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He will be loved.

 

 

 

정말 그럴까?’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는 게, 정말로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한 방 안이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악몽을 꾸느라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던 숨이 목구멍을 찢고 나오듯 터져 나왔다. 숨을 쉬는데도 폐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불편하게 들썩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눈을 감았다. 스스로 예민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 날의 일만큼은 보쿠토에게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가슴에 남았다. 평소와 같은 날을 지내다가도 가끔씩, 불현듯 다가와 보쿠토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하아... ...”

 

그리고 꿈을 꾼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재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곤 했다. 보쿠토는 감은 눈 위를 양 손으로 누르며 그대로 침대에 힘없이 쓰러졌다. 땀이 베인 이마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닿아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여전히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여린 목소리는 무정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어떤 평범한 하루에,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함께 동네 골목을 거닐었었다. 어느새 노을이 져 가는 하늘에 하나 둘 씩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다. 요 최근 들어 보쿠토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다.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고, 특히나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 마음에도 아이가 너무 좋아서 항상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돌변한 아이의 태도와, 잔인하게 쏘아 붙이는 날 선 말은 그 때의 어린 보쿠토가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밤에는 온 몸이 쑤셔 죽을 만큼 아팠고, 끙끙대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뒤 정신을 차렸을 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보쿠토는 아픈 와중에도 계속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어째서 그런 말을 했냐고 묻고 싶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이가 이사를 가고 동네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고 했다. 아이가 어디로 갔냐는 물음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그대로 보쿠토의 가슴에 박혔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일까, 보쿠토는 그 뒤에도 한동안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가슴통증을 느끼거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렇게 몇 번 아프고 난 뒤에야 보쿠토는 아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때가 언제인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 학교 가기 싫다...”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보쿠토는 꾹꾹 마사지하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이 가시길 기다렸다. 어두웠던 방안이 창밖의 햇빛으로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보쿠토는 침대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방 너머로 보쿠토의 엄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비척거리며 일어날 수 있었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보쿠토가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사립 후쿠로다니 학원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다. 1년에 천 만 원이 넘는 학비에도 매년 입시생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부자 학교라 불리는 만큼 교내 시설이 대학교 시설에 견줄 만큼 훌륭했고, 전국 각지에서 스카우트 해 온 선생님들과 체계적으로 잡힌 교육 시스템이 유명했다. 졸업생들 중에서는 해외, 국내 유수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부터 언론계, 연예계, 그리고 스포츠계 등 여러 방면에서 전국적으로 활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도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후쿠로다니 유학을 가기 위해 몰려 왔고, 아카아시 케이지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아카아시 스스로는 딱히 터무니없을 만큼 비싼 학비를 들여서까지 후쿠로다니 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일찍이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카아시를 키운 그녀는 아카아시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원했다. 아빠가 없어도 죽은 남편의 몫까지 사랑해주겠다며 그녀는 아카아시를 보살피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아카아시는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나중에야 그게 부족하다 못해 과분한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없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아카아시는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랑받았다. 또래 애들보다 일찍 철이 든 아카아시는 엄마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돈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몇 번 말해봤지만 언제나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기 때문도 있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가족인 아들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심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통 큰 씀씀이를 어쩔 수 없이 다 받아 주었지만 아카아시도 비싼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려는 엄마를 이번만큼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후쿠로다니 학원 설명회를 듣고 왔다며 테이블에 책자를 펴 놓고 설명해주었지만 아카아시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에 저녁을 먹으며 엄마가 스치듯 설명회에 갈까, 하고 얘기를 꺼냈던 것을 잊지 않고 아카아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카아시가 보기에도 후쿠로다니 학원은 훌륭한 학교임에 틀림없었다. 살인적일 만큼 비싼 학비가 아니라면 아카아시가 먼저 얘기를 꺼냈을 지도 모를 만큼 욕심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학비에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진학하고 싶지 않았기에 책자를 천천히 살펴보는 엄마에게 말했다. 주변에 좋은 공립학교가 충분히 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진학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그녀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아카아시의 말에 납득하는 듯 했던 그녀는 결국 아카아시 몰래 후쿠로다니 학원 입시시험에 등록하고는 시험 보기 일주일 전에야 아카아시에게 고백했다. 벙찐 아카아시를 향해 푸하하, 크게 웃으며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아카아시에게 시험만이라도 보라고 했고, 이후 합격한 아카아시에게 기왕 합격했으니 진학하라며 멋대로 교복을 맞춰왔다. 그렇게 아카아시는 얼떨결에 후쿠로다니 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매스컴을 자주 탄 학교인 만큼 교내 시설은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교실이 있는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에는 양 쪽으로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있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꽃잎이 떨어졌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머리와 어깨에, 가방 등에 꽃잎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해 아름다웠지만 아카아시는 괜히 곱게 보지 못했다. 하얗고 예쁜 건물이나 하늘하늘하게 내리는 벚꽃 비가 그만큼 돈을 들인 결과 같았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며 가방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나가며 건물로 들어섰다. 다들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신발을 갈아 신는데 사방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아카아시처럼 신입생인 듯 보이는 여자애들이 발그레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에 그들의 기대와 설렘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시끄러운 복도를 지나 마찬가지로 어수선한 교실에 들어서 아카아시는 대충 빈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고교데뷔? 교실을 둘러보니 벌써 각자 인사를 했는지 둘, 셋씩 모여 떠들고 있었다. 아니면, 아카아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아카아시 혼자만 이 학교에 진학한 것과 달리 서로 이전부터 일면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감정을 숨기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모든 것이 낯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카아시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고, 점점 학교에 적응해갔다. 멋대로 일을 벌인 엄마에게 아카아시 나름대로 소리 없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스스로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아카아시도 엄마의 결정에 쉽게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을 그대로 넘기면 그 다음에도 엄마에게 휘둘릴 게 뻔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엄마가 시무룩한 얼굴로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쭈물하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지... 아직 화났니?”

“......아니요. 별로...”

학교 다니는 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알아. 하지만, 엄마는 항상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었어.”

 

아카아시 또한 충분히 알고 있다.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굳이 거짓말을 해 가고 고집을 피우면서까지 제멋대로 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영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제가 별 수 있는가. 어차피 다니기로 한 학교에 계속 불만을 가져 봤자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뿐더러 엄마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아카아시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서 도시락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번만 넘어가 드릴 거예요. 다음엔 절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케이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웃어주고 아카아시는 문을 열었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아카아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제멋대로야, 우리 엄마는.

 

새 학기가 시작되며 후쿠로다니 학원에는 동아리며 부활동의 신입을 받는 일로 분주해졌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앞 운동장에 마련된 부스에 각종 스포츠 부활동과 게임, 소설, 애니메이션 등등 취미 동아리를 홍보하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신입생들로 북적였다. 후쿠로다니 학원은 딱히 부활동이 필수는 아니었지만 일단 가입하면 재학 중인 선배들과 졸업한 선배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다들 하나쯤은 가입하는 추세였다.

 

아카아시 또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매점에 들렀다가 구경하자는 말에 덩달아 부스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홍보 멘트가 쏟아졌다.

 

신입생, 게임 좋아해? 방과 후에 게임 잔뜩 할 수 있어~”

너 운동 잘 해 보이는데, 농구부 어떠니?”

문예창작 동아리에 드세요! OO 문학대상을 받으신 선배님들과 만나는 자리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며 부스를 구경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카아시는 딱히 동아리나 부활동에 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꽤 전력을 다하면서까지 배구부를 들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와서까지 배구를 할 마음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중학교 때 배구부 들었다고 했지? 배구부도 가 볼래? 후쿠로다니 배구부 완전 강호라고 소문났어.”

, 난 별로...”

배구부 저기 있다! , 완전 사람 많아.”

 

사양하는 아카아시를 끌고 친구들이 배구부 부스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멀리서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자 배구부와 남자 배구부 부스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어느 한 쪽도 입부 신청서를 내고 있는 줄이 짧지 않았다.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서 온 아카아시는 대충 구경하는 척 하다 돌아갈 셈으로 부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줄을 설 정도로 강호인가, 아카아시는 배구부 홍보 포스터를 하나 집었다.

 

후쿠로다니는 거의 매번 전국 진출 하는 모양이더라. 전국 대회에서도 꽤 손꼽혀.”

저번 봄고 때는 완전 난리가 아니었지? 대형 신인 출현이라나, 뭐라나. 작년에 엄청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날아다녔다더라.”

나도 들어 봤는데... 이름이 뭐더라? 무슨 토끼 어쩌구였는데...”

 

토끼 어쩌구? 이름에 토끼()가 들어가나 보지? 아카아시는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작년 인터하이와 봄고에 전국 진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연혁들을 보니 듣던 대로 꽤 잘 나가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가 포스터 뒤편에도 글이 있을까 뒤집어보는데 등 너머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고, 회색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머리를 잔뜩 올려 세운 남자가 양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커다란 금안이 아카아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씨익 웃어보였다.

 

! 배구부 들어오려고? 그렇게 포스터만 보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신청서 작성해!”

, 아뇨. 전 그냥 구경만...”

어라? 아카아시 중학교 때 배구부였다며. 고등학교에서는 안하는 거야?”

뭐야, 중학교 때 배구 했었어? 그럼 계속 해야지. , 이리 와. 신청서는 저기서 작성하면 돼.”

 

아카아시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아카아시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끌고 갔다. 얼른 얼른, 하고 신청서를 작성하는 테이블로 이끌더니 대뜸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 신청서 여기.”

전 배구부 안 들어갈 건데요.”

 

아카아시는 제게로 내밀어진 종이와 펜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카아시의 말에 남자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카아시에게 질문했다.

 

? 중학교 때 배구 했다면서 왜 계속 안하는 건데?”

 

이런 질문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는 게 굉장히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이 사람은?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자신이 부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배구를 그만둔 거였다면 어쩌려고. 아카아시는 언뜻 어린아이의 얼굴과 비슷한 순진한 얼굴을 보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사정이 있습니다.”

배구가 싫어졌어?”

“... 그건, 아니지만요. 각자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까요.”

뭐야. 배구가 싫어진 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있는 거네?”

 

아까부터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본 얼굴이 자신의 일인 것 마냥 해맑게 웃고 있어서 아카아시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던 종이를 뒤집어 손바닥에 대고 뭔가를 끼적였다.

 

여기, 오늘 수업 끝나고 배구부 견학할 수 있으니까 구경하러 와.”

? 전 괜찮...”

꼭 와!”

 

남자는 사양하는 아카아시에게 억지로 종이를 쥐게 하곤 근처에 몰려있는 또 다른 신입생들에게 달려갔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라며 여기저기에 말을 거는 모습이 신이 나 보였다. 아카아시가 종이를 다시 넘겨주려고 다가가는데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 가자!”

, .”

 

결국 구겨진 종이를 돌려주지 못한 채 아카아시는 교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 체육관 오후 4]

 

교실에 돌아와 사정없이 구겨진 살살 펴보니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손바닥에 대고 쓰는 바람에 글씨는 삐치고 볼펜에 박혀 이곳저곳 구멍 나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분명 옆에 테이블이 있었는데... 아카아시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빤히 쳐다보다 반으로 접고 접어 그대로 책상서랍에 넣었다.

 

배구는 좋아했다. 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든 배구부에서 배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확실히 재미를 느꼈고, 주변에서 잘한다며 칭찬을 듣기도 했다. 잘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으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스포츠 부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중, 고등학생이 그러하듯이 아카아시 또한 언젠가는 지게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에 조금 회의감을 느꼈다. 이길 땐 뛸 듯이 좋지만 질 때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점점 좋아질수록 나중엔 괴로운 감정이 커져만 갔다. 중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 지고 말았을 때는 그 허무함이 극에 달했었다. 재밌어서 시작한 건데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생각했다.

 

역시 배구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 비싼 돈 들여 좋은 학교까지 왔는데 배구에 시간 낭비할 수는 없겠지. 좋은 학교인 만큼 여타 학교에 다 있는 동아리, 부활동들은 물론이고 좀 더 실용적인 동아리도 있었으니까. 역시 그런 동아리를 드는 게 나을 거다. 아카아시는 서랍에 집어넣은 종이를 다시 한 번 깊숙이 밀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듯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는 몇 번이고 종이를 밀어냈다.

 

 

이미 체육관은 그 유명하다는 배구부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멋있다, 신기하다는 말소리와 코트에 밀린 끼익끼익 거리는 발소리,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익숙한 소리를 따라 아카아시는 인파를 비집고 슬며시 체육관에 들어섰다. 환한 조명아래 코트가 반짝이는 것처럼 빛났다. 트레이닝을 하는 사람들과, 코트를 누비며 연습경기를 하는 사람들로 체육관이 분주했다. 아카아시는 커다란 체육관에 한 번 놀랐고, 강호라고 불리는 만큼 부원들이 많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남자가 높이 날아올라 스파이크를 날리는 모습에 가장 놀랐다. 남자가 내리친 공이 바닥을 맞고 크게 튀어 올랐다. 주변에서 우와~! 하는 함성소리가 났고 누군가는 최강 보쿠토라며 소리쳤다.

 

헤이헤이헤이~!”

 

저 사람이 아까 말했던 보쿠토 코타로인가. 아카아시는 점심시간에 대뜸 신청서를 내밀고 배구 안하냐며 물었던 보쿠토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양 손을 번쩍 들고 코트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 보쿠토를 처음 보는 신입생들은 웃기다면서 피식거렸고 2, 3학년들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보쿠토는 코트를 누비며 꽤 수준 높은 블록을 피하고, 뚫으며 점수를 따냈다. 보쿠토는 1점을 땄으면서 10점을 따 낸 것처럼 유난스럽게 행동했지만, 그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보쿠토가 배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리고 역시 강호답게 한 사람의 에이스만으로 팀이 이끌어지는 게 아니었다. 존재감이 확실한 보쿠토를 제외하고도 연습 게임에 참여하는 부원들 모두가 실력이 출중했다. 리시브며, 스파이크며 서브까지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후쿠로다니 배구부가 특별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보다 같은 팀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부원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보쿠토의 존재였다. ‘그냥잘하는 에이스가 아니라 뭔가특별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시종일관 웃음을 지우지 않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근데 저 사람 되게 웃긴 게, 가끔 경기하다가 엄청 시무룩해진다더라.”

시무룩해진다고?”

. 그게 엄청 심해서 작년 봄고에서도 큰일 날 뻔 했데. 잘하긴 하는데... 가끔 쓸모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에이, 설마. 저렇게 팔팔 날아다니는 사람이?”

나도 주변에서 들은 얘기긴 한데... 아닌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던데, 확실하지 않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에 아카아시는 헛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저 사람이 시무룩해진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 아카아시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세트포인트가 되었다. 점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져 있기에 다들 조금쯤은 안심하고 보고 있는데, 서브 차례였던 보쿠토의 공이 네트에 맞아 떨어졌다.

 

, 아깝다.”

조금만 더 높았으면 됐을 텐데.”

그래도 1점만 더 따면 되니까.”

 

보쿠토 파이팅, 돈마이라며 여기저기서 1학년들이 보쿠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면 그에 답하듯 손을 흔들어 보이던 보쿠토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쥐락펴락하기만 했다. 가끔씩 이상하다는 듯이 보쿠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일이지?”

 

아카아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코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런 보쿠토를 보던 한 선배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다른 선배들에게 손짓했다. 허공을 몇 번 가르는 손짓에 보쿠토를 제외한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 포인트이니 만큼 마지막은 보쿠토가 화려하게 장식하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경기는 조금 싱겁게 끝나버렸다. 얼른 끝내버리자고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보쿠토 쪽의 선배들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다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서브를 실패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조용한 보쿠토 쪽을 쳐다보다, 묘하게 안심한 얼굴의 다른 선배들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비단 아카아시 뿐만 아니라 경기를 쭉 지켜보던 1학년들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추가적으로 입부 신청서를 쓸 수 있다며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선배들이 1학년들을 이끌었다. 연습시합을 보던 내내 대단하다, 멋있다며 말을 남발하던 몇몇 1학년들이 신청서를 쓰러 몰려갔다. 아카아시는 아직 경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빈 코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역시 강호교는 다르다고 해야 하나, 코트 위에 있던 선배들 모두가 멋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실력이 차원이 달랐다. 서브도, 스파이크도, 리시브나 세터의 토스까지 몇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보쿠토란 사람의 존재감이란.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여느 또래 애들처럼 연예인과 같은 특정 한 사람에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봐도 예쁘다, 노래를 잘하네, 춤을 잘 추네, 와 같은 일반적인 감상 외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거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든가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든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노력해도 닿을 수 있고 없고 그런 차원에 있어서 연예인과 보쿠토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배구를 하기에 저렇게 배구를 즐기면서 할 수 있지? 저 사람과 같이 배구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가슴이 복받쳐오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저 사람과 배구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배구부에 들어감으로써 예상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아카아시는 그러한 생각들을 갈무리해버렸다. 여전히 손바닥에 뭐가 묻은 사람처럼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보쿠토를 힐끔 보다 아카아시는 걸음을 돌렸다.

 

그냥 단순하게, 다시 배구를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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