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와] 흩어진 꿈 2

 

 

 

짝사랑하는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와 오이카와가 사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는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여자친구에게 그러했듯이 오이카와의 손이 내 볼을 감싼다. 춥지, 하고 웃는 미소가 아름답다. 오이카와의 빛나는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면 깨닫는다. 어두운 공간, 오직 빛나는 오이카와.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웃어주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전 여자친구였지. 꿈임을 깨닫는다. 부서진 꿈에 잠이 깼어도 눈을 뜨기가 힘겨웠다.


그런 꿈을 꾼 다음부터 난 바보같이 오이카와가 나에게도 그렇게 웃어준 적이 있을까 궁금했다. 언제나 방긋거리며 웃고 다니는 오이카와였지만 그런 미소를 본 적은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다. 괜히 오기가 나서 손으로 오이카와의 입을 죽 늘어트리며 웃게 해 보기도 했고, 어디선가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얼굴을 확인했다. 오이카와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웃었다. 누군가가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웃는 웃음은 결국 보지 못했다.


몇 개월 동안 오이카와의 웃음소리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누굴 보고 웃는지, 왜 웃는지, 혹시라도 그때 그 웃음을 짓고 있는지. 날 보고 웃을 땐 어떠한지. 오이카와의 전 여자친구이자 첫 여자친구는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겨울이 되면 ‘춥네’, ‘춥지’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머리에 윙윙 울렸다. 오이카와가 배구에 다시 빠지게 되었지만, 어쩌다 등굣길에, 시내에서 그 여자애를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초조하고, 이런 초조함을 느끼는 내가 싫었다.


오이카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를 때, 나는 종종 오이카와와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언제나 곁에 있는 든든한 소꿉친구. 옆집에 사는 친구. 배구를 함께 하는 친구. 주장과 부주장. 지금까지의 관계를 거슬러서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생각하면 설렘으로 벅찼던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순 없을까.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와 하나마키를 만나고, 포기하라는 하나마키의 말에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 나와 오이카와는 연인이 될 수 없다. 그건 하나마키가 게이란 것을 알게 되고, 오이카와에 대한 내 속마음을 고백하고,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맘속으로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 실패로 끝났을 때,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마키에 기대 훌쩍거리며 나는 결심했다.


-하나마키.

-응.

-이제 결심했어.

-......

-이제 끝낼거야.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꿈이었던 전국 진출. 그만큼 오래 나의 꿈이었던 오이카와. 우리의 꿈이 끝남으로서 나도 나의 꿈을 접기로 결심했다.




눈물 질질 짜며 독하게 결심했음에도 나는 당장 오이카와를 포기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혼자 아프고, 자책하고, 심지어 상대를 원망하게 만드는 짝사랑을 좋아서 계속 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결심 이전에 수천 번의 결심이 있었다. 항상 같이 등교하는 길, 아직 끝나지 않은 배구, 앞으로 있을 대학입시. 아직 곁에 오이카와가 있었기에 단단하게 마음먹었던 결심은 쉽게 부스러지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하나마키는 그저 바보라고 불렀다. 바보야, 아직도 뭐하고 있어. 세 살 바보는 여든까지 간다. 나는 욱하는 마음에 하나마키의 등짝을 때렸다. 그래도 하나마키는 어서 포기하라던가, 그때의 결심은 뭐였어, 라던가 나무라지 않았다.


-대학 어디 갈 거야?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진로 조사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의자를 뒤로 돌리고 앉아 있는 하나마키가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배구부는 끝났지만 대학이 남았다. 오이카와는 일찍이 도쿄의 유명한 사립대학에서 스포츠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한 번도 전국에 진출한 적이 없는 미야기의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몇 개의 대학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감독님이 말했다. 추천을 받았지만 선택지가 많았기에 방과 후 오이카와는 감독님과 상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도 센다이 시의 한 대학에서 추천을 받았다. 오이카와는 반드시 거절하고 도쿄로 가자고 했다. 이와쨩, 언제나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철없는 어린 애 같은 투정이었다.


-음, P대학교 추천받긴 했는데.

-갈 거야?

-아니. 도쿄로 갈 거야.


하나마키는 손으로 장난치던 볼펜 돌리기를 멈췄다. 톡톡, 하고 책상을 두들겼다. 저기요, 이와이즈미 씨.


-바보, 바보 거렸더니 진짜 바보가 된 거야?

-아니야, 너가 생각하는거.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


하나마키는 아마도, 내가 오이카와를 따라서 도쿄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에 미련한 소꿉친구 역할 계속 하기로 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이카와 따라서 가는거 아니야.

-그럼.

-예전부터, 대학은 도쿄로 가고 싶었어. 가도 전문대학이겠지만.

-기각.

-뭐?

-안 된다고. 도쿄는 안 돼, 다른 데 알아봐.


물론 하나마키가 온전히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단호한 대답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왜 도쿄로 대학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상한 침묵이 이어지다, 하나마키가 물었다. 빙글빙글, 하나마키의 손에서 돌아가다 톡톡, 책상을 치던 볼펜은 다시 도로록, 책상 위를 굴렀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하나마키는 이상한 대답을 들은 것 마냥 나를 쳐다봤다. 웃기고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정말로 언젠가부터 도쿄에 가고 싶었다. 도쿄는 넓다. 미야기에 비해선 좁디 좁은 땅이지만 어쩐지 넓은 곳 같다. 도쿄에 가면, 미야기에서의 일들은 과거로 남을 뿐,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 오이카와쯤은 단숨에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어디 대학?

-생각해둔 대학은 딱히 없는데. 성적에 맞춰서 가야 하니까.

-그럼 나랑 같은 대학으로 가, 이와이즈미.

-어?

-또 오이카와 바보가 되게 할 순 없으니까.


하나마키는 씩 웃었다. 어차피 배구로 대학 가려는 마음은 없었기에 2학년 때부터 가려고 생각했던 대학이 있다고 말하며 진로조사서에 M전문대학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내 진로조사서도 가져가 M전문대학을 적었다. 깔끔한 글씨는 하나마키의 것과는 달리 꾹꾹 눌러써져 있었다.


하나마키라면 옆에서 내 짝사랑이 빨리 끝나게 도와줄 것이다. 다정하지만 현실적인 하나마키. 오이카와에게 가졌던 손톱만큼의 기대도 무참히 뭉게버리는 잔인한 하나마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본심이 슬그머니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마키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깔끔한 하나마키의 글씨, 진하게 적힌 글씨가 너무 단호해 보였다.


감독님과의 상담이 끝났는지 오이카와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야? 묻는 하나마키에게 말없이 오이카와의 이름이 빛나는 액정을 보여 주었다.


-어.

-이와쨩! 어디야? 나 방금 감독님하고 얘기 끝났는데.

-어, 나 아직 학교. 하나마키랑 교실에 있는데.

-...맛키쨩이랑?

-응.


하나마키가 가방을 매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놓인 진로조사서를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일어났다. 전화기 너머로 오이카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앞서 가는 하나마키의 등을 보며 나는 괜히 머쓱함을 느꼈다. 하나마키는 내 짝사랑을 알고, 이제는 그만두겠다는 호기로운 결심의 증인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오이카와와 나, 하나마키가 같이 있을 때면 어딘가 눈치가 보였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툭 꺼내 바닥에 놓은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 하고 나를 불렀다.


-왜?


꾹꾹, 신발의 뒷굽이 눌리지 않게 손가락을 걸고 신발을 신은 하나마키는 밖을 힐끔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나랑 같은 대학 간다는거, 오이카와한테 말하지 마.

-어... 왜?

-그냥. 오이카와가 몰랐으면 좋겠어.


먼저 간다, 하고 하나마키가 등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 교문 앞에 오이카와가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땅바닥을 괜히 툭툭 차던 오이카와가 하나마키를 발견했는지 맛키~라고 부르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오이카와를 지나쳤다. 오이카와는 멀어지는 하나마키를 불렀지만 하나마키는 뒤도 안돌아본다.


-맛키!

-야.

-어?! 이, 이와쨩! 아니 맛키가 오이카와상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가!

-간다.

-이와쨩도 오이카와상의 말 무시하는거야?!


오이카와는 삐진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카라스노와 시합에서 진 후, 이렇게 싱글벙글하게 웃는 건 처음인데.


-뭐 좋은 일 있냐? 기분 나쁘게 실실 웃고 있게.

-헤헤, 이와쨩 귀신! 어떻게 알았어, 오이카와상 기분 좋은거!

-뭐야.

-후후훗. 놀랍게도! 오이카와상이 도쿄 S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 S대학교로 간다고?


S대학교라면, 나쁘지 않은 학교지만 오이카와는 더 좋은 학교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아는 대학교만 해도 T대학교라던가, O대학교라던가... S대학교 배구팀이 그렇게 강한 팀도 아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명해보라는 눈빛을 보내자 오이카와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짐작했는지 실없이 웃었다.


-S대학교로 가면, 장학금이라든가 주택지원 같은거 받을 수 있데.

-그...게 있으면 좋지만, 딱히 그런거 없어도 아줌마가 지원해주시잖아...?

-흠, 아니! 나 도쿄가면 자립할거니까!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자립하겠다고,

-이와쨩하고 같이 자립할거야.

-...아?


말문이 턱 막혔다. 자립이라니, 오이카와네 형편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은데 나랑 자립한다고? 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쿠소카와.

-어째서, 이와쨩?

-왜라니. 그런 일로 니 진로를 정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다른 대학으로 가도, 이와쨩 나랑 같이 살 거지?

-뭐?

-도쿄까지 가서 오이카와상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살면 외로워서 죽어.


오이카와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알고 있다. 저 녀석이 이럴 때면, 괜히 쳐진 눈썹을 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언젠가 장화신은 고양이에 나온 그 못된 사기꾼 고양이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때면, 솔직히 어떤 요구를 해도 거절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애의 얼굴이 바로 앞이고, 눈은 쓸데없이 초롱초롱하고, 투정을 부리듯 이와쨩, 하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도쿄에 가면...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이와쨩, 오이카와상이 외로워 죽어도 괜찮은거야?

-웃, 기지마.

-오이카와상 진심인데?

-난, 나는... 나는, 싫,

-이와쨩.


나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갈색 눈에 내가 비친다. 꼴사납게 부들거리고 있다. 덥썩하고 내 손을 쥔 오이카와의 손이 부들거리는게 보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손이 떨리는게 아니다. 내 손이, 내 손이 나도 모르는 새 잘게 떨리고 있다.


-이와쨩. 왜 떨어?

-무슨. 추, 추우니까! 니, 니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썰렁해서, 그래서.


횡설수설, 되는 데로 내뱉은 입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손이 잡혀 있다. 오이카와는 꼬옥, 손에 힘을 주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와쨩, 못생겼어.


집에 가자! 오이카와는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머리가 멍했다. 설마 진짜로 같이 사는건 아니겠지?


-야, 잠깐. 잠깐, 쿠소카와!


때마침 온 버스를 보고 오이카와가 뛰어, 이와쨩! 하며 뛰었다.






나는. 나는 도쿄로 가서, 미야기를 떠나, 오이카와에게서 멀어지고, 짝사랑을 정리하고...

여전히 오이카와의 친구로 남겠다고 결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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