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보쿠] 청포도
[아카보쿠] 청포도
-보쿠른 전력 '하찮은 초능력'
-보쿠토TS 요소 있음
“청포도, 좋아하세요?”
만날 때마다 청포도를 달고 다니는 나를 향해 아카아시가 물었다. 항상 청포도를 먹고 다니셔서, 그동안 퍽 궁금했었는지 아닌 척 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청포도를 좋아하냐고?
“응. 좋아해.”
내 말에 아카아시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넌 모르지, 내가 왜 청포도를 달고 사는지.
사실 청포도는 그리 즐겨 먹지 않는다. 아니, 먹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이상하게 변하곤 마니까. 가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청포도를 먹으면 얼마동안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이전의 일로, 엄마가 마트에서 사온 청포도를 먹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탱탱하게 알이 차오른 푸른 포도 알맹이가 예뻐서 한 알, 씹을수록 단맛이 퍼져 나오는 게 좋아서 두 알. 그릇에 담겨진 청포도를 해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코타로! 그 때는 아직 어린 아이여서 엄마는 내가 머리가 조금 길어지고, 얼굴이 조금 바뀐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정확하게 여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날은 유난히 배가 고팠는데, 집에는 먹을 만한 게 청포도 말고는 없었다. 이걸 먹으면 또 이상하게 변하려나? 그 때는 그저 머리가 길어지고, 이목구비가 조금 달라지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집에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괜찮겠지 싶어 청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먹었나,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더니 역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단발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연하게 머리가 길었고, 얼굴도 조금 달랐다. 역시 변했잖아. 퉁명스럽게 거울을 보며 바지를 내렸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응?”
내 물건이 그세 작아졌나? 팬티를 내렸는데 주니어가 없고, 주니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이상했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차마 자세히 확인하지도 못하고 나는 팬티를 올렸다. 꿈인가 싶어 망연하게 서 있는데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인상이 부드럽게 변한 얼굴을 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슴팍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왜... 가슴이 나왔지? 아까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직접 확인해 볼까, 말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티셔츠의 목 부분을 늘렸다.
“헉! 뭐,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했던 게 현실이었다. 여자처럼 가슴이 올라 있었고, 아마도 여자의 그것인 게 밑에 있었고, 목소리도 변성기 이전의 것이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졌는데 소변은 마렵고, 어떻게 하지를 못하다 눈을 질끈 감고 후다닥 처리해버렸다. 몸이 완전히 변해버린 게 무서웠다. 이런 몸으론 배구도 하지 못해, 완전히 여자가 되어 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방문을 잠그고 이불을 덮어썼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다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꾹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떴을 때 다행히 원래의 모습이라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습이 변한다는 게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왕성할 때라, 그 이후 청포도를 먹어보며 실험을 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청포도를 먹고 10분정도 뒤에 모습이 천천히 변한다는 것과 1시간 뒤에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청포도를 먹으면 여자가 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철저하게 밖에서는 청포도를 먹지 않으려 주의했다. 급식에 청포도가 나오면 못 먹는다며 친구들에게 떠넘겼다. 한창 배가 고플 시기라 그 조그만 포도 알맹이를 주는 것도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청포도는 항상 멀리했는데,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헉,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보쿠토, 너 청포도 못 먹지 않아?”
“응? 못 먹는데.”
“방금 먹은 거 청포도였어.”
그날따라 아침도 못 챙겨먹은 데다 점심을 먹기 전에 매점을 들르지 못해서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탓이었다. 배고파, 배고파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식판을 비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청포도를 먹은 것이었다. 친구의 말에 바로 식판을 들고 먼저 간다고 하곤 식당을 빠져 나왔다. 어떡하지, 10분. 10분이면 여자가 되고, 한 시간 동안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가야 했다. 머릿속으로 어디에 가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 사람들을 피해 무작정 피했다. 밖에서 청포도를 실수로 먹은 건 처음이었다. 어떡해. 여차하면 화장실에 한 시간 동안 처박혀 있어야지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꺾인 곳에서 누군가와 크게 부딪혔다.
“으악!”
“아,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진...”
그리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져 버렸다. 복도에서 달리다시피 걸었던 건 내 쪽이기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고개를 들었다.
“아, 아카아시?!”
분명 이 건물은 특별한 수업이 없는 이상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오지 않는데, 배구부 후배인 아카아시가 떡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마주쳐버려 당황하는데 아카아시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 저를 아세요?”
“무슨 소리야. 나...”
그제야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얇다는 것을 깨달았고, 허겁지겁 몸을 확인했더니 어느새 변해버렸는지 여자로 변한 뒤였다. 하필이면 아는 사람한테 들키다니!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한테 들켰어도 여자인 모습에 헐렁한 남자 교복을 입고 있으니 난처한 것은 피차일반이었지만. 아니, 아카아시여서 오히려 다행인건가? 흘끗 아카아시를 쳐다보자 방금 내가 아카아시한테 아는 척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쩌지, 솔직하게 말할까? 아카아시가 믿어 줄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카아시가 손을 내밀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아, 응... 괜찮아.”
남자 교복이라 셔츠와 재킷이 헐렁한 것도 문제였지만, 바지춤을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바지를 붙잡고 옷을 추스르는 나를 아카아시가 쳐다보았다.
“아아아, 아니 이건! 그... 그, 버, 벌칙이라서! 하하하... 벌칙이라...”
“아... 네. 교복이 커 보이는데요.”
“어, 어어! 그, 금방 갈아입을 거라서. 아하하! 그럼, 그럼 먼저 갈게...”
아카아시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행색이 이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치였기에 그냥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바지를 잡고 걸어야 해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아카아시가 잠깐, 하고 불렀다. 나는 뭘 훔친 도둑마냥 아카아시의 말을 무시하고 팔딱거리며 뛰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빈 교실에 한 시간 동안 숨어있다 모습이 변한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졸지에 수업을 빠져버려서 담당 선생님께 혼이 났고, 뜻밖의 상황에 몸과 정신이 피곤했다. 그래도 배구는 하러 가야지. 수업이 다 끝나고 연습하러 체육관에 들어가니 웬일로 아카아시가 먼저 와서 배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항상 뭐 준비하느라 일찍 오는 적은 없었는데.
아까의 일 때문인지 아카아시한테 평소처럼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눈치는 못 챈 것 같았지만 나중에 알아버렸을지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를 아카아시가 먼저 눈치 채고 고개를 꾸벅였다.
“보쿠토 씨.”
“어, 어어? 왜,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살풋 눈썹을 찌푸리고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심상찮았다. 역시 알아차린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카아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아카아시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뭐야, 아카아시. 싱겁긴...”
“아, 근데.”
“어?! 왜! 뭐, 뭐야!”
“혹시 여동생 있으세요? 사촌동생이라든가...”
“없는데... 왜?”
내 말에 아카아시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아카아시가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나로서는 조금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왜냐고 다시 물으니 그제야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그냥 궁금해서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방금 전처럼 배구공을 튕기는 거였다. 내가 여동생이 있는지 왜, 그냥 궁금한 거지? 사람의 표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카아시의 얼굴이 복잡해 보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라, 아카아시의 대답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자가 되어서 아카아시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뜬금없이 여동생이 있냐는 물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것이, 혹시 나 때문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연습을 빠지겠다고 말하고, 청포도를 먹고 여자로 변한 뒤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서 아카아시를 기다렸다. 용의주도하게 체육복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조금 있으니 아카아시가 보였다. 여자가 돼서 아카아시를 만나보자! 라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정작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것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지금 뭘 하는 거지? 아, 아카아시한테 말 걸어볼까? 말 걸어서 뭐라고...
“아, 저기!”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아카아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제 부딪혔던, 하고 아카아시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 모습으로 아는 사람과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그보다 진짜로, 나인 걸 모르는 거겠지?
“우, 우연이네! 어제는 사과도 안하고 그냥 가버려서 미, 미안.”
“아뇨.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어제 체육관에서 나를 살폈던 것처럼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자기가 아는 선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선배의 여동생은 없다고 하니 신기한 걸까? 헷갈려하는 얼굴을 보자 조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왜 쳐다 봐? 날 알아?”
“아,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아서요.”
“누구?”
내 질문에 아카아시가 말을 못하고 입술만 지르물었다. 이상하게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냥 배구부 선배가 아닌가, 나는? 왜 대답을 못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아주 많이 닮았거든요.”
“어?”
“그 사람이 여자라면 그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서, 빤히 쳐다보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어... 어어?”
“아, 지금 한 말은 비밀로 해주세요.”
졸지에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해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는지,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더니 당황해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다가 아카아시가 했던 말을 정리해보았다.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내가 닮았다고 했고, 여자라면 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그럼 방금 아카아시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는 건가?
“아, 아카아시...?”
뒤늦게 아카아시를 불러 봤지만 이미 체육관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곤 전혀,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너 전혀, 나한테 그런, 그런 말 해본 적도 없잖아. 오히려 매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으면서.