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Kaze (3)

2017. 11. 11. 04:01 from

[후타카마] Kaze (3) 


 

***

 

 

생각해보면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물론 눈치는 더럽게 없는 사람이 당사자도 모르는 걸 먼저 알아챈 건 꽤나 놀라웠지만, 워낙 오지랖이 넓은 데다 쓸데없이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여간 별거 아니었다. 고작 캔 음료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리 쉬운 사람이었던가? 우연히 들른 편의점에서 왜 하필 가장 눈에 띄는 게 이거인 거지. 후타쿠치는 못마땅한 눈으로 제 시선을 잡아챈 코코아 캔을 노려보았다. 그 날 이후로 코코아 캔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카마사키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처럼 코코아 캔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벌렁거린다는 거다. 이건 마치, 내가 이거 하나 때문에 낚인 것 같잖아. 똑같이 달릴 거 달린 남자에 자신과 맞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한테.

 


***

 

 

올해 여름은 유난히 짧은 느낌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진행 될 봄고 예선을 준비하느라 근교에서 합숙도 지냈고, 타교와의 연습경기도 줄기차게 치렀다. 방학 내내 배구 말고는 한 게 없을 정도였지만 그 동안의 연습 성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1차 예선에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2차 예선을 앞두자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조금씩 아침, 저녁마다 쌀쌀해지는 환절기가 찾아와 하나 둘씩 저지를 챙겨 입는 시기가 온 것이다. 청개구리처럼 아직도 반팔 티셔츠 차림인 사람이 한 명 있지만.

춥지도 않아요?”

별로.”

보는 사람이 더 추울 지경이었다. 후타쿠치는 저지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며 카마사키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춥다고는 하지만 정말 체질적으로 추위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마냥 허세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뻥 치시네. 그거 다 허세부리는 거잖아요. 제발 근육 자랑 좀 그만해요.”

진짜 안 춥거든?! 원래 추위를 못 느낀다고.”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다 춥다고요. 그것도 다 시각적 공해라니까요?”

누가 그래? 내가 안 춥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너 그냥 나한테 시비 걸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뭘요?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난리에요.”

그러자 카마사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껏 해온 짓들이 있는데 냉큼 오리발부터 내미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사람 신경을 살살 건드렸던 적이 얼마나 많은데 저 자식이.

넌 왜 날이 갈수록 성격이 나빠지는 것 같냐?”

저처럼 착한 후배가 어디 있다고.”

말을 말자.”

하지만 후타쿠치는 그만 둘 마음이 없었다. 라커룸을 나가는 카마사키의 뒤를 따르며 후타쿠치가 말했다.

아무튼 내일부터 저지 입어요. 카마사키 씨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이 체감온도가 내려가니까.”

, 싫다고. 안 춥다고.”

안 추워도 입으라고요. 2차 예선이 다음 주인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예요. 주전이면서 책임감도 없어요?”

귀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던 카마사키가 멈칫했다. 저지를 입는 것 가지고 책임감을 운운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슨 고집인지 카마사키는 쉽게 후타쿠치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내가 17년을 살면서 감기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저지 안 입어도 이 정도로 감기 같은 거 걸리지 않는다고, 짜샤.”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뭘 몇 년이나 감기 안 걸리는지 세고 있어요? 감기는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거니까 언제라도 걸릴 수 있다니까요.”

그건 비실비실한 녀석이나 그러는 거고. 난 아냐. 절대 안 걸려.”

진짜 환장하겠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제 딴에는 환절기라 감기 걸리는 사람이 늘어서 걱정해줬더니 당사자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괜한 고집만 피운다. 운동 좀 하고 근육질이면 감기에 안 걸리는 줄 아나. 후타쿠치는 결국 답답하고 짜증나서 카마사키에게 윽박질렀다.

걸리면 어쩔 건데요!”

걸리면 네가 내 형이다, 이 자식아! 저지 안 입어도 감기 안 걸린다니까 괜히 귀찮게 하고 있어!”

지금 분명히 감기 걸리면 형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예요. 젠장, 확 감기나 걸려 버려라!”

, 너 이 자식. 안 걸려! 안 걸린다고! 너나 걸려라!”

이쯤 되니 후타쿠치는 진심으로 카마사키가 감기에 걸리기를 바랐다. 한 번 걸려 봐야 된통 당하지, 아니면 걸릴 때까지 자기는 감기에 안 걸리는 줄 알고 있을 게 뻔하다. 그리고 결국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내 서로에게 감기 걸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카마사키가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후 연습을 위해 라커룸에 갔다가 마주친 모니와 선배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오늘 학교도 결석했어. 꽤 심한가봐.”

진짜 감기에 걸렸다고요?”

. 타이밍이 영 좋지 않네. 며칠 뒤면 2차 예선이니까.”

감기에 걸리라고 저주를 퍼 붇기는 했지만 정말 걸릴 줄은 몰랐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쩐지 자신이 한 말이 씨가 되어버린 묘한 상황이 돼버렸다. 꽤 심하게 걸렸다는 게 어느 정도인 거지. 학교도 결석할 정도면 많이 아픈 건가. 후타쿠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어떤지 라인을 보내볼까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우울한 얼굴로 침통해하던 모니와가 하소연했다.

하긴 지금까지 안 걸리는 게 이상했어. 지금 날씨에 만날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녔으니까. 게다가 감기 걸린 적도 없으니까 초기 증세가 있었어도 몰랐을걸.”

그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어휴, 진짜 내가 못 살아. 이따 다 같이 병문안 갈 건데 너도 갈래?”

저요?”

핸드폰을 쥔 손이 멈칫했다.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 생각은 있었어도 직접 병문안을 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다 같이 라면 모니와는 물론이고 2학년 선배들도 함께일 텐데 상상만 해도 어색하고 껄끄러울 정도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후타쿠치는 고개를 저었다.

귀찮으니까 전 패스.”

, 강요는 아니니까.”

모니와와 카마사키의 입장이 정반대였다면아픈 모니와에 병문안 가자고 카마사키가 말했더라면선배인데 걱정되지도 않냐고 한 소리 들었을 법 했겠지만, 모니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후타쿠치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하도 잔소리가 많은 사람과 붙어 다니다보니 선뜻 그러라고 말하는 모니와의 반응이 익숙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정상이지. 싫으면 싫은 대로 강요하지 않고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이런 관계가 보통의 선후배 사이이인 거다.

애초에 그 사람은 쓸데없이 간섭이 심하다. 귀찮고, 시끄럽고 짜증난다.

에이씨.

그럼 나 먼저 갈게.”

후타쿠치가 머뭇거리는 사이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모니와가 라커를 닫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에 후타쿠치가 말했다.

그냥 저도 갈게요.”

, 너 옷 다 안 갈아입었잖아.”

?”

무슨 소린가 하고 후타쿠치가 돌아보니 모니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 연습복으로 다 갈아입지 못한 후타쿠치를 손짓했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자신이 한 말이 헷갈리게 들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

, 병문안이요. 카마사키 씨의.”

아아, 난 또 같이 나가자는 줄 알았지. 그럼 연습 끝나고 다 같이 가자.”

후타쿠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모니와는 재차 먼저 가겠다고 말한 뒤 라커룸을 나갔다. 괜히 가겠다고 말했나. 라커룸에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고작 감기 걸렸다고 병문안까지 가는 건 조금 오바가 아닐까. 아니, 후배니까 선배 병문안쯤이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니까.

…….”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오바인 거다. 병문안 가는 게 뭐라고 이랬다저랬다 생각이 끊이지 않는지, 걱정되고 안절부절 못하겠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 마저 옷을 갈아입으며 후타쿠치는 재차 다짐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카마사키와 관련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평소라면, 혹은 상대가 카마사키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절대로 말과 행동에 망설임이 깃들 일이 없는데 말이다.

자신이 왜 그러는 지 알고 있다. 설마, 하고 부정해 봐도 결국 카마사키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었다는 거 말고는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언젠가 카마사키가 코코아 캔을 남몰래 전해줬을 때부터 끌린 거다. 조금씩, 서서히, 계속.

 

오후 연습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다. 2차 예선을 코앞에 두고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자신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수투성이였다. 평소에 잘 하던 리시브는 번번이 빗나가길 일수였고 블로킹은 움직임이 한 템포 느린 탓에 제대로 막은 공격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체육관에 남아 나머지 연습을 자처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도 못한다.

아주 제대로 되는 일이 없네. 수직 상승하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라커를 정리하던 후타쿠치에게 모니와가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후타쿠치, 아까 병문안 간다고 했지?”

……. , .”

근데 미안! 먼저 같이 가자고 해놓고서 다들 못 가게 되었어.”

?”

황당해하는 후타쿠치에게 모니와가 설명했다. 2학년 전공 기초과목이 내일인데 중간고사 때 점수가 반영되는 실습의 중간 점검테스트가 있다는 걸 다들 까먹었었다는 거다. 모니와가 재차 사과하며 후타쿠치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혼자서라도 가줄 수 있어? 좀 그러면 1학년들 더 데리고 같이 가든지.”

아무도 안 갈 거 같은데요.”

후타쿠치가 라커룸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남은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 중에 카마사키의 병문안에 가겠다고 선뜻 말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서 다들 지친데다 선배 병문안이라니 귀찮고 어색할 테니까. 후타쿠치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던 모니와는 그제야 납득하고 아쉬운 낯을 했다.

카맛치 저녁까지 집에 혼자라고 그러던데. 걔네 집 맞벌이인데다 외동이거든.”

외동이에요?”

전혀 아닐 것 같은데. 하는 말과 행동으로 봐서는 맏이에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꽤 놀라웠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모니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안 그래 보이지? 아무튼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은데, 나 사실 지금부터 준비해도 아슬아슬하거든. 부탁인데 너가 잠깐이라도 카맛치네 들러주라.”

부탁이야, 하고 모니와가 말했다.

혼자 병문안 가라니 그건 좀, 하고 후타쿠치가 망설이자 모니와가 쐐기를 놓았다.

아까 가겠다고 했잖아, 그치?”

아니 그야 그랬는데.”

그래도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요. 그러나 모니와는 이어지는 후타쿠치의 말은 무시하고 멋대로 후타쿠치의 손에 가지런히 접은 종이를 쥐어주었다.

이거 카맛치네 가는 길 약도로 그린 거거든? 가는 길에 편의점 있으니까 좀 챙겨서 가주라. 돈은 나중에 줄게.”

, 아니, 아직 간다고 안했.”

나 진짜 위험해서, 먼저 갈게. 부탁해, 후타쿠치!”

모니, 모니와 선배!”

어찌나 급했는지 후타쿠치가 잡을 새도 없이 모니와가 쏜살같이 라커룸을 뛰쳐나갔다. 뒤늦게 후타쿠치가 쫓아갔지만 부르는 소리에도 모니와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러는 게 어딨냐고. 후타쿠치는 하얀 종이를 쥔 채 그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버스를 타고 15, 걸어서 5. 후타쿠치는 낯선 정류장에서 내려 모니와가 그려준 약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편의점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오른쪽에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병문안이니만큼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후타쿠치는 편의점에 들러 따듯한 음료와 푸딩,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아이스크림까지 산 뒤 카마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모니와 선배가 말해두었을까. 과연 혼자 병문안 온 자신을 카마사키가 어떻게 맞을지 궁금해졌다. 엄청 어색할 것 같았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단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인데다 애초에 배구 말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10분은 있다 갈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카마사키라고 적힌 문패가 보였다. 그 앞에 서서 후타쿠치는 괜히 한번 어깨를 털고 초인종을 눌렀다. 발랄한 벨소리가 울렸지만 당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사뭇 긴장한 얼굴로 앞이 아닌 구석에 시선을 두고 딴청을 부렸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목이 다 말랐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미안, 자고 있어서.”

잔뜩 가라앉고 거칠어진 목소리에 후타쿠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삐쳐있는 모습을 한 카마사키가 보였다. 카마사키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마중을 나오는 사이에도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후타쿠치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허락 없이 대문을 열고 카마사키에게 달려 나갔다.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요.”

, 어어. 콜록, 미안.”

힘없이 비척거리는 걷는 모습에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등을 손으로 받쳤다. 집으로 들어가 방까지 가는 도중에도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이라 어지간히 아프지 않는 이상은 결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감기에 꽤 심하게 걸렸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거의 독감 수준이었다. 평소와 달리 축 쳐진 모습에 후타쿠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났다.

어떻게 너 혼자 왔냐, 콜록. 모니와는?”

선배들은 내일 실습 중간 점검인가 뭔가 있다고 못 온다고 했어요. 그보다 얼른 침대에 눕기나 해요.”

그 말에 침대에 누우려던 카마사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후타쿠치를 돌아보는데, 그 모습이 꼭 관절이 어긋난 인형 같이 뻣뻣했다.

. 나 아직 다 못했는, 쿨럭, .”

어떡하지, 하고 카마사키가 패닉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아파서 골골대는 주제에 성적은 신경 쓰이나 보지. 후타쿠치는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굳은 카마사키를 억지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지금 그게 문제에요? 아파서 결석했으면 당연히 조정해주겠죠. 그보다 밥은 챙겨먹었어요? 약은?”

, 그런가. 그래야 되는데. 콜록.”

약은요?”

? 아침에.”

그럼 점심은요.”

……?”

흐리멍텅한 얼굴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동자에 후타쿠치는 한숨을 터뜨렸다. 평소엔 귀찮다 싶을 정도로 남에게 참견하길 좋아하더니 제 몸 간수 하나 못하고 아주 잘 하는 짓이다. 후타쿠치는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들을 챙겨 들었다.

주방 빌릴게요.”

설마하니 여기 와서 병수발을 들게 될 줄이야. 후타쿠치는 여전히 몽롱한 얼굴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카마사키에게 턱 끝까지 이불을 여며준 뒤 방을 나왔다.

혹시라도 죽을 만들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카마사키의 어머니가 챙겨놓았을 죽을 대충 데우고 후타쿠치는 냉장고에서 같이 곁들일 간단한 반찬들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식탁에 놓여 있는 카마사키의 약과 물 한 잔을 트레이에 놓은 뒤, 카마사키의 방으로 향했다.

후타쿠치가 트레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일없이 천장만 바라보던 카마사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서 죽 먹어요. 대체 오후 내내 밥도 안 먹고 뭘 한 거예요.”

콜록. 그냥 계속 잤지. 암튼 미안.”

농담을 할 기력은 있나보다 했더니 카마사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 모습 또한 영 힘없이 축 늘어진 채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무릎에 트레이를 놓으려다 그대로 손을 물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열 띤 숨소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트레이를 제 무릎에 놓았다. 그에 카마사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꽂혔다.

뭐해. 이리 줘.”

…….”

, 후타쿠치. 이리 달라니까.”

뭐 하자는 거야. 여기까지 챙겨와 놓고 직접 가져가라는 건가. 열에 들뜬 머리로 생각이 그리로 미치자 카마사키는 울컥 짜증이 났다.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배고파서 몇 번이고 깬 것도 사실이었다. 배고프지만 몸을 움직일 힘이 도저히 나지 않아 억지로 허기를 참았던 건데 막상 음식이 앞에 보이니 식욕이 불같이 솟아났다. 카마사키가 신경질을 부리며 이불을 걷자 그제야 후타쿠치가 입을 열었다.

됐어요. 숟가락 들 힘도 없으면서.”

그리고는 후타쿠치가 죽을 한 숟가락 뜨더니 그대로 카마사키에게 내밀었다. 따듯하게 데워 뽀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 , 빨리 먹어요. 팔 떨어지겠네.”

, 어어.”

잠시 머뭇거리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내밀어 죽을 받아먹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쪽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주제에, 죽 그릇에만 죽어라고 시선을 두다 오물거리는 소리가 멈추면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떴다.

, 내가 먹을게.”

됐어요.”

당사자가 스스로 먹겠다는데도 고집불통이다. 이게 뭐야. 열이 오른 머리가 한층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색하고 민망하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카마사키는 숟가락을 받아먹을 때마다, 죽 그릇에 코를 박을 것 마냥 고개를 숙인 후타쿠치에게서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했다. 지도 창피한 짓을 하는 줄은 아나 보지. 후타쿠치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후타쿠치는 죽 그릇을 비우자마자 물 잔과 감기약을 챙겨 먹으라는 소리를 하고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되자 카마사키는 꾹 참았던 민망함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으아아아악!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동네방네 소문나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당장이라도 아까 전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카마사키는 도저히 후타쿠치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감기약을 허겁지겁 먹은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카마사키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불을 키지 않은 방에 어둠이 그리워져 있었다. 잠시 허공을 향해 가만히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카마사키는 이불 안이 땀으로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약을 너무 늦게 챙겨먹은 탓인지 좀처럼 열이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땀에 젖은 옷을 의식하기 시작하니 찝찝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순간 어둑한 방 안에 검은 인영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했더니 후타쿠치였다. 화들짝 놀란 카마사키가 후타쿠치를 향해 소리쳤다.

, 너 아직도 안 갔!”

이제 가려고 했어요. 설거지하고 방금 들어왔다고요.”

, 그랬냐? 미안. 아무튼 늦었으니까 얼른 가라.”

그러나 금방 간다고 말한 주제에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마사키는 이불을 끌어올려 제 상체에 덮었다.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이 녀석 앞에서 더 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에게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뭐해? 빨리 가, 감기 옮으니까.”

마스크 썼잖아요.”

어쨌든. 벌써 어, 6시가 넘었잖아.”

병문안 온 사람을 왜 못 쫒아내서 안달이에요? 어차피 부모님도 늦게 들어오신다면서요.”

그게 아니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하는 말이지.”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보다 옷 안 갈아입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물쩍거리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땀 냄새가 그렇게 심했나, 하고 카마사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운동부니까 허구한 날 맡는 게 다른 사람의 땀 냄새라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새삼 민망해하는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땀 냄새 안 나요. 옷 갈아입으려고 일어나려고 했던 거잖아요. 전 신경 쓰지 말고 갈아입어요.”

그냥 가는 게 어떠냐.”

지금 내외해요? 카마사키 씨 알몸 봐도 아무 느낌도 없거든요.”

그런 문제가 아니, , 됐다. 말을 말아야지.”

결국 카마사키가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후타쿠치를 등지고 카마사키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녀석 말마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팬티 바람이 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신경 쓰는 게 이상했다. 젠장, 근데 자꾸 옷이 낑기고 팔에 걸렸다.

알몸을 봐도 아무 느낌도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후타쿠치는 침대에 턱까지 괴고 카마사키의 알몸을 감상했다. 카마사키는 배구부 내에서 가장 근육 트레이닝에 관심이 많은 걸로 소문났다. 틈만 나면 상체 근육을 키우겠다며 관련 서적을 읽는다고 했다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가, 유난히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등의 근육이 카마사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거기다 더해 어두운 방 안에서도 땀 때문에 피부가 유난히 반질거려 보였다.

어지간하다고 후타쿠치는 생각했다. 어지간한 콩깍지가 낀 게 아니고서야 같은 남자의 몸을 보고 이리 야한 기분이 들 리가 없다. 후타쿠치는 괜한 갈증을 느끼고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는 카마사키가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우.”

카마사키가 벅찬 숨을 내쉬며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옷 하나 갈아입는 데도 힘이 달렸다. 수십 개의 납이 달린 것처럼 온 몸이 무거웠다. 그런 카마사키를 힐끗 보던 후타쿠치가 물었다.

아파요?”

그걸 말이라고. 카마사키는 대답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집에 가거나 말거나, 멋대로 하라지.

많이 아파요?”

침대 한 편이 기울어졌다. 후타쿠치가 기어코 침대 위로 제 상체를 들이민 것이다. 카마사키가 고개만 돌려 후타쿠치를 돌아본 뒤 짜증스럽게 말했다.

보면 몰라?”

감기는 비실비실한 녀석들이나 걸리는 거라고 누가 그랬더라.”

…….”

이게 목적이었군. 카마사키는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다른 애들 다 냅두고 왜 혼자 왔나 했더니 잔소리를 하려고 온 거였다. 확실히 2차 예선을 앞두고 주전 멤버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긴 하지만 기왕 꾸중을 들을 거라면 차라리 감독이나 코치님께 듣는 게 나았다.

그러니까 제가 분명히 말했죠? 저지 꼭꼭 챙겨 입으라고.”

…….”

뭐라 그랬더라. 감기 걸리면 형이라고 부른다고 그러지 않았나?”

, 콜록, 아프다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꼭 해야겠냐?”

못 할 건 또 뭐 있어요.”

…….”

그래. 못 할 거 없지. 젠장.

당장이라도 형이라고 부르라고 할 줄 알았더니 후타쿠치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덕분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가끔씩 카마사키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거나,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후타쿠치의 팔꿈치가 닿아있는 제 등에서부터 온기가 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하고 따듯하니 열기 오른 머릿속이 점차 멍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어떻게 눈치 챘는지 후타쿠치가 한층 목소리를 낮춘 채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많이 아파요?”

…….”

배고프면 차가운 거 먹을래요? 올 때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왔는데.”

……됐어.”

목마르지 않아요?”

…….”

열이 오른다. 카마사키는 얼굴 전체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감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말과 행동이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지만 오늘따라 후타쿠치의 목소리라든지, 은연중에 마주쳤던 시선 같은 게 이상했다. 낯설고 어색했다. 아프다고 신경 써주는 건가. 그게 아닌 다른 이유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시선이 이리 낯간지러울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냐고.

. , 오늘 되게 잘해주네. 뭐 잘못 먹었냐?”

등에 닿은 팔꿈치가 움찔하고 떨리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기에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카마사키는 괜스레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평소엔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그러지. 이제 와서 내숭 떨지 말고 평소처럼 해.”

왜요? 잘해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카마사키 씨, 저 건방지고 예의 없다고 구박했잖아요.”

……넌 아냐.”

…….”

네가 그러니까 이상해.”

…….

후타쿠치가 상체에 힘을 싣고 카마사키의 등에 기대왔다. 그에 따라 옆으로 돌아누웠던 자세가 무너졌다. 바싹 눌려 침대에 바싹 엎드려진 모양세가 되자 카마사키가 신경질을 부리며 후타쿠치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를 비웃듯이 후타쿠치가 그 위에 덮치듯 올라타서는 말했다.

잘해주는 데 이유가 뭐겠어요?”

?”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내가 왜, 하고 카마사키가 무조건 반박했다. “비켜, 이 새끼야.”하고 짜증을 내자 후타쿠치가 선심 쓰듯 몸을 물렸고, 잔뜩 지친 카마사키는 이불로 제 몸을 꽁꽁 감싸고 눈을 꾹 감았다. 너 같이 변덕쟁이에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의 의중을 내가 어떻게 알아? 카마사키는 그 뒤로 후타쿠치가 말을 걸어도 잠든 척하고 무시했다. 이제 가라, . .

자요?”

…….”

카마사키 씨. 자요?”

…….”

자는구나.”

정말로 잠이 드는 도중이었다. 몇 번이고 자는지 확인하는 후타쿠치의 낯간지러운 목소리는 먹먹한 귓가에 맴돌기만 했고, 카마사키는 이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앗다. 잠에 빠질 뻔했다.

잘자요.”

단단하고 서늘한 손가락이 카마사키의 이마 주변을 정리하듯 한 번 훑고 지나갔고, 이윽고 부드러운 감촉이 마른 입술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잠에 빠지려던 의식이 확,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이를 후타쿠치가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를 일이다. 카마사키는 그저 떨리는 입술을 즈려물고 한참을 눈을 뜨지 않았다. 갑작스런 긴장에 볼가가 뻣뻣하게 굳어 아리기까지 했지만 카마사키는 눈을 뜨지 못했다.

잘해주는데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잘자요.’

한참을 굳어있던 카마사키는 그제야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흐읍, 하고 벅찬 숨을 내쉬는 카마사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동시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꿈이었나.

그러기엔 차가웠던 손끝이 스쳐지나가던, 입술이 닿았던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꿈이 아니라면 뭐지.

이유가 뭐겠어요, 스스로 생각해봐요.’

순간, 어쩐지 카마사키는 코끝에 바람이 스쳐지나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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