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와] 흩어진 꿈 6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했어도 아침 해는 뜬다. 전날 밤을 설친 탓인지 반쯤 친 커텐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아침 연습을 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며칠 새 몸이 게을러진 기분이다. 찌뿌둥하고, 일어나기 싫다. 학교는 더더욱 가기 싫었다. 얼마 후에 보아야 할 오이카와의 얼굴이 무서울 뿐이다.


결석할까.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 봤다. 몽롱한 정신에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난다. 나는 어제 오이카와와 절교했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합의 하에 끝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이 그만두면 그 관계는 이미 운명을 다 한거나 마찬가지다. 오이카와는 어제,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오이카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났으니, 어느 하나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는 오이카와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는 언제나 모 아니면 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고 싶기도 하고, 좋아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고백하고 싶기도 하고, 고백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하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기 힘들어서 그저 흐르는 대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고백하고 싶지 않았지만 고백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결정이었지만,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나와 오이카와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변하는 거다. 내가 친구라는 관계를 버렸으니, 남은 것은 오이카와의 선택뿐이다. 오이카와는 과연 뭐라고 할까.


오이카와네 집과는 옆집이라 거의 항상 같이 학교에 가지만, 딱히 시간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집에서 나온 사람이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한다. 어쩔 땐 일찍 가기도 했고, 어쩔 땐 지각도 했지만 늘 함께 했다. 아침 7시 반, 아직 벨이 울리지 않았다. 7시 35분이 되면 지각을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출발해야 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별 의미 없는 시간은 기다려도 잘 흐르지 않았다. 1분이 1시간과 같이 느껴질 때쯤에 벨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오이카와는 없었다. 대신 오이카와네 엄마가 있었고, 어머니 계시냐고 물었다.


-어머, 근데 하지메 아직 학교 안 갔니? 벌써 간 줄 알았는데.

-이제 가려구요.

-토오루는 일찍이 나갔던데. 별일이네, 같이 안가고.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오이카와네 엄마의 말에 적당히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이카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친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해도 완전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오이카와가 나를 잡고 설명해보라고 다그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거나 최소한의 이해는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닥친 상황은 아주 작게 피어오르던 기대를 후, 하고 날려 보냈다. 언제나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하다. 먼저 내쳐버린 주제에, 뭘 기대했던 것인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일에 일희일비하다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늘 타던 버스가 오는 시간을 빗겨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도착해 버스를 아직 타지 못한 것인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앞을 내버려두고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여서, 말을 걸지 않고 그 뒤에 줄을 섰다. 오늘따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거리에는 둘만이 우두커니 존재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분을 기다렸을까, 버스가 도착했다. 정류장과 마찬가지로 버스 안에도 사람이 별로 없어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먼저 버스에 탄 오이카와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오이카와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2인석 자리에 앉았다. 아는 척 하지 않는다는 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15분. 평소와 다름없는 거리의 풍경을 보다가 옆자리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표정한 표정의 오이카와는 성질을 내듯 옆자리에 놓여 있던 내 가방을 바닥에 툭, 하고 던지듯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다리를 떨며 앞을 보고 있었고, 보란 듯이 입을 내미는 모습이 평소와 같았다. 표정부터 행동까지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한껏 내보이고 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학교에 다가올수록 오이카와의 발은 정도가 심해지며 달달 떨렸고 입술은 나올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나왔다. ‘다음은 아오바죠사이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자 오이카와는 떨던 발을 멈추고 입도 제대로 했다. 그리곤 내 쪽으로 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피할 수도 없이 정면에 자리한 오이카와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어린 애 같은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표정이 있지도 않았다. 오이카와는 버스가 멈추기 직전까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와쨩은 어떻게 아무 말도 없어?

-......

-내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왜 말이 없어...


버스가 멈춤과 동시에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제일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뒤늦게 내려온 내 앞에 오이카와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방과 후에, 집에 같이 가.

-......어.

-맛키쨩하고 같이는 안 돼. 나하고만 같이 가는 거니까.


그래, 라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교문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던 나는 그런 오이카와의 등을 얼마동안 보고 있다가 뒤늦게 발을 떼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거에 안심해야 하는 걸까? 아는 척을 해줘서 다행이라고, 잠깐이지만 투정 부리듯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는 것에 기뻐했어야 하는 거였나.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오이카와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날이 너무 많아서 나는 판단을 내리길 포기했다. 그저 사실 그대로, 그랬구나 하고 기억에 남겨둘 뿐이다.


어제와 같이 일상적인 하루가 흘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하나마키가 잠깐 찾아 왔지만 대화를 나눌 기력이 없었다. 하나마키는 어제의 일로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말없이 옆에서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다가 반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하나마키가 어제 거짓말 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뭐 하러 오이카와한테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해서 이 사단이 나게 했냐고 나무라려다가 그만 뒀다. 하나 하나 따지기엔, 방과 후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마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와이즈미. 같이 가자.

-아, 오늘은 안돼.


수업이 다 끝나고 하나마키가 다시 찾아 왔다. 어지간히 나를 걱정하는 듯 해보여서 어제의 일을 얘기해줄까 하다, 반 뒷문에 서 있는 오이카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뒷문에 계속 서서 하나마키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가려던 애들이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의 분위기에 발을 돌려 앞문으로 발을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랑 할 말이 있어서. 미안, 내일 보자.


하나마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이카와 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앞문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말도 없고 미동 없이 서 있던 오이카와에게 다가가니 불량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렸다. 평소였다면 무슨 재수 없는 행동이라고 타박할 법 했지만 조용히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장난치기 어려웠다. 먼저 발을 떼는 오이카와를 따라 걸었다. 모두가 바쁘게 하교하는 복도는 어수선했다. 복도를 지나쳐 신발장으로 가는 내내 마주치는 배구부 후배라던가, 같은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나와 인사하면서도 평소와 다른 오이카와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마도 같이 하교하는 길이 아니었으면 나를 붙잡아 오이카와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엔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고, 나 또한 오이카와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아침의 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결과든 오이카와와 나의 관계가 변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부디, 최악의 상황은 피하길 바랄 뿐이다.


버스를 타고,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잠깐 얘기 좀 하자며 근처 공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서로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원은 어렸을 적부터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이다. 여기서 함께 탐험 놀이도 했고, 배구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좀처럼 온 적이 없지만 잠깐 안 왔다고 낯설게 느껴질 만큼은 아니었다. 원래도 크기가 큰 공원은 아니었기에 사람이 별로 없지만, 쌀쌀한 날씨 탓에 공원 안에는 운동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근처 나무 벤치에 앉았다. 툭툭,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


벤치에 앉은 후, 잠시 조용하던 오이카와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어제 이와쨩이 했던 말 말인데...

-어.

-생각해봤는데, 이와쨩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별로,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정말?

-...응.


나는 거짓말을 했다.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날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중학교 3학년 봄이었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학교의 모두가 들떠 있었다. 학교로 들어가는 길에 줄지어져 있는 벚꽃나무들이 새하얀 꽃을 피워내고, 바람에 꽃잎이 흩날려 거리가 하얗게 물드는 봄이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것 같은 감각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움직이고 주위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3월의 어느 날, 매일 보는 얼굴인데 그날따라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날, 다른 학교와의 연습 시합에서 오이카와가 올려준 토스를 내가 성공시키고 마침내 이겼을 때, 오이카와는 성공했다! 라는 표정으로 나를 가볍게 안았다. 어깨에 둘러진 팔은 배구를 하느라 땀에 축축해져 있었고 나 또한 땀을 흘려 헉헉 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쿵쿵,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배구를 하느라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인지 오이카와 때문인지 헷갈렸다. 마주 닿은 몸에 오이카와의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 나처럼 크게 뛰는 심장소리가 귀에 박혔다. 오이카와가 멀어지고, 천천히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3학년이 되고 첫 시합에 이겨 흥분에 겨워하는 부원들과 오이카와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모두가 들떠있는 가운데 내 귓가에 고동소리가 맴돌았다. 쿵쿵, 여전히 가슴이 뛰었고 어수선한 주변에서 오이카와만이 시선에 꽂혔다. 나는 불현듯 오이카와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오이카와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오래 간직해온 마음을 오이카와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서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에 꽤 오랫동안 우정이 아닌 감정이 섞여 왔다는 것에 대한 오이카와의 반응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적당하게 대답한 내 말에 오이카와는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어 보였다.


-생각해 봤는데, 이와쨩이 나를 좋아한다는거...

-어.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걸 착각한 거 아냐?

-...뭐?


오이카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임을 알게 했다. 나는 오이카와가 어제의 고백을 오이카와의 상식선에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다. 몇 시간 사이에 몇 년 동안 쌓아 온 마음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울컥 분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양 손을 꼼지락대었다. 한동안 말을 고르는 듯 조용하더니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는데, 이와쨩이 나를 연애 상대로 봤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

-어... 뭐, 오이카와상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하하.

-......

-나를 친구로서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 마음을 연애감정이라고 착각한게 아닐까?

-......


오이카와의 말은 나 또한 몇 년 동안의 짝사랑을 하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내가 오이카와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인지 연애 상대로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차츰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단정 짓게 되면서 내 감정이 친한 친구에 대한, 남들보다 조금 더 밀도 있는 애정이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가끔씩 닿아오는 손길이나, 마주치는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리면 부정하고 부정하다 기어코 인정하고 말았다. 이 감정은 친구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쓰리는 마음은 상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봐주길 바라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라고.


-어제 충동적으로 말해버렸지만...

-...응.

-잠깐의 착각으로 너한테 쉽게 고백한 거 아니야.

-......

-착각이 아닐까 고민했던 때는 이미 지났어, 나한테는.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꼼지락대는 양 손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에 빠지면 오이카와는 금세 자신만의 세계로 빠진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가려진 시야에서, 대답을 고르고 있겠지. 그 대답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서웠지만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의 고백으로 나는 어떻게든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우리,

-...어.

-친구로는 안 되는 거야?

-......

-지금까지처럼 친구로... 지내는건 안 되는 거야?

-...나에겐 무리야.


이와쨩! 오이카와는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오이카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잔인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를.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너와의 관계를 포기하려는 나를 오이카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이카와의 눈이 원망으로 가득 찼다. 그 눈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워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더는 괴로움에 힘들어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오이카와와 인연을 끊더라도, 지금은 오이카와의 곁에 남아 있을 힘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너를 친구로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

-... 네게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싶어.

-...이, 이와쨩은 지금도 오이카와상의... 하나뿐인 친구야.

-아니.


모든 힘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주의를 기울여서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손을 말아 쥐었다.


-난 네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오이카와.

-이와쨩...

-미안한데 내가 더 이상 견디질 못하겠어. 나, 네가 좋다.

-...이와...

-너도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짧게 내뱉은 한숨이 하얗게 바스라지며 사라졌다. 저녁 해가 지며 나무며, 사람들이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회피하듯 바닥만을 보고 있자니 벤치에 앉아 뭉뚝하던 나와 오이카와의 그림자도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내가 고개를 숙여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그림자 또한 고개가 숙여진 모습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오이카와의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이게 나와 오이카와의 마지막이다.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치 이제 발을 떼라고 내 몸을 당겨오는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와쨩, 미안.

-...아니, 나야말로 미안하다. 친구... 계속 하지 못해서.

-그, 아... 이와쨩...

-나 먼저 갈게. 미안.

-이와...


나는 발길을 돌려 집 방향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워낙 집이 가깝다 보니 집에 들어가게 되어서도 오이카와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 먹을 수도 있고, 어쨌든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을 쥐었다 피며 무작정 걸었다. 어차피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동네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냥 발이 가는 데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대답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시나리오의 하나였다. 내가 고백을 하면 오이카와가 어떻게 반응을 할까 하는 주제에 대한 시나리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가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혼자서 상상해왔던 것만큼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럴 줄 알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내 안에 작은 기대가 남아있었나 보다. 그 작은 티끌에서 천천히 마음이 부식되는 것 같다.


-아...


배가 쓰라리다. 먹먹하게, 가슴에 멍울이 든 것처럼 답답해져온다.


-윽... 흐...


입에서 색색거리는 소리가 나며 내 의지와 달리 입가가 떨려왔다.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그대로 울음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굳은 손바닥을 억지로 들어 올려 입을 감쌌다. 해질녘, 붉게 물든 땅바닥에 뚝뚝 거리며 눈물이 검은 자국을 새겼다.


나를 네가 사랑해줬으면 바랐는데.


멍하니 땅바닥을 보며 호흡을 고르다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빨간 저녁노을에 흩어진 구름들이 물들어진 하늘이 아름다웠다. 태양은 저 너머로 사라지면서도 끝까지 새빨간 빛을 내뿜으며 구름을 물들이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오이카와를 좋아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끝이 다가온 만큼, 아직은 보답 받지 못한 내 감정에 가슴이 아프겠지만 얼마 안가 사라질 것이다. 흔적도 없이,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랑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망연하게 그러길 바랐다.



(849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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