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츠키] 거스러미
며칠 전부터 손톱 옆에 나 있는 거스러미가 신경 쓰였다. 보기에 좋지 않아서 손톱으로 긁었더니 툭 떼어졌다. 그러나 거스러미 부근의 살도 함께 찢겨 붉은 속살이 드러났고, 만지면 따가워서 그 전보다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손을 씻을 때도 쓰라렸고, 하필이면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라 필기를 할 때도 연필에 눌려 아팠다. 거스러미를 떼기 전보다 더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던 부위인데,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하루 종일 손가락을 매만지게 되었다.
어느 날 야마구치가 하교하던 중에 걸음을 멈추고 할 얘기가 있다며 불렀다. 답지 않게 침울한 표정에, 진지하게 말을 거는 모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놀이터에 도착했다. 근처 벤치에 앉아 야마구치의 말을 기다렸지만, 무슨 할 말이기에 야마구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야마구치가 드디어 말했다.
“츳키, 우리 사귀는 사이 맞아?”
뜬금없는 말이었다. 사귀기 시작한지 이제 한 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야마구치는 나와 사귀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뭔데?”
“그 전하고 다를 게 없잖아.”
“크게 달라져야 하는 게 있어?”
야마구치는 입을 다물었다. 야마구치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귀게 되어서 뭐가 달라져야 하는 거지? 닭살 돋게 팔짱끼고 다니고, 매일같이 라인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걸 기대하는 건가?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달라져야지.”
“... 어떻게?”
“어떻게라니. 좀 더 애정표현을 한다던가, 하다못해 다른 애들보다 나를 챙겨준다거나,”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로 말을 하면 할수록 계속 빗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실실거리며 웃던 야마구치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친 표정의 야마구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고쳐 맸다.
“아니, 츳키는 아무것도 변한 거 없어.”
“야마구치.”
“사귀어도 사귀는 것 같지 않아, 나는.”
“......”
“우리 좀 시간을 갖자.”
야마구치는 혼자 자리를 떴다. 나는 벤치에 남겨져 멀어져가는 야마구치의 뒷모습을 보다 괜히 열 받아 바닥을 발로 찼다. 주변에 널부러져 있던 낙엽이 흩어지며 먼지가 날렸다.
애초에 같은 남자끼리 사귀는데, 뭐가 달라져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야마구치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야마구치는 내가 야마구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고 얘기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인이 되기 전에도 야마구치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당연히 다른 애들보다 각별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상대였고, 표현을 잘 안한다 뿐이지 생일도 매년 챙겨주었고 야마구치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가 개봉되면 제일 먼저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배구부 연습이 끝나면 매일 기다려주는 것도, 시험기간에 같이 공부를 하는 것도 야마구치였다. 다른 사람과는 공부도 같이 해본 적 없고, 약속을 잡아 놀러 간 적도 없다. 이 정도면 됐지 않나? 혼자 고민해 봐도 답은 없었다.
쉽게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야마구치와의 갈등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시간을 갖자고 하던 야마구치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등교도, 하교도 매일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걷게 되었다. 점심시간에도 야마구치는 반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배구부 연습에서도 야마구치는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심지어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없던 화도 치솟을 지경이었다.
“야마구치!”
혼자 휙 하니 가버리는 야마구치를 따라가며 이름을 불렀지만 야마구치는 대답도 않고 가버렸다. 오기가 생겨 달려가서 어깨를 잡으니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언제나의 얼굴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왜?”
야마구치가 내게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나? 내가 아니라 다른 애들에게도 이런 표정의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야마구치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왜 혼자 가냐고.”
“우리 시간을 갖자고 했잖아.”
차가운 표정과 냉정하게 선을 긋는 말투. 그리고 전적으로 나에게 잘못이 있다는 듯한 말에 나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네가 왜 나한테 화를 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대체 왜 그래.”
내 말에 야마구치의 눈썹이 눈에 띄게 찡그러졌다. 잡힌 어깨를 돌려 내 손을 쳐 내고 야마구치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헤어지자는 얘기가 왜 나와? 난 츳키가 좀 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대해줬으면 싶어서 얘기했던 거였어.”
“난 제대로 진지하게,”
“그러니까 나는 못 느끼겠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야마구치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씩씩거리다 야마구치는 내게 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쥐었다. 내 키가 더 큰 탓에 상체가 절로 굽혀졌다. 잡힌 멱살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야마구치는 그보다 더 빨리 멱살을 당겨 쥐었다.
“츳키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해 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하는 행동이 어떤지.”
야마구치는 그대로 손을 풀고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진짜 헤어지고 싶어서 말한 거라면 솔직하게 얘기해 주고.”
이 말을 끝으로 한동안 야마구치와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사귀게 된 것은 한 달 전으로, 야마구치가 고백하면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집 근처 놀이터에서 야마구치는 긴장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었다. 좋아한다며, 연인으로써 사귀고 싶다고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야마구치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그러나 야마구치는 친한 친구였고 그 때만큼은 야마구치의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끼리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남자와 사귀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야마구치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에, 바로 아차 싶었지만 긴장된 얼굴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변하자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야마구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지 확실하게 감이 잡히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야마구치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흐지부지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야마구치와 사귀게 되어도 친구였을 때와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야마구치는 여전히 내가 내뱉는 핀잔을 받아주었으며 등, 하교도 같이 했고 주말에는 함께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가거나 레코드 샵을 가기도 했다. 친구였을 때와 똑같은 일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귀게 되어서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야마구치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특별한 점도 없지만 이상한 점도 없다. 사귄다고 해서 매일을 좋아해, 사랑해 하는 것도 이상하다. 지금까지 몇 년을 친구로 지내왔는데 갑자기 연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크게 변할 리가 없다. 대체 야마구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달 밖에 안 지났는데. 헤어지고 싶냐는 말에 이렇다 말도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벌써 질려서 그런 것일까? 사귀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라서? 어떻게 야마구치가 내게 이럴 수 있지? 자기가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네가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는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아침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 야마구치의 집에 갔다. 아직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아침인데다 쌀쌀한 날씨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야마구치가 나왔다. 야마구치는 나를 보고 잠시 굳어 있다가 또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
막상 야마구치의 얼굴을 보자 계속 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난 얼굴을 하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깜빡 잊을 만큼 머리가 하얗게 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와 눈을 마주하면서도 야마구치의 표정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쿵쿵 뛰었다.
“할 말 없으면 먼저 갈게.”
“야마구치!”
“왜?”
“... 너야말로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
“넌 몇 년을 나랑 친구였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
어제 밤에 잠을 자기 전에 생각했던 말들, 아침에 야마구치의 집으로 걸어가며 하려고 했던 말들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되는대로 내뱉어지는 말들에 야마구치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야마구치의 행동에 화가 났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 다그치듯 야마구치를 나무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사소하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얘기해달라고, 누구와 연애하는 게 처음이니까 잘하지 못해도 네가 이해해 달라고 얘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는 츳키야말로.”
“뭐를,”
“대체 내 고백 왜 받아 줬어?”
“......”
“츳키 말대로 몇 년 동안 친구였으니까 츳키에 대한 거라면 아키테루 형만큼 내가 더 잘 알아.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고.”
야마구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나는 것이 분하다는 듯이 야마구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고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어. 나 좋아해서 사귀는 거야?”
“그건...”
바보같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물쩍 받아들였던 선택에 대한 대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받아주지 않으면 어색해질까봐 그랬어? 그런 거라면 그냥 말해주지. 츳키 마음 강요할 정도로 난처하게 만들지 않아.”
“그, 런거 아니야.”
“그냥 친구를 원한 거였으면 그렇게 해. 그냥 헤어지고 친구로 남을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알았던 야마구치는 누구였을까 싶을 정도로, 야마구치의 말은 하나, 하나 단호했다. 야마구치의 성격 상 그 단호한 말의 뒤에는 며칠을 걸려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한 번이라도 야마구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나? 우리가 이제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받아들였었나? 나는 야마구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일까?
“츳키.”
“나는...”
우리가 사귀던 한 달 동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 나는 야마구치를 친구로 대했나, 연인으로 대했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데 야마구치가 끝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게 낫겠어. 나도 이제 지쳤으니까.”
오늘은 학교 따로 가자, 먼저 갈게. 야마구치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야마구치가 처음 내게 시간을 갖자고 했던 그 하교 길, 배구부 연습이 끝나고 야마구치를 잡아 세웠던 그 날, 그리고 지금. 친구로 돌아가자는 말이 이제 우리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친구로 남고 싶은가?
“야마구치!”
“......”
“잠, 잠깐만. 서 봐.”
야마구치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멀어지면 다시는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마구치, 부르는 소리에 여전히 답이 없었다.
“미안해!”
제발 거기 서서 얘기를 들어.
동정으로 사귄 게 아니야. 어색해질까봐 그런 것도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하고 너를 대하는 내 태도가 똑같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하고 너는 달라.
하지만 친구로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나는 너처럼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표현도 제대로 못하지만.
네가 없으면 나는 외로워. 네가 항상 날 봐줬으면 좋겠어.
먼저 뒤 돌아서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네 친구라서?”
조용히 말을 듣던 야마구치가 말했다.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였다.
“...아하니까.”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야마구치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그런 야마구치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이어 야마구치의 어깨가 잘게 들썩이는 것에 조심스레 다가가 야마구치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말에 야마구치는 훌쩍이며 뒤를 돌아 나를 안았다. 다시는 헤어지잔 소리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울먹임을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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