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중에 재회하는 이야기
* 고등학교 때 둘이 잠시 사귀었다는 설정(후타쿠치>카마사키)
* 먼저 사귀자고 한건 후타쿠치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것도 후타쿠치일 것 같다.
[후타카마] 너의 이기
짧지 않은 시간동안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사람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과천선이란 말은 당연히 믿지 않는다. 헛소리지.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올 것이고, 만약 변한다고 해도 본연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 사귄다는 말을 들으면 우습다. 애초에 헤어질 사람들이 다시 만난다고 해도 똑같은 이유로 다시 이별을 하게 될 텐데, 왜 사귀는가 싶다. 이별의 이유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서로 맞춰가며 살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영역과 생각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지. 똑같은 이유, 똑같은 결말.
“다시 만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하겠죠. 아직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으면 더더욱. 안 그래요?”
대학에 들어가 만난 여자와 4년을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 최근에 또다시 사귀기로 했다는 모니와 선배는 굳은 얼굴이었다. 다시 사귄다고 말하면 내가 뭐 잘됐다고 축하라도 해줄 줄 알았나? 네 말이 틀리다는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사람한테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기 마련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딱 맞는 사람일 순 없어, 후타쿠치.”
절로 웃음이 났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둘도 없는 것처럼, 서로의 모든 것이 다 어울릴 순 없는 거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잘 만날 수 있을까? 후타쿠치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점이 있으니까 조금씩 맞춰나가며 사는 거야. 똑같은 이유로 헤어졌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다시 사귀기로 한 거고.”
“그러니까,”
후타쿠치는 상체를 기울여 모니와 선배에게 다가갔다. 동그란 눈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모니와 선배는 굳은 얼굴임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애초에 고등학교 때부터 그다지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성격은 변함없는 선배다. 세상 일이 다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 텐데.
“뭐, 그럼 선배가 증명해 보던지요.”
선배 말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 모니와는 후타쿠치를 노려보다 얼마 마시지 않은 맥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오, 원샷. 후타쿠치가 놀리듯 말을 걸었지만 모니와는 그대로 맥주잔을 내려놓고 일어서 나갔다. 좀 심했나. 후타쿠치는 모니와가 떠난 자리와 빈 맥주잔을 보다 시큰둥하게 남은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선배한테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일 뿐이다. 한 번 안 돼서 헤어진 사람은 결국 또 다시 헤어지게 될 뿐이다. 그럴 바에야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지. 모니와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후타쿠치 씨. 다음 목요일에 오사카로 출장 좀 다녀와야겠는데요?”
“네?”
상사인 이케다가 서류를 내밀었다. 처음 보는 회사에 대한 내역이었다. 설마 하는 눈으로 이케다를 보자 이케다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이번에 새로 맺은 거래처인데 말이야. 새로 체결한 김에 가서 계약서도 쓰고, 눈도장도 찍어야하지 않겠어? 오사카라서 좀 멀긴 하지만.”
“하하하. 그렇죠. 새로 계약했으니 얼굴 맞대고 한 번 봐야죠.”
“그렇지? 하하.”
이케다가 실없이 웃었다. 하하하, 눈도장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저번 주부터 일이 꼬이는 바람에 밀린 일이 얼만데 오사카 출장이라니. 새 거래처면 나 같은 말단 말고 당신 같은 사람이 가야하는 게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사였다. 오늘따라 머리가 벗겨진 이케다의 이마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잘 부탁해요, 후타쿠치 씨. 알았지?”
“하, 하. 네. 그럼요.”
영락없이 이번 주는 모조리 야근이다.
“와, 진짜. 진짜 언젠가 때려치우지.”
출장 가는 전날까지 야근을 하는 바람에 피곤이 쌓일 만큼 쌓였다. 후타쿠치는 비척거리며 자리에 일어나 회사에서 정해준 숙소로 발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전에 도착해 거래처 미팅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가자마자 눈 좀 붙일 생각에 후타쿠치는 걸음을 서둘렀다. 숙소까지 가는 지하철에 타 핸드폰을 확인하자 메시지가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난 모니와 선배였다.
[내가 증명한다, 후타쿠치.]
하여튼 성실한 선배다. 건방진 후배한테 화 한번 제대로 내지도 않는 모니와 선배는 이런 때조차도 선배다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사귀는 거겠지.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지.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나을 텐데. 모니와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선배는 틀렸다.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뿐이다. 후타쿠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피곤에 절은 몸이 그대로 축 늘어지고 조용히 수마가 찾아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은 오랜만이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 근처에 자취하고 있어서 딱히 지하철을 탈 이유도 없었고, 대학 때도 기숙사에 살아 마찬가지였다.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느라 지하철타고 어디 갈 틈도 없었고. 고등학교때는 가끔 탔는데. 고등학교도 집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서 통학할 수 있었지만 가끔씩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아니, 가끔이 아닌가. 꽤 자주였던 것 같다. 그냥 어디 놀러가느라 탔던 게 아니라, 규칙적으로 자주... 왜였지? 지하철을 탈 만한 일이 나한테 있었나?
“...치”
“...쿠치, 후타쿠치.”
아, 지하철에서 그대로 잤나보다. 누군가 어깨를 거세게 흔들며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사정없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떴다. 누군지 몰라도 한소리 하려고 얼굴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아.”
“일어났어?”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와,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게 먼 든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이 사람이 내 앞에 서있는 거지? 후타쿠치가 멍하니 카마사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게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머리를 염색했고, 군데군데 검은색 뿌리가 자라나있는 모습과 짙은 눈썹. 꾸준히 운동을 계속하는지 셔츠 위로 희미하게 근육이 드러나는 것까지 똑같았다.
아, 그랬다. 고등학교 때 탈 이유도 없었던 지하철을 꾸준히 탔던 건 이 사람 때문이었다. 일부러 집 방향과 반대인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기도 했고, 가끔씩 함께 먼 곳으로 놀러가기도 했었다. 몇 년 동안 이 사람에 대해서 떠올려본 적이 없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 시절의 일들이 반짝거리며 하나, 둘씩 떠올랐다. 후타쿠치는 멍하니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다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고등학생 때 알았다. 어렸을 적부터 반반한 얼굴과 큰 키, 머리도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서인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고,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학년을 불문하고 고백을 수십 번 받았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좋아한다며 편지며 선물을 건네는 여자들은, 뭐 솔직히 귀여웠다. 이렇게 나를 좋아해준다니 그렇구나. 그러나 그 뿐이었다. 몇 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자들과 사귀어 봤지만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예쁘기는 하지만 그 뿐이었기에 사귀는 것은 별 대단한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한때 성적 쾌감에 빠져든 적은 있지만 그것도 잠시로, 얼마 안 있어 흥미를 잃은 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성적 쾌감은 쾌감일 뿐이고 그 뒤의 허무함이 너무 컸으니까 안 하느니만 못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던 따라오는 시선들과 고백해오는 여자들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같은 반 녀석들은 게이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놀려 댔고, 부럽다는 눈빛을 했다. 연애에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뭘 해야 재밌으려나 싶을 때 배구부에 들었다. 솔직히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배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배구도 하지 않으면 일상이 죽을 만큼 지루했다. 다시 선배가 생긴다는 건 싫었지만 배구는 싫지 않으니까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3학년들은 틈만 나면 시비를 걸며 몰아댔다. 그 날도 그랬다. 갑자기 연습을 하다가 3학년 중 한 사람이 제대로 블로킹을 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불러내더니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밀며 시비를 걸었다.
“야, 선배가 말하는데 왜 그따위로 쳐다 보냐? 불만 있어?”
“후. 아닙니다.”
“후? 너 지금 내 앞에서 한숨 쉬냐?”
있는 힘껏 힘을 내서 어깨를 밀어내는 것에 절로 뒤로 밀려났다. 선배랍시고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싶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말 한 번 해보지 않았던 2학년 선배였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선배. 이만 하시죠.”
“뭐? 야, 카마사키 후배라고 위해주는 척 하냐?”
“이 녀석 건방진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배구는 진지하게 하는 것 같은데요. 블로킹도 제대로 하고요.”
“뭐가 제대로야? 어?”
“저희 때보단 낫잖아요!”
남자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3학년을 이끌고 코트를 나갔다. 꼴 보기 싫었던 3학년을 치워준 건 좋았지만 그때 결심했다. 아무리 재미없어지더라도 이딴 배구부 나가고 말 거라고. 선배랍시고 시비 걸고 군기 잡는 게 싫어서 중학생 때도 한바탕 했었다. 다시 반복할 바에야 그냥 나가고 만다. 그렇게 연습이 끝나고 정리를 시작하는데 남자가 손짓했다.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또 시비 거는 건가 싶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차피 나가게 될 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표정을 풀지 않고 따라가자 남자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자식 진짜 건방지네?”
“뭐에요. 시비 걸려고 부르셨습니까?”
남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퍽퍽 때리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저 사람들 자기 실력 부족한 거 알아서 괜히 저러는 거니까.”
“됐습니다. 어차피 저 나갈 거니까요.”
“어? 야, 안 돼. 너 건방져도 배구 잘하던데? 내가 3학년 되면 네 건방짐 다 참아줄 테니까 그만두지 마.”
“예?”
남자는 이후로도 어깨를 퍽퍽 치며 절대로 그만두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말끝마다 건방지긴 하지만, 건방져도, 라고 말하지를 않나 네가 사람을 좀 열 받게 하긴 하더라, 라고 하면서도 그만두지 말라고 말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남자는 기어코 나를 잡으며 계속 배구부에 남게 했다.
그리고 카마사키 야스시가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깨달았다. 결코 첫 눈에 반했던 게 아니다. 애초에 남자고. 카마사키 씨의 말처럼 시비를 걸던 3학년들이 은퇴하고 나자 카마사키 씨는 내 건방진 말투와 행동을 다 받아주었다. 울컥해서 반응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장난 같은 투닥거림이 반복되고, 콕 찌르면 팍 하고 반응하는 게 재밌어서 일부러 건방지게 말을 걸었다. 깨닫고 보니 계속 카마사키 씨의 주변을 맴돌았다. 저절로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갔다. 처음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염색한 노란 머리도 시간이 흐르자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어서 좋았다. 단순한 사고방식이나 배구에 열혈인 점도 좋았다. 그렇게 하나, 하나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사소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냥 마음이 갔다.
같은 남자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카마사키 씨가 3학년, 인터하이가 끝나고 은퇴하고 나자 문제가 생겼다. 당연하듯 함께했던 부활동 시간이 사라졌다. 볼 일이 없으면 만나지 못할 만큼 카마사키 씨도 나도 바빠졌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부리나케 달려가 체육관으로 달려가도 카마사키 씨는 없었다. 같은 학년도 아닌 카마사키 씨와는 학교에서 잠깐 마주치는 것 외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데, 오히려 불이 붙은 것처럼 안달이 났다. 이대로 카마사키 씨가 졸업하게 된다면 그저 고등학교 선, 후배로밖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서로에게 연결고리가 그 뿐이라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여름합숙에 은퇴한 3학년들이 찾아왔다. 아이스크림이며 간식 등을 들고 놀러왔다는 말을 하며 카마사키 씨는 언제나 그렇듯 잘하고 있느냐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좋으면서도 괜히 분했다. 은퇴하고 난 뒤의 카마사키 씨는 운동량이 줄어 근육이 좀 빠지긴 했어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한가하세요? 취업 활동 하셔야죠?”
“얌마. 니가 말 안 해도 잘하고 있거든!”
“너 모르는구나?”
옆에서 선배들이 사 온 간식들을 나눠주던 나메츠가 카마사키 씨를 향해 물었다.
“카마사키 선배, 꽤 좋은 데서 내정될 것 같다고 들었는데요.”
“어? 어떻게 알았냐?”
“어쩌다 들어서요. 정말이에요?”
“뭐... 오사카 쪽에 건너건너 아는 분이 계셔서.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별 다른 곳이 없다면 아마 그 쪽으로 갈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카마사키 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듣기로 좋은 회사가 아니냐면서 나메츠는 카마사키 씨에게 잘됐다는 말을 했다. 그 옆에서 나는 멀뚱하게 듣기만 했다. 오사카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이대로 카마사키 씨가 졸업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수선해지는데 원거리라니 생각도 못했다.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에 카마사키 씨의 팔을 잡고 체육관을 나왔다. 무작정 끌고 가는 것에 카마사키 씨가 당황하며 말을 하는 것이 들렸지만 팔을 놓을 수 없었다. 놓으면 그대로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 왜 그래? 할 말 있어?”
“저요.”
“너 뭐.”
화가 났다. 얼빵한 얼굴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조급한데. 당장이라도 우리 사이에 뭐라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저랑 사귀어요.”
“뭐?”
뭘 잘못 들었냐는 표정으로 카마사키 씨가 되물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오히려 내 가슴이 시끄럽게 울렸다.
“좋아하니까 사귀자고요.”
“장난 하냐?”
사람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장난이냐며 피식 웃는 얼굴에 울컥했다. 카마사키 씨가 은퇴하고 난 뒤로 몇 번이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노란 뒤통수만 봐도 그대로 달려가고 싶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뭣도 모르게 웃는 얼굴조차 좋았다.
그대로 카마사키 씨의 뒷목을 잡고 키스를 했다. 당황해서 얼굴이며 팔을 버둥거리는 몸을 벽에 밀어붙이고 혀까지 집어넣자 카마사키 씨는 눈을 질끈 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혀가 입천장을 간질일 때마다 눈썹이 찡그려지고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때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모습 하나 하나에 손가락이 찌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항상 이렇게 휘두르고 싶었다.
“하, 하아. 너...!”
얼굴이 빨갛게 익은 카마사키 씨가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 뒷걸음쳤다. 본능적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양 손을 내밀어 어깨를 밀어댔다.
“너 이 새끼...! 장난도 정도껏,”
“하, 장난?”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장난으로 치부하려는 카마사키 씨에게 다가갔다. 어
깨를 미는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카마사키 씨가 동시에 몸을 물렸다. 주춤거리던 몸이, 그 등이 벽에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카마사키 씨가 물었다. 진심이냐고.
“아무리 저라도 이런 농담 안 합니다.”
조용하게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눈을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의심에 가득한 얼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몸을 카마사키 씨는 밀어내지 않았다. 멍하니 얼이 빠진 얼굴을 보다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흠칫하며 물러서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벽에 닿은 등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아까와 달리 입술을 여러 번 잘근거리고 깨물어 보았지만 카마사키 씨는 입술을 달싹일 뿐 다물지 않았다. 닫히지 않은 그 틈이, 물러나지 않는 몸이 나를 받아들인다는 허락의 의미인 것 같았다. 그대로 혀를 들이밀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코가네가와였다.
“카마사키 선배! 후타쿠치 선배! 어디 있어요?”
화들짝 놀란 카마사키 씨가 퍽하고 나를 밀었다. 무의식적으로 온 힘을 실었는지 맞은 어깨가 꽤 아팠다.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카마사키 씨가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코가네가와와 마주친 카마사키 씨가 코가네가와의 등을 밀며 걸어가고 있었다.
“어, 어어! 무슨 일이야?”
“연습 다시 시작한데요. 근데 후타쿠치 선배는요? 혹시 못 보셨어요?”
“그, 글쎄? 난 호, 혼자 있었는데.”
근데 선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요? 더위 먹으셨어요? 코가네가와가 걱정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카마사키 씨는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귀는 물론이고 목까지 빨갛게 물든 카마사키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다.
연습이 끝났을 때 카마사키 씨는 먼저 돌아가고 난 뒤였다. 아무 말도 안하고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아까는 조금이라도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사소한 일로도 기분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면서도 기분은 더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더 신경질이 났다. 이대로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결국 불이 꺼진 방을 조심스럽게 나왔다. 바람이라도 쐬면서 터질 듯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여름이라 열시가 넘었음에도 밖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게다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오히려 기분이 다운될 정도였다. 하염없이 걷다 적당한 곳에 앉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늘어져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밤중에 누군가 싶었지만 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누구든 나중에 뭐라 하면 자고 있었다고 핑계를 댈 셈이었다. 그러나 웅웅거리는 진동은 끊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아, 뭐야 진짜.”
누가 걸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전화한 거였으면 각오하라는 마음이었다.
“후타쿠치?”
입술에 풀이 발라진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운 것에 눌린 것 마냥 답답했던 가슴이 팍 하고 터진 것 같았다.
“카마사키... 씨?”
전화기 너머로 카마사키 씨의 멋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색하게 웃는 소리와 긴장했는지 드문드문 끊기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놀라서 중간에 그냥 가버렸다며, 아까 장난으로 치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진심이니까 나도 진심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그저 생각해보겠다는 말 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직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국에는 나를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 이후로 카마사키 씨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한 번도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사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카마사키 씨에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귀면 된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 진심인 녀석에게 어중간하게 받아줄 수 없다며 답을 미뤘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 속으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할 때 카마사키 씨는 내가 바라던 답을 해주었다.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일 잘 끝났냐?”
“뭐, 그냥 인사 치레였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잘 끝내야지, 하고 카마사키가 어느새 다 비운 그릇을 보다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말했다.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3시간이 흐른 기분이다. 그냥 무시하고 숙소로 돌아갈 걸 그랬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내리려던 곳을 한참 지나쳐 서둘러 내리려는 후타쿠치를 붙잡고 카마사키가 명함을 건넸다. 모처럼 만에 술 한 잔 마시자면서. 후타쿠치가 자신의 명함을 챙겨서 카마사키에게 건넬 틈도 없이 지하철 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지하철을 바라보다 후타쿠치는 시계를 확인하고 말없이 택시를 잡았다. 얼마나 잔건지 숙소에 들렀다 가기엔 미팅 시간까지 촉박했다. 할 수없이 거래처 근처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멍하니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그제야 카마사키의 명함을 꺼내 살펴보니 여전히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긴, 쉽게 이직할 사람이 아니었다.
술 한 잔 하자니.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때 이후로 이미 몇 년이지, 5년이나 흘렀다. 애초에 사귀던 사이 이전에 고등학교 선, 후배였으니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명함을 가지고 이리 저리 장난치다 툭 하고 날려 보냈다. 그렇다 하더라도 둘이 마주 앉아 예전의 일을 추억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테이블 위로 명함이 미끄러지다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토도독거리는 소리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후타쿠치의 손가락 끝에서 반복되었다. 토도독, 토도독. 그리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새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그대로 가방과 겉옷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지하철 역 근처에 위치한 카페라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했던 그 소리에 후타쿠치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씨, 진짜.
솔직히 말해 오래 전 헤어졌던 남자를 마주하는 건 꺼려졌다. 하물며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버렸던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난 뒤, 명함이 아니라 납을 단 것처럼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 명함에 쓰인 전화번호와 익숙한 이름 네 글자가 자꾸 뇌리에 떠다녔다. 미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눈앞에 두고 후타쿠치는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카마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으면 만나는 거고, 안 받으면 안 만나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를 내기를 걸며 발신음을 들었다. 세 번만 기다리다 끊기로 하자, 마음먹었을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후타쿠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렇게 카마사키가 아는 술집에서 만난 게 방금 전의 일이다. 서로 반가운 척 인사를 하고, 메뉴를 고르고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마셨다. 궁금하지도 않은 회사 이야기를 나누고, 모니와 선배나 아오네, 코가네가와같이 가끔씩 연락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잘못 길을 든 사람처럼 정작 궁금했던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침묵이 다가올 성 싶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나 곧이어 어떤 말로도 덮여지지 않는 화제가 나왔다.
“그,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말이야.”
“예?”
“그 때.”
헤어지던 날,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그저 카마사키의 말을 기다렸다.
“미안했다.”
“... 뭐가요?”
카마사키는 맥주잔을 쥐고 망설이다 조용히 잔을 비웠다. 크,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이후로 생각해 봤는데, 내가 조금 무신경했나 싶었어.”
“......”
“내가 널 이기적인 놈이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니었나 싶더라고.”
하하, 카마사키가 맥없이 웃었다. 아까 새로 주문한 안주를 들고 온 종업원에게 카마사키는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음, 이제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다.”
“다 지난 일인데 뭐 어때요.”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다시금 5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카마사키 씨는 스스로 이기적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기적인 선택을 강요했었다. 나는 카마사키 씨에게 나의 이기를, 카마사키 씨는 나에게 그의 이기를. 좁혀지지 않는 대화는 점차 갈등을 쌓았고 충동적으로 나는 헤어지자 말했었다. 절대 굽혀주지 않는 카마사키 씨가 미웠었다. 늘 못이긴 척 내게 한 수 접어주던 사람이었지만, 그 때만큼 간절하게 그가 내 말을 들어주길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 순간, 단 한 번 카마사키 씨가 스스로 욕심을 부렸을 때 나는 그것조차 참지 못했다. 그 때는 어렸었다. 그래서 이별을 고집했다. 나중에야 고집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카마사키 씨를 찾아갔을 땐 이미 늦었었다.
“그래도 계속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어.”
“됐다니깐요.”
“미안했다.”
잘못한 것은 딱히 카마사키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사람마냥 카마사키는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후타쿠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는 카마사키의 옆모습을 보다 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따갑게 탄산이 목을 찔렀다. 후타쿠치는 차마 카마사키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 또한 변한 게 없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건방지게 상대방을 휘두르기만 할 뿐 맞춰주질 못한다.
“내일 다시 돌아간다고?”
“출장이니까 다시 가야죠. 카마사키 씨는 내일 회사 안가십니까?”
“간다, 가. 가야지. 얌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웠다.”
“술 냄새 나거든요? 저리 떨어져요.”
귀엽지 않은 녀석! 카마사키는 술에 취해 킥킥거리며 비틀거렸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기에 지하철 개찰구를 앞에 두고 헤어지자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인사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후타쿠치에게 잘 가라고 하면서도 옷깃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잘 가라니까. 진짜.”
“아, 놔야 가죠! 놔요!”
“야, 근데 모니와 진짜로 아직 그 여자랑 사귄다냐... 내가 들은 것만 해도 만나고 헤어지고 몇 번을 반복했던데...”
그러니까 모니와 선배 얘기는 술집에서도 몇 번이나 물어봤었고 몇 번이나 다시 대답했다고, 후타쿠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카마사키가 손을 흔들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옷을 붙잡힌 후타쿠치의 손도 함께 흔들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에 후타쿠치가 고개를 기울였다.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네?”
진짜 잘 가라, 카마사키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카마사키의 고개 숙인 목가가 발갛게 물들여 있었다. 후타쿠치는 그 뒷모습을 보다 뒤늦게 카마사키를 불렀지만 카마사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멀리서 지하철이 도착했다는 벨소리가 울렸다.
도쿄에 돌아오고 나서도 오사카에서 있던 일이 마음에 밟혔다. 정확히는 자꾸 카마사키 씨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그 모습,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던 그 말의 의도가 궁금했다. 만났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걸 왜 좋다고 했을까. 어차피 다시 헤어지게 될 게 뻔한데. 카마사키 씨 또한 모니와 선배같이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
후타쿠치는 깊이 고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해치우는 성격이었고, 불가능하다 싶으면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찾았다. 인간관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는 사람은 칼같이 정리되었고 누구 하나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귀던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더라도, 한 번 관계가 수틀린 사람은 다시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끊긴 인연을 매듭지어 봤자 그 매듭은 언젠가 풀리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마사키 또한 그렇다. 이미 오래 전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것도 후타쿠치가 먼저 헤어지자 말했으니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우연히 오사카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잠깐일 뿐이지, 계속 연락을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카마사키 씨와 헤어지고 도쿄로 가는 기차를 탈 때만해도 그랬다. 앞으로 우연으로가 아니라면 다시 카마사키 씨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가끔씩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널 이기적인 놈이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니었나 싶더라고.’
‘그래도 계속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어.’
‘미안했다.’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이제 끝이라고 결론지은 머리와 달리 마음이 복잡했다. 혼자 잘못한 게 아니면서도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었다는 그 말과, 아쉽다고 부러워하는 말투로 말하던 목소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좋겠다며 말했던, 꺼질 듯이 작게 말하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여전히 노랗게 물들인 염색한 머리카락, 언제나 뒤에서 바라볼 때면 동그랗다고 생각했던 뒤통수가 보고 싶었다.
참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어지고 난 뒤부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함께 했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서 이제 잊었나 싶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게 없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교하던 날이나, 처음으로 둘이 영화를 보러 갔을 때의 옷차림, 긴장된 얼굴로 첫 섹스를 하고 조용한 방 안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던 날의 일. 차곡차곡 쌓아왔던 벽이 아주 작은 구멍 하나로 인해 팍하고 터진 것만 같았다.
우리가 헤어지던 그 때. 내가 카마사키 씨를 좋아하는 것만큼, 카마사키 씨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만을 원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간신히 사귀게 되었지만 곧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오만함과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가득했었다. 건방진 태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언제고 기다리겠다 말했지만 속으로는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었다. 그렇기에 조금씩 카마사키 씨의 말투나 행동이 사소하게 변할 때마다 웃기게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마음을 간질거리는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그만큼 오사카에 있는 회사로 취직하겠다는 카마사키 씨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그저 추억으로 전락하고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게 헤어지는 결말이 상상되었다. 그래서 오사카로 가서 원거리 연애를 할 바에야 헤어지자고 했다. 카마사키 씨는 말을 잇지 못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왜 벌써 끝을 생각하느냐 말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끝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게 왜 잘못인 것처럼 다그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끝까지 카마사키 씨에게 남겨지길 강요했고, 카마사키 씨는 끝까지 이해를 바랐다.
‘서로 멀어진다고 해도 그게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후타쿠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에요.’
서로의 입술이 닫혔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누구의 입에서든 어떤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 생각해보면 먼저 포기한 사람은 나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했다. 카마사키 씨와의 관계, 카마사키 씨의 마음과 카마사키 씨에 대한 내 마음 모두를 포기했다. 카마사키의 마음이 변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먼저 변한 것은 자신이었다. 멀어지더라도 변하지 말자던 사람은 카마사키 씨였고, 재차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서 좋겠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하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다시 사귀기로 한 거고.’
‘좋겠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져도 또 다시 만나서.’
후타쿠치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시 24분. 홀린 듯 기차 시간표를 찾아 첫 차를 예매했다. 오늘이 주말임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후타쿠치는 겉옷을 챙겼다. 뭐 하나 준비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카마사키 씨를 만나고 싶었다. 5년 전부터 조금도 설레어 본 적 없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별을 했어도, 잊으려고 노력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던 거다. 다시 한 번 헤어지더라도 끊긴 인연을 매듭짓고 싶었다. 후타쿠치는 책상 위에 꾸깃하게 접혀 굴러다니는 명함을 집었다. 하나 씩, 천천히 숫자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받고 안 받고는 상관없었다. 세 번이 넘게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타쿠치?”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이 몇 신데 전화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가 소리 없이 웃었다.
“카마사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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