도쿄로 가는 기차를 탈 때만해도 그랬다. 앞으로 우연으로가 아니라면 다시 카마사키 씨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가끔씩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널 이기적인 놈이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니었나 싶더라고.’

그래도 계속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어.’

미안했다.’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이제 끝이라고 결론지은 머리와 달리 마음이 복잡했다. 혼자 잘못한 게 아니면서도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었다는 그 말과, 아쉽다고 부러워하는 말투로 말하던 목소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좋겠다며 말했던, 꺼질 듯이 작게 말하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여전히 노랗게 물들인 염색한 머리카락, 언제나 뒤에서 바라볼 때면 동그랗다고 생각했던 뒤통수가 보고 싶었다.

 

참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어지고 난 뒤부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함께 했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서 이제 잊었나 싶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게 없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교하던 날이나, 처음으로 둘이 영화를 보러 갔을 때의 옷차림, 긴장된 얼굴로 첫 섹스를 하고 조용한 방 안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던 날의 일. 차곡차곡 쌓아왔던 벽이 아주 작은 구멍 하나로 인해 팍하고 터진 것만 같았다.

 

우리가 헤어지던 그 때. 내가 카마사키 씨를 좋아하는 것만큼, 카마사키 씨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만을 원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간신히 사귀게 되었지만 곧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오만함과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가득했었다. 건방진 태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언제고 기다리겠다 말했지만 속으로는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었다. 그렇기에 조금씩 카마사키 씨의 말투나 행동이 사소하게 변할 때마다 웃기게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마음을 간질거리는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그만큼 오사카에 있는 회사로 취직하겠다는 카마사키 씨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그저 추억으로 전락하고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게 헤어지는 결말이 상상되었다. 그래서 오사카로 가서 원거리 연애를 할 바에야 헤어지자고 했다. 카마사키 씨는 말을 잇지 못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왜 벌써 끝을 생각하느냐 말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끝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게 왜 잘못인 것처럼 다그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끝까지 카마사키 씨에게 남겨지길 강요했고, 카마사키 씨는 끝까지 이해를 바랐다.

 

서로 멀어진다고 해도 그게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후타쿠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에요.’

 

서로의 입술이 닫혔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누구의 입에서든 어떤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 생각해보면 먼저 포기한 사람은 나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했다. 카마사키 씨와의 관계, 카마사키 씨의 마음과 카마사키 씨에 대한 내 마음 모두를 포기했다. 카마사키의 마음이 변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먼저 변한 것은 자신이었다. 멀어지더라도 변하지 말자던 사람은 카마사키 씨였고, 재차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서 좋겠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하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다시 사귀기로 한 거고.’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후타쿠치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24. 홀린 듯 기차 시간표를 찾아 첫 차를 예매했다. 오늘이 주말임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후타쿠치는 겉옷을 챙겼다. 뭐 하나 준비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카마사키 씨를 만나고 싶었다. 5년 전부터 조금도 설레어 본 적 없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별을 했어도, 잊으려고 노력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던 거다. 다시 한 번 헤어지더라도 끊긴 인연을 매듭짓고 싶었다. 후타쿠치는 책상 위에 꾸깃하게 접혀 굴러다니는 명함을 집었다. 하나 씩, 천천히 숫자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받고 안 받고는 상관없었다. 세 번이 넘게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타쿠치?”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이 몇 신데 전화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가 소리 없이 웃었다.

 

카마사키 씨.”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타카마] 진단메이커 연성  (0) 2017.02.28
[후타카마] 끝  (0) 2017.01.17
[야마츠키] 거스러미  (0) 2016.12.24
[후타카마] 후일담  (0) 2016.12.14
[아카보쿠] 카메라맨×gv배우 썰  (0) 2016.11.20
Posted by 005500 :

[야마츠키] 거스러미

2016. 12. 24. 20:08 from

 

[야마츠키] 거스러미

 

 

 

 

 며칠 전부터 손톱 옆에 나 있는 거스러미가 신경 쓰였다. 보기에 좋지 않아서 손톱으로 긁었더니 툭 떼어졌다. 그러나 거스러미 부근의 살도 함께 찢겨 붉은 속살이 드러났고, 만지면 따가워서 그 전보다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손을 씻을 때도 쓰라렸고, 하필이면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라 필기를 할 때도 연필에 눌려 아팠다. 거스러미를 떼기 전보다 더 좋지 않았다평소에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던 부위인데,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하루 종일 손가락을 매만지게 되었다.

 

 

 

 어느 날 야마구치가 하교하던 중에 걸음을 멈추고 할 얘기가 있다며 불렀다. 답지 않게 침울한 표정에, 진지하게 말을 거는 모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놀이터에 도착했다. 근처 벤치에 앉아 야마구치의 말을 기다렸지만, 무슨 할 말이기에 야마구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야마구치가 드디어 말했다.

 

츳키, 우리 사귀는 사이 맞아?”

 

 뜬금없는 말이었다. 사귀기 시작한지 이제 한 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야마구치는 나와 사귀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뭔데?”

그 전하고 다를 게 없잖아.”

크게 달라져야 하는 게 있어?”

 

 야마구치는 입을 다물었다. 야마구치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귀게 되어서 뭐가 달라져야 하는 거지? 닭살 돋게 팔짱끼고 다니고, 매일같이 라인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걸 기대하는 건가?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달라져야지.”

“... 어떻게?”

어떻게라니. 좀 더 애정표현을 한다던가, 하다못해 다른 애들보다 나를 챙겨준다거나,”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로 말을 하면 할수록 계속 빗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실실거리며 웃던 야마구치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친 표정의 야마구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고쳐 맸다.

 

아니, 츳키는 아무것도 변한 거 없어.”

야마구치.”

사귀어도 사귀는 것 같지 않아, 나는.”

“......”

우리 좀 시간을 갖자.”

 

 야마구치는 혼자 자리를 떴다. 나는 벤치에 남겨져 멀어져가는 야마구치의 뒷모습을 보다 괜히 열 받아 바닥을 발로 찼다. 주변에 널부러져 있던 낙엽이 흩어지며 먼지가 날렸다.

 

 애초에 같은 남자끼리 사귀는데, 뭐가 달라져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야마구치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야마구치는 내가 야마구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고 얘기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인이 되기 전에도 야마구치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당연히 다른 애들보다 각별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상대였고, 표현을 잘 안한다 뿐이지 생일도 매년 챙겨주었고 야마구치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가 개봉되면 제일 먼저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배구부 연습이 끝나면 매일 기다려주는 것도, 시험기간에 같이 공부를 하는 것도 야마구치였다. 다른 사람과는 공부도 같이 해본 적 없고, 약속을 잡아 놀러 간 적도 없다. 이 정도면 됐지 않나? 혼자 고민해 봐도 답은 없었다.

 

 쉽게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야마구치와의 갈등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시간을 갖자고 하던 야마구치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등교도, 하교도 매일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걷게 되었다. 점심시간에도 야마구치는 반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배구부 연습에서도 야마구치는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심지어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없던 화도 치솟을 지경이었다.

 

야마구치!”

 

 혼자 휙 하니 가버리는 야마구치를 따라가며 이름을 불렀지만 야마구치는 대답도 않고 가버렸다. 오기가 생겨 달려가서 어깨를 잡으니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언제나의 얼굴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

 

 야마구치가 내게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나? 내가 아니라 다른 애들에게도 이런 표정의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야마구치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왜 혼자 가냐고.”

우리 시간을 갖자고 했잖아.”

 

 차가운 표정과 냉정하게 선을 긋는 말투. 그리고 전적으로 나에게 잘못이 있다는 듯한 말에 나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네가 왜 나한테 화를 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대체 왜 그래.”

 

 내 말에 야마구치의 눈썹이 눈에 띄게 찡그러졌다. 잡힌 어깨를 돌려 내 손을 쳐 내고 야마구치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헤어지자는 얘기가 왜 나와? 난 츳키가 좀 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대해줬으면 싶어서 얘기했던 거였어.”

난 제대로 진지하게,”

그러니까 나는 못 느끼겠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야마구치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씩씩거리다 야마구치는 내게 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쥐었다. 내 키가 더 큰 탓에 상체가 절로 굽혀졌다. 잡힌 멱살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야마구치는 그보다 더 빨리 멱살을 당겨 쥐었다.

 

츳키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하는 행동이 어떤지.”

 

 야마구치는 그대로 손을 풀고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진짜 헤어지고 싶어서 말한 거라면 솔직하게 얘기해 주고.”

 

 이 말을 끝으로 한동안 야마구치와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사귀게 된 것은 한 달 전으로, 야마구치가 고백하면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집 근처 놀이터에서 야마구치는 긴장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었다. 좋아한다며, 연인으로써 사귀고 싶다고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야마구치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그러나 야마구치는 친한 친구였고 그 때만큼은 야마구치의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끼리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남자와 사귀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야마구치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에, 바로 아차 싶었지만 긴장된 얼굴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변하자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야마구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지 확실하게 감이 잡히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야마구치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흐지부지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야마구치와 사귀게 되어도 친구였을 때와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야마구치는 여전히 내가 내뱉는 핀잔을 받아주었으며 등, 하교도 같이 했고 주말에는 함께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가거나 레코드 샵을 가기도 했다. 친구였을 때와 똑같은 일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귀게 되어서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야마구치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특별한 점도 없지만 이상한 점도 없다. 사귄다고 해서 매일을 좋아해, 사랑해 하는 것도 이상하다. 지금까지 몇 년을 친구로 지내왔는데 갑자기 연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크게 변할 리가 없다. 대체 야마구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달 밖에 안 지났는데. 헤어지고 싶냐는 말에 이렇다 말도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벌써 질려서 그런 것일까? 사귀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라서? 어떻게 야마구치가 내게 이럴 수 있지? 자기가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네가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는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아침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 야마구치의 집에 갔다. 아직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아침인데다 쌀쌀한 날씨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야마구치가 나왔다. 야마구치는 나를 보고 잠시 굳어 있다가 또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

 

 막상 야마구치의 얼굴을 보자 계속 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난 얼굴을 하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깜빡 잊을 만큼 머리가 하얗게 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와 눈을 마주하면서도 야마구치의 표정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쿵쿵 뛰었다.

 

할 말 없으면 먼저 갈게.”

야마구치!”

?”

“... 너야말로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

넌 몇 년을 나랑 친구였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

 

 어제 밤에 잠을 자기 전에 생각했던 말들, 아침에 야마구치의 집으로 걸어가며 하려고 했던 말들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되는대로 내뱉어지는 말들에 야마구치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야마구치의 행동에 화가 났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 다그치듯 야마구치를 나무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사소하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얘기해달라고, 누구와 연애하는 게 처음이니까 잘하지 못해도 네가 이해해 달라고 얘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는 츳키야말로.”

뭐를,”

대체 내 고백 왜 받아 줬어?”

“......”

츳키 말대로 몇 년 동안 친구였으니까 츳키에 대한 거라면 아키테루 형만큼 내가 더 잘 알아.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고.”

 

 야마구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나는 것이 분하다는 듯이 야마구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고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어. 나 좋아해서 사귀는 거야?”

그건...”

 

 바보같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물쩍 받아들였던 선택에 대한 대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받아주지 않으면 어색해질까봐 그랬어? 그런 거라면 그냥 말해주지. 츳키 마음 강요할 정도로 난처하게 만들지 않아.”

, 런거 아니야.”

그냥 친구를 원한 거였으면 그렇게 해. 그냥 헤어지고 친구로 남을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알았던 야마구치는 누구였을까 싶을 정도로, 야마구치의 말은 하나, 하나 단호했다. 야마구치의 성격 상 그 단호한 말의 뒤에는 며칠을 걸려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한 번이라도 야마구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나? 우리가 이제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받아들였었나? 나는 야마구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일까?

 

츳키.”

나는...”

 

 우리가 사귀던 한 달 동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 나는 야마구치를 친구로 대했나, 연인으로 대했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데 야마구치가 끝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게 낫겠어. 나도 이제 지쳤으니까.”

 

 오늘은 학교 따로 가자, 먼저 갈게. 야마구치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야마구치가 처음 내게 시간을 갖자고 했던 그 하교 길, 배구부 연습이 끝나고 야마구치를 잡아 세웠던 그 날, 그리고 지금. 친구로 돌아가자는 말이 이제 우리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친구로 남고 싶은가?

 

야마구치!”

“......”

, 잠깐만. 서 봐.”

 

 야마구치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멀어지면 다시는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마구치, 부르는 소리에 여전히 답이 없었다.

 

미안해!”

 

  제발 거기 서서 얘기를 들어.

  동정으로 사귄 게 아니야. 어색해질까봐 그런 것도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하고 너를 대하는 내 태도가 똑같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하고 너는 달라.

  하지만 친구로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나는 너처럼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표현도 제대로 못하지만.

  네가 없으면 나는 외로워. 네가 항상 날 봐줬으면 좋겠어.

  먼저 뒤 돌아서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네 친구라서?”

 

 조용히 말을 듣던 야마구치가 말했다.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였다.

 

“...아하니까.”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야마구치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그런 야마구치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이어 야마구치의 어깨가 잘게 들썩이는 것에 조심스레 다가가 야마구치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말에 야마구치는 훌쩍이며 뒤를 돌아 나를 안았다. 다시는 헤어지잔 소리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울먹임을 머금고 있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타카마] 끝  (0) 2017.01.17
[후타카마] 너의 이기  (4) 2017.01.11
[후타카마] 후일담  (0) 2016.12.14
[아카보쿠] 카메라맨×gv배우 썰  (0) 2016.11.20
[후타카마] 마음의 소리  (0) 2016.11.11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후일담

2016. 12. 14. 11:51 from

[후타카마] 카마사키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의 짧은 에필로그~

 

 

 

 

 

아침이 밝은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던 중 초인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름대로 걱정했는지 사사야가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아직까지 쓰라린 탓에 비척비척 걸어 문을 열자 녀석은 제일 먼저 카마사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얼굴은 초췌하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별 상처는 없었다.

 

살아 있네.”

.”

, 목소리가 왜 그러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사사야의 시선을 무시하고 카마사키는 침대로 기어올랐다. 몸살이 오려는지 하루 종일 피곤하고 잠이 왔다. 축 늘어져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카마사키를 보며 사사야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진즉에 취소하라니까 말을 안 듣더니 가차 없이 차였나 싶었다. 그래도 어디 다치진 않아서 다행이군.

 

, 괜찮아?”

. 몸살기운이 있어서, 기껏 와줬는데 미안.”

약은 먹었냐?”

 

귀가 막힌 듯 사사야의 말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끝으로 카마사키는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 , 카마사키. 자냐? 사사야는 고개를 내밀어 잠든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다 대충 바닥에 앉았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죽이라도 해주고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불쌍한 놈. 아직까지 어떤 센티넬하고 각인도 못하고 임시 가이드로 전전하는 카마사키가 안타까웠던 그였다. 이제야 짝을 찾나 싶었더니, 반했다는 남자는 개망나니고. 어지간히 일이 안 풀리는 녀석이었다.

 

사사야는 냉장고를 열어 달걀 한 알을 꺼내고 쌀을 찾았다. 몇 번 집에 놀러온 적이 있기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꽤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카마사키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쌀을 씻고 물에 잠시 불리기 위해 기다리는데 초인종이 눌렸다. 띵동 띵동 여러 번 울리는 것에, 거 참 인내심 없는 사람이네 싶어 사사야는 절로 인상이 쓰였다. 카마사키가 초인종 소리에 불편한 듯 뒤척이는 것에 얼른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

 

개새끼가 서 있었다. 정정, 후타쿠치가 있었다. 사사야는 깜짝 놀라 문고리를 잡은 손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었다. 반면 후타쿠치는 사사야를 보고 잔뜩 표정을 구기며 멋대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당신 누구야?”

, ? 저요?”

 

후타쿠치는 기분이 나빴다. 주변에 물고 물어 카마사키의 집 주소를 알아내서 찾아와 집까지 찾아왔을 때까지는 기분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처음이었으니까 아직 아파하려나, 자신답지 않게 가이드의 걱정을 하며 초인종을 누르고 카마사키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후타쿠치를 알고 있는지 돌처럼 굳는 것이다. 분명 카마사키라고 적혀있는 집에서 낯선 남자가 나온 것이다.

 

그럼 누구한테 말했다고 생각해요?”

, 저는 사, 사사야 타케히토라고.”

 

사사야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볼록한 침대가 바로 보였다. 폭 감싸인 이불 끝자락에 노란 머리카락이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데 이 남자는 대체 누군지 싶어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려 멍청하게 굳어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랑 무슨 관계야.”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개 같은 센티넬의 눈빛에 사사야는 옴짝달싹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안 그래도 험악한 눈빛이 가라앉으려고 하자 그, 그냥 치, 친구인데요! 하고 얼른 대답했다. 그냥 조금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걸 그랬나, 친구라고 같이 죽이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사사야는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미안하다 카마사키.

 

볼 일 없으면 나가.”

, ?”

 

후타쿠치가 카마사키가 잠든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멍하니 서 있던 사사야는 그런 후타쿠치를 보다가 가방을 챙겼다. 뭐지, 이상하게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후타쿠치가 무섭게 시선을 던지는 것에 사사야가 망설이다 말했다.

 

, 저기.”

뭐야.”

, 카마사키가 지금 몸살이라, 그러니까 아픈데요.”

 

사사야의 말에 후타쿠치가 잠든 카마사키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확실히 체온이 올랐다는 것이 느껴졌다. 약은 먹었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사사야는 안 먹은 것 같다고 조심히 말했다. 지난 섹스의 여파 때문인지, 감기에 걸려서인지 확실히 카마사키는 아파보였다. 어딘가 불편한 마음에 후타쿠치는 사사야를 내쫓았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나가면서 사사야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최악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후타쿠치는 누가 아프다고 봐줄 남자도 아니고, 몸살에 걸렸다고 약은 먹었냐며 물어볼 사람도 아니었다. 하물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목을 만진 뒤에도 손을 빼지 않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만지작댔었다. 사사야는 걸음을 옮기며 꼭 나중에 카마사키를 추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사야가 떠난 뒤, 후타쿠치는 방안을 둘러보며 약을 찾았다. 처음 왔으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무턱대고 방을 뒤졌다. 한참 뒤에야 신발장 근처에 있는 수납장에서 감기약을 발견했다. 딱 하나 남은 감기약과 물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고 카마사키를 일으켰다. 묵직하니 기대오는 카마사키의 몸이 아까보다 뜨거웠다. 아파서 정신없이 자는 카마사키의 입을 벌리고 약을 넣었다. 잔을 기울여 입에 물을 흘려주었지만 그대로 다시 흐르는 바람에 후타쿠치는 입으로 물을 머금고 카마사키의 입에 직접 흘러주었다. 턱을 들어 올린 덕에 카마사키의 목울대가 본능적으로 움직여 약을 삼킬 수 있었다. 후타쿠치는 물이 묻은 카마사키의 턱을 닦아주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만나자마자 한 판 하려고 했는데. 빌빌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섹스가 필요할 만큼 급하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기는 했다. 땀을 흘리며 끙끙대는 카마사키를 보다 후타쿠치는 적당히 작은 수건을 적셔 카마사키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내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던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기서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싶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프다는 말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가 무엇이 다르기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떠나기가 아쉬운지 모를 일이었다. 후타쿠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카마사키의 옆에 누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이유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고 후타쿠치는 가볍게 결론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몸을 뒤척거리던 카마사키가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사이즈가 별로 작지 않아서 잠을 잘 때 불편하게 느낀 적이 없는데 뭔가에 끼인 것처럼 답답했다. 불을 키지도 않았는데 바로 보이는 천장이 뚜렷하게 보였다. 멍하니 깜빡이며 몇 시지, 생각하는데 숨소리가 들렸다. 타인의 숨소리였다.

 

.”

 

고개를 돌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라 몸이 굳었다. 분명히 아침에 사사야가 왔던 것 같은데 후타쿠치가 있다. 게다가 카마사키가 누운 침대의 빈자리에 비집고 옆으로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진짜 제멋대로인 남자였다. 그제 처음 본 사람 집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는 후타쿠치의 행동은 카마사키의 상식선에 멀찍이 벗어났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뜰 것 같아 이불을 걷는 데에도 몇 분이 걸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닥친 위험에 카마사키의 손에 땀이 찼다. 여전히 잠든 후타쿠치를 내려다보며 카마사키는 이 상황에서 뭘 어째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써 일어나긴 했지만 벽과 후타쿠치에 가로막힌 상태에서 침대를 벗어나긴 힘들어보였다. 그렇다고 그 옆에 다시 누워 잠드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후타쿠치를 일부러 깨우는 것도 무서웠다.

 

어떡하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후타쿠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기를 몇 번, 잠든 모습에 또 홀려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잠들었기에 제대로 보이는 곳은 귀와 턱 주변뿐이었다. 귀는 별로 크지 않은데 귓불이 동그래서 귀여웠다. 귓불은 누구나 동그랗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모양은 삐죽한데 귓불만 동그란 것이 카마사키의 눈에는 그리 느껴졌다. 둥근 귓불에서 이어지는 턱 선도 예뻤다. 적당히 날카로운 선이 뚜렷하게 도드라져 한번쯤 손을 대 만지고 싶을 정도였다. 카마사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기울이고 후타쿠치의 얼굴을 구경했다. 잘생겼다. 잘생겨서 반한 거야.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얼굴 곳곳을 보다 깨달았다. 이렇게 잘생겼으니 자신이 첫 눈에 반한 거라고, 어이없지만 그랬다.

 

이제 다시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후타쿠치가 계속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며 카마사키는 머리에 후타쿠치의 얼굴을 새기듯 보았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만지고 싶었다. 닿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얼굴에 반했다고는 하지만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었고, 뒷모습이라도 발견할 때면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고양됐었다. 정말로 좋았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누군가 왜 그렇게 좋으냐 물으면, 이제는 굳이 이유를 헤아려 말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냥, 개 같은 녀석이라고 불리는 남자지만 그런 제멋대로인 행동도, 세상모르게 잠든 이 얼굴도, 그냥 다 좋았다.

 

다 봤습니까?”

 

후타쿠치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진작 깨있었다는 듯 목소리가 잠기지 않고 깨끗했다. 처음부터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 부족한데.”

 

카마사키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말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카마사키의 대담한 대답에 후타쿠치는 피식 웃었다. 얼굴 뚫어질 것 같은데요, 카마사키 씨. 후타쿠치가 일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카마사키는 굽혔던 허리를 바로 했다. 조금만 더 보고 싶었는데. 기운이 빠져 침대 헤드에 기댔다. 후타쿠치는 그 옆에 자신도 기대앉았다. 후타쿠치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으나 그는 말없이 카마사키를 관찰할 뿐이었다.

 

왜 왔어, ?”

, 그냥.”

 

카마사키는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말로 그냥 왔나.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남자이니 기분 내키는 대로 찾아왔을 수도 있다. 와서 뭘 하려고? 그때 그, 생각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거친 섹스가 생각났다.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설마 그 목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후타쿠치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아니, 딱 하나가 남아 있다.

 

.”

“? 뭐에요.”

저기, 나한테 보복이라던가 하려고 온, ?”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존댓말을 써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둘 다 그만뒀다. 친하지 않으니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이미 그제 말을 놨고, 하지만 계속 반말로 하기엔 조금 불편했다. 그런 카마사키를 눈치 챘는지 나이 많으니까 말 놓으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7살이니 그게 자연스러웠다.

 

벌 받고 싶어요? 별로 그러려고 온 건 아닌데 원한다면 그래줄 수도 있고.”

, 아니. 아니라면 됐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왜 왔는지.”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후타쿠치의 얼굴을 봐도 그 또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면 후타쿠치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며 그 밤이 다시 생각났다. 울며 버둥거리는 몸짓이라던가, 움찔거리며 조여 오던 내벽의 감각, 덫에 걸린 듯 파드득거리며 들썩이던 등허리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아한다고 부르짖으며 매달려오던 것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날 좋아한다고 말해 봐요.”

 

카마사키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확인받고자 하는 후타쿠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제는 정신이 없어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하기엔 목구멍이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뻐끔거리며 입을 달싹이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기다렸다.

 

듣고 싶어요.”

,”

 

다시 한 번, 저 남자가 좋아한다고 말을 해주길 바랐다.

 

, 좋아해.”

 

카마사키는 끝내 시선을 돌리고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짧게 친 머리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가 고스란히 보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자신이 시키는 대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가 보고 싶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후타쿠치는 기분이 좋아졌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에 카마사키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타카마] 너의 이기  (4) 2017.01.11
[야마츠키] 거스러미  (0) 2016.12.24
[아카보쿠] 카메라맨×gv배우 썰  (0) 2016.11.20
[후타카마] 마음의 소리  (0) 2016.11.11
[아카보쿠] 올가미  (0) 2016.11.07
Posted by 005500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