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와] 흩어진 꿈 3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오이카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진지한 대화를 피해갔다.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와쨩, 뭐가 그렇게 혼란스러워?

-뭐?

-아니 그게.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어?

-......몰라...


오이카와는 말을 줄였다. 오히려 계속 고민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답지 않게 조용한 귀갓길이 이어졌고, 우리 집에 먼저 다다랐을 때야 오이카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러자는 얘기야.

-......

-쉽게 생각해, 이와쨩.

-...어, 그래. 쉽게 생각...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별 말 하지 않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이카와가 먼저 발을 떼었다. 내일 보자, 이와쨩.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철컥, 하고 오이카와의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쉽게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그 얘기가 당연했을 수도 있다. 물론 도쿄에 함께 가서, 독립을 한다고 해도 옆집, 또는 룸셰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꿉친구니까. 이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을 세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세는 것이 더 빠를 만큼 서로를 잘 아니까. 우리가 단순히 친구였다면, 오이카와의 말은 당연히 생각해봄직한 쉽고 편한 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가슴이 퍽 막히는 것 같다. 나는 오이카와의 친구라는 사실이 답답했다. 답답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했다. 우정이란 우리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오이카와를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앓기만 할 뿐이다. 오직 친구로서 나를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볼 때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오이카와에게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다. 사실은 나와 너는 다르다고.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은 감정으로 너를 보고, 너와 손을 잡고 싶고, 키스하고 싶다. 언제고 여자 친구에게 밀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관계가 아니라, 언제고 너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싶다. 나를 좋아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만약에 고백하면.

오이카와는 분명 난처하게 웃을거다. 온 몸으로 미안해하며 거절하겠지. 그렇게 수많은 여자애들이 오이카와에게 고백을 해왔고 거절당했지만, 거절에서 끝나지 못하고 짝사랑을 계속 했다.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호감을 가지는 상대,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상대에겐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니까, 그런 오이카와에게 거절당했다고 해서 짝사랑을 끝낼 수가 없었을 거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런 애들을 보았고, 가끔은 거절당하는 여자애들에 나를 이입했다. 내가 만약에 고백하면, 저렇게 거절당하겠지. 남자지만 제일 친한 친구니까 누구보다 더 어쩔 줄 몰라하다 미안하다고 하겠지. 미안해, 이와쨩. 받아줄 수 없어서 미안해, 이와쨩.


나는 당장의 충동을 멈췄다.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꾹, 하고 깨문 입술 사이로 끅, 끅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 처지가 비참하다. 나는 고백 하지도 못하는 병신이다. 거절당하는 상상만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다못해 그냥 같은 반 친구였더라면, 졸업식 날 미친 척 하며 고백해 볼 텐데. 마지막이 있으니까. 그러나 오이카와와 나 사이에 마지막이란 언제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끝이 있을까.


끝이 없다면, 끝을 만들어 볼까. 잠깐 스치듯 생각했다가 그만 두었다. 가슴이 아팠다. 바보같이 나는 오이카와와 끝을 내는 것보다 그래도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질질 짜면서도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한다. 병신, 병신하고 중얼거리다 눈물로 축축한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 바보같이 울어도 별다른 좋은 해결책이 없다. 휴지를 뽑아 킁, 하고 코를 풀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하하, 하하... 진짜로 끝이 없어.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으면 좋았겠다. 이럴 바에야 좋아한다는 감정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 날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마키가 다가왔다.


-왜 그래? 눈이 빨갛네.

-아, 응. 잠을 못자서.


아침에도 집 앞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이었다. 깜짝 놀라며 이와쨩, 눈이 왜그래?! 밤새 야한거 본거야? 라고 말하기에 등짝을 날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나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대답해주기 난처하다.


-잠을 왜 못잤어?

-어? 그냥, 그냥 잠이 안와서.


하나마키는 잠깐만,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포털 검색어 따위 보고 있는데 눈에 축축한게 씌워졌다.


-악! 뭐, 뭐야?

-눈 많이 빨개. 축축해도 이거 쓰고 있어, 이와이즈미.


몇 번 본 적 있는 하나마키의 손수건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에 적셔 왔는지 축축하다.


-야, 주려면 잘 짜서 줘야지. 옷까지 다 젖겠어.

-짜줄까?

-뭘 짜줘. 내가 짤게.


한 손으로 손수건을 짜자 주르륵 물이 흘렀다. 아무튼 뭔가 하나씩은 허술하다니까. 그래도 마음은 고맙지만.


-땡큐. 시원하네.

-이제 나밖에 없지?

-큭. 응, 너밖에 없네.


하나마키는 한동안 앞자리에 앉아서 어제의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 떠들었다. 하나마키와 근래 들어 둘이서 같이 있다 보니 이것저것 알게 되었는데, 하나마키는 집에 가면 TV를 몇 시간이고 본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다큐 등 종류를 따지지 않고 본다고 한다. 나는 집에 가면 씻고 밥 먹고, 그냥 일찍 자거나 게임하거나, 노래를 듣다가 자버리기 때문에 하나마키가 해주는 얘기들이 다 신기했다.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에 대한 이슈라던가,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의 내용이라든가 듣다 보니 재밌기도 했다.


-그래서, 그 T라는 가수가 새로 앨범 발표했다고 예능에 나왔는데,


신나게 말을 하던 하나마키가 멈추었다. 북적거리는 교실의 소음은 여전히 계속 들렸지만 하나마키는 말을 잇지 않았다.


-왜 그래? 말을 하다 말아.

-어, 오이카와가 왔네.


계속 손수건을 눈에 대고 있던 터라, 손수건을 떼고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시야가 잡히지 않았다. 검은 어둠이 앞에 있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깜빡거리는 눈 위로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본능적으로 오이카와의 손임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손이 차가운 편이다. 하얗고 긴, 남자답게 단단한 손은 차갑기까지 해서 가끔 오이카와의 손에 닿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맛키랑 이와쨩이랑 또 같이 있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길래 오이카와상 온 줄도 모르고 있어?

-뭐, 평범한 이야기지.

-오이카와, 이 손 뭐냐.


눈에 닿은 손은 처음 닿았을 때보다 차갑지 않아서 시원했다. 솔직히 오이카와의 손은 기분 좋았다.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얼굴을 감싸지는 착각이 들게 했다.


-이와쨩, 눈 피곤한 것 같아서. 내 손 시원하지?

-...뭐, 계속 이러고 있어라.


오이카와는 하하, 웃더니 손을 치웠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가 안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눈이 아직 뻑뻑한 것 같아 몇 번 깜빡였다. 앞자리의 하나마키는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책상 옆에 앉아 책상 위로 팔을 엎드리고 있었다.


-요즘 둘이서만 노니까 섭섭한데?

-뭘, 징그럽게 섭섭하데...


오이카와가 온 뒤로 말이 없던 하나마키가 고개를 돌렸다. 똑바로 오이카와를 보며 드물게 무표정인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랑 더 친해지려고 둘이 있는거지.


오이카와가 하나마키의 말에 입을 열려는 순간 종이 울렸다. 애초에 오이카와도 하나마키도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야 했다. 먼저 일어난 건 오이카와였다.


-맛키.


하나마키는 고개를 들지 않고 시선만 올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힘내?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상보다 이와쨩에게 가까워지진 못하겠지만.


피식 웃으며 하나마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앞자리의 주인이 왔던 참이었다. 종이 쳤는데도 자기네 반으로 돌아가지 않는 하나마키와 오이카와가 주위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야, 둘 다 돌아가. 종 쳤어.


결국 일어나 말없이 서로를 보며 서 있는 하나마키와 오이카와의 등을 떠밀었다. 밀지마, 이와쨩! 하고 투덜거리는 오이카와에 비해 하나마키는 얌전히 등에 떠밀려 걸었다.


-나가, 나가. 너네 반으로 빨리 가라, 응?

-이와쨩, 점심 같이 먹자.

-어, 그러던지.


나도, 하나마키는 짧게 말하고 옆 반의 앞문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그 옆 반이기에 조금 더 가야 했다. 오이카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아서는 순간, 이와쨩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문에 반쯤 몸을 기대고 손을 흔들었다. 하얗고 긴 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점심은 하나마키와 나, 오이카와 그리고 마츠카와까지 넷이서 먹었다. 요즘 나 왕따시키냐며 마츠카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마츠카와는 넷 중에서 유일하게 반이 아래층이라서 쉬는 시간에 잠깐 보기 힘들었다.

언제나 부활동 시간에 보았기에 얼굴을 보는 것이 퍽 오랜만이었다.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마츠카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 뭐냐 역 근처에 카페에서 일한다.


오이카와와 하나마키가 큭큭거리며 웃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무슨 수로 사장님이 널 뽑았냐며 오이카와가 물었다. 마츠카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팩우유를 빨대에 꽂았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큭큭, 노, 놀러가도 되냐?

-놀러와. 서비스 해줄게 몰래.




그렇게 방과 후에 마츠카와가 일하는 카페로 놀러가게 되었다. 남자들끼리 카페에 갈 일이 드문데다 이 조합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마츠카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먼저 가버리고, 셋이서 같이 가게 됐다.


-카페 가는거 오랜만이야.

-그래? 난 누나랑 주말에 가끔 카페 투어해.


슈크림이 맛있는 베이커리를 찾아서, 하나마키는 덧붙였다. 생긴 것처럼 입맛이 애같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가볼래? 거기 슈크림이 내 인생 슈크림이거든.

-헤에, 그래?

-이와쨩은 단거 별로 안 좋아해.


오이카와는 맞지? 라고 물으며 나를 보고, 하나마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침부터 느꼈지만 하나마키를 상대로 오이카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나에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얄미운 태도다.


-카페에 슈크림만 있는건 아니니까. 그치? 거기 라떼도 맛있어.

-음, 뭐... 그렇지.

-이와쨩은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자서 마시면 안 돼.


하나마키의 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도 오이카와는 태연하게 저만치 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앞서 걸었다.


-가자, 하나마키.

-......어~ 가자, 이와이즈미.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였다. 어쩐지 토라진 애처럼 서있는 하나마키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자 하나마키가 순순히 끌려왔다. 마츠카와가 일하는 카페가 바로 앞이었다.


-이와쨩, 들어가자.


오이카와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하나마키의 팔을 이끌던 손이 떼졌고, 어어 하는 사이에 오이카와에게 끌려갔다. 뒤돌아보니 하나마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닿은 오이카와의 팔에 또 정신 못 차리게 의식하면서도 오이카와의 행동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남자끼리 어깨동무쯤이야, 친한 사이에는 무의식적으로 하기도 하고 시합 중에 점수를 땄을 때는 끌어안기까지 하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오이카와랑은 중학교 때 이후로 그랬던 적이 없다. 오이카와랑 시합할 때나, 시합이 끝나고 나서 파이팅의 의미 외에는 신체적으로 접촉한 적이 없었다.


당연한가, 그냥 친구니까. 근데 항상 같이 다녔던 넷 중에서 제일 대화가 없는 마츠카와랑도 매번 어깨동무 했는데. 하나마키도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이카와를 의식하는 나를, 오이카와가 눈치 채고 피했나...?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걸 고민하는 내가 이상한건가?


이래서 짝사랑이 싫다. 상대방의 아주 작은 행동에도 하나, 하나 의미를 가지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보통의 관계와 의미를 비교하고, 내게 했던 행동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절로 미간이 좁아진다.





(5844자)

'未完 > 흩어진 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이와] 흩어진 꿈 4.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4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2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1  (0) 2016.11.07
Posted by 005500 :

[오이이와] 흩어진 꿈 2

 

 

 

짝사랑하는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와 오이카와가 사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는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에게 그러했듯이 오이카와의 손이 내 볼을 감싼다. 춥지, 하고 웃는 미소가 아름답다. 오이카와의 빛나는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면 깨닫는다. 어두운 공간, 오직 빛나는 오이카와.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웃어주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전 여자친구였지. 꿈임을 깨닫는다. 부서진 꿈에 잠이 깼어도 눈을 뜨기가 힘겨웠다.


그런 꿈을 꾼 다음부터 난 바보같이 오이카와가 나에게도 그렇게 웃어준 적이 있을까 궁금했다. 언제나 방긋거리며 웃고 다니는 오이카와였지만 그런 미소를 본 적은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다. 괜히 오기가 나서 손으로 오이카와의 입을 죽 늘어트리며 웃게 해 보기도 했고, 어디선가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얼굴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웃었다. 누군가가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웃는 웃음은 결국 보지 못했다.


몇 개월 동안 오이카와의 웃음소리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누굴 보고 웃는지, 왜 웃는지, 혹시라도 그때 그 웃음을 짓고 있는지. 날 보고 웃을 땐 어떠한지. 오이카와의 전 여자친구이자 첫 여자친구는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겨울이 되면 ‘춥네’, ‘춥지’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머리에 윙윙 울렸다. 오이카와가 배구에 다시 빠지게 되었지만, 어쩌다 등굣길에, 시내에서 그 여자애를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초조하고, 이런 초조함을 느끼는 내가 싫었다.


오이카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를 때, 나는 종종 오이카와와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언제나 곁에 있는 든든한 소꿉친구. 옆집에 사는 친구. 배구를 함께 하는 친구. 주장과 부주장. 지금까지의 관계를 거슬러서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생각하면 설렘으로 벅찼던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순 없을까.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와 하나마키를 만나고, 포기하라는 하나마키의 말에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 나와 오이카와는 연인이 될 수 없다. 그건 하나마키가 게이란 것을 알게 되고, 오이카와에 대한 내 속마음을 고백하고,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맘속으로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 실패로 끝났을 때,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마키에 기대 훌쩍거리며 나는 결심했다.


-하나마키.

-응.

-이제 결심했어.

-......

-이제 끝낼거야.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꿈이었던 전국 진출. 그만큼 오래 나의 꿈이었던 오이카와. 우리의 꿈이 끝남으로서 나도 나의 꿈을 접기로 결심했다.




눈물 질질 짜며 독하게 결심했음에도 나는 당장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혼자 아프고, 자책하고, 심지어 상대를 원망하게 만드는 짝사랑을 좋아서 계속 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결심 이전에 수천 번의 결심이 있었다. 항상 같이 등교하는 길, 아직 끝나지 않은 배구, 앞으로 있을 대학입시. 아직 곁에 오이카와가 있었기에 단단하게 마음먹었던 결심은 쉽게 부스러지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마키는 그저 바보라고 불렀다. 바보야, 아직도 뭐하고 있어. 세 살 바보는 여든까지 간다. 나는 욱하는 마음에 하나마키의 등짝을 때렸다. 그래도 하나마키는 어서 포기하라던가, 그때의 결심은 뭐였어, 라던가 나무라지 않았다.


-대학 어디 갈 거야?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진로 조사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의자를 뒤로 돌리고 앉아 있는 하나마키가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배구부는 끝났지만 대학이 남았다. 오이카와는 일찍이 도쿄의 유명한 사립대학에서 스포츠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한 번도 전국에 진출한 적이 없는 미야기의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몇 개의 대학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감독님이 말했다. 추천을 받았지만 선택지가 많았기에 방과 후 오이카와는 감독님과 상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도 센다이 시의 한 대학에서 추천을 받았다. 오이카와는 반드시 거절하고 도쿄로 가자고 했다. 이와쨩, 언제나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철없는 어린 애 같은 투정이었다.


-음, P대학교 추천받긴 했는데.

-갈 거야?

-아니. 도쿄로 갈 거야.


하나마키는 손으로 장난치던 볼펜 돌리기를 멈췄다. 톡톡, 하고 책상을 두들겼다. 저기요, 이와이즈미 씨.


-바보, 바보 거렸더니 진짜 바보가 된 거야?

-아니야, 너가 생각하는거.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


하나마키는 아마도, 내가 오이카와를 따라서 도쿄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에 미련한 소꿉친구 역할 계속 하기로 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이카와 따라서 가는거 아니야.

-그럼.

-예전부터, 대학은 도쿄로 가고 싶었어. 가도 전문대학이겠지만.

-기각.

-뭐?

-안 된다고. 도쿄는 안 돼, 다른 데 알아봐.


물론 하나마키가 온전히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단호한 대답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왜 도쿄로 대학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상한 침묵이 이어지다, 하나마키가 물었다. 빙글빙글, 하나마키의 손에서 돌아가다 톡톡, 책상을 치던 볼펜은 다시 도로록, 책상 위를 굴렀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하나마키는 이상한 대답을 들은 것 마냥 나를 쳐다봤다. 웃기고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정말로 언젠가부터 도쿄에 가고 싶었다. 도쿄는 넓다. 미야기에 비해선 좁디 좁은 땅이지만 어쩐지 넓은 곳 같다. 도쿄에 가면, 미야기에서의 일들은 과거로 남을 뿐,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 오이카와쯤은 단숨에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어디 대학?

-생각해둔 대학은 딱히 없는데. 성적에 맞춰서 가야 하니까.

-그럼 나랑 같은 대학으로 가, 이와이즈미.

-어?

-또 오이카와 바보가 되게 할 순 없으니까.


하나마키는 씩 웃었다. 어차피 배구로 대학 가려는 마음은 없었기에 2학년 때부터 가려고 생각했던 대학이 있다고 말하며 진로조사서에 M전문대학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내 진로조사서도 가져가 M전문대학을 적었다. 깔끔한 글씨는 하나마키의 것과는 달리 꾹꾹 눌러써져 있었다.


하나마키라면 옆에서 내 짝사랑이 빨리 끝나게 도와줄 것이다. 다정하지만 현실적인 하나마키. 오이카와에게 가졌던 손톱만큼의 기대도 무참히 뭉게버리는 잔인한 하나마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본심이 슬그머니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마키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깔끔한 하나마키의 글씨, 진하게 적힌 글씨가 너무 단호해 보였다.


감독님과의 상담이 끝났는지 오이카와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야? 묻는 하나마키에게 말없이 오이카와의 이름이 빛나는 액정을 보여 주었다.


-어.

-이와쨩! 어디야? 나 방금 감독님하고 얘기 끝났는데.

-어, 나 아직 학교. 하나마키랑 교실에 있는데.

-...맛키쨩이랑?

-응.


하나마키가 가방을 매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놓인 진로조사서를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일어났다. 전화기 너머로 오이카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앞서 가는 하나마키의 등을 보며 나는 괜히 머쓱함을 느꼈다. 하나마키는 내 짝사랑을 알고, 이제는 그만두겠다는 호기로운 결심의 증인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오이카와와 나, 하나마키가 같이 있을 때면 어딘가 눈치가 보였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툭 꺼내 바닥에 놓은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 하고 나를 불렀다.


-왜?


꾹꾹, 신발의 뒷굽이 눌리지 않게 손가락을 걸고 신발을 신은 하나마키는 밖을 힐끔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나랑 같은 대학 간다는거, 오이카와한테 말하지 마.

-어... 왜?

-그냥. 오이카와가 몰랐으면 좋겠어.


먼저 간다, 하고 하나마키가 등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 교문 앞에 오이카와가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땅바닥을 괜히 툭툭 차던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발견했는지 맛키~라고 부르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오이카와는 멀어지는 하나마키를 불렀지만 하나마키는 뒤도 안돌아본다.


-맛키!

-야.

-어?! 이, 이와쨩! 아니 맛키가 오이카와상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가!

-간다.

-이와쨩도 오이카와상의 말 무시하는거야?!


오이카와는 삐진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카라스노와 시합에서 진 후, 이렇게 싱글벙글하게 웃는 건 처음인데.


-뭐 좋은 일 있냐? 기분 나쁘게 실실 웃고 있게.

-헤헤, 이와쨩 귀신! 어떻게 알았어, 오이카와상 기분 좋은거!

-뭐야.

-후후훗. 놀랍게도! 오이카와상이 도쿄 S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 S대학교로 간다고?


S대학교라면, 나쁘지 않은 학교지만 오이카와는 더 좋은 학교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아는 대학교만 해도 T대학교라던가, O대학교라던가... S대학교 배구팀이 그렇게 강한 팀도 아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명해보라는 눈빛을 보내자 오이카와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짐작했는지 실없이 웃었다.


-S대학교로 가면, 장학금이라든가 주택지원 같은거 받을 수 있데.

-그...게 있으면 좋지만, 딱히 그런거 없어도 아줌마가 지원해주시잖아...?

-흠, 아니! 나 도쿄가면 자립할거니까!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자립하겠다고,

-이와쨩하고 같이 자립할거야.

-...아?


말문이 턱 막혔다. 자립이라니, 오이카와네 형편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은데 나랑 자립한다고? 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쿠소카와.

-어째서, 이와쨩?

-왜라니. 그런 일로 니 진로를 정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다른 대학으로 가도, 이와쨩 나랑 같이 살 거지?

-뭐?

-도쿄까지 가서 오이카와상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살면 외로워서 죽어.


오이카와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알고 있다. 저 녀석이 이럴 때면, 괜히 쳐진 눈썹을 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언젠가 장화신은 고양이에 나온 그 못된 사기꾼 고양이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때면, 솔직히 어떤 요구를 해도 거절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애의 얼굴이 바로 앞이고, 눈은 쓸데없이 초롱초롱하고, 투정을 부리듯 이와쨩, 하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도쿄에 가면...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이와쨩, 오이카와상이 외로워 죽어도 괜찮은거야?

-웃, 기지마.

-오이카와상 진심인데?

-난, 나는... 나는, 싫,

-이와쨩.


나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갈색 눈에 내가 비친다. 꼴사납게 부들거리고 있다. 덥썩하고 내 손을 쥔 오이카와의 손이 부들거리는게 보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손이 떨리는게 아니다. 내 손이, 내 손이 나도 모르는 새 잘게 떨리고 있다.


-이와쨩. 왜 떨어?

-무슨. 추, 추우니까! 니, 니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썰렁해서, 그래서.


횡설수설, 되는 데로 내뱉은 입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손이 잡혀 있다. 오이카와는 꼬옥, 손에 힘을 주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와쨩, 못생겼어.


집에 가자! 오이카와는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머리가 멍했다. 설마 진짜로 같이 사는건 아니겠지?


-야, 잠깐. 잠깐, 쿠소카와!


때마침 온 버스를 보고 오이카와가 뛰어, 이와쨩! 하며 뛰었다.






나는. 나는 도쿄로 가서, 미야기를 떠나,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짝사랑을 정리하고...

여전히 오이카와의 친구로 남겠다고 결심했는데.





(5639자)

'未完 > 흩어진 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이와] 흩어진 꿈 4.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4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3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1  (0) 2016.11.07
Posted by 005500 :

[오이이와] 흩어진 꿈 1

 

 

 

 

 

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쿄로 대학갈 것.

배구는 취미로만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질 것.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오이카와란, 오이카와에게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했던 친구다.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부터 함께였다고 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러 지금의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이 아니었을 때는 많았지만 같은 학교가 아닌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 클럽에 같이 들어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서 부활동을 했으니 어지간히 같이 있었다. 거기다 더해서 서로가 옆집이라 등, 하교를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잠자는 것만 제외하고 서로의 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이인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 것은, 그렇게 충동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이카와에게 나는 둘도 없는 소꿉친구고, 나에게도 오이카와는 그렇다. 우리 둘 사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오이카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다.






중학교 때였던가. 오이카와와 내가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게.

오이카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에 푹 빠졌던 오이카와는 어느샌가 승리에 집착했다. 그 해 봄고, 시라토리자와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영입하고 처음으로 결승전에서 붙었다. 올해 꼭 전국으로 진출하자며 파이팅을 외쳤던 오이카와는 새로운 벽을 부술 수 없었다. 아무리 블로킹으로 막고, 피해도 시라토리자와에 이길 수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생긴 커다란 벽이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집착했다. 그리고 다음 해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카게야마가 들어왔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세터, 같은 포지션의 천재의 등장에 오이카와가 초조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언제나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 사람의 속마음을 콕콕 쑤시던 오이카와의 미소에 금이 갔다.


이길 수 없는 라이벌의 등장, 천재의 등장.

초조해진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걱정했다.

우시지마에게 집착하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잔인했다.

무너지는 오이카와를 보며 절망했다.

카게야마를 증오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마침내 오이카와가 이성을 잃고 카게야마에게 달려들 때, 나는 오이카와를 막아섰다. 너와 우시지마의 일이 아니고, 너와 카게야마의 일이 아니다. 우리와 시라토리자와의 일이다. 나는 오이카와가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싫었다. 단순한 아는 사이, 친구 사이의 일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가진 관계가 두려웠다.


우시지마로부터 오이카와의 관심이 수그러질 때 쯤,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원래부터 교내 아이돌취급 받았던 오이카와가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집 앞에서 만나 학교까지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오이카와의 팔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오이카와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좋은 아침, 하고 인사했다.


어리둥절하게 여자애를 바라보는 나에게 오이카와는 여자친구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안녕 반가워 이와이즈미, 라고 말하는 여자애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멍청한 얼굴로 안녕, 이라고 했었겠지. 어제부터 사귀게 되었다고 오이카와는 덧붙였다. 춥다, 그지?라고 묻는 여자의 발간 볼에 오이카와가 손을 들어 감쌌다. 응, 춥네. 누가 봐도 갓 사귄 연인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감히 너가?


나는 도망치듯 오이카와를 제쳐 앞서 걸었다. 나 먼저 간다, 떨리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다. 오이카와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존재, 나에게 오이카와는 가장 가까운 존재. 이제는 그 관계가 영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이성이 아니었으므로 아는 사람, 그 정도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저 여자애는? 내가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형성된 그 관계를 부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나는...


홀로 괴로워하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머리는 뜨거웠고, 멍했다. 혼자 분노했고, 혼자 슬퍼했다. 저절로 굳는 얼굴을 조절할 수가 없어 핑계를 대고 등, 하교를 따로 했다. 오이카와는 여자친구와 자신을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고맙다고 했다. 핸드폰 액정을 깨질 듯 눌렀다.


내가 혼자만의 감정에 휩싸여 수천 번 울음을 참았을 때, 오이카와가 시무룩한 얼굴로 집에 찾아왔다. 우울한 목소리로 헤어졌다고 말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조금도. 왜냐하면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이성에 눈을 뜬 남자애. 나조차 오이카와를 생각하면 몇 초만에 아래가 뜨거워 지는데 오이카와라고 다를 바 없었다. 성에 눈을 뜬 오이카와. 여자를 경험한 오이카와.


그 날 이후, 오이카와는 우울한 기색이었다. 그 좋아하는 배구를 할 때도 평소와 같지 않아서 배구클럽 감독님이 내게 오이카와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하자 감독님은 나보고 어떻게 해보라고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때는 내가 오이카와를 위로해서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아진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유치한 질투였다.


‘이와이즈미가 어떻게 좀 해봐’라는 말을 며칠 동안 들었을 때쯤, 차곡차곡 쌓인 질투와 걱정, 원망이 한 번에 폭발했다.


“정신차려! 여자가 걔 한 명뿐이냐?”

“이, 이와쨩...”

“그렇게 멍하게 분위기 흐리게 할 거면 그만 가! 배구 때려치우고 헤어진 여자 친구한테 가던지 새롭게 사귀던지 어떻게 하라고!”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상은 그저,”

“가! 꼴도 보기 싫어!”


그건 결코 오이카와를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오이카와를 생각했다면 왜 여자친구와 헤어졌는지, 그렇게 후회하고 슬퍼할거면 용서를 빌던지 해서 다시 사귀라고 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오이카와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했다. 배구는 또 다시 핑계거리였다.


씩씩대는 소꿉친구가 자신을 위로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오이카와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주변에서 듣고, 또 들었을 말일 텐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오이카와는 다시 배구를 연습했다. 우시와카 쨩하고 토비오 쨩에게 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해, 이와쨩. 오이카와는 배구의 세계에 빠졌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 오이카와가 여자친구를 사귈까, 매일 걱정하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교내 아이돌, 미야기 현의 아이돌로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배구부 연습게임을 할 때도 교내 학생들이 찾아와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고 인터하이나 봄고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각자의 학교 배구부를 응원하러 온 타교생들이 오이카와를 응원하게 될 만큼, 오이카와는 인기를 끌었다. 나는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애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이카와가 여자애들에게 둘러 쌓여있을 때마다 속으로 조바심이 일었다. 저 여자애들 중에서 누군가와 사귀게 될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오이카와가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부터 오이카와에게 말을 험하게 했던 것 같다.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방법이었다. 누구보다 오이카와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좋아하면서 동시에 오이카와가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나와 같지 않음을 원망했다. 가끔 심할 때면 자책감이 들었다.


-이와이즈미, 그건 좀 심했어.


속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오이카와에게 풀었을 때, 하나마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나마키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생긴 친구였다. 배구부 팀원이기도 한 하나마키는 자상하고 기본적으로 성실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게이였다. 또, 내가 오이카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단 한사람이었다. 나를 나무라면서도 하나마키는 더한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자책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남몰래 하나마키의 뒤에서 운 적이 있다. 억울하고, 슬프고, 원망스러움이 내 안을 가득 채웠을 때다. 오이카와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가 아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와 카게야마에게 다시 집착하게 된 것도 아니다. 그저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내 안에서 한계에 다다른 듯 갑자기 터진 거다. 어쩌면 처음으로 같은 성향의 하나마키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 혼자 억누른 감정,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그 절박함. 그러나 오이카와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하나마키는 다정했고, 나를 좋아했다. 그건 게이로서 이성을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다르지만 친구로서 나를 좋아했음은 틀림없다. 하나마키는 가망 없어 보이는 사랑에 목매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응원해주지 못했다. 그저 얼른 짝사랑을 끝내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게이이고, 오이카와를 좋아한다는 말을 고백했을 때 하나마키는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했다.


하나마키는 중학교 때,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어쩌다 사귀게 되었고, 얼마 안 가 헤어졌다고 했다. 좋아해서 사귀었는데 왜 얼마 못 갔냐는 내 질문에 하나마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노말은 게이완 달라. 노말이 게이와 사귀는 건 그저 잠깐의 장난에 불과해. 하나마키와 사귀었던 그 노말은 하나마키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었다. 하나마키가 게이였다는 것에 놀랐고, 신기했고, 친구와 멀어지는 것이 그때는 두려웠다고 한다. 한계가 보이는 관계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같은 성향이어서 그런지,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어서 그런지 나는 하나마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쨩 변했다며 툴툴거렸다. 언젠가 오이카와와 하교하는 길에 오이카와가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맛키쨩이 나보다 좋아, 이와쨩?


나는 덧없이 웃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알까. 내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너를 좋아했는지 알까...


-닭살 돋는 말 하지 마, 쿠소카와!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곧 이상하게 허물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이와쨩이 맛키쨩하고만 노니까 그렇지.


나는, 새삼스럽게 절친의 친구를 질투하는 오이카와가 미웠다. 오이카와가 내게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질투까지

일까? 친구 사이가 깨지지 않는 한, 거기까지일 뿐일까. 그 사실에 허무하고, 그저 친구의 친구에게 질투하는 것임에도 조금 기쁘다는 사실이 우울했다.


-하나마키가 너랑 같냐.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너 뿐이야, 라는 듯한 말에 오이카와는 허물어진 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덮었다. 그치? 이와쨩한테는 오이카와상 뿐이지? 오이카와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으쓱했다.


맞아. 나에게는 너 뿐이지.

그게 나는 너무 좋으면서 슬프다.



그리고 고3 겨울, 준결승전에서 카라스노와의 시합에서 패배했다. 마지막 공, 오이카와가 나에게 주었던 그 공은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 팀은 졌고, 카라스노는 이겼다. 시합이 끝나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등을 오이카와가 세게 쳤다. 곧이어 하나마키, 마츠카와가 쳤다. 결국 6년 동안 가고 싶었던 전국 진출이라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는 오이카와의 꿈을 함께 하지 못했다. 앞으로 함께 이뤄갈 꿈이 있을까.


윗옷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고 정렬했다. 응원팀 앞에 서 인사를 하기 전, 오이카와의 시선이 잠깐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각자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오이카와를 마주볼 자신이 나지 않아 모른 척 오이카와의 옆을 스쳤다. 이와쨩, 하는 오이카와의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분하겠지. 누구보다 분할 사람이 오이카와일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공이 떠있건, 떨어지는 순간 끝이야. 떨어지는 공이 잔인하다. 6년 동안 간절하게 원해올 만큼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춰서 바닥에 떨어지지 말아 주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6명이 강한 쪽이 이기는 거야,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나였다. 오이카와는 알까. 강한 6명이 더 강할 거라는 걸. 내가 좀 더 배구를 잘했으면 결과는 바뀌었을 지도 몰라, 덧없는 생각이 줄을 이었다.


-이와이즈미.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내 위로 하나마키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인 내 어깨 위로 하나마키의 턱이 얹혔다. 힘없이 늘어진 손이 하나마키의 손으로 덮어졌다.


-울지마. 내가 있어.

-......

-그동안 잘 했어. 이와이즈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마지막 공이 떨어지는 잔상인 것 같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오이카와와 나를 이었던 가장 강렬한 유대. 우리들이 꾸었던 오래된 꿈. 흩어지는 시야가 조각난 꿈인 것 마냥 허무하다.





(6113자)

'未完 > 흩어진 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이와] 흩어진 꿈 4.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5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4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3  (0) 2016.11.07
[오이이와] 흩어진 꿈 2  (0) 2016.11.07
Posted by 005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