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올가미
아카아시는 최근 보쿠토 선배가 신경쓰인다. 원래도 텐션이 쉽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선배이기에 다른 선수들보다 관심이 필요한 상대이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보쿠토 선배에게 눈길이 간다.
"헤이헤이헤이-! 완전 깔끔하게 들어갔어! 봤어, 아카아시?!"
"네, 보쿠토 선배."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등에 팔을 두르고 떠들썩하게 말을 걸더니 칭찬 받아 기쁜듯 어깨를 들썩였다. 덩달아 아카아시의 어깨에 보쿠토의 어깨가 닿는다. 아카아시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보쿠토와의 거리를 좁혔다. 땀에 젖은,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리다.
연습이 끝난 뒤, 자율연습을 남겨둔 때 갑자기 2학년 중 한 명이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주전은 아니지만 꽤나 열심히 하는 부원이라서 연습을 같이 하려나 했다.
"저, 죄송한데 보쿠토 선배. 같은 반 여자애한테 부탁받아서요..."
"우왓? 고마워! 아, 고맙다고 전해줘!"
후배는 자기가 건네는 선물도 아닌데 인사를 받자 쑥스러워하며 연습 열심히 하세요! 하며 돌아갔다. 보쿠토는 후배가 건넨(정확히는 후배의 반 친구가 준) 작은 종이봉투를 흔들거렸다.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글벙글 웃으며 아카아시!하며 다가온다.
"이것봐! 나 선물 받았어, 짱이지!"
"...네. 그런데 오늘은 연습 안하시나봐요?"
"앗! 아냐, 지금부터 할거야. 이거 두고..."
보쿠토는 종이봉투를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에서 봉투를 가져갔다. 벽 가까이에 놓인 물병들 사이에 봉투를 툭하고 내려놓았다.
"됐죠? 가요, 보쿠토 선배."
"응! 토스 마구마구 올려줘, 아카아시!"
네, 하고 대답한 아카아시는 흘끗 바닥에 놓인 보쿠토의 종이봉투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여자애가 준 선물이라, 아카아시는 왠지 보쿠토가 여자들에게 저런 선물을 받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면 얼마나 안다고 선물을 주는거지? 보쿠토 선배가 부담스러워 할텐데.
아카아시는 사실, 보쿠토 선배가 선물을 받는걸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보쿠토 선배는 누가 주는지도 모르면서 왜 받는거지.
그리고 아카아시는 왜 자신이 이렇게 기분이 나쁘고, 최근들어 보쿠토 선배에게 평소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이유를 알아냈다. 모든 연습이 끝난 뒤, 부원들이 일찍이 돌아간 탈의실에서였다. 주장과 부주장이기에 체육관과 탈의실 문을 잠가야 했기에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대부분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다. 물론 모든 정리와 문단속 등 총괄적인 관리는 부주장인 아카아시의 몫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보쿠토가 앗, 하며 아카아시를 돌아봤다.
"종이봉투 놓고 온 것 같아!"
그 작은 종이봉투를 체육관에 놓고 온 것이다. 아카아시는 옷 다 갈아입고 같이 가죠, 라고 말하며 옷을 마저 갈아 입었다. 손이 빠른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준비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옷을 갈아입는건 느리지 않지만 벗어놓은 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기에 사물함과 가방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카아시는 땀에 젖어 차갑게 식은 보쿠토의 옷을 들어 대충 접었다. 어짜피 가서 빨 옷이다.
"종이봉투에 뭐 들어있을까나?"
기대된다는 어투의 말이 거슬렸다. 뭐가 되었던 그게 중요합니까? 라는 말이 입에 맴돌았다.
"헉! 혹시..."
"예?"
바지를 갈아입다 말고 보쿠토는 눈을 동그랗게 뜬채 아카아시를 바라봤다.
"혹시 러브레터라던가..."
"...에... 러브레터..."
"나 고백받는거야??! 아카아시! 나 고백받아?"
"...그걸 저한테 묻는겁니까?"
듣기에 따라 차갑게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보쿠토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워낙에 눈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와 별개로 아카아시의 냉정한 어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탓이다. 오히려 아카아시는 스스로의 발언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보쿠토 선배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살짝 돌아본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뒷통수를 바라보다, 보쿠토의 목이 살짝 발그래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슬쩍 올라간 광대를 보아하니 분명 웃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백받으면 어쩌시려고요?"
"에? 그야... 잘 모르겠는데."
"...... 모르겠다고요?"
보쿠토는 바닥에 앉아 레그슬리브를 벗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 기대에 들떠있는 것 같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귀여운 애라면 사귈 수 있겠지?"
"헤에, 귀여운 애라면?"
"응! 한번도 사귀어본 적 없는데, 한번쯤은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보쿠토는 드러난 종아리와 허벅지를 마사지하면서 실실 웃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벗어놓은 레그슬리브를 돌돌 말아 보쿠토의 가방에 넣고 바지를 벗으려는 보쿠토의 종아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보쿠토가 고개를 들자 아카아시는 마사지 해드리겠다며 종아리를 주물렀다. 보기보다 손이 작은 보쿠토와는 다르게 아카아시의 손은 꽤 컸다. 배구부원 중에서도 손꼽히는 크기의 손은 쭉쭉 뻗은 학의 다리와 같이 섬세하고 가늘었다. 그러나 꾹꾹 종아리를 주무르자 드러나는 손등의 혈관은 남성임을 보여주어, 그 간극이 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아카아시와는 이미지가 다른 손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종아리를 마사지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카아시가 무릎 뒤의 파인 곳을 둥글게 누르고 돌리자 보쿠토는 다리를 움찔거렸다.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만져진 적이 없는 곳은, 원래도 예민했지만 아카아시의 손에 더 예민함을 느껴버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밀려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보쿠토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보쿠토 선배."
"응. 아카아시 이제 괜찮아, 그만해."
아카아시는 대답 대신 보쿠토의 허벅지로 손을 올렸다. 쓸어올리듯 이어지는 손길에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당황스럽게 쳐다 봤지만 아카아시는 조용히 허벅지를 주물거렸다. 아카아시, 이상하니까 이제 그만...
보쿠토가 다리를 뒤척였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다리에 놓인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힘을 주어 보쿠토의 다리를 자기 쪽으로 이끌었다. 아카아시가 다리를 마사지해주느라 보쿠토의 다리 사이에 있었기에 어쩐지 모양새가 이상했다. 보쿠토의 허벅지는 아카아시의 팔에 둘려진 채 아카아시의 허리깨에 있고, 자세가 무너져 똑바로 앉을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 비켜."
보쿠토는 다리에 힘을 주어 아카아시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불편한 자세때문에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끙끙대는 보쿠토의 모습은 아카아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쿠토가 챙김을 받는 존재라고는 해도 아카아시와 보쿠토 사이에는 선배와 후배, 3학년과 2학년, 1살 차이라는 나이 차가 있었다. 아카아시가 어떻게도 좁힐 수 없던 그 차이가 왠지 지금 좁혀진 것 같았다.
사실 아카아시는 아까부터 왠지 자신 앞에 있는 선배가 못마땅했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를 상대로 사귀는 상상따위를 하다니, 괘씸하다. 작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해 배구부에 들어온 뒤, 그리고 보쿠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자신이 곁에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귀찮게 했던 이 선배가 이제와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려고 한다니 참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무엇에 기분 나쁜지도 모르고 보쿠토에 날을 세웠다.
이 바보같이 단순한 선배는 진짜로 그 알지도 못하는, 선물조차 남에게 떠미는 여자와 사귈 수도 있다. 그만큼 생각이 얕고 앞일따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해보자는 사람이다. 그 결과가 나중에 어떻게 되던,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보쿠토 선배."
"응, 아카아시. 이제 비키라니까...?"
보쿠토는 눈 앞의 후배가 낯설다. 은근하게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이 자꾸 신경쓰이고 얼른 아카아시가 손을 떼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 보쿠토의 희망사항과는 반대로 아카아시의 손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짧게 밀려 올라간 바지 안으로 슬쩍 침범해왔다. 아카아시! 보쿠토가 놀라 양 손으로 아카아시의 어깨를 밀었다.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에, 그게 그런 의미가 되는건가...? 그보다 아카아시 손..."
아카아시는 허리에 둘러져 있던 보쿠토의 허벅지를 확 잡아 당겼다.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던 보쿠토는 꼼짝할 새 없이 바닥에 누워졌고, 아카아시가 그 위를 짓누르듯 덮쳐왔다. 보쿠토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느리게 다가오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보쿠토의 손보다 더 빨리 아카아시의 입술이 보쿠토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러워, 보쿠토는 자신이 남자인 후배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것보다 그 감촉의 부드러움에 놀랐다. 뒤이어 놀라 아카아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카아시의 입술이 더욱 깊이 닿아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아랫 입술을 빨다, 혀를 내밀어 보쿠토의 입안을 침범했다. 멍하니 벌어진 보쿠토의 입술 사이로 아카아시의 혀가 보쿠토의 것과 맞닿았다. 보쿠토는 멍하니 아카아시의 혀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원래부터 제 영역인 양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입 안 이곳 저곳에 영역표시하듯 닿아왔고, 깊어지는 키스에 보쿠토는 끙끙거리며 숨에 벅차했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아카아시가 숨쉬어요, 선배 하고 속삭였고 다시 입을 맞춰왔다.
부드럽고, 미끌거리는데. 보쿠토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 좋아. 자신의 입 안을 배회하는 아카아시의 혀가 입천장의 여린 부분을 비벼올 때마다, 더이상 깊게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올 때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간질거리고, 기분 좋아. 보쿠토는 눈을 감고 자신이 누구와 키스하고 있는건지에 대해 생각을 접고 아카아시의 목에 손을 둘렀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에 키스하며, 진짜 이 선배 어쩌면 좋으냐는 생각을 했다. 보쿠토가 자기에게 매달린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이렇게 쉽게 키스를 허락하는거냐는 괘씸함이 아카아시를 괴롭게 했다.
"하, 하아... 아, 아카아시."
보쿠토는 벅차오르는 숨을 감당하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가쁜 숨을 내쉬는 입술이 자신과의 키스로 문란하게 젖어있다. 아카아시는 아래가 묵직해져옴을 느꼈다.
"보쿠토 선배.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제가 할게요."
"하아, 응...? 뭐를..."
"뭐가 되었던간에 이제부터 저와 사귀어요."
"응...? 아카아시가 나랑?"
"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사귈 바에야 저랑 사귀자고요."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시선이 떨렸다. 내가 아카아시랑? 아카아시가 나랑 사귄다고?
"왜?"
"그야, 제가 싫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싫으냐는 보쿠토의 물음은 아카아시에게 막혔다. 두 번째 키스는 아까와는 달리 느긋하게 다가왔다. 보쿠토는 자신과 눈을 맞추며 다가오는 아카아시의 눈을 보며, 진짜로 아카아시와 키스를 했고, 다시 하려는 것을 실감했다. 한 학년 아래의 남자 후배와 키스를 하는 것이다. 입술이 맞닿았지만 아카아시는 눈을 감지 않았다. 보쿠토 역시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짧게 입술을 머금는 베이비키스가 간지러웠지만 어쩐지 좋은 느낌이었다. 보쿠토는 눈을 감았다.
보쿠토가 기분이 좋아 아카아시와의 키스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아카아시는 여전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최근 들어 보쿠토 선배에게 관심이 갔던 것은 맞지만, 보쿠토에게 키스할 거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보쿠토 선배와 입을 맞추자마자, 가슴이 쿵쿵거리며 두근거렸다. 이미 키스를 하고 있는데도 더, 조금 더 키스를 하고 싶어진다. 눈을 감은 보쿠토의 얼굴을 보며 아카아시는 이 선배가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한다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여자애와도 이런 식으로 키스한다면 자신은 그런 보쿠토 선배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같은 남자인 보쿠토 선배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것이 싫으냐면, 그러니까 왜 선배가 여자친구를 사귀는게 못마땅하냐면,
아카아시는 입을 뗐다. 완전히 키스에 취해 눈을 감고 있던 보쿠토가 눈을 뜬다. 평소와는 달리 성적인 흥분으로 발갛게 물들인 볼, 풀어진 시선, 타액에 적셔진 입술과 그 사이로 붉은 혀가 보인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보쿠토 선배에게 들릴까 아카아시는 두려웠다. 단순히 키스를 해서 가슴이 이렇게 뛰는 것일까?
“아카아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카아시를 똑바로 바라보는 보쿠토 선배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깨달았다. 이 성가신 선배가 자꾸 신경 쓰였던 이유를 알아 차렸다. 내가 당신을 보는 것만큼, 내가 당신을 신경 쓰는 것만큼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의 선물에 웃지 말고, 나를 보고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이 좋으니까.
이 단순한 남자를 뺏길까 두려웠던 거다. 누구에게 고백을 받으면 깊이 생각도 안하고 받아들일 것만 같아서 조바심이 일었던 거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보쿠토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저 쾌락을 느껴서 자신에게 기대오는 것도 좋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보쿠토 선배가 나에게 기대올 수 있다면, 아직은 참을 수 있다.
아카아시는 전보다 더 깊이 보쿠토에게 키스했다. 눈을 감은 아카아시를 보다, 보쿠토도 눈을 감고 아카아시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슬쩍 감겨오는 보쿠토의 혀를 느끼며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이 남자가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 서서히, 내가 없으면 무엇도 못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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