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마] 베타의 연애 (1)

-알파의 연애 외전



시작은 갑자기 울린 그룹 메시지 초대 알림이었다. 인간관계라곤 회사 사람들과 가끔 만나는 학생시절 친구들뿐인데다 매일같이 회사와 집만 반복하는 일상인 내게 새로운 그룹이 생길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 창에 뜬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초대 완료!]

[다행(이모티콘)]

옆에 있었더라면 분명 시끄럽게 떠들었을 게 상상될 만큼 핸드폰 진동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메시지들이 날아왔다. 뭐가 뭔지 파악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메시지 하나를 공지로 정했다.

[그럼 다음주 금요일 18:30 T가게에서 만납시다!(이모티콘)]

[ㅇㅋㅇㅋ]

[(이모티콘)]

난데없이 잡힌 약속에 유일하게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동기 녀석은 급하게 미팅에 빈자리가 생겼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나 애인 있는 거 알잖아. 걔가 알면 큰일 나.”

알지, 니 애인 극성맞은 거. 근데 진짜 어떡해, 올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아무도 없다고! 이번 주에 출장 가는 사람도 많고, 그 날 딱 기념일인 사람도 많아서 너 말고는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단 말이야.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그냥 한 자리 비우면 되지. 난 진짜 안 돼.”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분위기도 구려지고, 그리고이미 한 달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라서 이대로 가면 다시는 미팅 안 잡힐 수도 있다고. 이번에 미팅 성사된 것도 진짜 기적에 가깝다니까. 제발, 카맛치. 제발!”

고작해야 미팅인데 뭐가 기적이라는 거야? 상대가 누군데?”

“A기업 비서 팀이야. 엄청 사정사정해서 겨우 약속 잡은 거라고.”

A기업이라면 손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였다. 대기업 비서 팀이라니 외모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있는 여자들이니 미팅이 잡혔다는 게 기적이라고 칭할 만 했다. 녀석이 징징거림을 들어주는 사이에도 뭐가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쉴 새 없이 메시지 알림이 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연이은 야근으로 피곤해 죽겠는데 핸드폰 너머 칭얼거림과 멈출 줄 모르는 진동에 귀가 멍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동기의 울먹임이 커져갔다.

~~! 내 평생의 소원이야! 절대 네 애인한테 안 들키게 내가 잘 할 게. 그냥 회사 동기랑 술 마시는 자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마음이 안 내키는데.”

와서 30분만 있다 가. ? 30!”

내 쪽의 사정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점에선 아는 사람들 중 제일인 놈이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령 좋게 거절할 말도 생각나지 않고, 더군다나 채팅창도 기세 좋게 분위기를 잡은 터라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일단 대답하니 내내 징징거리던 목소리가 단박에 반전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만하게 보였던 게 분명하다. 고맙다며 은인이라고 외치는 녀석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귓가에 이명소리가 맴돌았다.

미팅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진다. 물론 애인이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도 동기 녀석과 똑같은 상황이었겠지. 고등학교를 졸업해 취직하고, 바로 밤낮 안 가리고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미팅 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미팅이란 그저 두통을 유발하는 일일 뿐, 일말의 흥미도 없고 귀찮고 꺼림칙하기만 하다. 미팅에 갔다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모른 척 하고, 다른 무언가를 핑계 삼아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될지 무섭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상상만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묵직해져오는 기분이었다.

 

길고 길었던 삽질 끝에 후타쿠치와 제대로 사귀기 시작한 지 햇수로 3년 차가 되었다. 졸업하고 나는 바로 자재회사에 취직했고, 이듬해 후타쿠치는 대학에 진학했다. 취직이 결정되었을 때부터 회사 근처에서 독립하겠다는 말을 끈질기게 반대하던 후타쿠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거 얘기부터 꺼냈다. 각자 직장과 학교로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후타쿠치는 제멋대로 방을 계약해서 말도 없이 집까지 찾아와서는 부모님 앞에서 착한 후배인 냥 온갖 내숭을 떨었다. 그러더니 둘만 남게 되자 대뜸 짐이나 싸라며 재촉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충 짐을 옮긴 뒤였다. 그제야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에 화를 내니 후타쿠치는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나에게 따져 들었다.

그렇게 같이 사는 게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나는.’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요.’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과정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내심 예전부터 같이 살고 싶었기에 이 문제를 계속 문제 삼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가 시작되었고, 이제 동거 2년 차. 어느새 후타쿠치와 나는 각자 20살과 21살이 되었다.

 

이제 와?”

집에 돌아가면 열에 아홉은 후타쿠치가 먼저 집에 와 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후타쿠치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여유를 만끽했다. 강의며 학회며 정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비어 두었다. 딱히 다른 친구들하고 사방팔방 놀러 다니는 타입도 아니니 웬만한 시간에는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날 백수가 따로 없는 모습에 언젠가 아르바이트라던가, 동아리라던가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후타쿠치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물론 부잣집 도련님이니 아르바이트 안하냐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긴 해도, 그렇게 끈질기게 이어가던 배구에까지 손을 놓다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후타쿠치가 완벽하게 집벌레가 된 덕분에 나까지 회사와 집만 오고갈 뿐 다른 약속을 잡을 눈치가 안 보였다.

저녁 준비 다 했어. 씻고 나와.”

땡큐. , 오는 길에 케이크 사 왔어.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으려고.”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후타쿠치에게 보이게끔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렸다. 뭔지를 가늠하는 듯 가늘게 뜬 시선과 부딪혔다.

뭔데?”

네 건 레몬 타르트.”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

이제는 서로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훤히 파악하고 있다. 동거 초반에는 입맛이며 생활 습관이며 모든 게 달라서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는데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퇴근길에 우연히 후타쿠치가 좋아하는 걸 볼 때마다 챙겨주는 게 사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네 요리는 네 성격이랑 완전 딴판이란 말이야. 어떻게 너같이 삐뚤어진 성격으로 이런 걸 만드냐?”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성격하고 똑같이 요리는 잼병이죠. 누가 봐도 입맛 떨어지게 만들잖아요, 누구 얼굴처럼.”

타르트 안 먹겠다는 거지?”

카마사키 씨, 오늘 배 안 고프다는 거죠?”

매번 하는 말다툼이지만 매번 후타쿠치의 빈정거리는 얼굴을 볼 때마다 울컥 짜증이 솟았다. 항상 마지막에 이겼다는 얼굴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도 짜증이 난다. 이대로 말을 더 했다간 내 기분만 상할 게 분명해 입을 다물었다. 짜증을 참는 내 얼굴을 보며 후타쿠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일 저녁은 알아서 먹어요. 학회 때문에 저녁에 교수님이랑 모임이 생겨서요.”

, 내일?”

내일 뭐 있어요? 설마 혼자라고 외로워서 밥 못 챙겨먹겠다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일은 일전에 약속이 잡힌 미팅이 있다. 그 때 이후로 회사에서 몇 번이나 다시 거절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끈질기게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미팅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후타쿠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또 깜빡 잊어버렸지만. 대충 둘러댈까, 모른 척 할까 이번 주 내내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뭘 선택해도 뒤가 구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더니 그새 후타쿠치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눈치는 귀신같이 빠르기는. 원래도 남에게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후타쿠치 앞에서는 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일 회사 동기가 미팅 대타 좀 해달라고.”

미팅?”

우물쭈물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되물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다 해가던 요리도 중단하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가서 딱 30, 아니 20분만 앉아 있다가 와도 된데.”

“20분이든 10분이든 안 돼. 나가지 마요.”

잠깐이면 된다니까. 친한 동기 부탁이라서 계속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래.”

그 사람 부탁은 들어주고, 애인인 내 말은 안 들어주는 거예요? 대체 뭐가 더 중요해요?”

이미 기분이 팍 상한 듯 후타쿠치는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거짓말이 들키게 되면 상황이 더 복잡해 질까봐 솔직하게 말했던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알면서 뭘 물어?”

그럼 안 가는 거죠?”

아니, 진짜 10분만 자리 지키고 있다가 올게. 나도 한, 두 번 거절한 게 아니라서 어떻게 거절할 말이 없단 말이야.”

대체 누구에요, 그 동기라는 사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카마사키 씨한테 애인 있는 거 알고도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 그러니까. 진짜 미안해. 이번만 네가 이해해 주라.”

후타쿠치는 잔뜩 부은 얼굴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솔직하게 말해버린 게 과연 옳았던 결정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후타쿠치는 대학생활으로, 나는 직장생활으로 이제는 각자 사회생활이 있다 보니 서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여러 번 비슷한 이유로 싸워서 다시는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게다가 미팅이라니 후타쿠치가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실제로 후타쿠치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엔 어쩔 수 없이 미팅에 끌려나갈까봐 자신 또한 온갖 걱정을 다 했었으니까.

여전히 딴 곳을 보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하게 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긴 해도 후타쿠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끝나고 연락할게.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을 텐데, .”

그 동기라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요. 존나 재수 없어.”

알겠어. 얼른 밥이나 먹자.”

카마사키 씨도 재수 없어. 딴 맘 품었다간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재수 없다니 저 자식이 근데 진짜. 슬슬 기분이 상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백번 잘못했으니까 참아야지, 참아야.

어차피 그 동기라는 사람도 폭탄 하나 만들려고 카마사키 씨 데려가는 거라고요. 딱 봐도 여자한테 인기 없어 보이니까 카마사키 씨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겠죠.”

알겠으니까 이제 그 입 닥쳐.”

진짜 재수 없어. 카마사키 씨 주제에 미팅이라니.”

저걸 그냥 확. 틈만 나면 못된 말이나 처하는 입을 확 틀어주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울컥해서 뭐라 한 소리 하려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는 모나게 말해서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여전히 눈가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열 받은 눈치다.

제가 한 말마따나, 내가 여자한테 인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있어봤자 10분만 앉아있다 오겠다는데 뭘 저렇게 화를 내는지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딱히 후타쿠치가 날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나는 기분이어서,

타르트 지금 먹을래?”

미안한데 기분이 좋아진다.

 

보통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아침엔 통 일어나 있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후타쿠치가 이른 아침에도 깨어 있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레포트 때문에 자지 못했던 것 같았는데 별 일이었다. 후타쿠치는 수면부족으로 다크서클을 눈가에 달고 다니는 주제에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주위를 졸졸 따라다녔다. 옷을 고르는 내 옆에서 비웃음을 치거나, 아침을 먹는 내 앞에서 말없이 째려보기만 하기에 대체 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나갈 때가 되어서야 현관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미팅 끝나면 곧장 전화해요.”

쟤는 정말 뭘 걱정해서 저러는 건지, 이쯤 되니 후타쿠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이 말 하나 하려고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면서 깨어나 있었던 걸까. 진지하게 의처증 기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진다.

 

어제 후타쿠치가 빈정거리며 했던 말이 씨가 된 건지 이 미팅에서 나는 철저하게 폭탄이었다. 아니, 그 이하인 걸지도 모르겠다. 약속된 장소로 찾아가니 애초 이 미팅에 관심조차 없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이미 고교 동창처럼 친해져 있었다. 알고 보니 처음 생겼던 채팅방에서 미팅이 잡힌 그 날부터 다들 매일같이 수다를 떨어왔던 모양이었다. 누구의 안중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안 왔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싶어 무척이나 억울했다. 괜히 쓸데없는 일 때문에 후타쿠치와 싸운 셈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좀 시끄럽죠?”

그래도 이왕 왔으니 약속한 대로 10분 딱 채우고 얼른 나가버리자 생각하고 가만히 맥주만 들이키는데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의 중심에서 웃고 떠들던 남자였다. 여자들 전부 은근한 눈빛을 하고 이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눈에 띄었던 사람이었다.

, 아뇨. 안녕하세요.”

전 히로키라고 해요. 혹시 제일 마지막에 합류하신 분 아니세요? 다른 분들은 다 인사해서 혹시나.”

. 카마사키라고 합니다.”

히로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살갑게 웃으며 그 이후로도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후타쿠치하고 같은 나이의 대학생으로 미팅을 주도한 동기 녀석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나와는 아무 접점이 없어 보여 곧 분위기가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10분이 다 되도록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덕분에 심심할 틈은 없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난처했다. 히로키는 눈치가 없는지 알고도 그러는지 주위에서 여자들이 온갖 눈치를 보내고 있는데도 그 쪽은 눈빛도 안 주고 나한테만 말을 걸어왔다. 아예 등을 돌린 히로키를 대신해 10분 동안 나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맞봐야 했다.

,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이 뒤에 바로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만.”

갈수록 여자들의 눈빛이 험해지는 게 보여 10분이 딱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옆에서 대화에 낄 궁리만 하던 여자들은 내 말에 활짝 웃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왔다.

벌써 가시게요?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일이 있으시다니.”

아하하, 재밌게 놀다 가세요. 이치로, 먼저 간다.”

아쉬워하는 척 하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옆 테이블의 동기에게 일단 인사를 건넸는데 여자들에게 한눈 팔린 녀석은 내 말을 듣지도 못했다. 기껏 인사해 줬더니 새끼가. 회사에서 만나면 제대로 한 소리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진짜 오지 말걸. 괜한 시간 낭비했다. 가게를 나오며 바로 핸드폰을 꺼내 후타쿠치의 번호를 찍었다. 아침에 그렇게까지 말했을 정도면 지금쯤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 같이 가요.”

? 히로키 씨?”

뒤를 돌아보니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은 히로키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덩치도 큰 녀석이 살갑게 웃으며 뛰어 오는 모습이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그냥 히로키라고 부르세요!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카마사키 씨랑 친해지고 싶거든요. 그래도 괜찮죠?”

, , 어어. 근데 미팅은 어쩌고.”

전 원래 미팅 관심 없었어요. 이번에도 그냥 자리만 채워주려고 온 거지, 애초에 여자랑 사귈 맘도 없고.”

아까 미팅 자리에 있었던 여자들이 들었다면 아쉬워했을 말을 히로키는 서슴없이 했다. 히로키는 처음 봤을 때처럼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활짝 웃었다.

역까지 같이 가요, .”

, 그러지 뭐.”

사실 아직까지 낯선 감이 있어 혼자 가고 싶었지만 구김살 없이 웃는 얼굴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니까 괜찮겠지. 역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고. 그보다 히로키 옆에서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메시지만 달랑 보내면 바로 전화가 올 것 같고.

, 전화할 데 있으세요? 안 그래도 편의점에서 뭐 살 게 있었는데, 전 저쪽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올게요. 편하게 전화하세요.”

핸드폰을 들고 망설이는 걸 눈치 챘는지 히로키가 요령 좋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녀석이구나. 히로키가 편의점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후타쿠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후타쿠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후타쿠치? 약속대로 10분만 있다 바로 나왔어. 지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딴 수작 부린 거 아니죠? 집에 들어가서도 바로 전화해요.]

전화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음이 들리는 걸 보니 후타쿠치도 학회가 끝나고 뒤풀이에 간 모양이었다. 아마 본인은 가기 싫다고 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끌려갔겠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해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장소 안 가리고 할 말. 못할 말 잘도 하네. 생각하기가 무섭게 애인이니 집착이니 전화 너머로 사람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작은 무슨. 이따 다시 전화할게.”

[. 나도 바로 들어갈게요.]

어어.”

말은 그렇게 해도 후타쿠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후타쿠치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하곤 전화를 걸어왔다. 직접적으로 말로 하진 않아도 미안하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처럼. 단지 이럴 때가 아니더라도, 가끔 후타쿠치가 살갑게 굴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남들이 들으면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몇 년이 지났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우습게도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게 진짠지 아닌지 믿기 힘들 때도 있다. 괜히 귓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까맣게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막연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멀리서 히로키가 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전화 다 하셨어요?”

, 미안. 자리 피해줘서 고마워.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머쓱한 기분에 사과를 하자 히로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편의점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커피 캔을 내밀었다.

커피 괜찮으시죠?”

괜찮긴 한데. 얼마야? 돈 줄게.”

연하에 학생인, 게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에게 얻어먹을 순 없어 돈을 내려는 나를 히로키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점점 난처해질 때쯤 히로키가 지갑을 쥔 내 손을 아래로 밀어냈다.

그럼 다음엔 형이 커피 사주세요. 이번엔 제가 사는 걸로 하고요. 그럼 됐죠?”

, 그러든지. 그럼 잘마실게.”

착한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슨 말을 해도 웃어주고,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하고 배려심이 엿보인다. 보통 착한 녀석이 아니었다. 주위에 이렇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녀석이 없어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형은 미팅 왜 나오셨어요? 잠깐 있다 가려던 걸 보면 역시 대타로?”

지하철 역 쪽으로 걸어가며 히로키가 물었다.

, 동기 녀석이 끈질겨서. 근데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을 걸 알았다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괜히 싸우기만 하고.”

여자친구? 부럽다~.”

, 애인. 넌 여자 친구 사귈 맘 없다며 뭐가 부럽냐?”

그거랑 이건 다르죠. 여자 친구는 어떤 분이세요? 형이라면 작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할 것 같은데.”

어떠냐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입은 더러운데 얼굴은 쓸데없이 잘생긴 건방진 놈이 되려나.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지만. 저 말을 실제로 하면 어떨까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사람 좋아 보이는 녀석이라도 벙찔 게 분명하겠지.

하하하,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와요? , 진짜 부럽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웃긴 상상을 해서 그래.”

역시 여자 친구 분도 베타겠죠?”

?”

형도 베타 맞으시죠?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베타는 보통 베타끼리 사귀니까 여자 친구 분도 베타 아니에요?”

그야 보통은 그렇다. 보통 베타는 베타끼리, 알파는 오메가와. 그 외의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합이 아니었다.

알파야. 내 애인.”

.”

예상대로 적잖게 놀랐는지 히로키는 으음, 하고 끙끙거렸다. 아마 사람 좋은 녀석으로서 내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알파와 베타는 보통 사귀는 경우가 드무니까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 저기.”

힘드시겠어요, .”

슬슬 지하철역에 다 와 가는데다 썩 달가운 주제도 아니라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히로키가 대뜸 말했다. 걱정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정도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얼떨결에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이 녀석에게 알파와 사귀고 있음을 고백했지만,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알파와, 게다가 후타쿠치와 사귀고 있다는 말을 주위 누구에게도 해본 적도, 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말하면 다들 어쩌려고 그래?, 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알파와 베타가 사귄다는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후타쿠치와 사귀는 걸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후타쿠치가 알파이고 내가 베타일 뿐인데 뭐가 힘들겠어. 사람 사귀는 게 다 똑같지, 뭐가 그리 다르다고, 힘들겠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왔다.

힘들긴, 뭐가 힘드냐.”

알파와 사귀면 항상 끝이 좋질 않잖아요. 지금은 학생이나 직장인이어도 결혼할 나이가 되면 집에서 오메가랑 결혼하라 난리도 아닐 테구요. 아무래도 잠깐 사귀는 게 아니라면, 아니 잠깐 사귀어도 항상 끝이.”

. 그렇긴 해도.”

주변에 비슷한 케이스가 꽤 많았어서 잘 알아요. 알파 남자와 베타 여자라던가, 베타 남자와 알파 여자라던가. 열이면 열 다 헤어졌어요. 알파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요.”

남자와 여자 사이인데도 그렇게 반대가 심할 정도면 남자와 남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 힘들지 않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고집했지만, 사실 힘들 것을 예상했다. 어차피 언젠가 끝이 날 관계라는 걸 알고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후타쿠치와 함께 있는 게 익숙해지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난 전혀 힘들지 않다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고. 새삼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 괜찮아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거에요? 전 그냥 형이 걱정이 되서.”

아니, 아니야. , 난 이제 가봐야겠다.”

잠시만, . 아무래도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바로 지하철 타면 멀미할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 있다 가세요.”

히로키는 다짜고짜 내 팔을 끌고 가더니 역 앞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손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점점 속이 안 좋아졌다. 할 수없이 울렁이는 배를 부여잡고 벤치에 앉았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배가 아픈지 모르겠다.

죄송해요. 제가 주변에서 그런 걸 많이 보다 보니까 좀 예민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 제가 괜한 말을 해서는.”

괜찮아. 그냥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그런가? 뒤늦게 취하는 것 같네.”

.”

난 잠깐 쉬었다 갈 테니까 너 먼저 갈래?”

아니에요, .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 진짜 저 때문에.”

끙끙거리며 눈치를 보는 게 진짜 대형견 같다. 몸은 다 큰 주제에 나이는 어려서, 자기가 잘못해도 애교밖에 부릴 줄 모르는 대형견. 그러고 본 후타쿠치도 그런 면이 있다. 어리광부리는 방식은 좀 많이 다르지만 의외로 어린 면이 있는 녀석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떠받들어오며 자라서 그런지 도련님 같은 면이 꽤 있다. 언제나 나보다 어른인 척 하는 주제에 지가 잘못하면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못하고 괜히 심술부리는 게 은근히 귀엽다. 젠장, 그럴 때마다 화는 화대로 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가끔씩 보이는 어린 모습을 나만 알고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후타쿠치는 모를 거다.

.”

, 형 웃었다. 왜 웃는 거예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큭큭. ,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

아하하, 다행이다. 진짜 다행.”

이만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신기하게 후타쿠치를 생각하니 아팠던 배가 가라앉았다. 옆에서 걱정하는 히로키에게 인사를 하고 개찰구를 넘는데 뒤에서 히로키가 형, 하고 불렀다. 개찰구 너머에서 히로키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 다음에 봐요!”

하도 손을 흔들기에 덩달아 마주 손을 흔들어주니 히로키가 방긋 웃었다. 후타쿠치랑 같은 나이인데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 후타쿠치도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다 곧바로 그만뒀다. 방긋 웃으면서 손인사하는 후타쿠치라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빨리 보고 싶다.

 

금방 오겠다던 후타쿠치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왔다. 막 씻고 나왔을 때 현관문이 열린 터라 얼떨결에 후타쿠치를 마중 나온 모양이 되었다. 얼굴 가득 못마땅함이 서려있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팔을 벌렸다. 신발은 벗을 생각도 안 하고 그 자세로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어 할 수 없이 다가가자 허리께를 안아왔다. 그리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거렸다.

다녀왔어요. 망할 조교 때문에 시비 털려가지고 바로 못 빠져나왔어요.”

수고했어. 그래도 이 정도면 일찍 온 건가?”

피곤해.”

물 받아줄까? 난 샤워만 해서 욕조 찰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답대신 후타쿠치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뒤풀이에서 얼마나 마셨는지 어깨에 닿은 숨결에 술 냄새가 났다. 더운 숨을 내쉬는데다 어깨에 닿은 뺨이 미묘하게 따뜻한 걸 보면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카마사키 씨는무슨 일 없었죠?”

고작 10분 있었는데 일은 무슨. 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바로 나왔어.”

잘했다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후타쿠치를 매단 채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샤워를 끝내 습기로 가득한 화장실에 후타쿠치를 밀어 내려고 했다. 후타쿠치가 모르는 척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자 나도 모르는 척 손을 잡아 뺐다. 밀려난 후타쿠치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했다.

씻고 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씻겨 줘요.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아.”

까불지 마라.”

후타쿠치는 술만 마시면 5살 어린애처럼 떼가 늘었다. 취하면 취할수록 그 정도와 함께 막말도 늘어나서 술에 취한 날이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몇 번 손이 잡히고 그걸 뿌리치는 실랑이가 오고가다 안 될 것 같았는지 후타쿠치는 잠자코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핀잔을 주거나 시비를 걸 때만 직설적이지 평소에는 솔직하게 뭘 해달라거나 어리광 부린 적이 없어서 사실 후타쿠치가 취해서 들어올 때면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한다.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솔직히 재밌다. 무엇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웬만한 건 기억하지 못해서 무슨 짓을 해도 안심이기도 하고.

물 마실래?”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타쿠치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마시고 있던 컵을 내밀자 거리낌 없이 컵을 비웠다.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조금이나마 술이 깬 듯 했다.

더 마시려면 네가 떠 마셔.”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다. 후타쿠치도 제정신인 걸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어깨가 잡혔다. 올려다보니 후타쿠치가 특유의 웃음을 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니 소파 등받이를 넘어 위로 올라탔다. 제대로 물기를 닦지 않은 몸이 닿자 티셔츠가 차갑게 젖어갔다.

, .”

뭘 당황하고 있어요?”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를 세우자 후타쿠치가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대로 등을 돌려 어깨를 잡은 후타쿠치가 기어코 내 무릎 사이에 허리를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옴짝달싹 못하게 갇혔다. 양치를 했어도 은근히 묻어 나오는 술 냄새에 고개를 가로젓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피곤하다며. 비켜.”

일주일이나 못 했잖아요. 오늘만 기다렸어.”

, , 웃기지마.”

답지 않게 닭살 돋는 멘트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큭큭거리며 웃는 내 위로 후타쿠치가 허리를 은근히 부비며 속삭였다. 하고 싶어. 팬티만 입어 살갗이 고스란히 드러난 다리에 후타쿠치의 맨 살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감기에 걸릴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던 공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부 아래가 묵직해져왔다. 후타쿠치의 말마따나 벌써 일주일동안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했던 섹스도 간신히 갈증만 채운 정도라 거의 이주일은 맘 놓고 욕구를 발산하지 못했다. 저번 주는 내 쪽의 연이은 야근 때문에, 이번 주는 후타쿠치가 학회 일로 바빴다. 그러니 몸을 부대끼는 것만으로도 바짝 달아오르는 게 당연했다.

카마사키 씨, 냄새 좋아.”

목덜미로 후타쿠치의 콧대가 닿았다. , 하고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후타쿠치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냄새가 좋아. 후타쿠치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오물거렸다. 끈덕지게 한 곳만 물고 늘어지는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왼쪽 목덜미에만 집착하던 후타쿠치는 반대쪽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들썩이는 허리 아래로 후타쿠치가 팔을 둘러싸고 꽉 끌어안았다.

내 또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자신의 성감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원래부터 목덜미는 성감대였다. 그걸 깨달은 건 후타쿠치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직 키스까지만 진도를 나갔을 때였는데, 후타쿠치는 유독 키스를 할 때 목덜미를 지분대는 습관이 있었다. 안 그래도 간질거리는데 야하게 목을 매만질 때마다 미치도록 손과 발끝이 저렸다. 몇 번이나 후타쿠치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목가를 만지면 움찔거리는 걸 꿰뚫은 후타쿠치는 더 야하게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었다. 한 번 헤어지고 난 뒤부터는 목덜미를 만지는 습관이 콧대를 부비고, 입술로 깨물고 빠는 정도로 진화했다. 냄새가 좋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민했던 구석은 후타쿠치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리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후타쿠치의 손길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잊었던 무언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개봉한 영화를 내일 보러가자고 약속했었다. 까먹을까봐 그 날 바로 예매해 놨는데.

내일, , 영화 예매했는데.”

몇 시에?”

아으, 오전에, 열 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와 동시에 후타쿠치가 팬티 위로 돋아난 내 것을 잡아챘다.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성기를 사정없이 주물럭거리면서 입 밖으로 말이 되지 못한 정체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척이는 소리가 스피커를 켠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깟 영화가 뭐가 중요해요? 이렇게 섰잖아, 카마사키 씨.”

들려요? 완전 젖었잖아. 야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 아직 술에 취했어. 취한 게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천박한 말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빨리 하라는 말에 후타쿠치는 간만 볼 뿐 처음과 달리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성기만 잡힌 나만 애가 타서 허리를 들썩이는 꼴이다. 그 모습을 후타쿠치는 애교부리는 강아지를 보듯 웃으며 내려다보기만 했다. 건방진 놈, 속으로 욕하기 무섭게 후타쿠치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

, 이 개새끼야.”

왜 매번 나만 안달내야 하는 거냐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짓이기자 후타쿠치의 얼굴이 내려왔다. 상을 주듯 가벼운 뽀뽀를 하며 후타쿠치는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 지었다. 후타쿠치가 원하는 대로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에도 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반쯤 드러나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보석 같았다. 쓸데없이 잘생겼어. 이럴 때마저 나는 매번 너에게 져주게 된다. 눈을 감으며 후타쿠치의 등을 팔으로 감쌌다.

 



(15614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친구와 후배와 나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외전

>모니와 시점 가벼운 에필로그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후배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 모니와는 후배를 만난이레 처음 보는 표정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곰곰이 후배에게 늘여놓았던 말들을 곱씹어 봤지만 딱히 후배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후배에게 했던 말들은 기껏해야 요즘의 근황이라든지 친한 친구의 부러운 소식뿐이었다. 내려야 하는 역이 가까워오자 모니와가 다시 한 번 후배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후배는 여전히 멍한 채였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후배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모니와가 안절부절 못할 때쯤, 후배는 어딘가 정신 빠진 눈으로 모니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어디 아픈 기색은 없어 보였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 모니와는 재차 후배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후배는 들은 척도 않았다. 점점 전철 안이 혼잡해지는데 후배가 내릴 역까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갈등했지만 말단 사원인 주제에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니와는 결국 후배를 향한 신경을 애써 갈무리했다.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은 조짐을 보이던 친구를 다시 만난 건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늘상 가던 이자카야에서 그는 어딘가 어색한 얼굴로 모니와를 맞았다. 먼저 도착해서 이미 한 잔을 걸친 것인지, 술잔에 사케가 반쯤 채워져 있었다. 모니와는 친구를 보자마자 비죽 심술이 돋았지만 그를 놀리는 일은 일단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당장은 그간의 일을 듣고 싶었다.

"왔냐?"

"먼저 한 잔 했네? 안주는 시킨거야?"

"아니. 너 오면 시키려고 술만 먼저 시켰지."

메뉴를 뒤적거리며 모니와는 간단한 안주 몇 개를 주문했다. 그 동안 친구는 술잔을 비우며 그 답지 않게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전에 모니와가 보낸 라인들을 싸그리 무시해버린 일에 대한 죄책감이 분명할 것이다. 제가 먼저 자랑 비슷하게 말해준 주제에 누구냐는 물음에는 이러 저리 피하던 못된 친구였다. 모니와는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음을 던졌다. 예상대로 찔리는 게 있는 친구가 힐끔 시선을 피했다.

"이주 만이네? 웬일로 연락을 했어, 바쁜데."

"아니, .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냐? 그냥 술 한 잔 하자고 불렀지."

"그래?"

"그렇지."

은근한 비난에 친구는 여전히 술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이 자식은 이랬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이 놈과 고교 후배 중 하나가 이상한 분위기를 내뿜었었다.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후배 놈과 주구장창 만나고 놀고 다닌다던 친구는 언젠가부터 후배의 이름이 나오면 표정이 굳어졌다. 후배의 봄고가 시작하기 전, 한창 연습에 열중일 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하이 시기에는 먼저 팔뚝을 걷어붙이고 응원이니 간식이니 말을 꺼내던 친구는 연습은커녕 경기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약속을 피하길 일수였다. 할 수없이 친구 녀석을 빼고 연습을 보러 갔을 때, 모니와는 친구의 거절의 이유를 짐작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상하게 머리 위에 까만 구름이 끼어 있는 듯 우울해 보이는 후배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응원 차 찾아 온 선배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던 후배는 보다 더 가라앉은 눈빛으로 친구의 행방을 물었다. 일이 있어 못 온다는 말에는 작게 한숨까지 내쉬었던 것에는 조금 놀랐었다. 최근에 좀 친해졌다고 말을 들었어도 이렇게 실망할 정도인지는 몰랐었다. 언제 이만큼 친해진 거지? 그러나 친해졌었다는 말이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친구는 그 여름 내내, 후배의 마지막 고교 배구가 끝날 때까지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배의 머리맡에 떠도는 구름은 시꺼멓게 변해, 후배의 우울한 속내를 반영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당사자는 말을 돌렸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흐른 지금도 역시 친구와 후배가 이상한 분위기일지, 모니와는 새삼 궁금증이 솟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듯 보이는 친구의 연애 사(). 모니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생겼어?"

"? 뭐가?"

"여자 친구."

또로록, 친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주변을 헤맸다. , 네 번 입술을 달싹이던 친구는 결국 귓가를 빨갛게 물든 채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아! 카맛치! 너가 결국."

모니와는 배신당한 슬픔에 자리에 없는 또 한 명의 친구를 부르짖었다. 사사양! 어떻게 카맛치가 우리를 배신하다니!

"네가 제일 솔로 탈출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 내가 뭘. 까놓고 우리 셋 중엔 내가 그나마 낫지."

"아주 그냥, 여자 친구 생겼다고 기고만장 해졌어! 건방져, 카맛치!"

흑흑거리며 가짜 울음을 흘리는 모니와를 향해 기고만장해진 친구는 연신 큭큭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솔로인 처지가 가슴 아파진 모니와는 가득 채워진 사케를 들이 마시고, 친구의 잔을 채우고, 술을 주문했다. 배신자라고 탓하는 모니와를 향한 친구의 웃음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꼴을 볼 때마다 열이 받아 술잔을 비우던 모니와의 하얀 얼굴 또한 새빨개진 것은 물론이었다.

", 야아. 이 짜식, 이이여친 자랑이나 해 봐! 예뻐? 예쁘냐구."

"큭큭, , 예쁘냐고? 그 자식이 뭐가 예뻐, 예쁘긴."

징그럽다, 임마. 친구의 말에 모니와는 기겁을 하며 친구의 팔을 흔들었다. , 너 이 자식. 잡은 고기라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카맛치! 모니와의 말에 또 한 번 친구가 박장대소했다. 뭐가 그리 웃긴지 테이블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기까지 했다.

"잡은 건지, 잡힌 건지. , 모니와. 그거 아냐? 내 애인은 하~나도 안 예뻐!"

"미쳤나봐, 카맛치. 너 그러다간 한 달도 못가서 채일 게 뻔하다?"

"하나도 안 예쁘고. 씨바, 드럽게 건방지고 제멋대로고. 만날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틱틱거리고."

"카맛치. 구박받으면서까지 여자 친구 사귀고 싶었어?"

동정이 어린 모니와의 눈빛에 친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구박은 무슨.

", 너어. 그럴 바엔 헤어져! 그런 못된 여자랑 사귈 바엔 차라리 안 사귀는 게 낫다니까?"

"아냐, 그런거. 아니라구."

"헤어져! 다시 우리한테 돌아와, 카맛치!"

내 이럴 줄 알았다. 겉으론 빵빵하게 근육이 붙어 있어는 데다 눈썹도 눈빛도 사나워서 상남자같지만 속은 누구보다 착하고 순진한 녀석이었다. 분명 뭣도 모르고 마녀같이 못된 여자한테 잡혀 사귀는 게 분명하다. 모니와는 친구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헤어져, 헤어져 외쳤다. 친구를 위한 건지, 그저 솔로 한 명 만들고 싶어선지 모르겠지만.

"헤어져, 카맛치! 그런 여잔 너랑 어울리지 않아. 헤어지고 그냥 우리랑 놀자, ?"

", 아니라니까. 나쁜 놈 아니아닌가? 나쁜 놈인 것 같기도 하고?"

"나쁜 놈이야! 너한테 구박이나 한다며, 그런 나쁜 여자랑은 안 돼, 카맛치."

"아씨, 아냐. 걔 하나도 안 나빠."

". 잘 생각해 봐? ?"

"뭐를?"

모니와는 속고 있는 불쌍한 친구의 앞에 손바닥을 쫙 폈다. 그리고는 하나씩 손가락을 쥐면서 말했다.

"그 여자 예뻐?"

친구는 생각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착해?"

다시 고개가 흔들렸다. 모니와의 손바닥에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막 막말하지 않아? 너한테 못되게 굴지?"

끄덕끄덕,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의 짧은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펼쳐진 손가락은 두 개뿐이다.

"너한테 잘해줘? 뭐 애교부리고, 맛있는 거 사주거나 그래?"

이번에는 친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로젓기를 번갈아했다. 그런가, 아닌가 헤매는 친구 대신에 모니와가 손가락을 접었다. 모니와의 하얗고 가느다란 새끼 손가락 하나만이 외롭게 서 있었다. 술기운에 발간 얼굴을 한 친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로, 진짜 진심으로 그 사람이 너 좋아해?"

멍한 시선이 모니와와 부딪혔다. 밤색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전의 그 날, 술에 취한 얼굴로 헤헤거리던 날과 같이 친구의 입가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모니와는 울컥하는 마음에 마지막 남은 새끼 손가락을 접지도 못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어떤 대답이든간에 모든 손가락을 접어 버리고 친구를 못된 마녀의 야수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던 속셈이었는데. 좋아라 실실거리는 얼굴에 모니와는 분통이 터졌다. 완전히 발이 꾀인 게 분명했다.

"이리 오라고 해! 당장, , 내가 한 소리 해줄게, 카맛치. 이 불쌍한 자식."

", 걔 오늘 바쁜데."

"바쁘고 나발이고 오라고 해!"

"화낼텐데."

궁시렁거리는 친구에게 모니와가 몇 번 으르렁거리자 결국 친구가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전화 너머의 못된 그녀에게 술에 취해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로 올 수 있는지 사정을 물었다. 그동안 모니와는 친구를 동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는 그 짧은 통화에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살짝 빈정 상한 얼굴로 모니와에게 애인이 온다고 말했다. 다가올 만남을 기대하며 모니와는 친구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누군지 몰라도 순진한 친구를 꼬여내다니 참을 수 없다며 모니와는 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친구한테 못되게 굴어서 마음에 안 드는지, 단지 친구가 애인이 생겨서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오기까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모니와는 친구와 술판을 이어나갔다. 가게에 있는 술은 모두 마셔보자며, 모니와가 새로운 술을 주문하고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쯤 익숙한 얼굴이 가게로 들어왔다. 10시를 넘은 이 시각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후배가 술집에 올 리가 없어 모니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뭐야, 카마사키 씨는요?"

"에엥? , 후타쿠치?"

", 진짜 술냄새하고는. 작작 좀 마시지 그래요?"

",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설마 벌써부터 술 마시고 그러는,"

"제가 양아치에요?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게?"

"너 양아치양아치 비스무리한."

후배는 모니와의 말을 술주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그 맞은편에 앉아 가게를 둘러보았다. 옆자리에 친구의 겉옷과 가방을 확인하더니 급기야 핸드폰을 챙겨 제 겉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거 카맛치 핸드폰."

"대체 몇 시부터 마신 거예요? 설마 7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던 건 아니겠죠?"

"어라? , 일곱 시부터 만난 건 어떻게 알았어?"

모니와의 대답에 대충 대답을 유추했는지 후배는 잔뜩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모니와의 앞에 물 컵을 들이밀었다. 대신 그 앞에 있던 술잔과 사케 병을 거둬 구석으로 밀었다.

"후타쿠치. 너 그거 알아?"

"뭘요."

"카맛치가카맛치가."

"카마사키 씨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후배라면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잘은 모르지만 모니와 주변에 이 후배만큼 건방지고 말발이 센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잘하면 친구의 그녀를 물리쳐줄 수 있을지도 몰라. 모니와는 친구의 안녕을 빌며 후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카맛치, 여자 친구랑 헤어지게 해야 해."

"?"

"들어봐, 후타쿠치. 그 나쁜 여자가 글쎄, 카맛치를 엄청 구박한다고.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할지도 몰라. 얼마나 건방지고 제멋대로인지 카맛치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다니는 게 분명해. 안 그래도 연애는 해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그런 여자한테 걸려서는. 후타쿠치, 이따 그 사람 온다고 했거든?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너도 한 번 보고, 카맛치 좀 말려 봐바."

모니와가 숨 쉴 틈도 없이 말하는 동안 후배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 왜 네가 열받아 하는거야? 설마 그런 여자랑 동급 취급해서 그런 건가. 후배의 눈치를 보며 모니와가 생각했지만 취한 잔뜩 술에 취해 후배의 열받은 얼굴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래요? 그렇게 건방지대요?"

"그렇다니깐? 게다가 하나도 안 예쁘데. 내가 예쁘냐고 물어봤는데, 카맛치가 엄청 웃으면서 징그럽다고 하더라니까. 그건 좀 불쌍하긴 하네..."

"헤에, 그래요? 헤에..."

모니와의 말에 후배는 다행히 공감하는 듯 보였다. 최근에는 좀 사이가 별로인 것 같았지만 올 초까지만 해도 친했다는 걸 보면, 후배 또한 친구를 막 대하는 여자가 거슬리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후배의 얼굴이 잔뜩 열 받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경기 시작 전에 상대팀한테 일격을 날리다 되려 한 대 맞은 모양이었다.

"런 사람이랑 대체 왜 사귄데요, 카마사키 씨는?"

역시 모니와의 생각대로 후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웃고 있는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지만 모니와의 착각일 터였다.

"왜 사귀겠어, 그 여자가 억지로 사귀자고 했겠지."

"그렇게 말했어요? 카마사키 씨가?"

"설마! 무서워서 그렇게 말했겠어? 그냥, 눈치로 그래보였다는 거지."

"그렇구나."

"근데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와? 내가 직접 어떤 사람인지 보고 말겠어."

"보면 뭐라고 하시게요?"

"뭐라고 하긴. 헤어지라고 해야지! 친구로서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할 거야. 대체 카맛치를 뭐로 보고 막 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감시할 거야!"

"……."

"근데 사실 헤어지라고 해도 막상 진짜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

풀이 죽은 목소리에 후배의 시선이 모니와에게 향했다. 말없이 그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빛에 모니와가 한숨을 쉬었다.

"카맛치한테, 그 여자가 널 진심으로 좋아하냐고 물어봤거든? 그렇게 막 대하고 제멋대로에 예쁘지도 않은데 카맛치를 좋아하지도 않는거면 진짜 최악이잖아."

"...근데요?"

"글쎄, 아휴, 말없이 그냥. 활짝 웃는 거 있지? 아주 좋아라하고."

"……."

"그 얼굴에 대고 당장 헤어지라고 말할 수가 있어야지. 말로는 나쁘다 징그럽다 하지만 카맛치도 그 여잘 진짜 좋아하는 게 보였으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

"……."

"그래도 그 사람 오면 한 마디 해줄 거야.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 오더라도 카맛치한테 잘해주라고."

근데 왜 이렇게 안 와? 카맛치는 화장실에 갔다더니 가서 뭘 하는 거야. 모니와의 툴툴거림에 후배가 피식 웃고는 친구를 찾으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던 친구는 세면대에서 골아 떨어졌다. 후배는 어깨에 친구를 들쳐 매곤 겉옷과 가방을 챙겨 나가자고 재촉했다. 친구의 여자 친구를 기다리겠다며 모니와가 고집을 피웠지만, 후배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건방진 그녀임에 틀림없다며 모니와는 생각했다. 그 말에 후배가 피식거렸다.

가게를 나와 후배는 택시를 잡아 모니와를 챙겼다. 이미 버스도, 전철도 다 끊겼을 텐데 너는 어떡하냐는 걱정 어린 질문에 후배는 친구 집에서 자겠다고 대답했다. 언제 화해한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았다. 모니와와 함께 친구의 그녀를 아니꼽아하던 후배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친구가 여자 친구를 떠올렸을 때와 비슷해 보여, 모니와는 멀어지는 후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행복해 보였다.




(7297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下)


   

 

한창 출근 시간이 되자 전철 안은 흡사 지옥과 같았다. 꾸역꾸역 전철 안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중간에 자리를 양보하느라 그 틈바구니 사이에 서게 된 후타쿠치는 압사당해 죽을 것 같은 고통에도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학교를 지나쳐가는 방향의 전철에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회사원들이 후타쿠치를 땡땡이치는 양아치처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타쿠치는 다다음 역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오전 719, 그 순간 후타쿠치는 오로지 하나만 바랐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그 집에 카마사키가 있기를.

먹먹해진 귓가에 모니와 씨가 했던 말들이 맴돌았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한껏 자랑을 했다고 했다. 술에 취했는지 감정에 취했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자랑하는데, 모니와의 눈에는 카마사키 또한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카마사키가 직접 말한 게 아니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모니와는 재차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지. 그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얼굴이었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카마사키 씨의 얼굴은 어떨까. 못 견디게 궁금하면서도 절대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3자가 봤을 때 한 눈에 알아챌 정도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였을 그 얼굴이 보고 싶으면서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해버릴 것 같다. 제발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그러지 말았으면 소원했다. 날 향한 게 아니라면 차라리 눈을 가리자. 내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카마사키 씨가 보지 못하게. 나조차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니 그 사람의 눈을 가려야겠다.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작정 뛰었다. 버스로 5분 거리의 카마사키 씨 집까지 가는 데에는 간신히 10분정도 걸린 듯 했다. 집에 몇 시에 나오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회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아직 카마사키 씨는 집에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밭은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올랐다. 지난 수개월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아파트는 그 때와 다름없이 어디는 말끔하고 어디는 낡았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도 이 집에 왔었던 것처럼 낯선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204호에 이르러 후타쿠치는 그 앞에서 잠시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여름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간신히 되돌아왔다.

어느 정도 숨소리가 편해진 뒤 후타쿠치는 벨을 눌렀다. 얇은 문 너머로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예상대로 카마사키는 아직 출근 전인지 안에서 타닥타닥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카마사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기 전, 후타쿠치는 짧게 숨을 들이 쉬었다.

누구,”

넥타이를 매던 중이었는지 카마사키는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후타쿠치가 집 앞에 서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카마사키는 말을 잃고 놀란 얼굴을 했다. 어버버거리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며 후타쿠치는 내심 안도했다. 최악의 경우엔 문전박대 당하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출근 몇 시에 해요?”

? , 8. 아니, 810분 정도까진 괜찮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736분이었다. 적어도 30분은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는 후타쿠치의 말에 카마사키는 대답대신 몸을 비켜주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방은 마지막으로 봤었을 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여전한 분위기와 변함없이 카마사키 씨의 체취가 느껴졌다. 괜히 방 안을 둘러보는 후타쿠치의 등 뒤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차라도 줄까?”

어제도 만난 사이마냥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변함없는 건 카마사키 씨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당황하던 얼굴은 벌써 무덤덤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라 후타쿠치는 조금 놀랐다. 카마사키 씨의 성격으로 봐서 이렇게 태연한 모습을 할 줄 몰랐다. 하긴, 그게 뭐가 그리 충격적이라고.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을 게 틀림없다. 후타쿠치는 새삼 실감하는 감정의 차이에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저 넥타이를 매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마사키가 그 모습을 봤을 리가 없었다.

녹차랑 커피, , 아니면 차라리 역 앞에 카페를 갈까?”

아뇨, 됐어요.”

그럼, 그러든지. 그러고 보니 봄고 예선전 끝났다며? 모니와한테 들었어. 이번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갈 수가 없었어. 미안, 준결승전은 꼭 가고 싶었는데.”

직장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선배들도 매번 온 건 아니라서 미안해할 것까진 아니에요.”

그래도 미안했다. 마지막이었잖아.”

별로 카마사키 씨가 안 왔었어도 상관없었어요.”

그야 그랬겠지.”

사실은 몇 번이고 경기장 입구를 확인했었다. 선배들에게 카마사키는 일이 있어서 못 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경기장 곳곳을 헤맸다.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오겠지. 인터하이 때는 몇 번이나 응원하러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오겠지.

하지만 결국 카마사키 씨는 예선 기간 내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가운데 정작 보고 싶은 얼굴은 끝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경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정말 미치도록 그 사람이 그리웠다. 응원이고 뭐고 상관없이 한 번만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마주치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든 좋으니 보고 싶었던 거다. 경기에서 졌다는 분함, 고교 배구가 끝났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이제 이 경기장을 나가야 한다는 씁쓸함이 배가 되었다.

봄고도 끝났는데 요즘은 뭐 해? 진로는 이미 다 정했지?”

궁금해요?”

, 앞으로도 배구 계속 할 건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가는지 궁금하긴 하지. 듣기로 아오네는 추천이 거의 정해졌다면서? 너는,”

제 진로가 왜 궁금해요?”

어딘가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꼬박꼬박 묻고 대답하던 카마사키가 말을 멈췄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흘렀다. 얼마 안 있어 카마사키가 말했다.

궁금해 하면 안 되냐?”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한 그 말의 저의를 알고 있다. 카마사키 씨는 단순히 후배를 신경써주는 것뿐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적당한 관심일 뿐이다.

여자 친구 생기셨다고요.”

?”

모니와 씨가 그러던데요. 카마사키 씨가 제일 먼저 배신할 줄은 몰랐다고, 여자 친구 생긴 게 틀림없다면서.”

무슨, 그런 거 아니야.”

, 아직 사귀는 건 아닌가 봐요? 설마 고백할 타이밍이라도 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카마사키 씨라면 우물쭈물 하다가 분명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텐데.”

.”

연애는 이쪽이 훨씬 경험치가 높으니까, 원하신다면 코치라도 해드릴까요?”

후타쿠치.”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마도 화가 나 있을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수록 가슴이 조여 왔다. 지끈지끈, 아프다.

내가 누구한테 고백하든 누구랑 사귀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침부터 시비 털려고 찾아 왔냐?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나가.”

,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아무 상관없는 거, 씨발, 안다고요.”

너 미쳤냐? 몇 달 만에 찾아와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

잘 지냈어요?”

?”

뜬금없이 묻는 안부에 카마사키가 황당해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니, 하고 부정하며 카마사키의 말을 막았다.

아니, 그냥 대답하지마세요.”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후타쿠치는 가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침묵이 흘렀다. 카마사키는 수그러진 후타쿠치의 뒤통수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칼이 이리저리 뻗쳐 있는 걸 발견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나보다고 납득하려는데 목가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목덜미 언저리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아침에 틀어놨던 날씨 예보가 떠올랐다. 오늘은 땀이 나기는커녕 기침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유난히 쌀쌀한 날씨라고 했었다. 순간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어땠는데?”

……같았어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놓칠까봐 카마사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미칠 것 같았어요.”

…….”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유 없이 화가 났다가 짜증이 났다가,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가. 감정이 마구 널을 뛰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

미쳐가는 기분이에요.‘

미칠 것 같다는 말과는 달리 후타쿠치의 목소리는 사뭇 담담하게 들렸다. 등을 돌리고 서 있어 후타쿠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그랬는데?”

…….”

한동안 왜 안 왔냐?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개무시하고 뻔질나게 찾아오더니. 내가 여자 친구 생겼다는 게 그렇게 놀라웠어?”

그런 거 아니라면서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봐. 왜 이제야 찾아와서 영문 모를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지 대답해 보라고.”

그 여자 좋아해요?”

후타쿠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목소리에는 아직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묻는 걸까.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말하는 바와 목소리가 달라서일까, 그 괴리감에 카마사키는 있지도 않은 여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좋아질 것 같아.”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쿵쿵, 심장이 울리는 소리로 방 안이 가득해졌다. 어느새 나는 후타쿠치를 좋아하게 됐나? 깨닫자마자 그동안 묵혀왔던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한동안 뭘 해도 허전한 기분이었던 원인이 이 때문이었나. 그 순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실에 안도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왜 좋은데요?”

그러니까……,”

…….”

같이 있으면 좋아.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편하고 즐겁고.”

…….”

무엇보다 그냥 자꾸 생각나거든. 눈에 안 보이니 얼굴을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지금쯤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카마사키는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보인 후타쿠치의 모습에 놀라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그저 좋았다.

넌 그런 사람 없냐?”

대답해 봐, 후타쿠치.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그런 사람 없냐고. 그 때 그 마음이 변함없다면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말해 봐. 내가 짐작하는 그대로가 맞아?

있어요.”

누군데?”

. 후타쿠치는 들이키던 숨을 멈추고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언젠가부터 빠듯하게 말아 쥐고 있던 주먹에 손가락이 아려왔다. 하얗게 질린 주먹에 꾸역꾸역 손가락을 펴보지만 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다시금 곱아 들었다. 어딘가에 애써 힘을 주지 않고서는 서 있기가 벅찰 정도로 후타쿠치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후타쿠치를 기다리지 않고 카마사키가 재차 말했다.

?”

후타쿠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카마사키 씨가 잘못 말한 걸거다.

무슨 소리에요?”

그 때 너, 나한테 키스했잖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거 장난이었냐?”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렸다. 후타쿠치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백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나겠지. 몇 년 동안 구질구질하게 혼자 앓아왔던 짝사랑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는 거다. 해피엔딩이 아닌 배드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장난이었다는 거야?”

애매한 대답에 카마사키가 다른 쪽으로 받아들였는지 따지며 물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두려움에 후타쿠치는 순간 망설였다. 장난이었다고 하면 아직은 마지막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여기까지 와서도 늘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찌질한 새끼. 후타쿠치는 스스로를 환멸하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카마사키 씨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벅차게 차오르려는 숨소리가 카마사키 씨의 귀에 들리지 않기를. 후타쿠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왜 허구한 날 오냐고 물었었죠. 좋아서 그랬어요.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별 시덥잖은 핑계를 갖다 대가면서 카마사키 씨를 만나러 간 거였어요.”

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후타쿠치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코끝이 찡해지고 있었다. 씨발, 꼴사납게 우는 건 절대 안 되는데.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후타쿠치는 눈이 아려올 정도로 눈에 힘을 줬다. 있는 힘껏 힘을 준 덕분일까, 다행히 촉촉하게 젖어가던 눈가가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코끝은 찡했지만 마른 눈가에 후타쿠치가 안도했을 무렵 내내 침묵하던 카마사키가 입을 열었다. 방금 후배 남자에게 고백 받은 사람치고는 목소리에 어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예요.”

그래서 넌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고. 이렇게 다 체념했다는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

…….”

그 날 이후로 벌써 4 개월 남짓 지났다.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냐고.”

공백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든 말해보려 했지만 후타쿠치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과 그 때의 상황을 비롯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름날의 자신과, 배구라는 핑계로 모든 걸 뒤로 했던 4개월간 나는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카마사키 씨의 말처럼 뭘 하고 싶은 걸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짝사랑에 갈피를 못 잡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카마사키 씨의 둔한 신경을 탓하며 아무 말도 못하는 겁쟁이였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노력해왔다고 자위했지만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 그 모든 것은 허사일 뿐이었다. 정작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면서 왜 내 마음을 알지 못하냐고 떼를 쓸 뿐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원인을 카마사키 씨에게 덮어버리고 이것 보라며, 가능성 따위 1%도 없다며 가망 없는 현실을 자조했다. 뭣 하나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포기해버린 것은 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를경멸해요?”

…….”

남자를,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를 경멸하고 있냐고요.”

아니.”

그럼.”

…….”

그렇다면.”

후타쿠치는 해야 할 말을 고르는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지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 후타쿠치의 뒤에서 카마사키는 아래로 흐르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 사이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본래의 피부색보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들에 카마사키는 애가 탔다. 모든 게 끝났다는 어조로 진심을 고백한 후타쿠치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전부 체념하고 있을까.

초침이 시계를 한 바퀴 빙 돌았을 무렵 후타쿠치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좋아해도, 되요?”

…….”

난 그냥, 카마사키 씨를 좋아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수도 없이 그만두고 지워버리려 했는데 결과는 항상 똑같았어요. 뭘 어떻게 해도 좋아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이제는, 이대로 계속된다면 이제,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요. 그냥, 내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한없이 계속.”

…….”

그러다보면 시간에 닳고 닳아서 감정이 문드러져 없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기 전에 언젠가 카마사키 씨가,”

마른 헛기침을 하며 후타쿠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콜록,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후타쿠치의 뒤통수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 여전히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날 생각해줄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

정말 사소한 거라도, 아무 것도 아닌 흔적에서 나를 생각하고 신경 써주었으면.”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불시에 돌려지고 짧은 숨을 들이키는 후타쿠치의 입술에 카마사키가 닿았다. 꾹 다문 입술이 아주 잠깐 부딪혔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후타쿠치는 시공간이 멈춘 듯했다. 꿈인가, 잠시 헤매던 시야에 인상을 찌푸린 카마사키 씨의 얼굴이 보였다. 다물다 못해 살짝 즈려물고 있는 입술은 빨갛게 달아올라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아랫입술에서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키스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서툰 입맞춤의 흔적이었다.

, 엄청나게 둔해서 네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네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돌려서 말하는 것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아.”

알아요.”

너도 알다시피 너랑 나는 싸우지 않을 날보다 싸울 날이 더 많을 거고. 대부분 다 네 탓일 테지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

난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널 좋아하지 않아.”

…….”

그래도 괜찮아?”

카마사키는 마지막 말을 할 때만큼은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카마사키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후타쿠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후타쿠치가 무슨 수를 써도 못 잊을 만큼 좋아한다면, 자신은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후타쿠치가 그 격차로 상처받는 게 보기 싫었다.

넌 내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아. 솔직히 남자에다 후배인 널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네가 키스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

널 만나지 않았던 4개월 동안 난 계속 너에 대해 생각했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신경 쓰였으니까.”

쌀쌀한 11월이다. 밖은 손끝을 시리게 할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고, 집 안에도 어렴풋이 한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마사키는 이마에 살포시 땀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로 꼼지락거리게 되는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 손바닥에도 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널 좋아한다고는 하지 않아. 그래도 난, 그동안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

널 좋아할 것 같아, 후타쿠치.”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카마사키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감정 앞에 금방 막 자란 조그만 감정을 들이대기가 벅차고 아까웠다. 아직 다 자라지는 않은 감정이 만개할 즈음, 후타쿠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 또한 후타쿠치를 좋아할 때, 그 때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좋아해도 되겠냐고 절절하게 묻는 후타쿠치의 입장에선 희망고문이라도 하는 거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지금은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바라건대 후타쿠치가 거절하지 않기를.

나랑 사귈래?”

카마사키의 신경이 온통 후타쿠치 쪽으로 흘렀다. 심장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며 자신이 이만큼 두근거린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초조함에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다. 머리 한 편에 출근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는 듯 했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째깍째깍, 얼마나 초침소리를 들었을까. 카마사키가 슬쩍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려는 순간 미동도 없던 후타쿠치가 손을 들었다.

오른쪽 가슴에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조금씩, 천천히 손을 들어 마주 닿은 몸을 끌어안았다, 후타쿠치가 그랬듯이. 귓가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타쿠치가 얼굴을 묻고 있는 왼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일 뿐, 후타쿠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어깨에도 눈물 흔적은 남지 않았다. 좋아해요. 나직하게, 그러나 억누른 목소리는 한 마디만 반복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는 가만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한 번, 두 번, 후타쿠치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흔적이 남았다. 비로소 사랑이 흔적을 남겼다.




(10007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中)




준결승까지 올라갔어.”

그래? 잘했네.”

가게에 들어서는 카마사키를 향해 초장부터 내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니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졸업하고도 간간이 보던 얼굴이지만 근래 들어 참 드물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낯선 얼굴을 하곤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왜 안 왔어? 인터하이 때는 매일같이 오겠다고 난리더니.”

그냥, . 요즘 회사 일이 바쁘기도 하고. 굳이 나까지 안 가도 다른 애들이 있잖아.”

거짓말 치지 마. 아닌 거 다 알아.”

모니와의 말에 카마사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잔이나 비운 술잔과 친구를 번갈아 보다 모니와는 말없이 카마사키의 잔을 채워주었다.

무슨 일인지 봄고 기간 내내 카마사키는 배구부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은퇴하고 나서도 뻔질나게 놀러 오고, 인터하이 때는 꼬박꼬박 찾아왔던 주제에 갑자기 생판 남인 사람마냥 연습 때에도, 경기 때도 못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하게 웃을 뿐 대답을 회피하기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마사키의 성격 상 아무 일도 없이 그러는 건 아닌 게 분명했지만 본인은 말해주지 않으니 모니와는 결국 모든 경기가 끝나고서야 후배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예선시합 전에 보러 갔었던 때부터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더니 원인은 후타쿠치에게 있는 듯 했다. 경기를 앞둔 긴장으로 보기엔 이렇게까지 신경이 예민해진 적은 없는지라 그 즈음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만나면 항상 서로 티격태격하던 사이이긴 하지만 뒤끝이 있었던 적은 없는데. 모니와는 평소보다 담담해 보이는 카마사키의 얼굴을 살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이름을 듣자마자 별거 아닌 근황을 말하던 입을 다물었다. 모니와의 눈을 피해 카마사키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답지 않게 내내 조용하더라.”

.”

건방진 건 여전하지만.”

.”

무슨 일 있어?, 하고 모니와는 말을 꺼내고 싶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카마사키가 그랬듯이, 후타쿠치도 후배들은커녕 아오네에게 조차 별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걸 보면 두 사람 모두 얘기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대체 뭐기에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모니와는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카마사키에게 무언의 시위를 표했지만 그런 모니와를 카마사키는 끝까지 모른척했다.

, 모니와.”

한참을 대화를 피하고 술만 마시던 카마사키가 술에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

내가 머, 뭐 마래줄 게, 있는데.”

사정없이 꼬인 혀로 카마사키가 더듬더듬 말했다. 모니와는 이미 한계치까지 마신 카마사키의 손에서 술잔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빠져나가는 술잔을 따라가는 손에 물이 든 컵을 대신 쥐어 주며 모니와는 말해보라며 카마사키를 재촉했다.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손에 쥔 게 술잔은 아니라는 걸 아는지 카마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컵을 만지작거렸다. 말하다 말고 컵에 신경을 뺏긴 카마사키에게 모니와가 재차 물었다.

뭐를 말하고 싶은데?”

, 맞아. 말 해줄 거.”

오늘 내내 무표정에 가깝던 카마사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오른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헤집어대는 게 짜증이 났다기보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걔 있잖아, 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중에 어떤 애가 그러는데.”

.”

내가 아는 애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니와는 카마사키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신의 얘기임을 눈치 챘다. 본능적으로 아는 애라고 포장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니까 내가 아는 애의 아는 애가 고등학교 후밴데, 친하친한가? 아씨,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후배란 자식이 말이야. 그 자식이.”

그 자식이 왜?”

젠장, 그 자식이 나한테, 아니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한테 가, 갑자기.”

갑자기?”

,”

?”

악 소리를 내며 카마사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 마구잡이로 쥔 까만 머리카락이 불쌍해 보였다. 술 때문에 빨개진 건지 어떤지 목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양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카마사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한테 키스를 했어. 그 자시기 나한테 갑자기. 근데 그래놓고 암 말도 안하고 .”

, ?! 잠깐, 뭐라고?”

한 번도 아니고 며, 몇 번이나, 젠장.”

, 그러니까 누가 너한테?”

모니와. , 그 자식이 나한테 왜 그랬지? 말로 하는 걸로는 부족해서, 그래서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날 괴롭히는 건가? 새끼, 나 첫키스도 아직이었던 거 어떻게 알아가지고.”

그러니까 누가.”

중얼중얼 첫키스가 어쨌네, 신종 이지메냐며 횡설수설 거리던 카마사키의 고개가 끝내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푸흣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풋풋거렸다. 미쳤나보다고 모니와가 사색에 질리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실은 다 알아. 젠장, 내가 암만 눈치가 없어도 다 안다고. 있지, 모니와. 나 어떡해.”

그니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오.”

어떡해, 존나존나, 걔 나 조아하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걔가 날.”

그러니까 걔가 누군지 말해달라고! 모니와가 미친놈처럼 큭큭거리는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봤지만 카마사키는 뭐라 웅얼거리기만 할뿐 일어나지 않았다.

쿠치, 미쳤나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고부터 이렇게까지 마신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카마사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하지 않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출근했어야 했으면 쓰러졌을 지도 몰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카마사키는 안도했다.

어제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셨더라? 꽤 오랜만에 모니와랑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봄고 얘기 좀 하다가그러다가, 맞아, 모니와가 후타쿠치 얘기를 꺼냈었다. 가만있으면 자꾸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 계속 술을 들이켰던 게 기억이 났다. 최대한 후타쿠치 얘기를 피하려고 회사 일만 얘기하면서 퍼마셨지.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시다가 어느 부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 왠지 예감이 안 좋다. 술김에 모니와한테 잔뜩 주정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마사키는 이마를 쥐어짜며 어제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모니와가 잔뜩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던 것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요상하게 눈빛이 반짝이던데, 대체 무슨 얘기를 했지? 이불 밖으로 손끝을 더듬으니 핸드폰이 잡혔다. 배터리가 없는지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보조배터리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그 잠깐 사이에도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은 켜지자마자 징징 소리를 내며 한참동안이나 부들거렸다. 거의 다 모니와로부터 온 라인이었다.

[배신자. 대체 그 자식이라는게 누구야?]

제일 처음에 온 라인은 그 자식이 누구냐는 얘기였다. 그 자식? 카마사키는 곧바로 화면을 내렸다.

[까먹었을게 뻔하지]

[어제 너가 첫키스 얘기해줌]

[누가 너 좋아한다며]

[이모티콘]

[이모티콘]

[얼굴 새빨개져서 부끄러워함]

[사진]

[사진]

[사진]

[이모티콘]

채팅창에 줄줄이 올라온 건 난리부르스를 추는 캐릭터 이모티콘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사진들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온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웬만큼 취했을 거라곤 예감했었지만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카마사키는 최대한 사진을 외면하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꿈이었으면 하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두통 때문에 머리가 사정없이 아팠다. 그나저나 모니와한테 후타쿠치 얘기까지 해버렸나? 첫키스니, 그 자식이니 하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술김에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누가 그랬는지까지 말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으아. 으아으아.”

그 자식이 후타쿠치란 걸 알면, 모니와 기절할 지도. 카마사키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분명하게 그 일이 언제 일어났더라. 한창 열대야가 시작되었을 때니 벌써 몇 달도 전의 이야기다. 방학을 맞이해 여름합숙을 앞둔 후타쿠치가 언제나와 같이 놀러 왔었고,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날이 너무 더웠다는 것 정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배어나올 정도라 후타쿠치도, 자신도 선풍기 바람 하나에만 의존해 더위에 지쳐 있었다. 아니,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날은 유난히 처음부터 후타쿠치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기운 넘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후타쿠치가 별안간 키스를 해왔던 때. 처음에는 후타쿠치와 입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저 눈앞에 늘 보던 얼굴이 평소보다 가까웠다는 것만 알았다. 그저 너무 더워서, 지나치게 가까이에 보이는 얼굴이 신기루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입술에 닿은 후타쿠치의 입술이 순간 움찔하고 떨리지 않았다면 계속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을 거다. 정신을 차리고 후타쿠치를 밀어내려 했을 땐 이미 어깻죽지를 잡히고 재차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비틀고 기울어지는 고갯짓에 후타쿠치의 앞머리가 스치는 이마가 간지러웠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입술을 깨물고, 기어코 혀를 들이밀어 입 안 곳곳을 문지르던 후타쿠치는 한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깜짝 놀라 나를 밀쳤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사이, 후타쿠치의 얼굴이 빠르게 무너져갔다. 숨이 턱 막힌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 모습이 금기를 저지른 어린아이 같았다. 정면으로 마주친 캐러멜 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지려던 말이 목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굳어 있던 후타쿠치는 도망치듯 일어나 방을 나갔다. 들고 왔었던 가방만 남긴 채,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뻔질나게 울려대던 벨소리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야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자주 얼굴을 봤으니 친해진 건 맞지만 단순히 선후배로서 친분이 쌓인 것이라 생각했다. 후타쿠치가 느닷없이 입술을 들이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 이후로 후타쿠치를 만난 적이 없으니 어느 하나 분명하진 않지만, 그 때의 그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 방면으로 경험도 없고 눈치도 없더라도 그건 분명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했던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 자취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늘어난 연락들, 그 때의 키스와 결정적으로 그 때의 저질렀다는 표정.

이제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는 사이 시간이 수개월이나 흘렀다. 처음 몇 주간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느 때와 같이 언젠가 태연한 얼굴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안 온다는 걸 깨달았을 땐 꽤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내심 후련한데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약간 화도 났다. 실수였던 아니던 뭐든 간에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따져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후타쿠치가 오지 않는 게 허무했다. 집에 있으면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있어야 할 게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 크게 느껴지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낯설었고, 혼자 먹는 저녁이 맛이 없었다. 평소에 옆에서 딴지를 걸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렇게 드나들더니 집안 곳곳에 후타쿠치의 흔적이 잔뜩 남아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도 번번이 후타쿠치가 떠올랐다. 자취를 시작한 뒤 딱히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한 적은 없었는데 그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지나치게 허전함을 느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애매하게 지난 시간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즈음 마침 모니와랑 사사야가 봄고 예선을 앞두고 응원 차 연습을 보러 가겠냐고 물어왔을 땐 기회라고 생각했다. 핑계가 생겼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일단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고, 뭔가 해결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집을 나설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아무 연락도 없는 건 날 피하는 거라고, 이제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고를 앞두고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면 안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갑작스런 일이 생겼다며 핑계를 댔다.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회피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 도망치니 되돌아가는 게 더 무서워졌다. 온갖 이유를 대가며 거절하다 상황을 파악했을 땐 모든 경기가 끝난 뒤였다. 그나마 있던 핑계거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피하기도, 다가가기도, 그렇다고 그냥 멈춰 있을 수도 없는데 뭘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니 근데 왜, 내가 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걔가 나를 좋아하는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대체 내가 왜 틈만 날 때마다 그 자식 생각만 하는 거냐. 어째서 내가 그 자식이 옆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쓸쓸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데?

대체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건지.

 

 

 

오랜만에 들은 그 사람의 소식은 전혀 반가울 만한 게 아니었다.

봄고 예선전까지 남아있던 3학년들은 잠시 뒷전으로 미루었던 취업과 진학 등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유난히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시린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가을비 치고는 대차게 내렸던 어젯밤 비와 더불어 예년보다 낮은 기온 때문에 그날따라 아침 등굣길이 쌀쌀했다. 수 년 동안 반복됐던 아침연습 덕분인지 후타쿠치는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아직도 고교배구가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근 시간보다 한참 앞섰기 때문인지 역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철을 기다리는데 맞은 편 플랫폼에 선 여자의 나풀거리는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팔랑팔랑 낙엽이 길가에 뒹굴 듯이 팔락거렸다. 멍하니 쳐다보는데 스카프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매무새를 정리하며 눈이 마주치지 않은 사람처럼 딴청을 부렸다. 후타쿠치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관심 있어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한 것 같았다. 여자는 예민해서 편하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보이는 행동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니까. 그만큼 착각도 많이 하지만 사람 사귀는 것에 있어서 예민하다고 나쁠 건 없다. 그러다 자연스레 예민하지 않은 남자가 떠올랐다. 솟아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전철이 다가온다는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철에 타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모니와였다. 뭘 하는지 핸드폰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모니와의 옆에 앉았다.

모니와 씨.”

어라? 후타쿠치. 완전 우연이다! 어떻게 전철에서 다 만나네.”

후타쿠치가 말을 걸고서야 모니와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만남에 모니와의 동그란 눈이 반짝하고 커다래졌다. 카마사키와 같이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된 모니와는 회사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카마사키를 제외하곤 선배가 양복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신선했다. 거의 1년은 입었을 텐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감색의 양복차림이 아직도 어색해 보였다.

아빠 양복 빌려 입은 중학생 같아요. 뭐야, 넥타이 색깔이 촌스럽잖아요.”

중학생이라는 발언에 모니와가 충격을 받은 듯 괜히 소매를 정리했다. 이 넥타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라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넥타이를 쓰다듬던 모니와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랄만한 거 알려줄까?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괘씸하니까 너한텐 말해줄게.”

제가 괘씸하다고요?”

아니, 너 말고. 진짜 걔가 제일 먼저 배신을 때릴 줄이야!”

누가 배신을 때려요.”

모니와는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후타쿠치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 이야기든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후타쿠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하나도 안 놀라기만 해 봐라. 가는 길에 내내 괴롭혀 줘야지, 하고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먹던 후타쿠치는 이어지는 모니와의 말에 귀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고요?”

카마사키, 사귀는 여자 있나봐.”

사귀는, 여자.

카마사키 씨가.

순간 느낀 감정은 뭐랄까, 억울함이었다. 또 답답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고장 난 것 마냥 모든 게 멈춰지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귓가에는 모니와 씨가 계속해서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귓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콩닥콩닥 잘만 뛰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진 기분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피가 찢겨진 가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모든 감각이 아득해져갔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완벽하게 제로.

아직도 지독하게 더웠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짜증날 정도로 후덥지근했던 방, 들리는 거라곤 가끔씩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이따금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로 덥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 입술이 맞닿았을 때 덜컥 숨을 들이키던 소리.

내가 대체 왜 그랬지.

그 날은 여러모로 기분이 영 별로였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여름방학과 동시에 시작된 배구부 집중 연습 때문에 학기 중일 때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이 지나치게 더웠다. 덕분에 샤워를 했는데도 카마사키 씨를 찾아가는 도중에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셋째로는 그냥 별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딱히 그 날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랬다. 언젠가부터 카마사키 씨를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감정이 요동쳤다.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얽인 실타래가 있어서 그걸 풀고 싶은데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애타고 초조하고 짜증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즈음엔 오랫동안 질질 끌어왔던 짝사랑에 나도 모르게 지쳐가던 중이었다. 아무 변화도 없는 관계가 지겨웠다.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몸짓에 화가 났다. 그 무신경함이 원망스러웠다. 가끔 다짜고짜 카마사키 씨를 붙들고 따지고 싶었다. 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느냐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왜 모르냐고. 정작 고백할 용기는 없는 주제에 멋대로 탓하고 원망했다.

이렇게까지 찌질해질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충동적으로 키스해버린 데다 일을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그 날의 나를 죽도록 패주고 싶다. 그 날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지만. 배구를 핑계로 삼아 나는 또 한 번 도망쳤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게 무서웠다. 경멸의 눈빛으로 날 볼 까봐, 혐오스럽다는 듯 말할까봐.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봐, 나는 그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끝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게 결국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주구장창 내가 먼저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나러 가지 않으니 만날 일도, 하물며 연락도 없다. 혹시 이미 카마사키 씨는 모든 걸 끝낸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는데 왜 연락하지 않는 걸까.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연락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미 나를 싫어하게 된 거면 어떡하나. 어쩌면, 나는 벌써 잊혀 진 걸까.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와 카마사키 씨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구나. 고작해야 선후배 관계로 정리될 뿐, 평범하고 흔한 사이. 갑자기 연락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이라는 사실이 잔인하다.

차라리 그 때 도망치지 않고 고백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힘들어 하는 일은 없었을까. 차라리 고백해서 차였다면 지금쯤 좋아했던 감정을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누군가와 사귀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혹시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까?

도망쳤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나는 왜 자꾸 도망치기만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그 집에 찾아가 이미 오래 전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간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지는 게 있을 지도 모른다. 근데 왜 발걸음은 생각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는 건지. 한 걸음 다가가는 게 어째서 이다지도 무서운 건지...

 

 

 

(10140자)

Posted by 005500 :

[후타카마] 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上)

- 0601 후타카마의 날 기념 뻘글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5정거장, 역에서 내려 버스로 5분 정도를 또 가면 외벽은 깔끔하지만 내부는 썩 좋지 않은 그럭저럭한 아파트에 도착한다. 8가구가 사는 이 아파트에는 대부분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자취하고 있다. 2, 204호에는 카마사키가 산다.

또 왔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그나저나 집에 있으면 환기 좀 하죠? 벌써부터 혼자 사는 아저씨 냄새 나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풍기는 카마사키의 냄새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며 말했다. 카마사키가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의 방에는 그 특유의 냄새가 배었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몰랐던 체취가 몇 개월이 지나자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거든. 그리고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주제에 어린 척 하지 마라.”

말과는 달리 카마사키는 조용히 베란다 문을 열었다. 집 냄새가 그 조금 열린 틈으로 날아갈 리 없지만 후타쿠치는 이 집에 올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문을 열게 했다. 그러면 단 둘뿐인 좁은 방에 바깥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은은한 소음이 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진짜 왜 허구한 날 찾아 와. 놀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걱정 안 해도 연습은 잘하고 있거든요? 완전 순조롭게 돼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 하러 오냐고, 만날. 와서 하는 것도 없고 금방 있다가 가잖아.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피곤하지도 않아? 너 친구 없어서 심심해서 오는 거지?”

카마사키 씨보다 친구 많거든요? 됐고,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요?”

네가 이렇게 성격이 드러우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서 먹을 거 찾지 말고 네가 먹을 거 사오는 게 맞는 거 아니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카마사키가 냉장고를 확인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먹을 건 없었다. 방금 저녁을 해결한 참이라 남은 밥도 없었고, 늘 아침으로 먹던 식빵조차 마침 오늘 아침밥으로 다 먹었다. 하다못해 소면도, 과자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언제나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나카와 컵라면뿐이었다.

나가서 뭐 먹을래?”

카마사키는 텅텅 비어 유독 찬 공기를 내뿜는 냉장고를 조용히 닫았다. 무슨 일인지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는 후배에게 또 컵라면을 내주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았지만 빈곤한 자취생에게 컵라면 말고는 내줄 것이 없고, 어쩌다보니 올 때마다 컵라면만 먹이고 있다.

라멘 콜?”

.”

둘이 나가도 열에 여덟은 라멘을 먹지만, 컵라면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 카마사키는 지갑을 챙기고 불을 껐다. 알고 보면 후타쿠치 이 녀석, 우리 집 근처에 라멘 맛집 때문에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안하냐고 비아냥거리던 후타쿠치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카마사키의 취업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교에서 실습할 때 관심 있었던 회사에 에라 모르겠다, 면서 무작정 이력서를 보낸 것이 서류 통과로, 면접으로 이어졌고 며칠을 안절부절 못하며 전화를 기다린 결과 합격 전화를 받았다. 지원한 카마사키 본인이 가장 놀라웠을 만큼 카마사키의 취업활동은 금세 끝났다. 취업 준비생을 노린 사기가 아닐까 걱정하면서 카마사키는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고,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이제는 꽤 회사 생활에 익숙해졌다.

혼자 살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환경이 변한 것도, 생활 습관이 변한 것도 아니라 후타쿠치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배구부 녀석들과 집들이 겸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후타쿠치는 일주일에 적어도 3, 4번은 찾아왔다. 평일에는 연습이 끝나고 어둑해진 저녁에, 주말에는 늦어도 점심 전에. 딱히 와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이다 돌아간다. , 두 달도 아니고 벌써 몇 개월을 그러고 있으니 카마사키가 뭐 하러 오냐고 매번 묻지만 후타쿠치는 매번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거나 그게 중요해요? 하고 되묻기만 하니 이제는 더 이상 물어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가끔 연습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찾아올 때면 저도 모르게 왜? 하고 묻게 된다.

애초에 이렇게 매일같이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던가, 나랑 후타쿠치가?

 

 

카마사키 씨가 배구부를 은퇴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도, 같은 동네도 아닌 곳으로 카마사키 씨가 가버렸고 카마사키 씨가 없는 날이 반복되었다. 늘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습관처럼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밖에 카마사키 씨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2년 동안 익숙해진 체육관, 빈 코트 위에서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손으로 훔치던 카마사키 씨를 가만히 떠올린다. 만지면 적당히 손에 감길 노랗고 짧은 머리카락을 상상한다. 손을 뻗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텅 빈 손바닥이 아무도 없는 코트만큼이나 허무했다.

연애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연애를 해봤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꽤 연애를 즐겨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애는 심플했다. 고백을 받으면 사귀고, 적당히 마음 가는 상대가 있으면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하고, 며칠의 밤이 지나면 연애가 시작되곤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끔은 조금 먼 곳으로 놀러 가거나 하다보면 어느새 서로가 연애하기에 맞지 않거나 질려서 자연스럽게 끝나는 연애.

만나고, 고백하고, 사귀고, 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심플한 연애 사이클에 익숙했던 내게 처음으로 공략법을 알 수 없는 상대가 바로 카마사키 씨였다. 애초에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그 남자는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던 데다가, 서로 성격도 맞지 않아 만나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길 일수였다. 그런 남자를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더라. 외모도, 성격도 취향에 한참 벗어나고 하물며 취미조차 맞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 왜 좋아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바보 같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에 상관없이 깨닫고 보니 사랑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말 한 마디에 감정이 널을 뛰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쉬운 연애만 해왔던 만큼 스킨십도 쉽게 단계를 밟던 자신이었지만, 카마사키 씨를 향한 연애는 스킨십의 단계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사실은 연애라고 하지도 못하는 짝사랑이니 계단조차 밟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른 척, 실수인 척, 온갖 척을 갖다 대며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카마사키 씨를 상대로는 이상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가득 차올랐는데 고백하지도, 닿지도 못한다. 닿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닿은 손끝에서부터 흘러넘쳐 그 사람에게로 향할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만약 감정의 형태나 크기가 고스란히 보인다면 아마 나는 그 날로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경멸섞인 눈은 별로 두렵지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두렵다. 이런 사랑을 알게 된 뒤부터,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그 남자가 되어 버렸다.

 

연습 정말 잘하고 있는 거냐? 왜 만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연습 땡땡이치고 오는 거면 출입금지령 내릴 거야.”

신경 쓰지 마시고 카마사키 씨는 방 청소나 좀 하시죠? 올 때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니까. 혼자 살 감당이 안 되면 자취를 시작하지를 말던가. 집에 밥 없으면 그냥 굶거나 컵라면이나 모나카로 떼우죠? 안 봐도 뻔해.”

그냥 난 모나카랑 라면을 좋아하는 거야.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말고 그만 찾아 와.”

뻔질나게 카마사키의 자취방을 들락날락하며 알게 된 사실은, 카마사키는 집에 컵라면과 모나카만 박스 채로 쌓아두고 좀처럼 밥을 챙겨 먹질 않는다는 거였다. 아침은 항상 토스트와 잼,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저녁은 대충 밥이랑 계란 후라이 혹은 소세지 볶음. 최소한의 요리를 위한 야채도 없고 양념은 케찹뿐이다. 과일은 말할 것도 없이 냉장고에 있는 걸 본 적도 없다.

본가가 회사에서 먼 것도 아닌데 왜 자취하는 거예요? 고교데뷔처럼 직장인데뷔라도 하는 거?”

그런 거 아니라고. , 됐고 라면이나 처먹어.”

노란 머리가 그리워도 뭐 어쩔 수 없죠. 이제 직장인이니까요, 그쵸? , 봄고 예선 시작하기 전에 머리 염색이나 할까봐. 코트에서 확 띄게.”

너랑 얘기하면 열 받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노랗게 염색했던 카마사키 씨의 머리는 직장인이 되면서 본연의 까만 머리색으로 돌아갔다. 딱히 염색이 금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노란색과 같이 튀는 색은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3년 동안 노란색이었던 머리가 중학생 때와 같이 까맣고 짧은 머리로 돌아가자 퍽 우울했는지 카마사키 씨에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색하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날 때면 쓸어 올릴 만큼 머리가 자라지도 않은 주제에 머리카락을 가만두질 못한다. 짧은 머리를 부스러트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 후타쿠치.”

왜요.”

직장인데뷔라는 말이 짜증났는지 말없이 라면만 먹던 카마사키가 목을 축이며 말했다. 어느새 그릇은 깨끗이 비워진 뒤였다.

너 말이야, 이왕 우리 집에 올 거면 오는 길에 먹을 거라도 사 오든가 해. 아니면 와서 뭐 해먹던가.”

귀찮으니까 내가 해주진 못하겠고. 대답 않고 라면을 비우는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는 괜히 테이블에 휴지를 조각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근데 얘는 라면을 가닥가닥 나눠서 먹나,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여기까지 오는 돈이 얼만데요. 밥 정도는 카마사키 씨가 쏴요.”

누가 오랬냐.”

전 학생. 그쪽은 직장인.”

너 용돈 많이 받는 거 다 알거든? 너네 집 부자잖아.”

전 후배. 그쪽은 선배.”

누가 오랬냐고.”

찌익, 찌익 하고 카마사키의 손에서 휴지조각이 찢어져 내렸다. 주인이 본다면 질색을 할 정도로 어느새 휴지조각이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카마사키가 눈치를 보며 휴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 후타쿠치는 라면 그릇을 다 비우고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치울 텐데. 쓸데없는 곳에서 부지런하단 말이야.

누가 오랬냐, 퉁명스럽게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생각나 후타쿠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쓸데없는 곳까지 성실한 게 짜증나. 오면 그냥 오는 거지, 이유가 왜 필요해. 가끔씩 카마사키가 내뱉는 무신경한 말에 일일이 상처받는 자신이 화가 난다. 뭐 하러 와, 왜 왔냐, 누가 오래? 마치 난 너를 요만큼도 신경 안 써’, 라고 말하는 행동과 말투에 가끔 엉덩이를 발로 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바보 아니야? 내가 이렇게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못 보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보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냐고.

카마사키 씨가 오자고 했으니까 카마사키 씨가 쏴요.”

영수증을 내밀자 카마사키가 질렸다는 눈빛을 하다 고개를 휙 돌렸다. 배가 불러 빙글거리는 후타쿠치가 얄미워 죽겠다는 게 까만 뒤통수만으로도 느껴졌다.

오지 마, 이제. 너 이러려고 자꾸 꼬르륵거리는 소리 내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거지? 맞지?”

그렇게 돈이 없어요? 빌려줘요?”

꺼져. 나가 있어. 돈 있으니까 빨리 꺼져.”

라면 값도 못 낼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냉장고가 텅텅 빈 이유가 있었던 거네요.”

, , ! 열 받게 하지 말고 집에 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자마자 카마사키는 손을 휘적거리며 후타쿠치를 보냈다. 끝까지 돈 빌려 줄까요? 따위의 말을 내뱉는 후타쿠치한테 하마터면 기어코 주먹을 날릴 뻔했다. 뒷걸음치며 멀어지는 후타쿠치를 째려보며 카마사키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저 자식.

폼 잡으면서 뒤로 걸어가긴. 가다 확 넘어져 버려라.

 

 

마음이란 분명 나의마음일 텐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빌어먹게 아이러니하다. 이제까지의 내 연애놀이를 봐왔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기겁할 것이 분명하다. 쿨하게, 깔끔하게 맺고 끊음을 분명하게 했던 내가 맺는 것도, 끊는 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니까. 그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짝사랑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짝사랑을 몇 년 동안 하는 애들이 왜 그런 줄 알아?”

어쩌다보니 짝사랑 상담을 해주게 된 나메츠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들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카마사키 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재로선 나메츠밖에 없다.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빨라서 알게 된 주제에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며 떠보기에 그냥 말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메츠는 그 때부터 인터넷에서 되도 않는 지식들로 조언을 한답시고 까불고 있다.

우유부단해서. 멘탈이 약하니까.”

아니,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아서 끝도 나지 않는 거야. 시작하자마자 HP가 한 방에 닳든 말든 일단 시작을 해야 게임이 끝나는 거라고.”

언제나처럼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말일 줄 알았는데 나메츠의 말은 뜻밖이었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라든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라든가 해결책 아닌 해결책을 말할 줄 알았는데, 하고 의아해하는데 나메츠의 눈이 반짝였다.

고백 해, 후타쿠치! 일단 시작을 하란 말이야, 멍청아. 게임 스타트!”

게임 스타트, 하고 게임 오버 하라는 말이지? 지려고 시작하는 게임이 어디 있냐, 멍청아.”

카마사키 선배 졸업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거 아니야? 이대로 계속 짝사랑만 하겠다고?”

연애에 있어선 너 정말 너답지 않구나, 제멋대로 상담이랍시고 자리를 잡고 떠들어대던 나메츠는 항상 이 말을 반복했다. 나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말이라던가, 뻔히 보이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못 본 척 회피하고 있다고. 찌질한 겁쟁이란 말도 태어나 처음으로 나메츠에게 들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답지 않게 질질 끌고 있다는 거. 고백도 못하고 혼자서 감정 삭이는 주제에 나중에 카마사키 선배 여자친구 생겼다고 질투하지나 말아라, ?”

, 하고 휘슬을 불며 나메츠가 일어섰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하나, 둘 씩 체육관에 늘어져 있던 부원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제로라도 끈질기게 밀어붙여야 하는 게 맞잖아. 네가 언제부터 공이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었어? 점수를 따려면 먼저 공격해야지.”

……솔직하게 제로는 아니거든?”

제로는 아니지만 제로에 수렴하지.”

, 하고 연습을 재개한다는 휘슬이 다시 울렸다.

 

 

나메츠의 말이 맞다. 솔직히 말해 카마사키 씨와 연애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서 언젠가는 제로에 수렴할 게 분명하다. 끈질기게 카마사키 씨 집에 찾아가지만 단 둘이 방 안에 있어도 긴장감이 흐르기는커녕 나를 의식한다는 눈치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또 왔어? 란 말이 안녕이란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제로에 수렴하고 있다.

여름에 합숙 일정 잡혔겠네. 늘 가던 거기로?”

거기 말고 또 어디로 가겠어요. 그나저나 진짜 돈 없어서 에어컨도 못 고치고 있어요? 더워서 뒤지겠네.”

저번 주에 기사가 온다고 약속해놓고 안 온 거라고. 너 자꾸 나보고 돈 없다고 무시하는데, 제대로 돈 벌고 있거든? 너만 안 오면 통장에 차곡차곡 돈도 쌓이고 있었을 거거든?”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것도 모자라 연신 부채질을 하던 카마사키가 바닥에 찰싹 누워 꿈틀거렸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지라 윗옷이며 바지며 다 벗은 지 오래라 팬티 한 장만 걸친 몸이 노골적으로 눈에 띄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땀이 밴 살갗이 유난히 촉촉해 보인다.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살인 더위야.”

죽겠다.”

진짜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구나, 젠장. 더운데다 우울함까지 겹치면 정말 짜증나서 죽을 것 같아 후타쿠치는 대놓고 카마사키의 몸을 훑어보았다. 배구부 생활을 하며 볼 곳 안 볼 곳도 어쩌다보니 다 봤고, 자취방에서도 수없이 본 몸인데 막상 노골적으로 살펴보려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워서 머리가 몽롱해져서 그런 건가.

은퇴하고 난 뒤, 카마사키는 딱히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헬스장이라도 가서 기껏 키워놓은 근육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영 시간이 안 나는 듯 했다. 전체적인 골격은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그대로였지만 아무래도 근육이 많이 빠져 있었다. 뒷모습뿐이지만 만지면 예전과는 달리 마냥 단단하지만은 아닐 것 같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만 같은 곳까지 손을 뻗다 후타쿠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가까이에 다가갔다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이미 충분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으면 닿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후타쿠치는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드러누운 카마사키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고, 스킨십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카마사키를 만진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누군가를 만지는 게 처음도 아닌데 항상 카마사키의 앞에서는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마냥 아무 것도 못한다.

짜증나.”

만지고 싶다. 입술로, 코로, 두 손과 다리로, 내 몸의 모든 곳을 통해 카마사키 씨를 만지고 싶다. 옆에 있어도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저 남자의 몸에 나를 남기고 싶어.

수전증이야?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웃기지 마요. 카마사키 씨가 징그럽게 다 벗고 누운 게 짜증나서 손이 떨리는 거예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 아직까진 그래도 괜찮거든. 근육이 좀 빠지긴 했지만 심한 정도도 아니고.”

하는 말과는 달리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카마사키는 양 팔을 쭉 뻗고는 근육을 확인했다. 배구를 하던 시기에는 근육 키우기에 열중했을 정도로 근육에 집착했기에 카마사키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눈썹을 찡그리곤 한참동안이나 제 팔뚝을 만져보던 카마사키가 돌연 후타쿠치 쪽으로 다가갔다.

, 네가 한 번 만져 봐봐. 내가 보기엔 많이 빠진 것 같지는 않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땀 묻어서 싫어요. 게다가 카마사키 씨 체온 높아서 만지면 기분 나쁠 것 같고.”

다가온 만큼 후타쿠치가 물러서며 말했지만 카마사키는 끈질기게 다가가며 팔을 들이밀었다.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닿은 어깨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카마사키의 맨 살갗에 후타쿠치는 미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닿지 않으려고, 애먼 곳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온 신경이 오른쪽 어깨에 몰린 지 오래였다.

조금 만지는 걸로 안 죽어, 자식아. 빨리 확인해 봐, 너 때문에 자꾸 신경 쓰이잖아.”

, 진짜 싫다니.”

끈질기게 물어지는 카마사키를 피해 후타쿠치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카마사키가 기어코 후타쿠치의 손을 잡고 제 팔뚝으로 이끌었다.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후타쿠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눈치 없는 카마사키는 제 손인 것 마냥 후타쿠치의 손을 제 팔뚝 이곳저곳에 갖다 대었다.

어때?”

…….”

역시 좀 빠지긴 했지? 한창 키웠을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좀. 그래도 이 정도면 딱 좋은 수준 아닌가?”

…….”

뭐냐. 너 왜 말이 없어.”

그제야 후타쿠치가 아무 말도 않고 제 손에 이끌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마사키가 물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후타쿠치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진짜 수전증 아니야? 너 손이 좀 부들거리는.”

,”

?”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후타쿠치가 고개를 돌려 카마사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의문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약간 짧은 올라간 눈썹과, 답답한 걸 싫어해서 항상 드러나 있는 말끔한 이마가 유난히 눈에 들어찼다. 이제는 꽤 낯이 익은 검은 머리카락은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에 살풋 갈대처럼 흐트러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후타쿠치, 하고 부르는 카마사키의 목소리가 채 귀에 들리기도 전에 후타쿠치는 그대로 고개를 비틀었다. 밤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9892자)

Posted by 005500 :

[아카보쿠]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 0504 아카보쿠데이 기념 뻘글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듬직하게 벌어진 어깨에 하얀 유니폼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진 모양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기분이 묘하다. 어디를 보아도 자신과 똑같은 남자인데 왜 시선이 가는 것인지. 확실히 저 사람은 배구를 할 때만큼은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경우 그런 이유와는 조금 다르다. 딱히 배구를 하고 있지 않아도 늘 눈이 가니까.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시야에 보이면 그 모습을 쫓게 된다.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 딱히 문제될 건 없나.’

자꾸 쳐다보게 되고, 신경 쓰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라? 오늘도 보쿠토 안 왔어?”

.”

이상하네. 오늘은 그쪽도 연습 없어서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연락도 없었고?”

.”

너한테도 연락을 안 하다니 별일이네.”

코노하의 말에 아카아시는 괜히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봄고가 끝나고, 3학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진학을 준비하는 선배들은 센터시험을 마쳤고, 몇몇 선배들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체육관에는 1, 2학년들과 올해 봄에 입학하는 예비 신입생들로 가득해졌다. 봄고가 끝나고도 부지런히 체육관에 들르는 3학년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보쿠토 씨의 마지막 봄고는 4강까지였다. 경기가 끝난 그 다음 주에 보쿠토 씨는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왔던 한 실업팀에 들어갔다. 취업이나 진학을 선택한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봄고가 끝나고도 보쿠토 씨는 틈틈이 체육관에 들렀다. 이제 배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만이 아닌데도 고교 배구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보쿠토 씨는 이번 주 내내 체육관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옆에서 코노하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꾸하며 아카아시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섰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 생각보다 기분이 별로였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일주일째.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고백을 한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좋아해요, 보쿠토 씨.’

오랜 기간 동안 담아왔던 마음이었다. 언제 그 마음을 확신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외로 좋아한 지 꽤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카아시는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그대로 멈춘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하얀 수건을 아무렇게나 뒤집어 쓴 그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언제까지고 내가 돌봐주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

?’

그 아래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한 번도 본 적 없이 생경하게 빛나서, 아카아시는 일렁이는 마음을 하마터면 그대로 내비칠 뻔 했다. 언제나 유리구슬처럼 맑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맹금류의 것과 같이 날카로운 경계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만, 아카아시.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 한거야?’

…….’

그거 그런 뜻으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보쿠토 씨에게 고백했지. 낯선 표정의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럴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게 우스웠다. 같은 남자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당연한 반응인데. 보쿠토 씨라면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해도 경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나를 좋아하는 쪽은 보쿠토 씨일 것이라 생각했고, 고백한다면 기뻐할 줄 알았다.

그야 보쿠토 씨니까. 학년은 다르지만 다른 3학년들보다 훨씬 더 친하다고 생각했고, 배구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지 2년 동안 함께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같이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과 표정과 행동에 당연하게 나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었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거나 표현을 한 적은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으니까. 친구나 후배를 향한 감정보다는 더 큰,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알고 보니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착각한 것뿐이었지만.

미안, . ,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얼굴을 감싼 하얀 수건을 마구 쥐고는 보쿠토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멍하니 보쿠토가 있던 곳을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뒤늦게 체육관을 나섰을 때, 보쿠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방을 품에 안고 달려가고 있었다. 맹수에 쫓기는 토끼처럼 쉬지 않고 달려 나가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맥없이 주저앉아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도망칠 것까진 없잖아요.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예상했었지만 그 날 이후로 보쿠토는 체육관에 들르지 않았다. 매일같이 보내오던 라인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항상 아카아시를 불러내던 전화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마냥 아카아시의 일상에서 보쿠토가 사라지고 있었다.

. 아카아시.”

, 죄송해요. 잠깐 멍해져서뭐라고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었냐. 그보다, 오늘 연습 끝나고 뭐 있어?”

아뇨, 오늘은 별 일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그게, 보쿠토한테 전해줄 게 있는데, 나 이제 아르바이트 가봐야 하거든. 학교 오면 보쿠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이 꼬여버렸어. 대신 좀 전해다 줄래?”

어차피 오늘도 끝나고 만날 거잖아, 하고 코노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딱히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만나진 않는데 다들 그랬다. 아카아시가 혼자 있을 때면 보쿠토는 왜 같이 없냐며 물었고, 대신 뭐를 전해달라느니 부탁해왔다. 지금까지야 별 문제 없었지만 이런 부탁을 받는 것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해요. 오늘 보쿠토 씨 안 만나요.”

아카아시가 거절하자 코노하가 엑, 하고 뜻밖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부탁한 건 나인데, . 근데 진짜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고 전해주러 갈 수도 없고. 아니, 매일 오던 애가 오늘은 왜 안 왔데.”

급한 거예요?”

모르겠어.”

?”

어제 뜬금없이 전화하더니 가져다 달라던데. 오늘 안 가져다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으음, 코노하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끙끙거렸다. 오른쪽 신발을 툭툭거리는 게 꽤나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빼면 안 되는데.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코노하의 곁에서 아카아시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슬슬 연습이 끝날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영 연습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3학년이 빠져나간 틈을 매우기 위해선 더 연습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 날 이후로 자신만 그 때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카아시.”

끙끙거리는 코노하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그 다음 이어질 말을 눈치 챘다. 난처하게 웃어 보이는 아카아시에게 코노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종이봉투를 건넸다. 부탁한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코노하를 거절하지 못하고 아카아시는 결국 봉투를 받았다. 어쨌거나 보쿠토 씨를 만날만한 핑계거리는 생긴 셈이었지만 마냥 잘됐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직접 만난다면 어떤 얼굴을 보일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보쿠토를 만나고 처음으로 아카아시는 사람을 대면하는 일에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주일이나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보쿠토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아카아시를 만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이니까. 아카아시는 손에 쥔 봉투를 움켜쥐고 체육관을 나섰다. 보쿠토를 보러 간다는 사실에 조금씩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보고 싶었구나, .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는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구나.

 

보쿠토 씨를 확실히 만나려면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라인을 보내는 것도 전화를 거는 것도 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보쿠토의 집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벨을 눌렀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집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반,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아카아시는 좀처럼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괜히 손에 쥔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딩동딩동, 하고 울리는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다 메아리치며 사라졌을 때쯤 문이 열렸다. 보쿠토는 문 앞에 서 있는 아카아시를 보고 놀라서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바로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버렸다.

, 무슨 일이야?”

코노하 씨가 대신 물건을 전해다 달라고 하셔서요. 이거.”

, 고마워.”

물건을 받고도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각자 아무 말 없이 보쿠토는 손에 쥔 물건만 꼬물거렸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보기만 했다. 일주일 만에 보는 보쿠토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행색이 추레했다. 연습이 없는 날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엉망이었다. 하얗던 피부는 푸석하게 거칠어져 있었고, 눈가에는 못 보던 거뭇한 다크서클이 생겨 있었다. 딱히 예민한 성격도 아닌 사람이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제게 고백 받은 일로 고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지 말라고, 그저 장난이었다고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줘야 하는 걸까.

, 아카아시. 나 뭐 하던 중이라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에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끝까지 아카아시의 얼굴로는 시선을 주지 않는 모습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화가 나고,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잘 가라고 더듬거리며 문을 닫으려는 보쿠토의 팔을 잡아챘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만 하게 해 주세요.”

?”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망연한 얼굴로 반문하는 보쿠토의 눈을 마주하며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팔을 붙잡은 손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이 손을 놓으면 또다시 보쿠토가 토끼처럼 달아날 것만 같았다.

한 번만,”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 추억으로.”

…….”

졸업하면 다시는 만날 일 없잖아요. 이제 끝이잖아요.”

…….”

그러니까 한 번만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아카아시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보쿠토는 망설이다 반쯤 닫히다 말은 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카아시가 들어섰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면서 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먼저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가는 보쿠토의 등에서 아카아시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뭐 하고 있어. 들어 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카아시를 향해 보쿠토가 말했다. 그럼에도 길가에 박힌 돌멩이처럼 아카아시가 미동도 안 하자 보쿠토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뭐 하자는 거야, 아카아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말했다.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며. 네가 말 해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정말로 해도 됩니까?”

하지만 이걸로 다시는 네 얼굴 보지 않을 거야. 절대로, 다시는!”

보쿠토 씨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은 건, 멋대로 지어낸 상상인가. 아카아시는 끝이라고 내뱉는 보쿠토의 얼굴을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다가가는 것도 마지막, 이대로 멈추는 것도 마지막. 어떻게 해도 마지막이라는 결론밖에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뭘 해도 끝이라면……. 망설이던 아카아시의 시야에 떨리는 손이 보였다.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훤히 보였다. 어떤 결과든 가장 중요한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심을 마친 아카아시가 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보쿠토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뒤로 숨겼다. 아카아시가 고백을 한 날 이후, 보쿠토는 좀처럼 가만있질 못했다. 혼자 있으면 자꾸만 그 때의 일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고,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대화에 집중하질 못했다. 연습도 엉망진창으로 해버려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날,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 자리에 온 정신을 두고 온 것만 같았다. 그만큼 놀랐고, 충격적이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어쩌자고 고백을 해온 거지.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은데, 지금의 관계가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데.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지?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체육관에 발을 끊었다. 아카아시를 피해 학교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팀 연습을 하는 날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우연이라도 아카아시와 마주치면 왜 그랬냐고 따져들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에는 아카아시에 대한 비난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제 다시는 아카아시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아시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함께 할 수 없는 건가? 같이 배구를 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시시콜콜하게 산책을 나간다든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이제 함께하지 못하는 거야? 모든 게 끝난 거냐는 질문을 아카아시에게 직접 물을 수 없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계속 아카아시를 피하고 피하다 그대로 끝나도 괜찮은 거야?

내 평생에 아카아시가 항상 함께였던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만나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카아시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함께 있지 않은 날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내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붙어 있어줬으면 좋겠다. , 언제나.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도, 아카아시가 대학에 가서도, 각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끝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하는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너한테는 우리 관계가 끝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 번 하게 해달라는 말에 그러자 말했지만 무서웠다.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해, 이런 걸로 끝을 내지 않겠다고 해.

 

소리 없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아카아시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 아카아시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 둘씩 얽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한참동안 잡고 있을 뿐이었다. 힘을 주어 잡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닿아만 있었다.

죄송해요. 거짓말이에요.”

.”

한 번만 하게 해달라느니, 했던 거 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추억으로 삼아달라던 말도 거짓말이에요. 저는 그저…….”

그저…… 제 고백이 마지막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조용한 고백에 보쿠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카아시도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벅찼다. 무턱대고 화부터 난 자신이 창피했다. 간단하게 끝을 고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속상했다.

, 아카아시는 내가 왜 좋아?”

글쎄요.”

뭐어?! 그게 뭐야! 좋아한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그냥 언젠가부터 보쿠토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보이면 보이는 대로 좋았고, 안 보이면 생각하는 걸로도 좋았고.”

…….”

제 눈엔 보쿠토 씨가 빛나 보여요. 너무 빛이 나서 가끔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빛이 난다느니 그게 다 뭐야, 아카아시 답지 않아. 보쿠토는 낯부끄러운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아까보다 힘이 더 들어간 손가락의 감촉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무기력한 얼굴을 했던 주제에. 연애니 사랑이니 하나도 관심 없어 보였던 주제에.

보쿠토 씨.”

…….”

전 보쿠토 씨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만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널 차면 만나지 못하잖아. ,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뜻으로 너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아카아시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는 거잖아.”

아카아시가 찾아오고 처음으로 보쿠토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까맣게 빛나는 눈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 눈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아서 보쿠토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카아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인지, 확신할 수 없어.

한 번만.”

…….”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보쿠토 씨.”

아니라면 어떡하지, 내 마음이 너와 같지 않다면 어떡하지. 노력해도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해. 그리고 끝이라면 어떡해.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한 번만이라도 저를 좋아해준다면.”

…….”

그걸로 저는 괜찮아요.”

아카아시.”

그러니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제게서 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처음엔 용기가 없어 살짝 그러쥐기만 했던 손을 아카아시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쥐었다. 어떤 결론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사랑을 보답 받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잃지 않고 싶다. 언제나 함께이고 싶다. 제 말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얼굴이 난처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도망은 쳐도 끝까지 달아나지 못하는 게 사랑스러워. 옆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으니 허락해주세요, 보쿠토 씨.

보쿠토 씨.”

한 번만 저를 좋아해주세요.





Posted by 005500 :

[아카보쿠] 청포도

2017. 3. 25. 23:20 from

 [아카보쿠] 청포도

-보쿠른 전력 '하찮은 초능력'

-보쿠토TS 요소 있음 



 

청포도, 좋아하세요?”

만날 때마다 청포도를 달고 다니는 나를 향해 아카아시가 물었다. 항상 청포도를 먹고 다니셔서, 그동안 퍽 궁금했었는지 아닌 척 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청포도를 좋아하냐고?

. 좋아해.”

내 말에 아카아시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넌 모르지, 내가 왜 청포도를 달고 사는지.

 

 

 

사실 청포도는 그리 즐겨 먹지 않는다. 아니, 먹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이상하게 변하곤 마니까. 가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얼마동안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이전의 일로, 엄마가 마트에서 사온 청포도를 먹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탱탱하게 알이 차오른 푸른 포도 알맹이가 예뻐서 한 알, 씹을수록 단맛이 퍼져 나오는 게 좋아서 두 알. 그릇에 담겨진 청포도를 해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코타로! 그 때는 아직 어린 아이여서 엄마는 내가 머리가 조금 길어지고, 얼굴이 조금 바뀐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정확하게 여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날은 유난히 배가 고팠는데, 집에는 먹을 만한 게 청포도 말고는 없었다. 이걸 먹으면 또 이상하게 변하려나? 그 때는 그저 머리가 길어지고, 이목구비가 조금 달라지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집에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괜찮겠지 싶어 청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먹었나,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더니 역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단발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연하게 머리가 길었고, 얼굴도 조금 달랐다. 역시 변했잖아. 퉁명스럽게 거울을 보며 바지를 내렸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

내 물건이 그세 작아졌나? 팬티를 내렸는데 주니어가 없고, 주니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이상했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차마 자세히 확인하지도 못하고 나는 팬티를 올렸다. 꿈인가 싶어 망연하게 서 있는데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인상이 부드럽게 변한 얼굴을 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슴팍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 가슴이 나왔지? 아까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직접 확인해 볼까, 말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티셔츠의 목 부분을 늘렸다.

! ,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했던 게 현실이었다. 여자처럼 가슴이 올라 있었고, 아마도 여자의 그것인 게 밑에 있었고, 목소리도 변성기 이전의 것이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졌는데 소변은 마렵고, 어떻게 하지를 못하다 눈을 질끈 감고 후다닥 처리해버렸다. 몸이 완전히 변해버린 게 무서웠다. 이런 몸으론 배구도 하지 못해, 완전히 여자가 되어 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방문을 잠그고 이불을 덮어썼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다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꾹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떴을 때 다행히 원래의 모습이라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습이 변한다는 게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왕성할 때라, 그 이후 청포도를 먹어보며 실험을 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청포도를 먹고 10분정도 뒤에 모습이 천천히 변한다는 것과 1시간 뒤에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청포도를 먹으면 여자가 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철저하게 밖에서는 청포도를 먹지 않으려 주의했다. 급식에 청포도가 나오면 못 먹는다며 친구들에게 떠넘겼다. 한창 배가 고플 시기라 그 조그만 포도 알맹이를 주는 것도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청포도는 항상 멀리했는데,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헉,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보쿠토, 너 청포도 못 먹지 않아?”

? 못 먹는데.”

방금 먹은 거 청포도였어.”

그날따라 아침도 못 챙겨먹은 데다 점심을 먹기 전에 매점을 들르지 못해서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탓이었다. 배고파, 배고파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식판을 비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청포도를 먹은 것이었다. 친구의 말에 바로 식판을 들고 먼저 간다고 하곤 식당을 빠져 나왔다. 어떡하지, 10. 10분이면 여자가 되고, 한 시간 동안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가야 했다. 머릿속으로 어디에 가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 사람들을 피해 무작정 피했다. 밖에서 청포도를 실수로 먹은 건 처음이었다. 어떡해. 여차하면 화장실에 한 시간 동안 처박혀 있어야지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꺾인 곳에서 누군가와 크게 부딪혔다.

으악!”

,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진...”

그리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져 버렸다. 복도에서 달리다시피 걸었던 건 내 쪽이기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고개를 들었다.

, 아카아시?!”

분명 이 건물은 특별한 수업이 없는 이상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오지 않는데, 배구부 후배인 아카아시가 떡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마주쳐버려 당황하는데 아카아시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 저를 아세요?”

무슨 소리야. ...”

그제야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얇다는 것을 깨달았고, 허겁지겁 몸을 확인했더니 어느새 변해버렸는지 여자로 변한 뒤였다. 하필이면 아는 사람한테 들키다니!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한테 들켰어도 여자인 모습에 헐렁한 남자 교복을 입고 있으니 난처한 것은 피차일반이었지만. 아니, 아카아시여서 오히려 다행인건가? 흘끗 아카아시를 쳐다보자 방금 내가 아카아시한테 아는 척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쩌지, 솔직하게 말할까? 아카아시가 믿어 줄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카아시가 손을 내밀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 ... 괜찮아.”

남자 교복이라 셔츠와 재킷이 헐렁한 것도 문제였지만, 바지춤을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바지를 붙잡고 옷을 추스르는 나를 아카아시가 쳐다보았다.

아아아, 아니 이건! ... , , 벌칙이라서! 하하하... 벌칙이라...”

... . 교복이 커 보이는데요.”

, 어어! , 금방 갈아입을 거라서. 아하하! 그럼, 그럼 먼저 갈게...”

아카아시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행색이 이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치였기에 그냥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바지를 잡고 걸어야 해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아카아시가 잠깐, 하고 불렀다. 나는 뭘 훔친 도둑마냥 아카아시의 말을 무시하고 팔딱거리며 뛰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빈 교실에 한 시간 동안 숨어있다 모습이 변한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졸지에 수업을 빠져버려서 담당 선생님께 혼이 났고, 뜻밖의 상황에 몸과 정신이 피곤했다. 그래도 배구는 하러 가야지. 수업이 다 끝나고 연습하러 체육관에 들어가니 웬일로 아카아시가 먼저 와서 배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항상 뭐 준비하느라 일찍 오는 적은 없었는데.

아까의 일 때문인지 아카아시한테 평소처럼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눈치는 못 챈 것 같았지만 나중에 알아버렸을지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를 아카아시가 먼저 눈치 채고 고개를 꾸벅였다.

보쿠토 씨.”

, 어어? ,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살풋 눈썹을 찌푸리고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심상찮았다. 역시 알아차린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카아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아카아시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뭐야, 아카아시. 싱겁긴...”

, 근데.”

?! ! , 뭐야!”

혹시 여동생 있으세요? 사촌동생이라든가...”

없는데... ?”

내 말에 아카아시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아카아시가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나로서는 조금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왜냐고 다시 물으니 그제야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그냥 궁금해서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방금 전처럼 배구공을 튕기는 거였다. 내가 여동생이 있는지 왜, 그냥 궁금한 거지? 사람의 표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카아시의 얼굴이 복잡해 보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라, 아카아시의 대답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자가 되어서 아카아시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뜬금없이 여동생이 있냐는 물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것이, 혹시 나 때문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연습을 빠지겠다고 말하고, 청포도를 먹고 여자로 변한 뒤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서 아카아시를 기다렸다. 용의주도하게 체육복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조금 있으니 아카아시가 보였다. 여자가 돼서 아카아시를 만나보자! 라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정작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것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지금 뭘 하는 거지? , 아카아시한테 말 걸어볼까? 말 걸어서 뭐라고...

, 저기!”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아카아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제 부딪혔던, 하고 아카아시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 모습으로 아는 사람과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그보다 진짜로, 나인 걸 모르는 거겠지?

, 우연이네! 어제는 사과도 안하고 그냥 가버려서 미, 미안.”

아뇨.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어제 체육관에서 나를 살폈던 것처럼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기가 아는 선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선배의 여동생은 없다고 하니 신기한 걸까? 헷갈려하는 얼굴을 보자 조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왜 쳐다 봐? 날 알아?”

,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아서요.”

누구?”

내 질문에 아카아시가 말을 못하고 입술만 지르물었다. 이상하게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냥 배구부 선배가 아닌가, 나는? 왜 대답을 못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아주 많이 닮았거든요.”

?”

그 사람이 여자라면 그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서, 빤히 쳐다보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 어어?”

, 지금 한 말은 비밀로 해주세요.

졸지에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해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는지,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더니 당황해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다가 아카아시가 했던 말을 정리해보았다.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내가 닮았다고 했고, 여자라면 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그럼 방금 아카아시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는 건가?

, 아카아시...?”

뒤늦게 아카아시를 불러 봤지만 이미 체육관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곤 전혀,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너 전혀, 나한테 그런, 그런 말 해본 적도 없잖아. 오히려 매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으면서.

Posted by 005500 :

07.

 

 

 

고작 3개월이었다. 작년 겨울, 2학년의 끝 무렵에 사귀기 시작해 올해 3월까지 왔다.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더 일찍 끝을 냈어야 했다고 아쉬워해야 할까. 후타쿠치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 말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내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잘한 것일까 하고. 이렇게 끝나는 게 괜찮을까, 하고. 걸어가는 동안 끝까지 다 버리지 못한 미련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카마사키는 그날 밤 남몰래 방에 틀어박혀 베개를 적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다. 어차피 알고 시작한 거 왜 새삼스레, 혼자 상처받아서 결국 후타쿠치와 헤어졌냐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몰랐던 거 아니었잖아. 다 알고 있었잖아. 멋대로 기대한 건 네가 아니었냐고, 마음 단단히 먹었던 주제에 얼마 못 가서 결국 포기하는 거냐고 자책했다. 이때껏 힘든 일들 다 참아 왔으면서 왜 지금 와서.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외면하려 했던 후타쿠치의 진심은 어떻게든, 언제가 되었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가슴이 무너질 듯 아플 게 분명해서 무턱대고 피했었지만 애초에 피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알량한 기대를 품은 게 잘못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데 말이다. 혹시, 하는 기대를 품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한 조각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스킨십에 설레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 이제 와 후회해봤자 다 지나간 일이다, 카마사키.”

 

카마사키는 혼잣말을 하며 합리화했다. 어차피 끝났는데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참을 베개에 코를 박고 훌쩍거리다 카마사키는 울어서 부은 눈을 비비다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대로 잤다간 내일 아침에 벌에 쏘인 사람처럼 얼굴이 팅팅 부을 게 분명했다. 힘내자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인데. 몇 번을 더 찬물로 세수하다 거울을 보니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얼굴이 있었다.

 

, 진짜 못생겼어.”

 

[, 진짜 못생겼어. 카마사키 씨 지금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언제였지, 저 말을 했던 게. 자신을 두고 못생겼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후타쿠치였지만 그 때의 상황은 머리에 박힌 듯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백했던 그 날,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나처럼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키스를 했었다.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눈을 가려주었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씨발.”

 

카마사키는 수도꼭지를 틀어 콸콸 쏟아지는 찬 물로 거칠게 세수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어느새 얼굴이며 손이며 빨갛게 달아올라 따가웠지만 카마사키는 멈추지 않았다. 피부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길 반복하다 조용히 세면대 위에 무너졌다. 격하게 숨을 토해내는 등이 급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물이 콸콸 쏟아지며 세면대 위를 빙글빙글 돌고 사라지길 반복하는데 그 거친 표면 위에 조금씩 눈물이 떨어졌다. , 똑 하고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결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씨발, 진짜... 진짜 개새끼...”

 

사정없이 흐르는 눈물을 카마사키가 손으로 훔쳤다. 울어서 그런지, 세수를 해서 그런지 흠뻑 젖은 눈가를 계속 닦아 내었지만 좀처럼 눈물은 멎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결국 포기하고 침대 위로 기어 들어갔다. 젖은 베개를 뒤집어 베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덮었다.

 

개새끼, 마음이 없으면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사귀자는 헛소리 따위 하지 말았어야지.

 

 

 

 

점심시간에 만난 모니와가 카마사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차마 카마사키의 얼굴에 손도 못 대고 모니와가 허둥지둥 거렸다.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 경 안 쓸 리가 있어?! 눈이며 얼굴이며 다... 이러고 학교를 어떻게 왔어...”

아무래도 아니야?”

...”

 

차가운 거라도 얼굴에 대고 있을래? 모니와가 당장이라도 캔음료를 사올 기세로 말했다. 모니와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니와를 만나기 전에 교실에서 한차례 듣고 오긴 했다. 엄청난 얼굴로 교실에 들어 온 카마사키를 두고 남자애들은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여자애들 중 두엇은 눈을 돌려 버렸었다. 카마사키는 창피해서 내내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그럴 수는 없었다.

 

. 이거 얼굴에 대고 있어.”

고맙다.”

 

모니와가 건네 준 캔을 들고 카마사키가 가장 부은 눈가를 문질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캔을 굴리는 카마사키를 모니와가 쳐다보았다. 카마사키를 알게 된 이후부터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모니와가 아는 카마사키는 가장 좋아하는 배구를 하면서도 시합에서 졌다는 이유로 우는 일도 없었고, 중학교 때 처음 사귄 여자애한테 가차 없이 차일 때조차도 머쓱하게 웃어넘기는 성격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데. 모니와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망설였다.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는데 카마사키가 말했다.

 

나 오늘 연습 못 갈 것 같은데.”

? 어어... ?!”

꼴이 말도 아니기도 하고.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네.”

많이 아파? 네가 연습을 쉴 정도로 아픈 거야? ?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모니와는 카마사키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나 확인해보았다. 카마사키가 자진해서 연습을 빠진다고 하다니 심각하게 아픈가 싶었던 것이다. 카마사키는 모니와의 팔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카마사키는 모니와에게 좀 부탁할게, 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니와는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카마사키가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카마사키를 찾았다. 어디에 있든 당장이라도 끌고 나가서 어제의 일을 다시 물어볼 셈이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헤어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카마사키와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카마사키 씨 어디 있어요? 안 보이네.”

, 카마사키는 오늘 연습 참여 안 해.”

?”

 

모니와는 오늘 연습할 메뉴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잠시,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후타쿠치에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후타쿠치가 씩씩거리며 왜요?! 하며 모니와를 다그쳤다. , 왜 나한테 화내는 거야.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모니와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제야 후타쿠치는 자신의 페로몬이 흘러나온 것을 깨닫고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나도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연습 못 가겠다고 그러더라.”

...! , 유도 없이 무작정 보내주면 어떻게 해요?!”

 

, 진짜. 후타쿠치가 머리를 헤집으며 씩씩거렸다. 당장이라도 아까처럼 페로몬이 흘러나올 듯 위태로웠다. 모니와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요즘 둘이 친해보였으니까 혹시 후타쿠치라면 알지 않을까.

 

혹시 어제 카마사키 무슨 일 있었어?”

?”

아까 점심시간에 만났는데... 어제 엄청나게 울었나 보던데. 얼굴이 팅팅 부어가지고 말이 아니더라고.”

“... 울어요?”

. 뭐 아는 거 없어? 둘이 요즘 같이 다니잖아.”

 

후타쿠치? 모니와가 이름을 불렀지만 후타쿠치는 멍하니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후타쿠치가 대뜸 모니와의 어깨를 턱 잡았다. 모니와 씨~, 하며 말하는 말투가 영 불안했다.

 

, ?”

제가 오늘 배가 좀 아파서 연습을 못 할 것 같네요.”

? ,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팔하던 애가 뭘...”

배가 아프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아픈지 진단서라도 떼 와야 믿어주실 거예요? ? 카마사키 씨는 그냥 보내줬으면서 아픈 저는 기어코 연습해야 한다, 이거에요?”

아니, 아니 너는 안 아파 보이잖,”

!!! , 배 아파!!! 배 아파 죽겠네!!!”

 

후타쿠치가 모니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큰소리를 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버럭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주변에서 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바닥에 웅크리고 은근슬쩍 모니와의 다리를 퍽, 퍽 하고 찼다.

 

, 야 후타쿠치! , 그만해. 악, 아파!! 알았어, 알았어! 보내 줄게...!”

 

그 소리에 후타쿠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하고 뻔뻔하게 돌아서는 후타쿠치를 보며 모니와는 이마를 짚었다. 후타쿠치 아프데요? 하고 물어오는 후배에게 모니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후타쿠치한테 휩쓸렸던 친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후타쿠치는 그 길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카마사키의 집으로 향했다. 사귀는 동안 몇 번이고 함께 내렸던 정류장에 도착해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절로 빨라지는 걸음에 금세 카마사키의 집에 도착했다. 그대로 벨을 울리려던 후타쿠치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어제 울었다는 말에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이 무작정 와버렸지만 잠깐 망설여졌다. 다음 날 얼굴이 팅팅 부을 정도로 울었다면 얼마나 울어댔던 거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찾아가도 되는 걸까, 후타쿠치는 잠시 시간을 재다 벨을 눌렀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기엔 지금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 궁금증이 너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 씨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둔 터라 카마사키네 집엔 좀처럼 부모님이 계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부모님이었다면 평범한 후배인 척 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저에요. 문 열어요.”

 

인터폰 너머로 카마사키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망설이고 있는 듯 숨소리만 들리는데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인터폰이 끊겼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관에 카마사키가 서 있었다. 과연 모니와 선배의 말대로 얼굴 여기저기 붇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타쿠치가 빤히 보고 있는 걸 눈치 채고 카마사키가 손바닥으로 한 쪽 얼굴을 가렸다.

 

왜 왔냐? 연습복은 또 왜 입고 왔어.”

 

생각보다 카마사키의 말투가 덤덤했다. 창피한 듯 얼굴을 가리고 후타쿠치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런 카마사키를 잠시 보다 말없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 째고 왔어요.”

. , 연습을 째면 어떻게 해? 빨리 다시 가,”

카마사키 씨도 연습 안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안 가요.”

 

억지를 부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투에 카마사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곧이어 한숨을 내쉬더니 제 앞에 서 있는 후타쿠치의 등을 밀었다.

 

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가. 너 이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1학년 아니야.”

그러는 카마사키 씨는 3학년이거든요. 3학년이라고 이렇게 해이해져도 되는 겁니까?”

나는,”

나는, 뭐요. 뭔데요.”

나는 사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빠진 거야. 너랑은 경우가 달라.”

무슨 사정? 어제 애인이랑 헤어지기라도 했나 봐요?”

 

등을 떠미는 카마사키의 손길에도 힘을 주며 버티던 후타쿠치가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제 등에 놓인 손을 내리 치며 카마사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인가 봐요? 그래서 충격 받고 연습 빠지신 건가?”

 

마치 제3자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후타쿠치는 아무렇지 않게 카마사키의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냐고,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의 어깨를 떠밀었다. 두어 걸음 뒷걸음친 후타쿠치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후타쿠치가 뭐라 쏘아 붙이려는데 카마사키가 더 빨랐다.

 

맞아. 나 어제 차였고, 당분간 네 얼굴 보고 싶지 않다.”

“......”

알겠으면 이제 가.”

 

개새끼. 진짜 개새끼.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후타쿠치의 언행에 카마사키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후타쿠치가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위층으로 오르려는데 뒤에서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가 그냥 갈 놈이 아니지. 좋아하는 사람이고 뭐고, 하루 종일 기분 잡치는데 한 소리 하려고 카마사키가 뒤를 돌았다.

 

...”

날 좋아한다면서요. 이거밖에 안돼요?”

 

당황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카마사키의 앞에서 후타쿠치가 씩씩거렸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헤어지겠다는 말을 해. 나를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었으면서. 어떻게 감히 나한테.

 

,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내가 무슨 순수 혈통개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만 찾아서 사귀고 결혼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 잠깐...”

당신 베타라고 그냥, 그냥 사귄 것도 아니고. 난 당신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 안 하는데 왜...!”

알았어, 그러니까 잠깐...”

날 좋아해서 사귄 거 아니에요?”

 

후타쿠치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말했다. 분해 죽겠다는 듯 얼굴 한 가득 인상을 찌푸리고 카마사키한테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안 말해요? 장난쳐? 가히 7살 어린애라고 봐도 좋을 만큼 후타쿠치는 떼를 썼다.

 

빨리 대답해요.”

“......”

어서 대답하,”

... 날 좋아해?”

“......”

날 좋아해서 사귄 거야?”

 

카마사키는 어제의 질문을 다시금 반복했다. 곧 죽어도 후타쿠치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카마사키는 그조차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물어보길 잘한 걸까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모른 척 했다. 진짜,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병신 같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 얼굴에 조금은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카마사키의 초조함을 아는지 후타쿠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나 카마사키 씨랑 그냥 사귄 거 아니에요.”

 

난 왜 언제나 이렇게, 너에게 쉽게 넘어가주는 걸까. 손해 보는 일인 게 분명한데도 어째서 늘 너의 건방진 행동과 말투를 다 받아주고, 가볍게 다가오는 스킨십을 뿌리치지 못하고. 날 그렇게 아프게 만들었던 너를, 난 왜 또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하물며 나를 좋아한다는 그 직접적인 말을 해준 것도 아닌데.

 

카마사키는 눈물로 뒤범벅된 후타쿠치의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울면서도 끝까지 분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바람에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제 얼굴을 덮은 손을 후타쿠치가 감쌌다.

 

카마사키 씨 아까 진짜 못생겼어요. 그러고 어떻게 학교까지 올 생각을 다 했지.”

 

후타쿠치는 제 눈도 팅팅 부어오른 주제에 끝까지 카마사키를 놀렸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겠는지 눈을 꼭 감은 후타쿠치를 보며 카마사키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봐 줄만한 건 그나마 잘생긴 얼굴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꼴사납게 부어 있다는 주제에. 누가 후타쿠치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남의 앞에서 항상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우위에 서서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알파가 평범한 베타의 앞에서 질질 짜다니.

 

후타쿠치가 눈을 덮은 카마사키의 손을 슬쩍 치우더니 실눈을 뜨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낄낄거리더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바보 같은 얼굴.”

,”

그렇게 내가 좋아요?”

 

그러는 너도 그러고 있으니 정말 못생겼다. 너야말로 그렇게 내가 좋으냐고 묻는 대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뒷목을 끌어 젖은 얼굴을 품에 안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끌려온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붙잡아왔다. 그리고는 카마사키에게 나를 빨리 대답하라고 웅얼거렸다. 카마사키가 뜸을 들이며 대답해주지 않자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재촉했다.

 

좋아한다고 귓가에 작게 말해주자 후타쿠치가 그제야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게 마치 나도, 라고 대답하는 것 같아 카마사키는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서툰 첫사랑이었다.

 


(7835자)

Posted by 005500 :

06.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카마사키와 후타쿠치는 나란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의 종점까지 와 버렸기에 카마사키는 왔던 만큼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후타쿠치는 어떨지 몰라도 카마사키는 혼자 어색해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주변에 있던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진짜로 꿈은 아니겠지. 버스에서 졸다가 꾼 꿈이라면 어떡하지. 저 멀리 볼 것도 없는 길 너머만 보다 카마사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똥 못 눈 개새끼 같네요.”

“...... 자식 선배한테, 개새끼가 뭐냐. 건방지게.”

스스로 생각해도 강아지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다고 개새끼도 아니거든.”

 

개새끼나 개나, 후타쿠치가 코웃음 쳤다. 쟤는 왜 저렇게 태연하지?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하는 마음에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우리 진짜 사귀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후타쿠치가 확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봤단 봐요. 진짜 확,”

?”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목덜미를 보면서 내뱉었다.

 

물어버릴 테니까.”

베타를 물어봤자 별 거 있냐. 상처도 안 남을 걸.”

남는 지 안 남는지 한 번 해 볼까요? ?”

 

카마사키가 조용히 목을 감쌌다. 빈 말이라도 가슴이 술렁였다. 목덜미를 물어버린다는 건 알파에게 있어 각인의 상징이었다. 예전보다 기술이 발달되어서 각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레이저로 손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각인은 독점욕과 소유욕을 드러내는 자국이었다. 자신의 것에 접근하지 말라는 알파의 사인. 페로몬이 없는 베타의 몸엔 남겨지지 않지만.

 

, 더럽게 안 오네.”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카마사키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택가가 모여 있는 길인데다 종점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 근처까지 오는 버스가 드물었다. 버스라도 타야지 어색함이 줄어들 것 같은데 참 더럽게도 안 온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텐데 뭘 그러고 있어요.”

 

후타쿠치는 정류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카마사키를 향해 손짓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앉으라고 말했다. 괜히 한 번 더 버스가 오는 방향을 확인했지만 올 기미가 없었다. 카마사키는 결국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서 카마사키가 머리를 굴리는데 바로 눈앞에 후타쿠치의 손이 튀어 나왔다.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차가운 감촉이 양 뺨에 닿았다.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볼을 한껏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제 손에 찌부러진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주무르니 붕어 입이 되었다가 말았다가 아주 재밌었다.

 

카마사키 씨, 설마 지금 긴장해요?”

어니거던. 이거 라.(아니거든. 이거 놔.)”

, 진짜 못생겼어. 지금 카마사키 씨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 지짜 너으라거!(, 진짜 놓으라고!)”

 

또 이렇게 시비를 턴다. 못생겼다는 말에 울컥한 카마사키가 제 뺨을 쥐고 있는 후타쿠치의 손을 뿌리치려 손을 올렸다. 후타쿠치의 손이 얼굴을 주무른 탓인지 못생겼다는 말에 창피해서 그런 건지 카마사키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에 굳이 힘을 주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얼굴에서 손을 뗐다. 볼썽사납게 빨개진 얼굴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완전히 굳은 카마사키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후타쿠치는 조심스럽게 카마사키의 반응을 살피며 맞닿은 입술을 물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맞추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 사이로 스르륵 하고 혀를 집어넣었다. 카마사키는 아예 숨도 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여직 자신을 멀뚱히 볼 뿐이었다. 후타쿠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카마사키의 눈을 덮어버렸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카마사키가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하나, 둘씩 곤두세워졌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입 안을 배회하는 후타쿠치의 혀가 움직이는 거라든가, 옅게 맡아지는 특유의 체취라든가, 듣기 민망해질 정도로 질척이는 소리라든가. 후타쿠치가 예민한 입천장이나 여린 잇몸을 간질이다 목구멍을 파고들 것처럼 깊숙이 들이밀 때면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느끼는 지점만을 골라 집요하게 문지르면 후타쿠치의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힘없이 미끄러지려는 손에 간신히 힘을 줘 생명줄처럼 후타쿠치의 팔목을 쥐었다. 이제껏 해봤던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기분 좋은 쾌감에 젖어 멍하니 생각했다.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던 연애는 의외로 순조로워 보이는 듯 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란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둥둥 떠버린다. 조금 벅차다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며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시끄러워서 들킬까 마음 졸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전히, 가끔씩 혼자만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알고 시작한 관계였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는 걸 느낄 때면 두려웠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만큼이나 커졌는데, 과연 후타쿠치는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바라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리란 걸 알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내가 주는 만큼 받고 싶어진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노력했던 욕심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커져버렸다. 후타쿠치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조마조마 했다. 털끝만큼의 변화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냐? 속으로 수십 수백 번을 삼켰던 말이 치솟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거야?

 

... 그 때 내 고백을 왜 받아줬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 다 영화를 볼 때면 뭘 챙겨먹는 타입은 아니라 티켓을 확인받고 곧바로 들어갔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상영관에는 중, 고등학생만 몇 명 있을 뿐 한산했다. 가운데 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때에 맞춰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봉하기 전부터 예고편이며 뉴스를 챙겨보면서 손꼽아 기대했던 영화였다. 좋아하던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이었기에 재미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스토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스크린을 보고, 상영관 전체를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가 들었지만 스스로 뭘 보고 있는지, 뭘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움직이던 태엽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는데 잡생각만 가득하다. 감흥없이 화면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습관처럼 후타쿠치의 손이 뻗어왔다. 팔걸이에 늘어진 제 손을 뒤집어 가닥가닥 얽어 잡는다.

 

사귀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후타쿠치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오히려 부끄럽다고 자신이 밀쳐 내거나 도망갔지 후타쿠치는 손을 잡거나 목덜미나 허리 같은 곳을 지분거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무릎을 쥐어 올 때면 물 흐르듯 키스를 해온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카마사키는 뻥 뚫린 공간에서 후타쿠치가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낯부끄럽긴 했지만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후타쿠치가 먼저 다가온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끝까지 밀쳐내지 못하고 후타쿠치가 서슴지 않게 하는 행동을 전부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좋으면서도 쓸쓸함에 휩싸였다. 스킨십이라는 달콤한 쾌락에 홀려 자신이 착각이란 바다에 홀연히 빠져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카마사키는 그대로 바다 속에 잠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왔던 의심이 떠오른다.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서 사귀는 거냐고.

 

 

뭐야, 허무하게 끝났네. 이거 속편 또 나오는 거 아니야? 그쵸, 카마사키 씨.”

? 어어...”

 

어느새 영화가 끝났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후타쿠치가 결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연신 투덜댔다. 아예 집중하지 못했던 카마사키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의자에 앉아 불만스럽게 다리를 까닥이던 후타쿠치는 별안간 카마시키를 올려봤다. 안 나가냐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카마사키를 향해 건방지게 손짓했다.

 

안 돼. 사람 아직 있잖아.”

 

출입구 쪽에 직원이 한 명 서있었다. 뒤처리를 하기 위해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리는지 유일하게 남은 카마사키와 후타쿠치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카마사키의 교복 넥타이를 쥐어 당겼다. 불식간에 당겨지는 바람에 카마사키가 그대로 후타쿠치 위에 엎어졌다. 순간 팔걸이를 쥐었길 다행이었지 꼴사납게 부딪칠 뻔했다.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뭐라 타박하려는데 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 하고 가볍게 몇 번 입을 부딪더니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입술을 앙 물어버렸다.

 

! 뭐 하는 짓이야!”

영화 보는 내내 딴 생각 하길래요. 이제 정신 차렸어요?”

그렇다고 입술을 물어버리냐? 아프잖아.”

그러게 누가 나랑 같이 있는데 딴 짓 하랬나.”

 

, 저 빌어먹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깨물었는지 입술이 화끈했다. 다른 사람이 볼 까 무서워 카마사키는 아픈 게 가라앉을 때까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다. 그 모양을 보고 옆에서 후타쿠치가 꼴좋다며 웃어대기에 주먹으로 후타쿠치의 등을 퍽 쳐버렸다. ! 하는 소리를 내며 거의 고꾸라질 뻔 했지만 아쉽게도 넘어지진 않았다. 후타쿠치는 아프다며 연신 등을 문지르더니 입을 가리고 있는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 떼어내는 척 했다. 안간힘을 쓰며 입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는 카마사키와 손을 내리려는 후타쿠치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오고 갔다. 결국 참다못한 카마사키가 무릎으로 후타쿠치를 밀어내는 것으로 유치한 투닥거림이 끝이 났다.

 

 

영화관에서 나와 오늘은 라면이 당긴다며 후타쿠치는 카마사키를 끌고 근처 라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맛집이라고 알아주는 집인지라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할 수없이 다른 곳을 가려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후타쿠치의 이름을 불렀다. 근처 사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후타쿠치와 안면이 있는 듯 합석하겠냐 물어왔다. 4인용 테이블에 2명분의 자리가 남아 있기에 별 고민 않고 자리에 앉았다. 늘 먹는 메뉴를 주문하니 옆에 앉은 처음 후타쿠치를 불렀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후타쿠치 친구신가요?”

아뇨. 배구부 선뱁니다. 카마사키 야스시입니다.”

선배님이셨군요. 전 후타쿠치 중학교 때 친구인 타마키 쇼우타에요.”

언제 또 본다고 통성명이냐. 먹던 라면이나 먹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타마키를 향해 후타쿠치가 타박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성격 더럽구나, 후타쿠치, 라며 타마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지냈냐는 말이 오고 갔다. 꽤 친한 사이였던 듯 타마키는 후타쿠치를 서슴없이 대했다.

 

, 맞다. 그러고 보니 걔랑은 어떻게 됐냐?”

누구.”

 

때마침 주문했던 라면이 나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점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휘휘 저으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던 카마사키는 면발을 두고 국물을 떴다.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났다.

걔 있잖아. 이름이 뭐였지? 니시우라였던가, 니시하라였던가.”

니시하라. 걔가 왜?”

헤어졌어?”

, 뜨거.”

 

뜨겁다는 말을 무시하고 그냥 먹었더니 그대로 혀에 데어버렸다. 대화를 나누던 타마키와 후타쿠치의 시선이 모아져 카마사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찬물을 들이켰다. 조심 좀 하시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에게 말하곤 타마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 하던 중이었지? 다시 이야기가 오고 갔다.

 

, 니시하라랑 헤어졌냐고. 그 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귀었잖아.”

지금이 언젠데 아직도 사귀겠냐?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지.”

그렇긴 한데, 설마 싶어서 물어봤지. , 진짜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몇 개월을 안 가냐.”

“3개월 정도 갔나.”

 

라면 좀 먹자며 후타쿠치는 말을 대충 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식은 면을 후루룩 먹는 동안 타마키는 그 옆에서 자기 친구와 떠들었다. 어지간히 재밌는지 니시하라라는 여자와 언제 사귀었고, 사귈 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타마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손님이 거의 빠져나간 가게에 후타쿠치의 연애 이야기만 들렸다.

 

언제였지? 크리스마스 파티 때였나, 아마 니시하라가 먼저 고백했었지? 진짜 그 때 애들이 다 놀라가지고 남자애들은 후타쿠치 질투하고, 여자애들은 니시하라 질투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니시하라가 좀 예뻤냐. 잡지 모델까지 하고 그때껏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잖아. 자기 눈 높다고 고백해오는 남자애들 다 뻥뻥 차버렸었지. 근데 후타쿠치랑 딱 사귄다고 그래서 애들이 참 언행일치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좀 소름끼치려고 그런다? 그 때가 언젠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 스토커야?”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 약간 세기의 커플 같았어. 엄청 유명했다고. 아직도 중학교 친구들 만나면 가끔 얘기 나온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타마키의 말에 후타쿠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타마키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네가 얼마 안 갈 줄은 예상했었지. 근데 3개월이 뭐냐.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오래 간 게 3... 4개월? 빠르면 한 달도 안 갔었지?”

헤어질 만하니까 헤어진 거지.”

왜 헤어졌는데?”

몰라. 그냥 질렸었나보지.”

 

나쁜 남자! 타마키가 분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 옆에서 타마키의 친구도 질린 얼굴을 했다. 태연하게 라면을 먹는 후타쿠치를 보며 타마키가 분해하다 표적을 바꿔 카마사키에게 물었다.

 

카마사키 씨! 선배가 봐도 완전 나쁜 남자죠, 맞죠! 쟤 고등학교 가서도 여자친구 몇 개월에 한 번씩 갈아 치우나요?”

, 어어?”

적당히 해라, ? 카마사키 씨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리니까.”

 

후타쿠치는 남자의 공공의 적, 이라며 타마키는 바로 옆에 앉은 카마사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다 후타쿠치가 던진 휴지조각에 맞았다. 얼굴에 맞고 테이블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다시 들어 올려 타마키가 후타쿠치에게 던지며 말했다.

 

내가 친구로서 얘기하는데, 후타쿠치 너 그러면 안 된다. 단기속성 특강도 아니고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었던 거야.”

그냥.”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너나 잘하시지.”

 

후타쿠치는 여전히 궁시렁거리는 타마키를 외면하고 카마사키를 향해 가자고 눈짓했다. 뒤늦게 타마키가 뒤에서 불러댔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등을 밀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가는 내내 고개를 저어댔다.

 

 

집에 가요?”

 

정처 없이 걷다 후타쿠치가 넌지시 말했다. 라면집에서 타마키를 피해 나오느라 이 뒤에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아직 시간은 8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헤어지기에도, 어디를 또 가기에도 애매했다. 카마사키는 잠시 고민하다 그럴까, 대답했다.

 

영화를 보고, 밥까지 먹었으니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지만 주말을 앞둔 번화가를 걷고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애매하다 생각하는 시간에도 거리는 친구며 애인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울이라 하기엔 늦고, 봄이라 하기엔 이른 계절은 저녁이 되자 아직은 겨울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교복에 저지까지 껴입었지만 휑하게 드러난 목을 스치는 칼바람에 카마사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유난히 날씨가 쌀쌀하다.

 

사람들에 치이고, 바람에 치이느라 잔뜩 어깨를 오그라들고 걸어가는데 손가락 사이로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타쿠치가 모른 척하며 손가락 두어 개를 잡아온 것이었다. 누가 볼 새라 카마사키가 손을 물리려는데 후타쿠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잡은 손가락을 당겨 카마사키를 말없이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쥔 손가락 사이에서부터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카마사키는 핀잔을 주는 대신 걸음을 빨리 했다. 찬바람에 카마사키의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 또 고백 받네.”

 

창밖을 보며 사사야가 말했다. 열린 창 아래로 교사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후타쿠치는 가만히 제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며 고백하는 여자애를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서 몇 번째냐. 신입생들 사이에서 후타쿠치 인기가 장난 아니라더라.”

남자가 후타쿠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데. 안 그러냐?”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가 아니지.”

“... 아무튼 잘생긴 게 최고네.”

최고지, 아무렴. , 찼나봐.”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여자아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꽤 멀어졌을 무렵 뒤에서 친구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몰려왔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후타쿠치가 있는 방향을 보며 삿대질하는 것이 아마도 욕인 것이 분명한 말을 하는가 싶다. 나란히 창가에 매달려 구경하던 남자들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딱하다며 누군가는 울지마! 라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이제 한명 쯤 사귈 때도 됐는데. 안 그러냐, 카맛치?”

? ... 런가?”

너 요즘 후타쿠치랑 자주 붙어 다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쟤가 작년 이맘때쯤에는 여자친구를 아주 달에 한 번은 바꾸는 것 같았는데, 가을쯤부터는 한 명도 안 사귀었지?”

 

그랬냐, 카마사키는 어깨를 으쓱이곤 창 아래를 내다보았다. 이미 후타쿠치는 멀어질 대로 멀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마사키는 한동안 시선을 괜히 좌우로 돌렸다가 슬쩍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아예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여전히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밑을 보는 카마사키의 옆으로 사사야가 몸을 기대왔다.

 

그래도 아예 희망고문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카마사키의 시선을 따라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던 사사야가 말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카마사키는 시선을 돌려 사사야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웬 희망고문?”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후타쿠치랑 사귀어도 사귀는 느낌이 안 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야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후타쿠치는 우성 알파라고 번듯하게 출세할 게 뻔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생각을 해 봐. 상대는 몇 없는 우성 알파고, 내가 그만한 우성 오메가가 아닌 이상은 뭐가 좋다고 나랑 사귀겠어? 내가 뭐라고.”

꼭 우성 오메가랑 결혼하라는 법도 없잖아. 좋아하면...”

 

카마사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사야는 그 순진한 질문에 그게 아니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란 게 참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고. 우성은 우성집단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공공연히 우성만 만난단 말이야. 우성끼리 결혼하면 그 자녀도 우성인 경우일 확률이 높으니까. 아주 드물게 열성 오메가나 평범한 베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일부고. 그래서 보통은 끼리끼리 만난다 이거지.”

 

급에 맞게. 사샤야가 덧붙였다.

 

그래서 그게 희망고문이랑 무슨 상관인데?”

넌 후타쿠치가 여자애들이랑 왜 사귄다고 생각해? 사귀어도 얼마 안 가 헤어지는 이유는 또 뭐라고 생각하고.”

좋으니까 사귀었겠지. 뭔가 안 맞아서 헤어지고...”

장담하는데 후타쿠치는 별 생각 없을걸. 그냥 just for fun이야. 그러니까 오래 안 가지.”

 

심심풀이일 뿐 별 의미 없을 거라며 사사야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폈다. 조금 있으면 종 친다며 카마사키의 등을 찰싹 두드리곤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사야가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망하니 창밖을 쳐다보다 수업종이 울리는 소리에 카마사키도 교실로 들어갔다. 은연중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사람은 모른 체 하려고 해도 기어코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진다. 알면 다친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분명 물어보면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카마사키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번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한번쯤은 후타쿠치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무섭다고 피했던 질문.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평소처럼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차리다 라커룸에 아무도 안 남은 것을 확인하고 카마사키가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 3개월이나 무난하게 사귀어 왔으면, 그래도 뭔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지금 자신이 하는 질문이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카마사키는 바랐다.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의 말에 핸드폰에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후타쿠치가 피식 웃었다.

 

뒷북쳐요? 사귄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런 걸 물어요?”

됐고, 대답이나 해 봐.”

왜 사귀긴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에게 말했다.

 

사귀고 있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더 바라는 거예요?”

뭘 바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후타쿠치의 발이 불만스럽게 까닥이기 시작했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카마사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요.

 

“... 그냥?”

예에. , 이제 가요 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후타쿠치가 카마사키의 팔을 잡아챘다. 빨리 가자며 그대로 당겼지만 탁, 하고 카마사키가 팔을 뺐다. 후타쿠치가 아연한 표정으로 뿌리쳐진 제 손을 보다 다시 카마사키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살풋 찌푸려졌다.

 

아니, 잠깐만. 그냥이라고? 그냥 사귀는 거야?”

왜 자꾸 물어요, 진짜. 이제 와서 왜,”

너 날, 좋아하긴 해?”

 

후타쿠치가 숨을 삼켰다.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후타쿠치를 지켜 보다 카마사키가 눈을 지르감았다. , 기어코 너는. 역시나 너는.

 

대답하지 못하던 후타쿠치의 얼굴이 눈을 감았는데도 훤히 되살아났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려오는 감각에 카마사키는 조용히 숨을 들이 내쉬길 반복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귀를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내 귀가 고장 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좀 덜 아플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잠시였다. 복받치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인내심 덕분인지, 남몰래 감정을 삭였던 보람인지 카마사키는 망설임 없이 후타쿠치에게 진심을 말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전부 고백하는 것을 끝으로 그만두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고백 따위 하지 말고 조용히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냥 헤어질까. 그냥 사귀었던 거니 헤어지는 것도 너한텐 아무 일도 아니겠네.”

뭐라고요? 갑자기 헤어지잔 얘기는 왜...”

 

언젠가 이런 적이 또 있지 않았나? 후타쿠치는 가만히 서서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얘기하는 카마사키를 보다 생각했다. 감정이 허물어진 사람처럼 카마사키의 안색이 창백했다.

 

난 분명 너를 좋아하는데, 아니 갈수록 좋아. 그건 틀림없어. 근데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으면서, 점점 힘들다.”

 

그만하고 싶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카마사키가 말했다.

 

너도 날 딱히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잖아.”

 

사실이다. 자신은 딱히 카마사키 씨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카마사키 씨가 고백해 왔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했고, 더 이상 술래잡기 하고 싶지 않아 사귀자고 말했었다. 내가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된 줄 알았다.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마주 대할 줄 알았다.

 

나 같은 베타보다 더 좋은 사람 수두룩하잖아. 여자인데다 오메가고, 네 이상형에 맞는 그런 사람 아주 조금만 둘러봐도 여럿 있고. 어차피 언젠가는 너도 우성 오메가를 만날 테고.

 

서로 각인할 수도 있고, 페로몬을 맡을 수도 있고, 굳이 억제제를 챙겨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만날 거잖아. 카마사키가 말을 잇다 후타쿠치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카마사키의 하얗게 질린 뺨이 떨리고 있었다.

 

카마사키 씨,”

맞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한가?”

잠깐 말을,”

... 난 네가 아니면 안 되지만, 넌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지. 상관없잖아.”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말을 끊어버렸다. 듣고 싶지 않는다는 듯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마사키는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을 나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나간 뒤에도 라커룸에 남아 카마사키가 했었던 말을 곱씹었다.

 

이별은 낯설지 않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왔던 만큼 헤어짐을 겪어 왔다. 후타쿠치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하기도, 상대방이 그러기도 했다.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후타쿠치는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지 않았다. 언제나 시원하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하고 보내 주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헤어지자 했던 여자가 오히려 화를 내기도 했지만 후타쿠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하기때문에 사귄 게 아니었으니까.

 

카마사키 씨와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름없이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다. 그렇기에 헤어지자고 말한 카마사키 씨의 말도 시원하게 납득하고 보내줬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마사키 씨의 말을 들으면서 후타쿠치가 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하는 지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그저, 창백하게 질린 카마사키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싶었다. 자신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모르고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카마사키의 양 손가락을 잡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그 뿐이었다. 그냥 닿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했다.




(12610자)

Posted by 005500 :

05.

 

 

혹시 날 좋아해요?’

 

카마사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눈치 챈 뒤부터, 후타쿠치는 이따금 묻고 싶었다. 저 어색한 표정이나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신기했다. 카마사키 씨가 나를? 어쩐지 최근 이상하다 싶었더랬다. 점점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하더니 같이 있을 때면 좀처럼 집중하질 못했다. 왜 그러나 싶었지.

 

 

며칠 전 배구공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카마사키 씨는 바닥에 나뒹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연습이 중단되었고,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는 이유로 카마사키가 깨어날 때까지 후타쿠치가 남게 되었다.

 

자신을 보러 왔다는, 점심시간에 잠깐 보았던 타카하시라는 여자도 깜짝 놀란 얼굴로, 카마사키 군 괜찮겠지? 하며 은근히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얼굴이나 몸매도 꽤 취향에 맞았고 오메가 페로몬 또한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평소라면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했지만 여자는 눈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같은 반 남자애를 걱정하는 척하며 후타쿠치의 옆에 앉아 대놓고 쳐다보면서 시덥잖은 질문만 늘여놓았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대충 대답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놓고 꺼지라 했다.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울컥한 얼굴을 하고 나갔지만 후타쿠치는 코웃음만 나왔다.

 

여자는 여러모로 자신과 닮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세는 다를지라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은근히 깔보고 우러러보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 딱 그래 보였다. 보아하니 오메가인데다 예쁘다고 이전부터 주변에서 치켜세워졌을 게 뻔했다.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동족은 동족을 알아보기 때문인지 후타쿠치에게는 타카하시의 가식이 너무 잘 보였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눈치 없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 타쿠, .’

 

왠지 불쾌한 마음이 이는데 카마사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마사키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혹은 누군가를 쫓는 듯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더니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이름만 절박하게 불러댔다.

 

카마사키 씨?’

‘...타쿠, . 후타, 후타쿠치.’

카마사키 씨! 일어나 봐요.’

아니, 아니야...’

카마사키 씨! 카마사키 씨!’

 

울먹이는 목소리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후타쿠치는 결국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어 카마사키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카마사키의 몸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떨렸고, 눈이 떠졌다. 아주 짧은 순간,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이 멍하니 흔들리더니 고인 눈물이 흘렀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것이기에 눈물까지 흘리며 우는 거지. 후타쿠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카마사키의 눈물을 훔쳤다. 멍하니 천장만 보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했다. 이상하게 울컥했다.

 

카마사키는 악몽을 꿨다며 멋쩍게 둘러댔다. 꿈을 꾸다 운 게 쪽팔렸는지 후타쿠치의 눈치를 보는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악몽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불렀나싶어 물어봤지만 카마사키는 당황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꿈에 제가 나왔나 봐요.’

 

뭐라고, 카마사키의 빨갛게 단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잠꼬대까지 한 줄은 몰랐겠지, 후타쿠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카마사키는 입을 꼭 다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하여간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카마사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이 흔들렸고, 당황하거나 궁지에 몰릴 때면 오른쪽 눈가가 찡그러졌다. 묘하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게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보였지만 카마사키는 좀처럼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이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똥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게 불쌍해 보여서 이마를 적신 땀을 닦아주니 별안간 카마사키가 손을 후려쳤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얼굴 표정이나 눈빛, 행동과 말투 등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허겁지겁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는 카마사키를 후타쿠치는 별 말없이 쳐다보다 다시 한 번 카마사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단단하게 뻗어 있는 목덜미 뒤쪽,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곳을 만지자 아까보다 격한 반응이 나왔다. ,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니 카마사키의 몸이 발작하듯 뛰었다. 귓불부터 천천히 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차마 후타쿠치한테 변명도 못하고 부산스럽게 옷을 입더니 자신을 내비 두고 도망쳤다.

 

생각해보면 미심쩍게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흩어진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기분에 후타쿠치가 미소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 있지만, 카마사키 씨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저 반응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후타쿠치는 카마사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관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를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카마사키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마음을 꼭꼭 숨겨둘 가능성도 있었지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 씨가 고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후타쿠치는 카마사키와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은밀하게 카마사키를 떠보았다. 자꾸만 도망가는 시선을 굳이 따라가 얼굴을 마주하거나, 은근슬쩍 허리께나 등을 터치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평온했던 얼굴에 슬며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한 동안은 좋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는 카마사키의 반응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카마사키를 볼 때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쯤 나한테 고백할건데?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 해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까짓 거 한번쯤은 받아줄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마음을 숨겼다. 이쯤 되니 카마사키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괜히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이 여자 내 타입이네.”

난 단발머리.”

여자는 생머리가 진리 아니냐. 긴 생머리 찰랑거리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나도.”

 

연습이 끝나고 누군가 들고 온 잡지를 두고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단발머리가 취향이네, 긴 머리가 취향이네 실없는 소리가 오고 갔다. 후타쿠치도 슬쩍 끼어들어 잡지를 살펴보니 길거리 미남미녀 특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지만 절대 마주칠 일이 없는 예쁜 여자들이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후타쿠치가 드물게 관심을 보이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후타쿠치도 이런 거에 관심이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당연히 관심 없지, 멍청이들아.

 

후타쿠치도 이 중에서 좋아하는 타입 있어?”

이딴 잡지에,”

, 뭐 보고 있냐. 다들?”

 

잠시 감독에게 불려갔었던 몇몇 2학년들이 라커룸에 들어오다 한 군데에 모여 있는 1, 2학년들을 보고 뭐야, 뭐야 하며 다가왔다. 이상형 얘기를 하고 있다는 말에 다들 오오~하며 후타쿠치의 손에 들린 잡지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뭐야, 후타쿠치. 너도 이런 거에 관심 있었냐? 그래서, 네 눈엔 누가 제일 예쁘냐?”

... ...”

뭔데 모여 있어?”

이 사람이 제일 취향인데요.”

 

카마사키를 발견하자마자 후타쿠치가 아무 사람이나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마사키의 시선이 후타쿠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역시 후타쿠치가 보는 눈이 있네. 여자는 자고로 하얗고, 작고 귀여워야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었군.”

...”

 

별 생각 없이 찍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마사키 씨와는 정 반대였다. 하얗지도 않고, 근육맨인데다, 귀엽지도 않다.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보다는... 뭐 굳이 말하자면 가학성을 자극하는 타입이지. 콕 찌르고, 휘두르고, 괴롭히고 싶은 그런 사람.

 

카마사키, 너도 볼래?”

, 그래.”

내가 볼 땐 카마사키 취향은 딱! 딱 이 사람이야. 어때?”

 

누군가 긴 머리의 청순한 타입의 여자를 가리켰다. 내 주변에도 카마사키랑 비슷한 친구가 있는데 걔가 이런 취향이라며 옆에서 조잘대었다. 후타쿠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조용히 잡지를 읽어보던 카마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형이 그렇긴 하지. 신기하네, 딱 알아맞혔어.”

내 말이 맞지? ~ 나도 참 보는 눈치가 있다고.”

 

긴 머리에,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원피스에 구두만 신고 다닐 것 같은 이런 여자가 취향이라고? 미녀 부분을 지나 미남 부분을 넘겨보던 카마사키한테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빼내었다.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가리켰던 여자를 확인했다.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카마사키 씨가?

 

, 나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러냐.”

카마사키 씨도 참 꿈이 크시네요. 이만한 여자가 카마사키 씨를 만나줄 리가 없잖아요.”

이게 또 가만히 있는데 시비를 털어. 그래, 꿈이니까 크게 꾼다. 됐냐?”

그럼 꿈 깨요!”

냅둬, 뭔 상관이야. , 마저 보게.”

 

괜히 짜증나서 후타쿠치가 잡지를 던졌더니 카마사키가 요령 좋게 잡아챘다. 확 맞아버렸으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반사 신경은 좋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후타쿠치가 가버렸고, 그 모습을 카마사키가 잡지에 시선을 고정하던 눈을 들어 슬쩍 쳐다보았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을 내는지 옷을 갈아입는 후타쿠치의 등이 불끈거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근육이 오밀조밀 짜여있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감상에 카마사키는 고개를 휘휘 젓고 잡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미녀 부분을 넘기고 미남 부분을 보는데 다들 잘생기긴 했다. 확실히 기자가 센스가 좋은지 사진도 잘 찍었고 잘생긴 사람들만 엄선한 게 티가 났다. 자신이 후타쿠치를 좋아하긴 해도, 딱히 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게이라면 이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겠지.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이 몇몇 눈에 띠었다. 우스운 건, 그런 사람들한테 눈이 가다가도 그 사람들과 후타쿠치를 비교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 이 사람은 후타쿠치랑 머리 모양이 비슷하네. 저 사람은 후타쿠치보단 키가 좀 작고, 눈매도 다르고. 또 저 사람은 후타쿠치랑 닮긴 했지만 분위기가 틀려. 몇 번을 그러길 반복하다 카마사키는 잡지를 덮어 아무에게나 넘겼다. 누굴 봐도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만 눈에 보였다.

 

방금 전에는 청순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대충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잡지에 나온 여자들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안 갔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여자가 취향이긴 했다. 긴 머리에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여자. 그런 여자들을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후타쿠치가 가리켰던 사진에만 신경이 쏠렸다. 결코 내가 후타쿠치의 상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후타쿠치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혹시라도 나와 공통점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자신과 공통점은 사람인 것 말고 없을 정도로 정반대였다. 작고, 귀여운 그런 여자. 나한테는 정말 가망이 없군.

 

카마사키 씨. 집에 안 가요?!”

 

카마사키가 우울함에 빠질 새도 없이 후타쿠치가 옷을 다 갈아입곤 다가왔다. 멍하니 앉아있던 카마사키의 어깨를 흔들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카마사키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민망하게시리 후타쿠치는 그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마사키를 구경했다.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되었지만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최대한 빠르게 옷을 입었다. 또 근육 키우는 운동 했어요? 날이 갈수록 가슴이 커지잖아요, 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 후타쿠치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오늘은 무슨 일 없냐? 금요일인데.”

별로 없는데요. 왜요.”

그냥, 요즘은 매일 같이 하교하네. 작년에는 여자, 친구랑 만나기도 했잖아.”

 

티셔츠 위에 저지를 겹쳐 입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후타쿠치에게 물었다. 요전번에 타카하시가 물어봤을 때부터 궁금했었던 거였다. 없는 눈치로 살펴본 결과 지금은 후타쿠치에게 여자친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달라지곤 했으니까. 선후배 사이라면 이런 거쯤은 궁금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카마사키는 태연하게 가방을 정리하는 척 했다. 괜히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꺼내서 라커에 정리하다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반면 후타쿠치는 꾀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카마사키의 등을 관찰했다. 깜빡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요란하게 가방을 뒤적이는 모습에 그냥 스치듯 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 그런 척 해보이더니, 결국 아까부터 자신의 여자 취향이라든가 여자친구의 유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자신에 관련해서는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은근 심술이 나 장난을 쳤다.

 

주말이 있잖아요. 설마 제가 여자친구가 없겠어요?”

“... ?”

 

건전지가 다 된 시계처럼 똑딱, 하고 핸드폰을 집으려던 카마사키의 손이 한 순간 멈췄다. 속으로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꽤 컸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 그렇구나. 형식적인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마사키의 눈에 자신의 손끝이 가방 속에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러냐, 병신같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까 저지를 껴입길 다행이었다. 카마사키는 주머니에 주먹을 쥔 손을 처넣었다. 내가 지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잘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가자.”

... .”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조용했다. 사실이 아니길 내심 바랐던 게 사실로 밝혀져 기분이 가라앉은 카마사키는 둘째 치고, 후타쿠치도 그런 카마사키에게 실없는 장난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실 후타쿠치는 라커룸을 나올 때부터 카마사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적어도 카마사키가 당황한 얼굴을 보이거나 놀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태연하게 웃어넘기려고 노력한다던지. 하지만 카마사키는 그래? 하고 싱거운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처럼 태연함을 가장하려 노력했다면 몰라도, 확연히 생기를 잃은 얼굴은 우울함을 내비치고 있어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떠보기가 망설여졌다. 밀고 당기며 장난치다 똑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같았다.

 

괜히 창밖을 구경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흘끗 카마사키를 보니 아까부터 쭉 무표정이다. 약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카마사키는 평소에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었다. 후타쿠치와 치고 박고 싸울 때는 흥분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배구를 할 때는 크게 웃기도, 힘들어 하기도 분해하기도 했다. 툭 건들면 파르르 반응하는 미모사처럼 건드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무표정은 영 어색했다. 차라리 침울해 하는 얼굴을 하던가,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후타쿠치는 공연히 아무 죄도 없는 카마사키를 탓했다.

 

그게 죄책감이라는 것도 모르고 카마사키에게 아무 말이나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마사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거의 다 와갔다.

 

나 먼저 내린다. ...... 주말 잘 보내라.”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하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카마사키가 말했다. 평범하게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이었지만 숨겨진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자친구랑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덜컹, 순간적으로 버스가 과속방지턱에 걸렸는지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후타쿠치의 심장이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할까 말까 곱씹었던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끼익, 하고 버스가 멈추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카마사키는 다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후타쿠치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오르내리는 얼굴이 익숙했는지 운전사가 내리지 않고 서 있는 카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카마사키 대신 후타쿠치가 고개를 저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지금 여자친구 없다고요.”

... ? 아까는 있다고 했잖아.”

 

네가 주말에 만난다며, 카마사키가 멍하니 후타쿠치를 내려 보았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후타쿠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카마사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 사뭇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런 거짓말을... 왜 했는데?”

그냥요. 굳이 말하자면 장난? 재밌으니까?”

뭐가 재밌다고,”

카마사키 씨 놀리는 게 재밌으니까요.”

“... , 하나도 안 재밌어.”

 

카마사키가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땅 끝까지 뚫을 기세로 가라앉았던 기분을 누가 확하고 끌어올린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려 했다. 카마사키는 버스 손잡이를 잡은 오른쪽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얘가 진짜 뭐라고 요 몇 개월을, 하루 종일 수 십 번도 넘게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지. 진짜, 나 진짜 어떻게 하냐.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후타쿠치가 진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냐.

 

요전번 꿈에 나왔던 타카하시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 때는 꿈에서 깨자마자 후타쿠치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지나갔었지만, 그 후 반에서 타카하시를 마주칠 때마다 멈칫하곤 했다. 답지 않게 여자애를 상대로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본능적으로 마음이 뒤틀렸다. 또 후타쿠치에 대해 물어보러 올까, 만약 고백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다행히 무슨 일인지 그때 이후로 타카하시가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럴까 두려워했다. 떳떳하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은 타카하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정작 후타쿠치는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혼자만 애달파하는 게 싫었다. 그냥 조용히 사드라든다면 좋겠다고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하지만 카마사키의 바람과는 반대로 후타쿠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마음은 차츰 커져만 갔다.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몇 번 맡아보지 못했던 희미한 체취도 좋았고 언제나 똑바로 직시해오는 다갈색의 눈동자도 좋았다. 빈 말이라도 후타쿠치의 모든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좋아졌고 그 정도가 심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차라리 싫은 점이 부각돼서 질려버렸다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그냥 저런 애였지, 하고 납득해버리고 만다.

 

... 그냥, 고백해버릴까. 시원하게 차이게.

 

후타쿠치한테 고백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무슨 말이 되돌아올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분명 차일게 분명하고, 기대 같은 건 애초에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해본 적 없기에 차이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예상이 갈 정도다. 그보다 그 순간, 그리고 앞으로 후타쿠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가 두려웠다. 후타쿠치라면 자신을 경멸하거나 두고두고 약점으로 잡을지도 몰랐다. 싸늘하게 식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아파하는 것도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뭐해요?”

 

고개를 묻은 팔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바로 밑에서 빤히 쳐다보는 후타쿠치와 눈이 맞았다. 재밌겠다며, 남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얼굴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악마가 깃든 천사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얼굴을 원망스럽게 보다 별안간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후타쿠치. ,”

?”

나 널, ......, 좋아, .”

뭐라고요?”

 

안 되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후타쿠치가 다시 캐물었다. 작아서 안 들렸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카마사키가 입을 달싹거리다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나왔다. 이대로 장난이었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아직은, 도망칠 수 있다.

 

똑바로 얘기하세요, 카마사키 씨. 답지 않게 피하지 마시고.”

 

덫에 걸린 생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다 카마사키가 홀린 듯이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또박 또박 흘러나온 말을 듣고 당황했는지 후타쿠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색하게 입술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카마사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 아니 뭘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내가 널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 .”

“...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원래는, 혼자 마음 정리하려고 했는데. ... 잘 안 되더라.”

“......”

그래서, 내 말은 그러니까... 차라리 차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한 거야.”

 

버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가득 차 미끌거렸다. 미칠 듯 뛰는 심장에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카마사키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달리고 있는 버스가 아니었다면 뛰쳐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마사키는 안절부절 못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고백 따위 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차마 빨리 나를 차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후타쿠치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마사키 씨가 절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 그렇겠지.”

좋아요, 그럼. 사귈까요?”

... 뭐라고?”

 

사귀자고요, 후타쿠치가 재차 말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어 카마사키는 어리둥절했다. 사귀자는 말이 내가 알고 있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맞나?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아무리 매사에 별 신경을 안 써도 그렇지, 가벼워도 너무 가볍잖아. 혹시라도 아까처럼 거짓말을 치는가 싶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장난으로 고백한거 아니다.”

사귀고 싶어서 고백한 건 아니고요? 카마사키 씨가 사귀자고 해서 사귀자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카마사키 씨야말로 저한테 지금 장난쳐요? 사귀자는데 왜 말을 못 믿어요? 먼저 고백한 건 그쪽 아닌가? 카마사키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타쿠치가 쏘아댔다. 연달아 쏟아지는 말에 카마사키가 어어, 하며 점점 말려들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가? 정말로 사귀자고 말하는 건가?

 

하지만, ?

 

그래서 지금 싫다 이거에요?”

 

격하게 숨을 몰아 내쉬더니 후타쿠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잔뜩 찡그린 눈가가 눈에 띄었다. 카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후타쿠치의 찌푸려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싫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상대와 사귀게 된다는데 싫어할 리 없었다. 다만 왜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얘기하는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후타쿠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보고 눈치가 없다지만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마사키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후타쿠치가 사귀자고 물었던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좋아.”

 

카마사키의 말을 듣자마자 후타쿠치가 이마에 닿은 카마사키의 손을 잡아챘다. 잡힌 손 아래로 순간 뿌듯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저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카마사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왕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제쳐 놓아야 했다. 그저 곁에 있을 수 있고, 딱 그만큼만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야 한다.

 

 

 (11693자)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