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와] 흩어진 꿈 4.5

 

 

 

 

하나마키는 어떤 의미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18살의 고등학생에게 10년 이상 지속되온 관계란 그들에게 평생과도 같은 거라서, 좀처럼 그 사이에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관계, 우정일 뿐이라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없는건 아니지. 하나마키는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이와이즈미에게는 안될 일이지만, 상관없다. 어짜피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질질 끄는 것이 이와이즈미에게도 괴로울 뿐이다. 그럴 바에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이와이즈미를 위한 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와이즈미에 대한 첫인상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화려하게 생긴 단짝에 상대적으로 가려지는 것도 있고, 이와이즈미 자체가 남들 앞에 스스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용하다거나, 소심하다거나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는 처음에만 존재감이 없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낯을 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외모와 센스있는 말솜씨. 반면에 오이카와는 한 눈에도 아이돌 뺨치게 사람의 이목을 끄는 녀석이었다. 얼굴만 잘생길뿐 속알맹이는 형편없을지도, 라는 주변 남자들의 찌질한 질투 섞인 기대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진중한 성격이었다. 엄청나게 가벼워 보이는 외모와의 갭이 인상 깊었다.


첫인상이 어떠하던 두 녀석 모두 배구에 진지했다. 특히 오이카와는 배구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위치가 바뀌는 타입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둘은 초등학생 때부터 배구클럽을 같이 다니는 일종의 파트너였다. 세터와 에이스, 핀치에 몰릴 때면 팀의 돌파구로 찾는 깊은 신뢰 관계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10년 이상의 우정, 세터와 에이스 사이의 신뢰. 하나마키는 자신에게 저런 친구가 없다는 것이 저절로 아쉬워질 만큼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타인의 시선에서 볼 때 특별해 보였다. 그러나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그리고 마츠카와와 친해지면서 하나마키는 절로 눈치를 챘다. 그 관계, 어쩌면 얼마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남달랐다. 하나마키가 중학교 시절 겪었던, 낯익은 감정이 그 시선에 담겨 있었다.


하나마키는 게이다. 깨닫게 된 것은 중학교 때로,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성 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을만큼 태연하지만 처음엔 아니었다. '보통'이 아닌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그 두려움, '남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것 같다는 불안함. 꽤 좋아했던 첫 사랑에게 받은 '상처'는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혼란과 상처 이후 하나마키는 크게 변했다. 이성애자인 '척'하는 노력을 했고, 여자를 밝히는 '척' 했다. 일부러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기도 했다. 결코 키스를 넘어서는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동성애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냥 똑같은 사람의 입술인데도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행위 자체가 하나마키에게는 고역이었다. 처음 여자와 입이 닿았을 때,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는 하나마키를 여자는 귀엽다는 듯 보았다. 실상 하나마키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친거였다. 그 다음날 하나마키는 바로 헤어졌다. 애초에 마음이 가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애꿎은 여자애를 이용했다는 마음에 속이 편하지 않았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하나마키는 깨달았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이건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대신 배구를 선택했다. 혈기 왕성한 성욕을 누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왜 여자친구가 없냐는 고등학생 특유의 의미없는 질문에 혹시라도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 도피처로 삼은 배구지만 하나마키는 자신도 모르게 배구에 점점 빠졌다. 게이냐,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세계였다. 스파이크를 칠 때마다 알게 모르게 하나마키의 안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렸고, 또 팀원들이 좋았다. 오직 승리라는 하나의 목적만을 바라보다보면, 지금까지 하나마키를 괴롭게 했던 것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팀원 모두가 하나마키의 연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배구부에는 하나마키의 취향에 맞는 남자가 없었다. 하나마키의 취향은 운동부와 거리가 멀었다. 일단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하얀 피부였으면 좋겠고, 키는 남자답게 좀 컸으면 좋겠다. 눈높이가 맞으면 더 좋고, 그리고 자상해보이는 상냥한 얼굴이면 그야말로 스트라이크 존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배구부에 없다. 하나마키보다 하얀 사람은 꼽아봐야 오이카와, 쿠니미 정도. 쿠니미는 키가 큰 편은 아니니까 제외. 오이카와는 얼굴이 취향이 아니니까 제외.


하나마키는 이상형이 주위에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연애보다 배구가 낫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성욕은 오른손과 영상 속에서 신음을 내는 이상형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나 꼭 이상형이 연애 대상이 되리란 법이 없듯,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하나마키의 눈에 들었다.


-하나마키. 서브 폼 좋은데?


이와이즈미는 칭찬에 박하지 않다. 1학년 때부터 같은 학년의 마츠카와와 스스럼없이 지내며 알게 모르게 마츠카와가 실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됬다고, 언젠가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비단 마츠카와 뿐 아니라 배구부원들은 모두 이와이즈미를 좋게 생각했다.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사람을 나쁘게 볼 사람은 없으니까.


-뭐, 내 폼이 좀 깔끔하긴 하지?


이와이즈미와 그렇게 친하지 않을 무렵이라 하나마키는 부러 능글맞게 대답했다. 오이카와에게 그러는 것처럼 타박을 할까? 아니면 정색하며 장난을 칠지도 모른다고 하나마키가 기대를 할 때, 이와이즈미는 활짝 웃으며 하나마키의 어깨를 툭 쳤다. 맞아, 진짜 깔끔해서 넋놓고 봤어! 하나마키는 어쩐지 불식간에 총에 맞은 것 같았다. 뭐지. 이와이즈미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본 건 아니었는데 하나마키는 절로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오이카와가 항상 장난치는 것과는 달리 이와이즈미는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잘생겼다고 하기도 뭐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얼굴이라 한마디로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후배 중 한 명은 오이카와 선배가 자꾸 그렇게 말하시니 진짜로 그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버렸다고 당황해하며 이와이즈미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오이키와에게 배구공을 있는 힘껏 던져 분을 풀었다.


그러니까 이와이즈미는 객관적으로 봐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짧게 자른 머리는 삐죽거리고, 눈썹과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간 모양이다. 버릇처럼 항상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삐죽 나와있다. 그나마 남들과 달리 차분한 녹색의 눈이 매력적이긴 하다. 그러니까 하나마키의 이상형과 완전히 반대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이와이즈미의 웃는 얼굴은 마치 꽃이 필리 없다고 생각한 풀떼기에 갑자기 하얗고 탐스러운 봉오리가 만개한 것과 같았다. 날이 선 눈매는 장난기 있는 아이처럼 변했고, 불만이 있어보이는 고집스런 입이 환하게 웃는 입매가 되자 이와이즈미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다.


하나마키는 그 찰나의 순간 이후, 이와이즈미를 이성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니 그건 웃음 한 방에 반해버린 것과 같았다. 어딜 봐도 하나마키의 이상형에 맞는 구석이 없는데 자꾸 시선이 갔다. 뾰족한 짧은 머리를 부스스 쓰다듬고 싶고, 올라간 눈매를 만져보고 싶고,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 조금 내려다보아야 하는 키도,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근육은 탄탄하게 잡혀 있지만 어딘가 골격이 크지 않아 아담해보이는 체구도 좋았다. 양 팔로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의 주변을 서성였다. 남몰래 이와이즈미가 입을 대었던 물통에 입을 대보기도 하는 부끄러운 짓도 해보고, 팀원들 모르게 이와이즈미에게만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물론 마츠카와가 발견해버려서 있던 간식을 다 뺏기긴 했다).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고, 혹시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을 좇다 오이카와를 발견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계속 이와이즈미에 신경을 집중했던 하나마키조차 며칠이 걸려 알아챌 수 있었던 만큼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친구로서 보는 것인지, 좋아하기에 보는 것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는 그 얼굴이 중학교 시절의 자신과 닮았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지만 이와이즈미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몰랐더라도 이와이즈미가 게이인 자신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누구에게나 자상하니까.


예상대로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의 커밍아웃에 놀라긴 했지만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혹시 나를 좋아해서 커밍아웃을 한건가? 하는 의심도 없어 오히려 하나마키는 김이 샜다. 그 이후, 같은 동성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때문인지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에게 기대는 일이 많아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이카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하나마키에게 털어 놓았다. 체념하듯 고백하는 목소리는 담담했고, 얘기가 다 끝난 뒤에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하나마키는 뜻밖에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좋아하게 된 지 꽤 되었다는 사실과 절대로 이루어질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하나마키는 그런 이와이즈미의 속마음을 알아 차렸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의 신뢰관계, 작은 틈도 보이지 않을만큼 깊은 우정이기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는 거였다. 가장 소중하니까 손 댈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였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 하나마키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 결심을 어렵게 털어놓은 것만 봐도 이와이즈미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어서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혹시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깨닫고 어쭙잖은 동정을 베풀거나 하면 곤란했다.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와 보다 더 친해진 뒤, 하나마키는 종종 오이카와의 시선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장난처럼 이와이즈미를 타박하곤 했고, 하나마키에게 질투난다고 투정부렸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와이즈미는 말했지만 하나마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친구사이 만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오이카와의 독점욕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오이카와가 유별나거나, 친구로서가 아닌 감정이 섞여 있거나.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의 관계. 하나마키는 그 둘의 관계를 그렇게 결론지었다. 오이카와가 자기도 모르게 독점욕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녀석,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의 시간, 관계를 참을 수 없이 질투했다. 저렇게 애매모호한 행동은 반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가 하루라도 빨리 오이카와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일부러 냉정하게 이와이즈미의 기대를 짓눌렀다. 상처받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마음이 아팠지만, 더 상처받기를 바랐다. 그리고 도쿄로 대학교를 가겠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하나마키의 초조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가 진학하게 될 도쿄에 간다면, 이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포기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언제나 오이카와에게 시선이 가버리는 이와이즈미다. 더군다나 누구보다 더 오이카와에게 무른 이와이즈미니, 질질 끌려 다닐게 뻔했다.


-그럼 나랑 같은 대학으로 가, 이와이즈미.

-어?

-또 오이카와 바보가 되게 할 순 없으니까.


하나마키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잠시 망설였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진로 조사서를 뺏어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고작 종이 한 장, 고작 몇 글자에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나와의 거리는 좁혀지겠지.


집으로 가는 길, 교문 앞에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땅바닥을 툭툭 차는 모습이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이와이즈미에게 두고 먼저 나오니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맛키, 하고 부르며 아는채하는 것과 달리, 시선은 빗겨져 이와이즈미를 찾는다.


-이와쨩하고 요즘 매일 같이 있네? 부활동도 없는데 둘이 뭐했어?

-뭐, 꼭 별일 있어야 같이 있나?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만 어딘가 조용하게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하나마키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지 조용했다. 친구긴 하지만 애인도 아니면서, 같잖은 질투심을 보이는 오이카와가 재수 없다.


-궁금해?

-...궁금하면 가르쳐 줄 거야, 맛키?

-가르쳐 주지. 나랑 하지메가 뭐 했는지.

-하지메?


이와이즈미를 이름(하지메)로 부르는 것에 오이카와는 동요했다. 시선이 흔들리며 웃는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메랑 데이트 했어, 집에 가는 길에는 네가 있으니까 별 수 있나.

-...하? 데, 데이트?

-그럼 나 먼저 간다, 귀갓길은 너한테 양보할게.


하나마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뒤에서 오이카와가 자신의 이름을 연신 불렀지만 쫓아오진 않았다. 곧 있으면 이와이즈미가 나오기 때문이겠지.


-야! 야! 하나마키! 데이트라니 무슨 뜻이야!

-알아서 생각해~ 잘 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오이카와에게 정말로 이와이즈미와 사귄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너보다 이와이즈미에게 가까운 사람은 나라고, 넌 친구 이상은 될 수 있지만 애인은 될 수 없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유치한 질투나 계속 해라, 오이카와. 오랜만에 귀갓길이 즐거웠다.


그러나 다음날, 누가 봐도 전날 울어서 팅팅 부은 눈으로 나타난 이와이즈미를 보고 하나마키는 그새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멋쩍은 듯 웃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누가 들어도 티가 나는 거짓말을 하는 이와이즈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상처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나마키는 늘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어하는 이와이즈미를 보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발갛게 부어 오른 눈가에 하나마키의 가슴이 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눈의 붓기를 빼기 위해 차가운 손수건을 대주거나 말없이 이와이즈미의 곁에 있어주는 것 이외에는 없다. 하나마키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시간이 흘러 이와이즈미의 감정이 퇴색되기를. 방해물이 또 다시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전에 그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730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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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이 완결은 아닙니다... 근데 갈수록 전개가 힘들어지네요ㅠㅠ


4.5는 하나마키 외전인데 길어져서 여기서 마감해요. 나중에 오이카와 외전도 꼭 쓰고 싶은데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야 쓸 수 있어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ㅠ.ㅜ


마음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별것도 아닌 소설 읽어주셔서 부끄럽지만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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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이와] 흩어진 꿈 5

 

 

 

오후 5시를 넘겨,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쌀쌀한 날씨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공원에 도착한 뒤, 시간이 흘러도 말이 없었다.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는지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서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귀가하는 학생들이 수없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용한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 또한 오이카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까지 오이카와가 내게 친구로서 독점욕이 많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신뢰관계로 이루어진 우리 우정, 그것 이외에 오이카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같은 남자이고, 오이카와는 동성애자가 아니고, 하나씩 없어지는 선택지에 남은 것이 우정밖에 없다. 그러나 방금 전의 오이카와의 행동, 그리고 예전부터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던 오이카와의 독점욕이 단순히 친구의 친구를 질투하기 때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혹시?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 그리고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에 기대를 접었다. 춥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목소리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장난처럼 얘기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애들처럼 보호본능을 일으킬 리가 없는 남자다운 체구에, 성격도 나쁘다. 습관처럼 오이카와의 등짝을 얼마나 때렸는지 셀 수도 없고, 배구공을 날린 적도 너무 많다. 애초에 친구였으니 그런 대상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헛된 기대는 쉽게 흩어졌고 우울한 마음만이 남았다. 선택지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다. 남들과 달리 유별나게 친구에게 질투심이 강한 오이카와.


-오이카와.

-......

-예전에 내가 말했었지. 가장 친한 친구는 앞으로도 너일거라고.


가슴이 답답하고, 아까부터 차가웠던 손이 찌릿했다. 뻣뻣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친구라고 해도 지금까지처럼 항상 같이 있을 순 없어.

-이와쨩.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네 행동, 억지 부리는 거라는 거.


고개를 돌린 곳에, 새하얗게 안색이 변한 오이카와가 서 있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 해가 저물어 밤이 찾아와 어둑해진 하늘 아래 오이카와의 새하얀 얼굴만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 너는 너의 인생이 있을 거고, 나는 나의 인생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이와쨩. 난 이와쨩하고 함께 있고 싶어.


오이카와는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나만큼 차갑게 식은 오이카와의 손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두워진 시야에 오이카와의 하얀 손이 낯설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본 오이카와의 얼굴 또한 만져보지 않아도 차갑게 식어있는 것 같다.


-이와쨩은 나랑 같이 있는게 싫어진거야?


오이카와의 말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만들었다. 내가 오이카와에게 바라는 관계와, 오이카와가 나에게 바라는 관계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우정과 사랑, 나는 오이카와에게 사랑을 바라고 오이카와는 나에게 우정을 바란다. 감정의 형태가 달라도,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에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나는 왜 오이카와를 좋아하게 됐지. 서로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되어서 괴로워질 바에는 좋아하지 말걸. 좋아한다는 마음을 애초에 깨닫지 말걸. 오이카와를 좋아하지 말걸...


-이와쨩, 왜 우는거야!


오이카와의 말에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는지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손가락에 눈물이 묻었다. 나는 문득 괴로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닿지 못할 내 마음, 포기하자고 수십, 수백 번을 결심하고 되새겼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이카와의 얼굴, 손짓, 말 하나 하나에 스러져가는 마음의 불씨가 타올랐다.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난 뒤, 언젠가 오이카와와 집 앞에서 헤어져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하고 오이카와만 좋아하게 될 지도 몰라. 첫사랑도 오이카와, 끝사랑도 오이카와. 오이카와가 나중에 결혼해도 그 옆에서 오이카와를 축하해주며 마음을 썩히게 될까? 아니면 그때는 면역이 생겨서 지금만큼 아프지는 않을까? 나 왜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 하는거지?


-이와쨩, 나랑 같이 도쿄 가자고 한 말이 그렇게 싫은거야? 그래서 우는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는 눈물을 멈추지 않는 내 얼굴을 연신 손으로 닦아내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이 너무 상냥해서 싫다.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오이카, 와.

-응, 이와쨩.


살아온 시간동안, 나는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멋대로 일을 벌린 적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적도 없다. 또래 애들보다 어른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철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로 한다.


-나 이제 너랑 친구 안할래.

-뭐?

-나, 나는.

-이와쨩!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를 할 수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쿄로 대학갈 것.

배구는 취미로만 하기로 결심한다.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질 것.


나는 괴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오이카와와 친구를 그만둔다.


-좋아해.

-......!

-나, 너 좋아한다.

-......뭐, 이와쨩.

-...미안, 그러니까 너랑 친구 그만둘래.


나는 오이카와의 손을 놓았다. 얼굴 위로 오이카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그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행여나, 혹시나 오이카와가 따라올까 무서워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나가 충분히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학생들이 귀가할 시간을 훌쩍 넘겨서인지 버스 안에는 두, 세 명의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맨 뒷좌석에 앉았다. 어차피 사람이 없는 버스이기에 옆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고백해버렸다. 저질러 버렸어.

기어코 고백해버렸다. 나 편하자고, 내가 괴로워했던 감정을 오이카와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10년을 훌쩍 넘긴 시간동안 친구였던 오이카와에게 친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오이카와와의 우정을 버렸다. 이제 오이카와와 나 사이에 남겨진 관계가 없다.


흐려지는 시야에 입술을 깨물었다. 조용한 버스 안에 혹시라도 울음이 터져나올까 두려웠다. 엎드려 앞좌석에 얼굴을 숨겼다. 벅차오는 숨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시합에서 져본 적을 제외하곤 남들 있는 곳에서 울어본 적이 없는데. 버스 안에서 끅끅 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어떡하지, 내가 오이카와를 버려 버렸다.




(332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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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ㅏㅏㅏㅏㅏㅏㅏ 한계가... 이 뒤는 상상에... 맡기면...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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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005500 :

[오이이와] 흩어진 꿈 4

 


 


마츠카와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곳이었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카페는 오이카와와 몇 번, 아니면 어쩌다 가본 적밖에 없었기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작지 않은 규모에도 사람이 꽤 가득 차있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끌고 창가자리로 가서 앉더니 그 옆에 나를 앉혔다. 이어서 따라온 하나마키가 맞은편에 앉았다. 멀리서 마츠카와가 보였다. 마츠카와는 유니폼인지 하얀 셔츠에 앞치마 비슷한걸 허리에 매고 있었다. 언뜻 앞에서 보면 치마를 입은 것 같아 우스웠다. 나만 그렇게 느낀게 아닌지 테이블로 다가오는 마츠카와를 보고 하나마키가 큭큭 거렸다.


-큭, 마, 마츠카와. 유니폼 잘 어울리는데?

-아하하하하! 맛층 진짜! 사진 찍어도 돼?

-이미 찍고 있잖아.


찰칵, 찰칵 하고 오이카와는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츠카와는 스스로도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이 카페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는 것을 아는지 가만히 있다가 오이카와의 핸드폰을 내리 눌렀다.


-나중에 보내줄게, 맛층!

-필요 없거든? 주문이나 해라.


마츠카와는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들을 봐도 도통 무슨 메뉴인지 모르겠다. 그런 나에 비해 하나마키는 익숙하게 메뉴를 살피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별 관심이 없는듯 종이만 넘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으며 가까이 기대 왔다.


-이와짱 뭘 시킬지 몰라서 그러고 있는거야? 오이카와상이 추천해줄까?


열심히 손가락으로 메뉴를 집으며 살피던 하나마키가 오이카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커피 못마신다고 그랬으니까 무난하게 아이스티나 에이드 종류는 어때?

-음, 뭐... 일단 보고.


레몬에이드, 자몽에이드, 블루레몬에이드, 블루베리에이드, 크랜베리에이드, 유자에이드... 종류도 많았다. 


-그럼 나는 블루레몬에이드.

-일단 나는 카페라떼랑, 그리고... 야, 여기 슈크림은 맛있냐?

-안 먹어봐서 모르겠는데.

-맛층, 이럴땐 무조건 맛있다고 해야 하는거 아니야?

-어, 슈크림 맛있어.


하나마키는 인상을 찌푸리고 뭐냐고 핀잔을 주었다. 마츠카와는 뻔뻔한 얼굴로 슈크림도 하나, 주문하고 오이카와에게 눈짓했다.


-난 녹차라떼 진하게.

-더 시킬거 없지?

-그리고 서비스 부탁해, 맛층~!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프런트로 갔고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하나마키는 카페를 두리번거렸고 오이카와는 말없이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발을 까닥거렸다. 여기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하고 하나마키가 먼저 운을 뗐다.


-마츠카와랑은 안 어울리지만.

-확실히 마츠카와는 뭐랄까, 카페 알바생이라기보다 술집 알바생같은 느낌이지.

-아무도 쟤한테 주문 못하겠네. 진짜 인상 험악하다니까.


운동부여서 체격이 큰 탓도 있지만 마츠카와는 초면에 좋은 인상을 받기 힘든 타입이었다. 제멋대로 삐죽거리는 반곱슬 머리에, 눈은 날카롭고 특히 눈썹이 박력있게 올라간 모양이다. 처음 마츠카와를 봤을 때 3학년인줄 알았으니 말은 다 한거다. 과연 처음 보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직에 마츠카와가 얼만큼 버텨낼 수 있을지가 흥미로울 정도였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에 대해서 떠드는 사이에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다. 오이카와의 녹차라떼, 하나마키의 카페라떼와 슈크림, 그리고 블루레몬에이드가 차례대로 놓였다. 처음 시킨 블루레몬에이드는 푸른 물감이 위에서 아래로 퍼지는 것 같이 보였다. 밝은 파란 색감이 여름의 바다같다. 마시면 싸르르하고 톡톡 튈 것 같은 탄산 방울이 보인다.


-사실 블루레몬에이드가 뭔지도 모르고 시킨건데.

-뭐, 레몬에이드랑 블루레몬에이드랑... 별 차이 없지 않나?


얼음 위, 음료 표면에 동그랗게 떠 있는 레몬은 보는 것 만큼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할 만큼 시큼해보인다. 한모금 마신 블루레몬에이드는 생각과는 달리 일반적인 레몬에이드의 맛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레몬에이드 맛인데?

-보기에 예쁘잖아. 파랗고, 청량해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마키의 말에 공감했다. 눈 앞의 음료는 정말로 여름에 마시기 좋아 보일만큼 청량하다. 노란색 빨대로 빙글빙글 휘젖자 노란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얼음이 덜그럭거리며 움직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보니, 오이카와도 나처럼 빨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녹차라떼를 휘젖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시킨 녹차라떼는 둘이서 왔을 때를 기억나게 했다. 둘이서 카페를 올 만한 일이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별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갔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방과 후에 오이카와에게 이끌려 들어가거나, 주말에 시내에 나갔다가 쉬러 들어가거나. 남자끼리 카페에 들어간다는게 처음엔 왠지 쪽팔리기도 했다. 머릿속의 이미지에서 카페는 어쩌다 스치듯 본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가본 카페가 생각보다 달라서 놀랐고, 그런 나를 보고 오이카와가 손가락으로 볼을 쿡쿡 찌르며 놀렸었다. 


오이카와와 카페를 갈 때, 메뉴를 선택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처음 카페에 갔을 때 메뉴를 읽길 포기한 이후로 오이카와에게 그냥 맡겨버린 탓이다. 오이카와는 한 가지 메뉴를 고집하진 않았지만 내 음료는 언제나 녹차라떼를 시켰다. 녹차라떼는 그렇게 달지도 않아서 입맛에 맞아 내심 맘에 들었었다.


눈 앞의 블루레몬에이드는 예쁘지만 내 입맛에 조금 달았다. 녹차라떼나 시킬걸 그랬나 싶다. 그래도 보기에 예쁘니까 후회는 없다. 사실 블루레몬에이드는 이름부터 그냥 끌렸다. 밝고, 파랗고,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시킨 거였다. 조금 더 사실을 말하자면 내 안에 오이카와의 이미지랑 맞았다. 오이카와는 항상 밝게 웃고 다니고, 주위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가끔 얄미운 소리를 하거나 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손이 올라가게 만드는 녀석이지만, 누구나 오이카와를 좋아한다.


물론 시키고 나서야 왜 이걸 시켰는지 깨달았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고 당황스럽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금방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 대학 어디 갈지 정했냐?


하나마키가 슈크림을 먹다 말고 말했다.  크림이 입가에 묻어 있어 티슈를 건넸다.


-음, S대학교로 갈까 생각 중인데.

-S대학교?


티슈로 입가를 닦던 하나마키는 오이카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마 오이카와를 아는 누구라도 오이카와가 S대학교를 가겠다고 한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왜 S대학교로 가려는거야?

-이와쨩이랑 같이 살려고~

-야, 난 그러겠다고 한 적 없어...!


하나마키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짓더니, 남은 슈크림을 입 안에 다 넣었다. 기껏 닦은 입가에 다시 크림이 묻었다. 어제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그러했듯이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의 결론을 내린 채였고 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어제는 스스로가 바보같아서 울다가 잠들었고, 뭔가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도 그럴 생각이야?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의 말에 나를 돌아봤다.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이 웃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억지로 웃고 있다.


-그게 잘, 모르겠는데. 어제서야 쟤가 얘길 꺼낸거라서.

-이와이즈미는 진짜로 오이카와 엄마야?

-하나마키!


하나마키는 어쩐지 분한 얼굴이었다. 뭐에 분해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마키에게 해왔던 얘기들이 있었기에 어제처럼, 평소와 같이 오이카와에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야 했다. 그러나 돌아본 오이카와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 예의상의 웃음도 아닌, 하물며 진짜 웃음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와쨩은 오이카와상이랑 앞으로도 함께라고, 맛키쨩.

-이와이즈미.

-...어?

-이제 끝낼 때가 왔다고 했잖아.

-아. 그건,


지금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면 오이카와가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역시나 힐끗 쳐다본 오이카와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마냥 굳어 있었다. 끝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이카와가 아직은 모른다는 것에 안심해야 하는건가.


-이와쨩, 무슨 말이야? 끝낸다니.

-그러니까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래서?

-앞으로는 새로운... 인맥을 쌓아볼까, 하는...


오이카와는 아예 몸을 옆으로 돌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충분히 가까웠던 거리가 확 좁아졌고, 오이카와의 팔이 내 허벅지를 잡았다. 어제처럼 횡설수설하며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다가,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덜그럭, 하고 테이블 위의 블루레몬에이드의 얼음이 녹아서 움직였다.


-맛키, 이와쨩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이와쨩이 헛소리를 하고 있잖아.


하나마키는 아까 전의 분해하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어느 새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페라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나마키의 손이 똑똑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오이카와, 이제 더 이상 이와이즈미랑 ‘언제나 함께’가 아니야.

-하하, 맛키쨩도 이상한 소리를 하네?


똑똑, 하는 소리는 꽤 장난스러워서, 이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하나마키는 눈앞의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환하게 웃은 하나마키가 블루레몬에이드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을 덮었다. 손을 마주 잡더니, 깍지를 끼었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하나마키의 얼굴을 보다가, 나와 하나마키가 마주 쥔 손을 내려 보았다.


-오이카와.

-하, 뭐하는 거야, 지금?

-이와이즈미는 졸업하면 나랑 동거할거야.

-...뭐?

-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하기로 했고. 그렇지, 이와이즈미?


왼쪽 허벅지가 조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말없이 나를 볼 뿐이다. 이제는 입가에 달렸던 억지 웃음도 사라진 얼굴이었다. 말해봐, 이와쨩. 오이카와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시선으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있다.


-학교는 같은, 곳으로 갈까 했는데.

-......

-도, 동거는... 아! 아파, 쿠소카와!


오이카와는 조용히 눈썹을 찡그렸다. 아프다는 내 말에 내 허벅지를 부숴트릴 것처럼 쥐던 힘을 뺐다. 미안, 하고 중얼거리곤 이제는 허벅지 대신 팔뚝을 잡았다.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어, 하는 사이에 오이카와는 나를 끌고 갔고 뒤돌아본 하나마키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오이카와와 나를, 정확히는 우리의 중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프론트 근처에서 디저트 따위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던 마츠카와는 서비스는, 하고 외쳤지만 동시에 카페를 나와 버렸다.



오이카와는 카페를 나오고도 한참을 나를 끌고 갔다. 그냥 무작정 앞으로 가는 듯 방향의 변화가 하나 없었다. 도중에 오이카와에게 붙들린 팔을 빼보려고 했지만 있는 힘껏 쥐고 있는지 뺄 수가 없었다. 십여 분을 그대로 앞을 향해 걸었을까, 언젠가 로드워크 중에 스쳐지나간 적이 있는 작은 공원 앞에 멈췄다.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내 팔뚝에서 손을 뗐다.

그대로 오이카와는 우뚝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합 중, 서브권이 오이카와에게 있을 때 상대편 팀이 타임아웃을 불렀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눈을 감고, 입을 닫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다.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면 찡그린 눈가와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하나마키와 조금 더 친해졌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하나마키에게 신경 썼다. 내가 좋냐, 하나마키가 좋냐는 유치한 질문을 하며 섭섭하다는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자기보다 하나마키와 더 친해질까 두려워하는 친구 사이의 질투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였기에 오이카와의 이러한 질투는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더 잘 알았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을 당시에 처음 오이카와가 내 친구를 질투했다. 나와 오이카와는 같은 반이 아니었고, 간간히 쉬는 시간에야 얼굴을 보았다. 막 학기가 시작된 참이라 부활동도 시작하기 전이었고, 나는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에 긴장하면서도 설렘을 가졌었다. 어색한 첫 만남이 반복되던 그 때에 오이카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꽤 맘이 잘 맞을 것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 앞자리에 앉은 타케루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남자다운 성격이 인상 깊은 애였다. 자리가 가까우니 얘기하기도 쉬웠고, 무엇보다 축구부였기에 같은 운동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작정 공을 차는 것을 좋아했기에 같이 놀기에도 좋았다. 점심시간에 가끔씩 축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을 뛰어 놀았다.


타케루와 친해지면서 오이카와와는 자연스럽게 부활동 시간 외에는 마주치는 일이 줄었다. 방과 후 배구부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타케루와 함께였고, 오이카와는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초등학교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여자에게 상냥한 오이카와는 여자애들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아직 오이카와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닫기 전이었기 때문에 도와달라는 듯 난처한 눈빛을 보내는 오이카와를 휙 지나치곤 했다. 그럴 때는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계속 칭얼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타케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자기네 반에 놀러오라는 말을 계속 무시하자 기어코 여자애들을 겨우 뿌리치고 우리 반에 찾아오고 난 뒤부터다.


-이와쨩! 내가 쉬는 시간마다 놀러오라고, 했는데... 누구야?

-아, 타케루라고 친구.

-안녕! 너가 3반 오이카와 토오루구나? 난 타카키 타케루라고 해.

-안녕. 반가워.


오이카와는 드물게 낯을 가렸다.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타케루를 보다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메한테 말 많이 들었어. 너네 소꿉친구라며?

-하지메?

-응. 아, 그러고보니 넌 하지메를 특이하게 부르네?


오이카와는 하지메, 하지메...라고 중얼거리더니 수업종이 치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부활동 시간에 다시 본 오이카와는 다시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유독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귀갓길이 어색한 내가 몇 번 장난을 쳐봤지만 반응도 미미했다. 그러다 타케루에 대한 얘기를 꺼내 봤는데, 오이카와가 아까와는 달리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고 타케루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처음 봤지만 내가 타케루와 마음이 맞는 것처럼 오이카와도 타케루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카키랑 많이 친해졌나보네?

-타카키... 아, 타케루? 응.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나랑 잘 맞아.

-헤에...


너랑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말하던 나는 오이카와의 표정에 말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화가 난 표정인데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러게, 나랑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타카키.

-그, 그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우리 셋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냐면,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던 거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타카키와 조금도 친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쉬는 시간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가며 우리 반에 찾아왔고, 점심시간에는 배구분데 왜 축구를 하고 있냐며 억지로 배구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타카키와 거리도 멀어져, 가까워졌던 사이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오이카와도 좋았지만 타카키와도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주말에도 타카키와 놀려고 약속을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오이카와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울먹였다. 왜 내가 있는데 걔랑 놀려고 하냐는 말과 함께 입술을 부들부들 떨더니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이와쨩이랑 제일 친한 친구는 난데. 왜 그 못생긴 애랑 놀려고 하는거야, 이와쨩...!

-야, 야 오이카와. 갑자기 울긴 왜 울어...!


오이카와는 서툴게 달래는 나를 보고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었다. 으와아아아앙, 하고 우는 소리에 거실에 있던 엄마가 올라왔고 대뜸 나를 때렸다. 왜 토오루를 울리고 그러냐며 오이카와를 달랬고, 오이카와는 그 후로도 몇 분을 울었다. 한 짓도 없는데 맞은 억울함에 삐죽 입술이 튀어나온 나를, 오이카와는 울어서 팅팅 부은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나마 봐 줄만한 얼굴이 조금이나마 못생겨진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하여튼 오이카와는 예나 지금이나 울보다.


-나랑 제일 친한 친구는 오늘도 내일도 너뿐이야.

-영원히 나랑 제일 친한거지?

-응. 그러니까 바보같이 울지 마. 너 지금 엄청 못생겼어.

-윽, 그래도 이와쨩보다는 안 못생겼어...


얄미운 소리를 하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이카와는, 부은 눈 때문에 웃긴 모양새라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중엔 큭큭거리며 웃는 나를 보고 오이카와도 바보처럼 하하하고 웃었다.


나는 단순해서 오이카와가 왜 그렇게 타카키를 경계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오이카와가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모습을 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오이카와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로, 나는 오이카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내가 다른 애들과 친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오이카와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그런 오이카와를 나무라기도 하고, 짜증도 냈지만 예전과는 달리 헤헤 웃으며 이와쨩, 하는 오이카와를 끝까지 내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친구로서 내가 그렇게 좋은가 생각했다. 물론 내가 오이카와를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는 오이카와의 그런 행동들에 혹시나 싶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어느 누구도 소꿉친구를 상대로 친구의 친구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를 가차 없이 뭉겠던 일이 오이카와의 첫 여자친구였고, 그 이후로 나는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저 오이카와는 친구인 나에 대한 독점욕이 조금 과할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854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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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_눈물은_무기(feat.오이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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